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아침이 밝았다. 미스 세이프티가 감방 문을 열고 나를 수감자용 식당으로 인도했다.


"금일 점호는 생략하겠습니다. ...어흠. 그,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한숨도 못잤지."


"그렇, 군요..." 


피곤한 몸을 끌고 식당에 들어서자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다. 수감자도 교도관도 모두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면서 이쪽을 힐끔거리거나 대놓고 떠드는 대신 서로 귓속말로 수근거리고 있었다.


사실상 이 교도소에서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니까 주목받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다들 내가 그 소식에 관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교도관들은 혹여나 내가 난동부리지 않을까 싶어서인지 평소와는 달리 식당 안에 펍헤드를 배치해놨다.


그렇게 쳐다봐도 뭐 재미난 반응을 보여줄 생각은 없다. 어젯밤에 잠을 못자서 피곤하거든. 그저 조용히 줄을 서고, 배식창구에서 밥을 받고, 식탁에 앉아 버터 발라진 식빵을 깨작거리는 게 다였다. 누구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으며, 또 누구는 내가 체념한거 같다고 쑥덕대고 있었다.


체념하지 않았다. 아직은.

살기 위해선 탈옥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에겐 탈옥할 힘도 능력도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밤에 몰래 상태창을 외쳐봤지만 역시 아무 일도 안일어났다. 이세계 특전 왜 없냐고 시발...


다른 죄수들이랑 손잡고 다같이 탈옥하는건 어떨까 생각해봤지만 역시 턱도 없었다. 이 곳의 수감자들은 모두 사령관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다. 괜히 탈옥하려 들었다간 되려 사령관한테 밉보일텐데 할 리가 없다. 가끔 잡담 나누면서 조금 친해진 애들은 몇몇 있어도 사령관을 버리고 날 따라올 정도로 친한 애는 없다. 멋모르고 같이 탈옥하자고 해봤자 교도관한테 꼰질러서 지 형량 줄이는 제물로 쓰겠지. 


가만... 한 명 있잖아. 사령관을 따르지 않는 바이오로이드가. 


그 펙스의 첩자. 


정말로 있는지조차 불명이지만 만약 있다면, 첩자짓을 할 정도로 능력이 있고 사령관한테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은 자가 이 안에 있다면, 그의 손을 빌려서 여기서 탈옥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펙첩이 탈옥할 때 나도 끼워준다는 보장이 없지만, 나에게 있어선 그게 제일 가능성 있는 탈옥 방법이다.


헌데 어떻게 설득할 지는 둘째치고, 그 펙첩을 어디에서 찾나. 일반 수감자 구역에도 없고, 독방 구역에도 없다. 그렇다면 혹시, 수감자를 가두는 제 3의 구역이 있는 게 아닐까? ...아스널이 말한 격리구역은 정말 비어있을까?


나는 격리구역으로 통하는 문을 슬쩍 쳐다봤다. 오늘도 어김없이 켈베로스가 그 문을 지키고 있었다. 펙첩이 있을만한 장소는 저기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교도관한테 가서 대놓고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아스널한테 쌰바쌰바한다 쳐도 아스널이랑 같이 들어가게 되겠지, 나 혼자 들어가서 펙첩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탈옥을 성사시키기 위한 퍼즐 조각이 부족하다. 식판 앞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결국 식빵 한 쪽만 먹어치우고선 잔반을 버리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


"이뱀, 이뱀! 이것 좀 보십셔! 쏘야임다! 저 감옥밥으로 쏘야 나온 건 처음봄다!"


"으, 응. 그러게..."


점심시간에 다시 식당으로 가보니 아침보다 떠들썩해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뭐 때문에 저러는 건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배식 창구의 포티아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내 식판 위에 담아준 소시지 야채볶음,  줄여서 쏘야.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걸 들어보니 비록 가공육이더라도 감옥에서 육류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인 듯 하다. 여긴 px같은 것도 없어서 군것질도 불가능했던 공간이라 수감자들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왜 오늘 갑자기 죄수 식단에 이 소시지가 나타난 걸까? 오르카호에서의 소완이 총괄하는 식단에 비하면 별 거 아니긴 해도 이곳에 있어선 큰 변화였다. 브라우니는 마냥 좋아하며 소시지만 쏙쏙 골라 입안에 집어넣고있는 반면 이프리트는 뭔가 눈치챈건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도로 식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형수에게 주는 최후의 만찬처럼, 이 교도소의 취사장인 포티아들이 건네는 작은 위로였다. 내가 모범수까진 아니더라도 그동안 얌전히 지내며 무해한 인간처럼 보인 덕인지, 감히 사령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어도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유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포티아가 담아준 소박한 선의를 천천히 곱씹었다. 맛있네. 기운이 조금 난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곳 교도관들도 내게 조금이나마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사소한 부탁 정도는 들어줄 지도 모른다. 남의 선의를 이용하는 건 옳지 못하지만, 내가 지금 옳고그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점심시간이 끝나자 작업장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고 수감자들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빠져나갔다. 일부러 감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식당에 죽치고 앉아있던 나는 분위기를 보다가 그 행렬에 끼어들었다. 몰래 숨어들어갈 생각은 없다. 보란듯이 문가에 서있는 세이프티를 향해 걸어가자 그녀는 무슨 용건이냐는 듯한 눈치로 나를 쳐다봤다.


"인간분, 방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은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 그건 알아. 하지만... 조만간 동면당할텐데 남은 인생마저 시체처럼 살고싶진 않아. 벌써부터 가만히 누워있을 바에야 뭐라도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그래. 어떻게든 안될까?"


동면포드에 들어가면 관에 누운 것처럼 굉장히 오랫동안 쉬게 될 테니까. 세이프티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말하더니 이내 무전기를 도로 내려놓고 내게 답을 들려줬다.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안에 들어가셔도 됩니다. 일하는 방법은 주변의 수감자들이 알려줄 겁니다."


"...고마워."


그렇게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작업장에 들어오자 게임 속 기지 시설에서 봤던 기계가 종류별로 줄줄이 배치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부품, 영양, 전력같은 자원을 생산하는 기계와 합성수지, 도료, 철재같은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기계, 총 6종류였다. 


사람 수에 비해 기계가 더 많은 모양인지 남는 기계가 좀 있었다. 불이 안들어온 기계 앞에 가서 자리잡은 나는 옆에서 기계를 돌리고있는 이프리트한테 일하는 방법이나 요령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맡게 된 기계는 전력 생산 설비였다.



"어차피 일은 다 기계가 알아서 하니까, 우린 제때 버튼만 순서대로 누르고 레버 내리고 하면 돼. 배터리 다 채워지면 꺼내서 뒤에 운반용 수레에 두고..."


나는 전지가 충전되는 걸 잠깐 지켜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감자들끼리 일하면서 떠들기도 하고 교도관들은 딱히 그것에 관해 터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널널한 분위기여서 다행이다, 막 두리번거려도 덜 수상하게 보일테니까.


나는 정말로 건전하게 일만 하려고 온 건 아니다. 이 작업장에서 탈출구라던가, 탈옥에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못찾았다. 문이란 문은 전부 옆에 교도관이 서있었다. 내게 남은 건 이 자동차 배터리만한 크기의 전지였다. 물론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전지 하나 몰래 가져간다고 치면 뭘 할 수나 있나? ...폭탄? 전지에 충격이 가해지면 터질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충격이래봤자 내가 전지를 주먹으로 때리거나 땅에 집어던지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거다. 하다못해 프레스기나 분쇄기 같은 기계는 있어야... 




...아니지, 여기에 있잖아. 건축자재 생산설비엔 단단한 원자재를 잘게 부수는 용도의 분쇄기가 딸려있다. 나는 주변을 한번 더 둘러봤다. 수감자들도 교도관들도 아침에 비해 나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남은 건 옆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이프리트 뿐인데...


"간수님!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됩니까?"


"다녀오세요."


마침 이프리트가 화장실 간답시고 자리를 비웠다. 이로서 가장 가까이서 날 지켜볼 수 있는 애가 사라졌다. 머리에 다른 대책이 떠오르는 것도 아닌지라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나는 분쇄기를 작동시킨 뒤 그 위에 전지를 던져넣었다.


'퍼엉-!'


전지가 폭발하면서 생긴 큰 폭발음으로 인해 모두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모았다. 불 붙은 분쇄기 위로 새까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 나도 몰라... 기계가 멋대로 터졌던데?"


사디어스가 웅성거리는 수감자들 사이를 비집고 달려왔다. 실내라서 연기가 밖으로 빠지지 못하고 사방으로 퍼지며 시야를 가리자 그 광경을 본 사디어스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작업 중단! 너희들, 구경하지 말고 저리 떨어져! 세이프티, 창문 전부 열어! 켈베로스는 소화기 가져오고!"


사디어스의 호통에 수감자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나는 한편 교도소 직원들이 불을 끄러 우르르 몰려들었다. 수감자도 교도관도 전부 저기로 시선이 쏠렸고, 격리구역 문 앞을 지키던 켈베로스도 같이 불 끄려고 자리를 비웠다. 나는 슬그머니 구경꾼들 사이를 빠져나와 격리구역으로 달려갔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내 발소리가 묻힌데다 뇌파 차단 구속구 덕에 저 바이오로이드들은 내가 사라지는 걸 느끼지도 못했다.


문을 열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실이 나타났다. 지하 1층에 도착하니 벽을 따라 여러개의 문이 달려있는 공간이 나왔다. 내가 수감되었던 독방 구역과 비슷한 느낌이다. 차이점은, 한쪽 면이 철창으로 되어 안을 훤히 볼 수 있었던 내 독방과는 달리 여긴 문도 벽도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문 밑에 식기를 넣을 수 있도록 작은 틈이 난 게 다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고리를 잡아 돌려보니 안잠궈놨던 모양인지 그냥 열렸다. 방 안은 창문마저 없는 밀폐된 구조였다. 안 쓰는 듯한 가구가 쌓여있는 걸로 봐선 창고로 쓰는 모양이다.


"여긴 없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문을 하나씩 열어봤다. 두 번째 방도 빈 방.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방도 빈 방. 문이 허무하게 열리고 텅 빈 안쪽이 드러날 때마다 초조해져갔다. 허탕친건가? 그 펙첩은 격리구역에 갇힌 게 아니었나?


"제발, 제발..."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전부 꽝. 마지막으로 복도 맨 끝의 딱 하나 남은 열 번째 문. 여기까지 오니 초조함은 허탈함으로 변했다. 나는 역시 틀린건가 하고 생각하며 힘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잠시 문을 쳐다보다가 이번엔 손에 힘을 실어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 했다. 문고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잠겨져있다.


나는 설마하는 마음과 함께 문을 두들겼다.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에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말을 걸었다.


"이봐...! 그 안에 있지?"


"... ... ...누구야?"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 목소리... 그 사령관 목소리는 아니야. 뇌파도 없고... 남자 바이오로이드가 있다는 말은 못들어봤는데."


서로 얼굴조차 볼 수 없지만 서로가 이 문 너머에 있다는 것 만은 알 수 있다. 여자 목소리인걸로 보아 바이오로이드인 건 확실한데 목소리가 쉬어서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침착하게 보이려 애를 쓰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니... 난 인간이야. 사정이 있어서 내 뇌파는 못느끼겠지만."


"...인간이 둘이나 있었다고?"


"그보다 너. 펙스에서 왔다가 잡혔다는 첩자, 그거 너 맞지?"


"몰라서 물어? ...너, 간수가 아니구나.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긴장해서 그런지 목이 바싹 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여지껏 입 안에 숨겨놨던 말을 내뱉었다. 


"...함께 탈옥할 사람을 찾고 있어."



사형수한테 동정심 들어서 좀 풀어줬더니 뒤통수 친 건에 대하여-


펙첩의 정체는 과연 누굴까용

미리 말해두자면 바르그는 아님. 펙스제 바이오로이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