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감시 카메라가 촬영하는 화면 너머로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리리스는 표정을 굳혔다. 하르페이아의 감정을 건드려 칸-리마토르-하르페이아로 이어지는 삼각관계 속에서 리마토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관측하려는 공작이 아스널에게 한 번, 리마토르에게 한 번, 칸에게 한 번, 총 세 번이나 박살났기 때문이었다. 아스널이 하르페이아를 떼어낼 것도, 리마토르가 하르페이아의 감정을 진정시킬 것도 그녀의 계산 밖이었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칸의 감정이 폭발해 리마토르를 기절시키고 납치하는 일까지 벌어지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젠장, 이러면 나가리인데...”

 

리리스는 그녀답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고민했다. 칸이 하르페이아를 폭행해서 기절시키고 리마토르도 목을 졸라 기절시킨 뒤 납치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제시했지만, 동시에 리마토르에게도 여태까지의 공작을 다 엎어버리고도 넘칠 정도로 훌륭한 고점을 주었기에 리리스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여론 공작만 잘하면 리마토르를 완전히 보내버릴 수 있지만, 저쪽에서 칸 대장과의 연정을 조명하면 리마토르에게 동정표가 붙어. 전자라면 아주 좋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씁, 주인님을 위한 일이라면 답은 하나뿐인가.”

 

완벽한 사령관의 승리를 대전제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던 리리스는 최대한 안전한 길로 가는 것이 사령관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는 리제가 준 깨꽃 하나를 빨아 꿀을 혀에 바르며 환풍구 안으로 몸을 넣었다. 입 안에 감도는 꽃꿀의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리리스의 움직임에 힘을 주었다.

 

 

 

그 시각 리마토르는 잃었던 정신을 되찾았다. 꺼졌던 의식에 다시 불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새까만 시야와 부서질 듯이 아픈 두통에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는 누워있는 곳에서 일어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고 간신히 힘을 쥐어짜 의식이 끊기기 직전의 기억을 복원했다.

 

‘으윽.... 머리가.... 아, 분명 칸이 내 목을 졸랐지... 산소공급이 차단되었던 후유증인가. 젠장,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머리가 통째로 부서지는 것처럼 아프네. 칸이 그 때 날 기절시키면서 울던 장면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네.’

 

기절하게 된 경위를 정리한 리마토르는 자신이 현재 있는 곳으로 사건의 흐름이 이어졌음을 자연스럽게 추론했다. 칸이 자신을 기절시키면서 ‘둘만의 낙원’을 언급했다는 점을 떠올린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자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납치당한 건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칸한테.’

 

맥이 탁 풀린다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그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이 아직 제 기능을 되찾지 못한 눈의 오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눈은 뇌보다 먼저 제 기능을 되찾았지만 그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었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려던 그는 벽을 조금씩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벽 질감을 만져보면 금속이란 말이지. 이는 곧 칸이 나를 납치했다고 해도 오르카호 내부라는 사실을 의미해. 칸을 잘 달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아스널이 구하러 온다는 기대를 가져도 될 거야.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이 벽만 말랑하지?

 

잠깐, 이 촉감은...’

 

 

“일어났구나, 당신?”

 

스위치를 찾던 그의 손은 목표에 없던 대상을 찾아버렸다. 그가 자신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약간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감촉이 무엇에서 오는지 머릿속을 뒤지던 중, 촉감의 주인은 어둠을 가르고 목소리를 냈다. 리마토르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기 무섭게 그녀는 불을 켰다.

 

“칸...”

 

“일어나자마자 만지는 게 나라니, 역시 당신도 내가 그리웠구나.”

 

“이런! 미안해요.”

 

자신이 만진 말랑한 물체가 다른 부위도 아니고 하필 칸의 가슴이라는 사실에 당황한 리마토르는 바로 손을 거두었다. 일순간 그의 볼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홍조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은 칸은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누르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더 만져도 돼.”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데?

 

아, 내 가슴이 하르페이아보다 너무 작아서 불만이야?”

 

리마토르의 말에 칸은 표정을 싹 굳히고 그의 양팔을 봉쇄했다. 그를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탄 칸은 방금 전 연구실에서 보여주었던 생기 없는 눈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답을 요구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대체 왜, 뭐가 문제인 건데?”

 

“그런 게 아니에요! 이렇게 칸이랑 둘이 있는 상황이 갑작스러워서... 부끄러워서 그랬던 거에요.”

 

리마토르는 즉각 머리를 굴려 칸을 진정시킬 말을 찾았다. 다행히 그의 임기응변이 효과를 봤기에 칸은 그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더니 그의 위에 몸을 숙여 엎드렸다. 다시 생글생글 웃는 입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생기 없이 검은 눈에 자신을 담은 칸의 모습이 실로 두렵고 기묘해서 리마토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신 바짝 차려. 잘못하면 황천행이야.’

 

“당신... 따뜻하다. 이렇게 안고 있으니까 당신의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져서 정말 좋아. 몸이 짜릿짜릿해.”

 

“많이 좋아요? 저도 그래요.”

 

칸은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끌어 모아 부비적대던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체취를 맡았다. 들숨의 간지러움이 목을 훑고 지나가자 리마토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칸이 싸늘한 목소리로 ‘왜 피해?’라고 묻자 다시 목을 원위치로 고정시켰다.

 

“하아... 기분 좋다... 당신의 냄새에 중독되어버릴 것만 같아. 이럴 때면 내 이명에 늑대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늑대도 갯과니까 냄새로 영역표시를 하잖아.

 

당신에게 내 냄새를 묻혀두면 다른 년들이 집적거리지 못하겠지. 그렇지?”

 

“....”

 

리마토르는 답하지 않았다. 조금만 답변이 어긋나도 칸이 송곳니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보았기에 그는 도저히 칸을 달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녀의 감정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론이 아무리 완벽할지언정 현실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해 논파될지 몰랐기에 그는 자칫하다가는 상황이 악화될 거라는 두려움에 입을 열지 못했다.

 

‘젠장, 사령관 앞에서 말을 받아치던 패기는 다 어디 간 거야.’

 

그가 속으로 자신을 책망하든 말든, 칸은 그의 동의를 받았다고 판단했다. 턱으로 그의 목덜미와 어깨를 문지르던 그녀는 목에 입을 맞추더니 공기를 빼며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압력 때문에 피가 몰려 칸의 입술이 있던 자리에 맞추어 빨간 자국이 생기자 칸은 원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짠, 이제 됐다. 내 거라는 표식. 이게 있으니까 더 이상 다른 년들이 눈독들이지 않겠지?”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 리마토르는 웃음을 찾지 못했다. 저렇게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칸이 어린아이 같은 귀여운 면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의 재확인이 그녀를 안아주고픈 충동을 부채질했다. 부담을 한결 던 그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면서 달래자는 전략의 초석을 놓았다.

 

“키스마크 또 새겼어요? 참, 이게 몇 번째에요.”

 

“몇 번째... 다섯 번째네. 다섯 번이나 키스마크를 새겼지만 하르페이아가...!”

 

“어?”

 

갑자기 상황이 그의 예상과 정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는 당황했다. 안전장치로써의 키스마크를 인정해서 칸에게 심리적 안정을 부여하려고 했건만, 칸은 안전장치가 있었는데도 하르페이아에게 그를 뺏길 뻔했다고 반대로 판단해 더욱 그에게 매달렸다.

 

“당신, 키스마크로는 부족하지? 맞아, 당신 말이 맞았어. 키스마크만으로는 부족했어. 그럼, 그럼 뭘 해야 하지?”

 

“칸, 진정해요!”

 

“아니야, 당신을 뺏길 수는 없어.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안전을 담보하는 방법이... 그래! 키스하자, 지금 당장.”

 

“칸...”

 

“안아줘, 당신도 날 사랑하잖아. 그렇지?”

 

칸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가 답할 틈도 주지 않고 억지로 그의 입을 덮쳐 혀를 섞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리마토르가 자신에게서 떠날 것만 같아서, 하르페이아에게 그를 뺏길 것 같아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리마토르가 다시 숨이 막혀 기절하기 전까지 그의 혀를 붙잡고 빤 그녀는 잔뜩 상기된 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아... 어때, 당신? 좋았지? 응?”

 

“....”

 

리마토르는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불탔던 그의 눈이 안타까움 어린 애정으로 온기가 식어있는 걸 본 칸은 더 애타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칸, 이렇게 하면 정말 사랑하는 건가요?”

 

그의 말이 정곡을 찌르자 칸은 가슴에 시큰한 통증이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그와 자신의 관계는 붉어진 볼보다 늘어져 끊어지는 타액에 더 가까웠다. 서로를 바라보며 타던 마음이 끊어질 정도로 아슬아슬해져 있음을 깨닫자 칸은 내면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당신도 나를 사랑하잖아. 응?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말한 거잖아. 헤겔도, 아들러도, 롤스도, 왈저도 전부 그래서 이야기했잖아.... 당신은 날 사랑하지? 그렇지?”

 

칸은 떨고 있었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데,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이 내면을 넘어 그녀의 외면에까지 드러나자 리마토르는 그녀의 사랑이 처한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칸.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라고! 난 이렇게 당신을 사랑해.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러는 거야...?”

 

사랑. 칸이 말하는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건지 체감하며 리마토르는 말을 계속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이 불안에 기반하고 있어서 지금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니, 여기서 그 점을 직시하게 하면 하르페이아 때처럼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다.

 

“칸이 지금 확인받고 싶은 제 사랑은 불안과 두려움을 덮기 위한 것뿐이잖아요. 이게 정말 사랑이 맞아요?”

 

“맞아, 사랑이야. 그러니까 내가 지금 당신에게 이러는 거잖아.”

 

“아니에요. 이건 폭력이죠.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가 기저에 깔린 게 아니라 지배하고 싶은 거니까요.”

 

“...그만해.”

 

“칸-”

 

“그만하라고!!!”

 

칸은 리마토르의 오른손을 부러뜨렸다. 정확히 팔뼈를 세 동강 내자 그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칸은 그의 비명이 공간에 울려 퍼지기 전에 자신의 입으로 그의 비명을 덮었다. 입이 막혔지만 리마토르는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처한 곳이 더 아래로 추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팔과 함께 조각난 자신의 계획이 상황의 조기종식은커녕 오히려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갔다. 칸은 불안을 훨씬 더 확고한 사실로 덮겠다는 심연의 의지를 한 겹 더 덮어쓰고 그의 부러진 팔에 손을 올리며 단언했다.

 

“아니, 이건 사랑이야. 사랑을 방해하는 그 어떤 폭력이라도 이겨.”

 

“칸, 지금 칸이 제게 하고 있는 게 폭력이에요!”

 


“닥쳐. 사랑하니까.”


 

칸은 리마토르의 동강난 오른팔을 어루만지며 확신에 찬 어조로 결론을 내렸다. 손가락 끝의 촉각이 그의 뼈가 부러진 지점을 생생히 짚어주자 그녀의 입은 중력을 거슬러 오르며 달콤한 목소리를 꺼냈다.

 

“아아, 오른팔 뼈가 전부 조각조각 부러졌네. 이제 당신은 오른팔을 못 쓰니까 나한테 의존해야겠네?

 

걱정하지 마, 당신은 내가 지켜줄게.”

 

황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하던 그녀는 그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찍는 것처럼, 그에게 남기고 싶은 자신의 사랑을 새겼다.

 


“억지로 떨어뜨리려고 해도, 절대 갈라놓을 수 없는 게 있어. 


그래서 집착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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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칸에게 납치되고만 리마토르. 초장부터 오른팔이 부러졌는데 과연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이번 편에서 칸의 심리를 묘사하려고 논문을 조금 찾아 읽었어. 알고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우니 여기 간략히 적어둘게.


얀데레의 핵심은 집착. 그런데 집착이 나오는 동기가 다양해보여도, 그 기저에 내려가면 대체로 불안으로 귀결돼.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려는 얀데레는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불안에 떨고, 상대방에게 의존하는 얀데레는 그 사람에게 버려질 것을 두려워해서 불안에 떠는 거야. 그런데 이 두 단계는 어느 정도의 경향성일 뿐, 칼로 무 자르듯이 딱 반으로 나눌 수 없어. 이 둘을 왔다갔다하는 주기성도 있지. 이 점에서 착안해서 본편에 나오는 칸은 불안을 기저 심리에 두고 의존과 강제성을 오가는 얀데레로 설정했어.


일반적으로 얀데레로서 집착의 첫 단계는 매슬로우 욕구 피라미드 5단계 중 3단계인 애정의 욕구가 결여될 때 시작하고, 여기서 더 내려가면 2단계 안전의 욕구가 침해받을 때 심화된다고 해. 점점 위기감이 커질 수록 대응 방식도 과격해지기 마련이니 칸의 상태가 호전되면 의존, 악화되면 강제성을 묘사하는 식으로 이번 에피소드를 풀어보려고 해.



참... 스토리 구상을 계속하다보니 지금은 100화 넘기도록 이야기가 이어질 거 같은데 내게 시간이 얼마나 빌지 모르겠다. 연재 주기가 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끝을 낼 수 있도록 할게.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준 모든 사람에게 고맙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