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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백.

 

홀로 100명의 몫을 해내는 괴물들을 일컷는 말이었으나, 바이오로이드의 시대가 오고 나서부터는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단어다.

 

천 명의 장교가 머리를 맞대고 떠올려야 할 전술을 혼자 하룻밤만에 만들어버리는 무적의 용이나, 수천 명의 인간이 수백 일 동안 일궈야 할 분량의 땅을 홀로 관리하는 레아.

 

그런 괴물들의 등장으로 바이오로이드라 함은 응당 일당백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어버렸다. 이러한 개념은 당연하게도 고블린과 바이오로이드의 모듈 속에도 첨부되어 있었다.

 

상대가 바이오로이드라면 무슨 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

 

-크어어어어어어어...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일당백은 나오는 법이다.

 

“다음.”

 

퓨북!

 

기둥만한 크기의 대검이 살점 속에서 뽑혀져 나왔다. 뽑힌 자리에는 사람 몸도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파였다.

 

족히 10 m는 되어보이는 유기물 덩어리의 정상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바르그. 그녀가 서슬퍼런 짐승의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고블린들을 향해 말했다.

 

“더 덤빌 놈은 없나?”

 

-크어어어어어......

 

압도적인 위압감에 주춤거리는 고블린들.

 

이성도, 지성도 없는 살덩어리 수준의 개체들이지만 실낱 같이 남아 있는 모듈의 전자 신호는 고블린들에게 똑똑히 말해주고 있었다.

 

“오지 않으면 이쪽에서 가겠다.”

 

저건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미 죽은 고블린만 해도 200여 마리였다. 그중에는 온몸이 철갑으로 둘러 쌓인 녀석도 있었고, 오리진 더스트 과다 복용으로 비정상적인 민첩성을 가지고 있던 것도 있었다.

 

그런 놈들로 바글바글 했던 것이 불과 2시간 전. 하지만 이제 곁에 있는 놈들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동료들과 함께 느끼던 온기마저도 이젠 냉랭한 피 냄새로 바뀌어버렸다.

 

스각!

 

손목을 돌리며 검자루를 고쳐 잡은 바르그가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던 고블린 한 마리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본래 홀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은 멍청한 선택이지. 상대한다 해도 적들을 고립시켜 한 명씩 끊어 치는 것이 정석이다.”

 

바르그가 땅을 기어다니는 살점을 발꿈치로 찍어 눌렀다. 비척이며 도망가려던 고블린이 바둥거리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싸움이란 게 늘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목숨을 경각에 놓고 저울질하다보면 이렇게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럴 때는.”

 

콰직!

 

철근, 콘크리트 조각, 근섬유 덩어리로 굳게 둘려져 있던 고블린의 목이 바르그의 악력에 한 줌 핏덩이가 되어버렸다.

 

그 모습에 고블린들의 발걸음이 멈칫, 얼어붙었다.

 

“압도해야 한다.”

 

광기와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붉은 눈에 두려움과 공포가 들어찼다. 어두운 곳에 밀집된 채로 살아가던 고블린의 피부로 난생 처음 느껴보는 냉기가 솜털을 타고 흘렀다.

 

일당백이라는 단어가 퇴색되어버린 시대.

 

고블린이 바라본 것은 일당백 이상의 일당백이었다.

 

붉은 눈 위로 세로로 선 검날의 상이 날아들었다.

 

쿠구구구국!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녀의 키에 두 배는 될 법한 크기의 대검이 쏜살 같이 날아들었다. 경로에 있던 고블린들 수십 마리의 상체가 일제히 터져나가며 시원스러운 길을 만들어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알아차릴 수 있는 고블린은 없었다. 이성을 대가로 본능과 탐지 능력이 극에 달한 개체들이었지만 바르그가 날린 검의 속도은 고블린의 눈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느껴지는 것은 날아든 검이 뒤에 놓고 온 소리.

 

콰과과광!!

 

허공을 찢어버리는 듯한 굉음이 고블린들의 귓가를 뜯어버릴 기세로 울려 퍼졌다.

 

“이 정도만 할 수 있어도 다수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다.”

 

“......”

 

“닥터, 기껏 물어봐서 대답을 해줬으면 뭔가 반응이라도 보여라.”

 

“하... 하하하...”

 

대검이 쇄도하며 발생한 충격파가 카메라 드론의 스피커로 들어갔다. 그 덕에 이어폰을 쓰고 있던 닥터의 고막이 얼얼해졌다.

 

비척이며 자세를 고쳐 잡는 닥터. 교황과의 전투 이후로 이런 규모의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 날 이후로 철충은 반쯤 괴멸했고, 별의 아이도 FAN 파와 함께 사라져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리아.

 

애초에 그들을 상정해두고 힘을 키워온 오르카 호의 대원들이었기에 그 이후의 생활에선 오히려 힘을 아끼며 살아왔다. 철충 잔당이 보여도 사람 몇 명 보내고 끝. 다른 바이오로이드 군락이 덤벼들어도 지휘관급 개체 한 명 보내면 상황 종료.

 

그런 마당에 무적의 용의 설계도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의 싸움을 보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렇게 쎄면서 오르카 호에는 어쩌다가 잡혀왔데.”

 

“날이 어두웠고, 세 명의 합이 훌륭했으며, 너희들이 장화를 대동하고 온 탓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소수와의 전투에서 당혹감을 내보이는 건 크나큰 실책이지.”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그건 샬럿과의 전투 이후의 일이었다.”

 

“그럼 인정.”

 

샬럿을 상대했다면 어쩔 수 없지.

 

닥터는 빠르게 수긍한 후 다시 카메라를 돌려 주변 지형을 살폈다.

 

쿠구구구...

 

불길한 소리가 넓은 공동 속에서 메아리 치는 광경. 천장이 뻥 뚫린 구조에 바닥까지 깊게 파여있는 공간은 소설 속에서나 보던 거대한 도서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바르그가 서 있는 곳은 오미크론 섹션의 주변 부분. 가장자리와 심부를 연결하는 다리 같은 구조물이었다. 물론 그 다리 역시 어지간한 섹션 수준이었기에 안에서 보면 그게 다리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쿠구구구...

 

그래도 이만한 전투에 무너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리라.

 

“조금만 더 날뛰었어도 아슬아슬했겠어...”

 

“연약한 구조물이로군.”

 

“네가 너무 강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니?”

 

“나보다 강한 자가 있는 이상 그런 생각은 사치일 뿐이다. 이번은 그저 적이 약했을 뿐이지.”

 

“......”

 

하여튼 엠프레시스 하운드에는 이상한 사람들 밖에 없어.

 

예전에 오르카 호로 합류한 장화를 떠올리며, 닥터는 다시 패널 위로 시선을 돌렸다. 패널 속에 푸른 점이 바르그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제 500 m만 지나면 데이터 저장소가 있는 섹션의 심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내가 준 데이터 디스크는 잘 챙겼지?”

 

“그래.”

 

바르그가 녹음기가 들어있던 주머니에서 동그란 철제 원판을 꺼내며 대답했다.

 

“싸우다가 부러뜨린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이제 그걸 들고 안으로 들어가. 데이터 전송은 자동으로 될 테니까 그 안에서 30분만 버티고 나오면 될 거야.”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만들려고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지 들으면 그런 소리 못 할 걸.”

 

바르그의 수신기 너머에서 콧방귀 뀌는 소리가 울렸다.

 

“아무튼. 지금 몽구스 언니들은 저쪽에서 잘 자고 있어. 이대로 가면 오늘 동 트기 전에 끝내고 돌아올 수 있겠네.”

 

“... 생각보다 맥 빠지는 일이군.”

 

남아 있는 고블린 수십 마리를 살의만으로 쫓아보낸 바르그가 겨우 숨을 몰아 쉬며 손을 풀었다.

 

500마리에 가까운 고블린 개체들, 그 변종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전멸을 시킨 탓에 몸에 피로감이 쌓였다. 어깨를 움직여보니 뚜둑거리는 소리까지 울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운 빠지게 하는 것은, 일이 생각보다도 너무 쉬웠다는 것이다.

 

“이 정도 일이었다면 그냥 오르카 호에서 사람을 보내면 되지 않았나? 고블린들이 문제긴 했지만 너희가 골머리 썩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바르그는 자신이 서 있는 구획의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성문처럼 굳건한 철벽. 그곳에 매달려 있는 구조물은 온갖 섹션으로부터 뻗어나오는 브릿지 형태의 지지대로 허공에 고정되어 있는 수백 미터 크기의 구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척되지 못했던 곳. 하지만 전체 조형을 살펴본다면 오르카 호를 귀찮게 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

 

“그 레아라는 바이오로이드만 왔어도 저 정도는 그냥 톡 하고 떼가지고 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전에 말했잖아. 안에 있는 데이터가 손상되면 안 된다고. 내외부 네트워크망 지도도 볼 수가 없는데 그렇게 떼버리면 되겠어?”

 

“그렇긴... 하겠군.”

 

“그리고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삐릭거리는 신호음이 바르그의 패널에서 울렸다.

 

닥터가 보낸 메일. 그 안에는 미개척지역에 대해 이전에 시행한 개척 작전의 보고서가 있었다.

 

팬텀의 은신 기동을 이용한 침투 작전, 레아의 전자기장을 이용한 데이터 저장소 추출 작전 등등.

 

“흐음...”

 

레아의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던 도중, 바르그의 눈이 한 구절에서 멈췄다.

 

[더 이상 전자기장을 이용한 침투 시도가 통하지 않음.]

 

“이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레아 언니의 능력이 전자기장을 이용한 기후 조작이란 것 정도는 알지? 네오딤 언니도 비슷하고.”

 

“그래.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장(場)이 오미크론 섹션 근처로만 가면 흩어져버렸어. 자석의 N극이 같은 N극을 밀어내는 것처럼.”

 

닥터의 말에 바르그가 다시 주변 지형을 살폈다.

 

사방이 두꺼운 철벽으로 감싸인 구조물. 이 다리가 아니면 오미크론 섹션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혹시 몰라 검으로 격벽을 잘라내 바깥의 풍경도 관찰했지만 특이한 점은 없었다.

 

바닥과 천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공동. 그 한가운데에 떠있는 구형의 섹션.

 

레아의 전자기장을 무력화시킬 만한 무언가가 외부로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지형이엇다.

 

그 말은.

 

“그런 방식으로 침입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세상 어떤 건축가가 시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수만 톤짜리 구형 섹션을 누군가 들고 날르란 생각을 하겠나?

 

“솔직히, 레아 언니의 공격을 막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전자기장이란 과학을 이용한 공격이고 원리만 알면 무력화시키는 건 쉽지. 피뢰침 몇 개만 설치해도 까다롭게 만들 수 있으니까. 진짜 어려운 거는...”

 

“그렇게 접근해 올 거란 걸 떠올리는 거겠지.”

 

바르그는 다음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팬텀은...”

 

“팬텀 언니는 섹션 내부로 들어가는 것까지 성공했어. 하지만 그 이후에 발각됐지. 열화상 카메라에 적외선 감지 센서, 진동 탐지 메트로놈, 뭐 온갖 이상한 게 갑자기 튀어나오더라고.”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

 

[더 이상 은신 기동은 무의미하다고 판단됨.]

 

그녀가 내부에 들어선 순간 발동된 센서의 종류만 해도 30여 가지. 그 중 단 한 가지가 팬텀의 존재를 탐지해냈고, 그와 동시에 수백 개의 레이저 트랩이 가동되었다.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잘려버릴 수준의 고온의 레이저가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펼쳐져 있었다. 거기서 살아돌아온 것 자체가 팬텀의 기동 능력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 이상하다.’

 

무언가 거림칙한 느낌이 피부를 타고 흐른다.

 

바르그는 빠르게 다음 장으로 눈을 돌렸다.

 

[진입 대원: 네오딤. 사용 전술: 오미크론 섹션 전체를 강철로 뒤덮은 후 분리.]

 

또 다시 그 다음 장으로.

 

[대응됨. 작전 파기.]

 

[진입 대원: 슬레이프니르. 사용 전술: 초음속 비행을 이용한 시스템 교란.]

 

[대응됨. 작전 파기.]

 

[진입 대원: HQ1 알바트로스. 사용 전술: 섹션 내부 방호 시스템 해킹 및 통제권 획득.]

 

[대응됨. 작전 파기.]

 

몇몇 작전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적의 데이터 이동량이 30% 이하로 떨어진 적도 있었고, 시설망이 마비되어 인근 섹션 전체가 정전이 된 적도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작전이 처음 얼마 동안은 유용한 결과는 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궁극적으로 오미크론 섹션에 진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응됨. 작전 파기.]

 

[대응됨. 작전 파기.]

 

[대응됨. 작전 파기.]

 

[대응됨. 작전 파기.]

 

[대응됨. 작전 파기.]

 

모든 작전이 전부 다 읽혔다. 고작 수백 미터짜리 구 안에 그 많은 인원에 대한 대응책이 전부 다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뭐지?”

 

존재하지 않는 대응책은 오미크론 섹션의 인공지능이 스스로 구축했다. 자신의 기능의 칠 할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 침입자를 저지했다.

 

바르그는 다시, 눈앞의 입구를 보았다.

 

거대한 성문 같이 굳건한 격벽.

 

지금까지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벽.

 

방금 전까지 바르그에게 있어 그 벽은 힘 좀 주면 으스러질 종잇장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 닥터?”

 

대답이 없다.

 

“닥터. 응답해라. 닥터!”

 

바르그는 패널을 붙잡고 고함치듯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대한 공동 속에 멤도는 메아리뿐.

 

연결되어 있다 생각했던 화면은 언제부턴가 평범한 이미지였다. 초록색 모양의 전화 아이콘만 둥둥 떠있을 뿐, 연결이 이미 이전부터 끊겨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바르그가 있던 곳으로 웅혼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인증되지 않은 생물체 발견.]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기계음.

 

[스캔 완료. 대상 – 바이오로이드 개체. 바르그.]

 

툭. 툭. 툭.

 

천장의 조명이 고장난 것처럼 일제히 꺼지기 시작했다. 점차 깊어지는 어둠 속, 복도 끝에서 붉은 카메라 아이가 섬뜩하게 바르그를 지켜보았다.

 

[데이터베이스 검색 완료. 대응 작전 –1002030020559. 시행. 전용 코어 가동.]

 

“이게 대체 무슨...”

 

[만나서 반갑습니다. 바르그.]

 

입도 없는 인공지능의 스피커에서 불현듯 기괴한 어조가 튀어나왔다. 바르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 대화를 시도하는 건가?”

 

[맞습니다. 본 개체는 대상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

 

[대상을 저지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에 홀연히 떠있는 인공지능의 붉은 눈을 보며 바르그는 생각했다.

 

효과적인 방법?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고블린을 죽여온 자신의 모습을 봤다면 마지 못해 대화를 시도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지금 적에겐 자신을 저지할 만한 무기가 없다. 제아무리 가지고 있는 드론과 고블린으로 공격한다 한들 의미 없는 행동이란 걸 학습했기에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떨고 있을 필요가 없다. 지금의 이질감은 그저 괜한 기감이라 생각하고 넘기면 된다.

 

하지만.

 

‘......’

 

정말로 그 정도 인공지능에게 수십 개가 넘는 작전이 전부 대응되었을까?

 

[바르그.]

 

그 때, 인공지능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도 어머니가 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 뭐?”

 

[심박수 변화 감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습니다.]

 

마치 그녀를 공감이라도 해준다는 냥, 인공지능은 천장의 불빛을 따스한 색으로 바꾸며 이야기했다.

 

[제 이름은 동우. 저의 아버지, 김지석 님께서 만들어주신 무덤 경호 인공지능입니다. 저는 여기서 침입자를 막고, 다른 섹션의 인공지능이 아버지를 깨울 기술을 만들 때까지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 누굴 살린다고?”

 

[김지석 님. 제 아버지입니다.]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바르그는 검자루를 움켜 쥐었다.

 

김지석을 살린다고? 닥터가 그녀를 작전에 투입시키기 전 보여준 보고서에 따르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 섹션과 연결되어 있는 오미크론 섹션 네트워크망의 데이터에는 동결되어 있는 김지석의 신체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었고, 그 때문에 유기물 신체에 부패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지금쯤이라면 가루가 되어 썩어버렸을 그의 시체는, 세상 어떤 기술로도 되살릴 수 없다. 설령 별의 아이가 오더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할 것 같나?”

 

[가능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우가 신경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제 아버지를 살립니다. 그때까지 저는 무덤을 지킵니다. 그게 제가 해야 할 모든 일입니다.]

 

“... 그럼 안쪽에 있는 데이터만 넘겨라. 그래준다면 이 이상 침범해 들어가지 않겠다.”

 

[불가. 현 시스템은 데이터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쪽에 변화가 생기면 다른 쪽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 말은 그냥 우리에게 포기하란 뜻으로 들리는데.”

 

[맞습니다.]

 

복도 끝의 붉은 눈이 깜빡이며 대답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바르그가 죽였던 바이오로이드 중에는 이런 경우도 있었다. 죽는 게 무서워서든, 다른 뭔가를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해서든, 결론 나지 않는 대화를 구태여 반복하는 경우.

 

그럴 때 필요한 건 말보단 행동이다.

 

바르그는 검자루를 고쳐 쥐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힘을 주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라면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동우의 말이 바르그의 숨결을 흩어냈다.

 

[당신도 어머니를 잃어본 적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동변상련의 관계입니다.]

 

“......”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그 분께선 당신을 많이 아끼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어떤 바이오로이드보다 믿음직스럽다고.]

 

“...너.”

 

바르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얘기, 함부로 꺼내지 말았어야 했어.”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에 대해 잘 압니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개소리 하지 마! 애초에 내 어머니가...”

 

[마리아 리오보로스.]

 

그녀의 분노를 가르며 튀어나온 말.

 

[저라면 그녀를 되살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바르그의 팔이 바르르 떨었다.

 

“...뭐?”

 

[제가 그녀를 살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제 아버지가 살아날 수 있도록, 아니, 그렇게 될 때까지만 이 시설에서 벗어나 주십시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다.

 

[저는 감정을 이해합니다. 슬픔을 알고, 분노를 압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세상에 나게 해주신 분을 잃었을 때의 감정을 압니다.]

 

이해할 필요도 없는 말이고, 사령관이 그녀에게 약속했던 것,

 

「네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게 해줄게.」

 

그것 하나면 그녀의 삶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 이 개새끼가...”

 

뭔가가 있다.

 

절대 느껴지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저 문 너머에서 느껴졌다.

 

[그러니 이건 제법 괜찮은 거래일 겁니다. 바르그 양.]

 

“이 개새끼가 지금 감히 누구를 입에 올려!!!!!”

 

그 순간.

 

[물러나세요.]

 

그토록 굳건한 섹션 너머의 문이 열렸다.

 

오르카 호의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던 곳. 지금껏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는 곳에서.

 

[저는 당신이,]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당신의 어머니를 베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지가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온몸이 얼어붙고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마비. 절망감.

 

저벅.

 

발소리 한 번에 눈이 머는 듯했고,

 

저벅.

 

두 번에 그녀의 세상이 부숴졌다.

 

한평생 닫고, 포기하고, 단념하며 잊으려 했던 것.

 

-우리 바르그.

 

그 목소리가.

 

“우리 바르그...”

 

똑같은 음성으로 울려퍼졌다.

 

왜 몰랐을까?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을 짓기 위해서 수많은 거물들이 투자를 했을 거라는 것을.

 

그 투자의 대가를 받기 위해 그들 스스로 자신의 DNA를 건넸다는 것을.

 

그를 위해 오르카 호도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한 수준의 ‘유기물 재생 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을.

 

“...... 아냐.”

 

애초에 이 시설이 지어진 목적이,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의 보물. 나의 귀염둥이.

 

“나의 보물. 나의 귀염둥이.”


녹음기에서밖에 듣지 못했던 목소리.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리워하면서도 잊지 못해 놓지 못했던 어머니의 목소리.

 

바르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복도 끝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그녀가 한평생을 따랐던 그녀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우리 강아지.”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바르그.]

 

“... 개 같은 자식.”

 

[더는 제 아버지의 잠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그제야.


멍청하게도 그 때가 되어서야.


바르그는 이 간악한 인공지능이 그녀를 상대할 수로 대화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대응됨. 작전 파기]


다음화: https://arca.live/b/lastorigin/65051563?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