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벌써 추격대가 왔다고!? 너무 빠르잖아!"


"대놓고 탈옥했는데도 하루 뒤에 왔으니 그리 빠른 대응은 아니지."


LRL이 비닐봉투 안에 생수와 참치캔을 우겨넣으면서 대꾸했다. 왼눈의 불빛도 키지 않았는데 어둠 속에서도 손이 쉬지않고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벌써 일본에서 볼일 다 본건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온건가?"


"아니, 오르카호 본대가 아닐세. 수색대는 요안나 아일랜드에 상주하던 병력으로 이루어져있었네. 교도소에서 일하던 시티가드와 죄수들이 섞여있더군."


"...그럼 최악의 상황은 아니군."


"그건 그렇지. 요즘 시대에 정찰 드론을 쓰지 않고 경찰들이 직접 발로 뛰면서 찾을 정도니..."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해. 아저씨, 그 수색대 어디쯤에 있었어? 방금 막 해안에 도착한거야?"


"아니, 그게... 바로 이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더구만."


드론이 그 말을 마치는 순간 짐을 싸던 LRL의 손이 멈췄다. 


"망을 보겠다고 자처한 주제에, 그 년들이 이렇게 가까이 올때까지 몰랐다고!?"


"나, 나도 어쩔수가 없었네! 어두운데다 주변의 폐허 때문에 잘 보이질 않았단 말일세! 수색대가 손전등이라고 들고 다녔으면 일찍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무슨 야간투시경 같은 걸 쓰고 어둠속에서 움직이니 원..."


"변명은...! 아니지, 야간투시경이라고? 그럼 전부 장님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겠는데?"


그 말을 한 LRL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아니, 기다려봐. 저 탁 트인 야외에서 빛 쐈다간 우리 위치가 바로 발각돼서 벌떼처럼 몰려들걸. 한번에 수색대 전부 무력화시킬수 있는 게 아닌이상 그 방법은 자제해야 돼."


"그럼 더 좋은 생각 있어?"


"...숨는 건 어때?"


"숨을 데는 있고?"


LRL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나는 황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 저긴 어때?"


****


"이봐 간수 언니, 그 탈옥한 친구들 잡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석방시켜주는 거 맞지?"


"물론입니다. 사령관님도 허락해주셨습니다."


"브... 그것보단 뭐시기 자지쇼라는 거 보고싶었지 말임다..."


"아 글쎄, 그런건 없다니까요!"


오르카 교도소의 수감자들까지 동원해서 급하게 수를 불린 수색대는 탈옥범들이 탈옥에 사용하고서 버린 배를 찾은 뒤, 그 배를 중심으로 넒게 흩어져서 수색을 개시했다. 그 중 워울프, 세이프티, 브라우니, 그리고 켈베로스로 이루어진 분대는 이 일대에 있는 모든 등대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가장 가까운 등대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워울프의 제안 때문이었다.


"내가 미드에서 봤어! 범인은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온다! 그 탈옥범이 LRL 모델이라면, 분명 자신의 집인 등대로 돌아갈 게 틀림없어!"


진짜로 직업이 경찰인 이들 앞에서 경찰 드라마에서 본 알량한 지식을 뽐내는 것도 우스울 뿐더러, 범인은 현장으로 돌아온다는 말도 범죄현장이 아닌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 LRL은 미국제인 만큼 한국의 등대에서 일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워울프가 워낙 당당하게 얘기하는데다 옆에서 브라우니도 옳다구나 하며 맞장구를 치니 켈베로스와 세이프티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어치피 가능한한 모든 장소를 수색해봐야 했으니 굳이 눈에띄는 건물인 등대를 지나칠 이유가 없기도 했고. 


등대에 근접한 그들은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허름한 벽을 보고 오래전에 버려진 장소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어두컴컴한 안을 대충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여긴 빈 집인것 같은데?"


"쩝, 허탕인가. 어쩔 수 없지, 다른데 가보자구. 아가씨들."


"잠깐만요."


빠르게 흥미가 식은 브라우니와 워울프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세이프티가 불러세웠다. 세이프티는 문 앞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서 다른 세 명에게 보여줬다. 바로 잘려진 철제 자물쇠였는데, 전체적으로 녹이 슬었으나 절단면만큼은 깨긋한 상태였다. 즉, 최근에 잘려진 거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누군가 최근에 이 안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어쩌면 아직 안에 남아있을수도 있고. 


시선교환을 마친 넷은 무기를 꺼내들었다. 켈베로스와 워울프는 등대 밖에서 창문을 마크하고, 세이프티와 브라으니는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문 앞에 섰다.


"시티가드, 오픈 업!!"


브라우니가 미드에서 본 대사를 외치며 문을 뻥 걷어차자 문이 경첩과 함께 뜯겨져나가 바닥 위로 쓰러졌다. 둘이 차례대로 안에 들어서자 어질러진 생활 공간이 보였다. 시선을 살짝 밑으로 숙인 채 살펴보던 세이프티는 방바닥에 널부러진 죄수복과 뚜껑 따인 참치캔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이 여기 왔던 건 확실했다.


"침대가 아직 따듯함다. 도망쳤다면 멀리 가지 못했을검다."


워을프랑 같이 본 미드의 수사장면을 기억한 브라우니가 침대를 손으로 쓸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도망친지 얼마 안됐다면 밖에서 인기척을 느꼈을 법도 한데 세이프티는 자신들 이외엔 야생동물의 기척밖에 느끼지 못했었다.


"어쩌면... 아직 이 안에 남아있을지도 모르죠."


"이 근처에선 뇌파가 전혀 안느껴지지 말임다?"


"뇌파 차단 장치를 쓰고있으니까요. 직접 찾아봐야죠."


세이프티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문이 두 개 보이자 세이프티는 브라우니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리고, 대충 알아들은 브라우니가 가까이 있는 문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는 문을 벌컬 열어재끼고 잽싸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문 너머엔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브라우니가 계단 위쪽을 갸웃거리는 한편 세이프티가 또다른 문을 열었으나 비좁은 창고만이 나왔을 뿐,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는 없었다. 


"1층엔 없는 것 같군요. 브라우니, 위층으로 올라갑니다. 위층에도 없으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도록 하죠."


"어? 아직 안살펴본데 남아있지 않슴까?"


"네? 어딜 말하는 거죠?"


등대 1층의 등대지기용 주거공간엔 문이 3개 뿐이다. 자신들이 들어온 정문, 계단실로 이어지는 문, 그리고 창고 문. 브라우니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그 중 어느것도 아닌, 바로 옷장 문이었다.


"저 옷장! 사람 들어갈 크기는 되보이지 말임다! 저라면 저기 숨을 검다."


미처 생각못한 맹점이었다. 세이프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는 권총을 들어 옷장을 겨눈 채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기위해 권총을 한 손으로 쥔 뒤 남은 한 손을 뻗은 그 순간-


"끄아악!"


바깥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소리에 그 자리에 있는 인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분명히 남성의 비명소리, 두번째 인간일 게 틀림없었다.


"찾았다! 거기서 딱 기다려라! 사냥의 시간이다!"


"여기는 제 7 분대! 인간 남자의 비명소리를 들었습니다! 저희 좌표로 모여주십시오!"


등대 밖에서 대기하던 워울프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냅다 바퀴 달린 가속 부츠를 급발진시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튀어나가고, 켈베로스는 무전기를 들고 주변에 상황을 알리면서 워울프를 뒤쫓았다. 


상황을 파악한 세이프티와 브라우니도 늦을새라 등대에서 뛰쳐나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금새 조용해진 등대에서는, 옷장 문이 끼익 열리며 사람 둘과 작은 드론 한 대가 엉거주춤하며 몸을 끄집어냈다.


"역시 옷장 안에 숨는 건 바보같은 생각이었어. 우리 진짜로 들킬 뻔 했다고."


"아니, 그치만 이게 최선이었다고. 그리고 결과적으론 안들켰잖아?"


"알았으니 수색대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튀세. 그보다 방금 그 소리는 대체 뭐였던겐가? 꼭 남자 비명소리 같았는데, 인간이 또 있는건가?"


"글쎄... 짐작가는게 하나 있긴 해. 여기가 한국이어서 다행이지."


***


켈베로스의 무전을 받은 모든 수색분대가 순식간에 모여들어 포위망을 형성했다.


"끄엑! 꾸엑!"


간혈적으로 들려오는 남성의 비명소리를 쫓은 지 몇 분 채 되지 않아 포위에 성공한 그녀들은 소리지른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범인은 그녀들이 예상한 두번째 인간이 아니었다.


"꾸웨엑!"


"...방금 저... 사슴? 노루?가 소리지른 거에요?"


켈베로스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든 수색대원들은 사람같은 소리를 내는 희한한 네발짐승을 보고 어이를 상실했다. 그 중 저걸 본 적 있는 브라우니가 저것의 진짜 이름을 말해주었다.


"저거... 고라니이지 말임다..."


아, 고라니! 개체수가 한국땅에만 집중된, 사람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짐승! 인류가 멸망한 덕에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에서 벗어났지만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특성상 다른 데로 세지도 못하고 이 땅 안에서만 수를 불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야행성이라 이 야밤에 울면서 의도치않게 수색대의 귀를 혼란시키고 만 것이었다. 


고라니 한 마리도 아닌 여러 마리가 사방에서 꽥꽥 울어대 수색대원들이 밤새 엉뚱한 곳에서 삽질을 하게 만들었고, 동이 텄을 땐 두번째 인간 일행은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


또 잠도 못자고 터덜터덜 걷다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폐허가 된 시가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색대도 따돌린 것 같이 보여서 우리는 적당히 으슥해보이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몸을 웅크리고 잠깐 잠을 청했다. 드론이 알람시계 역할을 해주어 잠에서 깨어났을 땐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하하 이런 젠장, 이러다 생체시계 씹창나겠는걸.


"어때? 피로는 좀 가셨는가?"


안색이라도 살피려는건지 드론이 내 얼굴 앞에 날아와서 말했다.


"그럴리가 있냐..."


"그거 유감이군. 그래도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하네. LRL, 자네는 어떤가?"


"멀쩡해. 레모네이드 밑에서 일할 때도 이정도밖에 못자고 살았는데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LRL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남아있는게 영 괜찮아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오르카 교도소 안에 있는 동안은 잠은 충분히 잔 거 아닌가? 설마 감옥에서도 잠을 설친건가. 


바깥은 매우 조용했다. 지도는 없었지만 드론이 나침반 역할을 해준 덕에 헤메지 않고 북쪽으로 갈 수는 있다. 무작정 멀리 가야하는 상황인데 걸어서 가야한다는 게 문제지. 자동차같은 이동수단을 구할 수 없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도로에 차가 한가득 버려져있는 게 보였다.


"저기, 잠깐만. 혹시 차를 고쳐서 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불러세우자 LRL이 돌아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주변에 있는 폐차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움직일 것 같이 보이지는 않은데."


확실히 저 많은 차 중 상태가 멀쩡한 건 하나도 없었다. 녹 슨 건 기본이고, 범퍼가 찌그러졌거나 유리가 깨져있는 등. 애초에 바퀴가 4개 다 남아있는 것 자체가 드물었다. 드론도 차 주변을 빙빙 돌며 살펴보더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적어도 굴러가기만 한다면 걸어가는 것보다야 훨 낫겠지만... 이건 내가 봐도..."


"넌 AGS 수리도 가능한 모델이잖아. 네가 고칠 순 없어?"


"이보게, 뭘 오해하고 있나본데. 나는 기본적으로 엔지니어가 아니라 엔지니어가 쓰는 도구일세. 포츈같은 정비사가 지시를 내려주지 않으면 제 성능을 내지 못한단 말이네. 그리고 이게 고장이나 파손이라면 뭐 시도는 해보겠지만 노후화로 인한 거면 어쩔 도리가 없네. 새 부품으로 교체해야 한단 말일세."


"그럼... 이미 차키가 있는 걸 찾아서 한번 시동걸어보는 건 어때?"


마침 옆에 있는 차의 깨진 창문 너머로 차키가 꽃혀있는 게 슬쩍 보였기에 던져본 말이었다. LRL이 다가와 운전석 문을 콰직 뜯어내자 안에서 왠 해골이 굴러떨어졌다. 안을 들여다보니 대충 1인분은 될 것 같은 뼈다귀가 운전석에 널부러져 있었다. 어쩐지 차 앞유리에 총알구멍 같은게 보이더라. LRL이 뼈다귀엔 눈길도 안주고 차키를 돌려봤지만 차는 여전히 묵묵답답이었다. 


"시간만 낭비했네. 인간, 가자."


LRL의 얼굴 위로 그럼 그렇지 하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국 또 행군해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에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마지막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잠깐만!"


"또 뭐?"


"저건 쓸 수 있어!"


짜증내던 LRL이 내가 가리킨 것을 보자 눈이 동그레졌다.


"...자전거잖아?"


내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자전거를 일으켜세워서 살펴보니 아직 바퀴에 체인이 연결돼있었다. 페달을 밟아보자 뒷바퀴가 체인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손잡이의 브레이크를 꾹 누르자 멈췄다.


"오..."


"과연, 이거 괜찮구만!"


이번엔 LRL과 드론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나는 기세좋게 안장에 올라탄 뒤 LRL에게 외쳤다.


"뒤에 타!"


"...인간. 내가 너보다 다리힘 좋거든?"


"그래, 그건 아는데. 넌 치마입고 있잖아."


그 말에 LRL은 고개를 밑으로 숙여 제 옷을 한번 내려다보고선 말없이 자전거 뒤의 짐받이에 털썩 걸터앉았다. 드론이 그럼 자긴 어쩌냐고 묻자 나는 자전거 앞에 달린 장바구니를 툭툭 쳤다. 그럼 되겠구만 한마디와 함께 드론이 장바구니에 쏙 들어가 안착함으로서 이제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


다른사람 태우고 자전거 모는 건 처음이지만 막상 출발하고 나니 부드럽게 달릴 수 있었다. 괜히 마음이 들뜬 나는 경적을 찌릉찌릉 울렸다. 그 직후 LRL이 내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아야!"


"경적 울리지 마, 주변에 우리 있다고 광고할 일 있어?"


"LRL 말이 맞네. 자네가 잘못했네."


맞는 말이라 나는 반박도 못하고 열심히 페달만 밟았다. 우리 셋은 자전거를 타고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자연이 너를 거부하리라 당한 늑대


인류가 멸망해도 고라니와 엄복동의 나라는 변하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슬슬 라붕이 파티원 늘릴 때가 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