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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다섯 번째(2)




(매움 주의)


* * *




유미를 따라 찾은 곳은 080생활관 아래층에 위치한 서버실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서버랙을 책장으로 본다면 커다란 서고같은 곳이다.


가장 안쪽, 팬텀같은 년이 좋아할 만한 구석에 간이식 접이 책상이 있었다. 그 위에 놓인 노트북은 본래 역할 외에도 가까스로 조명 역할을 겸하며, 구석을 등진 닥터를 비추고 있었다.


"언니들 왔구나. 밤에 미안하네."


"이 시간 밖에 꺼낼 수 없는 사안이겠지."


칸이 배려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오빠한테 보고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런 사안이 되겠지만… 됐어. 늦었으니까 본론만 할게."


닥터의 손이 키보드로 향하는 것이 우리더러 모니터 앞에 모이라는 신호였다. 

좁지만 노트북 앞에 어떻게든 옹기종기 모인 우리는 노트북에 집중했다.


이윽고 어떤 화면이 떠올랐다. 세 개로 분할된 화면이었고, 각 화면 우상단 마다 좌측부터 cam1, cam2, cam3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닥터가 cam3을 가리켰다.


"우리 펙스랑 치고받은 거 알고 있지? 언니들은 별도로 움직여서 그… 이상하게 생긴 녀석을 수색하러 다녔잖아. 이건 그때 광역 탐색으로 입수한 cctv 자료야. 장소는 미국 오리건 주 외곽의 공장지대."


공장지대라는 말을 듣고 다시 화면을 보니, 확실히 화면 일부에 포착되고 있는 것은 공장으로 보였다. 다만 흑백인데다 그것도 촬영된 시간대를 보니 밤인듯 해서, 정확히 화면에 대해 파악하려면 닥터의 추가 설명이 필요했다.


"알래스카의 옆은 캐나다가 아닌가. 어째서 먼 아래쪽을 뒤진 거냐."


"레모네이드 세력의 주축은 미국에 있잖아…"


"척후를 겸한 건가."


"맞아. ags친구들한테 부탁했어. ……아르망 언니가 그래 달랬거든."


닥터의 얼굴은 노트북 쪽 반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언짢은 표정인 건 알 수 있었다.


"끊어서 미안하다. 계속해도 좋아."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을 쉬고 닥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하도록 해. 나는 다른 언니들이랑은 다르게 ags친구들이랑 친하니까 어떻게든 가능했던 거야.


"알았다."


"어쨌든… 탐색에서 건진 물건들은 많았는데 딱 cctv하나를 찝어서 나한테 말하더라구. cctv를 발견한 곳은 휑한 공터였대. 거기서 내장 레이더에 잡히는 뭔가가 있었는데, 시각 센서에는 포착이 안 됐다나 봐. 같은 장소를 몇 번이나 돌아도 그 뭔가가 발견이 안 돼서, 덩그러니 굴러다니는 cctv만 가져왔다고 했어. 내장 메모리는 살아 있는데, 메모리 안의 파일이 암호화 되어 있어서 현장에서는 감식을 못했다나? 해독 모듈 장착을 깜빡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해독해 발견한 것이 이 화면이란 말씀." 


"화면에는 뭔가가 잡힌다만."


"지금은 그렇지. 잘 봐."


닥터가 패널을 허공에 띄우고 노트북 속의 커서를 조작해 cctv화면을 재생했다. 

닥터가 시각을 확인하라고 했다. 좌하단에 표기된 촬영 시각은 pm20:47이다.


20:48. 화면에 변화는 없다. cam2에 잡힌 나뭇 가지 일부가 살살 흔들린다. 


20:49. 화면에 변화는 없다. 화면 속 건축물은 공장의 후방이며, 화면의 하단 절반에 잡히는 공터는 쓰임새 없이 방치된 부지라고 닥터가 설명한다.


20:50. 화면에 변화는 없다.


20:51. cam3 화면 전체가 하얀 물감이 끼얹어진 듯 뿌옇게 되었다. cam2도 우측 절반이 동일하게, cam1은 변화가 없다.


20:52. 동일하다.


20:53. 공장의 윤곽조차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20:54. 동일하다.


20:55. 공터만 살짝 보인다.


20:56. 동일하다.


20:57.


"뭐냐 지금. 어떻게 된 거야."


공장이 사라졌다.


고작 몇 초 만에, 뿌옇게 된 화면이 정상화 됨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언니들 생각 먼저 들어야겠어. 어때? 뭔 거 같아?"


"먼저 물었잖나."


"나도 정확히는 몰라.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야."


얼굴이 왠지 따끔한 게, 어둠 속에서 닥터가 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폭발…인가?"


하르페이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르페 언니는 폭발. 칸 언니는?"


"글쎄… 폭발이 아닌 모종의… 병기?"


"칸 언니는 공장을 몇 초만에 증발시키는 모종의 병기… 그럼 아르망… 언니는?"


"둘 다 아닌 무언가."


또 째려보는 것 같다.


"처음에는 나도 폭발이 아닐까 생각했어."


닥터가 몇 초 뜸을 들이고, 몸을 내밀어 노트북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폭발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딱 봐도 꽤 큰 공장이잖아? 이런 게 5, 6초 남짓한 시간에 완벽하게 터져나갈 리는 없고, 그런 게 가능한 위력이라면 cctv도 휘말렸겠지. 우리가 이 화면을 볼 일도 없었을 거야."


"그렇군. 폭연도, 공장의 잔해도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폭발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그래도 혹시 몰라서, 일단 화면 속 환경에서 가장 그럴 듯한 걸 가지고 측정해봤거든. 자, 다시 봐."


cctv의 타임 라인이 20:51로 돌아갔다가, 21:01까지 재생됐다.


"cctv인 걸 감안해. 어때? 하르페 언니. 좀 알겠어?"


"잘… 모르겠는데…"


"아르망 언니는?"


"모르겠어."


에휴, 하고 닥터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허공에 패널을 띄웠다. 


"어디까지나 cctv 화면을 토대로 한 거지만, 자. 광량을 측정한 값이야. 좌측이 폭발로 인한 섬광의 평균값, 우측이 화면 속 광량의 측정값. 좌측 자료는 캐노니어 언니들의 고폭탄 기준이니까 참고해."


차이를 알겠으면 호출하라 말한 닥터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서버실을 나섰다.


"아, 아시겠나요…?"


유미가 칸 옆에서 조마조마하다는 듯 꼼지락댔다.


"이해했다. 다만, 좀 이상하군."


"그러게… 고폭탄이라니까 좌측 그래프 곡선이 위로 확 꺾인 건 당연하다 싶은데, 우측은… 아무리 봐도 잘 매치가 안 돼."


노트북으로 향한 하르페이아가 다시 화면을 재생했다. 우측 그래프는 완만한 동산 형태, 초마다 화면 속 뿌예짐이 심해지는 것 같기는 하나, 시간에 따른 광량의 변화가 완만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 그게요… cctv가 워낙 구형이라 결함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끊기듯이 딜레이가 좀 있거든요."


"그런데도 알아낸 건가."


"네. 그… 아시죠? 예전에 사령관님이 가상현실로 향하셨던 거요."


"전쟁 지식 각인 프로그램이었나? 그런 이름이었어."


"거, 거기서… 직접 재현했거든요. 그래서 측정 할 수 있었던 거에요. 여러분… 지금 닥터 굉장히 화난 상태에요… 사령관님 몰래 이런 짓까지 하게 됐다고 엄청…"


"따로 얘기하지."


칸이 서버실을 나간 뒤, 5분여 뒤에 닥터와 다시 들어왔다.


"확인들 했어? 누가 말해볼래?"


닥터가 칸을 지명하자 칸은 '이해는 했는데 뭘 예시로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내게 넘겼다. 나는 반딧불이라고 대답했다가 침묵만 돌려받았다.


"어… 항공 장애등?"


하르페이아가 나직이 말했다.


"제일 근접했네. 괜히 날아다니는 건 아니구나? 맞아. 화면 속 광량과 가장 유사한 패턴을 보이는 건 항공 장애등이야. 멸망 전 마천루나 비슷한 높이의 건물에 필수적으로 달려있던 거, 알지? 지금도 몇몇 도시에선 아직도 작동 중이잖아."


멸망 전 풍경이 떠오른다. 번화가 저 멀리 높은 곳에 보이던 각양각색의 완만한 명멸. 그 이미지를 곡선으로 표현한다면 딱 우측 그래프와 같다.


침묵이 흐른다.


항공 장애등.


그래서?


설마 항공 장애등이 공장을 없앤 거라곤 하지 않을 것이다.


"고작 그 정도 세기의 빛을 내는 무언가 때문에, 그것도 폭발도 아닌 무언가 때문에 공장이 사라져?"


"내 생각은 이래." 닥터가 말했다. "첫째. 공장은 파괴된 게 아니라 사라진 것이다. 위장이든 뭐든 좋아. 단지 cctv화면에서 사라진 것뿐이지. 혹은 포착이 불가능하게 됐다. 그리고 둘째……"


"둘째?"


"영상이 조작된 것이다."


닥터를 빼곤 노트북의 빛이 미치는 범위 밖이었던 터라,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에 어울리는 표정을 하고 있을 건 분명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올 단어야 많이 있다. 그런데, 조작. 많고 많은 단어 중에 왜 하필 그런 게 튀어나오는 걸까. 이상하다. 뭘 시사하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미대륙 최서북단에 위치한 주의 외곽 공장지대, 그 중의 공장 하나를 비추는 cctv.


그런 걸 조작한다? 그것도 멸망한 세계에서? 왜?


아무도 조작이란 단어에 반응을 하지 못하자, 그럴 거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유미가 말했다.


"이 영상이, 으… 좀 더 알아봐야하긴 하는데요… 계속 보다보니까 조작된 영상들의 특징 같은 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런 가능성이 있어서요…"


"발견된 cctv는 이 영상을 담고 있던 것 하나 뿐이었나?"


노트북으로 다가온 칸이 다시 영상을 재생시키고 닥터에게 물었다.


"응. 하나."


"이상하지 않나. 공장 지대에 공장이 이 영상 안의 공장만 있는 것도 아니고, cctv는 더 많을 거다. 그런데 딱 이 공장만 찍고 있던 cctv만을 발견한데다 녹화된 영상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어? 그것도 철충이 바글바글한 이런 때에? 누가? 설마 레모네이드 녀석들은 아닐 테지."


"그, 그렇겠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cctv를 발견한 건 사령관님과 오메가가 한창 치열하게 싸우실 때라… 애초에 펙스 세력이 이런 공장이 있는 걸 알았는가는 둘째로 둬도, 굳이 구형 냄새 풀풀나는 cctv를 딱 찝어서 조작할 필요도 없을 거고… 무엇보다 펙스가 그랬다면 제가 바로 알았을 거고…"


중얼거리듯이 떠오르는대로 말하는 것 같던 유미가 아! 하고 소리를 높였다.


"제가 왜 바로 알 수 있냐면요. 알래스카로 향하기 전에 몇차례 해킹 공격을 받았잖아요? 그때 방어하면서 알게 된 건데요. 펙스는 이름 높은 슈퍼컴퓨터를 소유한 게 무색하게도, 무척 파훼하기 간단한 수단으로 정보전을 걸어오더라구요. 아주 고전적인 크래킹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어…"


"간결하게 하도록."


"죄송해요… 그러니까 파훼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는데, 모든 수단이 펙스 고유의 코드로 개조되어 있었어서… 알고 난 뒤엔 쉬워졌다고 해야 하나… 방호벽을 다시 구축하는 것도 원활했어서… 펙스 쪽도 뭔가 바빠서 해킹에 제대로 신경을 못 썼다는 느낌이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끊었다.


"결론이 뭔데?"


"펙스 얘기가 나와서 생각 난 건데요. 얼마 전에 보안이 뚫렸어요."


유미는 갑자기 차분해진 말투가 되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펙스는 아니에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펙스는 고유의 코드를 가졌거든요.' 라고 유미가 나불댔다.


한밤중에 불러낸 주제에, 이 두 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요컨대, 이런 거구나. 얼마 전에 있었다던 보안 문제 이야기를 꺼낸 건 영상 조작과 관련 있을지도 몰라서, 맞지?"


"네, 네…"


"그리고 공장에 대해선 영상만으로는 알 수 없으니까 언니들이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조작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냥 넘기기엔 너무 기이하잖아? 맞지?"


"맞아맞아. 그리고 조작 의혹을 처음 제기한 건 시티가드 언니들이야. 같이 감식했거든."


심각한 얼굴의 칸 대신 하르페이아가 능숙함을 발휘하고 내게 윙크했다. 우리 대장은 대장 실격이다.


해킹이 어쩌고는 잘 모른다. 발생했다는 보안 문제에 대한 건 유미한테 맡겨두자.


내가 맡을 건 '위장'이란 단어다.


짚이는 게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계 공부라도 해둘 걸 그랬네." 


나가면서 그렇게 말하니 닥터가 '돕는데도 비꼬는 태도다.'라며 투덜댔다. 나는 나름 칭찬했던 것이었다.






* * * 






펙스와 한바탕 치른 뒤의 오르카는 새해 맞이의 설레는 열기로 따뜻했다. 나는 그 따위 시끌벅적함은 즐길 생각이 없었으므로 준비되는대로 오르카를 나섰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동행 중인 녀석들에게 말했다. 곧 보게 될 모든 것은 너희의 소망으로 직조된 환상일 뿐이며, 상황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피를 볼지도 모른다. 


누구의 피일지는 숨겼다. 피를 볼 일이 없을 수 있기도 하거니와 뭐가 어떻게 되든 우리 피는 아닐 테니, 그냥 장난에 불과했다. 이년들에겐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겠지만.


"야. 야 이년아. 정신 차려."


안개로도 신기루로도 볼 수 없는, 하지만 마땅히 빗댈 것도 없는 공간에 들어서고서 고작 5분이었다. 경고했어도, 분명 이렇게 되겠지라는 생각은 했다.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르페이아나 리앤은 그럭저럭 뺨 몇 대 후려치니까 바로 돌아왔지만, 칸은 심했다. 뺨으론 안 돼서 볼을 꼬집어보고 뽀뽀도 해보고 '키스한다?' 라고 겁을 줘도 안 돌아왔다. 나 참. 뭘 보고 있길래 이 지경인지.


하는 수 없어 칸은 리앤과 하르페이아에게 맡기고 홀로 길을 나섰다. 우리 대장님을 돌려 놓으려면 빨리 정리하는 수 밖엔 없어 보였다.


"안 돼! 해치지 마세요! 제가 설득할 수 있어요! 설득할 수 있…!"


설득할 수 있으니, 뭐, 시간을 달라고? 아쉽게도 내가 쓸 시간은 있지만 배풀 시간은 없었다. 복부 한 번 걷어차이는 걸로 조용해질 년에게 왜 시간을 줘야 하는가. 이게 더 빠른데.


충분히 두들겨 맞은 마키나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째서 내가 낙원에 영향을 받지 않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친절하게 말해 줄 생각도 시간도 없었으니 죽기 싫으면 따라오기나 하라고 속삭여줬다. 성질 같아선 목을 치는 게 맞는데, 얜 죽으면 안 된다. 아직은.


칸에게 돌아가는 길에도 낙원은 유지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텅 빈 웃음을 보이며 점차 죽어가는 년들이 한무더기였고, 나머지 한무더기는 낙원으로도 달랠 수 없는 슬픔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낙원의 기원에 대해 알고 있어도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슬프다는 건지 모르겠다. 비애의 무게가 현실을 외면해버릴 정도라면 그냥 뒈져버리면 될 일이다. 사랑해 마지않은 인간님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거뭇한 금속 텅텅이들에게 덤벼들면 될 일이다. 


"씨발년들 진짜!"

"꺄아아악!"


메리가 비명을 지른다. 참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년을 죽였기 때문이다. 슬슬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까딱했다간 목적은 뒤로 하고 메리와 마키나를 쌍으로 처죽이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참는다. 참아야 된다. 


겨우 인내심을 끌어내서, 너도 죽기 싫으면 아가리 다물라고 진심으로 겁박했다. 


당장 죽어버려야 할 년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힘들다고. 그 누가 가진 비애라 한들 내 안에 들어찬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난 그런 걸 네 번이나 반복했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라는데, 그렇다 해도 내 쪽에서 이해해 줄 생각은 일체 없다. 


오르카로 복귀해서 마키나를 대충 치료하고, 폐하와 대면시키기 전에 다음 목적지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 몇 일 동안 칸은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낙원의 영향이 생각보다 큰 듯했다. 


"곧 출항한다는 듯하군. 찾아갈 생각이라면 서둘러야 할 거야."


좀 더 지나 멀쩡해진 칸이 폐하에게 '장거리 탐색' 건에 대한 결재를 받고서야, 그 공장으로 갈 수 있게 됐다. 호라이즌으로부터 고속정을 지원받고 육지에서는 ags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편리함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값은 반드시 돌려받겠다고, 칸은 입을 열 때나 닫을 때 꼭 강조했다. 리앤에게 듣자니 폐하와 제법 입씨름을 거칠게 했다는 듯했다. 


뭘 꼭 돌려줘야 할 건 없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런 결말을 피한다는 것 자체가 큰 선물일 것이다.







* * * 






닥터에게 받은 공장의 좌표와 도착한 곳의 좌표를 대조했다. 맞게 도착했다.


멸망한 세계에 남은 공장이라기엔 형태가 잘 유지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 공장지대의 다른 곳들도 동일했다. 다만 오늘날의 공장이라고 하면 대부분 ags제조 공장 ―다른 말로는 철충―을 뜻하기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일행의 수가 제법 많았다.


쓸데없이 시끄러워진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데려올 수 있는 만큼 데려오는 게 정답이었다. 현장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곳도 ags공장이었다. 


그 공장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다시 좌표를 확인한다.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공터 뿐이다. 역시 영상은 조작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위장'을 살펴 볼 시간이다.


"야. 씨발아. 살펴 봐."


툭툭 쳐도 마키나는 반응을 안 했다. 또 패야 되는가 싶었는데 하르페이아가 나섰다. 뭐, 그래. 굿캅 배드캅이란 거다. 진짜 경찰들은 한창 공터를 뒤지는 중이니 역할 정도야 대신할 수 있는 거다.


"뭘 살펴봐야 하는지는 말해줘야지…"


마키나와 대화를 마친 하르페이아가 상냥하게 물어왔다. 나는 "흔적! 그년 드론이 일으킬 만한 것이 여기서도 일어났는가 살펴 보라고!" 라고 소리쳤다. 눈치없는 년들 같으니. 


20분 정도 지났다. 공장지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공장이다보니 주변은 숲이나 낮은 산 밖에 없었다. 날씨는 기분 좋게 흐렸지만 찾아온 목적이 기분 나쁜 것이라, 정신 속 온도계의 수은은 중간에 걸쳐 있었다.


"없대." 라고 다가온 하르페이아가 말했다.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는데, 적어도 '자신의 드론이 할 수 있을 법한' 뭔가가 일어난 흔적은 없다나 봐."


내 시선은 하르페이아에게 향해있지 않다. 그 뒤의 리앤에게 있다.


"그럼 이건 뭔데?"


막 다가온 참인 리앤의 손에 들린 걸 가리켰다.


어쩐지 마키나 이 씨발년 같더라니.


"으… 이게 뭐야?"


하르페이아 이년은 낙원에서 뺨 맞은 이유를 벌써 까먹은 것 같았다. 


"저년한테 물어봐."


"아냐. 아니에요. 전 모르는 일이에요."


가리키기가 무섭게 마키나가 말했다. 내가 부를 땐 대답 한 번 안 하더니, 적잖게 당황했다.


"네 드론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똑같다기엔… 색깔이 다르잖아."


이건 검은색인 걸, 하고 리앤이 마키나를 감쌌다. 색깔이 달라도 조형이 같으면 똑같다고 하는 게 보통이다.


"이거… 마치 철충같네."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이 마키나는 자신의 드론을 꺼냈다. 마키나의 드론도 색감이 어두운 부분은 있었지만, 리앤이 찾아낸 드론(?)은 전체가 유광의 흑색이었다.


리앤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철충이란 단어를 꺼낸 리앤 본인도 뭔가 꺼림칙한 걸 느낀 듯했다. 


"그래서, 결국 여기는 왜 온 거야?"


하르페이아의 말이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게. 왜 왔지. 위장이란 단어를 닥터의 그래프와 매치시켜 보니 마키나일 거라고 직감한 것까진 좋다. 실제로 현장에서 색깔은 다르나, 마키나의 드론과 완전히 동일하게 생긴 드론(?)을 발견하기까지 했다.


그 다음은? 뭘 확인해야 하지?


난 무엇에 이리도 불안해 하는 거지?


그때였다.


"나타났다."


어느새 뒤에 와있던 칸이 좀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 영상 속의 공장이 갑자기 나타났다."


두 번 말 안해도 된다. 내 눈으로 보고 있다.


잡초만 가득한 공터였던 곳에 공장이 나타났다. 


"당신들… 뭐죠? 도대체 뭘 찾는 건가요?"


아무도 마키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 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칸이 공장에 시선을 둔 채 몽롱한 어조로 말했다. "영상은 조작된 게 맞다는군. 방금 닥터의 교신으로 보고 받았다."







* * * 






복귀한 다음날 아침, 오르카는 알래스카를 떠났다. 간밤에 꾼 꿈 때문에 잠이 모자랐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와서 꿈 같은 걸, 그것도 폐하가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꿈. 나라는 년의 무의식이 다루는 통계에 따르면, 폐하는 사랑 앞에 허물이 없는 인간이었다. 애정표현에 망설임이 없고 반사적으로 보이는 몸짓이나 표정에 구김이 없다. 그런 인간이라 빈틈을 보이기만 하면, 나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말들을 무신경하게 쏘아댔다. 


한 문장을 읊기엔 쓸데없이 긴 시간을 들여서. 무신경하게까지 들리는 것들 중에서도 그 몇 마디만은 나름 차분히 고심하여 꺼낸 것이라는 걸 내가 깨달을 때쯤이면, 폐하는 시선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오늘 새벽부터 들어온 보고다. 읽어봐."


머리를 흔들어 폐하를 지웠다. 

수면 부족의 원인일 뿐이다.


칸에게서 패널 조작 권한을 인계받고 보고서를 열람했다.








* * *







작성자:유미

제목: 보안 관련 문제에 대한 보고 및 향후 방침에 관한 건의.


통신 보안.

전산, 통신 및 보안 담당 개체 유미입니다.


근일에 발생한 보안 관련 문제에 대해 알아낸 것을 보고드립니다.


먼저, 방호벽의 재구축에는 성공, 외부로부터 침입한 프로그램 제거 및 보안 리포팅 갱신도 완료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스카디의 협조도 있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멀웨어 형태의 소프트웨어였습니다. 멸망 전 가까운 과거부터는 거의 쓰임이 없던 종류였기에 꽤 애를 먹었습니다만, 구조가 단순하여 빠르게 대처가 가능했습니다.


멀웨어라고 하면 생소하실 수 있겠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악성 코드, 바이러스 같은 겁니다. 이번에 말썽이었던 건 루트킷을 닮은 것으로, 백도어, 웜, 트로이 목마 등등, 침입에 용이한 기능을 제공하는 도구함 같은 것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부터 본론입니다만, 해결은 했으나 이상한 점이 몇 개 있습니다.


첫 번째. 역추적이 불가능했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불가능했다기보다 종착지가 없었다고 하는 게 옳겠습니다. 침입 경로가 바뀐 정황은 곧바로 발견했기에 역추적 자체는 가능했지만, 침입의 초입부가 어디인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적성 대상을 특정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두 번째. 피해가 없습니다.


멀웨어의 침입은 보안부 메인프레임의 3번 터미널까지, 스파이웨어 형태로 잠복 중이었습니다. 잠복 기간은 최소 2주였기에 오르카의 다양한 정보가 빠져나가고, 그 흔적이 남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만, 정말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유출된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저 설치만 되었을 뿐, 스파이웨어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세 번째. 침입 소프트웨어에 대한 제대로 된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멀웨어로의 기능을 하는 것은 분명하고 퇴치 자체는 했지만, 어딘가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는 게 스카디의 의견입니다. 이쪽의 대처에 맞춰 즉각적으로 변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나요. 목적하는 기능이 아닌, 구성 코드부터가 완전히 바뀌는 것 같았답니다. 생물로 치자면 날개의 필요성을 느낀 개구리가 자신의 몸을 모두 허물고, 날개에 알맞는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과 같다더군요.


혼란스럽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선 그녀를 찾아가 보시는 것이 빠를 겁니다.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으로, 보안과 관련된 방침에 대해 1차 건의를 드리고자 합니다. 좀 더 유연한 대처가 가능한 방향으로 개정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먼저 건의안의 개요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열람이 끝나시면 사령부 측으로의 보고 여부를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 * *






작성자:리앤

제목:자료 열람 권한에 대한 문의.


안녕 대장님. 나야 나. 리앤. 얼마 전에 발견한 밀항자 얼굴은 봤어?

아니 글쎄 여우래 여우. 알래스카에서부터 창고에 숨어있었다나 봐. 


어휴, 얼마나 꾀죄죄하던지. 지금은 컴패니언 쪽에서 이것저것 당하고 있다던데?

대장님도 시간나면 한 번 가서 봐. 되게 웃긴 얼굴하고 있을 걸.


아, 메시지를 보낸 건 다른 게 아니구, 혹시 이전에 조사한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을까 해서. 


그, 권한이 막혀 있더라구. 페더한테 물어보니까, 사령관한테는 비밀이라 대장님이 관련 파일을 프라이버시로 지정해놨다더라. 


따로 자료들을 조사해보고 싶어. 

혹시 모르잖아? 경찰의 시선이 도움이 될지. 


알았지? 이거 보면 답신줘야돼? 







* * *






허탕의 연속이었다. 꼬리가 여러 개 달린 올챙이든 다리가 많은 거미든 문어든 발견하지 못했다. 


밀항하던 여우가 오르카의 일원이 되고, 안드바리가 폐하의 품에 안길 무렵까지 다다랐다. 이제 반년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해도 '반년 밖에 남지 않았다.' 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미식별 개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 전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들 뿐이었다. 오리건에서 일어난 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유미의 보고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동시에 명도가 낮은 희망도 품었다. 기이한 것들 투성이지만 이런 전개는 분명 처음이었기에,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면 평화로운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다는 기대가 들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한다. 칸을 선택한 이상, 최선은 파멸과 관련된 맹점을 파악해가며 발로 뛰는 것뿐이다.


그날도 수색에 나서던 참이었다.


"발견! 발견!" 라는 울림이 칸의 귀쪽에서 들렸다. "진짜 있었어!"


갑작스러운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바로 반응하지 못 했다. 그저 어느 순간 내 손 안에 이어마이크가 들어와 있었다. 


칸의 귀에 손을 뻗었었다는 걸 자각했을 땐 마이크에 어디냐고 소리치는 중이었다.


"제주도! 일출봉 기준 서쪽으로 5km떨어진 지점! 좌표 송신할게!"


부랴부랴 좌표 지점으로 향하자 샐러맨더와 퀵 카멜, 티아멧이 대기 중이었다. 아직 해가 모두 떠오르지 않았기에 절벽을 낀 해안은 파스텔톤의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세 명 모두 우리가 온 것도 모르고 발밑을 보고 있었다. 손이 닿을 거리까지 가도 인사는 오고가지 않았다.


"이거,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


죽어서 떠밀려온 고래같이 암초에 걸린 그것을 두고, 카멜이 들릴락 말락 한 크기로 말했다.


"최초 발견자는 누구인가."


"제가 발견했어요." 


티아멧이 칼끝으로 그것을 툭툭 건드렸다.


"제압한 건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런 상태였습니다."


티아멧은 설명을 시작했다. 히루메와 새벽 일찍부터 해를 보러 나선 사령관의 호위로 나서게 됐는데, 안전한 지역이란 걸 확인한 다음엔 컴패니언에게 뒤를 맡기고 수색에 나섰다. 나온 김에 돌아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다 비행한지 10분도 안 되어서 발견했다. 멀리서 봤을 땐 죽어서 떠밀려온 해양 생물로 착각했으나, 가까워질수록 이질감이 커졌다. 처음엔 크기가 제법 되는 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문어 치고는 커도 너무 크고, 칼로 건드리면 금속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났기에 생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완전히, 난생 처음보는 무언가다.


"일단 숨겨." 라고 나는 칸에게 말했다. "티아멧의 말대로라면 근처에 폐하가 있어."


"이거, 죽은 거 맞지?"


칸이 당황한다는 드문 광경이었다. 아까 티아멧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인 것 같았다.

한동안 충격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아 내가 조치하기로 했다. 


네오딤을 꺼내 그것을 잡아서, 절벽 위쪽의 숲에 숨겼다. 일단 오르카로 복귀했다가 다시 준비해서 그것을 회수하기로 했다.


회수 작업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끝내게 됐다. 나를 뺀 모두가 몸서리를 쳐댄 탓이다. 아무리 죽은 것이라도 오르카에 철충을 반입한다는 행위에 여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발각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라, 반입 과정도 힘겨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닥터의 공방에 처넣을 수 있었다. 


드디어 발견했다.


시야가 트인다. 미약하기만 하던 희망의 명도가 조금 높아진 기분이 든다.








* * *







제주도 해안을 시작으로 정체불명의 철충 개체는 계속해서 발견됐다. 횟수로 따지면 수색 10회에 한 번 꼴, 어림잡아 2주에 한 번 이상은 어떻게든 포착되고 있었다. 호드가 발견하지 못하면 하르페이아가, 티아멧이, 코헤이 년들이, 현장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닥터가 위성사진을 건네오는 흐름이었다.


그렇게 눈에 불을 켜도 찾을 수 없던 녀석들이 조금씩이나마 발견되고 있다. 한 번 인식했기에 눈에 잘 들어오게 된 걸까. 아니면 숨겨진 뭔가가 더 있는 걸까. 아주 오랜만에 가능해진 긍정적인 사고는 불안을 동반하고 있었다.


육지에는 충분히 스며든 봄의 기운이 바다에서도  어렴풋이 느껴질 무렵, 수색에서 돌아오자 내일은 모두 모여달라는 닥터의 전언이 있었다. 그저 모이라는 말뿐이었지만, 그 개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자리일 것이 분명했다.


잠들기 전 떠올려본다. 거미 같기도 올챙이 같기도 한 녀석.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매트릭스에서 우수수 죽어 나가던 그것과 똑닮은 모습, 센티널이란 이름이었던 것 같다.


영화 속의 그것은 철충과 같이 인간에게 발작적이지만, 현실의 그것은 좀 달랐다.


처음으로 멀쩡히 움직이던 걸 발견했을 때였다. 겨울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의 사거리에는, 인간의 눈치를 볼 일이 없어진 목련과 매화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숲에 그것이 있었다. 이리저리 동체를 돌리며 가지에 생겨난 꽃망울 쪽을 올려다 보는 게, 마치 숲을 관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의 동체 위에는 오목눈이 몇 마리가 자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총성에 놀란 오목눈이가 날아가도 그것은 여전히 위를 바라 본 채였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어도 붉게 명멸하던 눈들은 끝까지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에 대한 칸의 감상평은 '너보다 기이한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였다. 나는 반만 동감했다.


"다들 모이셨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다음날, 늦은 시각. 칸의 지휘관실. 집중하지 않으면 듣는 게 불가능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세띠였다. 커다랗게 띄워둔 패널 옆에서 제대로 고개도 못 드는 녀석이, 어째서 오늘 모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눈치채고 칸이 '닥터가 끌어들였다.'고 간결하게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칸이 남자였다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패널에는 미식별 개체(가칭:센티널) 조사 결과 보고, 라고 딱딱한 폰트로 적혀 있었다. 


시작하겠다고 말한 지 1분은 됐을 텐데 세띠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세띠에게 옆의 엠프리스가 "긴장하지 마." 라고 북돋아줬다. 


보기 좋은 광경이다. 이제 1분이라도 빨리 보고해주길 바란다.


…그로부터 5분이 넘어갈 때까지, 보고는 시작되지 않았다. 참고자료라며 엠프리스가 모두에게 유인물을 배포했을 뿐이다. 유인물의 내용은 한 눈에 봐도 복잡해 보였다. 좌측 상단에 '참고*이해를 돕기 위한 단순화된 모델로 짜여진 도식입니다.'라 적혀 있었다.


패널에 문제는 없어 보이고, 세띠는 계속 패널 옆에 있었으니 보고자료도 수정이 필요하거나 하는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세띠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럴수록 세띠는 더 말을 못하게 된다. 근본이 그런 녀석이다. 참지 못하고 윽박지르면, 이대로 자리가 끝날 가능성도 있다.


간만에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인내심을 발휘하자고 마음먹은 걸 환기 할 때쯤, 가장 앞 쪽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이목이 세띠에서 닥터로 옮겨간다.


"언니! 내가 말같은 소리를 하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이게 뭐야!? 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닥터는 소리치며 손에 든 유인물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거 또 이러네!?" 앞으로 나선 엠프리스가 세띠를 몸으로 가렸다. "진짜! 다른 분들도 있는데 성질 내는 거 봐!"


"어차피 여기있는 대다수는 이 프린트가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도 못 해."


"난 네 얘기를 하고 있어. 너 진짜 성격 나쁘구나?"


"관찰했답시고 이딴 걸 들고 왔는데 그럼 화가 안 나!? 저 패널도 똑같아. 무슨 소릴 해댈 건지 안 봐도 비디오야!"


"왜 우리 세띠한테 그래! 도와달라고 한 건 너잖아!"


"입 안 닥쳐!? 그래서 더 화가 난다는 걸 꼭 말로 해줘야 돼!?"


어리다고 싸울 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웬만한 성숙한 개체보다 비난에 능숙한 모습을 보이면, 감히 말리기도 어려워진다. 지금 막 둘에게 다가간 아자젤이 그런 상태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은 건 나와 칸, 그리고 뒷자리의 하이에나와 워울프 정도였다. 이 둘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눈치라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 그 사이에도 엠프리스와 닥터는 살벌한 언변을 뽐내고 있었다.


"저 둘? 자주 저랬어. 잊을 만하면 다투더라고." 워울프가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은 좀 심한 편이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보고하지 않았나."


"지성인들의 의견 교환이란 건 보통 저런 결과로 이어지잖아?"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 대화엔 뒤끝이 없고 감정이 상하는 일도 없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결국 저 둘이 저렇게 된 건 가칭:센티널 때문이다. 


발표니 뭐니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할 상황이 아니었다. 닥터는 코헤이 녀석들이 데리고 나가도록 한 다음, 우리는 세띠에게 향했다.


실제로 싸운 건 1분도 안 됐지만, 세띠는 몇 십 분이나 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 아직도 씩씩대던 엠프리스는 세이프티에게 맡겼다.


무슨 말이든 하기 어려운 상태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정 봐 줄 생각은 없다. 세띠는 좀 더 고생해줘야 한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닥터의 공방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불침번인 팬텀과 레이스와 마주치지만 곤란해지는 일은 없다.


이런저런 것들이 웅웅대는 어두컴컴한 공방은 쌀알만 한 빛이 몇 개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닥터는 생활관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공방에 불을 켜고 돌아온 세띠는 공방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던 센티널 앞에 섰다. 그리고는 칸에게 촉수 형태의 기관을 직접 만져볼 것을 권했다.


"부드럽군. 연질 같은 게, 조금이지만 탄성도 느껴진다. 복합섬유 같기도 하군."


칸을 따라 나도 촉수를 만져봤다. 연질 같다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질감이 가장 비슷한 걸 떠올려보자면, 타이어, 합성고무 같았다.


"그렇죠…?"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세띠가 말했다. "하지만 금속이에요."


"말랑한 금속이란 소리인가? 그런 게 가능해?"


칸이 그저 고개를 갸웃대는 것에도 세띠는 움츠러들어갔다. 겨우 짜내듯 중얼거렸는데, 귀를 최대한 기울여서야 '그 쪽과 관련된 지식은 없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쪽과 관련된 지식이 없는데 어째서 닥터가 너에게 도움을 청한 거니?"


세띠는 또 움츠러들었다. 나는 그냥 물었을 뿐이다. 어조도 평범했다.


다시 대답할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줄 겸 유인물을 살폈다. 


원자 배열과 구조가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적힌 그림의 옆에는 세포 조직과 신경계의 구조도와 모식도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그 두 그림을 합친 듯한 것이 틈새형 합금 구조의 형태로 추정이라는 문장과 함께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닥터가 제게 도움을 청한 거예요." 라고 내게 말한 세띠가 심호흡했다. "저, 적확한 표현일 수는 없겠지만… 이건 금속이면서, 생체 조직이기도 해요. 세포의 특성을 가진 금속 입자라 해도 좋고, 금속의 특성을 가진 세포라고 해도 좋아요. 그, 그 이상은 어떻게 설명이 불가능해요."


"그래도 설명해."


"불가능해요!" 세띠는 소리쳤다. "모르면 알아내면 돼요! 찾아내면 돼요! 하지만 이건 그 어디에도 '없는' 거라구요! 없어야 하는 게 눈 앞에 나타나서 조사하라고 하면! 당신은 할 수 있나요!?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냐구요! 이건 말이죠! 단순히 생체와 금속을 결합시켰다 수준이 아니에요! 두 특성을 모두 가진 완전히 새로운 물질로 만들어진 무언가에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어요! 이게 뭐죠!? 어떻게 이런 물질이 있을 수 있죠!? 합금 제작하듯이 만들어진 건가요?! 액화된 금속과 생체를 섞어서요!? 어떻게 결합시킨 건데요?! 아니! 어떻게 융합시킨 건데요!? 어떻게! 그런 것이 어떻게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이루면서 똑바로 기능하고 있느냐구요! 아세요? 저 촉수, 잘라도 재생해요! 아하하! 재생하는 금속이라니!"


전 그저 동물 구조에 필요한 수준의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구요 세띠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걸로 봐선 추가적인 설명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알았다. 지휘관실에서의 세띠는 그저 긴장했던 게 아니다. 패닉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닥터도 마찬가지. 과연 싸움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언니들. 이리 와."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았더니, 닥터가 와 있었다. 세띠에게서 전염된 패닉에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서 기다려." 널찍한 작업대 앞에 우리를 대기시킨 닥터는 세띠와 몇 마디 나누더니 다시 돌아왔다. "세띠 언니하곤 잘 풀었어. 언니들한테도 미안."


"미안할 것 없다. 그래서?"


칸이 세띠가 불가능해진 설명을 닥터에게 요구하자, 닥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세띠 언니랑 같아. 뭐라 설명을 못하겠어. 할 수 있는 건  저것이 지니고 있는 기능에 대한 것 정도야."


"그걸로 충분하다."


"먼저 선을 그어둘게. 세띠 언니가 결합이니 융합이니 뭐라 했다고 해서 진짜 그런 거라곤 생각하지 마. 어디까지나 융합한 것처럼 보이는 거지, 융합할 수 없는 것끼리 융합한 것은 융합했다고 말할 수 없어. 혹시 규소-금속 중합 자생적 유기체를 떠올렸다면 그만둬. 그 따위 것이랑 나란히 두면 실례야."


"규소-금속 중합 자생적 유기체?"


하이에나가 볼을 긁적였다.


"철충의 유충 말이야."


"어, 아, 그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거, 철충이라고 부를 수 없겠어."


"네 말대로라면 그렇겠군. 철충은 유충, 유충에게 침식 당한 ags, 연결체를 가리키니까. 미지의 물질로 구성된 무언가가 아니지."


설마 또 닥터가 그렇게 될까 우려라도 하는 건지, 맞장구 치는 칸의 모습에서 눈치를 보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 직후 나를 대하는 닥터의 태도로 보면, 직감이라도 했던 것 같다.


"너. 이리와 봐." 닥터가 나를 보고 순식간에 얼굴을 바꿨다. "너 뭐야?"


"?"


"너 뭐냐고."


"뭐야 이거. 회까닥했어?"


"설명해. 너 뭐냐니까?"


"아하. 좀 당황스러운데."


이봐, 하고 내 어깨를 움켜잡은 칸이 고개를 무겁게 저었다. 알고 있다. 이전이라면 몰라, 지금은 바이오로이드더라도 애한테까지 그러진 않는다.


"티아 언니의 검을 역설계로 프린팅한 자료야." 닥터가 자신 앞에 패널을 띄웠다.  "그리고 이건 네 검. 아무리 비교해봐도 완벽하게 일치해. 리리스 언니, 팬텀 언니의 것도 마찬가지. 틀린 건 성능 뿐이야. 소재나 탄종까지 완전히 동일한데 어째서 네 무기들이 더 뛰어나? 누가 만들었어?"


"내가 만든 건 아냐."


"누구한테 받았어? 무기들을 담아두던 장갑은? 자기장을 마음대로 조종 가능한 또 다른 장갑은 누구한테 받은 건데? 그건 어떤 기술로 만든 건데? 왜 대답 안 해? 왜 대답 못 해?"


"닥터. 진정해라."


"언니. 입 다물고 있어줘. 내가 말하고 있잖아."


이거 위험한데.


"야. 아르망 추기경."


패널 빛을 받아 파랗게 된 닥터의 얼굴에 얼굴을 내민다. 적당히 할 생각이 없다면 나도 봐주지 않는다.


"150년 전으로 떨어졌었다며?"


"응 ㅋㅋ"


"거짓말 하지 마. 이 또라이 년아. 복원 개체였다고? 150년 전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150년을 기다려서 오르카를 찾아와? 그것도 네 번이나? 왜? 어째서?"


"몰라~"


"ㅋㅋ 이 정신나간 년. 하나도 설명을 못 하네. 야. 모든 결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이 세상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아직 기술과 지식이 모자라 설명을 유보한 것뿐이지,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네 물건들이 그렇지. 센티널도 그래. 근데, 150년 전으로 떨어져?"


"닥터! 그만 해라!"


"이 씨~이팔년. 누가 과학자 아니랄까봐 말하는 것 좀 봐."


"너까지 뭘 하는 거야!"


"다 너 때문이야!" 뻗어오는 팔들을 뿌리치고 닥터가 외쳤다. "네가 오기 전까진 모든 게 괜찮았어! 전부 다 좋았다고! 전부 다! 네가 오면서부터 저런 터무니 없는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거야!"


닥터는 적당히 누른다고 기가 죽을 년이 아니었다. 대충 받아치려던 나는, 공방의 모두가 뜯어말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진지하게 이년을 죽여야 하나 고민했다. 


왜 내 탓이지? 남자가 준 장갑과 그 안에 든 무기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냥 받았으니 쓰고 있다. 센티널을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냥 기억 속에 있던 녀석일 뿐이다. 


왜, 내가 계속해서 150년 전으로 떨어지는지, 나도 모른다.


"이게!"


살과 살의 밝은 마찰음이 울렸다. 발광하기 직전이던 닥터는 내가 아니라 자신이 뺨을 맞았단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몸을 축 늘어뜨려 얼굴을 감췄다.


"오늘은 여기서 해산한다." 칸이 하이에나와 워울프를 지목했다. "닥터는 맡기지. 다음 집합 시간은 개별로 통지하겠다. 이상."


공방을 나선다. 나서기 전 시야에 들어온 센티널에게서, 죽었음에도 이쪽을 노려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 * *






작성자:닥터

제목:정체불명 개체에 관한 조사 결과 보고(1차)


안녕하십니까. 080소속, 저항군 기술고문 개체 닥터입니다.


먼저, 보고드리기에 앞서 근일 발생했던 소동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동시에 두 번 다시 그러한 일은 없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가칭:센티널의 불가사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전에 대면으로 보고드렸기에 생략, 1차적인 조사로 알아낸 사항에 대해서만 보고드리는 것임을 참고 바랍니다.


제원: 전장 3500mm(다리 포함), 전폭 1700mm, 중량 250kg


외형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센티널은 두족류의 생김새와 매우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족류의 신체 구조가 몸통-머리-다리 순이라는 것을 기억하신 뒤, 몸통을 빼면 센티널이 됩니다. 따라서 센티널의 형태는 머리-다리 입니다. 또는 머리와 다리가 몸통을 겸하고 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김새가 흡사할 뿐입니다. 두족류로서의 특징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머리입니다. 연질과도 같던 다리와 달리 머리는 곤충의 외골격이 연상되는 갑각이 둘러져 있습니다. 1차 조사로 알아낸 주요 구성분은 키틴, 텅스텐, 티타늄, 그리고 알터리움이며 이들은 면에 따라 폐쇄, 간극연접 양식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눈(렌즈)은 총 11개, 각각의 눈이 크기 대비 넓은 광각을 가지며, 기능 실험에 따르면 거의 모든 종류의 파장을 감지 가능한 것으로 추정 중입니다. 더해서 딱히 언급할 만한 사항은 아니지만, 첫인상으로 거미의 홑눈을 떠올리지 않으셨나요. 생긴 게 그러니까요. 그렇다면 거미 같다고 보셔도 상관 없을 것 같습니다. 센티널의 렌즈 내부 구조는 거미의 그것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다음으로 눈 외의 기관입니다. 중앙의 단안 아래에 두 개의 부속지를 가지며, 이 부속지의 말단은 강한 유동성을 띱니다. 간단하게 말해, 형태의 변형이 가능합니다. 


부속지 사이에는 작은 홈이 있습니다. 내부에는 모기의 입과 같은 형태로 탑재된 짤막한 기관이 있는데, 부속지와 같은 강한 유동성은 띄지 않으나, 보다 많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추정 됩니다. 일단 알아낸 기능으로는 레이저 투사(내부 구조 조사 결과, 이산화탄소 레이저를 투사 가능한 것으로 판명했습니다.), 안테나입니다. 


다음으로 머리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 입니다…만, 아직 단언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가 모이지 않았습니다.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와쳐 오브 네이쳐 소속의 세띠와 같이 간결한 모델링으로 도식화하였으니, 참고 바랍니다. 






* * *






"곤란하게 됐네…"


입에 담배를 물었지만 피우지는 않는 하르페이아가 말했다. 필터에서 느껴지는 단맛이 좋다며 입술로만 맛본 게 세 개비 째다.


"이런 담배는 어디서 구했대."


"이번에 탐색 나간 곳에 담배 공장이 있더라구. 자기 생각나서 슬쩍했지."


좋은 말을 듣고 싶다는 듯이 눈을 빛내길래, 젖가슴을 따귀치듯 후렸다.


"꺅!"


"칭찬 받을 짓 하면 뭐라도 떨어질 줄 알아? 젖가슴이라도 빨아줘? 침대로 갈래?"


"우웃…"


"왜 얼굴을 붉혀? 설마 기대한 적 있어?"


아니야! 라고 뒤늦게 고개를 휘저어봐야 늦었다. 이년, 분명 날 가지고 상상한 적 있다. 최근에 뭔가 이상한 걸 읽었는지도 모른다.


갑판은 고요하다. 바다도 그랬고 하늘도 그랬다. 하르페이아 가슴만 한 달이 하늘에서도 바다에서도 빛을 뿜었기에 따로 조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 어쨌든… 한동안은 같이 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 전대장이 말이야. 사령관한테 제의를 받…"


"아이돌하자고 했겠지."


하르페이아는 눈을 꿈뻑였다.


"아 참… 다 알고 있지."


"곡명도 알려줄까?"


"아니."


그 대신, 하고 하르페이아는 검지를 입술 앞에 둔 채 거리를 좁혀왔다. 내가 빌려준 린스 향기가 풍겼다.


"노래 불러주라."


"뭐 이 미친년아?"


욕도 아랑곳 않고 더 가까이 오더니, 멋대로 내 팔에 팔을 감았다. 최근 들어 이런 식으로 애교를 부리는 일이 부쩍 늘었다. 


"호드 언니들한테 들었어. 노래 엄청 잘 부른다던데?"


"부른 적이 없는데 그년들이 어떻게 안대?"


"취하면 막 불렀대…"


나도 참. 이마에 손을 짚고 생각해 봐도 기억이 없다.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기도 하고, 내가 좋다고 다가오는 년은 하르페이아와 페더를 제외하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가슴에 닿을 정도로 내 팔에 달라붙어선 재촉하듯 흔들고 있다. 


조금은 서비스를 베풀어도 좋겠다 싶었다. 


"와… 대박…"


노래를 듣던 내내 붙어있던 하르페이아는 가식없는 감탄을 터뜨렸다. 부끄러울 이유는 없는데, 하르페이아를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됐지? 이제 좀 놔."


"곡명이 뭐야?"


하르페이아는 더 달라 붙어왔다. 좋아하는 게 독서라 그렇지, 이런 년들은 만족을 모른다.


"웅? 자기야. 알려주라."


"아 징그러워! 처맞을래 진짜!? 빨리 안 떨어져!?"


"알려주면 떨어질게."


"너 씨발 나 좋아하니?"


"웅. 나 너 좋아해. 몰랐어?"


"뭐?"


"그.러.니.까…" 뭐 때문에 요염한 톤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사랑해… 좋아한다구…"


얼굴이 가까워진다. 달 만큼 영롱하면서 야릇하게 빛나는 눈, 달빛을 받아 더 선명해진 분홍색 입술에, 내 숨결이 반사돼서 되돌아올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너… 너… 죽…"


그렇게 계속,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다 갑자기 하르페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씨발년. 내 그럴 줄 알았다.


"아하하! 얼굴 심각한 거 봐! 진짜 웃겨!"


"너 진짜 죽을래!?"


수 분 간 쉼 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하르페이아의 등을 난타했다. 이건 뭐가 좋은지, 처맞아도 깔깔대며 다시 키스하려 얼굴을 내미는 시늉을 하는 둥, 나를 약올려댔다.


"그래도 좋아하는 건 맞아." 숨을 고르던 중에 하르페이아가 말했다. "있잖아, 자기한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데 실제로는 보호 받을 필요가 없고, 몸가짐이나 표정이나 눈빛이 다른 개체들하곤 뭔가 달라. 그게 너무너무 끌려서, 옆에 있지 않으면 이제는 불안할 정도야."


"지랄도 정도껏 해."


"…어때? 요즘도 마냥 다른 개체들이 싫어?"


"싫다고 한 적 없어."


"얼굴에 다 쓰여 있었거든? 차라리 오만상을 찌푸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단 말이야."


"그러셔."


"친해지자고는 말 안 할게. 오히려 나하고만 친했으면 좋겠어. 그래도, 응? 잘 지내자."


"이게 나를 아주 통째로 잡아먹으려고…"


"침대로 갈까?"


"닥쳐!"


이후에 하르페이아는 신생 그룹 스카이나이츠의 보컬 트레이너가 되어달라고 청했지만, 나는 당연히 즉시 거절했다. 이년이 오늘 한 짓을 두고두고 담아둘 생각이었다.


그래도 뭐, 조금 재밌긴 했다.


"곤란하게 됐군."


며칠 뒤, 칸은 갑판의 하르페이아와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머리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매만졌다. 듣자하니 몇몇 개체들에게 의심을 사고 있다는 듯했다.


"누군데?"


"마리, 레오나, 메이다."


"아하. 벽창호 삼대장."


"요즘 들어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고 한 소리 하더군. 어디서 무얼 하냐던데."


"걔들은 절대 안 돼."


"안다. 다만,"


작은 탁상 램프만 켜놓고 이어폰에 집중하고 있던 칸은, 몇 번이나 얼굴을 구기고 펴더니 말했다.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말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런 사이에 칸이 다시 물어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목도한 것들, 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되겠냐는 거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을까? 얘는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네가 결정할 문제잖아."


"왜?"


"돌이켜 보렴. 내가 마수를 뻗은 건 너지, 다른 년들이 아니야. 이젠 네가 구심점이라고."


볼륨을 꽤 크게 해놨던 건지, 이어폰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자 아이돌 음악 같은데 곡명은 모르겠다. 

그런 곡들을 담아 놓긴 했는데, 설마 가리지 않고 듣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나만 말할게. 만약 보고하게 된다면 전부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만 알아둬. 어떤 건 보고하고 어떤 건 삼켜두고, 그렇겐 안 돼. 알지?"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에 대해 보고하든, 꼬리에 꼬리를 물 거야. 공장에 대해서도, 보안에 대해서도, 마키나에 대해서도, 오르카 내에서 폐하께 비밀을 가진 모임이 있었다는 것도. 1년이나 넘게 말이지. 그 중심엔 콘스탄챠의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까지 말하게 될 걸."


"그렇게 되겠지."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폐하에 반하는 짓을 해온거야. 거짓말하고, 비밀을 만들고, 숨기고, 도움이 될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을 가려내기까지 했어. 다시 말하는데, 그런 식으로 1년이 넘었어. …감당할 수 있겠니?"


"재고하도록 하지."


"아 참, 그리고." 칸이 불러 세웠다. "한동안 수색은 중지다. 센티널의 세부 조사에 진척이 없으니 수색에 의미가 있겠냐만, 이젠 적당히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과 어울려줘야 해. 우리 쪽 녀석들도 많이 지쳤어."


"그럼 좀 쉬라고 해. 난 알아서 있을게."


"곧 스카이나이츠가 무대에 오를 예정이라더군. 이왕이면 즐기지 그래."


"관심 없어."


정말로 관심 없었고 티끌만큼도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하르페이아의 보컬 실력 향상을 위한 개인 교습을 해주게 된다. 


고작 2주 남짓한 시간을 쏟는다고 눈에 띄게 좋아지진 않을 것이라 헛수고였지만, 하르페이아의 목적은 '나와 그런 시간을 보낸다.' 자체에 있는 것 같았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 한다고, 하르페이아는 한 가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며 '원하는 건 없다.'라는 내 대답은 못 들은 척하고 내가 부탁하기를 강제했다. 거절하면 침대로 끌고 갈 거라길래 죽고 싶으면 그러라고 진심으로 말했지만, 이 녀석은 내면에 묘한 것으로 구성된 스위치를 가지고 있는 듯한 녀석이라, 진짜 한다면 할 것 같은 년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침대로 가도 상관 없다는 눈빛이 결정적이었다.


기가 빨려 결국 백기를 들어버린 나는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부탁을 하게 된다. 하르페이아는 자신도 그리 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라며 겸양을 떨었으나, 나는 알고 있다. 이년의 활자놀림에는 확실한 매력이 있다.


그렇게 종종 쉬는 시간이면 하르페이아와 적당히 박혀있기 좋은 장소로 끌려가 독서하는 시간이 펼쳐졌다. '모든 쓰기는 읽기부터 시작한다.' 가 녀석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내 쪽에서 가르쳐 달라고 한 이상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나는 은근슬쩍 걸어오는 녀석의 스킨십을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후~ 엄청 힘들었어. 아르망. 나 어땠어? 잘했어?"


군중 속에서 숨은 고수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배로 긴장했어, 라고 너스레를 떨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펼쳐진 별밤의 무대에서 가장 돋보인 것은 하르페이아였다. 


"고생했네."


촉촉해진 얼굴, 땀에 젖어 들러붙은 복장, 반쯤 풀린 다리. 어째선지 그런 하르페이아가 야릇해 보였다. 무대라는 단어가 품은 설렘과 군중으로부터 스피커를 통해 반향된 행복에, 잠깐이나마 맛이 가버린 모양이었다.


봄의 끝자락이 다가온다. 여름이 아른거린다.


이 무렵 페더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듯했다. 내일은 아무것도 수색하지 말고 즐기러 나가자던가. 나는 너무 쉬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오자고 하기도 뭐했다. 


나는 몰라도 이녀석들은 지쳐있다.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차이가 있다. 원래라면 욕을 퍼부어야 할 타이밍이지만, 이번에 노는 걸로 끝이라면 어울려 줄 수 있었다.


안전이 확보된 근방의 도시로 외박계를 냈다는 페더는 호드의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고 강제했다. 하르페이아도 그렇고, 스위치만 켜지면 이 둘은 상당히 저돌적이게 된다. 그 시크한 칸 마저 페더에게 별다른 저항을 못했다.


"이왕이면 즐기라 한 게 누구더라?"


이제는 좀 알았으면 좋겠다. 칸 자신은 무표정을 짓고 있다 생각하나 본데, 기분에 따라 눈매가 미묘하게 다르다.―이때는 언짢을 때의 눈매였다.―이제 그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녀석이랑 보낸 시간도 시간이구나 싶었다.


"얜 왜 부른 거야?"


외박 당일. 호드끼리만 외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 왼팔에는 하르페이아가 달라 붙어있었다. 페더는 "부른 적 없는데요?" 라고 따라와도 상관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상관있다.


"아 좀 떨어져!"

"자기, 오늘도 튕기는구나? 귀여워 죽겠어."

"씨발년아!"

"꺄!"

"이게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네 눈엔 내가 애로 보여!?"

"웅? 애 맞잖아? 좀 고생한 아이."


조만간 하르페이아의 인식을 개변시켜줘야겠다.


"휴… 얼마 전에 말이지. 살짝 사고가 있었어."


수송기에서도 내 옆자리에 앉은 하르페이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뭔 사고?" 내 손등을 간지럽히듯 매만지던 걸 뿌리쳤다. "얼마 전이라면 너 무대에 선 거 밖에 없잖아."


"으응 우리 전대장이 좀 아, 도망가지 마."


다시 손을 잡혔다.


"니네 전대장이 뭐?"


"그, 그게 있지"


"말 할 거면 똑바로 해."


"그날, 무대가 끝나고 말이야. 그, 그 돌격했다고 해야 하나 사령관한테."


"아. 그래. 그랬지."


"그랬지?"


"이전에도 그랬거든. 니네 전대장."


"그, 그렇구나. 하여튼 그게 안 좋았어."


"거절 당했다?"


"응… 완전히."


"ㅋㅋㅋㅋ 비응신들. 유부남한테 뭐하는 짓이래."


"그, 그래도 남자는 하나에 여자가 이렇게 많으니까 용납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했나 봐."


"그 이전에, 인식에 치명적인 차이가 있는 거지. 남자이지만 인간, 니들은 바이오로이드. 뭔지 알겠어?"


"너는 왜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란 것처럼 말해?"


"내가 철충 상대하는데 폐하 필요없는 거, 봤잖아. 그런데도 내가 바이오로이드로 보여?"


"웅."


"뭐야 이거"


"아 몰라! 사령관 아니면 자기랑 놀면 되지!"


"밀착하지 마!"


분명하다. 이년은 나를 그냥 애도 아니고 껴안기 좋은 곰인형 쯤으로 보고 있다.


도착한 시내는, 어디가 안 그러겠냐만 아주 엉망이었다. 수송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곳엔 야생 동물의 배설물이, 몇 발 치 떨어진 곳에는 벌거벗은 대형 전광판이 나뒹굴고 있었다. 형태를 유지 중인 고층 건물에 가려 햇빛은 들지 않았고, 그래서 약이 오른 건지 여기저기 퍼져있는 녹색은 다른 도시의 것보다 억세 보였다.


미지의 정글 초입부를 연상케하는 곳이다. 멸망한 세계더라도 돌아다닐 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는데, 골라도 이런 곳을 골랐다.


그런 식으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은 나뿐, 다른 녀석들은 날씨 좋은 날에 우연히들 카페에서 만난 미성년자처럼 새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 쪽이에요." 라고 밝은 표정의 페더가 말했다. "저기 건너에 백화점이랑 쇼핑몰이 있어요."


여러가지 할 말은 많았지만 페더는 외박을 계획한 장본인이다. 목적하는 장소가 그리 나쁜 곳은 아닐 것이다.


십분 뒤, 우리는 거대한 백화점 주위로 폴리카보네이트 천장을 가진 아케이드 쇼핑몰 근처에 도착했다. 조금이라도 부서지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이십 분 더 걸어서 도착한 반대쪽 입구의 카페가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통나무가 테이블을 대신하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의자로 있는 테라스석에 자리를 폈다. 한쪽이 내려앉아 걸려있느니만 못한 간판 위에서 지빠귀와 할미새 몇 마리가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추진기로 흙먼지를 마저 치운 하르페이아가 오고나서야 나는 준비한 것을 꺼냈다.


"알아서들 나눠 먹어." 내 몫의 빵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맨날 식사 같지도 않은 걸 먹는 꼴이 안타까워서 좀 준비해 봤어."


사실은 폐기 처분 될 식재료로 만들었을 뿐이지만, 매번 수색에 나설 때마다 식사로 삼던 것들에 비하면 훨씬 먹을 만한 것들이었다. 워울프나 하이에나는 수색 중에 몇 번 사냥해서 먹었던 야생 동물의 고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면서도, 내가 만든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어줬다. 굳이 둘에게 말할 건 아닌데, 그 고기도 내가 요리했기 때문에 먹을 만했던 거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페더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했다. "이름이 뭐에요?"


"그냥 쿠키슈야. 크림치즈에 체리로 만든 젤리랑 딸기를 넣었어."


"아, 이건 뭔지 알아요. 뺑오 쇼콜라죠?"


"티라미수가 남길래 얹어봤어. 좀 과할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먹어."


"자기야. 이건 뭐야?" 내 옆을 차지한 하르페이아가 마들렌을 가리켰다. "안에 뭐 넣었어?"


"바닐라."

"이건?"


"피칸이랑 초콜릿을 넣은 쿠키."


가리키는 걸 일일히 말해줄 만큼 많은 종류를 만든 건 아닌데, 하르페이아는 계속 내 팔을 잡아당기며 디저트의 이름을 물어왔다.


그것이 페더가 "이건 뭐에요?" 라고 끼어들 때마다 조건반사적으로 취하는 반응임을 깨달은 건, 다음 디저트까지 갔을 때이다.


"그 옆에 있는 건 아몬드 크림을 넣은 까눌레… 야."


"웅?"


나는 맞은편의 볼을 잔뜩 부풀린 페더를 가리켰다. 데려오지 말 걸 그랬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너 지금 쟤 견제해?"

"웅."

"왜?"

"자기는 내 거잖아. 내가 이렇게 신경을 쏟는데 나만 봐줘야지."

"디저트만 먹더니 머리가 돌아버렸어? 진짜 날잡고 처맞아볼래?"


하르페이아는 얼마든지 맞겠다고 헛소리를 했다. 당연히 장난이지, 라는 시선을 하고 있긴 했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한바탕 하게 될 날이 온다. 그게 어떤 형태가 됐든 날 원망하진 말아야 할 것이다.


보온병에 담아놨기에 향과 맛이 아쉬워진 에스프레소로 마무리를 하고 그릇을 정리했다. 요리라고 부를 것들은 페더를 뺀 호드가, 디저트는 페더와 하르페이아가 쓸어버렸다. 서로는 그것을 당연한 배려의 결여라 결론 짓고 왜 남기지 않았느냐며 다퉜다. 그 광경은 결국 내 요리실력이 뛰어나단 뜻이었겠으나, 기쁜 건 하나도 없었다. 어느 쪽이든 후려갈기고 싶었다. 


말은 없었어도 나와 같은 감상인 듯한 표정의 칸과 쇼핑몰 골목으로 들어섰다. 다투는 소리에 놀란 새 몇 마리가 우리 옆을 지나갔다.


"야." 


칸은 시선으로만 대답했다.


"넌 왜 아무 말도 없어?"

"?"

"내가 만든 거 맛 없었어? 네 생각해서 이틀 전부터 준비한 거란 말이야."

"먹을 만했다."

"먹기는 더럽게도 많이 처먹고 고작 먹을 만해?"


내 말을 무시하듯 뒤를 돈 칸이 아직도 다투고 있는 쪽에 손짓했다.


"하르페이아. 이리 와라."

"야!"


이년은 갈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내가 좀 짓궂게 말해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거나, 단둘이 있을 때 오두막의 상황을 재현하려 들어봐도 미동도 안 한다. 그러면서 지금에 와서는 주위 환경을 적절히 활용하는 여유까지 갖췄다. 나는 칸이 내건 조건을 슬슬 어겨야 하나 고민했다.


"여기가 오늘 저희의 플레이 그라운드에요!"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페더가 힘차게 외쳤다. "여자들끼리 놀러 나오면 당연히 쇼핑이잖아요? 다들 예쁜 옷 잔뜩 챙겨서 돌아가자구요."


"무슨 인간인 것처럼 말하네."


또 토라진 것 마냥 볼을 부풀린 페더를 지나쳐 백화점 안으로 향했다. 또 달라 붙으려는 하르페이아는 뿌리쳤다.


내부는 외부보다 나았다. 1층을 구성하는 뷰티 브랜드의 간판들은 불이 들어오지 않았어도 색감을 유지 중이었다. 에스컬레이터도 작동만 안 할 뿐, 계단으로써의 역할을 하기엔 괜찮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쇼핑이란 단어가 귀에 흘러들어와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모처럼 그럴 기분이 들어 4층의 유니섹스 캐쥬얼 플로어와 5층의 여성 의류 플로어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아무 매장에 들러서 가장 큰 쇼핑백을 챙겨나왔을 쯤이었다. 백화점 내부의 스피커가 지직거리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페더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쇼핑에 음악이 빠질 순 없다니 뭐니 지껄이던 스피커는, 이내 음악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중에 페더를 말리는 듯한 칸의 목소리와 흘러나온 첫곡을 통해서 내가 준 cd플레이어의 리스트인 것을 알았다.


종업원 한 명 없는 백화점에 잇지의 Sneakers나 니키 미나즈의 Super Freaky Girl같은 음악이 흐르는 광경은 꽤 신선했다. 몇 년을 살고 있는데 왜 이런 발상을 한 번도 못 했던 걸까.   


5층까지 둘러 보면서 적당히 고른 것 같아 1층으로 향했다. 3층인가 4층에서 보인 하르페이아는 음악에 맞춰 살랑거리는 엉덩이춤을 추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돌 한 번 해봤다고 흥이 많이 오른 것 같다. 


마주칠까봐 걸음을 빨리해 1층으로 가서 화장품을 살펴보기로 했다. 딱히 사용할 생각은 없으니 그냥 기분만 내기로 했다.


사전에 합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트랙이 꽤 여러 번 바뀌고서 입구 쪽에서 다시 모였다. 저마다 필요하다 생각한 것들을 양손 두둑하게 챙긴 상태였다.


딱 한 명 빼고.


"뭐냐."


내뱉은 말 그대로, 뭘 보냐는 시선이 어이가 없었다. 손에 들린 건 상의 한 벌, 하의 한 벌이 끝이었다. 그것도, 이걸 뭐라고 말할지 잘 모르겠는데, 대충 보이는 대로만 말하자면 코디라는 개념이 머리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한 픽이라고 해야 할까. 끝내주는 조합이다. 센스 한 번 기가 막힌다. 


물론 그런 부분의 센스야 잘만 소화할 줄 안다면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그것도 그렇고 가장 심각한 것은, 칸 자신은 딱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도저히 같은 여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보지 말고 말을 해라. 뭐냐니까."

"너는…"


아니, 발상을 바꿔본다. 여자지만 여자로 살아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내가 바이오로이드를 가장 혐오하면서도 부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멸망 전에도 후에도 바이오로이드는 언제나 바이오로이드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말로 해봐야 칸은 모른다.


"어이! 이봐!"


이 딱딱한 년. 군인이기 전에 여자란 자각도 없나. 


칸이 들고있던 이상한 것들은 아무 녀석에게나 던져주고 손을 잡아 끌었다. 놀러 나왔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오늘 정도는 이년도 여자여야 한다.


"잠깐! 아프다! 놔라!"

"넌 오늘 호드에서 제일 깜찍해질 줄 알아! 알아들었어!?"

"손 아프다니까!"

"늑대는 깜찍하지 말란 법 있어!? 넌 오늘 각오해!"


욕지거리를 뱉어가며 빠른 걸음으로 4층과 5층을 다 둘러 봤다. 그래도 왠지 성에 차지 않아 백화점을 나가서 아케이드 쇼핑몰까지, 골목이란 골목은 다 돌았다.


"익숙해 보이는군."


나온 김에 로드샵 브랜드 매장을 둘러보던 중에 칸이 지껄였다. 


"뭔 소리야?"

"말 그대로다. 쇼핑이 익숙해 보여."

"당연하지. 이, 같은 여자로 안 보이는 끔찍한 년아. 넌 군소리 말고 잘 따라다니기나 해."

"역시 멸망 전인가?"

"나는 너처럼 멸망 전에도 바이오로이드로만 살지는 않았거든?"

"……인간으로 산다는 건 어떤…"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다물자. 응?"


묻지 않겠다며? 그렇게 말하니 칸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깊게 끄덕였다.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와 1층을 돌고서 파티션을 설치하고, 옷을 갈아입게 했다. 


연한 라일락 색상의 스웨트 셔츠와 녹색 a라인 하이웨스트 미니스커트 조합의 칸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러나 그걸로는 성에 안 찼다.


스툴에 반듯하게 앉히고 움직이지 말 것을 지시했다. 대장이란 입장을 잠시 잊은 듯 칸은 고분고분 따랐다.


1층과 로드샵에서 집어온 것들을 꺼낸다. 위장을 지우고 난 후에는 아무 관리를 안 하는 건지, 다 뒤집어지기 직전인 피부부터 진정시키기 위해 토너 패드를 잠깐 붙여뒀다. 본판이 괜찮아서 크게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면 나중에 트러블이 생겨도 할 말이 없다.


패드 다음에 세럼과 수분 크림을 발라 피부를 더 촉촉하게 만들어주고, 선크림을 바른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톤업이 되는데, 왜 안 하는 걸까?


브러쉬를 꺼내 베이스를 뭍혀 얼굴에 살살 펴바른다. 확실하게 톤업이 필요한 부위에 집중해 바른다. 간지러운지 칸의 얼굴 군데군데가 움찔댄다. 마음 같아선 화장이 아니라 간지럼을 태우고 싶지만, 지금의 나는 칸보다 진지해야 한다. 


아이 크림을 꺼낸다. 언제 끝나는 거냐고 칸이 답지 않게 칭얼대듯 궁시렁댔다. 아직 반도 안 했다고 짤막하게 말해주고서, 커버가 필요한 부분에 추가로 아이 크림을 발랐다.


앞머리에 헤어롤을 만다. 컨실러를 이용해 관리 부실로 인한 잡티를 위주로 커버하며 블렌딩한다. 제대로 커버가 안 된 곳이 더 있나 꼼꼼히 찾아가며 계속 컨실러를 움직인다. 도중에 내 얼굴은 색칠 공부용 종이가 아니라고 칸이 말했다. 뭘 모르나 본데, 화장은 공부와 연습이 필요한 색칠이 맞다.


중간점검을 위해 화장솜을 꺼낸다. 지금까지 바른 게 뭉쳐있으면 부자연스러우니, 화장솜으로 뭉친 부분을 문질러 다시 펴 발라준다.


스크류 브러쉬를 꺼내 눈썹을 정리한다. 그 다음에 아이브로우를 꺼낸다. 칸은 눈썹이 예쁘니 살짝 보정하는 느낌으로만 그려주고서 팔레트를 꺼냈다.


화려함은 자제하면서 화사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 섀도우는 무펄에 쉬머한 느낌이 좋을 것 같다.


"아직인가…?"

"시끄럽고, 팔 내밀어 봐."

"손에도 바르는 거냐?"

"손에 왜 발라 멍청아. 양 조절 해야 되니까 내밀라고. 내 팔에 바르리?"


한 대 치고 싶다. 어떻게든 언더라이너까지 끝냈다.


"눈 뜨고 있어."

"그건 뭐냐."

"병신아! 뷰러도 몰라!? 속눈썹 찝을 거니까 가만히 있어!"


뷰러와 마스카라 픽서까지 하고 파우더 브러쉬를 꺼내서 블러셔를 발라 마무리했다. 입술은 틴트로 충분하니 코랄빛이 도는 걸로 발랐다. 입술 색깔이 타고나서 크게 신경 쓸 게 없었다.


헤어롤을 풀어 앞머리를 내리고, 뒤로 가서 머리를 마저 정리해줬다. 이제 진짜 끝. 될 수 있다면 커트까지 해주고 싶었는데, 일단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간 대장님을 위한 봉사가 인내심 테스트가 되어버린다.


파티션 앞으로 먼저 나와서, 모여있는 녀석들에게 말했다.


"야. 따까리들. 감탄할 준비해."


나와. 라고 파티션 뒤에 말했다. 반응이 없었다.


"나와."


반응이 없었다.


"부끄러울 거 없으니까 나와! 제발!"


파티션 왼편에 손이 걸쳐지고, 반신이 나왔다가 도로 들어갔다.

더는 못 참겠어서 파티션을 걷어차버렸다.


"누구…?" 멍청한 얼굴이 된 샐러맨더가 말했다. "호드에 이런 개체는 없는데?"


"농담하지 마라."


이제 적당히 포기한 듯 꼿꼿한 자세로 선 칸은 무표정이다. 제대로 역효과가 터지고 있다. 그 무표정을 노린 메이크업이기 때문에 예뻐보이는 게 싫을수록 더 예뻐 보인다. 


"그러니까 누군데?" 


워울프랑 하이에나는 놀리는 티가 났다. 


"불쾌하군. 이 이상 장난은 용납하지 않겠다."


"와. 외모에 신경쓰는 고등학생 같아."


퀵 카멜이 감상을 내뱉음과 동시에 페더가 칸에게 달려들었다.


"이봐! 떨어져라!"

"대장님! 대장님이죠!?"

"떨어지라고 했다!"

"대박! 엄청 예뻐! 좋은 향기도 나요!"

"냄새 맡지 마!"


칸의 양 뺨을 잡은 페더는 거의 키스할 기세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반대쪽에선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제법인데?" 


다가온 하르페이아가 팔꿈치로 찔렀다. 


"그냥 간단하게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했을 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무대 오를 때 너한테 메이크업 해달라고 할 걸 그랬어."


그건 그거다. 오르카에선 절대 그럴 생각 없다.


"여러분! 우리 사진 찍어요!"


페더에게서 사진기가 튀어나오자, 도망치려던 칸은 휘하의 대원들에게 둘러싸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나는 하르페이아에게  너도 끼어들라 말하고 빠져나오려 했지만, 나도 잡혀버렸다.


모두가 카메라를 바라본다. 뒤통수를 짓누르는 하르페이아의 젖가슴에 단념하고,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외박 기념 셀카를 찍고, 환복한 상태에서 한 시간 정도 주변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진 뒤 오르카로 복귀했다. 


복귀하고나서는 화장을 지우든 말든 상관없는데, 점호 때까지 칸은 내가 코디한 모습으로 돌아다닌 듯했다. 내게 감사 인사를 한 걸 보면 틀림없었다.


"고맙다."

"알면 됐어."

"…음. 그게, 사령관에게 칭찬을 받았다."

"잘 됐네."

"그래. 내가 이렇게 예쁜지 처음 알았다더군."


은근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단 말이지.


"방금 거 좀 재수 없었어."


폐하의 감상 같은 건 관심 없어.







* * *







다시 본 궤도에 오를 시간이다.










* * *









반갑습니다. 글싸개입니다.


이번 화는 좀 쉬어가는 느낌입니다. 작중 아르망이 마지막으로 쉬었던 게 꽤 오래 전인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고 다음 화 수위를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할지 애를 먹고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빨리 쓰겠습니다.


날이 춥습니다. 아무쪼록 다들 건강하시길 빕니다.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