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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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붕이는 넋을 놓고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여 씨발......



아니, 이 씨발놈은 사람을 쳐 불러놓고서 도대체 언제 오는거야!!!


....이 새끼...... 사실은 까먹었다던가... 그런건 아니겠지....



그냥, 아까 결심한대로 진작에 바다로 뛰어내려서 튀었으면 애저녁에 수km는 여기서 멀어졌을 것이다.


......나도, 아예 이참에 그냥 튀어...?



아냐아냐... 그러다가 소완 그 새끼랑 마주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거고...


.........



...슬슬 시간대가 시간인지라, 나도 이제 배가 고파지긴 했는데...


......밥이 문제가 아니지... 지금은 말이야...



제일 꺼려지고, 제일 역겨웠던 새끼와의 대면이 남아 있으니까.

우선은 이 씨발새끼의 의중을 파악하는것이 급선무이다.


아오...!!! 올거면 좀 미리 쳐 올라와 있던가!!!

이럴거면 뭐하러 부른거야!!!



괜히 올라와서 사람 기분만 잡쳤잖아!!!


....뭐, 약속시간 정도는 가뿐히 어길수 있는 위치에 있으시다... 이런 거라도 티내고 싶으셨나?



그렇다면 아주 대성공이네.

그만큼 니 새끼 개념이 모친 출타한 병신이라는 증명만 더욱 확실해졌잖아?



"......"



그 와중에도, 라붕이의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경치는... 소완의 말마따나 너무나도 아름답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예쁘긴 하네..."



이건... 그래.

이전에 스틸라인 애들이랑 함께 놀러갔을때 보았던 그 경치와도 같은 느낌.



"........."



라붕이가 바라 마지않던 자유가 펼쳐진 세상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눈치볼 필요도, 긴장을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나 자신의 인생을 자유로이 살아갈수 있는 길.



"......슬슬,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할 시기가 되었어."



이곳에서 나갈 준비.

늦든 빠르든... 이곳에서 나간다.

그걸 위해서, 머릿속에서 그리기만 했던것을 이제는 현실에서 실천해야 한다.

.....설령.... 신체 재건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곳에서 나가는것 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신체 재건이라는 목표를 이루어 내지 못하게 되는 최악의 경우가 찾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없으면 없는대로.... 이루지 못한다면 이루지 못하는대로.... 상관없다 이 말이야."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새끼들의 나와바리에서 뒤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인생이고 삶이니, 어디에서 어떤식으로 죽든.... 그것을 정하는것은 오직 나의 것이다.



너희같은 쓰레기들이 함부로 간섭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어서 올라오시라고. 위대하신 왕 면상 한번정도 알현해 드리는것 정돈... 까짓거 해드릴테니.'



이젠 어찌 되든 상관없다.

어떤식으로 흘러가든 좆도 의미없다.

그냥, 어서 기어올라 오기나 하라고.


그저 기디린다.

하염없이, 하늘이나 바라보면서 기다렸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그 새끼는 찾아오겠지.

그러니.... 그저 멍하니 기다렸다.


어차피, 한두번 보고 그 이후엔 평생... 면상조차 거들떠볼 일 없을테니까.


























헉헉헉헉헉......!!



사령관은 미친듯이 뜀박음질하며 복도를 가르고 있었다.


대체 뭐하는 짓거리야....!! 오늘은 소완이 갑판에서 외식할거라고 말 다 해줬었잖아...!! 근데 왜 버릇처럼 간부식당으로 가서 라붕씨를 찾고 있냐고......!!



한번에 너무 많은 업무를 해결하느라 과부하라도 온걸까.

분명 머리는 갑판으로 가자고 되내이고 있었는데... 다리는 버릇처럼 늘 가던 간부식당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라붕씨 먼저 내려가 버린건 아니겠지....



아냐아냐아냐아냐...!!!

기껏해야 5분정도 일테니, 당장 달려가면 맞출수는 있을터!


으으윽....! 내가 약속을 잡아놓고 내 쪽에서 지각을 해버리다니... 솔직히, 내가 봐도 첫인상으로선 좋지 않은 모습이야...



그래도, 곧 있으면 상층 갑판 입구다!


......후우우우.........



미친듯이 내달린 덕분에 금방 갑판 입구에 도착할수 있었다.


....후우..... 다행이 크게 늦진 않았네.



크게 소리가 나지않도록, 살짝만 고개를 들이밀어 라붕이가 앉아있을 테이블을 빼꼼히 쳐다보았다.





"............."




다행이... 안내려가고 잘 기다려줬네.... 하하..



..........


....좋아.



이젠, 가야한다.

모든것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이야기 하자.

라붕씨가 품고 있는 아픔들, 

그간 여기서 지내오면서 힘들어 했던 것들.


그리고... 그가 오해하고 있는것들 전부.


...내가, 도와줄수 있는게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그도 진심으로 날 바라봐주길.

의심과 오해로 이루어진 가면이 아닌, 진짜 그의 모습과 속마음을 드러내주길.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며, 사령관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음?'



인기척. 숫자는..... 1명.


'.....드디어..... 온건가.'



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기다렸다.


'어디.... 무슨말을 할지 들어보기나 하자고.'



뭔 개소리를 싸재끼는지.

뭔 병신같은 소리로 날 구워삶으려 할지.

어떤 지랄맞은 소리로 날 떠보려고 할지.









"...라붕씨?"



사령관은 미동없이 의자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고 있던 라붕이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오셨습니까. 사령관님.



라붕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령관을 향해 돌아보며 고개를 숙이려고 자세를 잡았다.


아아아...!!! 라붕씨 라붕씨...!


...네?



의아하게 사령관을 쳐다보는 라붕이는 갑자기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이 참...! 우리 사이에 뭐하러 굳이 그런.... 그..... 딱딱하게 인사하고 그래~! 하하하....


'..........'


그..... 오래 기다렸지? 씻고 돌아가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업무량이 확 늘어나서 말이야.... 그러다보니 약속시간에 살짝 늦어버렸네. 하하하.....


....너무 마음쓰실 필요 없습니다 사령관님.


아....응...?



본인이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차갑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사령관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라붕이를 바라보았다.


사령관님꼐서는, 제가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많은 업무를 소화하고 계시겠죠. 그러니.... 굳이 그것때문에 저 하나에게 그렇게까지 미안해 하실필요는 없습니다.


..어...그게.....


오히려, 저 때문에 이렇게 무리하게 시간을 내도록 만들어버려서, 괜히 죄송스런 마음만이 드는군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목례로 사과를 건네는 라붕이의 모습에 사령관은 크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아....!! 아냐아냐아냐...!!! 라붕씨가 애초에 잘못한건 하나도 없는데, 왜 라붕씨가 미안해 하는거야...!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또, 이 패턴이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유도 없이 사과먼저 하고, 고개부터 숙이고 본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는데.



"......."


"........."



어색한 정적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적막하게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그.... 우선은 앉을까? 이제 곧 소완이 식사를 가져올 타이미잉거든. 그러니까... 그...... 그전에 대충 수다라도 떨까? 뭐든 좋으니까...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



마치 "명령"이 하달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라붕이는 그제서야 자세를 풀고서 의자에 착석했다.


'.....이게... 아닌데....'



사령관은 표정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은 그 어느때보다도 타들어 가는것만 같았다.


'어쩌지..... 이럴땐 무슨말로 시작을 해야....'



사실, 어느정도 상황에 맞는 이야깃거리를 몇개정도는 미리 준비를 해놓긴 해놓았으나.....

라붕이가 보여주는 감정없는 딱딱한 모습에 크게 당황해버린 사령관은 그것들을 꺼낼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람을 대하면서.... 이렇게까지 어려웠던적은 없었지.... 그래서인지, 내가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뭔가 입이 더 꼬이는것만 같네....'



사령관은 오르카의 수많은 대원들과 교류해오며,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내심 자부했었다.

정말... 수많은 대원들을 마주하며, 저마다의 성향과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춰 자연스럽고 물흐르듯 서로를 알아간다.

이것이 사령관이 겪어오고 경험했던, 타인과의 교류.












'라붕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사령관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라붕이의 앞에선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이 사람의 앞에서 쉽사리 입을 여는것 자체가, 함부로 행해서는 안됀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만다.

자신과 같은 인간 남성이라는... 새로운 경험에서 우러나는 긴장감 때문인지, 아니면.... 



'....라붕씨가, 우릴 싫어하는걸 넘어... 두려워 한다는걸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이유는.... 알수없다.

라붕씨의 정신과 감정에 감응했던 엔젤조차도, 그 원인에 대해선 알지 못하니.



'라붕씨가.... 우릴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다는건, 첫날에 만났던 순간부터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우릴 그렇게까지 무서워 하고 있었을줄은....'



그것을 알아버린 날부터, 사령관은 라붕이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왔으며 다른 대원들이 라붕이와 접촉하는것을 그저 멀리서 보고 듣기만 하는것으로 그 근황을 접하고 있었다.



'당신이.... 처음에 온 날부터, 내가 당신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줬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눈앞의 당신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늘 하고있었어.'



의미없다는걸 이미 잘 알고있다.

어차피,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라붕씨에게는 그저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을것이다.



'....그게 두려웠거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져 버릴거란걸 알고있었으니까.'



그냥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저 어깨라도 토닥여주면서 편안하게 있을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냥.... 더 이상은 혼자서 외롭게 있을 필요없다고, 그저 그 한마디만 건네주고 싶었다.



'만약, 당신이 그리워 했던 "그 사람"이 곁에 있어줬더라면.... 그땐, 당신의 모습도 달라졌을까.'



엔젤이 슬픈 얼굴로 고백했던 진실.

라붕씨는, 더 이상은 만날수도, 볼수도 없는 사람을 애타게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

그걸.... 알아버린 뒤로, 더욱 더 다가갈수가 없었다.

소중한 사람과 헤어져 버려 힘들어하고 있는 이 사람을, 더는 힘들게 하기 싫었으니까



'아마, 당신은 이후에도 나에게 기대어 주지 않을거란걸 이미 알고 있어.

날....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래도 말이야. 다 알고있다고 해도, 아니... 

다 알고 있기에, 그런 당신을 내버려둘 생각은 더더욱 없어.



'그러니까... 당신이 이로 인해서 날 더욱 더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난 당신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러니, 한번 더 다가가보자.

이 사람이 기어코 숨기고자 했던것을, 무책임하게도 훔쳐본 죄인으로서, 미움받을 각오는 되어있으니.








..라붕씨?



사령관은 넌지시 라붕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네. 사령관님. 말씀하시지요.



뻣뻣한 말투로 무표정한 모습 그대로 대답에 응하는 라붕이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 요즘은 좀 어때..? 잘 지내고 있는거지? 내가 워낙 바빠가지고 라붕씨를 보러갈 틈이 없다보니... 잘 지내는가를 알수가 있어야지~



최대한 밝게 웃으며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해보았다.


저야 뭐... 이전부터 늘 말씀드렸다시피, 그 어느때보다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령관님 뿐만아니라.... 다른 대원분들도 저를 매우 배려해주시는 만큼, 불편한 점이 있을리가 없으니까요.


아아...그, 그렇구나..



워낙 간결하면서도 형식적인 말투로 대화를 쇄절해버리는 라붕이 특유의 화법으로 인해, 사령관의 초조함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차라리.... 감정이라도 좀 풍부하게 드러내 주었다면, 그나마 이야기를 해나가기 수월했을텐데....'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감정만큼은 드러내려 하질 않는 사람이기에, 그것이 제일 큰 고민이었다.


'아까와 같은, 형식적인 안부인사는 라붕씨의 앞에서는 의미가 없어.'



어차피... 본심은 결코 말해주지 않을테니까.


으음... 이제 곧 소완이 식사를 갖다줄텐데...


......


아! 라붕씨는 뭐 좋아해? 역시 고기려나? 아니면 해산물? 미리 말해주면 소완한테 전달해서 다음에 같이 먹을때 참고해서 준비해주려고 하는데... 어때? 






...다음?




...어.... 음식 취향 말인가요....


'...꿀꺽....'




'밥 뭐 좋아하냐니...'



이것도 뭔 꿍꿍이가 있는건가...


'흐으음~ 음식말이지...?'



뭐, 나도 선호하는 음식이야 당연히 있기야 하지.


'솔직히, 다른건 모르겠고... 그냥 밥상에서 니 면상만 안보이면 그게 진수성찬이란다ㅗ'



남의 밥상에 또 뭔 개수작을 부릴라고 이딴걸 물어보고 지랄이야.


음... 


.......


...주먹밥...


네?


주먹밥...을 꽤나 좋아합니다.

맛도 무난하고, 간편하거든요. 대충 보존식이랑 곁들여 먹기에도 무난하기도 하니까요.


어... 그... 근데 주먹밥은 그....


굳이 꼽자면 그것 이외엔 딱히 생각나는것이 없네요. 뭐... 굳이 그거 아니더라도 가리는건 없이 왠만한건 다 잘먹는 편입니다.


아...그, 그래... 하하...





..................















'소완~~~~!!! 빨리좀 와줘....!!!'



어떡하지... 도대체 어떤 대화주제를 꺼내야 라붕씨가 흥미를 가ㅈ...


...사령관님.


....?!!



지, 지금 라붕씨가... 먼저 날...?


한가지... 질문사항이 있어서 그런데, 하나 여쭤봐도 될런지요.


아...! 응..! 그야 물론이지..! 궁금한게 있다면 무엇이든 물어봐! 뭐가 궁금해? 혹시 이곳에서의 생활 관련해서 아직 설명듣지 못한거라도 있는거야? 아니면....


혹시, 저에게 무언가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어?



원하는것 이라니.... 내가 라붕씨한테?


저... 원하는거라니, 라붕씨가 나한테가 아니라... 그 반대를 묻는거야?


네. 이전에 만난뒤로, 나름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에 만나뵙게 되었으니까요.


.........


사령관님 정도 되시는 분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인적이 없는 곳에서의... "단 둘" 만의 시간을 마련하실 리가 없죠.


.........


그렇다면.... 분명 뭔가 저에게 볼일이 있으실거라는 것 정도는, 저라도 이미 충분히 예상할수 있는 일입니다.


라붕씨.... 난.


괜찮습니다 사령관님.



무덤덤한 목소리로 사령관의 말을 틀어막았다.


사령관님께선, 아무런 부담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


그야... 사령관님께선, 저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분께서 저에게 무언가를 바라신다면, 전 당연히 그것을 기쁜마음으로 진행할 준비도 진작에 되어있구요.


라붕씨...


사실, 이전부터 놀고먹기만 하는것에 저 또한 나름대로 죄송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심지어 다른분들께선, 밖에서 목숨을 걸고 임무 수행을 하시는 분들도 상당수 있으실텐데, 고작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특혜를 누리기만 한다는게.... 아무리 생각해도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러니, 저에게 무언가 시키실 일이 있으신거라면, 언제라도 시켜주시길 바랍니다.

 저야 뭐, 시간이야 넘쳐나니...



하나부터 열까지 목숨을 구해준 은혜와 그에 대한 "빚"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라붕이의 이야기에 사령관은 그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아닌데......'



그야 물론, 우리 오르카야 늘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니 이렇게 솔선수범해서 손을 보태주겠다는 말은 고마운 일이지만....


'라붕씨는... 아직 휩노스병 조차도 치료하지 못한 몸이니까.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업무를 시킬수는 없는일이고.'



이미, 지휘관들을 비롯한 수뇌부의 회의에서도 라붕씨의 몸이 회복단계를 넘어서기 전까진, "적응 기간"이라는 명목으로 그 어떠한 업무에도 투입시키지 않기로 결정이 난 사안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래가지곤 언제쯤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런지....'



늘 느껴왔던거지만, 이 사람을 대할때만큼은 저도 모르게 긴장되다보니 나 또한 말투가 형식적이고 딱딱한 말투가 되어버린다.


....저, 라붕씨?


네. 사령관님.


그... 이전부터 말하고 싶었던건ㄷ...




(드르르륵)





...?!



마침, 매우 적절한 타이밍에 소완이 준비해둔 식사를 카트에 담아 걸어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사옵니다.




'안기다렸어 씹새야...'


'진짜 오래 기다렸어...!!!'



두 남자는 속으로 각자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거대한 카트를 끌고오는 소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째.... 첫날에 나한테 가져왔을 때 이상으로 카트의 사이즈가 몇배는 큰것같은데...'



비록 사령관의 식사도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크기의 차이는 최소 3배는 되어보였다.


'...흐음....'















이것참... 죄송합니다. 중간중간에 추가하고 싶은 메뉴들이 자꾸만 떠오른지라, 시간이 다소 초과되어 버렸사옵니다.



죄송스럽다는듯 사과를 건네는 소완의 모습에 사령관과 라붕이는 약속이라도 한것마냥 손을 내저으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 아냐아냐...! 그만큼 우릴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줬다는 의미잖아~! 뭘 그런걸로 미안해하고 그래~ 하하하!

'사, 살았다...! 고마워 소완!! 적절한 타이밍에 와줘서...!!'


맞습니다 주방장님! 오히려, 괜히 저때문에 더 고생하신건 아니신지 걱정스러웠는데... 주방장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참... 적절한 타이밍에 오셨네~? 왜, 뭔 약을 칠까 고민이라도 하셨나? 어??'



각자가 서로 상반된 속마음을 숨기며 환영해주는 두 남자를, 소완은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후후훗... 그렇게 배려를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 오늘의 저녁식사를 책임지는 몸으로서, 잔뜩 기합을 넣었으니 기대해주시길.



그렇게 말하며 우아하면서도 신속한 동작으로 식탁보를 덮은뒤, 커다란 카트에 담긴 접시들을 하나하나 제 위치에 맞게 세팅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라붕씨에게 대접해드렸던 스테이크 정식을 매우 맛있게 드셔주셨던것을 바탕으로, 거기에서 더욱 범위와 질을 향상시켰사옵니다.



마치 TV에서나 볼법한, 이름조차 생소할것만 같은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미식들이 미려한 접시에 담겨 두 사람의 테이블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



라붕이는 그런 화려한 테이블을 수놓는 소완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 음식들... 괜찮은건가....'



물론, 라붕이의 관심사는 그런 호화로운 미식의 나열이 아닌... 다른곳에 쏠려있었다.


'이전에 먹었을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긴 했지만... 문제는 지금인데...'



과연, 이 음식에 대한 안정성은 어느정도일까.


'우선... 날 죽이는게 목적이면, 수단과 기회는 언제든 차고 넘칠 새끼들이지.'



실제로, 이곳으로 날 데려오던 때, 그리고 내 방에서 나와 마주하던 때, 그리고... 이곳으로 도착했을때도, 죽일기회는 수백수천번 있었을 터.


'효율을 추구한다면... 이런 빌드업 같은 행위는 무의미 할테지. 문제는...'



난 이 새끼가 어떤 놈인지를 모른다.

소완의 문학글 행적에 대해선 왠만한 경우의 수가 보이기에, 예상정돈 할수있다. 하지만...


'사령관... 이 새끼는 도대체 어느쪽에 속하는 부류인거지? 좆간? 빛간? 씨발 어느쪽이야...'



물론, 현 오르카의 분위기와 기류를 감안한다면, 빛간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바이오로이드 새끼들 기준으로 말이야.


'그 새끼들 기준은, 내겐 좆도 의미없지.

중요한건... 나한테도 빛간인지 아닌지를 알수 없다는게 문제니까.'



바이오로이드의 입장과 기준은 내 알바 아니다.

중요한건, 나다. 


'문학글 보면... 절반은 거의 지랄이더만.

자애로운척 하지만 그건 지 식구들 한정...

"두번째" 같은, 외부인한테는 씨발 좆간마냥 정치질로 낙인찍기 바쁜 쓰레기들이 대부분이던데...

그 사람이 어떤 사정을 가졌든,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않고... 억압과 의심만이 있을뿐. 보나마나, 너도 그중 하나겠지? 응?'



빛간이라, 좋지. 

좋은사람, 사랑으로 감싸주는 대장, 리더...

참...좋지. 


근데 그것도 결국, 니가 "좋아하는 것들"한테만 허용되는 것뿐이지, 결국은 너도 차별과 정치질을 일삼는 "인간"이잖아?


'많이도 봐왔거든. 올바른척, 정의로운척 하지만... 그 기준이란것도 자세히 보면, 결국은 지 기분에 따른것 외엔 없더만.

그래놓고서... 정의로운척 하는걸 내가 얼마나 많이 봐왔는데, 니새끼를 잘도 믿겠다 씨발아.'



...이전에 본 문학글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보니, 제일 최근에 본 문학글에서도 그러더만. 죄없는 인간을 "두번째"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명씌운뒤 교도소에 쳐박고, 심지어는 뭐? 전쟁끝날때까지 동면조치라고?? 

허 참나... 사실상 뒤지라는거잖아.

게다가 이유라는게, 전시상황때 인간이 둘 이상 있으면 전시체계에 혼란이 올수도 있다느니 뭐니... 별 말같지도 않은걸로 사람을 담글라고 하다니..... 정말 역겨운 기분이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머릿속은 온갖 개념글과 문학글의 "사령관 행적"으로 가득차기 시작했고... 그에 비례해 불신감 또한 커져만 가기 시작한다.


그저, 짜증나고 더러울 뿐이다.














'역시...! 라붕씨는 고기를 좋아하는구나~!'



사령관은 나름 사소하지만, 그래도 자잘한 정보라도 얻은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라붕씨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배가 많이 고플테니까. 부디 맛있게 잘 먹어주면 좋겠는데...'



사령관은 소완이 솜씨좋게 셋팅하고 있는, 손짓 한번한번 오갈때마다 화려해지는 테이블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라붕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라붕씨. 배 많이 고프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건 아닌가 모르겠네.



사령관은 웃으며 라붕이를 향해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 하나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신 사령관님에게 괜히 민폐를 끼쳐드린건 아닌지 고심중이었는데, 역으로 이렇게 배려를 해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 아...아냐아냐...! 민폐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그... 시간없다는 핑계로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라붕씨를 잘 챙겨주지도 못하고...


사령관님께선 안그래도 매우 바쁘신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신경써주시는 것만으로도, 기쁠 따름이니 너무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필요없어 씨발놈아'



뭔 혀가 이렇게 길어 이새끼는!!


'어여 밥이나 쳐 드세요 새끼야... 적당히 시마이 치고 나도 자리좀 뜨게...'




방금 설명드렸다시피, 이전에 라붕씨께 대접해 드렸던 스테이크 정식을 기반으로 메뉴를 확장 시켰사옵니다.


.......


오늘을 위해, 그 어느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여 요리한 만찬이옵니다.

부디... 느긋하게 만끽하시길.



우아하게 고개숙이며 카트를 끌고서 다시 자리를 비우며, 소완은 속으로 내심 기원했다.


'부디, 이번 식사자리를 계기로, 서로의 진심이 맞물리기를...'
















.......



라붕이는 현재 자신의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바라보며 두뇌를 풀가동 시키고 있었다.


'어디... 이 요리의 위험성은....'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이런식으로 공을 들여서 죽이는건 수지타산도 맞지 않을뿐더러, 효율적이지도 않은것이 사실.


'...칫.... 정면돌파 이외엔 답이 없는건가.'



요리의 맛 자체야 뭐, 그년이 만든거니 보장은 가능할테고, 문제는 안정성...


라붕씨!



그런 고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령관은 그저 환히 웃으며 식사를 권하기 시작했다.


많이 배고팠지? 자, 식기전에 어서 먹자.



그렇게 말하며 식기를 들기시작한 사령관을 따라, 라붕이 또한 식기를 들어올렸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사령관님.


아, 으응...



여전히, 딱딱한 사람이다.













'흐으음...'



라붕이는 천천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


'...모르겠네....'



아니... 그냥 평범한 음식맛만 느껴질뿐, 이렇다할 느낌은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발병해버리는 약물이라던가...'



하... 사령관 새끼의 성향을 알지를 못하니까 뭘 예상하기도 힘들다보니,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수가...



......


.............



...딱히 그런것도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앞을 보니, 싱글벙글 웃으며 스테이크를 맛있게 썰고있는 사령관의 모습이 보였다.


~~~


..........



참... 맛깔나게도 먹네...











'후훗... 이정도면 라붕씨도 충분히 만족하겠는걸!'



역시 소완! 너에게 맡기길 잘했다니까!


....(스윽).....


........



정면을 슬쩍 바라보니, 라붕이는 천천히, 침착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뿐, 현재로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진 않았다.


'...맛있게 잘 즐겨주고 있는걸까...'



워낙 표정변화가 없는 사람이니까.

이렇게만 봐선 그 속마음을 알수가 없다.


'칸이 해준 말에 의하면... 라붕씨도 활짝 웃을땐 잘 웃는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스틸라인, 호드, 엠프레시스 하운드, 팬텀과 레이스와 쉐이드...


이들과 있을때면, 라붕씨는 진심으로 웃어주었다고, 그렇기에 나 또한 분명 할수 있으리라고 격려해주던 칸의 말이 떠올랐다.


'역시... 이전부터 조금씩이라도 얼굴만이라도 비췄으면, 조금은 진전이 있었으려나...'



자신을 불편해하는 라붕씨를 위한다는 핑계로, 최대한 그를 피해다녔던 것에대한 아쉬움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아냐, 이전일들을 아쉬워해봐야 그것만큼 의미없는 일도 없지. 지금은 그저, 지금에 집중하자.

...조금이라도 오해를 풀수 있도록.'

















라붕이는 최대한 천천히,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자신의 입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니까..... 맛은 있다고.... 

맛은 존나 좋다니까.....'



개같이 위험해서 문제인거지...


'도대체.... 뭐가 목적이지.... 아까부터 진짜 밥만 먹고 있는데...'



굳이 함 내부도 아니고, 일부러 갑판 위의 외부에서 식사자리를 마련한 것에는 분명 확실한 이유가 있을 터.


'...문제는, 그걸 드러내질 않으니 갑갑한건데....'



예상가는것들이야 많다.

사상검증, 심문, 탐색전... 각기 방식만 다를뿐, 추구하는 방향의 결과는 같으니 그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 슬슬..... 뭔가 이야기라도 할법한데....'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를 잠시 내려놓고, 옆의 접시에 놓여진 바게뜨 빵을 집어 수프에 다소곳히 찍어 입에 넣었다.


'.......내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면, 어떤 방향으로 전개가 될련지....'



아마, 식사는 결국 형식적인 것.

분명 뭔가, 노리는 바나 원하는 것이 있을것이다. 그것을 내가 먼저 알아낼수 있다면...












사령관님.


...?!!!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라붕이의 목소리에, 사령관은 놀라서 순간 체할뻔 했으나 다행이 티내지 않고 침착하게 라붕이에게 입을 열었다.


으응..! 라붕씨. 왜그래?


..........



잠시간의 정적뒤, 라붕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식사가.... 정말 맛있군요.


!!!


역시... 주방장님이십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화려한 만찬을 열어주시다니, 언제나 신세만 지고 있기에 늘 죄송스럽습니다.



여전히 형식적인 말투였으나, 먼저 말문을 터준것에 더 의미를 둔 사령관을 활짝 웃으며 뿌듯하게 말했다.


그, 그렇지?! 우리 주방장 솜씨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거든! 우리 라붕씨가 그렇게까지 칭찬해주다니, 소완도 엄청 기뻐할거야!


....네.



말을 하는 내내 가급적이면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의도를 알수 없기에, 음식을 바라본다는 핑계로 사령관과 눈을 마주치는것은 자제하고서 다음 이야기를 꺼낸다.


사령관님께는....


.......


언제나 신세만 지는군요. 이래서야.... 언제쯤 입은 은혜를 갚을수 있을련지...


.......



사령관은 이미 이 대사가 나올것을 예측하였기에 자신 또한 미리 준비해둔 대사를 내뱉었다.


라붕씨.


네... 사령관님.



직설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라붕이의 수저가 멈추고 그제서야 사령관과 눈을 마주쳤다.


라붕씨는, 아직 적응 기간이 끝나지 않았어.


.....적응 기간..... 말입니까.


응. 우선, 우리에게 도움을 보태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해주는 말은 나도 고맙게 생각해.


..........


하지만, 어떤일에든 순서가 있는거 아니겠어?

우선은...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마친다.

그리고 함 내의 대원들과 친해지는 것.

그 이후에야, 무언가를 시작할수 있지 않겠어?


........



구구절절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사령관을 라붕이는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적응기간......이란 말이지.....'



뭐... 온지 얼마 안된 신병이 적응 할수있도록 초기에 편의를 봐주는 기간을 뜻하는것 같긴 한데....


'그걸 나한테도 부여해주고 있었다.... 

뭐 이런 뜻인가.'



어찌보면 틀린거 하나없는, 나름의 배려에 속하는 말들뿐.


'문제는, 그 "적응기간" 이 끝나고 난 뒤에는, 뭐가 있을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 적응할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건 좋다.

근데... 그 이후엔 뭐가 기다리는거지.










사령관님.



라붕이는 사령관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꺼낸 만큼, 이 기회에 전부 본인의 입을 통해 그 진의를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응.... 라붕씨.


우선, 신입인 제가 무사히 적응할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하온데.... 그 "적응 기간"이 종료된 이후에는, 전 어떤 업무에 배정되는지 알수 있을까요? 아마... 간부님들 사이에서도 어느정도 향후 저에 대한 처우가 간단하게라도 언급은 되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에....



라붕씨가.... 할일....?


.......


...........


'아직은....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아니 그야.... 늘 시켜만 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그의 말버릇을 항상 들어왔기에, 자신도 어느정도 향후 그에게 어떤 일을 맡기고 교육을 시켜야 할까. 라는 생각을 안해본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라붕씨의 휩노스 병부터 대처하는것이 최우선 순위였던지라..... 그것에 대해선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는데...'



그.....뭐냐.... 이전에 라붕씨가 쓰러졌을때 회의실에서 지휘관들이 뭐라고 했었지.....


'.....아..!!'



그때, 마리와 칸이 향후 라붕씨에게 맡길 일들을 어느정도 언급했었지!


'그러니까... 마리가 그때 라붕씨 교육 커리큘럼을 어느정도 완성해나가고 있다는 듯이 말했었지....'



마리와 칸의 말대로, 라붕이 또한 사령관과 같은 인간남성.

자신과 같은 인간남성이 사령관에게 착실하게 힘을 보태준다면... 저항군에도 도움이 될것이다.


'그런데... 이걸 라붕씨에게 어떻게 설명하지... 갑자기 이런 얘기를 듣고 난 뒤의 라붕씨의 반응이 도저히 짐작이 안가는데....'



일단 질러볼까라도 생각은 해보았으나, 그의 성격이 워낙에 신중하다보니 이걸 어떻게 생각해줄지도 의문이다.


...음.... 라붕씨가 이후에 해야할 일들 말이지....


........


어.... 우선은 역시... 간단한 업무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지 않을까? 그야, 처음부터 너무 무리를 시킬순 없으니까, 1부터 단계를 밟아가듯이 천천히.... 말이야.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것을 하게 될까요?


에....



라붕씨가... 이렇게 연속으로 같은 주제에 대해서 물어본적이 있던가...

어떤 주제가 나오든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대답하고 이야기를 종료시켜 버리던 사람이었는데....


'유독... 이 이야기만큼은 관심을 많이 보이네....'



어째서인지, 라붕이는 유독 자신이 향후에 하게될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가만히 신세만 지고있는걸 원치않는다, 라는 뜻이겠지...'



언제나 "은혜" 와 "빚" 이라는것에 집착을 해오던 라붕씨의 성격상, 납득이 가는 행동이다.


'음....그렇다고 이전에 회의때 칸이나 마리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면 그건 그거대로 부담아닐까....'



이제야 적응중인 사람한테 그런 주제를 꺼내는건 역시 시기상조 일것이다. 그렇다면....


어... 우선은, 간단한 서류업무와 창고의 자원관리... 정도려나?

간단한 일부터 마스터 해나가야 더욱 상위단계의 업무에도 도전할수 있으니까.


...사무업무와, 창고관리....말씀이시군요.


어어어.. 그렇지. 아..! 창고하니까 생각났는데, 혹시 안드바리를 만나본적 있어? 발할라 소속의 보급관 업무를 담당하는 아이거든. 아마 한번쯤은 마주친적 있지않을까 싶은데.


....아.....



사령관은 첫날, 컴패니언에게 오르카 함내의 안내를 받을 당시 알비스에게 초코바를 건네받았던 그 때를 떠올렸다.


직접 마주했다.... 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본적은 있습니다.

알비스씨께서 저에게 초코바를 주신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 한번 안드바리씨를 본 적은 있습니다.


아..하하하.. 그래? 한번 봤었구나....


'어린아이에게까지 경어를 사용하다니....'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마주하고 있는 그의 허들의 높이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 그... 보급관님과 먼저 업무를 하게 되겠군요.


음? 어...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 물자를 관리하면서 오르카의 소비 흐름을 미리 파악해둘수 있다면, 향후의 모든 업무면에서 큰 도움이 되거든.


...음... 그렇군요....


..........











'....어느정도는, 예상한 답변이 나왔구만....'



어떻게 예상했느냐, 그야... 개념글에서도 두번째 인간은 주로 창고에서 잡무를 맡는것으로 시작하는 문학글을 여럿 보았기 떄문이다.


'사무업무도... 커다란 기밀사항이 아닌 자잘한 업무만을 선별해서 나에게 토스할테고, 사이사이에 창고에서 물자관리하고, 재고관리도 하면서... 일하게 될것이다. 라는 의미같은데....'



나름 모범적인 답안이 생각한 것과 별 차이없이 흘러나온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내가 원한 대답은.... 다소 달랐던것이 흠이지만....'



우선, 이렇게 말하는것을 본다면, 

우선은 "시킬게"있다라는 것.


'시킨다는건, 일단은 살려두고서 차도를 보겠다.... 이런 의미라고 어느정도 받아들여도 괜찮은건가.'



실제로 그 속마음을 게임마냥 다 알순 없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숙청이나 유폐로부터는 시간을 번 셈이 된다.


'그렇다면.... 탈출을 위한 시간도 어느정도 확보가 될테고, 그만큼 성공률도 높아지겠지.'



게다가, 업무에서 어느정도 모범적인 모습을 선보인다면... 그 시간도 연장될지도 모른다.


'흐음.........'









그렇군요.



라붕이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말씀하신대로 간단한 업무부터 해결해 나가며 성장하는것이 중요하겠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사령관님....


응? 아, 그래그래...! 누구나 처음은 있으니까~!

너무 처음부터 무리하면 나중에 힘들어진다니까~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다급하게 생각하지말고, 우선은 내가 말한대로 적응부터 차차 해나가자. 알았지?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어어...그래... 하하하...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식탁의 음식들은 절반이상 사라져 있었다.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음식의 소모 속도가 빠른 이유는, 그만큼 먹는것 외엔 서로 할수 있는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마음을 놔도 되겠지.'



당장 뭔짓을 할것이 아니라면, 독살같은건 바로 실행해야할 이유가 없을테니 말이야.


'그나마... 시간이 좀더 생겼다는것이 위안이다만.....'



이 식사가 끝나면.... 그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땡인지, 아니면 다른 일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냥 밥 한끼 때우고 시마이 쳐라 임마... 

나 피곤하다...'



밥 한번 먹는데 도대체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건지.... 


'아까... 어떤 음식 좋아하냐고 물어봤을때, 좀 거슬리는 말을 한것같은데....'



"다음"에 같이 먹을때 참고하려고.


'....다음이 어딨어 병신아. 니가 상 차려놓으면 그땐 이미 내가 없을거다 새꺄.'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이 짜증나는 만찬회가 먼저 재개될지, 내 탈출이 먼저일지... 그것은 나도 모르지.


'뭐가 되었든, 난 무조건 여기서 나간다!!!

철충이고 나발이고 좆까라그래!! 아무리 그래도 여기보단 밖이 낫지 씨발!!!'



이미 밖에서 오랜시간 존나게 살아온 몸이다.

그저 그 시절로 회귀하는것뿐, 변하는것은 없다!














음식이... 참 맛있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 그렇지? 우리 소완 음식솜씨야 누가 됬든 인정할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마찬가지로, 했던 말을 반복한다.



........



그렇게, 무의미한 언어를 주고받으며, 조용히 식사가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거의... 다먹었네.'



이거 다 먹고... 뭐하지...


'...! 이참에, 한번 더 목욕이나 같이...'

'아...'



오늘, 철야업무 있었지...


'그거 오늘내로 안끝내면, 다음주 일정 다 꼬여버릴지도 모를 일이고... 그럼 또 부관들이 고생할테니 말이야...'



안그래도 오늘 라붕씨 만나려고 다소 무리를 많이 한 상태다.

이 이상 모두에게 민폐를 끼칠순 없지.


'...그래....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기회는 많이 있잖아.'

'어차피,라붕씨도 앞으로 우리랑 함께 할거니까.'



솔직히, 당장 오늘 하루만에 둘 사이의 관계에 드라마틱한 관계가 생길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뀌는건 아니니까.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계속 시도해나가다보면 라붕씨도 오해를 풀어줄거야.'



그래. 시간은 많으니, 너무 다급하게 행동해서 일을 그르치지 말자.

그래도 오늘은... 함께 식사도 하면서 적게나마 대화도 나누었으니.


















라붕이는 수저를 내려놓고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사령관님."



깔끔하게 비운 접시들을 보며, 감사인사를 건네었다.



"절 위해서 이렇게까지 대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령관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음식을 비우고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을이 지고 있는 경치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 그렇게 부담갖지 않아도 괜찮아."



"......."



"다른 대원들에게도 이미 들었겠지만, 라붕씨는 이미... 진작에 우리 동료잖아?"



"...동료....인가요."



라붕이는 유독, 그 단어를 깊게 읊조리는 것만 같았다.



"...응. 동료야. 우리들의."



"......."



노을을 등지며 라붕이를 슬며시 바라보는 사령관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았다.


당장은... 전해지진 않으리란걸 알고있지만,

 그렇기에 꾸준히 건네주고 싶은것.



"다음에도, 같이 식사할수 있으면 좋겠네. 오늘처럼."



".....네. 물론입니다."



"........"



잠시간의 침묵이 갑판을 휘감고 있을때, 사령관은 지금이 그것을 건네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아 맞다 라붕씨!"



"...네?"



사령관은 갑자기 라붕이를 부르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무슨 일이신지?"



"아~ 다른게 아니고, 라붕씨한테 줄게 있었거든."



"줄게 있다니.....저한테 말인가요..?"



뭘 준다는거지? 목에 장착하는 시한폭탄인가.



"자!"



"...이건, 휴대폰인가요?"



"응! 정확히는 오르카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전용단말기야. 휴대폰이라고도 표현해도 괜찮겠네. 실제로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고 사람들 대부분이 오르카폰 이라고 부르니까. 하하!"



해맑게 웃으며 통칭 오르카폰을 건네주는 사령관을 라붕이는 무뚝뚝하게 응시하다가 이내 두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연락용이군요... 또 이렇게 편의를 봐주시니, 정말 여러분께는 빚만 계속 지고있습니다."



"에이, 빚이라니! 이 정돈 당연히 내가 챙겨주는게 당연한걸! 너무 그렇게 섭섭하게 굴지마~"



"...아뇨, 전 여러분께 목숨을 빚진 입장이니까요.. 어서 빨리 이 은혜를 갚아야할텐데, 자꾸 이런식으로 항상 신세만 지고있으니...여간 죄송스러운게 아닙니다."



"아,하하... 라붕씨도 참... 별걸 다 미안하데~..."



보다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고 싶었던 사령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의, 여전히 형식적이고 딱딱한 모습만 보여주는 라붕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령관의 표정은 점점 씁쓸한 기류가 돌았으나, 이내 그걸 그가 행여나 눈치챌까 곧바로 미소를 띄운 사령관은 다시 밝게 웃으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르카폰 사용법은 박스 내의 메뉴얼에 아주 알기쉽게 정리되어있으니까! 그걸 보고 천천히 익혀가면 될거야. 모르는게 있으면 꼭! '나'한테 물어봐! 알았지?"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정말 감사합니다."



"......"



유독 '나'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넉살좋게 말하는 사령관은 라붕이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푹 쉬어 라붕씨! 심심하면 그걸로 전화나 메신저톡으로 말 걸어줘도 돼. 나도 항상 지니고 다니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살펴가십시오...."



"으,응..."



라붕이는 인삿말 끝에 예의바른 90도 인사로 마무리지으며 사령관을 배웅했다. 그 허리는 사령관이 갑판의 입구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기까지 절대로 펴지는 일이 없었다.


































라붕이는 사령관이 떠난것을 확인한후, 마찬가지로 사령관이 바라보았던 노을을 쳐다보았다.



"..........."



그 표정에는 그 무엇하나 담겨있지 않았다.

평소에 품고있던 환멸감도, 경계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감정이 깃들어 있는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무뚝뚝하고 무감정한 모습.



"........."



노을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사령관이 건네준 오르카 내부 개인단말기. 오르카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르카폰 이라.... 설마 이런게 실제로 있을줄은 몰랐는데."



문학글에서 간혹가다가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걸 본적은 있는데... 설마하니 이쪽 세계관에서도 이런것을 사용하고 있었나.



"뭐.... 이정도의 기반을 가진 시설이니까. 이런 휴대폰 정도야 당연히 보급되어 있겠지."



이 세계관의 과학기술의 경이로움을 생각해본다면, 이런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게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고.



".........."



저물어져 가는 노을을 바라보고서 깨달은것은, 태양이 저물기 직전에는... 붉은빛이 더욱 강렬해지는것만 같다는 것.



"....들어갈까."



사령관과의 저녁 식사 미팅도 무사히 잘 넘겼다.

소완과의 대면도, 아무 탈없이 지나간 일.

그리고... 진짜라는 가정하의 이야기 이지만, 사령관이 말한 바에 의하면 나에겐 아직 시간이 더 있다는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은.... 뭘 하는게 좋을까..."



아무도 없는 갑판을 뒤로하고, 조용히 발걸음을 자신의 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름 다행인것은, 돌아가는 내내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수 있었으니, 가는길 만큼은 편안한 느낌이었다.




























.........


사령관은 그 이후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하아....."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그게 첫번째 목표였으며 가장 쉬울줄 알았다.


"쉽지가 않네..."


사령관은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교류의 난해함에 빠져있었다.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마저도, 나에게 90도 허리숙여 인사하는 그 모습을 보고나니... 이 이상 그의 시간을 빼앗아 부담스럽게 하고싶지 않았다.


"역시, 아직도 내가 많이 거북한가..."


여태것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를 만나고, 또 함께 해왔으며, 이윽고 사랑의 결실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상대를 이해하는것에 성공했으며, 결과는 언제나 성공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대원들을 만나오며, 가까워지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이 함께하고, 그것이 사령관에게 있어서는 매우 당연한것 이었으며 또한 자신이 내세울수있는 강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나와 같은 동성친구를 대하는 법이 따로 있는걸까..."


그런 사령관이었기에, 우연이자 기적적인 확률로 만난 유일한 남성이자 동성친구. 라붕이 또한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원할하게 가까워지고, 친해지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당신을 환영한다고, 결코 싫어하지 않는다는것을 전하고 싶었다.


"뭔가...내가 생각한거랑은...다르네.. 하하..."


그러나 가까워지고 싶었던 사람은 여전히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니.

그걸 모르는 사령관이 아니었으나 오히려 더욱 과감히 다가가기를 선택했다.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잠시 정체상태가 발생한다면, 자신이 과감하게 상대방에게 다가간다. 그것 또한 대원들을 접하고 대해오면서 배워온 자신의 공식이었다.


"역시 조금...시간이 필요한거겠지."


사령관은 애써 어깨를 펴고 일어나 자신의 품속에 있는 오르카폰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역시...힘들겠지.."


사실, 사령관은 라붕이에게 오르카폰을 건네기전, 자신이 그에게 건네줄 단말기에 미리 손을 대 두었다. 손을 댔다고는 하나 그렇게 거창한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연락처를 제일 최상단에 입력한뒤, 고정시켜 놓았을뿐.


"원래라면 사용방법을 알려준다는 핑계로 내가 직접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아마 안좋아하겠지.."


어거지로 연락하더라도 딱딱하고 예의바른 어조로만 대답할 터. 이내 1분도 못가 서로 아무말도 못할것이다. 괜히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버렸다가 더 어색해지는것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바로, 말 놓기에는 힘들겠네...하하.."


이런 페이스로 과연 언제 말을 편하게 틀수 있을까. 아니 애시당초, 날 보고 편하게 웃어주는 날은 올까.


"..조금만 더, 시간을 가져보자.. 응.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사령관은 오르카폰을 책상위에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혹은 실수로라도 라붕씨에게서 연락이 오진 않을까 하여 이후에도 여러번 폰을 들었다 놓았다 해보았지만, 사령관이 원했던 작은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완의 스테이크 정식이라니... 존나 맛있겠구나 라붕아!














재밌게 보셨으면 댓글이랑 개추좀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