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칸 대장과 리마토르 교수 발견!”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외부에서 들리는 목소리. 자신과 그의 낙원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그 목소리에 칸은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들었다. 구멍 사이로 누군가가 머리를 집어넣자 칸은 정확히 겨냥해 칼을 던졌다. 기습을 당한 상대는 그대로 쓰러질 듯 하더니 무언가를 그녀에게 던졌다. 일순간 섬광이 강렬하게 비치며 폭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제기랄!”

 

예기치 못한 공격에 당한 쪽은 칸이었다. 섬광탄의 강렬한 빛에 시력을 잃어버린 그녀는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이명이 울리는 먹먹한 귀에서 청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100년이나 늑대로 살면서 터득한 후각에 집중력을 모았다.

 

“비릿하지만 진한 냄새... 리마토르!”

 

외부의 공기가 흘러들어와 그와 그녀의 체취로 가득 찬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옅어져가는 그의 체취를 맡은 칸은 자신이 그를 섬광탄에 무방비하게 노출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섬광탄보다도 더 크고 강렬한 폭발의 충격을 느끼며 리마토르가 있었던 곳에 손을 뻗었다.

 

“미안해, 혼자두면 안 됐는데. 당신이 다치면 안 돼. 당신은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 주는 공포가 그녀를 잠식했다. 수없이 되뇌이며 그녀는 그가 있는 곳을 더듬었지만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 그의 흔적만이 남아있고 정작 그의 몸이 없자 칸은 점점 초조해졌다.

 

“타겟 확보. 제압하면 됩니다.”

 

순간 들려온 지시와 함께 그녀의 다리가 얼어붙었다. 지시에 맞춰 발사된 냉동탄은 아직 섬광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칸을 제압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냈다. 칸의 가장 큰 장점인 기동력이 봉쇄되자 다른 인원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제압했다. 다른 이의 손길이 자신을 짓누르자 칸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거 놔! 다른 더러운 년들이 내 몸에 손대지 마! 리마토르! 리마토르는 어디 있는 거야!”

 

“리마토르 교수는 저희 측에서 구출해서 방금 수복실로 모셨습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사람을 저렇게 만드나요?”

 

“리마토르를 내놔! 내 사랑을 뺏어가면 전부 육편으로 만들어버리겠어!”

 

칸이 악을 쓰며 발악하자 홍련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마취약을 주사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서 마취약 용량을 늘리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상황 종료를 알렸다.

 

“상황 종료. 칸 대장을 제압했습니다.”

 

“수고했어, 홍련. 남은 일은 리리스에게 맡기고 들어와.”

 

홍련은 사령관의 말에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가 방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자 머리에 칼이 꽂힌 리리스가 그녀에게 고생 많았다면서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홍련 작전관. 남은 건 저희 컴패니언에게 맡겨주세요.”

 

“협조 감사합니다. 그보다 머리는 괜찮으세요?”

 

“기습이 날아올 걸 예상해서 대비했으니 무사하답니다. 섬광탄 사용은 정말 좋은 작전이었어요.”

 

리리스는 홍련을 추켜세우며 쓰러진 칸에게 옷을 입혀 심문실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머리에 늘 끼고 다니는 느낌표 모양 머리핀에 꽂힌 칼을 뽑은 리리스는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로자아줄로 먼저 칸 대장을 막는 방법도 있지 않았나요?”

 

잘됐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리리스가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기에 홍련은 왜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는 선택지를 골랐는지 물었다. 리리스는 그 방법도 있었다며 긍정하면서 홍련에게 왜 그러지 않았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칸 대장이 방 안에서 리마토르 교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아예 파악하지 못했잖아요. 카메라를 설치하려고 벽에 구멍을 내면 칸 대장은 분명히 눈치를 채고 더 격렬하게 저항했겠죠. 그러니 사전 정보 없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제가 직접 머리를 들이미는 게 좋은 선택지였답니다. 로자아줄에 카메라를 다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칸 대장은 살상력이 없는 로자아줄을 무시하고 바로 저희에게 공격을 퍼부었겠죠. 어느 쪽이든 위협을 감수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였어요.”

 

“역시 대단한 실력이군요.”

 

리리스의 설명에서 드러나는 판단력에 홍련은 감탄했다. 리리스는 별 거 아니라며 홍련을 아래로 내려 보냈다. 홍련이 자리를 뜨자 리리스는 리마토르를 후송한 페로와 스노우 페더에게 연락을 걸었다.

 

“그래, 페로. 리마토르는 잘 도착했지? 치료받지 말고 바로 주인님께 모시고 가. 주인님이 수복실로 간다고 하셨으니 그 점을 말하면 다프네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알겠어요. 그런데 언니, 리마토르 교수 상태가 심각한데 응급처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페더, 주인님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치료해주는 자비는 필요 없단다. 이대로 리마토르가 죽으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니 리마토르한테 손 대지 말고 주인님을 잘 맞으렴.”

 

“언니, 그래도 진찰만은-”

 

“휴, 알겠어. 현장에 닥터가 간다고 했으니 닥터의 소견서를 받는 정도까지는 허락할게.”

 

스노우 페더가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자 리리스는 한 발 물러났다. 어차피 리마토르가 자신들의 통제 하에 들어온 이상 진찰 정도는 나중에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이었으니 스노우 페더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연락을 마친 리리스는 칸과 리마토르가 있었던 방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흐음, 이런 공간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했대.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 여럿 있으면 주인님의 경호와 오르카호의 안보에 지대한 위협이 되겠지. 이 사건이 끝나는 대로 대대적인 조사를 해야겠어.”

 

그러면서도 리리스는 이 공간에 자신과 사령관이 같이 있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어둠에 갇힌 채 묶여있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사령관의 거칠지만 섬세한 손길을 떠올리자 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제 포상 받으러 갈게요, 주인님♥

 


또 다른 뒤틀린 사랑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 시각 사령관은 수복실에 도착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입원실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페로와 스노우 페더에게 경례를 받은 사령관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고가 많네. 리마토르와 칸이 이 방 안에 있나?”

 

“리마토르 교수는 이 방에 있고, 칸 대장은 옆방에 있습니다.”

 

“알겠어. 방 안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해줘.”

 

“알겠습니다.”

 

페로의 다짐을 받고 방 안에 들어간 사령관의 눈에는 바로 침상이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1인실에 홀로 누운 리마토르는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눈으로 리마토르의 상태를 훑자 리마토르의 상태를 진찰하던 닥터가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어서와, 오빠. 상황이 좋지 않아.”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알 수 있겠어. 리마토르의 상태는 어때?”

 

“오른팔 복합골절, 왼쪽 허벅지에 열상, 가장 심각한 건 칸 언니가 투여한 메스암페타민이야.”

 

“심각한 건 알겠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메스암페타민이 정확히 뭔데?”

 

사령관의 질문에 닥터는 들고 다니던 패드를 조작해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그가 그래프를 눈으로 읽는 동안 닥터는 간단하지만 핵심적인 내용만 정확히 전달했다.

 

“메스암페타민은 강력한 마약류 약물로, 이 약물을 파는 제약회사의 상표명을 따라 흔히 필로폰이라고 불러. 한 번만 투약해도 도파민과 관련된 신경은 싹 다 건드려서 중추신경계를 갈아엎지. 멸망 전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으로 엄격히 통제하던 마약이었는데, 칸 언니는 그 위험한 걸 인간보다 훨씬 강한 바이오로이드에게 효과가 들 정도의 양을 리마토르 오빠한테 투여한 거야.”

 

“쯥, 그럼 심각해도 아주 심각하군.”

 

“심하면 심장마비로 사망할 수도 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마토르 오빠는 숨은 붙어있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닥터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사안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한 사령관은 속으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계산을 시작했다. 한 번의 선택으로 갈라지는 수많은 갈래 길을 따라 걷던 그는 리마토르의 과거에 대한 보고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리마토르는 동면 전에 마약 중독자였다고 했지. 자세한 종류가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닥터가 심각성을 언급할 정도면 필로폰 정도로 강한 약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러면 중독성도 꽤나 강했을 텐데, 리마토르는 실험용 LRL 개체를 거두고 함께 생활하면서 마약을 끊었다고 기록에 적혀있었어.

 

마약 투여의 후유증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적은 건가?’

 

“닥터, 필로폰 투약의 후유증이 심각하니?”

 

“매우 심각하지. 딱 한 번만 해도 중추신경계, 다시 말해 뇌를 작살내는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야. 쾌락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도파민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모조리 들쑤시고 다니는 약물이라서 쾌락의 역치를 엄청나게 높여버려. 약효가 끝나도 일상적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쌓이다가 다시 마약에 손을 대게 되는 무서운 물건이지.”

 

“한 번의 선택이 남은 인생을 전부 약에게 저당 잡히게 만드는군. 끊는 데 성공해도 부작용이 남나?”

 

“당연히 남지. 필로폰 같은 심각한 마약을 끊는다는 건 쾌락의 역치가 낮아진다는 뜻이 아니야.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쾌락의 역치 아래에서 약의 유혹을 물리치고, 불만족 속에서 만족을 찾으며 적응한 거지.”

 

닥터의 설명을 들은 사령관은 알겠다며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멈췄던 생각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닥터의 말과 자신이 본 리마토르의 과거 기록, 현재의 생활에서 맞춰지지 않는 조각을 논리와 추측으로 메우는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생각해보자. 리마토르는 과거에 심각한 마약을 했고 끊는 데 성공했어. 닥터의 말대로라면 마약을 끊는다고 해도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으니, 리마토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고 봐야겠지. 그렇지만 이 말대로라면 리마토르가 보여준 정상적인 모습이 납득이 안 돼.

 

내가 내린 가정을 되돌아보자. 리마토르는 철저히 연출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구 인류의 본성을 감추었을 거야. 이 가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리마토르가 과거에 바이오로이드를 도구로 보는 연구를 진행했다는 점과 마약 투여 이력이 있어. 하지만 반대로 이 가정이 틀렸다면? 그 근거는 실험용 LRL 개체를 거두고 마약을 끊으며 바이오로이드와의 공존까지 모색하기 시작했었다는 점이 있지.

 

여기까지의 정보만으로는 어느 쪽이 맞다고 확신할 수 없어. 그래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자 리마토르가 구 인류와 같은 인간이라는 가정이 맞다고 보고 검증을 시도했지. 그렇지만 지금 추가된 정보를 근거로 두면 이야기는 달라져. 

 

아무리 구 인류라고 해도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지는 못했어. 한낱 인간이 낮아진 쾌락의 역치 아래에서 오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며 철학이라는 고도의 학문을 연구하고, 그걸 대중에게 전달하는 강연을 업으로 삼고, 다른 이들을 상담해주는 위장을 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려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그럼 여태까지 리마토르가 보여준 모습은 위장이 아닌 진심이라고 봐야해. 스트레스 속에서 적응하는 데 성공한 인간이 새로운 길을 개척한 거겠지. 실험체 LRL과 함께하면서 인격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도 신뢰가 생겨.’

 

사령관은 마른 침을 삼켰다. 기존에 자신이 세운 가정이 뒤집어지는 과정 속에서 그는 새로운 가정이 신빙성을 얻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었다. 리마토르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가정이 힘을 얻는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대한 창끝을 볼 수 있었다.

 

‘검증하기 위해서였어. 그렇지만... 내가 리마토르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 오르카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선량한 한 사람을 쓰레기로 몰고 가서 매장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덮을 수 없는 내 책임이야.

 

내가 잘못하지 않았어. 그런 생각도 들지만 이 생각이 맞다면 과거 구 인류가 테마파크를 만들겠다며 바이오로이드를 C구역으로 몰아넣은 것도 정당화되어야 해. 목적이 옳다고 해서 수단까지 옳은 건 아니야. 피할 수 없는 내 책임이고, 난 책임을 져야만 해.’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리마토르가 의식불명 상태에 놓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스프리건이 뿌린 찌라시가 있고, 그걸 지시한 장본인은 자신이었기에 사령관은 죄책감이 자신의 등을 타고 오르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다리를 떼 방을 나서며 닥터에게 말을 남겼다.

 

“리마토르 교수의 치료에 집중해. 반드시 살려야 해.”

 

“알겠어. 최선을 다할게.”

 

닥터의 목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사령관은 칸이 있는 옆 병실로 들어갔다. 사지가 결박당한 칸이 기절한 듯 잠든 모습과 조서를 작성하고 있는 리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 왓슨 왔어?”

 

“어. 칸 상태는 어때?”

 

사령관은 자신을 반겨주는 리앤의 인사도 넘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리앤은 볼펜으로 칸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지 않아. 리마토르 교수가 없으면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며 버티다가도 리마토르 교수의 신변이 보장되지 않았냐며 바락바락 악을 쓰기도 했어. 지금은 진정제 맞고 자고 있는데, 이 상태로는 심문이고 뭐고 진전이 안 될 거 같아.”

 

“리마토르 교수와 다른 방향으로 상처가 깊군. 신체냐 심리냐의 차이네.”

 

“그렇지. 그래도 칸 대장이 저렇게까지 리마토르 교수한테 집착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아.”

 

“음? 뭔데?”

 

리앤의 말에 사령관은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앤은 흥미로운 걸 찾았다는 표정으로 조서 앞에 붙은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칸 대장의 몸 상태야. 리마토르 교수를 강제로 납치했고, 정황상 그 안에서도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 흔적을 보면 전부 공통점이 있어. 뭔지 알겠어?”

 

“손목, 어깨, 목, 복부.... 모르겠는데. 공통점이 있는 거야?”

 

사령관이 답을 찾지 못하자 리앤은 싱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칸을 상대할 때 받은 스트레스를 그와 대화하며 푸는 인상이 아주 강하게 묻어나는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왓슨이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해봐. 앞에서 공격을 하면 주로 어디를 반격할 거야?”

 

“음, 어깨나 배를 찰 거 같은데.....아!”

 

머릿속으로 화면을 그리니 리앤이 묻고자 했던 점이 보였다. 명확한 이미지가 떠오르자 그는 자연스럽게 탄성을 내뱉었다. 리앤은 정답이라며 그에게 설명을 계속했다.

 

“맞아. 왓슨이 생각한대로 손목과 어깨, 목, 복부는 반격할 때 주로 목표점이 되는 부위야. 리마토르 교수가 칸에게 공격을 받는 입장이었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현재 추측에 따르면 공격의 강도가 생명의 위협까지 초래할 정도였으니 반격이나 방어를 시도했다고 봐야함이 타당해. 이렇게 생긴 상처를 방어흔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칸 대장에게는 방어흔이 전혀 보이지 않아. 다시 말해 리마토르 교수가 공격을 그대로 맞아주었다는 의미며, 연인 관계인 둘의 사이를 고려하면 리마토르 교수가 칸 대장이 막 나가는 상황에서도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는 추리를 해볼 수 있지.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사실이라면 정말 낭만적이지 않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사랑을 믿고 상대방을 받아주려고 한 거잖아. 리마토르 교수도 보통 인물은 아니지.”

 

리앤은 흥미롭지 않냐며 사령관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며 긍정을 표하는 그는 입과는 달리 얼굴에 수심을 가득 쌓고 있었다. 옆에서 리앤이 어디 불편한 점이 있냐고 묻자 괜찮다며 얼버무렸지만 사령관의 속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내 가정은 완전히 무너졌군.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면 구 인류의 본성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리마토르는 그런 상황에서도 칸을 받아주려고 했어. 리마토르가 안전한 인물이라는 검증은 성공했지만 내가 리마토르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버렸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길을 정해서 열심히 걸었지만 그 끝은 더 나아갈 수 없는 절벽이었다. 그런 끝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면서도 희생을 치르며 왔건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길과 사람, 두 가지 토끼를 모두 놓쳤다는 사실이 그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

 

“리앤.”

 

“어.”

 

“칸과 리마토르의 접견을 허락할 테니 둘을 만나게 해줘. 단,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 되니 호위를 철저히 해.”

 

“알겠어. 걱정 말라고.”

 

사령관은 그 말을 끝으로 병실을 나왔다. 사령관실로 돌아가는 내내 그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책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몇 번이고 주저앉을 뻔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사령관실에 도달한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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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얀데레 에피소드가 끝났네. 67편부터 장장 16화나 이어진 사령관과의 갈등도 이걸로 일단락 됐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리마토르는 너무 많은 걸 잃고 말았지. 사랑도, 사람도, 자기 자신도. 이 모든 것에 사령관은 어떻게 책임져야할까?


다음 편은 리마토르의 이야기가 될 거야. 갈 길을 잃고 심하게 방황하는 시기가 되면 누구나 한 번쯤 답을 구하고자 멘토를 떠올리게 되지. 이 소설에서 리마토르가 다른 이들에게 줄곧 멘토가 되어왔지만 리마토르에게도 멘토가 필요하고,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었지. 그 멘토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 풀 생각이야. 이 편이 올해 마지막으로 업로드하는 편이 될 테니 다음 편은 새해에 보게 되겠지.


사족으로, 연초에 시작한 소설이 연말을 맞았으니 드는 생각인데 그동안 소설을 구상하면서 폐기한 아이디어나, 보고 싶은 IF 상황을 댓글로 달아주면 써서 외전으로 올리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 혹시라도 의견 있으면 보내주길 부탁할게. 빠르면 섣달 그믐날, 늦어도 새해에는 올릴 수 있도록 할게.



부족한 글을 1년 가까이 읽어줘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다들 따뜻한 연말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