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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다섯 번째



(매움주의)



* * *






다시 오르카에 오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폐하가 나타나신 시점부터 2년 하고 반년까지를 네 번이나 반복한 나다. 


네 번째는 오르카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정확히 따지자면 세 번이 되지만, 어쨌든 이 기간에 한해서 ―이번에도 똑같았다는 전제 하에― 나보다 오르카의 행적을 잘 아는 존재는 없다.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히 교신을 한 것만으로도, 나는 '구출'이란 형태로 오르카에 오를 수 있었다.


오르카에 오르자마자 들른 곳은 제조실이었다. 


아니나 달라, 제조실에서는 아르망 추기경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터라 나는 그 작업부터 막았다. 여기 아르망 추기경이 나타났는데 괜한 자원을 소비할 이유가 있냐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로. 의아해 했던 제조실의 개체들이나 폐하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듯했지만, 이미 복원 작업이 반환점을 넘은 탓에 폐기하기도 뭐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폐기'가 아니라 그 중간 지점인 '중지'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좀 더 완고하게 굴어봤으나 폐하의 입장은 거기서 변하지 않았다.


이번 오르카에선 처음부터 폐하와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입지는 없다. 딱히 어떤 직위를 부여받지도 않아서, 나는 그냥 일반개체 취급을 받고 있다. 내 특성을 고려해 폐하가 그럭저럭 높은 지위를 부여하려고 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내가 거부했다. 때문에 나는 1인실이 아닌 소속별로 구분된 생활관, 덴세츠제 생활관에서 지내고 있다. 


여러 바이오로이드와 부대끼는 게 끔찍하긴 하지만, 가끔 취침 중에 조용히 할 수 없냐고 뭐라하는 것이나 대화를 거부하면 나무라듯 지껄이는 걸 빼면,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오르카의 참모였을 적과 비교했을 때 현재의 장점이라면, 일과 시간에 한해서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하지만 책임이 막중한 참모라는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하루 일과의 경로가 고정되다시피 했었다. 폐하의 방. 내 방. 그게 전부. 그 경로를 이탈하면 어디를 가든 눈에 띄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비전투 개체로 분류되었다 보니 전투와 관련된 작전, 희망한다면 간단한 탐색에도 나서지 않을 수 있었다. 첫번째도 두번째도 세번째도 '폐하의 저항군'은 철충과의 전투 및 승리보다는 바이오로이드의 보호를 우선적으로 추구했다. 물론, 지금도. 그래서 나처럼 '보호받아야 할 것 같은' 개체들에겐 막말로 하루 종일 빈둥대도 쓴소리는 커녕, 더 편하게 쉬어도 된다는 온정만 쏟아졌다.


이런 온정이 고작 2년짜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지.


"안녕, 아르망. 점심은 먹었어?"


완연한 가을. 오르카에 들어서고 한달 정도 지나 폐하와 면담을 가졌다. 테마 파크에 나는 동행하지 않았고, 가끔 제조실에 들러 거품이 부글대는 제조 탱크에서 잠들어 있는 '아르망 추기경'과 대면하다가 카페테리아에서 죽치는 시간을 보냈다. 


누가 적당할까를 고민하면서. 


폐하를 눈앞에 두고서도 머리속에 후보군에서 괜찮은 후보를 추려내고 있었다.


"아르망?"


다른 생각하고 있냐는 표정 앞으로 폐하의 손이 지나갔다. 


하나, 둘, 셋, 넷. 


내 시야는 약지에 끼워진 것을 정확히 포착한다. 


"이번에도…"


"어?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최대한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역효과가 나서였는지, 폐하는 애써 지은 듯한 어색하고 움츠러드는 미소를 보였다. 그런 미소인데도 눈이 부셨다.


"방금 뭐라고 말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알았어."


폐하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알만 굴려 약지와 얼굴을 번갈아봤다. 그 사이에 폐하는 으레 첫면담이라고 하면 할 법한 소리나 해댔다. 오르카는 어때? 지낼만 해? 불편한 건 없니? 그 동안 힘들었지? 여기서는 마음 놓고 지내도 돼. …같은. 서간 형식으로 이루어진 상담을 하는 기분이었다.


추가로, 몇몇 개체가 내 특정 행동에 대해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그에 관해 폐하는 우려하시는 듯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네, 아니오. 로만 질문을 받아냈다. 


"말씀 끝나셨으면 일어날게요."

"어? 아니, 잠깐만."


내가 멋대로 대화를 끝내자, 폐하가 튀어오르듯 일어섰다.

나중에 티타니아 같은 년은 어쩌려고.


"아르망. 잠깐만 있어 봐."


"괜찮아요."


"얘기를…"


"오르카는 정말 편안해요.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요. 굶을 일도 없고요. 커피랑 디저트 재료도 다 있어서 잘 만들어 먹고 있어요. 정말 지낼 만해요. 그 외에도 불편한 건 없고요. 더는 힘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왜…!"


"뭐가 문젠데요?"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 보지만, 폐하는 다음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냥 "그런데 왜."에 잇기 어울리는 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렇게 공격적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태도가 삐딱해.' '그런데 왜 어투가 그래?' 물론 이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최악이 될 것을 아시니 그러지 않으시겠지. 일단 지금의 폐하는 선하니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폐하는 출입문을 막고 서 있다. 나는 노크하듯 폐하의 팔을 가볍게 두들긴다.

팔이 내려가고, 조용하고 날렵한 기계음과 함께 출입문이 열린다.


문간에 서서, 나는 폐하를 뒤돌아봤다.


"죄송해요."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해."


당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말했다.


"죄송해요."


지금의 당신에게도.


나만이 아는 당신에게도.






* * *






폐하가 나타나시는 날, 나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그게 옳다는 듯 폐하는 불타 죽지 않았고, 나 없이도 무탈히 육체를 얻으신 다음 콘스탄챠와 평생을 기약했다. 서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싶다는 멘트를 갑판에서 던졌을 거란 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약지에 끼워진 그 반지가 콘스탄챠의 반쪽임을 뜻한다는 것도 확인할 필요 없다.


이쯤되면, 세계가 내게 강조하는 것 같다. 이런 게 바로 운명이야. 그들은 운명이야. 너에게만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그들의 새끼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에 이어져 있어.


좋아. 운명이라고 치자.


단순히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로 운명이라 해보자.


그럼 그 다음은? 그 아름다운 외딴 섬에서 콘스탄챠가 죽는 것도, 그 죽음을 폐하가 목도하는 것도 운명인가? 그래서 폐하가 이성을 잃고 어떻게 돼버리는 것도, 저항군이 끝장나는 것도 운명인가? 왜. 똑같잖아. 이번에도 내가 실패하면 똑같을 거잖아. 대답해봐라 이 개새끼야. 마지막의 마지막엔 내가 다시 150년 전으로 떨어지는 것도 운명이야?


끼워 맞추기 편해서 운명이란 단어를 들이밀 뿐이지 않나. 현상만 놓고 봤을 때 그냥 네 번째 폐하는 그렇게 죽었을 뿐이지 않나. 내가 콘스탄챠를 폐하와 만나기 전에 죽인 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나.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 않나. 


……그러니까 콘스탄챠에게는 사과하지 않는다.


다른 년들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도 몰라.


인정할 수 없다.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 * *






"들어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호드의 생활관과 붙어있는 지휘관실을 찾았다.

호드라고 하니 설명할 것도 없겠지. 목적은 칸이었다.


"반가워요. 칸 대장님."


"면담을 신청했던데."


눈에 띄는 거라곤 원목 테이블 하나 뿐인 검소한 곳이었다. 그 외엔 탐색 중에 건진 듯한 사무용 책상, 칸은 그 너머에 앉아 인테리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가 고를 법한 책꽂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테이블에서 의자를 빼들고 칸에게 다가갔다. 칸과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다가, 다시 테이블로 가서 커피 포트를 챙겨 대충 마실 거리를 마련했다.


"녹차를 내려달란 부탁은 한 적이 없는데."


앞에 놓인 찻잔을 무감정한 눈으로 보던 칸이 말했다.


"싸구려 티백인데 뭐 어때요? 좀 춥기도 하고."


얼굴은 여전히 무감정한 채로 나를 보고 있지만, 안다. 나를 굉장히 언짢게 여기고 있다. 방을 뒤져 커피 포트랑 녹차 티백을 사용해서가 아니다. 그런 짓을 한 게 '나' 라서다.


딱 좋다. 이 정도 경계심은 가져줘야 내 이야기를 가볍게 듣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얼굴에 아무것도 안 바르니까 참 예쁘네요. 오르카에서 손 꼽을 정도 아니야? 앞으로도 그러고 다니는 편이?"


"나는 군인이야. 위장은 필수다."


칸이 찻잔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거뭇해진 깡통들 상대하는데 위장은 무슨…"


"용건은?"


"좀 편하게 있죠? 이거만 마실게요."


"편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다시 묻는다. 용건이 뭐야."


"내가 무서워?"


가당치도 않다는 듯 칸이 피식했다.


"뒤에서 말이 많이 나오는 개체가 내 앞에서 이리 건방지게 구는데, 그럼. 무섭지."


"호드식 농담인가?"


"반만 농담이다."


"나머지 반은?"


"확인하려들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무슨 말이 나오는데? 알려줘요."


"좀 이상한 것 같다나. 맛이 간 것 같기도 하다던데." 칸이 다시 피식댔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나를 두고 오르카 년들이 뭐라 지껄이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하루 종일 이어폰을 끼고 있다, cd플레이어라니. 멸망 전에도 구하기 어려웠던 걸 어떻게 갖고 있는가, 카페테리아에선 제지해도 멋대로 주방을 사용해대고, 공방에서는 혼자 중얼거린다는 둥, 가끔 이상한 약도 먹는 것 같다, 주사기 같은 걸 본 적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돈다. 


소문의 내용만 보면, 의외로 면담 때 폐하의 반응은 약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폐하께 올라간 보고란 건 어느 정도 희석된 내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휘관실의 난방은 약해서, 녹차는 잠시 간의 침묵 사이에 금방 식어 버렸다. 


녹차를 원샷한 칸이 눈썹을 한 번 움찔대고 입을 열었다.


"차만 마시러 온 거였으면 이만 자리 좀 비워주지?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서류는 전부 페더년이 만지지 않나?"


"…년?"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눈썹이 움찔댔다.


예열은 이만하면 됐다.


"이야기가 좀 긴데, 들어줄 수 있겠어요? 당신 외엔 딱히 선택지가 없어서."


나는 칸을 믿는다. 믿을 만한 녀석이다.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를 마냥 미친 소리로만 치부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진중한 녀석. 앵거 오브 호드의 기동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접근하기에 가장 심적으로 편한 녀석이기도 하다.


칸이 고쳐 앉는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하고, 침을 삼켜 장시간 이어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첫 운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 * *





"끝인가?"


"응. 여기까지."


"그렇군."


일과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해맑은 함내 방송이 울린지 좀 됐다. 저녁 식사를 즐기러 식당으로 향하는 여러 발소리가 들렸을 때는 손이 차가워진지 오래였다. 


이제 20시 정도 됐을까. 책상을 검지로 두들기던 칸이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나다. ……그래. 칸. 아아, 그래. …아니야. 괜찮다. 그보다 거기 혹시, 다프네 있나?"


이 씨발년이…!


"야!"


"괜찮다면 내가 호출했다고 전파 부탁한다. 가능하면 스틸라인 녀석들에게서 몇 명 차출해서. 내 지시라고 하면 돼. 연대장에게 말해두지. 음? 아니다. 조금 그럴 일이 있어서."


몸을 날려 전화기를 후려쳤다. 동체가 벽으로 날아가 박살났고, 수화기만 칸의 귀에 붙어 꼬불꼬불한 케이블을 천천히 부채꼴로 흔들었다.


"무슨 짓인가."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일하던 표정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미친 취급할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는 건 예상했어. 하지만 걔는 안 돼."


"걔?"


"다프네! 그 씨발년이 알면 다 끝장이야! 빨리 지시 물러!"


"보다시피 네가 박살냈잖나."


이게…! 하필이면 왜 다프네 그 년한테…!


"대장니임♡" 칸 앞에서 씩씩대는 중에 출입문 쪽에서 비음 섞인 애교가 들려왔다. "하루 종일 대장님 보고 싶어서 제가… 어머?"


"나가라. 페더."


"아… 그 아이네… 바쁘세요?"


나와 칸 사이에 서서 페더가 말했다.


"그, 그럼… 이건 놓고 갈게요. 결재는 다 받았어요."


"고맙다. 쉬도록 해." "아니. 마침 잘 됐어."


"에… 잠깐…"


빠르게 거리를 좁혀 탈론페더를 벽에 꽂았다. 등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순간적으로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눈을 부릅 뜬 패더는, 곧 호흡곤란으로 기침하기 시작했다.


벽에 꽂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바로 다음으로 이행한다. 팬텀을 꺼내 페더의 목에 대고, 아슬아슬할 정도로만 살갗을 자극한다. 가볍게 베인 곳에서 새어나온 피가 깜찍한 방울 모양으로 팬텀에 맺혔다. 이 모든 과정이 채 3초도 되지 않았다.


"하…윽… 뎨쟝님…?"


"놓지 못 해?!"


"이제 곧 올 녀석들." 나는 출입문을 고개로 가리켰다. "알지? 눈치껏 해."


"눈치껏? 넌 이미 끝장이야."


칸이 칸 답지 않게 동요하며 눈을 부라렸다.


"아니. 아니지. 그럴 리가."


그럼. 그렇고 말고.


"미친 것. 사령관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그걸 말한 거야. 우리 폐하."


"지금이라도 페더를 놔!"


"지금이라도? 이미 끝장이라며?"


"이 이상 사태가 더 커지길 바라나!?"


"응. 넌 아닌가 봐? ㅋㅋ 배짱이 모자란 거지. 폐하의 귀에 들어가봐야 좋을 게 없다, 지휘관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다, 뭐 그런 계산이 예쁜 칸 씨의 얼굴과 눈에서 읽히는 걸."


"대, 대장님… 숨이… 켁…"


"쉬… 곧 뭉개질지도 모르는 성대에 신경 쏟을 때가 아니야, 페더. 좀 더… 응?"


"아…악…"


"놔!"


"눈물 좀 더 흘리면서… 그래… 그렇지. 이래야 좀 애원하는 것 같지. 칸. 어때? 꽤 귀엽지? 네 짹짹이."


발소리가 들린다.


"어때? 폐하에게 보고할래? 그럼 네 귀여운 페더랑 너는 저승행이야. 곧 들어올 년들도 마찬가지. 농담 아니야. 더 말 안 해. 선택해야 하는 건 너야."


"왜 이렇게까지…!"


"그만큼 절박하고 간절하거든. 자, 선택의 시간이야."


출입문이 열렸다.


"호출하셨다 들었슴다. 근데, 어…" 


막 등장한 브라우니가 눈물을 흘린 기색이 역력한 탈론페더를 보고는, 당황스럽게 지휘관실을 훑었다.


"…무, 무슨 일로…"


나는 페더의 옆에 나란히 서 있다. 왼손은 페더의 상의 안에서, 팬텀을 쥔 채 늑골을 겨누고 있다. 여기서 이 카스타드 푸딩 같은 보드라운 가슴 쪽으로 살짝만 힘을 주면, 그대로 관통. 탈론페더는 제 피에 질식해 급사한다.


칸이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다프네는?"


"부재 중이라 저희만 왔습니다." 레프리콘이 답했다. "그래서, 어떤 용건이신지…"


"……아니, 됐다. 아무것도."


"그렇습니까." 레프리콘이 페더를 곁눈질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미안하게 됐어."


지휘관실의 분위기도 그렇고, 곧바로 다시 나가게 된 상황에 브라우니는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브라우니의 등을 레프리콘이 밀면서 "뭐하나요. 빨리 나가요." 하고 발을 떼는 걸 도왔다. 눈치가 빨라서 좋다. 그러고 보니 두번째 오르카에서도 레프리콘이 스틸라인에서 유일하게 조심성이 있었던가. 


브라우니를 먼저 내보내고, 몸이 반쯤 나갔던 레프리콘이 뒷걸음으로 다시 들어왔다.


"외람되지만… 페더 부관과 옆의 아이가 관련된 것이었습니까?


"……트러블이 좀 있었던 모양이야. 드물게 우리 부관을 좀 혼낸 참이었어서 말이지. 못 보일 꼴을 보였군."


"그 뿐입니까?"


"궁금한 게 많아."


"호출로 인한 행선지가 타 부대일 경우에는 경위를 보고하도록 되어 있기에. 그 뿐이라면, 알겠습니다."


"아니. 함구하도록. 입 밖에 내지 마."


"…"


"경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프리콘이 나가고 출입문이 닫혔다.


"현명한 선택 감사해요. 칸 대장님. 마지막엔 좀 흔들린 것 같았는데, 뭐, 그랬다면 영영 부관과는 빠이빠이였으니까."


페더는 주저앉았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기에 도와줄 의도는 없었지만, 일어나도록 어깨를 당겨봐도 일어나질 못했다.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꽃밭 천지인 잠수함에서 지내는 년답다.


"앉죠?"


핏방울이 맺힌 팬텀을 닦으며 테이블로 향했다. 칸은 내가 책상 쪽에 뒀던 의자를 도로 끌고와 나와 마주 앉았다. 

그 둘을 돌려보낸 이상, 주도권은 내게 있었다.


칸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풀린 다리에 이어 긴장도 풀린 걸까. 그러기엔 너무 일렀다. 지 대장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앞으로도 죽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차가워. 네 부관 질질 짜잖아. 가서 좀 토닥여 주지?"


"정말이냐. 정말로, 2년 뒤에 모든 게 끝나버리는 거냐."


이제야 좀 심도 높은 대화가 가능하겠는걸.


"지금 반응을 아까 보였어야지. 다프네가 아니라."


"진지하게 굴어. 정말이냐 묻고 있다."


"…그래."


"증명할 수 있나?"


"증명?"


"납득시켜보란 거다. 네 말대로라면 너에게 이 오르카는 다섯 번째야. 동일한 사령관에 동일한 개체들. 2년이란 시간 동안 벌어질 사건이나 행사도 완전히 동일하다면서."


"완전히는, 아니야."


"대략적으로."


"대략적으로는. 응. 맞아."


내 이야기 자체는 제대로 들었던 것 같다.


증명이라. 어떻게 해야할까. 아, 어려울 것 없나. 벌어질 사건이나 행사도 동일하다고 했으니, 그 부분에 살을 붙여주면 될까. 거기에 내가 없었을 때 오르카가 어땠나도 말해주면 될라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곧 있을 크리스마스에 이 방 바깥에 있는 년들이 말이지. 합심해서 폐하한테 감동을 선사할 거야. 세인트 오르카였나. 뭐 그런 이름으로 드론쇼를 할 거거든? 니들 그런 거 계획 중이잖아."


"너는 몰랐다는 듯 이야기하는군."


"나같은 년을 그런 이벤트에 껴주겠니? 어쨌든 감기약 챙겨. 폐하는 크리스마스에 감기 기운으로 고생하실 거니까. 그리고 내가 오르카에 없었을 때 말인데, 소완이란 년이 폐하한테 약물로 장난질하지 않았어?"


"…"


"또 여름 휴가때는 트리아이나란 년이랑 조우하셨을 거야. 그리곤 앙헬의 애착인형과 다름없는 로크를 취하셨을 거고. 그 새끼 지금 격납고에서 자고 있지?"


"계속해."


"에바는 목이 잘렸어. 혓바닥이 매력적인 새끼한테. 달리는 열차에서 레이더와 전투도 벌였을 거고, 스토커 때문에 고생도 하셨겠지. 폐하, 라비아타한테는 괴물 소리까지 들었지 않아? 하여간 그 덤프트럭 같은 년. 누가 누구보고 괴물이란 거야."


"비하적인 표현은 삼가라."


"의미만 통하면 덤프트럭이든 멧돼지든 무슨 상관이야. 실제로 그렇게 생겨 먹었잖아. 어쨌든, 폐하가 몸을 얻게 되는 건 생체 재건 설비 덕. 입력한 설정은 청년에 균형잡힌 몸일 것이고. 설비가 위치한 곳에는 익스큐셔너가 배회 중이지 않았어?"


"맞다."


"폐하가 오르카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우한 개체는 LRL."


"그것도 맞아."


"여태까지 말한 것 중에 틀린 거 있어?"


"…없군."


다만, 하고 칸이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 가능성이 있겠군."


"무슨 가능성?"


"염탐."


"내가?"


"여기에 너말고 누가 있나."


몇 번의 오르카를 거쳤는데도 내가 칸을 잘못 판단한 건가? 뭐 이런 멍청한 의문이 다 있지?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는데?


"뭘로?"


"잠입용 드론, 통신 하이재킹. 그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이때까지의 오르카는 보안에 구멍이 숭숭 나있었다는 게 되는데."


"보안 담당 개체들이 나태했을지도."


"지금 유미한테 가서 물어봐. 그 기운 없는 년이 노발대발하는 걸 볼 수 있을 걸."


"그 뿐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말한 것들은 기록실에서 얼마든지 열람 가능한 정보야."


"그건 지휘통제실로. 아르망 추기경이란 이름으로 기록실에 출입한 내역이 있나 보면 돼. 더 필요해?"


"아니. 됐다."


취침 전 점호 준비를 알리는 함내방송이 울렸다. 벌써 그런 시간이다. 10분 뒤면 취침이 시작된다.


방송이 지나간 뒤에도 한동안 칸은 제 무릎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콧물을 훔치는 소리와 옷매무새를 고치느라 부스럭대는 소리 뒤에는 페더가 칸 옆의 소파에 위치했다. 내게 시선을 맞추진 않았고, 숨죽여 우는 도중에 들려온 대화는 제대로 들었는지 칸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기록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서비스로 하나 더 추가 해줄까."


몸을 일으켜 지휘관실을 떠나기 전에, 그것까지 알려주기로 했다.


"기록실에는 기록되지 않은 정보. 뭔지 알아?"


뒤통수로 충분하다는 건지, 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폐하는 갑판에서 콘스탄챠에게 고백했어."


"그랬다는 소문이 있었지."


"콘스탄챠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모를 걸. 알고 싶어?"


"말해주세요."


페더가 고개를 돌려 물어왔다. 나중에 콘스탄챠에게 확인해 볼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야 고마운 일이다.


"주인님, 저의 마지막이 되어주시겠어요?"







* * *






"대장님의 전언이에요.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에 다시 보자고… 그때까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대요."


페더가 그렇게 전한 게 3일 전이고, 오늘은 이브. 10분 지나면 크리스마스다. 


오르카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뭘 하면서 보내면 좋을까. 오르카에 오르기 전에는 호랑이를 끌고 멧돼지 사냥을 했었는데, 오르카에 올랐으니 바이오로이드 사냥이라도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기분으로 아무도 없는 카페테리아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필요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면 모두가 폐하와 감동 넘치는 시간을 보내러 시내에 갔으니, 뭘하든 상관없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사고를 치진 않았다. (담배만 한 개비 피웠다.) 가만히 이어폰을 꽂고, 창 너머 푸르른 공간을 유영하는 어류들을 관찰했다.  크리스마스라서 머라이어 캐리나 왬, 존 레전드를 이 멸망한 세계에 소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지만,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인식을 최대한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이날 내 귀에 들린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멜로디 뿐이었다.


"앉지."


며칠 전과 똑같은 테이블에 똑같은 구도로 앉은 우리는, 예열수단으로 침묵을 선택했다. 사전에 암묵적인 합의라도 됐다는 듯, 서로가 어떤 뜻으로 침묵 중인지를 알 수 있었다. 


칸의 흘기는 듯하면서도 철저히 요목조목 뜯어보고 있다는 느낌의 시선, 내쪽은 얼마든지 그러라는 시선. 나야 나를 볼 수도 없고 거울도 없으니, 제대로 결백이 담긴 눈매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비웃고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르망 추기경 특유의, 보는 이로 하여금 안심하게 되는 그런 표정을 언제 지어봤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나를 불렀을 것이다. 


"빠르게 가지. 먼저, 첫 번째."


칸이 팔짱을 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왜 다섯 번째인거냐."

"왜 150년 전으로 네 번이나 떨어졌냐는…"

"아니. 왜 사령관을 구하는 것에 실패했냐는 거다."


"처음부터 할 말 없게 만드시네."

"아르망 추기경이란 개체는 예지 수준의 연산능력을 지녔다는군. 알아보기로 말이야."

"그러니까, 왜 예지를 못했느냐고?"


"그래. 그것도 네 번이나 실패할 정도로. 어디까지나 연산이니 정보와 자료가 필요하겠지만, 네 번이라면 그런 것도 충분할 테지. 그런데도 왜 실패했냐는 거다. 변수? 변인? 혹시 네 번 모두 동일하진 않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네 번 모두 동일하진 않았어. 그리고… 이건 너희한테만 말하는 건데, 나 예지 못 해."


왜 동일하지 않았는지는 아직 말하지 말자.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커다란 줄기가 동일한 거지, 잔가지는 달랐어."


"됐다."


기가 찬 콧숨을 뿜고 칸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데. 듣자하니 너는 오르카에 오르자마자 아르망 추기경의 복원을 막았다지. 복원에 필요한 자원이나 노동력 등을 생각하면 타당한 이야기다만, 지금 보면 아르망 추기경은 한 개체 더 복원하는 게 옳았어. 그 아르망 추기경은 예지가 가능할 테니 말이야."


"아니. 못 해."


나는 단박에 칸의 말을 부정했다.


"뭐라?"


"내가 막지 않았다면 복원됐을 아르망 추기경도 저항군의 마지막에 대해선 예지가 불가능할 거라고. 복원 개체에게 내가 정보를 제공한다 해도 불가능. 네 생각과는 다르게 예지에 필요한 정보가 모자라거든. 아니, 정보량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예지가 가능한 사항인가를 따져야 하나."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복원작업을 재개하라…"


"안 된다고 씨발. 복원해봐야 예지 못한다고."


"어떻게 확신하나."


"나도 처음엔 복원 개체였으니까."


"그, 제조탱크에 들어있는 그것이?"


"내가 그년이었다고."


그년이 나라고 해도 좋다. ……차이점이라곤 2019년부터 2113년에 이르는 시간에 대한 경험의 유무 뿐이다.


나는 최대한 가볍게 생각하려 했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제조탱크에 잠들어 있는, 이제는 '만약의 나' 라고 표현해야할 그년도,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낸다면 지금의 나처럼 될까?


"마지막이다." 


어떤 질문이길래 칸이 호흡을 다 골랐다. 


"사령관에게 밝힌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말을 막고 칸은 덧붙였다. 


미친 것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을 거란건 안다, 하지만 최대한 설득력을 갖추고 이야기해 본다면 믿어줄 가능성이 있지 않았겠느냐… 듣자마자 다프네를 호출하려 들었던 년이 잘도 할 소리였다.


폐하에게, 전부 밝힌다? 믿어줄지도 모른다? 폐하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 이야기를 믿어주냐 마느냐 이전의 문제다.


"폐하가 아는 순간 끝장이야. 믿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애초에 들으려 하지 않을 거거든."


콘스탄챠의 죽음, 그것도 혹시 모를 사고라거나 철충의 느닷없는 습격이라는 가능성 높은 이야기라 해도, 예지를 내세워 곁들여도, 폐하는 듣지 않을 것이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다. 세번째 폐하를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단 둘이서 함께 했던 2년도.


폐하의 머리속엔 콘스탄챠의 죽음은 고사하고 가능성에 대한 발상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조금이나마 내 말이 닿았다 한들, 폐하의 우려만 키울 뿐이다.

그 우려가 폐하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까지 웅크리게 된다.


확신할 수 있다. 폐하에게 콘스탄챠란 그런 존재다.


이러한 설명이, 칸에게는 내가 내뱉은 말들 중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진 듯했다. 추가로 아르망 추기경을 복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덧붙였다. 


나나 그년이나 똑같다, 예지가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복원 개체였을 시절에 이미 했을 것이다, 그게 안 되니 그년이 복원되면 우리에게 힘을 보태는 게 아니라 배척하려 들 것이다, 예지로도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고 떠드는 우리를 미친 취급할 것이다, 


폐하를, 끝까지 싸고 돌 것이다.


그러면 방해다. 복원하느니만 못하다.


슬슬 대화가 식어가는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묻기로 했다.


"나를 여기로 불렀다는 건, 내 이야기를 믿는다는 걸로 생각해도 되는 거지?"


"진짜로 감기 기운이 있으셨어요…"


페더가 눈을 깔고 어제를 곱씹었다. 날씨로 얼마든지 염려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고 칸이 혼잣말을 했다. 


"다시 부르지." 


칸이 출입문을 가리켰다. 진전이 있었던 것 같아 이런 싸가지는 묵인할 수 있었다.


며칠 뒤, 해가 바뀌기 전. 나는 얼마 있지도 않은 짐을 싸들고 호드의 생활관을 찾았다. 그러라는 칸의 지시였다. 이제부터는 호드 소속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란 게 칸의 설명이었다. 폐하를 찾아가 이런 저런 조율을 했다는 듯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신경쓰였지만, 칸은 그 부분에 대해선 딱잘라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금일 부로 호드의 새로운 자매가 된 아르망이다. 인사는 알아서들 나눠라. ……잠깐 볼까."


"인사 나누라며?"


그런 인사는 내가 먼저라는 듯이, 칸은 내 손을 잡아 복도로 끌었다. 


"동행하지. 네 쪽에서도 동행해 줘야겠어. 그러러면 앞으로도 계속 증명해야 할 거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 걱정 마."


"너 자신에 대해서도다. 넌 이상한 개체야."


"고맙네."


"착각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감시의 연장선이다. 너같은 개체가 마음대로 오르카를 배회하도록 풀어둘 순 없어."


"솔직하게 굴어. 내 말에 흔들리고 있다고."


"멋대로 생각해라."


네 말이 사실이길 바란다. 그렇게 말하고 칸은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방금 건 취소다. 거짓이길 빌지."


동감이다.


내 입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가 거짓으로 끝나기를 진심으로 빈다.







* * *







해가 바뀌고 첫 날은 호드의 모두가 비번이었다. 이 사이에 호드의 구성원 모두는 칸의 머리속을 헤집어놓은 이야기를 공유했고, 똑같이 혼란스러워했다. 


이해한다. 그러나 이야기만으로 혼란스러워하면 곤란하다. 그런 상황이 눈앞에 닥치면 혼란하다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이제야 호드의 기동력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을 디뎠다. 다음 걸음으론 뭐가 좋을까. 


증명하라 했으니, 그 부분부터 시작할까.


나는 칸을 찾아가 '대장님'이라며 애교를 떨고, 오늘이 비번인 건 알지만 다같이 오르카를 나서자고 청했다. 처리할 서류들이 있다고 에둘러 거절하는 건 듣지도 않았다. 더 커다란 목적 앞에 그 따위 서류 몇 장 쯤이야 내던져 둘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대원들 뒷감당은 네가 해라."

"그럴게요. 대장님."

"대장님은 빼."


다시 대장님이라고 속삭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덤으로 수송기도 한 대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이 부분은 '지휘관'이신 칸 대장님이 폐하께 청할 문제다. 


알아서 해주리라 믿는다고 한 번 더 애교를 부리고 호드를 끌고 수송기로 향했다. 


수송기는 칸이 오기도 전에 엔진 예열을 끝마친 상태였다. 알아서 좌석에 자리잡은 대원들은 저마다 투덜댔지만, 페더가 한명씩 찾자 금세 잠잠해졌다.


"목적지는?"


옆의 부조종석에 앉은 칸이 나와 계기판을 살피며 물었다.


"네가 좋아할 증명의 장소지."


그나저나 폐하가 선뜻 허가했느냐고 물었는데, 칸은 째려보기만 했다. 비번인데 오르카를 나서겠다고 했으니 의심을 산 모양이었다. '현재' 폐하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의심 아닌 의심이었겠지만, 어찌됐든 폐하로부터 의심을 산 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로도 칸은 수시로 나를 째려봤다. 


"마, 말도 안 돼…"


첫 증명을 막 마치자 탄성과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 장소는 이름을 부른다 해도 오늘날에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어떤 도시의 모처였고, 여기서 한 시간을 죽치고 있자 철충 세 무리가 몰려왔다. 그리고 전부 나 혼자서 족쳤다. 10분도 안 걸렸다. 어째서인지 날아온 폐하의 지휘용 드론도 깔끔하게 박살냈다.


다시 말하지만 한 무리가 아니다. 세 무리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드물게 눈꺼풀을 연 샐러맨더를 지나쳐 칸에게 다가섰다.


"증명. 됐을까?"


대단해요! 라고 새된 소리를 내는 페더를 밀어내고 칸이 한 발 다가왔다.


"아니. 새로운 의문이 드는 광경이었다."


"에에? 왜요? 멋졌는데?"


"조용히 해라 페더."


방금 걸 보고 멋지다 말하는 건 너뿐이다. 칸이 그렇게 다그치자 페더는 풀이 죽었다.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린 칸은, 다시 페더에게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혼내지를 말던가. 칸이 멋쩍게 페더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야 대화가 진행됐다.


"지휘용 드론을 박살낸 건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호출하면 안 됐겠군."


"그렇지?"


"어떻게 된 거냐."


일부러 히히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떻게 사령관의 지휘도 없이 그런, 철충을 박살낼 수 있는 거냐. 그것도 저만한 숫자를, 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지휘는 필요없으니까."


이 발언을 여러 번 돌려보면, 인간도 죽일 수 있다는 게 된다. 

거기까지 가장 먼저 생각이 미친 건 놀랍게도 워울프였다.


"혹시… 아니지?"


"맞아. 정말이지 인간을 얼마나 죽였는지 몰라. 아무런 지시도 명령도 없이 말이야."


"아니 나는… 메이 대장같은 개체인 거냐고 물은 건데…"


넘겨짚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것에 더해 위험한 개체로군. 말이라도 인간을 죽이니 뭐니, 바이오로이드가 맞나 의심해야 할 레벨인데."


"지랄을 한다. 너도 죽여봤잖아."


"멸망 전이다. 어디까지나 명령이 있어서였고."


"그러시겠지. 그래도 짜릿하지 않았니? 다른 개체들은 느낄 수 없을 찌릿찌릿함을 알고 있어서 우월감이 들지 않아?"


"입, 닥쳐."


그런 걸 느꼈던 건 사실인 모양이다. 나와는 다르게 나쁜 의미의 짜릿함이겠지만. 


……나에게도 나쁜 의미로의 짜릿함이다.


"이게 증명인가?"


유충까지 곤죽이 된 철충들을 둘러보고 칸이 말했다.


"일단은."


"안하느니만 못했군. 돌아간다."


몇 분 뒤에 우리는 다시 조종석과 부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푸르른 도시의 상공에서 바다로 들어서자,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묵직한 구름이 맞이했다. 


풍경이 바뀌는 동안 말이 없던 칸이 입을 열었다.


"막 생각난 건데, 어째서 저항군에 더 빨리 합류하지 않았나. 다 알고 있다면… 저항군이 창설되자마자 합류하는 것이 마땅했던 게 아닌가."


"자신이 없었으니까."


"무엇이."


"내가, 너희를, 가만히 둘 자신."


"알아듣게 말해."


"처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고. 멀쩡히 훗날만을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데에만 10년이 걸렸어. 그랬었는데 과연 너희에게 합류하면 오르카에 오를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리고?"


증명도 할 겸, 이건 직접 보여주도록 하자. 







* * *






"이래서 합류를 안 한 거야."


애당초 할 생각도 없었지만, 오르카에 합류하기까지 이걸 준비하느라 바빴던 건 사실이다.


"이 모든 걸, 네가 한 거냐?"


"한… 60년? 70년인가."


오르카를 향하던 수송기가 도착한 곳은, 그 섬이다. 


착륙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갈대숲으로 들어섰다. 


물기를 머금은 잎을 훑으며 나아간다. 갈대들은 계속 이어지고 이어져 해바라기들의 무덤과 연결된다. 생생한 갈대와는 달리, 해바라기는 몇 송이만이 겨우 살아 있었다. 


산 것 중에 가장 작은 녀석을 뜯어서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한 장. 두 장. 세 장.


"이봐."


…여섯 장. 여덟 장.


"아르망."


아홉 장.


"부르면 대답을 해라."


"시끄럽네. 모처럼 산책 좀 하겠다는데."


"산책에 어울리는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대답을 들어야겠다. 여기를 이렇게 만든 건 너인가?"


"나야."


"어째서?"


가능한 멀리 보며 섬을 눈에 담았다. 따뜻하지도, 춥지도 않은 곳. 계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무분별하게 나있는 다양한 꽃들, 망망대해 속 무인도에는 날 리 없는 꽃들도 있다. 그런 꽃들만으론 자아낼 수 없는 바리에이션은 풀과 덩굴, 나무들의 몫이었다.


언뜻 보면 어린 아이의 유치한 색놀이로 희생 당한 도화지 같은 풍경이었다. 수십 년 간 들르고 나선 곳이지만, 이곳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내가, 섬 구석구석까지 박아 놓은 것을 빼놓고 봐도 말이다.


칸과 대원들이 놀라는 건 다양한 꽃과 풀 때문이 아니었다. 그 총천연색에 어울리지 않는 금속들 때문이었다. 대공포, 반파됐으나 코어만은 살아있는 AGS. 상대적으로 멀쩡한 AGS. 하지만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AGS.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부분만 살아있는, AGS. 


어디를 둘러봐도 금속. 그것도 꽃과 풀을 품에 안은 금속들이 난립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기에,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대장님! 여기 보세요! 대장님!"


먼 곳의 동산에서 페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깡총대는 실루엣이 덩굴과 융합된 듯한 포신 옆에서 완만히 오르내렸다.


페더 외에도 섬에 들른 대원 모두가 감탄하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종종 보이는 풍경일 텐데, 바다 한가운데라서 각별하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감탄이나 하라고 여기를 이렇게 뒤튼 게 아니다.


"여기니까."


한박자 뒤에 칸이 숨을 참는 게 보였다. 


"콘스탄챠는 여기서 죽어."







* * *






증명이라고 보였던 것들은 칸의 의구심만 키운 모양이었다. 첫 번째는 내가 150년을 4번이나 반복한 년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이었고, 두 번째는 보았다시피 콘스탄챠의 죽음을 막기 위한 노력의 증거였는데.


이년들에게 그 정도로는 파멸을 연상시키기 어려운가. 일단은 칸이 계속 동행해주고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증명이야 계속하면 된다. 하기 싫어도 하게 된다. 그러면 마지못해서라도 믿겠지. 


"다시 묻겠다. 그 섬을 대공 화기로 도배한 건 너인가?"


오르카로 돌아와서 나를 지휘관실로 끌고 간 칸이 꺼낸 첫문장이었다. 뒤에 "오직 너 혼자서? 협력자는?" 이라고 묻는 걸 보니 어느 부분을 믿지 못하겠는지 알 수 있었다.


"나 혼자했어. 그렇게 안 믿겨? 나처럼 가녀린 년이 그런 샬럿 젖가슴만 한 것들을 옮겼다는 게?"


"믿고 못 믿고 이전에, 수단의 문제다. 하나하나가 수 톤은 가볍게 넘어가는 것들이야. 아무리 수십 년이라지만 그렇게 많은 숫자를 무인도에 옮기는 건 불가능해. 너 혼자서면 더더욱 불가능하지."


"가능해."


이게 있으니까.


"그런 장갑 하나로 옮겼다고 말하지 마라."


"옮겼어. 인사해. 내 오랜 친구 네오딤이야."


"…네오딤?"


"그래. 네가 지금 떠올린 그 네오딤."


"헛소리에 어울려주는 것도 정도가 있 "


칸이 문장을 완성하기 전에 보여주었다. 책상을 꾸미는 몇 안 되는 것들 중에 금속이었던 건 작은 탁상액자였고, 그걸 공중에 띄워 놀리듯이 칸의 면전에서 돌렸다. 잠깐 가져와 확인해보니, 액자에 담긴 것은 페더와 칸 단 둘이었다. 그것도 셀카 구도로 찍었다. 이런 귀여운 면이 있었다니. 마지못해 찍었다는 표정이라서 더 귀여웠다.


액자를 제자리에 내려놨다. 그것도 네오딤을 통해서였다.


"네오딤이라니까."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칸을 향해 보란듯 내 입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평소의 일자 입이 되었다.


"마술인가?"


이건 좀 웃겼다.


일과 시간 종료 방송이 울린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는 탁상액자가 아니라 수십 톤의 무언가를 들어보여주기로 하자.








* * *







접근하기 전부터 칸이 마음에 들었던 건 맞지만, 철저히 사적인 감정은 배재했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호드의 '기동력'이지, 정서적으로 친밀해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것은 칸의 따까리 년들도 마찬가지다.


헌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호드 녀석들과 잘맞는 구석이 있었다. 

이년들. 하나같이 단순해 빠졌다. 


그런 단순한 년들과 잘맞는다는 건, 나 또한 단순한 년이란 뜻이다. 순순히 인정할 수 있다. 그야 멸망 전에는 그런 하치코와 밀도 높은 시간을 함께 했었으니까. 그 영향을 받아 기호가 서서히 단순한 것으로 바뀌어버렸다고 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주위의 영향을 받아 변한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이 단순한 년들에게 공명하기 시작한 지 3주차가 됐을 때부터는, 틈날 때마다 술병을 까대기 시작했다. 담배는 기본. 본격적으로 취기가 돌게 되면 수위 높은 장난이 오가는 건 예사였다.


제동을 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도 못 했다. 


좋았으니까. 솔직히 즐거웠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즐겁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분과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봤던 건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다 겨우 제동을 걸려 한 것은, 그런 즐거움의 서늘한 생소함이 소름 끼쳤을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어느 날, 비번이었기에 대낮부터 취했던 나는 생활관에서 자빠져 자고 있었다. 칸과 페더를 뺀 나머지도 취기에 몸을 비틀며 이를 갈거나 코를 골거나 했다. 


그러다 눈이 뜨여져서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날짜는 바뀌지 않았다. 아직 낮이었다. 생활관은 몸에서 푹 삭은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코고는 소리와 이갈이 소리는 여전했다. 취해서 잠들었다가 금방 일어나면 몰려오기 십상인 두통은 없었다. 


뒤통수가 편안했다. 이제는 없으면 섭섭하기까지 한 게 두통이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두통에 시달린다. 오늘 하루만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뒤통수는 편안했다.


그 답은 천장방향에 있었다.


"깼어요?"


처음 보인 건 페더의 턱, 그 다음이 눈이다. 


내려다 보고 있다. 요컨대, 페더가 무릎 베개를 만들어주고 있다.


"뭐하니?"


취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처음엔 그 옅은 미소의 의미를 몰랐다. 귀는 시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잡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온다면 조용히 하자고 약속이라도 한듯, 코와 이빨이 내는 소음도 사라졌다.


"술 엄청 잘 마시네요."


페더가 생활관을 훑었다. 부관이라면 내 주량에 감탄할 게 아니라 엉망으로 더러워진 것에 한탄해야 하는 게 아닐까.


"비번일 때면 매번 마시고, 왜 그럴까요?"


"질문이야?"


"아뇨." 페더가 애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질문은 맞는데, 당신한테 향하는 건 아니에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생각해봤는데, 역시 안 마시고는 못 견디겠네요. 술이 의지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켜."


"힘든 거죠?"


페더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취기 때문에 조준이 잘 되지 않았다. 아무리 높게 뻗어봐야 가슴까지만 닿았다.


가만히 있어요, 라고 페더가 내 머리를 감쌌다. 어떤 의도인지는 이미 파악해서, 뭘 하려는 걸까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어떻게 감당하려고, 라는 의문이 자리 잡았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600살이니까요. 똑같은 시간대를 반복해서 사는 것도 나이 계산이 제대로 되는 건지… 하여튼 어떻게해서라도 저항군을 구하려고 그런 시간을 반복해 온 거라면…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아무 말 안 하면 되잖아.


우리의 첫대면이 상당히 강렬했다는 걸 페더는 잊고 있는 듯했다. 


다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겸, 우리의 관계에 미지근한 것들이 오갈 통로는 없다는 것도 상기시켜주기로 했다.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페더를 덮쳐 목을 틀어쥐었다.


"기억나? 그때, 거의 목을 터뜨릴 뻔했었지?"


페더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이럴 거란 걸 전혀 예상 못했음을, 터져나오는 침이 대신 말해준다. 목근육이 일체 경직된 게 손 전체에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호흡기에 이상이 오면 대체로 이런 반응이다. 다시 말해 이년은 감히, 완전히 긴장을 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를 계속해볼까 하는데, 어때?"


목 한가운데 꽂힌 엄지에 힘을 준다. 페더의 목이 우스운 모양으로 구겨진다. 페더가 필사적으로 싫다는 의사를 표명할수록, 내 손은 침으로 더러워져간다.


"힘든 거죠? 힘든 거죠?! 두번 다시 그런 말 못하게 해줄게. 응? 응?"


도리도리. 도리도리. 눈가에 고인 눈물이 이마 쪽으로 역류한다. 

처음 울먹일 때도 생각한 거지만, 페더는 꽤 귀엽다. 내가 칸이었으면 재미로라도 몇 번 먹었을지 모른다.


"워워! 이봐! 호드에선 그런 거 금지야!"


잠에서 깬 샐러맨더가 눈치 빠르게 만류해왔다. 꼭 무슨 들짐승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제스쳐가 짜증났다.


"그런 거가 뭔데?"


"지금 네가 하는 거!"


"아쉽네. 천천히 따먹으려고 했는데."


그럼 역시 목을 터뜨려야겠지.


"껙…켁…힉…"


엄지 마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목을 누르자, 페더는 재밌는 소리를 냈다. 눈 감고 들어보면, 도저히 목이 졸려서 내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다. 


목만으로는 아까워서 머리를 뒤로 쳐들었다가 아래로 확 수그렸다. 이마끼리 충돌하면서 생긴 빈틈 사이로 페더가 "미안해요! 아파요!"라고 잽싸게 말했다.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다.


몇 번 더 이마끼리 충돌하고, 엄지 끝에 피가 묻어나올 때가 됐을 땐 호드의 모두가 나를 말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고, 몸싸움으로 가면 내가 정말로 페더를 죽일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눈치도 빠르다.


상황을 종료시킨 건 금방 들어온 칸이었다.


"내려오지 그래."


순순히 물러났다. 나는 칸이 좋으니까.


호드년들의 어이없다는 얼굴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누구는 경위서나 쓰고 있는데, 대낮부터 술판 벌이고 난리도 아니군."


창문 열어라, 라고 말한 칸은 워울프의 "웬 경위서?"라는 물음에 전번의 지휘용 드론 파괴 건을 꺼내고, 나를 복도로 불렀다.


"하나 잊은 게 있다." 복도 양옆으로 눈치를 본 칸이 말했다. "이 동행에는 조건이 있어."


"말해보렴."


"말을… 됐다. 조건, 호드의 그 누구에게도 공격적으로 대하지 말 것. 상시 진정된 언행을 유지할 것. 이것은 호드만이 아니라 오르카의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못 지키겠다면?"


"내일 네가 보게 되는 건 다프네의 얼굴이 되겠지. 다른 개체면 몰라도, 넌 다프네를 꽤나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이 씨발년이…"


"벌써부터 엇나가는군. 그렇게도 다프네가 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어."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시지 말라곤 않겠다. 네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도 묻지 않겠어. 그냥, 좀 줄여."


"알았어."


"그럼 내일 보지. 내일은 꽤 바쁠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누가 칸 아니랄까봐, 용건만 본 칸은 뒤돌아 떠나갔다.


얘는 페더가 걱정도 안 되나.


"너 그러다 페더한테 미움 받아."


"그 녀석한테는 미움 좀 받고 싶군."







* * *






"…언니가 불러서 좀 기대했는데, 설마 그런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어."


다음날. 칸의 방에 모인 것은 나, 페더, 이 지휘관실의 주인, 티아멧과 닥터였다. 바쁠 거란 건 이 둘을 가리킨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둘에게 설명한 것은 칸이었다.


"나도 믿는 건 아니다." 칸이 말했다. "하지만 그냥 '삼류 소설'로 치부하기엔 걸리는 것들이 있어. 이봐, 아르망. 그걸 꺼내라."


칸이 티아멧을 시선으로 가리키고 손을 폈다 접었다 했다. 그냥 검을 꺼내라고 하면 되는 걸, 이 녀석은 이상한데서 말을 꼬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이 믿든 말든, 살짝 장난기가 발동했다. 닥터와 티아멧은 어린애들, 이왕 검을 꺼낼 거라면 시선을 끌기 좋은 연출이 괜찮겠거니 싶었다. 


머리 위로 뻗은 손을 내려, 상체 라인에 맞아 떨어지는 호를 우아하게 그렸다. 몸 앞에서 둥글게 돈 팔 끝에는 참수검이 한 자루. 대단한 마술을 보기라도 한듯한 귀여운 두 얼굴…은 없었다. 나름 실력 좋은 마술사 같이 굴어봤지만, 너무 뛰어난 마술은 놀라기보단 경악하기 마련이다. 


경악한 얼굴도 나쁘진 않았다. 찾아올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경악이 더 어울린다.


"이건, 제 검…" "응. 네 검이야."


엄밀히 따진다면 티아멧의 검이라고 하기엔 뭐하겠지만, 지금은 넘어가자.


티아멧은 내게 검을 받아들고,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두 검을 왼손과 오른손으로 바꿔 잡거나, 내 검을 검집에 넣거나 허공에 가볍게 휘두르는 등,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재확인을 거듭했다. 끝에 가서는 뭘 위한 확인이었는지 제 자신도 모르는 듯했다.


칸 녀석, 실력 좋은데. 내가 휘두르던 검이 티아멧의 그것과 같다는 걸 용케도 알아챘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유일한 검이 두 자루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검증은 티아멧의 당혹스런 침묵으로 끝났다. 곧이어 닥터가 말했다.


"어디서 꺼냈어? 뭘로 꺼낸 거야? 검집은?"


"하나씩 물어."


"왜 티아 언니의 검이 두 개야? 그걸 왜 언니…가 아니라 네가 가지고 있어?"


"뒤지기 싫으면 뒤에 언니 붙이렴."


"이봐."


칸이 목소리를 깔았다.


닥터에게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장갑을 던져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남자가 준 이 장갑에 적용된 기술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미래, 그것도 다른 차원의 기술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본래부터도 그런 쪽으로 박식한 편도 아니었다.


나는 검에 이어 팬텀의 나이프와 리리스의 피스톨까지 보여주고 닥터에게 장갑을 던져줬다. 닥터는 받아든 장갑을 이리저리 손바닥에서 돌리며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다가, 후다닥 지휘관실에서 나가버렸다.


 





* * *







세상 모두가 알겠지만, 말이라는 건 어느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무게와 신뢰도가 달라진다. 


저항군은 무너진다, 오르카는 머지않아 침몰한다, 같은 소리를 이상한 개체 취급받는 내가 하면 미친 소리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칸이 한다면 의미를 달리한다.


저항군의 지휘관이라는 위치도 닥터와 티아멧이 우리에게 합류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과연 그 둘이 봐도 진중한 '칸 언니'가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그냥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장갑… 장난 아니야. 인정하긴 싫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거기에 내 자잘한 증명까지 더해지자 설득력(?)은 배가 됐다. 그 똑똑한 닥터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물건을 두고 '나의 기이함'을 인정했고, 그것은 곧 믿기 힘든 미래에 관한 이야기쪽에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닥터에 비해 조용한 티아멧은, 따로 설명할 것도 없겠지. 초코 여왕의 성에서 티아멧의 경로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나 말하자면, 이때의 티아멧은 왠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내게서 어떤 기류를 읽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때의 나는 티아멧을 조졌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틈나는 시간마다 모일 때면, 닥터는 시공간과 관련된 이론들을 늘어놓으며 내 장갑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물건인지를 알리려 했다. 특히 칸에게는 거의 강제 주입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칸이 닥터에게 시달릴 때마다 나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내 증명은 계속됐다. 초코 여왕이란 인간에 대해 발렌타인이 오기도 전에 알려주고, 칠칠치 못한 경호대장님은 초콜릿으로 무식하게 거대한 동상을 만든다고 일러주었다. 추가로 컴패니언과 페어리의 사소한 다툼까지. 발렌타인이 끝나갈 무렵엔 모두가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듣는 걸 거부했다.


폐하가 호라이즌을 손에 넣을 때가 다가왔을 무렵엔, 별의 아이에 대해 말해주었다. 특히 닥터가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인류에게 확실한 마침표를 찍은 FAN파는 별의 아이가 원인이라고 듣자, 내게 끝도 없이 설명을 요구했다. 그 이상에 대해선 아는 게 없으니까 나는 적당히 겁을 주고 쫓아냈다. 아, 칸에게는 이런 것도 말해줬다. 레오나가 겁먹은 척 폐하께 꼬리를 칠 거란 것. 정말 시답잖은 년이지 않냐고 물어봤는데, 별 반응은 없었다.


괌에 도착했을 무렵, 요정 마을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 말할 때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사안이 사안이니까. 혹시 배후가 오메가라는 걸 미리 알아버리면, 저항군의 몰락에 대비할 수도 없을 만큼 다른 전개가 되지는 않을까? 같은, 그런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 오메가 정도로는 저항군의 완벽한 몰락이란 결말에 영향을 주지 못하겠지만, 전개만이 달라진다면 곤란하지 않은가.


결국 오메가에 대해서는 요정 마을에 들르신 폐하가 오르카로 돌아오기 전에 말했다. 후에 폐하께서 찾으실 vr세계에서까지 헛짓을 할 거란 것도 말해줬다. 닥터는 폐하로부터 리앤의 복원을 부탁받는다는 것도. 세세한 사항은 300년만이라 잊은 부분이 있어, 어느 정도 걸러서 말했다. 


리앤을 우리에게 막 합류시켰을 때가 되자, 칸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예지를 못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게 확실한가?"


조심스러운 건 나쁘지 않다. 합당한 의심이다. 나는 거짓말을 했고, 이 모든 게 예지로 관측한 이야기라는 편이 보다 받아들이기 쉽겠지.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예지를 못 한다.

내 증명은 경험에 기반한다. 겪어봤으니 아는 것이다.


"이제는 믿겠지?"


애교를 가득 담아 물었다. 칸은 끝까지 믿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폐하의 결혼식은 내가 중무장시켜둔 그 섬에서 거행됐다. 섬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서였는지, 무인도 구석구석까지 들어찬 대공 화기에 대한 의문은 누구도 폐하에게 제기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결혼식 직전의 순백색 기류를 아무도, 감히 깨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대공 화기조차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니까.


이 결혼식에 대해서 칸은 먼저 알고 있었다. 당연히 나 때문이다. 장소는 맞췄고 과정은 내 말과 완벽히 일치하진 않았지만, 칸이 당혹스러워하기엔 충분했다. 두 번째 오르카에선 내가 축가까지 불렀다고 말해주었다.


결혼식이 마무리 되고 평화로운 시간이 지속되어, 겨울을 앞뒀다. 


오르카의 다음 행선지는 알래스카.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


칸이 지휘관실에 모여있는 개체들을 둘러봤다. 사안의 중대함을 아직도 모르고 싱글벙글하는 년, 칸처럼 무표정하지만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년, 아직도 믿지 않고 있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한 년. 다양한 면면이 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묻지. 사실은 처음부터 물어야 했던 거지만… 왜 나였던 거냐."


네가 그나마 들어줄 것 같으니까, 는 빼자. 


"찾아야할 게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연필로 a4용지 한 장에, 수십년을 떠올리려 노력했고, 마침내 떠올렸던 그것을 그렸다.


"너희들."


종이에 그려진 미식별 개체, 아니, 정말 존재하는지 조차 의문인 그 개체를 지휘관실에 모인 녀석들에게 들이밀었다.


"혹시 매트릭스라는 영화 알아?"







* * *






이전의 오르카에서도 그랬지만, 갑판은 내 흡연소다. 밤이 되면 바다가 끈적한 타르처럼 보이는 시각적 효과 때문인지, 기관지로 흡수되는 기화한 타르의 양도 평소보다 상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르망. 여기서 뭐해?"


나는 뒤돌지 않는다. 뒤돌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쯤은 안다.


위를 본다.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의 바다는, 언젠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듯한 착각이 든다. 실제로 똑같을지도 모른다. 반복된 시간과 무관하게, 지구 바깥의 알갱이들은 그때와 동일한 것들인지도 모른다.


귀에 손을 가져가 이어폰을 빼고 품 안에 넣었다. 


수단은 참 불편하다. 어쩔 수 없이 '아르망'이기 위한 외적인 요소가 필요했다지만, 이럴 때면 굳이 '시체가 된 아르망'에게서 수단만 챙길 필요가 있었는가 싶다.


"담배 피우는구나… 몰랐어."


언제는 알았나. 면담 후에 대화한 적도 없는데.


…직접, 가르쳐 준 적도 있는데.


품을 만지작거려 감촉으로 이어폰을 확인했다. 확실히 있다. 


이걸 꺼내서, 폐하께 권해볼까 하는 충동이 샘솟는다.


"먼저 들어갈게요."


폐하가 이제 막 갑판 난간에 손을 얹은 참에, 나는 말했다.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는 게 좋다.


"아르망. 잠깐만. 잠깐이면 돼."


"뭐죠?"


나는 뒤돌지 않고 말했다.


"음… 너무 직설적인 게 아닌가 싶은데, 혹시 내가 불편하니?"


"아뇨."


"몇 번 호출했는데 한 번도 응하질 않아서… 혹시 내가 불편한가 싶어서… 그렇다고 내가 찾아가면 더 안 좋은 것 같고…"


"불편한 거 없어요. 처음에 다 말씀드렸잖아요."


난 지금 뭘하고 있는 거람?


"그, 그래… 미안…"


또. 

왜 당신이 미안하다는 거야.

뭐가 미안한 건데.


"아르망."


이름만 부르면 멈춰 줄 거라 확신 하는 건가. 왜 계속 이름 먼저 불러보고 말을 하는 거야.


"정말 미안하지만,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 부탁이 있어."


"말하세요."


나는 여전히 뒤돌지 않는다.


"나… 그리고 우리…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를 묻는 거야. 철충이나 별의 아이에게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는, 그런 세상 말이야."


"그러신가요."


"예지해줄래?"


……


……


……


……


"행복하실 거에요."







* * *






폐하에 대한 마음은 접었다.


오해할까 봐 말한다. 내가 접은 것은 폐하와의 이상적인 관계이지, 나는 여전히 폐하를 사랑한다. 


틀려, 여전히가 아니다. 


더, 더 사랑한다.

150년. 300년. 450년. 이제는 600년이다. 오르카를, 시간을 거듭할수록 이 마음은 꺼지거나 작아지긴커녕 커지기만 했다. 


어디까지 부푸는 걸까? 한계가 있긴 한 걸까?

이제는 600년분의 크기가 된 이 마음은, 어떤식으로든 해소가 되긴 하는 걸까. 


그런 언제가, 있긴 한 걸까.


콘스탄챠와 맺어진 이상, 그런 날은 안 오는 게 아닐까.


콘스탄챠가 없어야, 있어도 맺어지지 않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야. 해봤잖아.


네 번째 폐하가 어떻게 죽었는지, 나는 그 새 또 까먹은 모양이다.


이런 건…… 계속 커지기만 하겠지. 


 





* * *







오르카가 알래스카에 도착했을 때가 되어서는 더 많은 개체들이 우리에게 합류했다.


코헤이 년들, ags의 유지보수 및 정비를 도맡는 년들, 그리고 도움이 될런 지 의문인 년들 몇. 나는 칸에게 오르카의 다음 행선지가 알래스카로 정해지기 전부터 알파에 대해 말했고, 실제로 폐하와 접촉한 알파가 내 설명과 일치하자, 더는 앞날에 대해 증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칸의 재량으로, 우리는 저항군의 본대와 별도로 행동하게 됐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폐하가 오메가를 제압하는 사이에 시시각각 몰려드는 철충을 견재할 '별동대'이지만,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진짜 모르겠네. 이렇게 생긴 철충이 정말 있다고?"


무슨 꼬리가 여러 개 달린 올챙이 같잖아, 라고 퀵 카멜이 엄습하는 추위에 불평해댔다. 그렇게 생긴 철충이 정말 있냐고? 있다. 그놈들이 오르카를 통째로 작살낸다.


목적은, 특정 개체 식별. 타겟은 내 머리속에서 a4용지로 튀어나온, 퀵 카멜의 입을 빌리자면 꼬리가 여러 개 달린 올챙이다. 


내가 보기엔 올챙이보단 거미같다. 거미는 눈이 많으니까.


어쨌든 저항군이 존재해온 수 십 년간 단 한 번도 보고되지 않은 개체다. 존재하는지 조차 의문인 게 당연하지만, 진짜 존재한다. 찾아야 한다.


우리는 철충 신호가 터지는 곳이라면 알래스카, 무리해서 캐나다 근방까지 샅샅이, 직접 수색하며 다녔다. 이래서 내가 기동력이 뛰어난 호드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다소 무식한 방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많고 많은 철충 중에 딱 내가 그린 것처럼 생긴 녀석을 찾아낸다는 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다.


대략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실제 난이도는 그보다 더 높다. 무엇보다 김서방은 다짜고짜 죽이려 덤벼들지 않는다.


거듭되는 전투를 무릎쓰며 직접 몸으로 찾아 헤맨 것도 거진 일주일이 됐을 때, 칸이 물었다.


"이전 오르카에선 발견하지 못했나?"

"응."

"혹시, 찾을 시도를 안한 건 아니겠지."

"안 했어."


예지가 가능했던 첫 번째는 예지를 못 했고, 두 번째는 설마 반복되리라 상상을 못 했고, 세 번째는 결말에만 시선이 쏠렸고, 네 번째는 오르카에 오르지조차 못했었나.


"참모였다면서. 참모가 정보를 등한시했다는 거냐. 하. 생각해보니 웃기는군.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참모라니. 네가 참모로 있던 오르카는 꽤 볼만 했겠어."


칸과는 꽤 가까워져서, 이전 오르카에서의 나에 대해 조금 말해준 적이 있다.

그걸 여기서 써먹을 줄은.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번에 찾으면 돼."


"…나 원."


알래스카는 해가 빨리 진다. 


칸이 호드를 호출했다.


"전원. 지정하는 거점으로 합류하도록. 현시간 부로 금일 수색은 종료한다. 이상."


칸과 향한 거점은 내가 오르카에 합류하기 전에 만들어 둔 오두막이었다. 오두막, 덕아웃, 벙커 등등, 여러 형태로 곳곳에 지어뒀다. 알래스카가 그 중 한 곳이었다.


숲 속 오두막에 빛이라곤 스토브를 달구는 불 밖에 없었다. 오두막에 쟁여 둔 담요는 한 장 뿐이라, 우리는 최대한 몸을 붙여야 했다. 


칸의 지휘관실에서 몰래 가져온 싸구려 티백으로 몸을 녹이다가,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살짝 장난을 쳤다.


"떨어져라."


페더가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겠지. 거절하는 건 무시하고 칸에게 좀 더 파고 들었다. 칸은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담요 밖으로 나가긴 싫은지 수비에 점차 애를 먹기 시작했다.


"추워. 나 좀 녹여줘."

"차 한 잔 더 마셔라."

"나 싫어?"

"차 마시라고 했다."

"네 침이 더 따뜻할 것 같아."

"떨어지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페더랑 할 거 다 해봤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모르기는 씨발. 밴대질 존나게 했으면서."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라."


무표정인 채면 어떻게든 평정심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은 이런 반응이 너무 귀엽다.

무표정도 무표정이 아니다. 실은 표정에 다 드러난다.


이런 건 어떨까.


"나… 너는 괜찮아."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목에서 힘을 빼고, 눈과 입술에 옅은 수분을 머금고, 얼굴에 스토브 불빛을 적당히 두른 뒤, 속삭임에 요염함을 더한다.


"…할래?"


"이게 정말!"


드디어 칸이 담요 밖으로 나갔다.


얼마 만의 폭소일까? 항상 무표정이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거칠게 씩씩대고 있다.

장담컨대, 칸에게 이런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건 오르카에서 나뿐이다.


한참을 웃고 나서 담요를 던져줬다.


…그래. 웃음이 좀 필요하긴 했어.


"장난인 거 알 텐데도 과민반응이네? 어쨌든 고마워. 오랜만에 웃었어."


칸은 씩씩대기만 했다.


수색은 3일 더 이어졌다. 


의미있는 수확은, 없었다. 


"정말로 도망갔군."


오르카로 복귀해서, 오메가에 관련된 보고를 받은 칸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내가 맞췄다.


하나쯤은, 틀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다시 오르카에 돌아오고 첫날, 밤에 몰래 갑판으로 나와 담배를 피던 와중이었다.


"야호!"


내가 놀라기를 바라며 외친 것은 하르페이아였다. 어쩐지 한 번 겪었던 구도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세 번째 오르카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아마 그때는 스카이나이츠 녀석들의 공연이 끝난 직후였었나. 나는 담배 대신 이어폰에 몰두 중이었을 것이다.


신경 써 줄 겨를이 없어 연거푸 연기만 뱉어냈다. 

머쓱하다는 기색을 팍팍 내며, 하르페이아는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옆에 붙어 섰다.


"이, 인사 정도는 받아주면 안 될까?"


"무슨 용건?"


"딱히 용건이 있는 건 아닌데…"


하르페이아는 맥빠지는 웃음 소리를 냈다. 그것으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의도가 너무 티나서, 맞춰주기식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플레너리 오코너의 책이라도 읽는 듯한 표정이네…"


정말이지 하르페이아 다운 표현이다.


"이왕이면 라클로로 해주지 그래."


"앗! 위험한 관계! 읽어봤어!?"


여기서 대답하면, 하르페이아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만다고 판단해 말을 아꼈다. 아주 조금 맞춰준 것만으로 이렇게 화색이 돌다니, 세 번째 때도 그렇고, 얜 나한테 제법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단지 나같은 유형의 년을 가만두지 못하는 피곤한 년인지도.


"어때!? 재밌어!?"


"몰라. 읽다 말았어."


"왜!? 재미없어!? 그건 그렇고 어디서 어떻게 읽은 건데? 혹시 소실되지 않은 판본이 있는 거야!? 탐색 중에 도서관이 보이면 찾아봤는데 어디에도 없었어!"


"야."


"웅?"


웅? 


내가 눈가를 구긴 것도 모른 체하고 하르페이아는 철저히 계산된 귀여움을 미소에 섞었다.


"시끄러워 씨발년아. 밤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도 몰라?"


"너무해… 욕설은 안 좋아."


그러면 욕 처먹을 짓을 하지 말아야지.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 탐색으로 위장한 수색에서 별 소득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스트레스 때문에 갑판을 자주 찾게 된 나는, 밤마다 나를 노리고 찾아온 게 분명한 하르페이아에게 매번 시달리게 됐다. 안 그래도 소득이 없는 것 때문에 짜증이 차곡차곡 쌓여 갔는데, 오르카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때도 짜증이 나니 몇 번이고 화가 터졌다.


욕을 몇 번이나 먹고 때리기 직전까지 가도, 그저 그 때만 움츠러드는 척할 뿐, 하르페이아는 밤이면 밤마다 재잘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넌 떠들어라, 난 안 들을란다 식으로 나가도 소용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서는 갑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마주쳤다. 쓸데없이 자주 마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늦었었다. 설마하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찾아다니는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쫓아왔고, 어디에 있든 기어코 찾아내서 제멋대로 대화를 시도했다. 하나같이 나와의 대화를 상정해 준비한 티가 나는 주제들이었다. 


그런 년이다 보니 하르페이아의 합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칸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 심각했던 건 다른 년들과 마찬가지였지만, 혼자서 고심하는 듯 하더니 적극적으로 협조해오기 시작했다.


이 즈음에서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어서, 하루는 칸을 찾았다. 이 날도 칸의 지휘관실에 들르기 전까진 하르페이아에게 시달렸다.


지휘관실에서 칸은 페더와 함께 책상 위에 띄워 둔 패널에 열중하고 있었다. 스피커가 활성화된 패널에서는 아리아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보니?"


"멸망 전의 너."


"뭐?"


패널에 펼쳐진 것은 커다란 무대였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눈에 띄었고, 곧 그 여성이 아르망 추기경이란 걸 알았다.


"오페라다. 하바네라, 알고 있나."


"카르멘 1막의 아리아잖아."


"그래. 제법이군, 멸망 전의 너. 완전히 다른 녀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야."


"당연하지. 이건 내가 아니니까. 실력은 내 쪽이 위야."


"이쪽이 아르망 추기경이란 개체에 더 어울리는 모습 같은데."


"…기분, 좆같네. 너 오늘 마음에 안 들어."


칸은 패널을 닫고 내 쪽으로 고쳐 앉았다.


"용건은?"

"네 짹짹이는 밖으로 치우지?"

"페더도 듣는다. 말해."


하긴, 이젠 서로 알 건 다 안다. 들어도 딱히 상관 없다.


"이건 확실히 해두겠어. 만약 폐하를 살리는 대신 너희 모두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난 그렇게 할 거야. 같이 지내 봤으니 알겠지만, 난 거리낌 없어. 망설이지도 않아. 너희를 버려야 한다면 나는 지체없이 버릴 거야."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가."


"너도 그렇게 해. 폐하를 살리는 대신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날 죽여. 반드시. 거리끼지도 망설이지도 마."


"걱정 마라. 그런 걸 망설일 사이도 아니잖나."


이걸로 됐다.


"듬직해서 좋네."


"그렇다면 이 기회에 페더에게 사과라도 하도록. 서로 필요하다면 즉각 버릴 사이라 해도 일단은 동행 중이지. 풀 건 풀어야 해."


"대장님… 전 괜찮아요. 언제 적 이야기예요."


"그러게. 언제 적 이야기야."


"감정이란 건 쌓아두면 이상한 타이밍에 발목을 잡는 법이거든. 무엇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페더를 위해서야. 해라. 사과."


"저 진짜 괜찮아요. 기억도 안 난다니까요."


"미안. 됐어?"


하란다고 진짜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 눈앞에 두 개 있었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 용건을 꺼냈다.


"이거 너 가져."


책상 위에 cd플레이어를 툭 던졌다.


"사양하지. 딱히 들을 시간도 없고."


"너 비틀즈 좋아하잖아. 걔네도 여기에 담아뒀어."


"헛소리를…"  "비틀즈? 그게 뭐에요?"


"페더는 모르니? 네 대장님을 팬으로 둔 밴드야. 가장 좋아하는 곡은 Let It Be. 세 번째였나?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 또 뭐랬더라? 어떤 분야에서든 시대를 초월하는 게 있기 마련이랬나?"


"걸핏하면 멋대로 지어내는군. 게다가 누가 좋아한다는 건가. 그냥 듣기…"


얘 설마 페더 앞이라고 부끄러워하는 건가.


"편해서. 맞지? 어, 그러고 보니 그때는 칸, 네가 먼저 나한테 접근했었는데. 그 뿐이 아니라 내 말을 믿는다고 먼저 도왔었는데."


사악하게 웃어주자, 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알래스카를 떠나고 어느 날. 칸이 한밤중에 나를 불렀다. 끈덕진 하르페이아를 어쩔 수 없이 뒤꽁무니에 달고 찾아가자, 나한테 용건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함교 쪽이라고 했다.


"오셨어요? 그, 말로만 설명하는 건 어려우니까 조속히 이쪽으로 와주세요."


우리를 부른 건 유미다. 통신 및 보안을 맡고 있는 녀석 중 하나. 이전에는 내 부관이었던 그 녀석이 맞다.


여기서부터 흐름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무려 3개월만의 업로드입니다. 


이 3개월간 현생의 환경이 일변하는 대사건의 연속이었던 터라, 여유롭게 글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올해가 다 끝나가는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네요. 앞으로는 빨리빨리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죄송합니다. 기다린 분이야 없으셨겠지만.


어쨌든, 다시 결말까지 써보려고 합니다.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늘 모자란 글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