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수감자용 샤워실 바닥에 구멍을 뚫어 진입한 지하수로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수로 양 옆에 길이 나있어서 신발을 구정물에 적시지 않아도 됐는데다 LRL의 왼눈에서 나온 빛이 어두운 통로를 밝혀준 덕에 넘어지지 않고 뛸 수 있었다.


사다리를 발견하자 LRL이 사다리를 비춰줄테니 먼저 올라가라고 했고, 난 그 말을 따랐다. 사다리 끝까지 올라가서 맨홀 뚜껑을 치우자 밤하늘이 보였다. 우리 둘은 정말로 교도소 밖에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아, 드디어 나왔군! 기다리고 있었다네!"


저녀석까지 포함하면 셋. 드론이 우릴 반겨주듯이 우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거야?"


"교도소에서 가장 가까운 맨홀이 여기였으니 말일세. 여기로 나올거라고 짐작하고 이 근처에 숨어있었지."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린 땅굴파서 겨우 나왔는데 넌 마음대로 나올 수 있던 거였어?"


"그야 물론이지, 내가 누군가? 첩보용으로 개조된 소형 드론인데. 환풍구 안엔 감시카메라도 없으니 가뿐하게-"


"잡담은 그쯤하고 다음 계획이나 말해. 금방 교도소에서 수색대를 풀텐데."


LRL이 다시 안대를 쓰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아, 그게 말이지. 탈옥한 다음부턴 생각해둔 게 없다네. 여기서부턴 임기응변의 영역이지. 뭔가 좋은 생각 있는 사람?"


드론이 머쓱한 말투로 발언권을 돌렸다. 이에 나는 급한대로 당장 생각나는 중요한 사항부터 말했다.


"일단 교도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자. 그리고... 어... 여긴 섬이라서 도망치기도 힘들지 않나? 거기다 시간을 끌수록 상황이 악화될거 같은데. 해안이 봉쇄되거나 오르카 본대가 도착하기라도 하면 진짜 빠져나갈 길이 없어질거야."


"그럼 결정됐네, 해안으로 가자. 가서 낚싯배나 한 대 훔치자고."


"좌우좌 너 배도 몰 줄 알아? 등대에서만 머무르는 역할 아니었어?"


"잠수함에 스파이 짓 하러 들어갔는데 빠져나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 정도는 다 입력됐지."


LRL이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고 걷기 시작하다가 곧장 멈추고선 고개를 까딱 돌렸다.


"...근데 좌우좌가 뭐야?"


"뭐긴, 너지. ...그 있잖아, 에러렐(LRL)이란 이름은 좀 부르기가 힘들...지 않나?"


"..."


LRL이 무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저기, 마음에 안든다면-"


"상관없어. 마음대로 불러. 빨리 따라오기나 해."


LRL은 도로 몸을 홱 돌려 뛰어가자 나랑 드론 역시 놓칠새라 서둘러 뒤쫓았다. 뛰면 뛸수록 목에 걸려있는 구속구가 무겁게 느껴졌다.


***


해가 뜨기 전에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를 제외하곤 주변에 사람은 안보였지만 대신 어선으로 보이는 작은 배 여러척이 정박해있는게 보이자 LRL이 적당해보이는 배에 올라타서 조종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간 드론이 고열광선으로 배의 키 박스를 잘라내서 구멍을 내자 LRL이 눈으로 불을 비춘 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구멍 안에서 케이블을 끄집어내 억지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금방 끝나는 작업이 아닌 모양이라 나는 방해되지 않게 조금 떨어져서 구경만 했다. 지금 등지고 있는 방향인 육지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저멀리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금새 파도와 바람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런데 그 중, 다른 소리와 달리 묻히지 않고 계속 들리는 소리가 있다. 불안한 마음이 피어오르면서 내 고개가 천천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저기, 얘들아...? 이 소리 들려?"


내 말에 LRL의 작업을 보조하던 드론이 내 옆으로 날아왔다.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건가? 뭔가 들은... 이건... 차 바퀴 소리가 아닌가?"


드론이 약간 고도를 올려서 창 밖을 잠시동안 응시하더니 이내 작은 소리로 소리쳤다.


"LRL! 불을 끄게! 왠 차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네!"


이에 LRL의 눈빛이 픽하고 꺼지자 조종실 안은 다시 어둠에 감싸였다. LRL은 전선을 손에서 놓치 않은 채 우리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시티 가드야? 수는?"


"모르겠군, 적어도 경찰차는 아니네. 수는 차 한 대 뿐이고."


얼마 안있어 칙칙한 녹색으로 칠해진 군용 지프차 한대가 부둣가에 와서 멈춰서고, 거기서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타고 온 차와 전혀 안어울리는 기사 차림을 한 갈색 피부의 여자, 바로 요안나였다. 우리는 요안나가 딴 데 가기를 바라며 몰래 지켜봤지만 그 기대가 무색하게도 요안나는 우리가 숨어있는 배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배 앞에 선 요안나가 소리쳤다.


"두번째 인간 공! 그 안에 있다는 것 다 알고있네! 다치게 하지 않을테니 순순히 나오게나!"


내 뇌파를 감지할 수 있는것도 아닐텐데 벌써 들킨 모양이다. 비록 한 명 뿐이긴 해도 요안나는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나는 LRL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시동 걸려면 시간 얼마나 더 필요해?"


"...1분."


"계속 하고있어. 내가 시간을 벌어볼게."


"바보같은 생각 하지말게! 상대는 바이오로이드일세, 자넨 한주먹거리도 안된단 말일세!"


드론이 내 눈앞에 날아와서 나를 말리자 나는 드론의 몸체를 옆으로 부드럽게 밀어낸 뒤 일어섰다.


"누가 싸우겠대? 얘기만 할 뿐이야."


요안나가 대화할 생각이 없없으면 진작에 칼을 뽑고 달려들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저게 최후통첩이든 뭐든 적어도 말을 나눌 생각은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나가려고 할 때 쯤 요안나가 한번 더 소리쳤다.


"두번째 인간 공! 나오지 않겠다면 짐이 그쪽으로 가겠네!"


"알았어. 간다, 가!"


조종실의 문턱을 지나 갑판으로 나오자 요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요안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배에서 내려 그녀와 같이 부두 위에 섰다. 가슴을 옥죄여오는 긴장감을 억누르기 위해 허세부리듯이 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프레스터 요안나! 설마 이 섬의 주인께서 친히 납시어주실 줄이야."


"짐은 섬을 개척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뿐, 이 섬은 어디까지나 주군의 소유라네."


"아 예 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래서,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지?"


"섬에서 나가려면 당연히 배가 필요할테니까, 배가 정박한 항구를 있는대로 찾아보던 중 이 곳의 배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보고 알아냈을 뿐이라네. 조금만 늦었어도 놓쳤을 뻔 했군."


"여긴 뭐하러 온 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왜 네가 온 거지? 죄인을 잡아가는 건 네가 할 일도 아니면서-"


"귀공."


요안나는 내 말을 끊고 나를 불렀다. 그래놓고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도로 입을 열었다.


"귀공. 이제 그만 돌아가세. 지금 돌아가면 탈옥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도록 내 약속하지."


"돌아가?"


이번엔 내가 뜸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디로?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다 사라져버렸는데. 집도, 가족도, 고향도. 어디로 돌아가라는 거지? 감옥으로? 아니면 사형장으로?"


"사형이라니...! 귀공. 귀공은 오해하고 있네. 주군은 결코 귀공을 해칠 생각이 없네! 주군이 귀공에게 하사한 휩노스 병에 면역인 신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사령관의 최고급 보디와 비교하면 한없이 나약한 몸뚱아리지. 이 몸에 오리진더스트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체능력은 B급 가정용 바이오로이드보다도 못한데, 명백히 나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들어간 설계잖아!"


"그건 오해일세. 주군의 몸을 빚을 당시에는 주군이 유일한 인간이었던 만큼 제일 중요했기에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했던 걸세. 귀공의 경우는 인간인 귀공이 직접 전선에서 싸울 일도 없는데다 전투원들을 강화시키는 데도 오리진더스트가 대량으로 필요했기에 딱 휩노스 병만 막을 정도의 오리진더스트를 사용해 만든 것이지. 동면도 마찬가지일세. 주군은 그저 귀공을 이 전쟁에서 떨어뜨려놓은 뒤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그 때-"


"개소리 집어치워!"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욱한 나머지 시간을 끌어야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요안나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심정으로 이 모든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기나 해!?"


내가 큰 소리로 쏘아붙이자 요안나도 지지 않겠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알지, 잘 알지! 자네가 느끼는 두려움은 잘 이해하네. 그리고 자네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유감이라고는 생각하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게. 바깥은 너무나도 위험하네. 철충이 어슬렁거리는데다 펙스는 호시탐탐 산 인간을 확보할 기회를 노리고 있지. 여기서 바다를 건넜다간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될 걸세. 다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일세."


"목숨을 잃는 건 여기 남아있을 때의 이야기겠지!"


"그렇지 않네! 말했잖은가, 그저 장기간 냉동수면일 뿐일세!"


"움직이지도 못하고, 호흡도 하지 않고, 거기다 의식도 없는 차가운 고깃덩이가 되는데, 그게 죽는 거랑 뭐가 다르지?"


"허나...!"


"애시당초, 난 그 동면에 동의한 적도 없어. 나 본인이 동면당하는 건데도 내겐 선택권이 없었지, 박탈당했으니까. 너희 손에 의해서 말이야. 난 노예가 아니야. 물건도 아니고. 가축도 아니지. 나는 사람이야.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게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억지로 빼앗은 주제에, 다 날 위해 한 일이다 라고 하면 퍽이나 믿을 수 있겠다!

말해봐 요안나. 내가 동면에 든 사이에 암살당하지 않을거란 보장은 어디있지? 펙스에 팔아넘기거나 철충을 유인할 산 미끼로 쓰지 않을거란 보장은? 응?"


"...대화가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군. 역시 말로 설득하는 건 무리인가."


요안나가 체념한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한발자국 내딛자 나는 주춤하며 뒷걸음질쳤다. 바로 그 때, 배의 시동이 걸리며 엔진 소리가 털털 울리기 시작했다.


"인간! 타!"


LRL의 외침에 나는 냅다 뒤돌아 배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1초만에 붙잡혔다. 요안나 이년이 등 뒤에서 방패로 밀쳐서 나는 앞으로 철푸덕 넘어져버렸고, 일어서려 했으나 요안나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눌러 제압했다.


"으윽...!"


"얌전히 누워있게. 도망치려 들지만 않았어도 다칠 일은 없었을텐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힘으론 요안나를 떨쳐낼 수가 없없다. 


"LRL, 아무래도 우리만이라도 도망쳐야-"


"닥쳐!!"


"알겠네, 내가 실언했군!"


배 쪽에서 LRL이랑 드론이 날 버리고가네 마네 하는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시야를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고개를 최대한 옆으로 돌렸다. 드론이 요안나를 레이저 커터로 공격했으나 그녀의 왼손에 든 방패에 막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요안나가 나를 붙잡고있느라 반격은 못하고 있긴 하나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불리해지는 건 명백히 우리쪽이다. 나는 헛된 노력임을 알면서도 더 거세게 몸부림쳤다.


"놔라!"


"귀공, 저항을 멈추게. 내 장담하건데,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 자네는 동면에서 깨어나 다시 땅을 밟고 설 수 있을걸세! 부디, 주군을 믿어줄 수는 없겠나!?"


"그놈에 대한 믿음은 여기 쳐넣어진 순간 갖다버렸어! 내 목숨은 내가 챙긴다! 그 인간 밑에서 죽은 채로 살 바에야 저 바깥에서 보란듯이 살아남을 테다! 방해하지 마!!"


"어쩔 수 없군... 잠시 기절해있게나. 눈을 뜨면 방 안일걸세."


요안나가 담담하게 말하며 방패를 쥔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요안나도, LRL도, 드론도 아닌 제 4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말고 보내주지 그래. 그게 저 자를 위한 길이니까."


요안나에 가려져서 누군지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그 목소리는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요안나의 왼팔을 붙잡자 요안나는 놀라 뒤돌아보고, 이내 경악했다.


"당신은...!"


그 직후, 요안나가 내동댕이 쳐지면서 나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그 여자는 내가 스스로 일어설 틈도 없이 나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냅다 배의 갑판 위로 집어던졌다. 


"LRL! 출발하게!"


내가 올라타자마자 드론이 외친 말이었다. LRL이 곧바로 배를 급발진시켰고, 나는 그 충격에 뒤로 쏠리는 걸 난간을 붙잡아 겨우 몸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요안나 아일랜드의 선착장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던 중 나는 그녀의 작별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후후, 가라! 당당하게 살아남아서 네 꿈을 펼쳐보게나!"


뒤늦게 일어선 요안나가 멀어지는 배를 쳐다보다가 그녀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어째서 저 자를 돕는 것인가! 아스널 준장!"


"사나이의 출항을 방해할 이유가 어디있지?"


아스널이 한 그 행동의 이유는 동정심인가, 아니면 변덕인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우리들은 탈옥에, 아니, 요안나 아일랜드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스널은 처음에 단순한 원나잇 목적으로 접근했었으나 라붕이가 거절하자 그가 예비 성범죄자라는 꼬리표랑은 달리 눈앞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이란걸 보고 마음에 들어했음. 그래서 라붕이가 탈옥해 제 발로 위험한 바깥으로 가려하자 아스널은 자신의 형량이 안끝났음에도 라붕이를 말려서 데려오겠다고 직접 나선 것

그러나 아스널은 라붕이와 요안나의 대화를 엿듣고선 마음을 바꿈. 요안나는 라붕이가 무조건 사령관의 관리 하에 있어야 안전할거라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아스널은 반대로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이렇게 도와주게 된거임. 이것이 진정으로 두번째 인간을 위한 길이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