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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맘대로?"

"시간 낭비군. 게다가 술자리라니... 주인님이나 비서진에게 허가받지 않은 주류 반입은 징계 대상 아닌가?"


너무도 예상대로인 반응이 돌아오자, 천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먼저 얘기 꺼낸 내가 미친 년이지... 하지만, 자신이 총대를 매지 않으면 이 모래알 같은 조직력을 가진 사냥개들이 단합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천아의 주머니 속에는 이 모든 부정적인 반응을 단번에 해소할 히든 카드가 있었다.


"지지배들... 그럴 줄 알고 언니가 미리 허가 받아 왔지. 이미 다른 부대들도 각자 자기들끼리 송년회 챙기고 있는 것도 몰라?"


천아가 내민 종잇장에는 사령관의 직인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이 종이쪼가리 하나가 뭐라고, 그때까지 들은 체 만 체 하던 둘의 태도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소파에 누워 있던 장화의 한쪽 눈이 슬그머니 떠졌고, 바르그는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서 불출 허가서의 내용을 한 조목 한 조목씩 살펴 읽고 있었다.


"부대 별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주류 반입을 허가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과 성을 다하느라 모두의 일정을 맞추긴 힘들 테니, 각자 편한 날짜에 망년회를 추진하도록 하세요... 비서진에게 회식 일자를 공지해 주시면 사령관도 일정이 맞는 한 잠깐만이라도 참석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절도를 지키면서 연말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됐냐? 핫팩한테 공인 받은 거고, 명목도 '부대 단합'이야. 멍멍아, 부대장에 니 이름 걸려 있으면 원래 이런 건 니가 나서서 추진해야 하는 거 아니니? 뭐 또 태클 걸 거 있어?"

"흐, 흠... 확실히... 단독 임무가 많던 이전과는 다르게, 협동해야 할 일이 많으니... 이런 자리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군..."


주인님의 권고임을 확인하자, 역시나 바르그는 더 변명을 주절거리지 않고 꼬리를 내렸다. 내렸는지 올렸는지도 잘 보이지 않을 앙증맞은 꼬리이지만.


하지만, 아직 말을 더럽게 안 듣는 금쪽이가 남아있었다.


"그럼, 참여 여부도 자유라는 거네? 난 귀찮으니까 그냥 니들끼리 하지 그래? '단합'이라는 명목도 오히려 머릿수 많으면 방해되는 내 주특기랑은 상관없는 거 아닌가?"

"주인님의 말씀을 뭘로 듣는 거지? 부대장으로서 대원의 불복종을 묵과할 수 없군."

"저런 종이 쪼가리가 주인님의 말씀이라고? 그래 봤자 계급 빨로 가까운 자리 차지한 년들이 꼬드긴 거겠지. 그리고, 누가 대장이야? 그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치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예전에도 대장다운 짓을 하긴 했던가? 맨날 우리들 모가지만 따고 다녔다면서?"

"하."

"자~ 둘 다 그만~"


역시나 첩자였다는 앙금이 장화의 마음 속에 깊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세 명이서 같이 앙헬의 무덤지기를 상대했을 때는 일시적으로 일치단결했다고 하더라도, 그리 쉽게 떨쳐내지는 못하겠지.


그러니까, 더더욱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천아는 개와 고양이처럼 가르랑대는 둘을 부드럽게 떼어 놓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냥 술 마시고 놀 목적도 있긴 하지만.


장화의 팔을 붙잡고 바르그에게 안 들릴 장소로 데려간 천아는, 넌지시 속삭였다.


"야, 진짜 안 가게?"

"...미쳤다고 내가 거길 왜 가?"

"아 쫌! 핫팩이 너만 겉도는 거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리고, 저번에 같이 여제님 무덤 앞에서 싸웠을 때 좀 풀린 거 아니었어? 왜 자꾸 먼저 말을 좆같이 하는데? 핫팩이 친하게 지내라고까지 했는데."

"..."

"뭐가 문젠데 도대체?"

"...그런 거면 굳이 술자리가 아니어도 되잖아."

"...뭐라고?"


천아는 눈썹을 기울이며 우물쭈물하는 장화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뭔 소리래?


그리고, 이어서 새빨개진 장화에게서 흘러나온 고백으로 의문이 해소되었다.


"술... 그 맛대가리도 없고 나중에 머리만 아픈 거... 먹기 싫다고..."


의외로 깜찍한 이유였다.


"...쿱."

"웃기냐?"

"아, 아니. 의외라서."

"뭐가 의왼데? 너처럼 발랑 까진 년이 아니라서?"

"누가 발랑 까졌다고 그래? 남자라곤 한 명이랑밖에 안 자봤는데."


째릿, 하고 노려보는 장화를 가볍게 무시하며, 천아는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서 비밀을 말해주듯 속삭였다.


"너... 핫팩이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못 들어봤구나?"

"...! 뭐, 뭐라고?"

"있잖아... 그 워울프가..."


'밧줄', '묶어서', '강제로' 등의 불순한 키워드가 지나가고, 이젠 귀에서 피가 터져나올 지경으로 빨개진 장화가 애써 부정하듯 중얼댔다.


"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야, 왜 상관이 없어? 이거 듣고도 주인님이랑 술 마셔보고 싶지도 않아? 그럴 때 니가 술 못한다고 빼거나, 아니면 억지로 같이 먹다가 핫팩보다 먼저 나가떨어져서 그럴 기회도 못 받으면... 어마어마하게 손해 아니야?"

"..."


아직도 반쯤 망설이고 있는 장화에게, 천아는 마지막 쐐기를 꽂았다.


"아니면... 쫄리냐?"

"뭐...!"

"알쓰라서 빨리 나가떨어질까봐?"


얄밉게 웃으며 도발하는 천아에게, 장화는 바락바락 외쳤다.


"하! 그냥 별로 안 좋아해서 그렇지, 마시기 시작하면 너 같은 건 그냥 쳐발라 버릴 수 있거든?! 너야말로 취해서 진상 빨지 마라?! 나보다 먼저 꼴면 주정 부리는 거 내가 다~ 찍어서 절대 그딴 소리 못 하게 할 테니까!"


걸렸다. 이래서 놀려먹는 맛이 있다니까. 천아는 마음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그렇게,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가지런히 세팅된 과자류, 마른 안주, 육포, 좌탁 한가운데의 버너 위에 놓인 술국, 방주 내의 온실에서 재배한 제철(?)과일, 그리고 주방에서 받아온 여러 요깃거리까지. 조촐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셋이서 먹기엔 충분히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물론, 주식(酒食)도 풍부했다. 한 짝씩 옮겨 놓은 희석식 소주, 부담 없이 마시기 좋은 피쳐 맥주, 나름대로 장화를 배려하기 위해 몇 병 슬쩍해 온 달달하니 마시기 편한 혼성주까지... 물론, 장화는 그런 배려를 알아챈다면 그 쪽에는 보란 듯이 손도 대지 않을 것이다.


한가득 차려놓은 술상과, 모두 앞에 가지런히 세팅된 식기와 여러 종류의 잔들. 바르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곤, 반절 조금 넘게 채운 맥주 잔을 들어올렸다.


"크흠, 자... 제가 먼저 건배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주인님께 먼저 감사드리고, 에... 우리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발전과 단결을 도모하여..."


또 건배사는 언제 써 왔는지, 상 위에 놓인 종이 쪽지를 흘긋거리며 지루한 연설을 이어나갔다. 마지 못해 들어올린 천아의 작은 소주 잔과,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닥에서 살짝 드는 둥 마는 둥 떨어뜨린 장화의 소맥 글라스도 후들거리기 시작할 무렵, 천아가 적절하게 컷트했다.


"야, 야. 스톱 스톱! 언제까지 할 거야? 제일 쪼끄만한 년이 제일 개 꼰대같네! 그냥 대충 건배 해. 핫팩도 없는데 왜 이렇게 길게 하냐?"

"설령 주인님이 안 계신다고 해도..."

"건배! 건배!"

"...건배."


이 점에서는 장화도 동의했는지, 성의 없이 잔 밑둥을 톡, 하고 맞부딪혀왔다. 얼떨결에 잔을 마주친 바르그는 모두가 잔을 꺾어 올리기 시작하니 허둥지둥 자신도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장화는 호기롭게 5대 5 비율로 맞춰 꿀과 비슷한 색감을 뽐내는 소맥을 넘기면서도 눈으로는 천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 오늘 저 년만큼은 잡고 쓰러진다. 눈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런 메세지가 출력되고 있을 것이다.


"읍?!"


허나, 겁없이 넘긴 첫 모금은 말로 이룰 수도 없이 독했다. 아무리 맥주로 소주의 역한 알코올 향을 눌렀다고 해도 초심자나 다름 없는 장화에게는 반반 비율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장화는 반대편에서 순식간에 잔을 비우고 어느새 물을 마시는 천아를 보여 결의를 다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예전엔 더 심한 것도 충성심 테스트를 빙자한 학대를 당하며 삼켜 보았으니까. 장화는 억지로 잔을 들어 올리며 그대로 목구멍 안쪽으로 털어놓았다.


"우읍... 꿀꺽... 꿀꺽..."

"어우, 야... 힘들면..."


탕!


첫 잔을 원샷한 장화는 탁자 위에 잔을 내리찍고는 격한 날숨을 뿜어냈다.


"푸하아... 뭐라고?"

"오올~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물 좀 마실래?"

"됐거든...!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너나 많이 마셔라."


대놓고 호승심을 불태우는 장화를 보며 천아는 절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물잔으로 살짝 가렸다.



**



그리고, 천아가 경악하는 데에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이 년들... 설마..."


천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체질을 넘어선 몸의 이변이 지금 천아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감당 못 할 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실감이 들어서였을까? 생각 없이 들쑤신 벌집에서 손가락만한 말벌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광경에 천아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천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잔을 움켜쥐었다. 대체 내가 어쩌자고 장화를 도발했을까? 생각해 보면, 제대로 주량 파악도 못한 상대에게 시비를 건 것부터가 천아의 패착이었다. 천아는 두렵게 고개를 들어 장화와 바르그를 쳐다보았다.


"이것들 실환가..."


"흐흑, 엄, 엄마아아아아~!"

"야 이쒸, 이쒸발... 듣고 있냐? 하이씨, 씨뻘... 으윽. 어? 너 나 무시해?"

"술 드럽게 약하잖아...!"


제 주량도 모르고 경쟁하듯 들이켜댄 장화야 그렇다 쳐도, 맥주 몇 잔 홀짝였다고 바로 즙 짜면서 엄마 찾는 저 년은 정체가 뭐란 말인가? 몸집에 비해 무게도 꽤 나가서 잘 마실 거라고 나름 기대했는데, 이 정도로 답도 없는 술찌들일 줄은 정말 몰랐다.


천아는 사냥개는 커녕 그냥 개가 돼 버린 두 하운드를 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취해서 주정 부리는 꼴 보는 것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내가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라와야 재밌는 구경이지, 정신 말짱할 때 보니 진상이 따로 없었다. 천아는 자신의 계획이 뿌리부터 어그러져가는 것을 실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망년회 자체는 부대 별 회식이라는 허울 좋은 탈을 쓰고 있지만, 어떻게든 사령관에게 술을 먹여서 자기네 부대에서 자빠뜨려 보려고 수작질하는 것들이 없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럴 확률은 타 부대와 회식 날짜가 겹치지 않을 수록 높았고, 몰래 거짓된 날짜를 흘리고는 스케줄이 널널한 다른 날짜로 잡아버려서 경쟁자를 줄이는 수법도 횡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비정규전은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특기였다. 천아는 그간 쌓인 경험으로 단숨에 핵심을 찔렀다.


거짓 정보가 난립하는 와중에도 비서진에게 전달되는 날짜는 진짜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령관은 그 일정표를 보고 얼굴을 비추러 다닐 테니까. 천아는 그 점을 노려서 친분이 있는 오렌지에이드를 꼬드겨서 '진짜 회식 스케줄'을 손에 넣었고, 회식 일정이 아예 없는 이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다른 부대들이랑 날짜가 겹쳐버려서 확률이 줄어드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고, 여기저기서 한 잔씩 얻어먹고 몸에는 다른 여자들 냄새 묻힌 채로 얼근히 취해서 들어오는 핫팩을 맞이하기도 정말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적당히 달아오른 분위기에서 노 마크가 된 핫팩을 술을 빌미로 주정 반 애교 반으로 녹여버리고, 그대로...


"야, 쉬, 쉬, 쉬발... 쉬, 시발련아. 그, 근뒈... 그래도... 니가 스, 스발바르에서... 내 연락 받고 돠준다고 했을 때에... 사, 사실 쪼, 쪼오~금 가, 감동했다?"

"이, 임종도 지키지 못한 효녀를, 딸꾹. 흐, 흐으으..."

"씨, 씨빨... 그, 근데... 쪼, 쪽팔려서 고, 고맙다고 어어어케 말해... 그, 그래도 알지이? 그, 그래서 지금 말하자나... 고, 고맙다고 썅년아!"

"수리란, 술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사,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위, 흐끅, 위한 것인데..."


...라는 미래는, 이 웬수 같은 꽐라들을 데리고는 도저히 나올 턱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핫팩이 와 봐야, 고주망태가 된 둘을 수습하면서 자연스럽게 파하는 분위기가 될 게 뻔했다. 답없는 둘만 버리고 혼자 홀랑 핫팩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쓸데없이 착한 핫팩은 만취한 둘을 신경쓰느라 자기한테 온전히 몰입해 주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저 두 년의 아가리에 깔때기를 박고 물을 들이붓는 한이 있더라도 핫팩이 오기 전까지 조금이나마 술을 깨게 만들어야 했다.


"아 씨, 수, 술이, 술이 없서..."


상 위를 더듬거리다가 술병을 잡은 장화의 손을 천아가 재빨리 낚아챘다.


"술을."

"내, 내 술... 머야... 어디갓서..."

"술을 좀 적당히 쳐먹어 씨발! 곧 있으면 핫팩 온다고!"

"쥬, 쥬인님? 쥬, 쥬인님도 와?"

"안 오면 내가 여기서 이 지랄 왜 하고 있겠냐? 야, 멍멍이! 너도 그만 마셔! 말고 옆에 물 있잖아, 물!"

"안 된다... 나, 나같은 불효자는 차라리 먹, 먹고 죽어야...!"

"병신들 진짜 돌아버리겠네!"


천아는 열이 뻗치는 것을 느끼며 옆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렸다. 공교롭게도 엠프레시스 하운드 숙소의 초인종이 눌리기 30초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