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칸은 리마토르의 연구실로 향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병실을 찾았는데 막상 그가 일찌감치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리마토르의 얼굴을 본다는 사실만으로 웃음이 헤실헤실 나오는 걸 참지 못하던 그녀는 전과 비교해 자신의 삶이 많이 바뀐 걸 체감했다.

 

“이것 참, 내가 이렇게까지 웃음이 많았었나.”

 

입에 걸리는 웃음과 함께 속에서는 간질거리는 감각이 그녀를 애태웠다. 지금 당장 얼굴을 마주한 것도 아니고, 만나러 가는 길인데도 이토록 행복할 수 있는지 생각하던 칸은 리마토르의 연구실이 눈에 들어오자 아예 볼에 사랑의 연홍빛까지 옅게 띄웠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설레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려고 했다.

 

“당ㅅ-”

 

“하르페이아.”

 

하지만 칸의 부름은 닿지 못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 그녀의 성대는 언제 말을 꺼낼 수 있었냐 듯이 굳어버렸다.

 

“사랑해요.”

 

“...뭐?”

 

사랑한다. 그녀가 그에게 고백했던 마음을, 그가 그녀를 안아주며 했던 말이 방 안에서 들렸다. 그녀가 아닌 다른 이에게 전해진 말이었다.

 

“교, 교, 교수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칸이 멍하니 굳어있는 잠깐의 순간을 찢고 방안에서 하르페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리마토르가 말한 사랑한다는 말의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지자 칸의 몸은 뒤로 돌아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그녀가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녀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한참을 달리던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공용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컥, 커헉! 허억.... 하.... 하아...”

 

구역질이 올라왔다. 아침으로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은 연신 무언가를 게워내려고 했다. 신물만 뱉던 칸은 토악질이 잦아들자 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면서 방금 전에 보았던 상황이 되감겨졌다.

 

“뭔데.... 대체 왜...”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사랑한다는 것이라니, 왜 하필 그 말을 듣는 대상은 하르페이아였는지. 하루에도 몇십 번이나 그녀가 그에게 해주었고, 그도 그녀에게 해준 사랑한다는 말. 잠언에 진리를 담은 철학자처럼 그녀는 그 짧은 말에서 자신의 삶을 찾았다.

 

“왜... 어제는...”

 

그랬기에 그녀는 더더욱 납득할 수 없었다. 백년이 넘는 평생을 오로지 싸움 속에서 살았고 소중한 이를 잃는 아픈 기억을 몇 번이고 겪어야만 했던 그녀였다.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기 싫어 보이지 않게 감춰둔 상처를 눈치 채고 다가와 보듬어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왜 어제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건데....?”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혼자 안고 가려했던 아픔을 같이 짊어지겠다고 했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혼자 울지 말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도 애틋해서, 각별해서, 비감스러워서. 그래서 더 아팠다.

 

“이렇게, 이렇게 하루도 안 되어서 하르페이아한테 사랑한다고 할 거면...”

 

사랑이 가심히 올라왔다. 그녀가 가진 상처만큼이나 그도 쓰라린 상처를 갖고 있었다. 그의 깊은 기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녀뿐이었기에 그녀도 그를 안아주려 했다. 그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혼자 울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저 그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었다.

 

“왜... 왜 나를 사랑한다고 한 건데....”

 

콧등이 시큰하더니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사랑은 뚜렷했지만 그는 받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믿음은 다른 이와 자신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금이 갔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믿고 싶었다. 여전히 그를 사랑했기에, 그가 자신에게 하는 믿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래야만.... 했던 거야?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랑한다고...”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행여 밖에 소리가 새어나갈까 우려해 그녀는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었다. 사랑도 울음도 어느 하나 그녀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차가운 현실은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냉혹한 현실이라서 그녀는 더더욱 자신을 잡아준 그의 온기를 갈구했고, 그 온기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가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차디 찬 냉기가 되어 살을 파고 들어왔다.

 

“버리지 말아줘... 당신에게 버려지면... 대체 누가 이 아픈 감정을 알아주는데....”

 

몸이 떨렸다. 추워서 그런 것보다 견딜 수 없이 아픈 게 더 컸다. 자신의 모든 걸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자신의 상처까지 있음에도 자신을 안아주려 했던 그 사람이 자신을 떠난다는 사실이 믿기 싫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한 사람의 부재. 칸은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을 여력도 없이 덜덜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왜 내가 아니라... 그 년이어야만 했냐고....!”

 

눈물은 서서히 그쳤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끝에는 그가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이가 서 있었다. 조교라는 이름으로 그녀가 사랑해마지 않는 그의 옆에 붙어 있고,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가증스러운 존재. 그 존재를 인지한 칸은 떨리던 몸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동시에 속에서 불타오르듯이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의 안을 채우는 감정은 결코 하나로 단정지을 수 없었다.

 

“용서 못해... 그래, 분명히 하르페이아 그 년이 작업을 쳤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리마토르가 나를 버릴 리가 없잖아? 나도, 리마토르도 서로 정말 사랑하고 있는데... 그 년이 다 망친 거야. 나만의 리마토르를 더럽혔어...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소유욕, 질투, 분노, 집착. 다양한 감정이 얽히고설켜 있었으나 칸은 그 감정들이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오랜 잠에서 깬 것처럼 그녀의 머릿속은 티 없이 맑았다. 오로지 순수한 사랑으로 채워진 그녀의 눈동자는 단 한 사람만을 비추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나만 있으면 돼. 나한테도 당신만 있으면 되고. 우리 둘의 사랑에 불순물이 끼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조금만 기다려줘. 지금 당신을 더럽히고 있는 그 년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태워버릴 테니까.

 

정말로, 정말로 사랑해.”

 

칸은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이를 보지도 않았건만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녀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간질거리는 속을 누르며 리마토르의 얼굴을 그리던 그녀는 그를 만나고 자신의 삶이 아주 많이 바뀐 걸 느꼈다.

 


연구실로 향하는 내내 칸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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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네. 분명 많이 쓴 거 같은데 왜 분량이 이거 밖에 안 되지... 독립적으로 78편을 달기에는 분량이 부끄러운 수준이라 0.5화로 분류했어. 아무래도 오랫동안 글을 안 썼더니 심각하게 필력이 퇴보한 것 같네. 이럴 때는 빠르고 많은 초고 작성으로 극복해야지.


이번 편은 칸이 맛이 가는 걸 써보려고 했어. 수미상관 구조를 시도해봤는데 어떻게 느껴질까 모르겠네. 다음 편은 리마토르와 하르페이아 시점에서 진행될 예정이지만,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부족한 글 읽어준 모든 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다들 건강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