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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다섯 번째(3)





(매움 주의)




* * *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나름 결론을 내봤어."


들어볼래? 라고 말한 리앤은 자정이 넘긴 시간에 칸의 지휘관실을 찾아왔다. 나는 잡히지 않은 수면과 씨름하다가 잠자기를 포기하고 지휘관실의 소파에 누워있던 중이었다. 


"듣고 있다."


탁상 램프만 켜둬 얼굴의 절반만 드러나있는 칸이 조용히 말했다. 외박 때의 깜찍한 변신을 끝내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버렸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한다.


꽤 심각한 사안인지, 리앤은 얼마 전 칸의 모습을 한호흡 쉬어 가는 용도로 삼지 않았다. 나는 귀만 열어두고 소파 안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응. 다른 게 아니고, 연초에 있었던 두 사안에 대해서야. 보안 문제랑 cctv."


"그래."


"길게 말하는 게 좋을까?"


"시간은 상관없다."


"응." 시원스런 어조였던 리앤이 숨을 골랐다. "그럼 이것부터 말할게. 추측 불가. 정체, 목적, 수단, 모두 불가사의야."


"그럼 따로 보고할 만한 것은 없지 않나."


"그렇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도대체 뭐가 뭔지. 하지만 딱 하나, 추측해 볼 법한 건 있었어."


"뭔가?"


"의도."


들숨 소리로 봐서 칸은 어처구니 없어하는 것 같았다.


"기초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데, 의도만은 알겠다고?"


리앤 쪽에서 목을 푸는 소리가 났다.


"오히려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기에 보인 점이라고 해야 하나?"


글래스 하프에 전류가 흐른 듯한 소리가 들렸다. 패널을 조작하기라도 한 거겠지.


"자, 이걸 봐. 오른쪽이 유미가 올린 보고서, 왼쪽은 얼마 전에 내가 올린 보고서. 끝에 쪽만 보면 돼."


"봤다."


"알겠어?"


"모르겠는데."


으음…하고 리앤은 앓는 소리를 냈다. 제대로 파악된 게 없다고 했으니 보고서의 말미에는 '결국 알아낸 건 없었다.' '조사가 더 필요하다.' 따위의 문장이 적혀 있지 않을까. 그런 보고서를 두 개 꺼냈으니 공통점을 찾으라는 의미일 것이고, 그 공통점이란 위와 같이 '결국 알아낸 건 없다.' 다.


귀를 기울이고 있다보니 잠기운은 다 날아가버렸다. 지금이라도 대화에 끼어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리회전을 멈출 수 없다. 이런 게 엿듣는다는 행위의 묘미다. 굳이 자는 척하며 애써 엿듣는 척 할 입장도 아니고 필요도 없지만, 이러는 편이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란 칸의 주문을 못 들었던 건 아닐 텐데, 리앤은 보고를 꽤 길게 풀어나갔다. 나름 짧게 간추리고 싶지만 어떻게든 납득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화법이었다. 


먼저 유미다. 유미의 보고서는 나도 읽어봤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오르카가 알래스카로 향하기 얼마 전에 보안이 뚫리는 일이 있었다. 무력화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유미의 말을 빌려보자면 침입을 허용한 것과 무력화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인 듯하다.


그리고 공장. 내가 직접 찾아갔던 그곳이다. cctv의 화면 속에서 사라졌던 공장은 마키나의 드론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자 다시 나타났고, 시티가드 녀석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떤 특별한 구석도 없는 그냥 ags 공장일 뿐이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cctv가 제조된 연도는 2065년이다. 그것도 2065년 당시에도 상당한 구형 취급을 받던 모델이라는 것 같다. 감시 중인 현장의 온도 측정 같은, 2070년 이후부터는 기본시 되던 부수적인 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건 그런 이유라는 듯했다.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하나 더 발생했다. 그런 싸구려 cctv인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런 싸구려가 100년이 넘게 제 기능을 똑바로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리앤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했는데, 공장의 제조 현장에 투입되었던 ags의 관리를 받았을 것이란다.


오늘날에도 제조와 관련된 ags들은 여전히 제조에 땀을 흘리고 있다. 멸망 전에는 인간을 위해서. 현재는 인간, 나의 폐하를 말살하기 위해서. 유충에 의해 침식 당했다 한들, 그들의 헌신과 봉사는 의미를 잃은 적이 없다. 괜찮은 블랙 유머이지 않냐고 리앤은 고약한 미소를 보였다. 별로 재미없다.


어쨌든, 그렇다면 또 의문점이 생긴다. 우리가 찾은 그곳은 공장지대 전체에 걸쳐 철충이 있었을 뿐이다. 목적한 현장에선 철충은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도리어 마키나의 드론과 비슷한 것이 발견될 걸 기다렸다는 듯 cctv속의 커다란 공장이 나타났다. 그 공장 내부에도 빛바랜 제조 설비만이 갖춰져 있었을 뿐, 철충은 없었다. 철충이 됐어도 상관없다며 제조에 열 올리는 ags도 없었다. 리앤의 말대로라면 그 cctv가 멀쩡하기 위해선 철충이 됐다는 자각도 없는 녀석들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다. 공장이 가동 중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영문을 알 수 없다. 도대체 뭐였던 걸까? 그 공장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버린 곳이었다. 설비들이 본래 띠고 있었을 색은 먼지에, 공장 외벽은 녹에 삼켜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바닥만이 기묘하리만치 깨끗했다. 그 공장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목해봐야 할 것은 cctv다. 그것이 공장으로 향한 계기다. cctv, 그것은 죽어버린 공장을 여전히 눈에 담고 있던 것도 모자라 무언가에게 수술을 당하기까지 했다. 닥터와 시티가드의 보고대로라면 틀림없다. 왜? 그냥 살아 있었기에 공장을 눈에 담을 뿐인 그것이, 왜 그런 식의 처리를 받을 필요가 있었던 거지? 애초에 어떤 부분이 조작된 거지? 시티가드의 보고에 의하면 cctv는 조작이 가해졌되, 딱히 수정 당한 부분은 없다고 한다. 덧칠을 위해 캔버스를 이젤에 올렸다가 다시 치운 꼴이다. 아무것도 덧칠된 것 없이.


공장은 여기까지. 리앤은 보안 쪽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리앤 이외의 목소리가 들린 걸 보아 몇 명이 더 지휘관실을 찾아온 듯했다.


유미가 보안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챈 것은 오메가와 한바탕하기 며칠 전이다. 실제로 보안이 뚫린 건 그보다 더 전이었고, 뚫린 시점에서 발동됐어야 할 갖가지 경고 신호는 무반응이었다.


결코 오르카의 정보통신쪽 보안이 약한 것은 아니다. 바이오로이드의 사지와 두 눈 보다 더 견고했으면 견고했지, 고작 멸망 전 어느 시점부터는 잘 쓰이지 않던 것에 간단히 뚫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뚫렸다. 그걸 아무도 몰랐다. 유미는 방어 시스템이 무력화된 것은 절대 아니고, 과정 자체만 보면 침투를 기꺼이 허용한 것에 가깝다고 변명했었다. 억지로 뚫고 들어오든 안에서 문을 열어주든 그게 그거 아닌가.


완전히 안방을 내어준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도둑맞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뒤늦게 알아채고 도둑이 안방에 뿌려둔 여러 불온한 것들을 처리했다. 그런 다음 도둑을 쫓았다. 뒤틀려 있었지만 침투한 경로 자체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적 끝에 초입부는 알아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집이든 문을 열어야 안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도둑도 문을 열고 들어왔을 것이다. 문이 여러 개라 해도 정도가 있다. 아무리 커다란 집이라 해도 문이 수백개씩은 달려있지 않을 것이다. 침입 경로는 한정될 것이다.


"이게 다야." 리앤은 소파로 다가와 내 다리를 조심스럽게 치우고 앉았다. "이제 이해했지?"


리앤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걸 알아도 이렇게 말해버리면 무책임하다고 여겨진다. 칸이 이해 못 했다고 대답중일 때 나는 몸을 뒤척였다.


"그냥 다시 정리했을 뿐이잖아." 리앤의 무릎에 다리를 올렸다. "나를 포함해서 멍청한 호드년들은 그렇게 말해주면 이해 못 해."


"누가 멍청하다는 거냐."


나와 칸 사이에 끼어 대답이 궁해졌다는 얼굴을 한 리앤은 좀 봐달라는 웃음을 짓고 다시 말했다.


"공통점."

"무슨 공통점?"

"두 사안의 공통점, 모르겠어?"

"결국 알아낸 게 없잖아."


내가 쏘아붙이듯 말하자 리앤은 세워뒀던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그걸 다르게 표현해봐."

"뭐?"

"결국 알아낸 게 없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하란대로 하자면, 알아낸 게 없으면 결국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어라…"


눈꺼풀 안쪽이 번뜩인 듯한 감각이 일었다.


…무의미하다고? 정말 그럴까? 아니야. 무의미하진 않다. 발견은 했다. 어떤 의미인지를 모를 뿐이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겠어?"


싱글벙글하는 리앤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아니, 아니야. 웃기지 마."

"딱히 웃긴 일은 아니잖아."

"내 말은! 철충 따위가 어떻게 그런…!"

"하지만, 그 외엔 딱히 없지 않아?"


리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머리속에서 부정하느라 칸이 다가온지도 몰랐다. 올려다 본 곳에 있는 칸의 얼굴은 나도 알려달라는 의미로 구겨져 있었다.


공통점.

아무 의미도 없다.


그건 우리가 밝혀내려는 입장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내용물에 큰 의미도 없었다.


헌데 그런 짓을 한 입장에서도 과연 의미가 없을까?


보안을 뚫어냈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공장이 발견될 테지만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는다.


그저, 위와 같은 의미가 도출될 현상 자체만을 보여준다.


"…보라고 한 거야."


옆에 앉아있는 리앤이 끄덕였다.


"우리가 발견한 게 아니야. 놈들이… 대놓고 흘린 거야. cctv도, 보안도, 공장도, 다 놈들이 의도한 거야."


"무슨 의도?"


일어서서 칸을 마주봤다.


"우리더러 주워가라고."


칸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따라 흔들린 머리카락이 내 볼에 닿았다.


"일부러 흘렸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맞아. 우리가 여태껏 발견하고 찾아낸 건, 발견하고 찾아낸 게 아니야. 다 의도된 거야.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한다.'가 목표였던 거야."


"하지만 이상하군. cctv도 보안도 딱히 심각한 사항이 아니고 공방의 센티널은…"


"cctv나 보안에는 의미가 없다고! 아직도 깨닫지 못 했어!? 우리한테 발견된 시점에서 그 두 가지는 쓰임을 다한 거란 말이야!"


칸은 슬픈 건지 두려운 건지 모를 얼굴을 했다.


"누구 입장에서."

"몰라. 철충이겠지."

"그건 또 무슨 의도로. 무슨 목적으로."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적으로 볼 필요도 없겠지."


칸은 손을 마구 흔들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알긴 하는 거냐."


"내가 한 소리 아니야. 옆에 있는 년이 한 거야."


"고작해야 효율적인 대형을 갖추는 게 전부인 놈들이, 책략으로 승부를 걸어온다는 걸로 들린다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리앤이 깊게 끄덕이고 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기만전략의 한 갈래라고 보고 있어."


칸이 리앤의 손을 쳐냈다.


"웃기지 마라. 기만이란 고차적인 정신 기능에서 비롯되는 것중 하나다. 기만으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효과가 뭔 줄 아나? 바로 공포다. 다시 묻지. 비록 우리가 인간은 아니라 해도 꽤 많은 것이 인간과 닮아있다. 그 차이를 철충이 이해하고 감정과 맞닿은 부분을 이용해 우리를 뒤흔들려 든다는 거냐? 그 철충이? 인간을 속여넘길 정도로?"


"누구도 그렇다곤 말하지 않았어…"


리앤은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자신감을 더 가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칸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 아주 부들부들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칸에게 기죽은 리앤이 다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만을 의도한 것 같으니 더 이상 휘둘릴 필요는 없다는 거야. 보안을 좀 더 철저히 하고, 탐색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조사하되, 냉정을 유지하자는 거지. 그리고 기만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내 사견일 뿐이야. 두 보고서에서 발견된 공통점을 가지고 소거법으로 추려낸 이야기니까,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그렇다기엔 너무 그럴듯한 이야기다. 지휘관실의 분위기는 짜임새가 뛰어난 괴담이 휩쓸고 간 듯한 분위기가 된지 오래였다. 그런 말은 보고 전에 미리 깔아뒀어야 했다. 


"그, 그리고, 센티널을 발견했잖아? 이건 진짜 의미가 있다고 봐. 그러니까 공방에 박혀있는 그 녀석을 요목조목 뜯어서 대처방안을 잘 세워보자. 응?"


시간도 많이 흘렀고, 여러 이야기도 충분히 오갔기에 오늘의 밀회는 여기서 정리되는 흐름이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해가 뜨기 직전 패널의 알람이 울렸다. 날이 전부 밝고서 확인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처음엔 무시했지만, 닥터로부터 날아든 것이라는 걸 알자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가르는 것은 확실히 구분 되느냐 아니냐이다.


닥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하자면,


가령, 아주 사소한 행동부터 시작해서 인간 개개인의 감정과 특성, 그것을 아우르는 성격이나 개성은 뇌가 전체적으로 반응해서 발현된다. 기계는 그 반대다. 필요에 따라서 각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가 제각각 반응한다. 말을 해야 하면 언어 모듈의 신호를 받고, 발포한다는 행동이 필요하면 전투모듈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지성체가 보기에 감정표현이라 볼 만한 행동도 마찬가지. 프로그래밍된 부품이 모두 따로 기능할 뿐이다. 그 모든 프로세스는 중앙처리 제어장치만 달려있으면 문제 없음. ags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정도가 되겠다.


서두의 말미에는 센티널의 머리 내부와 동물의 신경계 구조도와 함께 이렇게 적혀 있다.


고차적인 정신 기능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


내용을 숙지하고 칸에게 다가갔다.


"야. 이거 봐."


보고서를 읽고나니 문득 떠올랐다. 센티널을 발견했을 때부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작은 위화감이었다. 모니터의 작은 물자국 같은, 상당히 예민하게 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간대도 문제 없을 크기의 사소한 위화감이었다.


"닥터는 센티널을 철충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어."

"전에도 나온 이야기잖나."

"부를 수 없겠다고 한 거지, 결론이 아니었잖아."


보고서를 보니 닥터는 그것에까지 신경을 쏟고 있던 듯했다. 분명 모두가 느꼈겠지만 너무 작은 크기의 위화감, 너무 범상한 것이라 다들 가볍게 넘겼을 그것을 닥터는 알아챘다.


분명 나도 그 위화감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다음과 같은 자문을 날렸을 것이다.


철충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정말로 센티널은 철충이 아닌가? 단순히 외형적인 특성이 유사하다고 해서 철충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비슷한 색감과 질감을 가져서 그랬던 건 아닐까? 애초에 멸망한 오늘날에도 철충이 위협적인 이유가 뭐였지? 단순히 제어권을 상실하여 적대적이게 된 ags라는 외적인 부분 외 정리할 수 없는, 다른 요소가 뭐였지?


왜 바이오로이드는 철충에게 애를 먹었지?

왜 저항군은 폐하가 필요했지?


다시 정리해보니 너무 간단하게 풀려버린 퍼즐을 들어올린 그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금 칸이 보이는 반응이 1분전 내 반응이었다.


센티널에게서는 어떠한 파동도 감지할 수 없었다.


보고서 최하단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위쪽에는 직접 촬영한 듯한 사진이 두 장 실려 있다. 각각의 사진 아래엔 유충에게 침식 당한 ags의 회로, 센티널의 회로라 적혀 있다. 색감은 같아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질감이 다르다. ags쪽 회로의 피복은 보이는 그대로 기계같은 질감, 센티널 쪽 회로의 피복은 동물의 근육조직같은 질감이다.


"우리, 센티널을 발견했을 때 그 누구도 인간으로 혼동하지 않았어."


이제는 부정할 수 없다.


센티널은 철충이 아니다. 


아직 단언할 수 있을 만큼의 확실한 재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나 철충과 엇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오르카 최고의 브레인이 보증한다면, 부정할 거리를 만들어서 들이민대도 아무도 재설득 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뒤다. 

센티널은 철충이 아니란 사실을 뒷받침하는 아주 생생한 광경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 * * 





"저희, 알아선 안 될 걸 알아버렸는지도 몰라요…"


아침 조회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시간, 우리는 함교에 모여 있었다. 유미의 전언이었다. 도쿄 쪽에서 기묘한 움직임을 포착했다며 에이다가 보내온 영상이라고 소개한 유미는 영상이 끝나고서야 의자 밑에서 기어나왔다. 구역질을 참기라도 했던 건지 코와 눈가가 시뻘갰다.


구역질 해도 너르게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장 아자젤부터가 아직까지 구역질 중이다. 영상의 내용이 내용이다보니 함교의 과반수가 죽을상이었다.


"지금 내가 본 거, 너희도 다 본 거지?"


아무에게나 확인하는 사디어스에게 티아멧이 끄덕였다. 미약하게 떨던 티아멧은 다리를 지탱할 것을 찾고 있는 듯했다.


영상은 이전의 유인물이나 패널 보다 아주 알기 쉬웠다. 흡입력, 전달력 면에서 글보다 영상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다. 효율적인 면에서의 이야기다.


하여튼 영상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쓸데없는 비계를 쳐내고 담백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만 담았다는 인상마저 받았다. 과연 기계. 우리 바이오로이드처럼 감정에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보조 패널에 떠있는 에이다의 화상화면은 마치 이렇게도 말하는 것 같다. 살덩이들이 토를 하든 말든 나는 전달한다. 이런 게 진짜 냉정함이다. 기계이니 무감정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겠지만, 뭐, 어쨌든.


그래서 영상의 장르가 뭐냐면, 딱 그거다. 슬래셔 무비. 지금의 내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있을 수 없다. 


함교의 모두가 공황을 호소했다. 칸은 호드를 제외한 모두를 내보내고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일방적인 학살이군."


나는 학살보다는 아이에게 터져죽어가는 개미같다고 느꼈다. 재밌을 것 같다. 아이를 악역으로 내세운 슬래셔 무비.


영상 속 센티널들은, 철충을 죽이고 있다.


"대단하네." 나는 동요를 억누르고 말했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익스큐셔너를 찢어죽이다니, 거의 뭐 거열형이라도 당한 꼴이 됐잖아."


"이것도 봐." 워울프가 구석으로 몰리는 중인 스토커를 가리켰다. "얘 꼭 목숨을 구걸하는 것 같지 않아? 윽… 터졌다."


연결체들이 그 모양이니 더 약하고 작은 녀석들은 상대조차 안 됐다. 센티널의 다리에 잡힌 나이트칙은 비치 볼처럼 다뤄지고, 빅 칙은 벽에 박힌 과녁이 되어 센티널들이 던져대는 온갖 것들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센츄리온은 익스큐셔너와 비슷한 꼴이 됐다. 다리가 빨라 도망치던 슬래셔를 상대로 속도 승부를 거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날아가던 스패로우를 들이받아 추락시키기도 했다. 샐러맨더는 이걸 보고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맹금류 중에 그런 사냥법을 가진 녀석이 있다.' 고 말했다. 어떻게 봐도 사냥이 아니다.


다시 재생된 영상이 끝나고 에이다가 말했다.


"이와 유사한 동향이 아메리카의 동북부 쪽에서도 관측 되었습니다. 본 사항에 대해서는 사령관께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그건 곤란해.


함교를 뒤로 했다. 칸의 지휘관실로 가다가 유미를 찾아서 다시 지휘관실로 향했다.


지휘관실에 들어서자마자 유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들어오는 위성 교신은 모두 차단해."

"네…?"


멍청한 얼굴을 해서 뺨을 쳐버리려다가 참고 다시 말했다.


"네 선에서 끊으라고."

"하, 하지만 그건… 월권행위인데…"

"내 말 들어서 나쁠 거 없어. 해."

"훗날에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훗날? 지금 먼저 생각하렴."


왼손에 팬텀을 쥐었다.


"할게요! 할 테니까 살려주세요!"


고개를 까딱여 유미를 치웠다.


"하하…"


유미가 나가고 워울프가 메마른 웃음 소리를 냈다. 반응다운 반응은 그 녀석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을 초침이 메꾼다. 


"움직이는 센티널과 처음 조우했을 때를 기억하나?"


낮게 깔린 칸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딱히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는지, 나머지가 유지 중인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숲 속에서 배회하던 그 모습 말이다. 머리에 오목눈이를 올려두고, 나뭇가지를 관찰하듯이 동체를 움직이던. 공격성은 전혀 없었지."


칸이 너무 심각한 얼굴이었어서 쿡쿡 웃어 보였다. 효과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다시 아르망을 의심했었다. 그런 놈들이 오르카를, 나아가 저항군을 완벽히 무너뜨린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오늘까지다. 센티널은 인류의 적이야. 그리고, 철충의 적이기도 한 것 같군."


"그 부분 말인데요…"라고 페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저희가 돌아다닌 건 뭐가 되는 거에요?"


"무슨 의미인가."


칸이 추궁하듯 물어서 페더가 움츠러들었다.


"아뇨아뇨. 그게, 저희는 이제껏 그 미지의 개체를 철충이라 단정하고 찾아다니고 조사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철충이 아니라고 하면, 으음… 뭔가 이상해서…"


"중요한 것만 생각해라. 조사가 가능한 표본이 있고, 시간도 있다. 대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칸에게 동의한다. 그게 중요하다. 다소 회피적인 걸로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이젠 생각해봐야 골치만 아플 뿐인 것에 더 쏟을 시간이 없다. 실질적인 대처방안을 세워둬야 한다.


어느 정도의 기술력을 가졌길래 닥터가 압도 당하는지.

왜 갑자기 공격적이게 됐는지.

녀석들이 철충이 아니라면 정체가 뭔지.

기원은 무엇인지.


이젠 그런 것보다 앞서 생각해야할 게 있다.


"아니… 하지만 분명히…"


센티널을 강하게 의식하자 떠오른 기억들을 살핀다.

 

오르카의 최후. 그 기억 속에서는 분명 철충 신호가 잡혔었다. 레이더를 빨갛게 뒤덮을 만큼 포착됐었다.


마음을 다잡은 건 좋다. 하지만 페더의 말대로다. 이런 타이밍에 갑자기 철충이 아니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마키나의 드론과 비슷한 것 같은 그런, 센티널 외에도 신경 쓸 게 한 두가지가 아닌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무엇 하나 제대로 판명된 게 없는데 더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콘스탄챠는 철충한테 죽어. 센티널은 철충을 적대해. 그렇다고 여기서 적의 적은 아군이란 논리는 펼칠 수 없어. 오르카를 부수는 게 센티널이야.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확실하게 밝혀지는 것이 없다. 계속해서 열을 셋으로 나누는 것 같다.


"괜찮아?"


"괜찮아. 가벼운 두통이야." 하이에나의 손을 뿌리쳤다. "오늘 밤에 다 모이라고 해. 전달할 게 있어."


칸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받고 지휘관실을 나서서 생활관으로 돌아갔다. 물을 두 잔 연속으로 마시고, 속옷만 빼고 모두 벗고서 여덟 시간 정도 잤다. 그래도 두통은 남아 있어서 다섯 시간 정도 더 잤다.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카페테리아로 가서 주방을 빌려 커피를 내려마시고 지휘관실로 갔다. 두통은 약해졌지만 신경은 긁을 정도라 나는 아무도 없는 지휘관실에서 소파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따금 무릎이나 앞의 테이블에 물고기 모양의 그림자 그림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자정이 되자 모두 모였다. 칸은 21시쯤에 지휘관실에 들어와 있었지만, 대화는 한 번도 나누지 않았다.


지휘관실의 조명이 꺼졌기에 부유물도 안 보이는 창 밖을 보다가, 나는 말했다.


"특정 상황에 대해 대비를 해놔야겠어."

"특정 상황이란?"


칸이 대답하고 내가 다시 말했다.


"최악의 상황."

"말해."


창 밖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닥터가 대답했다.


"듣기 좀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어."

"더는 그런 건 없어. 이미 충분히 봐왔으니까."


 그리고, 라고 닥터는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깔았다.


"너같은 것보다 더 이상한 것도 없지."


일주일 전의 나라면 호전적으로 웃어줬을 것이다. 


"이전의 오르카들은 이번 9월에 침몰했어."


먼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돌아 등으로 살폈다. 눈에 띄는 반응은 없었다.


"너희가 오늘 아침에 봤던 학살극의 주인공에게 말이지."


"저기, 저기."


포츈이 물어왔다.


"말해."

"방금 오르카가 '침몰'한다고 했잖아?"

"그래."

"그건, 그 문어들이 바다 속에도 들어온다는 거야?"

"철충은 바다를 꺼린다?"

"응… 그렇잖아."

"철충이 아니라잖아. 그럼 얼마나 바다를 헤엄치든 뭔 상관이야. 생긴 것도 헤엄 잘 치게 생겼고."


포츈의 그림자가 쭈뼛댔다. 질문은 그게 다였다.


나는 평정을 유지하며, 담담하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오르카의 침몰 과정을 소개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뭘 했느냐가 다르지, 전부 똑같은 흐름이었기에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시간이 필요해. 아주 많이." 생각을 마친 닥터가 말했다. "1,2주 정도로는 안 돼. 아예 한 장소에 눌러 앉아 있으면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환경이 필요해."


그런 환경이라면 마침 적기다. 오르카의 다음 행선지는 가고시마. 곧 여름 휴가가 시작된다. 


"시간은 벌어 주겠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어서 준비해 봐."


닥터는 대답없이 가로막고 있는 녀석들을 난폭하게 밀쳐가며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출입문이 열리고 닫히자, 닥터가 사라진 경로를 불안하게 보던 녀석들 중에서 누군가 말했다.


"아르망 씨." 목소리의 주인은 티아멧이었다.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아무래도 이상한 질문 같다, 라는 표정인 걸 보니 물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꺼릴 것 없다. 누구 말대로 나나 센티널 이상으로 이상한 것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티아멧의 입을 열었다.


"전조, 같은 것은 없었나요."


"전조?"


"당신이 이야기한 사태의 전조요. 그 정도의 일인데 아무런 전조가 없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서…" 


600년이 다 되어서 철충이 아니라고 판명된 녀석도 갑자기 제주도에서 발견됐는데 전조 따위가 어디 있겠는가? 오르카가 언제 공격받을지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그렇게 대답해주긴 뭐해서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그 만한 일에 아무 전조가 없다는 것은 기묘한 걸 넘어 불합리하게도 느껴진다. 예정된 시기만 알고 있다면 불안하기만 할 뿐이니까. 확실한 전조, 혹은 그와 비슷한 게 하나 쯤은 있는 편이 마음을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녀석들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파멸과 관련됐다면 나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데 어째서 기억이 흐릿해진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거짓말로라도 전조를 지어낼까 생각했을 땐 허탈하게 웃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난 지금 바이오로이드를 배려하려 드는 건가?


"딱히 없네. 폐하한테서 도망치다가 잠깐 마주친..."


작은 배려를 배풀 요량으로 꺼낸 아무 말이었다. 기억의 파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파편이었다. 그러나 다시 떠올려보자면 전조라는 단어에 그보다 부합하는 것도 없었다.


"…초롱 아귀."

"네?"


티아멧에게 물은 게 아니다. 


"너." 


땡그래진 눈을 원래 크기로 되돌리고 이번에야말로 티아멧에게 물었다.


"혹시 물고기랑 눈 마주쳐 본 적 있어?"


티아멧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지 단지 내 질문에 맞는 기억을 떠올리려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 거북과는 마주친 적이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걷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같은 일기에 뻔질나게 쓸 법한 내용이 아니다. 육지에서의 햇살이 그렇듯이 오르카에서 해양 생물과 아이컨택을 하는 것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럼에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특별하다기보다 너무나 불온한 시선을 나는 느껴 본 적이 있다.


마치 지금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창 밖은 새까맣다. 지휘관실은 조명을 켜두지 않아서 부스러기같은 부유물 하나 비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창문 밖 칠흑의 정중앙에 초롱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어둠이 지휘관실과 바다를 일체화시킨 탓에 초롱에 밝혀진 창문은 작은 액자로, 눈앞의 그것은 사진 속 피사체로 보였다.


믿을 수 없다. 뭘 믿을 수 없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더 믿을 수 없던 건 옆에 서있던 티아멧의 말이었다.


"초롱 아귀란 건 이걸 말한 건가요?"

"뭐?"


나는 티아멧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저게 보여!? 창 밖은 바다고 바다에 초롱 아귀가 있는 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티아멧은 끄덕인다. 당연히 이상하지. 그야 그 초롱 아귀는,


"내… 어라…?"


분명 언젠가, 아주 옛날에, 정말정말 괴로웠을 때 떠올린 풍경이었는데? 그 풍경 속의 초롱 아귀였는데? 기억이 역류하여 현재에 혼재된다. 그런 녀석이랑 마주친 적이 있었어? 언제였지? 그게 이번에도 나타났어? 그건 그렇고 그런 녀석이 왜 티아멧에게도 보이는 거야? 내가 품은 풍경 속 녀석을, 죽음과 파멸의 메타포를. 


이상하다. 이거고 저거고 전부 다 이상해. 센티널이고 공장이고 cctv고 보안이고 도쿄고 철충이고 뭐고 뒤죽박죽,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처리를 요구해서 두통이 몰려온다. 나도 모르게 주저앉는다. 눈물이 핑 돈다.


어깨가 흔들린다. 귀가 울린다.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은데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시야는 창 밖보다 어두워져 눈을 뜨고 있는 건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된다.


더는, 무리다. 나는 전신에서 힘을 빼고 장력이 사라진 로프처럼 흐물흐물 칠흑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만 자고 싶다. 아무도 방해하지 말았으면 했다.







* * *






"괜찮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군."


뜨여진 눈으로 처음 본 것은 협탁 위의 작은 백자였다. 백자에 꽂힌 데이지와 델피늄의 고개가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긋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다시 불어온 바람에는 옅은 바다내음이 섞여 있었다. 그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내 반응을 보고 칸은 몸을 일으켜 손수 창문을 닫고, 간병인이라도 된 양 다리맡 비스듬한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여느때보다 상냥해 보인 것은 실제로 칸이 그런 눈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약해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지났어?" 


어쩌다 드러눕게 됐는지는 기억하고 있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을 것은 없었다. 칸은 닫혔음에도 창을 뚫고 들어오는 새된 소리에 대답을 늦췄다가 일주일이라고 답해줬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다프네하고 접촉했다는 소리야?"


칸은 고개로 대답하고 걱정말라는 듯 한손바닥을 올려 보였다. 칸이 말하길, 다프네도 합류했다고 한다. 물론 나를 믿어서가 아니고 칸과 우리가 모아온 증거 쪽을 믿어서라고 했다.


"그걸 증거라고 불러야 하나."


"증거지. 파멸의 증거."


LRL이 할 법한 대사였지만, 칸이 하니 나름 무게감이 있어 보였다.


나는 약 냄새가 밴 환자복을 벗고 아르망 추기경이기 위한 차림새를 다시 갖춘 후 의료실을 나섰다. 


냉방중이던 의료실과 대조적인 복도로 나오자 몸 곳곳에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일주일 새에 묵직해졌다. 창 밖의 일조량은 과해서, 바다의 반짝임은 한계를 모르고 상승하려드는 수온을 향한 몸부림으로 보였다. 


중식 시간 알람이 울렸지만, 부리나케 식당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없다. 다들 여름 휴가를 즐기는데 열심이다. 파라솔 밑에서 여유롭게 선탠 중인 퍼블릭 서번트. 수영하다말고 창 너머로 지나가는 우리에게 물을 뿌리는 덴세츠. 모래성 쌓기에 여념이 없는 아머드 메이든. 파도 끝부분을 걸으며 조개껍데기를 수집 중인 페어리. 함내까지 들릴 크기로 극성맞게 외쳐대며 폐하를 찾는 몇몇 년들. 그런 여름 휴가다운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며 지옥 훈련으로 죽어나는 스틸 라인.


스틸 라인만 빼면 대부분 그럭저럭 즐거워 보인다.


창을 따라 걷기 시작한 게 방금인데 어느새 오르카를 한바퀴 쭉 돌아버렸다. 칸이 잠깐이면 괜찮다는 얼굴을 해서 나는 사양했다. 피서는 계획에 없다.


카페테리아에서 짧은 시간을 갖고 난 후에 격납고로 향했다. 들어서기 전부터 엔진 예열을 마친 수송기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격납고를 찾은 이유는 알았다. 내가 모르겠던 건 왜 그 녀석이 수송기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였다.


조종은 칸과 하르페이아가 맡았다. 나는 얌전히 그들의 멀찍한 뒷편에 앉아…있으려고 했지만 바로 옆에 앉은 다프네가 통로 너머로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몇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 그럴 때마다 다프네도 자리를 옮겼다. 


그러기를 여섯 번 반복했을 때가 되어서 내가 말했다.


"버스나 기차, 비행기를 탈 때는 얌전히 앉아있어야 된다는 것도 못 배웠니?"


누가 들어도 시비조인데 오히려 다프네는 흥미롭다는 듯 더 해보라는 얼굴이었다. 내 거동 하나하나에 눈을 반짝인다고 하면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지껄일수록 걸고 넘어질 구석이나 실수를 포착하기 쉬워진다는 듯이. 그런 걸 노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더는 아무 말도 안 나왔다.


"나는 너 마음에 안 들어." 


나는 그렇게 마무리 짓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이년이 비웃는 듯한 표정만 안 지었다면.


"지금 웃었어?"


다프네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착각하시는군요. 저를 피해다니신 이유가 짐작 됩니다."


"아무렴 씨발년아. 누구한테 잘못 지껄였다가 격리 당하는 것보단 낫잖아."


"이 얼마나 난폭한 언사… 추기경이 아니라 마녀라 해야겠군요. 그래요. 당신이 겪었다던 다른 오르카에선 격리 당할 취급이었나보죠?"


"아주 고맙게도 말이야."


"걱정 마시길. 이번에는 그럴 생각 없으니까요. 권한도 없고요."


"그때는 너같은 년한테 그럴 권한이 있어서 격리 당할 뻔한 줄 알아?"


"그만하실까요. 저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자연스럽게 대화가 단절된 지 한 시간이 좀 안 되어서 수송기가 착륙했다. 목적지는 그 섬이다. 얘들은 어쩌려고 휴가 첫날부터 이런 곳에 왔나 싶었는데, 섬에는 우리 말고도 몇 개체가 더 있었다. 하르페이아에게 듣기로는 이 섬도 이번 휴가의 피서지로 지정되어서 희망자에 한해 방문했다는 모양이다. 물론 그 희망자들이란 우리 쪽에서 추려낸 녀석들이다.


일년이 넘어 찾은 섬은 변한 게 없다. 오르카에 오르기 전에도 꼴랑 2~3년 지나갔대서 변한 건 없었으니 당연하다. 


대공 화기들도 관리 할 겸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들를 생각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찾을 줄은 몰랐다. 나는 섬 한복판에 서서 잠시 동안 바람을 즐기고 네오딤을 꺼내 섬 전체의 대공 화기를 점검했다. 내 조작에 맞춰 발사만 되면 충분하기에 점검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수송기에 들렀다 나온 하르페이아가 아직 오전이라고 일러주었다. 시간이 빈다. 가고시마 기준으로 18시 이전에만 돌아가면 된다고 하니 우리는 섬에 좀 더 머물기로 했다.


어떻게든 나를 무릎에 뉘이게 하려는 페더나 하르페이아 같은 년들이 있다 보니 무릎 만큼 짜증나는 베개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한해서, 무릎보다 좋은 베개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쩐 일로 칸이 고분고분 내 요청을 다 들어주었던 것이다.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앉기 좋은 동산에 위치한 대공포를 등지고 앉아서 무릎을 내어줬다. 나는 사양할 것 없이 옆으로 누워 칸에게 뒤통수를 맡겼다. 녹슨 쇠냄새와 풀냄새 사이로 칸의 살냄새가 났다. 


전방에는 바다, 뭍에는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후방에서는 섬을 훑는 바람이 다가왔다. 멀리서는 동산에 신이 난 년들의 소리도 들린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저녁까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칸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그때, 내가 널 내쳤다면 어쩔 생각이었나."


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지나간 다음에 나는 말했다.


"믿어줬으니까 됐어."

"중요한 거다. 대답해."


"아주 거친 플랜b가 발동했겠지. 필요하면 니들 다 죽이고, 오르카도 침몰시켰을 거야."


"사령관만 살면 상관없다 이거냐."

"우리 약속한 거 잊었니?"


팔을 뻗어 볼을 꼬집었다. 윗입술을 문지르고, 선을 따라 턱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서글퍼보이는 게 귀엽다.


"너도 나 죽여. 나도 너 죽일 거니까."

"필요하면."

"그래. 필요하면."

"두통은 좀 괜찮나?"

"우리 대장님 덕분에."


설마 그것을 위해서 이 섬에 온 거냐고 물었지만, 칸은 부정하고 다프네에게 섬을 보여줄 목적으로 온 것이라고 대답했다. 평소처럼 '멋대로 생각해라.' 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참 길게도 말한다고 생각했다.


바람대로 저녁까지 섬에서 있었다. 아주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수송기로 돌아와 섬의 이상한 점에 대해 늘어놓는 다프네를 봐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여름 휴가가 끝나고도 매일이 이렇다면 좋을 텐데.


그럴 일이야 없겠지. 오늘은 오늘로 끝낸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다음날 아침, 생활관에서 눈을 뜨고 찾아간 지휘관실에는 코헤이 녀석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녀석들은 급했는지 인사도 생략하고 어제 들른 가고시마 지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말한대로 '그런 아자젤'이 정말로 존재했다.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매역인 엔젤과 함께 처리했다……


멸망 전 코헤이라면 몰라도 저항군의 코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보였다. 일반적이라면 그리 생각할 것이다.


…요컨대, 이런 거다. 자신이 겪을 경험에 대해, 더 나아가 그 경험에서 비롯될 감정까지 싸그리 스포일러를 당하면 당사자는 과연 그 스포일러의 내용과 같은 반응일 수 있을까. 코헤이는 여기에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참 못된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난 원래 그런 년이다. 게다가 내가 그랬다 한들 코헤이 교단이 표방하는 주된 이념은 바로 박애다. 어디 종교적 박애란 게 어떤 수작질에 간단히 사그라들 만한 것인가? 결국은 코헤이 년들의 문제이며 한편으론 이번 가고시마 지부에서의 사건은 종교적 사상과 이념이, '올바름'이란 게 얼마나 허울 뿐인 것인지를 시사한다. 역겨운 거짓말쟁이들 같으니.


그래도 입장상 코헤이를 두둔하자면, 가고시마 지부를 방문한 목적이 이전과 달랐기에 그런 흐름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구원자가 죽는다는데, 씨발것의 외딴 지부에 처박힌 년 따위 알 바겠냐고.


"예의 그 개체는 가고시마 지부에서도 목격했다."


사라카엘은 불편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수는 적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얼마 전에 본 영상처럼 철충을 도륙내진 않았다고 했다. 그뿐이었단다. 그 외에 살펴 볼 만한 특이 사항은 없는 듯하다.


곤란하게 됐다. 이년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 이상으로 곤란한 일이다. 


가고시마 이후의 행선지는 없다. 아메리카였던 것 같긴한데 그곳으로 향하기 전에 파멸이 찾아온다. 따라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는다면 가고시마 밖에 없었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하면 가고시마 외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했다? 정보다운 정보가 없다? 이제는 칸도 오지랖 넓은 년들 때문에 맘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어떻게 수를 강구하지?


…난, 뭘 하고 있는 거람?

뭘 얌전빼고 있는 거지? 협력하는 녀석들이 많다고 은연 중에 그런 년들 안위라도 신경쓰는 건가?


나답게 하는 거다.


이제는 물불 가려선 안 된다. 좀 더 오르카 년들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최근 유미가 난감을 표하며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에이다의 교신을 차단하기 위해 외부 통신 포트를 하나만 개방해둔 것을 '이상 신호'로 받아들인 녀석이 있다는 듯했다.


"발칙한 암캐들 같으니. 일시적인 교신 불량이라 생각했는데 고의적인 수였다니,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니?"


아주 지 좋을 때만 교신해오는 년답다. 야심한 밤의 함교에서 떠들어대는 건 무려 최초의 바이오로이드라는 바로 그 에바다. 못 생긴 년. 푸르딩딩한 패널 너머라 더 못 생겨 보인다.


유미에 따르면 틈 날 때마다 에바는 교신을 시도해온 모양이라, 우리가 원하는 시간대에 에바를 불러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내 지시에 따라 에이다고 에바고 모든 통신을 차단해왔던 유미다 보니, 이번에 '오르카에 이상이 생겼다.'고 답신해주자 곧바로 꿰어낼 수 있었다는 것 같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거두절미하고 그간 모은 정보들을 보여준 후 에바에게 물었다.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런 짧은 단답은 건성으로 한 주제에 그간 교신이 불가능했던 게 몹시 화가 났던 건지, 에바는 비난에 열을 올려갔다.


참을 만큼 참았다.


"진짜 씨발년 아주 쉼없이 지랄을 하네."


에바는 일그러진 표정 째로 굳었다. 패널 전체가 굳었는지도 모른다.


"뭐 이 씨발년아. 욕은 너만 할 줄 알아? 포르노 사이트 갱뱅 카테고리 누르면 제일 먼저 튀어나올 것 같이 생긴 년이 누구 보고 씨발 암캐암캐 개지랄이야."


"너…너…!"


"뭘 어버버거려 씨발 창년아. 굳이 말로 해줘야 알아 먹어? 어? 창년아? 너 창녀같이 생겼다고 씹창년아. 멸망 전 제일 싸게 놀 수 있는 홍등가에 너같이 생긴 년이 얼마나 많았는데? 재밌는 거 알려줄까? 그런데는 단체로 가면 할인도 해줬다? 왠 줄 아니? 바이오로이드한테 밀렸거든. 안 그래도 1:1가격이 바이오로이드보다 비싼데, 누가 너 같이 생긴 다 늙은 인간년을 사먹겠냐고."


"진정해…"


하르페이아 같은 목소리가 제지한다. 상관 않고 계속한다.


"그건 그렇고 참 불쌍한 년이야. 생긴 건 좆도 못 생겼어~ 그것도 서러운데 남편은 바이오로이드에게 뺏겨~ 같은 인간한테도 뺏겨~ 그러다 남편은 실종 돼버리고, 인간들은 신시대를 열어준 남편에게 감사는 못할망정 비난이나 해대고. 아니? 네 남편 이름은 인간들한테 욕설이었던 거? "이 애덤같은 새끼!" 인간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오간다는 건 한번 싸우자는 소리였어. ㅋㅋ 네 남편은 딴에 인간들을 위해 바이오로이드를 개발했다 생각했을지 몰라도, 어쩜. 바이오로이드야말로 인간을 도탄에 빠트린 개좆같은 년들이었는데 말이야. 이야. 그런 년들의 시초시라니. 그런 분에게 욕을 다 먹을 수 있어서 황송할 따름인데?"


"다, 닥치지…못…"


"그러게 이 씨발년아! 감히 누구한테 암캐암캐 개지랄을 떨어! 상대 봐가면서 덤벼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년이 어떻게 감당하려고 눈을 부라려! 괜찮은 정보라도 들고 있으면 눈이라도 감아줄 텐데 아는 건 좆도 없는 년이 뭘 담보로 씨팔 처개겼냐고! 아앙!? 욕도 다양하게 할 줄 모르면서 그냥 되는대로 뱉으면 내가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조아릴줄 알았냐!? 암캐년아! 넌 딱 목 씻고 기다려! 이쪽 일 일단락 되면 넌 내가 손수 목을 썰어버릴 거니까! 알아 들었냐? 앙!? 알아 들었냐고!"


패널에서 에바가 사라졌다. 교신 종료, 라고 유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병신같은 년.


"우리 에바께서도 센티널에 대해 아시는 바가 없는 모양이네?"


내 능청에 겉으로나마 웃어 보이는 녀석은 없었다.


에바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에이다 쪽도 기대할 수 없다. 센티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모른다. 정말로 미지의 존재가 맞다. 하지만 죽일 수 있다. 발견할 때마다 몇 번이나 죽였다. 주눅 들 필요는 없다.


휴가 사흘째. 닥터를 위시한 기술자들의 대비책을 살피기로 한다. 


"EMP폭탄?"


엉망인 작업대에 올라있는 둥그스름한 것을 두고 닥터는 "기뢰." 라 가리켰다. 그 옆의 미사일같은 건 어뢰고 뚱뚱한 총알 같은 건 폭뢰겠지.


"청어떼마냥 어마어마하게 몰려온다며? 그럼 이러는 게 효과적이잖아. 그놈들이 뭐가 됐든 일단은 기계야. EMP는 효과가 있어. 검증도 했고."


아무도 토 달지 않는다. 오르카 최고의 브레인이다. 그런 녀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철저하게 파괴를 목적으로 고안했다하니 효과도 확실할 것이다. 


닥터는 시간 벌이는 잘 되고 있느냐 물어왔다.


"벌이가 꼭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말만 하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줄게."


"그럼 최소 2주 이상 현상태를 유지해주도록 해. 특히 오르카는 절대, 1mm라도 움직이면 안 돼. 하나하나 고출력으로 제작할 것들이라 오르카 전체에 차폐작업을 다시해야 되거든. 적재에 용이하게 선창을 싹 밀고 다시 배치할 거고, 불필요한 설비나 시설도 마찬가지야. 작업량이 많으니까 ags를 함내에서 운용 할 건데, 작업내용이 내용이라 오빠가 모르는 편이 나을걸."


"차라리 폐하를 오르카에 들이지 말라고 해."


"그거 밖에 더 있어? 오빠가 모르려면 야전 텐트 생활 외엔 없어. 잘해봐. 빠르면 내일부터 작업할 거니까."


거듭 느끼지만 난 이번 오르카의 닥터가 정말 마음에 든다. 다른 년들도 이 시원시원함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렇고 어려운 주문이다. 폐하를 오르카로 들여선 안 된다니. 방법이야 찾아보면 있겠지만, 아마도 '그런 방법'은 칸을 포함해 우리 쪽 애들에게 상당한 반발을 살 것이다. 좀 얌전한 방법은 아무것도 모르는 년들 눈에 띈다. 이상적인 형태는 오르카의 모두가 폐하를 들이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협조하는 것뿐이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한다. 


우리에게 순순히 협조해줄 필요는 없다. 바라지도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협조만 받으면 된다.


"우리에 대해 전부 밝히자."


둘이 있을 때 그렇게 말해도 칸은 당황하지 않았다. 칸도 때가 됐다 생각한 것이다. 이런 모임의 구심점이란 입장에서 오는 부담도 만만치 않았겠지. 불쌍한 대장님. 누굴 탓하진 않길 빈다. 다 대장님 잘못이다. 나같은 년의 눈에 띈 게 잘못이다.


휴가 나흘째. 라비아타를 제외한 오르카의 모든 지휘관급 개체들이 칸의 지휘관실에 모였다. 이야기가 오갔고, 긴 침묵 끝에 메이가 첫 운을 뗐다.


"본론에 앞서 물어보겠는데, 언제부터 지휘관급 회동이 망상이나 지껄여대는 자리가 된 거야?"


"사안의 중대함을 알고도 그런 반응인가. 유감스럽군."


"유감스럽군? 야, 칸. 유감스러운 건 나야. 너 저번에 뭐라고 했어? 요즘 왜이리 보기 힘드냐고 할 때는 신설된 동아리에 참여하느라 그랬다고 했지? 설마 그 동아리란 게 삼류 소설이나 끄적이는 창작 동아리였니? 지금 뭐 네 소설 감상회라도 하는 거야?"


"음악 감상회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을 돌리는 걸 보니 칸은 화난 거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하! 그러셔? 무슨 음악을 들으시길래?"


"비틀즈."


"젤리 말고 무슨 음악 듣냐고."


"젤리가 아니다. 밴드다. 하긴, 너 따위가 비틀즈의 위대함을 알 리가 없지."


"교양이 모자라서 저엉~말 죄송하네요. 그래서? 그 비틀즈라는 위대한 녀석들을 이용해서 회의까지 빼먹고 돌아다닌 게, 그 따위 망상이나 하기 위해서였나?"


"도쿄의 영상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뭣하면 다시 보여줘? 익스큐셔너가 산 채로 찢겨 죽는 걸 다시 보면 네 보잘것없는 상황 판단력이 바로 설 수 있겠나?"


"야. 철충을 찢어죽이는 저 문어들이 오르카가 침몰한다는 망상과 도대체 어떻게 연결된다는 건데?"


"오르카를 침몰시키는 녀석들이다."


"증거는?"


"저 녀석들 자체가 증거다."


"알았어. 좋아.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 그럼 그 cctv나 공장은? 보안은? 그것들이 어떻게 오르카의 침몰과 연관되고 연결되는 건데?"


"기만일 거라는 의견이 있다."


"의견이 있다?"


"그래."


"철충이?"


"이야기를 똑바로 들은 건가. 철충이 아니라 했잖나."


"아, 그래. 쏘리. 철충이 아니지. 어쨌든 저 문어들이 바로 우리 저항군에게 기만을 펼친 것이다?"


"맞다."


"나, 좀 쉴래."


휘적휘적 손사래를 치던 손으로 메이는 양옆의 마리와 레오나를 툭 쳤다.


"질문." 레오나가 눈을 서늘하게 뜨고 말했다. "메이가 말한 그 망상의 소스를 제공한 자는?"


"표현을 정정해라."


"망상의 소스를 제공한 자는?"


"…아르망 추기경."


거기서 물러나면 어쩌자는 거니. 


"…아, 쟤?"

"…"


대놓고 비웃음을 머금고 쳐다본다. 그냥 삿대질을 하는 게 낫다.


"어머. 노려보는 것 좀 봐. 칸. 너도 갈 데까지 갔구나? 요 최근에 뭐 힘든 거라도 있었니?"


들어줄 테니까 말해봐, 라고 말한 레오나는 나를 볼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반대편의 마리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이다. 진지하게 듣고 있는 년들이 없다.


레오나는 매번 칸에게 다방면에서 밀리던 입장이라, 이번에 기회를 잡았다는 태도였다. 꼬은 다리위로 얹은 팔에 턱을 괴어서, 재밌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대며 칸을 관찰한다. 딱히 칸에게 의미있는 데미지는 주지 못하고 있는데 기를 누르고 있다 착각이라도 하는지 기고만장하다. 


여기까지가 인내심의 한계였지만 나는 꾹 참았다. 앞으로도 참을 생각이었다.


그렇다. 참을 생각이었다. 레오나가 조금만 도와줬다면.


"얘, 칸. 네 입장을 알아야지. 본분이라는 게 있잖니. 넌 지휘관이야. 대장이라고. 그런 네가 저런… 하, 알지? 저런 녀석한테 휘둘리면 어쩌자는 거야. 봐. 딱 봐도 이상한 애잖아. 전에 누구더라. 누가 그랬는데. 쟤가 흘린 주사기를 검사했더니 항정신성 약물 성분이 검출됐댔나. 마약류 성분도 검출됐다 그랬던 것 같은데. 하여튼 그런 거에 의존할 정도로 상처깊은 녀석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좀 직설적으로 말하면 머리가 메롱인 녀석. 그렇다고 쟤를 동정할까? 으응, 아니지. 태도가 아주 나쁘다는데. 마치 자기만이 가슴 아픈 멸망 전의 이야기를 가졌다는 듯이..."


"야."


공기가 언다. 


그것으로 대부분의 년들은 상황을 파악 했지만, 레오나만이 응전 태세를 갖추고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메이는 움츠러들었고, 마리는 눈썹을 한번 튕긴 게 다다.


"야?"

"마음에 안 들어? 너 라고 해줄까?"

"…귀청소는 매번 하는데, 이상하네. 어떻게 들어도 건방진 소리야."

"씨발년이 귀에 좆이라도 박았는갑지."

"뭐!?"


"아르망! 멈춰라!"


아니. 안 멈춰. 왜 멈추라는지 알겠는데 안 멈춰.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지금 그 따위 소릴 한 거야?"


"그럼 모르고 하냐 이 개호로잡년아. 씨발 다리 하나 날려버려도 개만도 못할 년아."


"하…뭐…"


"얘도 욕 한번 박히니까 어버버대네. 아니, 야. 나같은 년이 욕하는 게 그렇게 신기해? 뭐 됐고, 다시 말해봐."


"입 다물어라. 이 자리에서 처분 당하고 싶은가."


"입은 너나 다물어 씨발 소아성애자년아."


마리는 바로 덤벼들었단 점에서 레오나보다 나았다. 나 원. 지가 소아성애자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데, 이렇게 즉각 반응하면 인정하는 꼴인 걸 모르나.


마리와는 대략 세 합 정도 주고 받았다. 그 이상 횟수로 주고 받지 않은 건 적당한 공방이었어서가 아니라 내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마리는 복부를 가격 당해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것을 보고 슬슬 말려야겠다 나서려던 년들은 모두 잠잠해졌다. 


"야. 다시 말해보라니까?" 나는 레오나에게 다가갔다. "네 왕언니 처맞는 거 보고 쫄았어? 너도 처맞을 것 같아?"


"읏…"


"말해. 빨리."


"뭘…"


"마치 자기만이 어쩌고부터. 자, 리핏."


"마치 자기만이 괴로운 멸망 전의 이야기를 가졌다는 듯이…"


뺨을 후려치고 소파 깊숙이 밀어붙였다.


"아아악!"


"너 22세기나 되어서야 개발된 년이잖아. 복원돼서 이어받은 기억에 22세기 이전에 대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런 주제에 씨발년아! 감히 뭘 안다고 네까짓 년이 멸망 전을 논해! 대가리에 들어찬 거라곤 폐하를 노린 추잡한 계획 밖에 없는 씨발 쓸모없는 년아! 네가 알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지옥이 어떤지 네가 알아!?"


"아악! 아파! 떼어줘!"


"보나마나 씨발년, 응? 너도 다른 년들이랑 다를것 없이 멸망 전 인간들을 까내리기에 바쁘겠지? 주제도 모르는 게. 내가 바이오로이드 중에서도 제일 싫어하는 것들이 바로 인간을 욕하는 것들이야. 인간에 대해선 조금도 모르고 인간이어봤던 적도 없고 오만가지 감정을 교환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뭘 안다고 인간을 논해. 하. 그런 주제에 폐하는 또 좋다고 꼬리 살랑살랑. 냄새나고 역겨운 년들 같으니. 폐하는 뭐 다른 줄 아나 보지?"


"아르망! 진정해!"


"그래. 네가 봤을 때 내가 어디 인간에게 상처입은 흔해빠진 바이오로이드로 보였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학대만 당해서 구제가 필요한 어린 양으로 보였냐고! 나는, 나는! 너희랑 달라. 인간에 대해 알아. 인간이 얼마나 역겹고 더러우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아주 잘 안다고. 나야말로 인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어! 기껏해야 인간의 도구일 뿐인 너희같은 거랑은! 근본부터가 다르다고!!"


"젠장! 다들 붙어라! 떼어내!"


"나는 그런 인간들도 모두 뒤로 하고 여기에 온 거야! 폐하를 구하려고! 꾸역꾸역 살아서! 도대체 내가 왜 살아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도 오직 폐하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텨서 다시 왔어! 너 따위 어줍잖은 년한테 그딴 소리나 처듣겠다고 온 게 아니라고!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년들이 꼴랑 기록 몇 줄 가지고 인간 전부를 욕하는 자리에나 끼려고 온 게 절대 아니란 말이야! 알아 들어라! 씨발 복원에 쓰인 자원이 아까운 년아! 알아 들으라고 했어!"


"흑… 으…"


"알아 들었으면 대답을 해!"


레오나의 입이 다 열리기 전에 끌려서 떨어져 버렸다.


왼뺨에 격통이 달린다.


"정신 차려라."

"굳이 뺨 안 때려도 알아서 차릴 수 있었어."

"오른 뺨에도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냐."


착각이 아니다. 뺨을 맞아도 진정이 안 된다.

나가기로 한다.


지휘관실을 나서기 전, 나는 다시 뒤돌았다.


"……폐하를 가장 사랑하는 건, 바로 나야."


그것까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 * *






근신 처분을 받은지 10일째가 되어서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군법에 의거해 적법하게 처리 됐다면 근신은 아득히 뛰어넘는 처분을 받았겠으나, 칸을 비롯한 당시의 지휘관들이 근신 이상을 희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맙냐고 한다면, 아니. 고마운 건 하나도 없다. 그렇게까지 해야 말귀를 들어먹었다는 게 어이가 없을 뿐이다.


말귀를 들어먹었다고 말한 부분에서 예상했겠지만, 오르카의 주축이 우리에게 협조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폐하는 일주일이 넘게 텐트에서 생활 중이란다. 폐하에게서 다양한 불만이 튀어나오고 있다는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폐하를 잠잠하게 만드는 녀석들은 오르카의 꼬맹이들이었단다. 콘스탄챠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던가. 


여름 휴가는 끝난지 오래이나 닥터의 주문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좀 더 오르카를 가고시마에 묶어 둘 필요가 있었다. 그 수단으로는 코헤이 가고시마 지부가 이용됐다. 죽은 건 나쁜 아자젤과 엔젤이지, 바벨과 철충은 멀쩡했으니까. 코헤이 녀석들이 의도치 않게 잘해줬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제 길어야 두 달 남았다. 기술적인 준비는 닥터에게 일임하고 나는 나대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레오나가 전해달라더군. 그런 의미로 한 소리가 아니라고."


갑판에서 생각에 잠겨있는데 칸이 그렇게 말했다.


"뭔 개소리야?"


"말 그대로다.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거야."


"뭐야." 나는 코웃음쳤다. "별 거에 다 신경쓰네. 그거 그냥 한 소리야."


"뭐라?"


"그냥 한 소리라고. 먼 옛날에 싹 다 뒈진 인간들 따위 알 바야? 눈앞에 폐하가 있는데."


"그런 것치곤 상당히 상처받은 반응이었지 않나."


"내가 그렇다면 씨발 그런 줄 알아. 좀."


괜히 슬퍼지잖아.


나같은 년의 일거일동에 촉각을 세울 여력이 있다면 폐하나 더 신경쓰기 바란다. 


다시 생각을 해보자. 닥터가 대비 중인 것은 최악 중의 최악인 상황이다. 되도록 닥터가 준비 중인 폭탄들을 사용할 상황이 되어선 안 된다. 내 목적은 폐하가 무사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온전히' 무사하신 상태여야 한다. 아니, 가능하다면이 아니라 무조건이다. 폐하가 온전하지 못할 상황이란 건 하나 밖에 없다. 


결국 이상적인 결말의 선결 조건은 콘스탄챠의 생존이다. 콘스탄챠가 죽어 버리면 센티널을 막는 의미가 없다. 이번에는 어찌어찌 폐하만은 살린다 해도, 콘스탄챠를 잃으시면 실패한 것과 다름없다. 나 개인적으론 그렇게라도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콘스탄챠의 죽음을 이겨내실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대하고 닥터에게 맡긴 것이기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결혼기념일. 폐하가 9월에 그 섬으로 향하는 걸 막아야 한다.


이전의 오르카에선 그 섬으로 소풍을 간다는 형태였다. 계기가 되는 것은 소완이다. 그년이 소풍을 가자고 조르는 것이다.


그럴 것을 생각하면, 소완을 죽이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소완이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 섬은 소완이 아니더라도 폐하가 이미 알고 있던 곳. 그래서 결혼식의 배경이 된 것이고, 결혼 후엔 폐하에게 있어 마음 한구석에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장소가 되지 않았을까. 나라면 그럴 것 같다. 폐하와 결혼식을 올린다면 그게 어디가 됐든 죽을 때까지 특별하게 여길 장소가 될 것이다.


가능성 높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소완을 어떻게 해버린다는 건 불필요한 짓이다. 폐하가 그 섬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려 했다면 처음부터 결혼식 장소를 다른 곳으로 잡게 했어야 했다. 아아, 나는 나대로 열심히 맹점을 헤아렸다 생각했는데, 결혼식이라니. 폐하는 그 섬을 어떻게 알게 되셔서 결혼식 장소로 삼았던 걸까.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와서 깨달은들 소용없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좀 거칠어서 반발을 살지도 모르지만, 할 수만 있다면 변수 따위 생기지 않을 아주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것을 시행하기로 한다. 내가 설치한 대공 화기는 어디까지나 보험이자 발악. 끝까지 사용할 일 없는 흐름으로 가야만 한다.


다프네가 필요했다. 더는 내부 사정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기에 나는 준비되는 대로 섬으로 향했다.


"당신, 미쳤어요? 정말로 그런 짓을 하겠다고요?"


필요한 걸 필요한 만큼 수집하고 계획을 말해주자 다프네는 아연실색했다. 


"정말이야. 할 거야."


"대장님들께 뭐라 말씀드려야 하나요."


"글쎄."


나는 고민하는 시늉을 하고 다프네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마녀가 키스를 준비 중이라고 하는 건 어때."







* * *






"네! 들어오세요!"


"언니. 저예요."


"다프네! 어서 오렴! 웬일로 다 찾아왔어?"


"오늘 점심에 보자고 약속했었잖아요."


"아이 참, 내 정신 좀 봐. 깜빡했네. 미안해. 요새 신경 쓸 게 좀 많았어. 옆에 분은?"


"아르망 추기경입니다."


"아아~ 주인님께 말씀 들었어요. 반가워요. 그러고 보니 우리 한번도 인사 나눈 적이 없네요?"


"그렇죠. 아쉬움이 컸어요."


"마침 시간이 비니까, 그럼 오늘 그 동안 못 나눈 분 만큼 시간 보내면 되겠다. 어때요?"


"기뻐요. 잘 부탁드려요."


"호호~ 저야말로. 티타임 같은 건 가져본 적이 없어서 좀 긴장돼요. 속으로 모자란 것 같다고 욕하고 그러면 안 돼?"


"설마요."


… …


… …


… …


"어머~ 이거 정말 맛있다. 아르망이 만들었어요?"


"네. 그냥 간단히 만들 수 있는 화전이에요. 그리고 방금 드신 건 꽃차. 국화꽃으로 만들었어요."


"이건 아포가또죠? 이것도 직접 만들었어?"


"벌꿀을 곁들여봤어요. 아이스크림 다 녹기 전에 어서 드세요."


"어떡해~ 너무 맛있어~ 이러다 혀 녹는 거 아니야?"


"그리 대단한 건…"


"무슨 소리~ 이 정도면 억지로 잡은 흠조차 칭찬일 수 밖에 없을 걸? 진짜진짜 맛있어요."


"고맙습니다."


"음… 그런데, 아까부터 우리 다프네는 왜 아무 말도 없니?"


"언니."


"어맛! 깜짝야!"


"왜요?"


"갑자기 그렇게 눈만 움직여서 보면 놀란다고 말했잖니. 그거 안 좋은 버릇이라니까?"


"미안해요. 그보다 주인님은 지금 뭐하고 계세요?"


"오빠? 오빠는 지금… 아차… 주, 주인님은 지금 밀린 보고들 확인하신다고 바빠. 오늘 내내 시간이 없으시대. 왜 있지? 이번 년부터 해상 거점을 짓기 시작했잖아. 하와이 쪽에서 보고 확인 안 해준다고 주인님한테 한소리 했다나 봐."


"힘드시겠어요. 죄송해요. 괜히 티타임을 가지자고 말씀드려서. 하우스키퍼님도 불편하시지요?"


"아뇨? 별로? 그리고 힘들긴요. 자업자득이에요. 그간 게으르게 행동한 벌이라구요. 정말이지 평소에 좀 일과에 신경쓰라니까 도통 떨어질 생각을 안 해서…"


"기쁘시겠어요."


"하나도요! 진짜 제멋대로라니까!? 그렇게 청소 좀 하라고 하는데도 끝까지 안 하고 버티다가 꼭 제가 한다고 할 때에나 와서 같이 하려고 든다구요. 주인님한테 신경 쓰는 시간이 늘수록 다른 쪽 업무가 밀린다고 해도 안 들어먹어.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


"아, 그런데, 혹시 최근에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주인님이 그러더라구요. 오르카에 못 들어가게 지휘관들이 막는 것 같았다나? 알죠? 주인님 며칠 전에야 겨우 다시 오르카로 들어오신 거. 혹시 뭐 따로들 준비 중이신 게 있는 건가?"


"뭔가 성대하게 준비 중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 같아요."


"그렇죠? 역시. 호호~ 주인님은 좋으시겠네~ 누구는 바가지만 긁는데 뭔가 성대한 걸 받을 예정이라니까. 으음… 나도 슬슬 상을 하나 준비해 둬야 하나?"


"그러실 필요 없어요. 폐하는 하우스키퍼님 얼굴만 봐도 좋아하실 텐데."


"에이~ 아니에요~ 그러다 언제 또 토라져서 무언으로 시위할지… 몰… 어…"


"언니?"


"어라… 나… 뭔가… 좀… 느낌이… 어…? 에…?"


"언니. 몸 넘어가요."


"하… 아… 왜… 다프네가 셋으로 보이지…? 숨이… 윽… 잘 안 쉬어지…는데…"


"언니, 언니."


"몸이… 이상해… 뜨거워…"


"야. 혹시 모르니까 망 봐."


"에…? 아르망…?"


"응. 나야. 자, 힘 빼고 입 벌려."


"웁… 후웁…!"


"괜찮아. 도망치지 말고. 응. 그렇지. 기분 좋지? 전부 삼켜."


"싫어… 오빠… 흑…"


"머리가 붙어있는데 혀만 도망쳐 봐야 무슨 소용이니. 자, 마저 삼키자? 혀 더 내밀어 봐."


"하읍… 웁…"


"옳지. 잘하네? 폐하랑 많이 해봤나 봐? 그래. 물론 많이 했겠지. 놀리는 거 아니니까 힘주지 마. 한모금 더 넣을 거니까 가리지 말고 다 받아 마시자?"


"아… 앙…"


"젖었네...? 응. 괜찮아. 기분 좋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근데 너, 꽤 맛있다? 왜 우리 폐하는 항상 너같은 싸구려 년한테 빠지는 걸까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혀를 갖고 있어서야. 이거 뭐 하루 종일이라도 빨 수 있겠는데."


"……"


"잘 자. 당분간 일어나지 마."






* * * 






"굳이 마우스 투 마우스일 것 까진 없었잖아요."


다 정리하고 콘스탄챠의 방에서 나가기 직전에 다프네가 말했다.


"확실하게 하는 게 좋잖아. 차나 디저트로 충분하지 않을지 어떻게 알아."


"…그래요. 보기 좀 그랬어서 한 소리에요."


"너도 해줄까?"


"절대로 사양하겠어요."


나도 사양이다.


콘스탄챠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듣게 된 폐하는 그날 밤부터 모든 업무를 뒷전으로 두고 다음날, 그 다음날 아침까지 콘스탄챠 옆을 지켰다. 간호하는 다프네가 제발 주인님 몸부터 돌보라고 뜯어말려서야 폐하는 사령관실로 돌아갔다. 


콘스탄챠에 대해서 폐하에게는 다프네가 일시적인 면역력 저하와 피로누적으로 인한 감기몸살이라고 조곤조곤 일러두었다. 실상은 다프네가 실력을 발휘해 일으킨 화학작용으로, 섬의 꽃에서 추출한 독이 중심이다. 


죽지는 않는다. 빨리 회복되지도 않는다. 다프네가 간호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몇 번 더 콘스탄챠의 내부에서 이런저런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뜻이니까. 


이걸로, 폐하가 소풍을 갈 엄두도 안 낸다면 좋겠다.


기술자들의 보고가 있던 날, 격납고로 들어서자 먼 발치에 메이와 레오나, 칸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기계와 금속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조합의 소리가 울리는 곳이지만, 기척이나 발소리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시끄러운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 녀석들이 내는 소리가 다 들리는 위치까지 다가갔음에도 누구 하나 내가 온 것을 몰랐다.


"걔… 완전히 미쳤어… 하우스키퍼야. 콘스탄차라구. 사령관의 반려에게 그, 그런 짓을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돼먹어야 그런 짓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거야? 역시 이상해. 뭔가 다른 목적을 가진 게 아닐까? 처음부터 오르카를 알고 있었다는 건 그냥 거짓말이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나 고평가를 해줄 정도로 메이의 안에 각인된 내 존재감은 커다란 듯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너같이 지껄이는 년 대갈통을 날려 버리려고, 라는 게 있겠네. 친히 오르카에 직접 찾아와서 말이지."


"히이익!"


정색하고 뒤편에 서 있자 메이는 내 쪽을 확인도 안 하고 앞으로 나자빠졌다.


"안 보인다고 남몰래 험담이나 하고 말이야. 가녀린 내 마음에 기스를 낸 주제에."


"별로 험담 같은 건…"


"아~ 그래? 그렇지? 그야 우린 이제 협력하는 관계니까. 맞지? 서로 험담이나 해대면 이 무자비하고 험난한 세상, 어떻게 함께 해쳐나가겠어?"


"으, 응…"


"물론 나는 뭔가 다른 목적과 뭔가 다른 이유로 오르카에 온 거지만 말이지."


"미안해…"


"또 걸렸다간 그땐 그냥 안 넘어가."


메이에게 밝게 웃어주고 앞서 걸었다. 뒤따라온 칸이 "좀 적당히 해라." 라고 나무랐다. 어찌됐든 같은 지휘관 개체라고 메이를 신경 써 주는지도 모른다. 


칸이 신경쓸 것 없다. 그때 제대로 발광을 떤 이후로 칸이 '위계질서는 지키는 편이 좋다.' 라고 에둘러 부탁해왔어서 나 나름대로 대장 취급은 해주려 하고 있다. 나한테 내보이는 태도에 따라서.


보고자는 그렘린이었다. 보고의 내용은 심플해서, 격벽 및 탈출 포트의 보수 및 강화 정도가 다였다. 여차하면 즉각 이용할 수 있도록 ags도 여러 면에서 손을 봐뒀단다.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ags와 관련된 보고를 할 때의 그렘린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ags는 코어를 통해 연결된 자체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거든요. 보, 보안상의 문제로 그걸 끊어둔지가 좀 되어서… 혹시 친구들이 사령관님께 독자적으로 보고해 버리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ags발 정보를 통제한 건 너였어?"


"앗. 네."


"언제부터?"


"닥터에게 부탁받은 이래로요…"


"처음부터 우리 쪽이었니? 몰랐네."


레오나는 배신 당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한번 더 네 손을 탄 현재의 ags는 어떤 상태인 건데?"


"본연의 기능이 강조된 상태…라고만 말씀드릴게요."


로봇다워졌다는 소리겠지. 요컨대 로봇에겐 쓸데없는 사고력이나 감정을 적출해냈다는 것 같다.


더 들을 건 없어보였다. 나는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기려했다.


"지휘관 개체 아르망 추기경."


"앗! 토미! 안 돼!"


"지휘관 개체 아르망 추기경."


소리가 난 곳을 본다.


"내분비계의 이상을 감지. 세로토닌 수치 불안정. 수복 불가능한 사항. 조속히 재조율에 들어갈 것을 권함."


"…"


"지휘관 개체 아르망 추기경. 내분비계의 이상을 감지. 세로토닌 수치 불안정. 수복 불가능한 사항. 조속히 재조율에 들어갈 것을 권함."


"죄송해요! 토미는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요! 거짓말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지휘관 개체 아르망 추기경."


"토미! 제발!"


이거 재밌네.


"얘 웃긴 애네. 나 지휘관 아닌데."


그런 모듈은 단 적 없는데, 뭘보고 지휘관 개체라는 건지 모르겠다. 지휘관 노릇을 한 건 아주 옛날일 뿐더러 현재에 와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진 일이다.


정신병 환자 취급 당한 건 불쾌했지만, 어쨌든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이 아주 망상은 아니라는 것을 로봇의 시선으로 입증받은 것과 다름 없었다. 격납고에 거울이 있었어야 했는데. 메이와 레오나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2주간, 여느 때 같은 파멸을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이후. 상황은 급전개 된다.






* * *





"메이데이! 응답 바란다! 메이데이! 미상의 개체 다수에게 공격받는 중! 메이데이! 도움을 요청한다! 한시가 급하다! 전부 죽고 있어! 아악!"


"이걸 보낸 게 누구라고?"


"레, 레모네이드 오메가요…"


영상이 끝나서 굳어버린 오메가의 얼굴은 장난치는 걸론 보이지 않았다.. 품격이나 고상함 따위 전부 집어치우고 콕핏에 앉아 처절하게 도와달라 부르짖고 있었다. 그게 20초 가량되는 영상의 내용 전부였다. 


그 오메가가, 도움을 청했다. 그것도 저항군에게. 무엇이 오메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는 영상에 정확히 나오진 않았지만, 확인해 볼 것도 없이 센티널이다. 


오메가는 죽었다.


"알파 불러 와."


함교로 끌려오다시피 한 알파는 자초지종 같은 건 듣지도 못하고 강제적으로 영상을 시청했다. 


"야. 뭐 아는 거 없어?"


알파는 알비스도 보이지 않을 반응을 보였다. 이거 지린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몸을 떨어서, 대답을 듣기까지 영상의 몇 배는 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 야! 아는 거 없냐고! 너랑 언니동생하던 사이잖아!"


"어, 없어요. 아무것도."


"네 정보원은? 오렌지 어쩌고 있잖아."


"아무 보고도 없었어요."


알파는 혼이 나갔다. 더는 쓸모 없었다.


"우린 그렇게 고생해서 제압한 녀석을… 도망간 이후론 찾지도 못하던 녀석을 간단하게 박살냈어." 


레오나가 부르르 떨며 말했다. 패널 빛을 받아서 시퍼래진 입술 때문에 실시간으로 병들어 가는 인상이 됐다. 


그 레오나가 그럴 정도니 다른 년들이야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건에 대해선 논의해도 제대로 된 답이 안 나올 것이다. 일단은 해산하고 다음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다음날 심야. 화두가 된 것은 '지금이라도 폐하에게 알려야 한다.' 였다. 의견은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였는데, 나는 당연히 반대였다. 센티널에 대한 건 정보가 차고 넘치니 안 믿을 수가 없지만, 콘스탄챠의 건에 대해서는 절대로 안 믿는다. 백 퍼센트다. 하나는 믿고 하나는 안 믿는 그런 상태에서 폐하가 어떤 결정을 하실지 나는 감도 안 잡힌다. 


그것도 그렇고, 나는 나를 포함해 바이오로이드는 얼마든지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년이다. 반면 여기 있는 년들은 그렇지 않다. 찬반을 가르는데에 우선시 되는 사항 중 하나로 생존이 높게 고려되고 있다. 주로 그런 이유로 '찬성'에 섰다. 폐하에게 의존하려든다. 즉, 이년들의 생존 본능이 폐하에게 부담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건 두 눈 뜨고 볼 수 없다. 


"결정은 칸이 하도록 할까. 지금까지 제일 고생한 녀석이잖아."


그런 식으로 결정권이 쥐어질 상황이냐고 마리가 반론했다. 나는 바로 기각하고 여차하면 총과 검까지 휘두를 준비도 갖췄음을 내비쳤다. 웅성거림이 들린다.


"알리지 않는다."


어수선해지려는 분위기를 칸이 그 한마디로 정리했다. 


"이제 와서 알리는 건 오히려 역효과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


이제는 끝까지 가야 한다.


앞으로 한 달. 때는 가깝다. 


"곧 장화라는 년이 기웃댈 거야."


며칠 더 지나서, 그 불길한 징조같은 년에 대해 나는 몽구스팀을 모아놓고 말했다. 그년까지 지나가면 진짜 시작된다. 콘스탄챠는 아직도 의료실 신세고, 그 때문에 날로 괴로워하시던 폐하는 소풍의 소자도 꺼내지 않았으니 이번엔 어떤 전개일지 절대 예측할 수 없다. 가용 가능한 모든 요소는 폐하를 위해 쓰여야 한다. 몽구스도 예외는 아니다.


"경고하는데, 네 동생 뻘 되는 년 만났다고 해서 신파 찍지…"


"아르망 씨?"


"ㅋㅋ…그게 이렇게 돌아오네."


신파 찍든 말든 상관없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어차피 목적은 폐하가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는지, 몽구스는 장화와 접촉한 그날 반나절도 안 돼서 복귀했다. 홍련은 냉담한 얼굴로 '이미 사살당한 상태였기에 신파 찍을 기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간단하게라도 부검해 보려 했지만 철충이 너무 많았고, 몸에 난 사입구로 장화를 꿰뚫은 탄종을 추정할 뿐이라고 했다. 결론은, 장화는 바이오로이드에게 죽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멸망 이후로 바이오로이드끼리 죽고 죽이는 건 꽤 흔한 일이다. 식량문제로 다투다 죽거나 했을 것이다.


우리는 맞닥드릴 상황에 대비해 수칙을 짜고 근무표 및 일과 내용을 대거 수정했다. 아스널 같은 년들은 부하들의 과로가 우려된다는 덜떨어진 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직도 나를 모른다. 우리를 모른다. 이제 우리의 기조는 '폐하의 무사를 최우선한다.' 로 바뀌었다는 걸 모른다. 뭐, 원래부터 저항군은 폐하의 무사를 최우선하긴 했다. 뉘앙스도 결도 많이 달라져서 그렇지. 폐하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 착각들을 하는 것이다. 바이오로이드는 도구다.


9월 중순. 가고시마 인근 전체를 집어삼킨 적란운이 오전, 오후 가림없이 늦밤을 방불케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행패를 저지르며 발악해본들, 이제 여름의 시간은 끝났다. 끝나야 한다. 제발, 끝나길 빈다. 나는 오르카의 세 번째 가을을 보고 싶다. 더는 여름과 가을 사이에 끼인 채 본래 나와는 아무 상관 없었어야 할 그곳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 


마주치는 녀석마다 모두 피로에 절은 얼굴이 된지 일주일째. 칸은 어두컴컴한 지휘관실에서의 흡연을 허용했다. 아직도 바깥엔 비가 오니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언젠가 LRL이 그러더군." 탁상 램프 때문에 유난히 포근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칸은 말했다. "수천년을 우뚝 존재해왔으나 그럼에도 짐에게는 원대한 소원이 있도다."


"뭐야 그게."


"너도 소원이 있겠구나 싶어서. 진조보다 격이 낮은 녀석이니."


뿜어낸 담배 연기는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램프의 빛이 닿는 곳에서 나타났다.


"궁금한대. 그렇게 오래 살아도 소원이라 할 만한 게 있는지."


"너 오늘 말 많다?"


칸은 두 팔로 턱을 괴고 고개를 내밀어왔다.


"어떤가, 카르멘. 소원이 있나."


소원이라.


없지는 않다.


"비밀."


말해 줄 만한 것도 아니다. 말한다고 한다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서나 할 법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다 끝나면 알려주자.


하지만 내 소원을 칸이 알게 되는 일은 없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콘스탄챠가 죽었다.







* * * 






리앤이 주도한 경위조사가 절반쯤 진행되었어도 갑판에 튄 이런저런 파편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더러운 구리색으로 굳어버린 피는 역한 냄새로 파리를, 바다에 튄 다른 파편은 바닷새와 물고기를 불러 모았다.


적란운이 가고 다시 드러난 하늘은, 푸른색이 가지는 모든 상징을 상실하고 그저 그 자리에 휘영하게 있을 뿐인 것에 불과했다. 풍경으로써 자리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다면 거기에 뭘 더 들이붓는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스카이나이츠가 뒤늦게 그려낸 비행운이 그랬다. 호라이즌이 갈라낸 바다가 그랬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 오늘 하늘이 개어서.


그렇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미친듯이 비를 퍼부어대던 주제에 갑자기 하루아침에 틴들 현상을 일으키면 어느 누가 반응하지 않겠는가? 커플에게는 소소한 이벤트를 가지기에 그 만한 풍경이 없을 것이다. 때마침 독에도 내성이 생겨 몸이 좋아졌다. 그런 상태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어서 환상적인 서광을 감상하러 나가자고 하면, 거절할 여자가 없다.


그것이 오르카 유일의 커플을 위한 풍경이 아니었던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 매일 뜨고 지는 해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따지자면 문제는 우리한테 있었다. 혹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설마 '갑판에 있을 때' 저격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대비가 안 된 것도 아니었다. 폐하가 섬으로 향하지 않게 됐다고 해서 절대 방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갑판을 지키던 경계 근무자들이 있었고 오르카 주위론 초계함이 즐비했던 것이다. 저격? 꿈도 못 꾼다. 장애물이 많아 각도도 없었다. 콘스탄챠는 저격 당하고 싶다는 양 난간에 몸을 내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격 당했다. 탄환이 날아온 방향은 200km내엔 무인도 하나 없는 완벽한 망망대해. 리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함교 외벽에 기대어 있던 콘스탄챠는 잠시 등을 뗀 찰나의 사이에 저격 당했다. 바로 옆에는 폐하가 있었고 각 방향으로 다섯 걸음씩 떨어진 곳에는 컴패니언이 경호 중이었다. 

즉, 경계 근무자와 초계함과 컴패니언으로 이루어진 장벽의 실낱같은 틈을 뚫고 콘스탄챠가 벽에서 살짝 등을 튕겨서 생긴 각도를 통해 저격했다는 이야기다.


정말이지 삼류 소설에서도 채택되지 않을 전개다. 하지만 그 외엔 없다. 컴패니언은 공통되고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다. 리앤을 치우고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콘스탄챠가 죽고 떠오른 해가 반대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해도 갑판은 더러운 채였다. 폐하는 컴패니언의 부축을 받아 사령관실로 향한 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끝났다.


다음 해가 떠오를 때까지 나는 시간의 흐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공복이든 배변이든 어떠한 생리현상도 느끼지 못했다. 계속 대비해야 할 여지는 남아있지만, 이상적인 결말의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머리를 굴릴 의욕도 갖지 못했다. 


"부검 완료. 탄종을 가려냈어." 


머리 절반이 사라지고 가슴팍에 구멍이 뚫린 콘스탄챠 앞에서 닥터가 말했다.


"몽구스 언니들 좀 불러줄래? 미호 언니가 와야 할 것 같은데."


"뭐? 누구?"


"몽구스 팀의 미호. 콘챠 언니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미호의 저격 소총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콘챠 언니는 레이더한테 들린 스나이퍼 칙에게 죽는다고? 풉…"


닥터가 그렇게 비웃은 걸 시작으로 고성이 울려 퍼졌다. 보이는 표정들로 그 고함에 담긴 것이 비난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청각으로는 그런 의미의 정보라는 걸 인식할 수 없었다. 그래. 뭔가 이상하다했다. 스나이퍼 칙에게 당했다면 콘스탄챠는 좀 더 심한 꼴이었어야 됐는데, 절반 뿐이지만 목 위로 달려있는 게 있고 몸통은 제법 멀쩡하다. 


그런데 얘들은 왜 지들끼리 싸우는 거야? 


"지금 미호가 범인이라는 거야? 걔는 비번이었다구! 내가 알아! 내가 조사할 땐 생활관에서 취침 중이었어!"


"누가 미호더러 범인이래!? 그년이 쓰는 탄환이 콘챠 언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단 거잖아! 씨발 경찰이라는 년이 갑자기 멍청해져서! 알아서 알아먹을 것이지 꼭 두 말을 하게…!"


"너희들."


그것은 이질적인 울림이었다. 

변조가 들어간 듯한 그 목소리는, 아무리 목소리를 변조한대도 여자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남자라는 걸 모두가 인지한 순간, 일제히 뒤를 돌았다.


"미호가 어쨌다고?"


공방의 입구에 폐하가 서 있었다. 


텅 빈 곳에 억지로 초점을 끼워넣은 듯한 눈을 하고서.


그 눈이 결정적이었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 * *






사령관실로 들어간 미호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고 이틀째가 찾아올 때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홍련이 자살했다. 자신의 입 안에 볼트를 쏘고, 그럼에도 살아 있어서 머리에도 쐈다는 듯했다. 이유야 미호 때문일 것이다. 아직 그렇다고 정확히 판명된 것도 아닌데 딸 아이가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생각하여 목숨으로 책임을 진다라는, 뭐 그런 거겠지. 직접 배 아파서 낳은 딸도 아닌데 딸을 따라 간다니. 우스운 이야기다. 하늘에서는 피가 이어진 진짜 가족이 되길 빈다.


나머지 딸내미들은 어떻게 됐냐고? 알 바냐. 새벽에 갑판으로 담배 피우러 나갔을 때 린치 당하고 있던 걸 본 게 다다. 어두워서 누구한테 당하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뒤론 못 봤으니 그 자리에서 물고기 밥이라도 됐겠지.


배틀메이드는 향냄새를 풍기고 다녔…다고 하기엔 모자라고, 거의 살아있는 향에 가까웠다. 눈은 꼴사납게 퉁퉁 부은데다 피부는 말라 쩍쩍 갈라져서, 어지간히 수분 섭취를 하지 않는 이상 예전과 같은 피부로 돌아오기는 어려워 보였다. 물도 마시지 않는다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라비아타는 칸과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이유없이 분노하는 일이 늘었다.


점호가 사라졌고, 도수체조가 사라졌고, 결국 일과가 사라졌다. 식사는 알아서들 해결해야했다. 또 사라진 것으로는 저격 소총을 다루는 개체들이다. 레이스, 아스널……그 다음은 지정 사수를 맡은 개체들. 차례차례 하나 둘 보이지 않게 됐다.


그리고 레오나. 사건은 그년으로부터 일어났다.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던 사령관실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는 일이 있었다. 여자 쪽 비명이 아니라 남자 쪽 비명이었다. 모습을 보이지 않던 컴패니언이 다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만큼 끔찍한 비명이었다.


사령관실은, 딱히 빗댈 만한 게 없었다. 그냥 사라진 개체들 탓에 오래있을 수 없는 곳이 됐다고만 해두겠다. 그런 곳 한가운데, 폐하는 벌거벗은 채 쓰러져있는 레오나 옆에 주저앉아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황망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유일하게 이 '사령관실'이었던 곳 안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나는 감싸안듯 폐하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허락을 구하듯 마주앉고, 눈물에 가린 눈 깊은 곳까지 살피고,


레오나의 이마에 팬텀을 꽂았다.


"죽이시려면 확실하게 하셔야죠."


폐하의 얼굴에서 떨림이 잦아든다. 


"쉬… 이제 괜찮아요. 싫으셨죠?"


더러운 년. 몸으로라도 위로하겠다는 최악의 수를 쓰다니. 


"폐하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대답은 없었지만 몸은 안정되어갔다. 표정은 평탄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으나 다시 눈에 고이지는 않았다. 그걸로 됐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두 번째 오르카의 나를 불러내기로 했다. 


폐하의 대답에 어울리는 것으론 그년 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 * *






두 번째 오르카에 있을 때, 폐하께 권했던 적이 있었다.


원하신다면 새로 통제 구역을 만들어드리겠다고. 

폐하는 거부 했었다. 나도 진심으로 권한 건 아니었다.


세 번째 오르카에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밖에 쓸모가 없어졌으니 통제 구역을 만든 거라고.

칸을 통해 알았던 폐하가 한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만들어드리기로 한다. 세 번째 오르카의 폐하가 만든 통제 구역은 멸망 전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영 돈벌이가 안 될 것 같은 곳이었다. 그도 그럴게 폐하는 온전한 통제구역을 본 적이 없다. 찾으셨던 곳은 다 무너진 상태에 폐하가 직접 없애버리셨고, 남아있는 기록이나 영상은 너무 단편적이라 구역 신설에 큰 보탬이 되진 못 했을 것이다.


통제 구역은 ags덕에 반나절도 안 돼서 만들어냈다. 사령관실이 있는 층을 통째로 밀어서 널널하게 공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꾸밀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건 컨셉이 확실해야하는 '테마관'에나 할 짓이다. 나는 종합테마관을 그렸기에 딱히 컨셉을 정하지 않았다. 도구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타겟 지목은 폐하께 맡겼다. 멸망 전 느낌 좀 살려서 오르카의 구성원 목록을 팜플렛 형태로 정리해드릴까 했는데,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그냥 폐하의 일지에서 찾은 개체별 제원표를 보여드렸다.


그래서 대망의 첫 타겟은, 둠 브링어가 됐다. 딱히 폐하는 특별한 의미로 둠 브링어를 지목한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눈에 띄었으니 골랐다는 느낌이었다. 기준이 뭐였을까? 부대 마크? 물어봐야 대답을 들을 순 없을 것이다.


둠 브링어가 통제 구역에서 하게 된 것은 수건돌리기. 놀이이지만 이곳은 통제 구역이기 때문에 목숨이 걸렸다. 수건을 폭탄으로 치환하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머리에 잘 그려질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폭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떨어져 앉아 동고동락한 전우의 등에 폭탄을 놓는다니, 어떤 의미에선 둠 브링어의 상징인 폭발에 어울린다고 할까. 부탁인데 그간 쌓여온 전우애가 너무 빨리 폭발하지 않기를 바랐다.


자리는 만들어졌고 시작만 하면 됐지만, 목숨 걸고 게임을 하라 하면 고분고분 따를 리 없다. 첫 번째 술래인 실피드는 울며불며 어째서 이런 걸 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애원했다. 그런 걸 알려주면 구경하는 재미가 반감된다. 그냥 하면 된다. 버텨봐야 이쪽에도 방법이 있다.


"폐하." 나는 폐하의 귓가에 속삭인다. "한번도 명령해 본 적 없으시죠? 착하시니까. 지금이야말로 바로 명령이 필요한 때랍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폐하는 명령했다.


"해."

"사령관님!"

"해. 명령이야."


실피드는 감전된 것처럼 바르르 떨다가, 울음을 지우고 광소하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장 여덟 바퀴를 돌았다. 끝까지, 끝까지 '수건'은 놓지 않겠다는 듯 거의 수백 미터를 전력으로 질주해댔다.


침이고 콧물이고 땀이고 줄줄. 저러면 수건을 놔도 자리를 차지할 체력이 없다. 그냥 뒈진다.


결국 수건은 지니야 뒤에 놓였다. 놓은 것보단 흘린 것에 가까웠다. 어쨌든 그렇게 됐다면 하이에나제 특수 폭탄의 뇌관이 작동한 것인데, 둘은 죽음의 레이스를 시작하긴커녕 얼싸안고 엉엉 울기나 했다. 그리고 1분 좀 안 지나서 사이좋게 폭사했다.


다시 폐하가 명령한다. 똑바로 해. 다음 술래인 밴시는 본래 그런 용도로 태어났어서인지 그다지 겁먹은 얼굴을 하진 않았고, 명령은 잘 먹혀서 열심히 달렸다. 


밴시가 선택한 것은 다이카.


"아하하하하하!"


다이카는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달렸다. 보는 이가 속이 터지던 그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였다. 도저히 폐하의 명령 때문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열심히 달리는 것도 달리는 건데, 진짜 잘 뛴다. 기가 막힌다. 이제야 좀 게임다웠다. 


폭탄은 밴시에서 다이카를 거쳐 나이트 앤젤에게 갔다. 몸을 일으킨 나이트 앤젤은 뛰고 뛰다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메이의 근처에 갔을 때가 돼서,


갔을 때가 돼서,


터덜터덜 걸었다.


"대장."


뭐야 이거.


"먼저 갈게요. 되도록 늦게 와요."


"나애앤!"


폭탄이 터졌다. 더러운 게 손등에 튀었다.


"흐으응…"


"사령관! 아르망!" 메이가 외쳤다. "부탁이야! 대원들은 살려줘! 나 하나로 끝내줘! 내가 죽을 테니까! 제발!"


새 수건을 쥐고 메이에게 갔다.


"받아."

"아르망!"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 메이의 손에 폭탄을 올려놨다. "이런 상황에서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 아니지? 너는 거부권이 있다지만… 응? 그렇지?"


"안 돼… 제발…"

"돼. 뛰어."


어쩔 수 없이 메이는 뛰긴 했지만 끝내 게임을 즐길 의지는 불태울 수 없었는지,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다가 체념한 듯 천장을 바라보며 폭사했다.


다음 게임에서 밴시가 죽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다이카가 됐다. 슬퍼하면서도 언뜻언뜻 본능적인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 얼굴이 그렇게 추해보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기뻐하는지 몰랐다. 그 누구도 '마지막 한명만 살아남는다.'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런 규칙은 없다.


살아남았으니 상은 주기로 한다. 나는 폐하께 금속 배트를 쥐여드리고 다이카에게 보냈다. 


게임은 빠른 시간 안에, 많이 할수록 좋다. 예열된 고양감은 다음 게임을 더 즐겁게 감상하게 만드는 재료가 된다. 폐하도 빨리 다음을 바란다는 듯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방망이질을 하셨으니 나는 지체없이 또 다른 게임의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으로 지목된 것은 컴패니언이었다. 둠 브링어와는 다르게 폐하의 이번 지목은 감정적이었다. 좋은 신호다. 해소가 필요한 종류의 감정은 그 방식이 어떻든 필수적으로 해소시켜줘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인간은 망가진다. 커다란 효과를 기대하고 싶다면 감정의 축적을 한계까지 기다린 후에 해소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방법은 지금의 폐하에게 알맞지 않다. 바로바로 풀어줘야 한다.


둠 브링어가 몰살되고 약 3시간 뒤, 저녁. 폐하는 참 누리기 어려운 사치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멸망 전에는 오전, 오후 하루 종일 통제 구역에서 시간을 보내는 인간은 손에 꼽았고 재력이 뛰어난 인간들도 대개는 잠깐 즐기는 것에 그쳤었다. 내가 겪었던 인간들은 어디를 가든 vip대우를 받는 인간들이었기에 나를 그런 식으로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것이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사치. 폐하는 사치같은 건 누린 적도 없거니와 아예 사치란 게 뭔지 모르던 인간이었으니까. 이젠 좀 즐겨도 아무에게도 빈축을 사지 않는다.


다음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컴패니언에게는 청소를 시켰다. 아무리 넓디넓은 통제 구역이더라도 머리카락과 살점이 엉겨붙은 배트 같은 게 굴러다니면 보기 안 좋기도 하고, 무엇보다 냄새가 안 빠지게 된다. 


컴패니언은 내색않고 시키는 대로 청소해 갔다. '메이였던 것.' '나이트 앤젤이였던 것.' '지니야였던 것.' '실피드였던 것.' '밴시였던 것.'. 그것들의 수백 파편은 그런대로 금방 치웠지만, 역시 다이카는 아니었다. 뭉개진 면상 옆에 유리알 같은 것이 굴러다니는 걸 보고서야, 곧 자신들도 이렇게 될 거란 공포에 드디어 전율했다. 이래서 아무 일도 없을 거란 쓸데없는 기대같은 건 하면 안 된다.


컴패니언이 하게 된 것은 개싸움이다. 막 싸워댄다는 개싸움이 아니라, 투견. 맞다. '개처럼 싸운다'가 아니라 '개가 되어 싸운다'이다. 


리리스와 스노우 페더는 목줄을, 하치코와 펜리르는 개 역할을 맡았다. 이제 알기 쉽지 않나? 이 둘은 개과니까. 눈치가 빠르다면 이 개싸움 다음은 고양이 싸움이라는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해봐야 이것들은 바이오로이드이기에, 개가 되라고 한들 개일 수가 없다. 그래서 도움을 주기로 한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과 다름없다.'는 그 좆같은 소리를 아무도 할 수 없도록.


목줄에 묶여 네발로 엎드린 자세로 대기 중이던 개들의 목에 주사기를 가져다댔다. 벌벌 떨어대는 게 정말 개같아서, 진짜 개처럼 대소변을 지리는 건 아닐까 잠깐 기대했다. 


아쉬우면서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약발은 금방 나타났다.


"엑…힉…! 페로…! 나! 몸이 이상해…!"

"하치코에게 뭘 주사한 거에요!"


뭘 주사한 거에요는 좀 이상하지 않나? 뭘 주사하려는 거에요!? 가 맞는 거 아닌가? 진즉에 물어볼 것이지.


"전투자극제에 이런저런 걸 섞었어. 걱정 마. 성능 확실하니까. 직접 써봤거든."


"괴물…"


"그럼 폐하도 괴물이야?"


페로의 다음 말은 짖기 시작한 하치코에 의해 도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온몸을 돌기 시작한 약물이 하치코의 언어구사 능력을 완전히 앗아갔다. 이제 이성이다. 좀 더 지나면 하치코가 저항의 눈물을 흘리는 일도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하치코는 한 마리의 개가 됐지만, 펜리르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바로 눈앞의 자신을 물어뜯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 이를 갈아대는 하치코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보고 있었다. 


펜리르의 저항은 10초쯤 더 이어졌다. 으르렁대는 소리가 두 개가 되자 나는 목줄을 풀 것을 지시했다. 당연히 내 말은 들을 리 없었고, 또 폐하가 명령을 해야 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두 다리. 깨져서 굴러다니는 이. 입가에 엉겨붙은 피죽. 뜯겨나간 손가락. 찌그러진 코. 뭉텅이째로 굴러다니는 살점. 흩날리는 피보라, 피, 피.


펜리르가 먼저 쓰러졌다. 하치코는 비틀대다가 실혈사했다.


승자는 없다. 


그냥저냥 즐길 만했다. 의외로 하치코가 잘 싸웠다 싶었다. 아니면 펜리르가 알려진 것보다 약한 년이었거나.


바로 다음 매치업으로 간다. 이번엔 목줄이 필요없다. 


포이를 먼저 제압해서 약물을 투여하고, 그 다음 페로에게 투여했다. 


그리고 펼쳐진 고양이 싸움은, 개들에 비하면 재미 없었다. 진짜 고양이의 그것과도 많이 달랐고. 동생들이 약을 투여 당할 때 뭔가 해야한다는 듯 움찔움찔 댄 리리스가 더 재밌었다.


남은 두 년은 그냥 평범하게 싸우게 시켰다. 시켰는데, 갑자기 둘 다 나한테 달려들길래 나도 모르게 죽여버렸다. 이래서야 폐하한테 감상을 물을 수도 없었어서 다음 게임으로 만회하자고 생각했다.


폐하는 통제 구역에서 주무셨다. 올라가서 주무시라 해도, 앉아있던 의자 앞에 누워 둥글게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통제 구역에서 자기로 했다. 


폐하와 먼 곳의 벽에 기대어 앉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피가 튄 창을 통해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흥분이 잦아들고 담배만 태우는 차분한 시간이 오자, 통제 구역에 쌓인 하루분의 죽음과 그 자극적인 냄새가 가감없이 느껴졌다. 그 냄새를 가리려고 담배를 계속 태웠다. 어느새 잠들어서 일어났을 땐, 옆에 꽁초가 여섯 개 쌓여 있었다. 담배 피우다 잠들기는 또 처음이었다.


이튿날의 오전 게임 전에 폐하의 식사를 준비하다가 리앤과 마주쳤다. 리앤은 겉으로 보기엔 무덤덤한 얼굴로 정수기에서 물을 몇 잔 받아마시고 입을 열었다.


"생각 있으면 봐." 시야 측면으로 유인물이 들어왔다. "보고서야."


"이 마당에 뭔 보고서?"

"가만히 앉아 한탄하는 것보다야 낫잖아."

"그래. 그런 식으로 몰두할 거리라도 있어야겠지."

"……어때? 사령관은."

"아직 주무시고 계셔. 넌 신경쓰지 마."


식사를 들고 폐하께 간다. 손에서 떨어진 유인물이 허공에서 춤추다 바닥에 떨어졌다.


등에 리앤의 말이 닿는다.


"엘라가 조사했어. 얼마 전에 있었던 기상 악화. 자연적으로 발생한 현상이 아닌 모양이야."


어쩌라는 거야.


오전의 게임은 직접 참여하는 형태로 준비했다. 그냥 관람만 하면 지루할 뿐이고, 잠에서 깬 폐하가 식사를 거부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뱉으면서 발광을 해댔기에 액티비티가 충만한 것으로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번 무대는 통제 구역이 아니라 격납고다. 대상은 ags. 마련한 도구는 각종 무기들. 아무거나 집어들고 원하는 만큼 때려부수면 ok. 멸망 전에 몇 번 들린 스트레스 해소방에서 착안했다. 


먼저 시범을 보이기로 한다. 나는 드리아드의 낫을 집어들고 알프레드에게 다가간다.


"오옷! 아가씨! 그런 흉악한 걸 겨누고 다가오시면 무섭지 않습니까! 잠시만요! 계셔 보세요! 뭐가 문제였습니까? 예? 귀띔해주시면 곧바로 시정하도록 하지요! 그, 그래! 닥터! 닥터 양에게 부탁받은 조사의 결과도 들어보셔야지 않겠습니까!? 아가씨!?"


낫을 면상에 꽂았다. 깨진 패널에 일순 떠오른 :( 같은 이모티콘은 X( 로 변해 사라졌다. 머리 아래로는 리리스 전탄을 박아넣고, 그래도 움직여대던 사지는 티아멧으로 다 날려버렸다.


화기, 폭발물, 둔기, 날붙이. 손에 잡히는 게 뭐든, 폐하는 적극적으로 깡통들을 부쉈다. 시범을 보이길 잘했다. 안타까운 것이 있었다면 ags들은 모두 잠을 자던 상태라 폐하에게 애원하는 걸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니다. 애원이 아니라 비난을 했을지도 모른다.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니까.


공복에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 아무리 지금의 폐하라도 또 식사를 거부할 순 없었다. 흐느적거리던 폐하를 부축해 식당으로 가서, 부담스럽지 않게 스프와 빵만 준비해드렸다. 


정작 식사가 나오자, 분명 굉장히 허기질 텐데도 폐하는 깨작깨작 거렸다. 그렇지만 처음과 달리 먹기는 먹는다. 그것에 안심하고 격납고에서 튄 파편을 털어드렸다. 몸에 바이오로이드가 닿았다고 발광하시는 일은 없었다. 나는 허락 받았다.


"아르망." 한손에 빵을 든 채 갑자기 폐하가 말했다. "넌 안 먹어?"


"먼저 먹었어요."


"그러니."


맞은편에 앉은 내 어디가 신경쓰인 건지, 폐하는 비어버린 스프 그릇에 시선을 두다가 힐끔 나를 보고, 빵을 깨작대고를 순서대로 반복했다. 


그러다 폐하가 다시 말했다.


"너하고 자리다운 자리에 앉는 건 처음이네."


"자리다운 자리요?" 나는 웃었다. "제 앞엔 아무것도 없어요. 폐하한테는 빵이랑 스프 뿐이고요."


이번에는 폐하가 웃었다.

소리내어서. 

나는 틀리지 않았다.


"네 이야기를 해줄래?"


고개를 흔들어 거부했다. 한번 더 부탁한다면 말해 줄 생각이었다.


폐하는 다시 부탁했다.


이 어긋난 자리에, 어떤 말로 그 어긋난 이야기를 시작할지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까. 나를 타박하고 원망하기에 충분한 이야기를 그려낼까. 이미 오래 전에 망가져버린 나와 또 망가져가기 시작한 폐하 사이에 내 이야기가 곁들여진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폐하는 내 이야기가 듣고 싶다 했지만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면 제대로 듣지 않을 것도, 나는 안다. 그런 상태가 아니란 것도 안다.


600년. 실은 나는 600년이란 시간을 살았고, 이 오르카는 내게 다섯 번째라는 것만 말했다.


"다 알고 있었구나."


나는 끄덕였다.


"그래서 너희가, 너 때문에 그랬던 거구나."

"나중에 칸은 꼭 칭찬해주세요."

"……콘스탄챠가 그렇게 될 것도… 알고 있었니?"


나는 끄덕였다.


"왜 말하지 않았니."


나는 웃었다.

정말로 웃겨서, 한참을, 몸이 흐트러질 정도로 웃었다.


"믿으셨겠어요?"


폐하는 삼킨 빵을 우물거리다가, 입에서 뿜어내고 나처럼 웃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따라 웃었다. 


울음기 섞인 웃음소리가 둘 뿐인 식당에 메아리쳤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뒤로 게임은 세 번 더 진행됐다. 순서대로 스틸라인, 발할라, 스카이나이츠였는데, 지금까지 게임에 참여한 녀석들 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마리를 손수 처죽인 뒤, 폐하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다.'라는 의욕적인 얼굴이 되었기에 발할라와 스카이나이츠까지 게임을 하게 됐다. 당초에 내가 계획했던 것은 스틸라인이 하게 될 게임까지였다.


마리는 외쳤었다. 


"각하!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옆에 있던 노움의 머리가 총알에 터져도 마리는 외쳤다.


"너! 이게 다 무엇인가! 이것이 어떻게 각하에게 '치료'일 수 있는가! 그저 애먼 분노에 휩싸이셨을 뿐이지 않은가!"


게임을 하지 않을 때의 폐하가 마리의 외침에 대한 답이 되어줄 수 있었지만, 게임 외엔 폐하를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니 마리가 납득할 만한 답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리는 그렇게 아무것도 납득 못한 채 죽었다.


"다음은… 나구나."


자신이 지목될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일과가 하루 종일 비행하는 것으로 바뀌었어도 별 소득이 없었던 게 원인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됐어. 시간 맞춰서 준비하고 와."

"응… 너하고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래. 나도."

"웬일이야. 솔직하게 말하고."

"너한테 첨삭받고 싶었는데, 결국 한 글자도 못 썼네."

"다음에… 다음에 하자."

"다음은 없어."

"저기, 아르망."


하르페이아가 뒤에서 안아왔다.


"정말 이런 방법 밖에 없었던 거야? 사령관은…"


"얘, 하르페이아."


나는 하르페이아의 팔을 풀고 뒤돌아 마주섰다.


"폐하는 있지. 지금 살아있는 게 아니야."


"우리가 있는데… 콘스탄챠가 죽었다고…"


"아니지, 아니야. 얘. 너 정도면 알아야지. 폐하한테는 콘스탄챠가 전부야.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들러리도 못 돼. 폐하에게, 콘스탄챠는 세계야. 그런 세계가 무너졌는데 너라면 멀쩡하겠니? 나는, 나는 그저 폐하를 연명시키고 있는 거야. 너희가 그런 꼴이 되시는 걸 볼 때는 있지? 제법 반응을 하셔. 인간으로서 있을 수가 있어. ……우리가 있는데, 라고? 있으면 뭐? 너희의 위로로 상실의 상처를 치료하고 분노를 올바른 곳으로 향해서 복수라도 꿈꿀 수 있는 상태가 될 거라 생각해? 하르페이아. 그런 건 공상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야. 현실은 달라. 이겨낼 수 없는 시련 앞에서는, 견뎌낼 수 없는 고통 앞에서는, 다들 망가져."


"아르망…!"


"나는, 폐하가 앞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니야. 보다 가라앉기 쉽게 만들어드리고 있는 거야."


하르페이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 만큼 울게 해줬다. 그런 다음 나는 하르페이아를 껴안고, 선물을 줬다.


"…미안. 고마웠어."


늑골을 파고든 팬텀에 하르페이아는 나를 껴안고 밀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는 것도 처음 몇 초였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미소를 짓고, 하르페이아는 내게 기대듯이 고꾸라졌다.


그렇게 스카이나이츠는 하르페이아를 뺀 나머지만 게임을 하게 됐다. 게임의 내용은 뭐였냐고?


스틸라인은 도수체조하는 과녁이 되기. 


발할라는 폐하 마음대로. 


스카이나이츠는 별밤의 무대 차림으로 무한히 안무 반복하기. 지쳐서 멈추는 년부터 차례대로 맞아죽는 식.


"다 닦으셨으면 이리 오세요."


폐하에게서 젖은 수건을 받아들고, 싸늘해진 시트 위에 앉혔다. 베개를 두들겨 눕기를 권유한다. 며칠만에 느끼는 침대가 낯선지, 폐하는 어색한 움직임으로 이불을 어깨까지 올렸다.


"주무세요. 내일 봐요."


폐하와 맞춘 눈높이가 높아지고 돌아서려던 때였다.


"가지 마."


나는 고민했다. 

지금 폐하가 보내오는 신호는 보상인가. 호의인가. 호감인가. 전부 아니라면 나는 여기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 자체가 주제넘은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고, 나는 몸에 걸치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치웠다. 속옷 쯤은 남겨둬도 됐지만, 부끄러움 같은 게 끼어들 자리는 없었어서 나는 당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폐하 앞에서 태연했다.


혀를 섞게 됐을 때는 작은 후회가 피어올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콘스탄챠에게 그런 식으로 약을 먹이는 게 아니었다. 


흐릿한 숨결이 목을 훑느라 폐하의 혀가 내 혀에서 잠시 떨어지면, 나도 질새라 폐하의 이곳저곳을 입술로 훑었다. 가슴으로 시작해서 어깨와 목, 중앙의 목젖까지. 키 차이 때문에 까치발을 서야 했지만, 결과적으론 폐하의 손가락이 아랫도리로 유도되는 몸짓이었기에 만족스러웠다.


내 목을 괴롭히던 폐하는 다시 혀끼리 껴안기를 바라고, 가슴으로 내려가 타액을 묻혀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폐하의 입술은 계속 내려갔다. 상복부, 배꼽, 하복부, 아랫도리에 폐하의 얼굴이 완전히 파묻힌 후부터는 다리에 힘이 잘 안들어가서, 허리에 둘러진 폐하의 팔에 의지해야했다.


세 번째의 나를 떠올린다. 


폐하의 혀가 내 그곳을 맛 본 그 다음, 나는 '이런 식으로는 싫다.'며 파멸 직전이었음에도 폐하를 거절했었다. 멍청하게도.

이번에는 그러지 않는다. 콘스탄챠가 사라져서 내가 메울 수 있게 된 이 자리를, 기회를, 거절하지 않는다.


침대에 눕게 됐다. 내가 아래, 폐하가 위. 세 번째와는 다르게 완력이 필요한 흐름이 아니었다. 나는 얼마든지, 지금이야말로 폐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꺼이 다리를 벌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깊숙한 곳까지 이 남자를, 유일하게 사랑하는 이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는 소원을 말하기로 했다. 그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드렸고 소원 자체도 대단한 게 아니라서, 폐하가 조금만 선심써주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끝나면, 절 죽여주시겠어요?" 


폐하는 끄덕였다.


나는 미소짓고 다시 말했다.


"얼굴 보면서 죽고 싶으니까, 목 졸라 죽여주세요."


그 전에 할 행위를, 폐하는 기다리고 있다. 귀여워. 손을 올려 폐하의 뺨과 턱선을 쓰다듬어 허락한다. 다리를 벌려서 올린다. 폐하가 돕는다. 평범하게 체위라고 말할 수 있는 자세가 되자 폐하가 내 손목을 틀어쥔다. 아래에 폐하가 느껴진다. 폐하는 떤다. 바이오로이드의 피를 뒤집어 쓰고 하게 된 섹스가 폐하에게도 각별하게 다가간 것 같다.


이제 마지막. 한 발 짝만 더 가면 나는 폐하와 하나가 된다.


"……이게, 뭐야."


그 마지막 직전에, 폐하가 거리를 벌렸다.


회로가 끊긴 가전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틀어쥐고 있던 내 손목을 보고 있다.


아아, 뭐야. 그런 건가.


"안 해요?"


폐하는 여전히 손목만 보고 있다. 그런 게 뭐가 대단하다고.


"……600년을 살았다구요? 그런 거 몇 줄 있다고 이상할 거 없잖아요."


대답은 없다.


여기서 끝이었다. 섹스도, 소원도, 전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샤워실로 향했다. "먼저 씻을게요." 폐하는 손목을 보던 자세 그대로 침대 위에 있을 뿐이었다.






* * *






"……미안하다."


젖은 머리로 사령관실을 나오자 칸이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에 기대 헐거운 팔짱을 끼고, 담배 한 대만 빌려달라 부탁해왔다.


"미안하다. 정말로."


칸은 계속해서 앵무새 마냥 미안하다고 되뇌였다. 


"나야말로 미안해. 방법이 좀 거칠었지?"


칸은 고개를 저었다. 착해라.


"하지만 우리 약속했었잖아. 필요하면… 그렇지? 그러니까 나 너무 원망하지 마. 필요하니까, 폐하를 위해서 필요하니까 죽인 거야. 그냥, 너희의 가치를 멸망 전으로 돌려놨을 뿐이야. 원래 바이오로이드가 그런 거잖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 수복보다 새로 만들고 새로 구입하는 게 더 저렴한… 말하는… 고깃덩이…"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목이 메이는 걸 칸은 모른 척 해주고 말했다.


"만약 네가 또 150년 전으로 떨어진다면, 그때는 멸망 전에 날 찾아라."


"네가 믿겠니?"


"믿는다. 반드시. 이번에는 시간이 모자랐을 뿐이야. 다음 번에야말로, 이겨내자. 충분히 시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준비하자. 나를 꼭 찾아다오."


그것이 칸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다음날, 끝이 다가왔다.







* * *






가고시마에 내내 정박해 있던 것은 바다에서 습격 당한다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여차하면 육지 쪽은 걷고 뛰어서 도망쳐 볼 수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센티널은 바다든 육지든 상관없다는 듯 때가 되니 몰려왔다. 그 숫자로만 보자면 육지이기에 더 많이 모여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전 같은 청어떼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메뚜기떼였다. 아니, 메뚜기떼도 비할 수 없었다. 센티널은 메뚜기의 수 백 배, 그런 놈들이 메뚜기처럼 군집을 이루면 그냥 눈에 담기는 풍경 자체가 다가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추, 추산 30만… 앞으로 해안까지 20분… 파, 파, 판단 및 지시를 부탁드립니다…"


유미의 오퍼레이팅에도 지휘관급 녀석들은 아무 반응도 못하고 있었다. 


"잠항 준비." 보다 못하겠단 어조로 닥터가 말했다. "바다로 가."


"안 돼요! 추기경의 말을 잊었나요!? 바다로 가면 퇴로를 막는 꼴입니다!"


그렇게 반박한 아자젤을 닥터가 쐈다. 사라카엘은 눈앞에 쓰러진 아자젤을 바라 보기만 할 뿐, 닥터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서 극복하기 위한 EMP야. 잠항 준비."


닥터가 잠항을 지시하고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청각이 회복 되니 오르카의 동체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고 유미가 1진 격파!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2진! 잔존 숫자 추산 17만! 옵니다!"


닥터가 EMP발사! 라고 외치자 후미 부분에 강한 충격이 있었다. 한쪽 다리가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게 오르카가 삐걱댄다.


"적성 개체 신호… 소실…!"


유미가 굳리 철충 신호라 하지 않은 건 철충 신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철충이 아니란 게 여기까지 와서야 명확해졌다. 왜, 왜 전이랑 다른 거야.


…별로 상관 없다.


알았더라도 못 이겼을 테니까.


이겼다고 방방 뛰던 유미가 잠잠해진다. 

눈앞의 화면을 응시하며, 유미가 말한다.


"3진… 추,추산… 40…50…60만…"


도대체 저런 숫자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걸까? 

언제 만든 걸까?


"부상해!"

"부, 부상하겠습니다! 수면으로 향합니다!"


전의를 유지하려면 닥터는 그래선 안 됐다.

전부 포기하려고 그런 거라면, 옳은 판단이었다.


부상한 뒤에 함교의 창 너머에 보인 것은, 

검은 파도였다. 

검은 수평선이었다. 

검은 하늘이었다.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 모든 것이 오르카를 향해 우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다가온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내 멱살을 흔들어대는 닥터 너머로 컴퓨터 조작을 그만 둔 유미가 보였다.


"다 너 때문이야!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책임져! 책임지란 말야!"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해봐야 닥터는 안 듣는다.


그저 조용히, 나는 속으로 바랐다.


이번에야말로,


실패했다면 실패한 채로 죽게 해 줘.







* * *






"또 왔냐."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오르카에서 벌어지는 가장 굵직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분량이 매우 길어졌습니다.


다음 번 오르카의 이야기는 이렇게까지 길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야기 자체도 오르카를 배경으로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이번 화는 필자인 저 자신부터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아르망이 왜 마지막에 가서 다른 개체들보다 빨리 포기해버렸는지 같은 거요.


저는 600년 분의 고통을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심정입니다만, 독자분들껜 어떻게 다가갈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빨리빨리 쓰겠습니다.


참고로 한번 더 말씀드리자면, 이 글의 장르는 로맨스입니다. 일단은 그렇게 정하고 쓰고 있습니다.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탈자를 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