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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Falling



(조금 매움 주의)



* * *




"왜 또 왔어? ...그래 뭐, 또 실패했겠지."


"내놔."


"뭐?"


"너, 내 세이브포인트잖아. 내놓으라고."


"일단 몸부터 말리지 그래? 네 폐하 떤다."


"빨리 내놔! 신분증! 집 열쇠! 필요한 거 다 내놔!"


"성질하고는. 기다려. 메리, 나와라."


"빨리!"


"기다리라고! 만들어야 줄 거 아냐!"







* * *






"오늘 회식있어요. 오늘은 갈 거지?"


"죄송합니다. 빨리 들어가봐야 해서."


"거 참. 아무리 초년생이라지만 이해해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누군 회식하고 싶나? 다 사회생활이라고. 회식도 업무인 거 몰라? 연장선이야 연장선. 일 잘하는 건 좋지만 말이지."


"죄송합니다."


"하~ 그래서 회사생활 오래 해먹겠어? 중간에 빠지면 되잖아? 어?"


"오래 해먹을 생각 없어요."


"응?"


"적당히만 벌면 되거든요. 투자금은 벌었고요. 저라고 좋아서 당신같이 보기만 해도 토나올 것 같은 분과 같은 장소에 있는 게 아니에요."


"…이봐. 이봐요!"


"말 나온 김에, 사표 낼게요. 내일부터 안 나올 거니까 알아서 하시고요. 꼭 좀 수리해달라고 전해주세요."






* * *






"20분 뒤에 세 번째로 오는 메시지요. 알아서 찾아가. 카톡 아니다? 텔레그램이야."


"추가 주문한 것도 챙겨놨어?"


"그럼. 단골인데."


"얼만데?"


"큰 거 여덟장. 할인이요. 사장님 서비스야."


"또 봐."


"저기, 잠깐만."


"?"


"이유가 뭐요?"


"무슨 소리야?"


"왜 당신같이 멀쩡하게 생긴 아가씨가 잔디를 씹냐고."


"필요하니까 씹지."


"그러슈."


"너 웃긴다? 니들 고객한테 그런 거 물으면 뒈지잖아."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 그, 철없는 애새끼들마냥 패치는 붙이지 마쇼. 그건 진짜 아니니까."


"…"


"캬… 예쁘구만."







* * *






"누나. 지금 들어가면 세 잔 공짜에 30퍼센트 할인인데."


"물은?"


"어, 어? 물?"


"물 어떠냐고."


"아~ 당연히 좋지~ 우리 매장 들어가서 중간에 나오는 누나들 한~명도 없었다. 진짜! 마감 시간 되도 안 나간다 뻐팅김!"


"그래?"


"ㄹㅇ. 후회 안할 걸. 들어가자고~"


"됐어."


"어? 왜? 물 좋냐며!"


"구라치지 마. 내 경험상, 삐끼새끼부터 못 생긴데는 볼 것도 없어."


"어이! 이봐요!"


"그리고 씨발아. 누구보고 누나래. 딱 봐도 마흔 다 돼보이는 새끼가."







* * *






'30대 직장인 서모씨는 지난 2020년 중반, 주식을 시작했습니다. 내 집 마련을 하려고 모아둔 돈 7천만원에 신용대출 6천만원을 받아, 모두 1억 3천만원을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주식 안 하면 바보다라는 분위기이기도 했고, 처음엔 수익도 좀 봤거든요. 그래서 더 투자하면 더 벌겠다 욕심도 나고…'


'1년이 지난 지금, 4천만원만 남았습니다.'


'올해 초부터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계속 오르진 않을 거고, 언제 한번 주춤하겠다곤 생각했는데… 이렇게 떨어질 줄은…'


'증시에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코스피의 하루 거래 대금은 1년 새 약 35퍼센트가 줄었습니다. 국내 경제는 혹한기가 예고된 바…'


"폐하. 다녀올게요."


"…"


"식사는 싱크대 쪽에 뒀으니까 꼭 챙겨드세요."


"…"


"…우리, 다음 달에 좋은데로 이사가요."







* * *






"하자신청 한 건 처리 됐나요?"


"아, 네네. 주방이랑 샤워실, 공기청정기. 다음 주 안으로 오시겠대요."


"늦잖아요."


"이제 막 입주 시작해서 기사님들도 바쁘셔요~ 처리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래요. 그래도 아가씨 봐서 빨리 오겠다 했으니까 금방 올 거에요."


"키 불출은 어디로 가라고요?"


"생활지원센터요. 관리비 수납도 하고 있으니까 미리 확인하시면 편해요."







* * *






폐하. 새 집은 어떠세요? 무려 46평이에요. 이제 춥지도 덥지도 않으시죠? 아차. 식사하세요. 오른쪽은 옥수수 스프, 옆에는 모닝 브레드에요. 커피로 하실 거면 로즈마리 빵으로 바꿔드릴 테니까 말씀하세요. 


좀 소박하죠? 아침은 가벼운 게 좋거든요. 든든하게 먹으라는 건 다 거짓말. 아침부터 꼬이면 하루 내내 가요.


얼마 전에 단지 앞 상가를 샀어요. 여기 집 앞에 생활지원센터랑 마주보는 곳. 베란다 나가면 바로 보이거든요? 히히, 제가 이제 거기 사장님이에요. 인간들이 저를 건물주라 떠받들면서 매달 임차료를 꼬박꼬박 낸답니다? 전 소유주는 임차인이 사정이 안 좋으면 안 받는 경우도 있었다는데, 전 안 그러려구요. 조금이라도 밀리면 어떻게든 다 쫓아낼 거에요. 전부 폐하를 위한 건물이고 돈이니까요. 폐하를 위하지 못하는 약한 인간들은 다 죽으라죠.







* * *






죄송해요, 폐하. 점심이 늦었죠? 윗집이 자꾸 시끄럽게 굴어서 한 소리 하고 왔어요. 정말, 얼마짜리 집인데 층간소음이 이렇게 심한지. 분명 층간소음 없을 거라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있는 거면 얼마나 난리를 친다는 거예요? 하여간 애새끼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킬 거면서 애는 왜낳는지 몰라요.


아, 저는 교육 잘 시킬 자신 있어요.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경험도 있답니다? 폐하 깜짝 놀라실 걸요? 아르망이 이렇게 애를 잘 다룰 줄은 몰랐다고. 아아, 한번 쯤 보여드릴 걸 그랬어요. 알비스나 LRL 있을 때요. 엄마처럼 따르게 할 수 있었는데, 기회가 없었네요. 


죄송해요. 말이 너무 많았죠? 빵 다 드셨으면 식사 가져올게요.


오늘 메뉴는 뇨끼에요. 소스는 직접 만들었고 감자도 직접 손질했어요. 원래는 넣으려던 버섯 대신에 베이컨을 넣었구요. 폐하는 버섯 안 드시잖아요.







* * *







탕 요리는 좋아하세요? 저녁은 탕으로 준비해봤는데.


폐하. 이번 여름도 다 끝나간대요. 시간 참 빠르죠. 이곳에 다시 오고나서 벌써 여름이 두번이나 지나간다니. 


… …


… …


저, 어땠어요?


노력했어요.


폐하는 아무 반응 없으셔도 노력했어요.


같이 왔으니까.


…어쨌든 둘이서 다시 왔으니까요.


폐하 더울까봐, 추울까봐, 아플까봐, 또 개같은 꼴들을 봤어요.


나가기만 하면 다 죽여버리고 싶어요. 아세요?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는 시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배척해야 된다는 시선.

남자고 여자고 진짜 좆같은 년놈들 밖에 없어서요.

어떻게든 폐하 살리려면 참고 걸어야 해서요!

안 보이는 척, 모른 척, 도도한 척 했어요. 

손이 떨리고 머리는 돌아버릴 것 같은데!

그래도 참았어요. 네. 참았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폐하가 죽는데.


폐하.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대답해 주세요.


저를 불러주세요.


폐하.







* * *






"폐하."


"…"


"오늘도 아무 말 없으시네요."


"…"


"메뉴는 떡갈비에요. 직접 만들었어요. 만드는 김에 육회도 만들었으니까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


"새 옷 샀어요."


"…"


"속옷도요."


"…"


"tv도 더 큰 거 들여놓은 거 보셨어요?"


"…"


"서재도 따로 만들었어요."


"…"


"폐하."


"…"


"폐하."


"…"


"폐하!"


"…"


"제가 어떻게 해야 돼요?"


"…"


"저도 힘들어요."


"…"


"……당신이... 알아?"


"…"


"나 이러는 거, 당신이 필요한 거, 아냐고."


"…"


"아냐고 했어."


"…"


"아느냐고!"


"…"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줘! 무슨 말이든 좋아! 욕을 해도 돼! 제발…"


"…"


"제발 나도 기대게 해줘."







* * *






"아르망."






* * *






"폐하?"


"…아르망."


"폐하! 네! 저예요!"


"여긴 어디야?"


"…"


"...vr세계에서 본 것 같은 곳이네."


"2021년이에요."


"20…21년?"


"네. 2021년. 여름."








* * *







"계세요. 확인해드릴게요. 네, 벨트 잘 하셨네요."


"답답한데…"


"참으세요. 운전 중엔 필수에요."


"알았어."


"출발할게요?"


… … 


… …



"이건 아르망 차야?"


"네. 제 차예요."


"신기하네. 선 따라서 빛이 나오는데."


"비싼 차니까요. 밤에 운전하면 더 예뻐요."


"그럴 것 같아. 여자들이 좋아할 느낌이네."


"남자들이 더 좋아할걸요?"


"그래? 난 별로…"


"끌까요?"


"괜찮아. 그보다 아르망은 안 춥니?"


"아차… 에어컨 끌게요."







* * *






"인간들이 엄청 많네…"


"여름에 워터파크니까요. 당연히 많죠. 복장은 괜찮으세요?"


"응. 트렁크로 충분해."


"그럼 가요. 자, 손."



… …


… …



"등이 좀… 많이 따가운데."


"어떡해! 다 쓸렸어! 죄송해요! 이렇게 탄 줄 알았으면 슬라이드 타자고 하는 게 아닌데…"


"괜찮아."


"…그래요?"


"응. 재밌었어."


"그러면 됐어요…가 아니라, 연고는 꼭 발라야 돼요. 이리 오세요."


"진짜 괜찮아. 이 정도야 알아서 낫겠지."


"안 돼요! 우리 파라솔 어딨는지 아시죠? 연고 사올테니까 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꼭이요!"



… …


… …



"폐하. 저 왔어요."


"어서 와. 휴. 어려웠어."


"뭐가요?"


"으응, 앉아있는데 여자들이 몇 번 왔다갔거든."


"왔다가요?"


"응. 두 명 한 번, 세 명 두 번."


"왜요?"


"몰라. 번호 알려달랬는데 무슨 번호를 알려달라는지 알아야 알려주지. 같이 놀자는 건 미안하다고 했어."


"…아하."


"아르망?"


"그 씨발년들 지금 어딨어요?"


"괜찮아. 화내지 마. 잘 보냈다고 했잖아."


"그래요. 폐하가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아르망 무섭네. 욕하는 바이오로이드는 처음봤어."


"…폐하. 2021년에 바이오로이드는 없어요."


"응…?"


"여기서 저는 인간이에요."


"화났어?"


"화난 게 아니라요. 알아 두시라구요. 아셨어요?"


"그래. 화내지 마."



… …


… …



"아까는 죄송했어요."


"…"


"폐하?"


"…"


"잘 자요. 폐하."







* * *





"우와. 화려하네. 진짜 같은 걸."


"쉿… 폐하. 영화관에선 잡담 금지."


"미안… 그런데 인간들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인간들이 아니라 사람들."


"사람들. 봐. 별로 없어."


"없어도 정숙하셔야 해요."


"알았어. 조용히 볼게."


"…다음엔 통째로 대관해드릴게요."






* * *





"와! 와! 오른쪽! 오른쪽에 온다!"


"오른쪽은 폐하잖아요! 빨리 쏘세요!"


"아! 나 죽었어…"


"윽… 저도 죽었어요."


"좀비 잡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네. 유미는 잘할 것 같아."


"……다른 게임 하실래요?"


"그러자. 저기 공 던지는 거 재밌겠네."



… … 


… …



"그냥 막 던지는 거 아니야!? 이게 맞는 거야!?"


"골대에만 넣으면 상관없잖아요! 쉬지 말고 계속 던지세요!"


"10초 남았다!"


"더 빨리! 하나 더!"


"와… 최고 기록의 반도 안 되네…"


"괜찮아요. 던진 건 저희가 더 많이 던졌을 거니까."


"이왕이면 점수 높은 게 좋잖아."


"재밌었으면 됐죠."






* * *





"와. 이게 다 옷이야? 이건 0이 몇 개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옷에 여섯 개면 많은 건가?"


"많은 편이죠. 그게 좋으세요?"


"음. 아니. 초가을이잖아. 아직 코트는 필요 없어."


"미리 사요. 여기, 이거 주세요."


"괜찮은 거야?"


"뭐하면 여깄는 거 다 사드릴 수도 있어요."


"아니… 그건 좀…"


"사요. 마음에 드는 거 다 골라 보세요. 안 그래도 옷 사드리려 했어요."


"괜찮아. 부담되잖아."


"제가 고르기 전에 빨리요."


"으음…"




… …


… …




"잘 고르셨네요. 센스는 타고 나셨나 봐요."


"그런가? 그냥 어울려보이는 것끼리 골랐는데."


"그게 안 되는 인간들이 대다수에요."


"다들 잘 입고 다니지 않아? 여태 다닌 곳에서 본 인… 사람들은 이상한 거 없던데."


"폐하. '옷을 잘 입는다'에는요. 몸매랑 얼굴도 포함이에요."


"에이 무슨. 오드리가 들으면 화내겠다."


"……아뇨. 사실이에요. 폐하같이 몸 좋고 잘생긴 사람이 그런 소리하면 욕 먹으니까 맘껏 뽐내고 다니세요."


"그래? 난 나 잘생긴 건지 잘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틈나면 폐하한테 말 붙이던 점원 있죠?"


"어? 응."


"폐하한테 꽂혀서 그런 거니까, 앞으로는 알아두세요."


"그런 걸 왜 알아둬?"


"그래야 덜 짜증나고 덜 귀찮아요. 앞으로도 계속 똥파리들 꼬일 거에요."


"…아르망. 그렇게 말하는 건 안 좋아."


"……그렇게 말하는 게 안 좋은 게 아니라! 사실이라구요!"


"알았어. 알았어. 또 화낸다."







* * *





"벌써 이브네. 이 코트 산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네요. 추우세요?"


"아니. 괜찮아. 아르망은?"


"좀 추워요. 주머니 좀 빌릴게요?"


"웃. 차갑다. 손 좀 진즉에 녹이지 그랬어."


"지금 녹이면 되니까 괜찮아요. 휴. 따뜻해."


"주머니는 아르망한테도 있잖아."


"원래 남의 주머니가 더 따뜻한 법이에요."


"걷기 안 불편해?"


"불편하시면 뺄게요."


"아냐 괜찮아. 얼마든지 써."



… …


… …



"폐하는 뭐 드실래요?"


"난 토피넛 라떼. 그거 맛있더라."


"그건 제가 만들어드린 거고요. 사먹는 거니까 그렇게 맛은 없을 거에요."


"그럼 만들어줘. 돈 아까워."


"일단 카페 왔으니까 먹어요. 토피넛 라떼. 따로 드시고 싶은건요?"


"없어. 마시는 거면 충분해."


"알았어요. 주문하고 받아서 갈 테니까 자리 가 계세요."


"아냐. 내가 받아서 갈게. 먼저 가있어."


"그러실래요?"


"응. 어서. 앉아있어."



… …


… …



"저기요."


"?"


"혼자세요?"


"아뇨. 혼자 아닌데요."


"혼잔데?"


"밑에 남친 있어요."


"에이~ 딱 봐도 이브 타는데. 앉을게요?"


"앉지 마."


"쌀쌀맞네. 잠깐 말 붙이는 것도 안 되나?"


"앉지 말라고 했는데?"


"응~ 아니야~ 안 앉았어~ 투명 의자야~"


"씨발 해충 같이 생긴 새끼가."


"뭐?"


"벌레같이 생겼다고 개새끼야. 벌레 겹눈만도 못한 눈깔에 힘 줘봐야 씨발 더 못 생겨 보이니까 제발 투명 의자에서 꺼져주세요. 남친 앉을 의자에 냄새 배기 전에요."


"…야. 내가 너한테 시비 거냐? 얘기만 하자는데 왜 말을 좆같이…"


"기분이 좆같으니까 말이 좆같이 나오지 벌레 새끼야. 뭐? 이브 타? 뭐 이런 병신이 다 있냐? ㅋㅋ 이브에 헌팅하고 다니는 새끼는 내 살다살다 또 처음이네. 야. 오늘 저 밖에 있는 애들 싹 다 모텔로 없어질 때까지 너한테 대주겠다는 년 없을 거니까, 그냥 집에 가서 딸이나 쳐."


"야. 일어나 봐."


"나 일어나면 너 죽어."


"일어나 보라고 씨발년…아!?"


"저기, 죄송한데요. 여기 제자립니다."


"뭐야…?"


"지금 제 동생 때리려고 하신 건가요?"


"이새끼 뭔 힘이…! 아, 아아! 아!"


"제 동생이 뭐 잘못한 거 있나요?"


"아, 아니! 없으니까 놔! 아! 진짜 부러져!"


"그럼 그냥 가주세요."



… …


… …



"고마워요 폐하. 영화 같았어."


"영화?"


"방금 폐하 모습이요. 영화 주인공 같았다구요."


"본 게 없어서 잘 모르겠네."


"로맨스 영화를 볼 걸 그랬다. 그렇죠?"


"잘 모르겠어."


"그래요. 일단 드세요."


"음. 좀 식었어도 괜찮네."


"폐하."


"응?"


"오늘 좋았어요?"


"응. 좋았어."


"얼마나?"


"많이. 많이 좋았어."


"정말로?"


"응. 정말로."


"거짓말 아니죠?"


"거짓말 아니야."


"흠~"


"왜?"


"따로 확인 안 해도 되나 싶어서요."


"안 해도 돼."


"아니. 할래. 폐하. 우리 내일은 집에서 있어요."


"그럴래?"


"그럴래요? 요새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하잖아. 그렇죠?"


"응. 좀 피곤했지. 내일은 집에서 있자."


"……"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 * *





"만든다고 하면 스테이크만큼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도 없는데 왜 다들 그렇게 비싸게 사 먹는지 모르겠어요."


"자릿값이 있잖아."


"분위기야 꾸미면 되죠. 어때요? 저번에 갔던 곳보다 더 낫지 않아요?"


"그래. 뭐. 더 낫네."


"자, 냅킨부터."


"냅킨."


"나이프랑 포크."


"나이프랑 포크."


"부딪히세요. 치징."


"치징."


"이제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방금 제가 그렇게 말했다고 저렴한 고기는 아니니까요."


"알아. 가격표 봤어."


"어머. 언제 봤대?"


"물 마시러 나왔다가 봤지."


"치사해."


"치사할 것 까지야… 맛있네."


"와인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나 술 잘 못하잖아."


"못 해도 마시는 날은 있잖아요. 오늘이 바로 그 날이고."


"미안해. 사양할게."


"알았어요. 마저 드세요."



… …


… …



"다 드셨어요?"


"응. 배부르다. 치울까?"


"제가 치울게요. 쉬고 계세요."


"아냐. 맨날 혼자했으면서. 도와줄게."


"그럼 식기 좀 부탁드려요. 나머진 제가 치울게요."



… …


… …



"들어와."


"안 주무셨어요?"


"응. 잠이 안 와서."


"좀 이르긴 하네요. …자리 좀?"


"자."


"좋네요. 폐하 옆에도 다 누워보고."


"가끔은 괜찮지."


"폐하."


"응."


"여기 봐요."


"자. 왜?"


"이러고 있어요."


"…뭐 하려고?"


"그냥, 보게요. 얼굴."


"봐서 뭐해. 그렇게 뚫어지게 보면 금방 질리겠다."


"질리는 얼굴이면 그렇겠죠."


"질리는 얼굴이잖아."


"안 질려요."


"끄응…"


"왜 눈을 못 마주쳐요?"


"질리는 얼굴이 아니니까."


"무슨 의미에요?"


"예뻐. 아르망 예쁘잖아."


"고마워요."


"아니, 오지는 마."


"더 와요."


"…아르망하고는, 딱히 그럴 생각 없어."


"그럼 뒤돌아주세요."


"…"


"껴안는 건 되죠?"


"그래. 여기까지만."


"…폐하."


"응."


"앞으로 원하는 거 있으시면 뭐든 말하세요. 거리낄 것 없어요."


"..."


"뭐든요. 다 해드릴게요."


"…응."


"제가 지켜드릴게요."


"…"


"그러니까 떠나면 안 돼요?"


"…"


"주무세요."


"아르망."


"깜짝야…"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다고 했지?"


"네, 네… 폐하. 일단 내려오세요. 무거워요. 하시려는 거면 하시고요."


"정말이지?"


"네. 뭐든 들어드릴게요."


"그러면…"





* * *





"나 좀 죽여줘."


"…"


"나는, 살아선 안 돼."


"…"


"……나는, 사령관이었어. 마리, 메이, 리리스, 페로, 하치코, 다이카, 지니야, 실피드, 레프리콘, 노움, 이프리트…"


"왜."


"그런 짓을 했어.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놈이 아니야."


"왜… 울어?"


"매일… 떠올라. 그 아이들에게 내가 한 짓이, 매일 떠오른다고. 어, 얼마든지… 멈출 수 있던 걸… 하하…"


"왜 그런 소릴 해?"


"네 탓을 하는 건 아니야. 결국 승인했던 건 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러면 나는 뭐가 돼?"


"그녀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어…"


"싫어."


"나 좀 죽여줘."


"싫어. 안 돼."


"아르망. 부탁해. 최대한 고통스럽게 날 죽여줘."


"죽어도, 절대로 싫어."






* * *





2021년 12월. 크리스마스 다음날.


폐하는 자살했다.






* * *






"재운 줄 알고 잠깐 안심했는데, 일어나보니까 죽어 있었다? 어 하는 사이에 죽었다 이거네?"


"…"


"문고리랑 수건을 이용해서?"


"…"


"맞아? 대답을 해."


"…봤으니까 알잖아."


남자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서걱거렸다. 로봇청소기가 비켜달라는 듯 남자의 구두에 머리를 박아댔다.


"시체는 치운다."


남자가 폐하를 안아들고 현관으로 나섰다. 내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3일 뒤에, 남자가 다시 찾아왔다.


"밥 안 챙겨먹냐?"


죽어버린 로봇청소기를 발끝으로 툭 쳐보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물도 안 마시고?"


"신경 꺼."


"아니 내 말은 ㅋㅋ" 남자는 입가를 가렸다. "그런 식으로 초췌해져봤자 봐줄 인간이 나 밖에 없다는 거지. 나는 널 동정할 마음 따윈 없고."


"…고맙네."


"이젠,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뭐 막, 어? 다시 가서 잘 해봐라 같은 소리 안 할 테니까, 너 알아서 하라고."


안방으로 가서 가방을 챙기고, 남자를 지나쳐 문을 열었다.


"어디 가!"


"알아서 하라며."


"그건 그거고 지금 어디 가냐고."


"남이사 씨발 새끼야. 내가 어딜 가든."


"네 폐하가 어디 묻혔는지 같은 건 이제 묻지도 않냐?"


"알아도 내가 거길 어떻게 가."


"그럼 이거라도 받지?"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남자가 내밀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폐하의 것이라는 말에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깔끔하게 정사각형으로 접힌 종이였다.

펼쳐보고, 그것이 유서라는 걸 알고,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내용을 모두 머리에 담았을 때, 유서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 로봇청소기를 덮었다.


"처음으로 너희가 이 시간대로 왔을 때, 기억 나냐."


남자는 거의 600년전 이야기를 묻고 있다.


"기억 안 나."


"그러냐? 뭐 상관없어. 그 안에 적힌 건 600년 전 그거랑 똑같은 내용이니까. 글씨 하나 다르지 않아."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네 폐하. 처음에도 그거랑 똑같은 걸 썼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입술이 떨린다. 이가 부딪혀 달그락거린다. 존재를 지워버리듯 눈을 감아도 남자가 보이는 것 같다.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

"몰라."

"아니. 알아. 떠는 걸 보니까 기억도 떠오른 것 같은데."


나무에 목이 달린 폐하의 이미지가 뇌리를 몇 번이고 스쳤다.


나는 남자에게 달려들어야 했다. 그 이미지를 연상시킨 남자의 입과 이미지로 인한 반동을 지우려면 그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온 체중을 실어 남자를 들이받았다. 남자의 등에 묵직한 마찰이 있었음을 어깨로 느끼고 멱살을 잡았다. 흔들어서, 몇 번이나 머리를 벽에 박게 했다. 남자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충격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맥이 빠진다는 듯 부러 늘어뜨린 것에 가까웠다.


남자에게는 아무런 데미지도 없었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좀 도와주지."


남자의 얼굴과 말은 현금인출기의 그것과 같이 평탄했다.


"첫째. 오르카로 가지 마. 포기해."


내게서 튀어나올 말을 막고 남자는 기계처럼 계속 나불거려갔다.


"둘째. 갈 거라면 아르망답게 굴어."


어느 쪽이든 상상 속에서라도 참고할 수 없는 제시였다. 


"운명은 있어."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운명이 있다고? 그러면, 그러면 폐하가 저 꼴이 된 것도 운명이야? 내가 계속 150년 전으로 떨어지는 것도 운명이야!? 콘스탄챠의 대갈통이 수박 마냥 터져버리는 것도 운명이냐고!"


"답하지. 첫째.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야. 둘째. 기회는 많았어. 너는 극복할 수 있었어. 아니, 극복해야만 했어. 셋째. 이번에 네 폐하가 그 꼴이 된 건 네 탓이야."


모든 것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 신경은 셋째에 쏠렸다.


"그게 왜 내 탓이야! 어떻게 내 탓이야!"


"난 알아." 남자는 기계같은 인상을 지우고 음습한 미소를 꺼냈다. "난 결코 눈치도 빠르고 감이 뛰어난 인간도 아니지만, 딱 하나. 그거 만큼은 기가 막히게 포착할 줄 알거든. 뭔지 알아?"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죽음. 피. 특히나 바이오로이드의 피." 남자가 고개를 들이밀고, 나는 내뺐다. 내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너. 이번에도 두 번째 같은 짓 했지?"


"아니야."


"더 심한 짓 했지?"


"아니야. 안 했어. 안 했어!"


"다 포기했지? 아무리 봐도 정답 같은데."


남자는 확신하고 있다. 더 확인할 것도 없다는 듯이 멱살을 잡은 내 손을 거적대기 털듯 치워내고, 여유롭게 타이를 정리한다. 


"대답해."


"…ㅋ…ㅋㅋ…" 부정할 기력이 없었다. "그래. 했다. 근데 있잖아. 이번에는 나 혼자 그런 게 아니야. 폐하도 같이 했어. 오랜만에 날뛰니까 줘언나게 재밌었다!?"


"ㅋㅋ 뭐, 달랜다는 의미로 그랬나 보지?"


"1차원적인 자극만큼 확실한 것도 없잖아?"


"패닉에 빠진 고양이 달래본들, 앞발이 멈출쏘냐." 


남자는 연기하듯 과장된 몸짓과 정극톤으로 지껄였다.


"…극복할 수 있었어? 극복해야만 했다고? 야. 네가 몰라서 그래. 네가 직접 봐야 돼. 내가, 뭘 상대했는지, 수를 좀 세워보자하면 별에 별 상황이 계속 생기는 그 시간을! 너도 보내봤어야 돼!"


"흥. 예지도 못하는 데다 가르쳐준 걸 그딴 짓에 써먹는 년이 잘도 대처했겠지."


두들겨 팰 가치도 없어, 라고 남자는 새기듯 말했다.


"피냄새나는 바이오로이드는 범죄 사양이랑 다를 거 없어. 빨리 꺼져버려."


문을 쳐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숨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 *






2062년. 겨울.


이 마당에 이르면 절망마저 달콤하게 느껴진다. 종류에 관계없이 강렬한 감정이라면 무엇이든 기분 좋게 와 닿고, 그것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즐기기 쉬워졌다. 그런 상태가 이어지자 후회와 한탄마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종국에는 내 머릿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남의 일처럼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바이오로이드가 세상을 좀먹기 전인데도 인간들은 가지각각의 이유로 신나게 죽어나갔다. 쓸데없이 울부짖거나, 담담한 척 누구보다도 처절히 한탄하거나, 본래부터 일생에 있어 의미있던 적이 없었다는 양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인간들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게 부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이라는 완벽하고도 공평한 끝에 대한 저항감이 심해진다는 것도 부러웠다. 끝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것들이 부러우면 부러울수록, 방종의 유혹이 심해졌다.


시간은 약이 될 수 없다는 걸 지난 수백 년간 절감했음에도, 잠깐은 시간에게 빌어보기도 했다. 분명 시간이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있으며 내 안의 여러가지에게도 시간이 약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인간들에게서 인간성이 사라져갈수록,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만 새로이, 다시금 깨달았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이미 사라진 것뿐이다. 끝나버린 일 뿐이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끝이 없으니까, 폐하는 또 나타나니까, 나는 마음놓고 방종의 늪에 몸을 내던질 수 있었다.


나는 밤이면 밤마다 네온과 홀로그램이 혼재된 거리를 쏘다녔다. 남자에게 받은 '미끼'를 이용해 인간으로 둔갑한, 생체리듬으로만 보자면 그야말로 흡혈귀와 다름 없었다. 하는 짓도 흡혈귀와 진배 없었다.


물 좋은 클럽으로 들어간다. 따로 물색 행위를 할 필요는 없다. 피를 빨리고 싶어하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다. 벌레가 꽃향을 거부할 수 없듯, 더 새롭고 깊은 방종을 찾는 인간이라면 알아서 꼬여든다.


오늘 마주보게 된 수컷은 제법 잘 생겼다. 내 앞에서도 여유가 있는 게 돈도 많은 것 같다. 오랜만의 상등품이다. 나는 혀 위에 백탁색 액체를 올린다. 침을 섞어 점성을 늘리고, 팔을 뻗어 품어줄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낸다. 암컷의 그것이다. 보통 여기까지 오면 다소 자격이 모자란들 거부하는 수컷이 없다. 암컷으로써 지니고 있는 무기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던 나같은 년 앞에서는, 누구나 함락 당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저기, 이거 다음은 얼마야?"


수컷이 물었다. 떨어진 입술에 늘어진 몇가닥의 실이 야릇하게 끊어져내렸다.


"키스만이야. 자, 50."

"존나 비싸…"

"깎은 거야. 100불러도 한다는 새끼들 넘쳐 나."

"음… 왠지 그럴 것 같아."

"만족스럽지?"

"어. 윽, 씨발. 슬슬 반응 온다. 으…"

"응. 50 확인. 재밌게 놀아."

"잠깐만."


부러 애교가 녹아난 몸짓으로 돌아봤다.


"연락처 없어? 또 보려면 어떻게 하면 돼?"

"자주 돌아다녀~ 연락처 같은 거 없으니까."

"존나 따먹고 싶어. 진짜 섹스는 안 해?"

"응. 안 해. 바이바이."


오늘은 150을 벌었다. 따로 벌어야 할 만큼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도 즐길 겸 돈도 벌면 좋으니 시간 날 때 하는 것뿐이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수컷들이 늘어나면 본능에 닿아있는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핸드폰 케이스에 장식물을 주렁주렁 추가하는 것 같아서 재밌기도 하다.


그날도 클럽에 가서 대충 즐길 거리를 찾았다. 웬만큼 외모가 안 되면 무조건 입뺀 당하는 곳이었는데, 나야 뭐 검사 당하는 게 기쁜 족속이라 제지 당하는 일은 없었다. 뭐만 하면 담배는 검사를 해대는데.


물 좋기로는 최고인 곳이다 보니 눈이 즐거웠다. 적당히 흔들고, 허접한 솔티 독과 마가리타를 마시고, 하체에 슬쩍슬쩍 붙어대는 수컷들의 치근덕거림을 즐기고, 슬슬 취기가 올라올 때가 돼서 오늘의 수컷을 기다렸다.


"이봐."


신호가 왔다.

왔는데,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그쪽이 소문의 밤의 마녀인가?"


뒤돈 곳에 있던 것은, 나이대가 좀 있어 보이는 수컷이었다. 하지만 잘생겼다. 일단 잘생기면 ok다.


"어머. 웬 휴 잭맨이 있네."

"밤의 마녀. 맞나?"

"응. 요즘 그렇게들 부르더라."

"호오. 드디어."


나는 쿡쿡 웃었다.


"보통은 해본 놈들만 찾는데? 그렇게 나랑 만나고 싶었어?"


"그렇다마다.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 놈을 보면 보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지. 뭐라던가. 세상에 남자는 마녀와 키스해본 적 없는 놈과 있는 놈으로 나뉜다던가."


"기뻐. 바로 할래?"

"선불로 하지. 얼마지?"

"30이면 돼."

"듣던 것보다 저렴하군."

"서비스♡ 잘생긴 수컷은 내 쪽에서 환영이야."

"고맙군."


액체를 꺼낸다. 혀에 올리고 침을 섞어서, 수컷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몸짓을 보인다. 입술간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수컷이 혀를 찔러넣기 좋게 입술을 살짝 벌려준다. 정복욕을 자극한다.


코가 닿는 거리에서,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안 해?"

"…나 참."

"뭐?"


뒷골목에서는 상황을 의심하는 상황 자체가 위험이다. 위험을 감지한 나는 신속히 몸을 빼려 했지만, 허리가 꽉 붙들려 떨어질 수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잡을 줄 아는 놈이다.


배운 놈이다.


"우리 딸. 거의 뭐 창녀 다 됐구나? 그래 뭐, 꽤 오래 전에 경고하긴 했었는데."


했었는데, 가 들리기도 전에 남자의 목을 겨눴다. 팬텀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 같기도 했다.


"하아~" 거리를 벌리고 머리를 위로 쓸어넘겼다. "언제 매즈에서 휴로 바뀌셨대? 아주 씨발 천의 얼굴이셔."


"얼굴 자체를 바꾸는 건 아니야." 남자는 주위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정장 매무새를 고쳤다. "뭐, 바꾸긴 바꾸는 거라고만 해두지."


"네가 여긴 왜 와."

"왜, 오지 말란 법 있나?"


"뭐야, 마녀." 지나가던 빡빡이가 끼어들었다. 수컷은 아니고, 몇 번 신세진 놈이다. "뭐 또 귀찮게 구는 놈 있어?"


"응. 저 개새끼."


내가 남자를 가리키자 남자는 양손가락으로 만든 화살표를 얼굴에 댔다.


"씨발, 어이. 틀딱." 빡빡이가 거구를 뽐내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들어왔어? 틀딱은 캬바레나 가실 것이지 뭔 클럽이야."


"어허. 틀딱이라니. 내 아랫도리는 아직 청춘인데. 것보다 큰손을 이리 불손하게 대접해서야 쓰나. 저기 진열대에 있는 칼라풀한 녀석들 내가 다 쓸어갈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안 되나?"


"어. 안 돼." 빡빡이가 남자 앞에 섰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우리 마녀가 불러 모으는 고객이 한 둘이 아니거든. 나가. 좋은 말로 할 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주위 안 보여? 개고기 되고 싶어?"


하나 둘 모여든다. 나를 받드는 수컷들. 가드. 이번 기회에 환심을 사려는 놈들. 많이도 온다. 최소 스물이다.


"음. 이거야 곤란하구만. 알파메일은 싸우지 않는 법이거늘."


"알파메일이라기엔 너무 늙으셨는데."


"알파메일의 조건에 나이는 없어. 아, 참고로 정말로 곤란한 건 말이지. 알파메일을 알아보지 못하는 너희의 협소한 시각이야. 정리하는 건 딱히 문제가 안 돼."


"씨발럼!"


빡빡이가 쳤다. 그리고 휘두른 자세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자칭 알파메일이 본색을 드러냈다.


"wow! Yes! Fuck!" 남자가 외쳤다. "이러면 결국 미스터 윅으로 돌아가버려야 하잖아! 이런 개 씨팔럼들! 너희는 한놈도 빠짐없이 전부 다 혀를 뽑아주마! 감히 내 딸 혀를, 응!?"


터져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고 티아멧을 꺼냈다.


"이야. 진심으로? 그거 나한테 겨누려고?"

"대갈통을 날려줄게."

"널 가르친 게 나라는 걸 왜 매번 잊는 거니."


남자는 터덜터덜 팔을 풀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알파. 셧다운."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클럽이 암전됐다.







* * *






"이, 이 미친 새끼! 진짜로 혀를 뽑아!? 넌 이 또라이 새끼야! 시티가드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오면 시티가드도 다 쓸어버릴 거야. 진심이야."


쥐와 벌레들의 집인 골목에서, 나는 벽에 밀어올려져 목을 졸리고 있었다. 버둥거릴 수 있는 사지로 복부와 안면을 가격해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마녀야. 백날 쳐 봐라. 그런다고 무게가 실리나."


"켁…끅…이 개…새끼… 네가 뭔데…"


"딸이 제 몸뚱이 알기를 개처럼 아는데, 어떤 아빠가 가만히 있어. 있어봐라. 몇 대만 맞자."


"이… 씨발아!" 남자가 구속을 풀어서 자유로워졌다. "뭐하자는 거야! 너 옛날에 뭐라고 했어! 이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할 거라며! 그런데 여기에 와서 왜 남의 취미생활이나 방해해대고 지랄이냐고!"


남자는 주먹과 발로 대답했다. 온몸이 안으로 오그라들며 폐에 담긴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임종을 앞둔 노인같은 숨소리를 내고, 입과 혀는 통제를 잃어 침이 새는 걸 막지 못했다.


"변덕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더 말 안 해. 건실하게 살아."


건실하게 살아? 


"ㅋ…ㅋㅋ… 지도, 건실한 놈은 못 되면서…"







* * *






2078년. 여름.


"유효기간 지난 체크카드에, 둥글게 만 지폐, 하얀 가루. 허어… 딸. 아빠 말을 전혀 안 들어 먹는구나?"


고양감이 머리를 뚫고 나가려 한다. 코에 남은 친구들을 마저 받아들이려고 계속 코를 훌쩍댄다.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는데, 대항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 조금만 권해보면 다들 친구가 된다. 기분 좋은 저릿함에 몸이 가만히 있질 않는다.


"누구?"


일단 남자다. 들리는 걸론 한 명 같은데 눈에 보이는 건 셋이다. 천장에 붙어있는 다리가 계속 바닥으로 떨어지려 한다. 하지만 그건 기분 좋은 착각, 아아, 환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바닥에 두 다리 다 제대로 붙어있음을 알 수 있다.


"네 아빠."


이상한 소리를 한다.


"나 아빠 없어."


"없긴 뭐가 없어. 셀프 패드립 하지 마라."


진짠데. 나 아빠 없는데.


"…하. 완전히 갔구만. 이 썅년. 너 이리 와."


"아앙! 아프잖아!"


"머리털 다 뽑히기 싫으면 잠자코 끌려와!"


거기서부터는 기억이 안 난다. 다시 눈을 떴을때는 내 방이었고, 팔뚝에 주사가 꽂혀 있었다. 카, 카테 어쩌고 하던 건데, 비슷한 경험이 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주사기를 뽑는다. 잠들기 전에 업된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버려서 약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많이 쟁여뒀는데 그게 다 어딜 간 건지 두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여기저기 헤집어진 흔적이 있던 걸 보아 도둑이라도 맞았나.


"오구구! 그래. 여기선 좀 괜찮겠냐?"


방을 나가 거실로 가자, 그 남자가 웬 애들을 팔로 들고 내리며 비행기를 태워주고 있었다.


맞다. 이 남자가 머리끄덩이를 잡았었다.


"아저씨. 저기 언니 일어났어요."


머리가 하늘색인 아이가 나를 가리켰다. 어쩐지 눈에 익다.


"아찌도 봤다~ 너희끼리 잠깐만 놀아라~"


"네!" "네!" "네!"


"야, 너." 남자가 다가와 나왔던 방을 가리켰다. "들어와 봐."


"…언제 내 집이 탁아소가 된 거야?"


"애들 앞에서 후려치기 싫으니까 일단 들어와."


남자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서 유니콘에 앉았다. 내 지정석을 뺏었다.


"씻고는 사는 거냐?"


몸을 살핀다. 하얀 크롭 탱크탑에 누런 얼룩 몇 개 있는 거 말곤 그럭저럭 깨끗하다. 팬츠는 꺼매서 모르겠다.


"또 뭘 하자고?" 나는 침대에 앉아 남자와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고 말했다. "네 말대로 건실하게 살고 있어."


"건실하게 살고 있어?"


"응. 아무것도 안 하는 거. 너든 누구든 뭐만 하면 지랄을 하고 사고가 나니까, 그냥 있어."


"그럼 그 체크카드랑 지폐는 뭐였는데? 그걸 보이고도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이 나와?"


"…짜증나. 너 왜 지랄이야?"


"아?"


"조용히 살잖아. 근데 왜 지랄이냐구우."


"그게 대답이야?"


이게 대답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가." 남자가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너는 애진즉에, 응? 이미 몇백 년 전부터 맛이 갔으니까 망가진 건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더 망가져 가는 것도 뭐, 그래. 그것도 그렇다 쳐. 하지만 있잖냐. 망가지는데에도 급이 있어. 종류가 있다고."


"머얌? 궁금하당."


"뭐긴 뭐야 이 씨발년아! 완벽한 뽕쟁이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아니 씨발 어떻게 하고 많은 것 중에서 약을 골라! 어!? 너 저기 뒷골목 가면 널린 게 좀비 마냥 굴러다니는 바이오로이드인 거 알아 몰라!? 너도 거기 인간들한테 장난감으로 쓰인 년들이랑 손 잡고 좀비되고 싶어!?"


"우웅… 별로. 양 조절은 하고 있는데."


"아주 몸 배배 꼬는데 잘도 하겠다! 어휴! 다 무너져가는 연립주택에 처박혀서 그냥 세월아, 네월아, 약 한번 빨고 유니콘에 탑승해서 광란의 로데오를 즐기는 매일이셨겠어!? 응!? 응!?"


훌륭한 허리돌림을 보인 남자에게 권했다.


"잘 돌린당. 네 말대루 존나게 빨고 하면 더 좋아."


"썅년아!"


또 여기서 기억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머릿속에 썅년아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또 주사가 꽂혀 있었고, 약 기운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깨에 무게가 느껴졌다. 남자가 손을 올리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그 애들은 뭔데?" 나는 도로 눕고 말했다. "나 탁아소 연 기억 없어."


남자는 다시 유니콘에 탑승했다.


"이제 있어. 여긴 이제부터 탁아소야."


"뭐?"


"좆같은 새끼들한테 좆같은 꼴 당할 예정이었던 애들, 여기서 보호할 거라고."


"…뭔, 씨발… 뭐? 뭐라고?"


"애들. 여기서. 살 거라고."


"누구 맘대로! 여기 내 집이야!"


"이젠 아니야. 세입자 씨. 내가 샀거든."


"하?"


"이 단지 통째로 내가 샀다고. 네 뽕쟁이 이웃들 다 쫓아내고 새로 열 거니까 그런 줄 알아."


뭔가 말해야 되는데 말이 안 나왔다. 문장 조립은 커녕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 Ngo활동 중이야."


"아, 그래? 대단하네."


"그래. 누구 기억 안 나냐? Ngo활동가가 꿈이었다는 아이."


"…안 나는데?"


창문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남자는 곰팡이 낀 틸트 창을 닫고 다시 말했다.


"앨리스. 세라피아스 앨리스 말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래도 기억 안 나?"


…기억난다.

잊은 적이 없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이젠 없던 일이다.


"죽었어. 몇 년 전에. 네가 주인님이라 부르던 인간은 지금 완전히 미쳐서, 클럽 착공에 들어갔어. 알아 들어?"


"…"


"너 알아서 해. 난 여기에 고용인들 풀고 또 떠날 거야. 뭐, 맨 약이나 빨고 살면 이번엔 탈 없긴 하겠네."


"…왜, 떠올리게 해."


"못 봐주겠어서 그런다."


다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비명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창에 시선이 갔다가 돌아왔을 땐, 유니콘 위는 텅 비어 있었다.







* * *






2090년. 여름.


습한 냄새가 나고 등에 알갱이가 찝히는 곳에서, 나는 살충제를 들이킨 장구벌레처럼 온몸을 뒤틀고 있다. 불쾌한 땀 냄새, 남자 냄새, 몸을 기어다니는 손, 가벼운 상의는 벗겨져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적당히 엉덩이는 가려지던 돌핀 팬츠는 찢겨서 여러 조각이 됐다.


화근은 마녀짓이었다. 드높은 마녀의 명성을 모두 잃고 마녀짓을 다시 했다가 이 사단이 났다. 딱 한번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랬던 건데. 소위 말하는 임자 만났다는 상황이었다. 다수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걸 보면,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다.


"와. 좆되네." 까까머리에 땜빵이 난 놈이 말했다. "야. 살 뽀얀 거 봐. 씨발 핑두다. ㅋㅋ"


"햐~ 요런 걸 보고 앙다문 일자 보지라 하는 거구만?"


레게머리를 한 놈의 입에서 걸쭉하게 침이 늘어진다. 아랫배에 묻었다.


"근데 좀 어린 거 같지 않냐? 풋내 남."


"냄새 맡아보셈. 개좋음."


상체를 가까이서 훑던 포마드 머리가 말했다.


"오~ 물방울 궁뎅이 ㅋㅋ" 더벅 머리가 허리를 간지럽힌다. "뒤치기할 때 쩔겠네."


"근데 얘 왜 이렇게 지랄함? 따먹히고 싶어서 앵긴 거 아님?"


"아 몰라! 야! 나부터 한다!?"


"지랄 마 병신아! 내가 들고 왔는데!"


"아 다 뒤지고 싶냐? 보지는 내 거다?"


"그럼 입은 내 거 ㅋㅋ"


"아나 씨발년 ㅋㅋ 질싸 존나게 해줄게. 임신해도 책임 안 진다?"


후두부에 여운같은 통증이 있다. 싸구려 전구에서 내리쬐는 빛 때문에 모든게 주황색으로 번져버렸다. 팔은 하나로 겹쳐 위로 묶여있고, 다리는 지금 막 잡혔다. 다리 군데군데의 감촉으로 판단하건대, 아래로 파고 들고 있는 놈은 알몸이다. 한놈은 머리카락 끝쪽을 만져댄다. 거기만 연보라색이라서 만져대는 것 같다. 염색이 거의 다 빠졌으니까.


"아 내가 먼저 한다고!"


"씨발럼아 진짜 뒤질래? 떡도 못 치고 아가리 터지고 싶냐?"


"니 뭔데 벌써 좆세우고 대고 있냐? 안 꺼져?"


"아 있어 봐 좀. 금방 끝내고 나온다고. 아니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좁아서 그런가봄 ㅋㅋ 보지 존나 귀여움 ㅋㅋ"


"넣지도 못하는 새끼가! 내가 먼저 한다니까!?"


"아 나 먼저 한다고!"


"다 꺼져라! 나부터다!"


"아니. 나부터 할 건데."


마지막의 울림은 근처에서 들린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비틀어 올려다본다.


전구의 빛이 거의 닿지 않는 나무 문 쪽에, 누군가가 서 있다. 선이 강한 얼굴인 건지 드리워진 음영이 깊어서, 눈이 있어야 할 곳엔 깊은 암흑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상을 좌우하는 선 모두가 그랬다. 전체적으로 보면 해골을 연상케한다. 얼굴 아래로 둘러진 그림자는 구겨진 검은 셔츠와 조화롭게 섞여, 죽음을 몰고 다니는 저승사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직전까지 몸은 내어주자 생각하고 있었다. 목숨만이라도 건지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서있는 남자를 보고, 나는 잦아들던 장구벌레짓을 다시 시작했다. 저 누군가가 나를 돕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데도, 이 집단 강간의 현장이 될 곳에 변수가 생긴 것 자체가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하여간 어린 놈의 새끼들." 남자가 그림자에서 벗어나 주황색 영역으로 들어섰다. "시대가 바뀌면 바뀔수록 대가리에 젖가슴이랑 보지만 들어차는구만. 지긋지긋해 아주."


"……뭐야. 틀딱이야?"


틀딱이란 말에 촉각이 선다.


그 남자다. 살았다. 강간은 피할 수 있다. 남자에겐 또 한소리 듣겠지만 차라리 아빠를 자처하는 저새끼가 낫다. 시원하게 몇 대 맞아주면 된다. 십 몇 년 만인데 그 연립주택에서의 만남이 바로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오냐. 틀딱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걔는 내가 박을 거니까, 니들은 집에 들여놓은 바이로로이드한테나 박아. 다들 한대씩은 들여놨지? 바이오로이드도 없는 거지 새끼들이면 엄마한테나 박던가."


"틀딱. 우리가 먼저야."


"ㅋㅋ 우리가 먼저야?"


"어. 먼저. 차례 지켜. 옆에 방 있으니까 기다려. 안 그럼 뒤져."


다시 고개를 비틀어 본 곳에는 나를 보는 남자가 있었다. 시선이 맞았다.


남자는 내게서 시선을 치우고 말했다.


"왜, 바이오로이드는 질려? 아니면 니들 엄마는 별로 맛없어? 거 이상하군. 먹을 만은 했던 거 같은데."


"안 꺼져? 여기서 뒤질 거야?"


"아니 뭐, 뒤지진 않을 것 같은데. 좋아. 제안하나 하지. 한꺼번에 덤벼도 돼. 무기만 들지 마라. 주먹으로만. 그러는 것도 남자다운 걸로 쳐주지. 어때?"


"약 처먹었어?"


"약은 저기 누워있는 년이 처먹던 거고. 아, 빨리. 제안 받을 거야 말 거야?"


"이런 늙다리 씨발럼이 어디서 계속…"


더벅머리가 날린 주먹에 주먹이 부딪혔다. 더벅머리의 어깨가 뒤로 빠지고 손가락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였다.


그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라면 대개 꽁무니를 빼기 마련인데, 어린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상황 파악이 안 된 강간 미수범들은 차례차례 남자에게 요리 당해갔다.


"옘병. 두 놈은 갔네." 남자는 포마드 머리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이상하다? 힘 조절 했는데."


칼질 소리가 들리고 손목이 느슨해진다. 따가운 등을 돌려 몸을 일으킨다. 


직후, 목에 강렬한 충격이 있었다. "어쨌든 이제 박아야지!" 등의 충격이 고통이 되는 것보다 빨리 숨통이 막혔다.


"벽에다 말이야."


"허…헉… 커흑…"


"하다하다 이제는 좆 만한 새끼들한테 당해? 꼴 좋구나."


아무 말 안 한다. 말이 나올 상태도 아니다.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렇게 성의껏 경고해줬으면 알아 들어야지. 말을 안 들어 처먹으니까 이 꼴이잖아."


"아… 윽…"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몰라? 가르쳐준 거 다 까먹었어? 네 기원에 따른 입장이 어떤지 잊은 거야?"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내 대답은 일단 예스다. 


"너, 뭐가 문제야."


목의 조여듬이 심해진다. 호흡이 막 진정되어가던 참인데, 이래서는 물어봐야 대답해 줄 수 없다.


"나한테 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제 적당히 했으면 한다.


"나한테! 이 개년아! 나한테! 나한테! 도대체 계속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피부에 닿는 기류가 이상했다. 숨통이 더 조여들자, 이 남자가 나를 진짜 죽이려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보다 한 발 빨리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기 전에 본 남자의 눈빛은 탁해져 있었다. 그것으로 확신한다. 남자는 진짜로 날 죽이려 하고 있다.


압박감은 목에서 입, 눈과 머리까지 올라왔다.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눈은 터져버릴 것 같고 머리는 아찔해져 내가 공기를 들이키는 건지 공기가 나를 들이키는 건지 헷갈렸다. 진짜 죽는다. 뇌리에 발악하듯 스치는 것은 그 문장 뿐이다. 


그걸 마지막으로 체념하자, 거짓말처럼 호흡이 가능해졌다.


남자는 푹 주저앉아 있었다. 고개가 위로 향하고 있어서 과정을 보지는 못 했지만, 앉아있는 분위기로만 봤을 땐 실이 끊긴 인형 같았다. 몸을 지탱하는 무릎은 바깥 쪽으로 벌어져 있고, 턱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어깨는 아래로 늘어졌다.


벽에 기대서 눈물이 그칠 때까지 눈을 닦고, 마저 더 닦고서 다시 남자를 봤다.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다. 갑자기 급사라도 한 것은 아닌지 어깨가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분명히 살의를 확인했음에도, 이상하게도 나는 남자에게 아무런 짓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남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 무릎에 뉘었다. 그 일련의 과정에 내 의지는 전혀 반영된 것 같지 않은 감각이 전신을 달렸지만,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게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남자도 망가져있는 것이다.


원래도 정상은 아니었긴 했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그런 표면에 드러나는 비정상이 아니라, 좀 더 근원에 있는 무언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동질감이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데, 애매한 부분에서 다르다. 그 애매한 부분을 모르겠다.


앉은 채로 둘러보니 이곳은 호텔 내지는 모텔인 듯했다. 벽지나 깨진 창의 상태로 보아 폐허가 된지 꽤 됐다. 측면 가까운 곳에 있는 침대에서는 물 속에 침잠시켰다가 말린 듯한 냄새가 났고,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은 화가를 유추할 수 없을 정도로 상해 있었다.


여름이었음에도 깨진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몸은 열이 올라서 뜨거웠다. 그 두 온도가 만나 나른함을 만들어 나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아주 푹 잘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는 강간 미수범들도 남자도 사라져 있었다. 몸에는 마녀짓을 할 때 입은 옷 말고 다른 것이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팔뚝에는 포스트잇과 함께 사탕이 붙어 있었는데, 사탕 봉지 안에 든 것은 익숙한 수복 캡슐이었다.

 

포스트잇 중앙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건실하게 살아.'


그 아래엔 아주 작게 '미안해.'라고 적혀 있었다.







* * *






2095년. 겨울.


막다른 곳에 몰렸다.


이번에는 건실하게 산 것이 문제였다. 

사실 건실하다기엔 뭐하고, 그냥 약 끊고 적당히 돌아다니며 산 것이 다였다. 그 정도로도 쫓기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나를 몬 것은 그자다. 

클럽 사장.

주인님.


"재주도 좋아. 이렇게 오래 걸려서 잡기는 처음이야."


주인님 옆에는 찰리, 찰리의 손에 붙들린 것은 전과 다르게, 그리고 본래의 모습이었을 '사냥개' 리리스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굵직한 쇠목줄에 묶여서 개같은 자세를 하고 있다. 하치코는 얼굴이 피어스 투성이고, 스노우 페더는 날개에 온갖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그래피티가 새겨져 있다.


다시, 적대하게 됐다.


"제안하지." 


지금의 이 남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장? 주인님?


"우리와 함께 해라. 아니면 죽던가."


풍채에 어울리는 중저음이 매력적이다. 이전에는 그런 목소리로 내게 온갖 애정을 표현했었는데.


나는 몸에서 힘을 빼고, 대답아닌 대답을 했다.


"죄송해요."


사장…이 눈썹을 튕겼다.


"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찰리가 리리스를 풀려는 것을 사장이 제지했다.


"앨리스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시간도 위치도 다 알고 있었는데도."


사장의 눈이 커진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알면서도, 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있죠. 그래서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예요. 그 클럽을 만들고, 증오와 분노에 차서 저같은 걸 사냥하게 된 거예요. 앨리스가 살았다면… 당신은 10년도 더 전에 죽었을 거고요.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결코 당신이 오래 살기를 바라서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아무것도 안 했어요."


"…어떻게. 네가 어떻게."


"함께 하진 못 하겠어요. 그러니까, 죽이고 싶으시다면 죽이세요. 저같이 아무 제약 없이 돌아다니는 바이오로이드를 죽이셔서 마음이 편해지실 것 같으면, 그렇게 하세요."


으르렁대는 리리스를 제외하곤 모두가 침묵했다.


사장이 말했다.


"돌아간다."


"보스!"


"돌아가!" 사장이 찰리에게 윽박질렀다. "내가 잘못 알았어. 무가치한 녀석이었다. 다들 각자 현장으로 복귀해라. 그리고 너."


사장은 마지막으로 말하고, 뒤돌아 떠나갔다.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라."


나는 사장이 사라져도 몸에 힘을 넣지 않았다. 아무 데나 부딪힐 때까지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을 확인도 안 하고 앉아 담배를 피워댔다.


"나와."


아무것도 없었고 이어진 곳도 없는 구석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은폐장이다.


"스토커 새끼."


남자는 사납게 노려보고 다시 사라졌다.


몇 년 뒤, 거친 천사가 죽었다는 뉴스가 인터넷에 게시됐다.






* * *






2113년. 멸망.


시간은 흘렀다. 어떻게든 흘렀다. 살아남을 생각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지만 나는 또 살아서 여기에 서 있다. 


마천루 옥상에 서서 불길에 잠긴 시내를 눈에 담는다. 높이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임에도, 수천 수만의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오히려 높았기에 지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가짓수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강풍도 막을 수 없는 비명 사이로 구두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장관이구만." 다가와서 옆에 선 남자가 말했다. "인간들 터져나가는 것 봐라. 거의 뭐 폭죽이야 폭죽. 크, 언제봐도 안 질린다니까."


남자의 등 뒤에서 소총이 잔뜩 튀어나와 근처의 스패로우를 격추시켰다. 남자는 스패로우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부탁한 건?"


1년 전 쯤이다. 상대적으로 건실해진 상으로 ―좋은 아빠라면 그럴 거란다.― 가벼운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남자가 말한 적이 있다.


"죽었어." 라고 남자는 나직이 대답했다. "너한테 상주기 딱 1년 전에, 그러니까 2년전이지. 이미 죽었다는군."


"…그게, 정말로?"


남자는 고개를 내쪽으로 돌리고 거짓없는 눈빛을 보였다.


"전사했단다. 멸망 전 개체가 될 니네 칸."


날 찾아다오.


"하하…"


찾아달라며.

이제라도 찾으려 했는데, 죽어버리면 어쩌자고?


"담배?" 남자가 뻗은 손가락에 가느다란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피우고 싶다는 얼굴인데."


"맛도 더럽게 없는 걸 피우네."


남자가 손을 치우고 웃었다.


"같이 대관람차 탔을 때 한 대사구만."


모른다. 관심없다. 쓸데없는 걸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럼 이제 꺼져. 스토커 새끼야."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던 남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이 담배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야. 다 좋은데 스토커라고는 하지 마."


"맨날 갑자기 튀어나와서 따라다니면 그게 스토커지 뭐야. 하는 짓도 기분 나빠, 아니야?"


"그럼 너도 스토커로군."


"뭐 이 씨발놈아!?"


이것은 그냥 넘겨들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스토커야?


"150년의 간극이 있다 뿐이지, 매번 같은 남자 찾아가서 할 짓 못 할 짓 다 하잖아. 내가 하는 짓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아주 씨발 배은망덕하게 가르쳐준걸 그 따위로 써먹는, 아니야?"


마지막 어조는 나를 따라하는 뉘앙스였다.

머리에 피가 쏠린다.


"거진 100년만에 다시 묻게 되는데, 만약 이번에도 두 번째, 다섯 번째 같이 굴 거면, 그냥 오르카로 가지 마. 이번에도 그러면 넌 진짜 스토커야."


"내가, 내가 스토커라고?"


"반응이 강렬한 걸 보니 너도 자각은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 폐하 살린답시고 네가 오르카로 가는 게, 오히려 악영향인 건 아닐까라는 생각 안 드냐?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래?"


"…그래가 아니고, 아, 뭐,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그러지 말라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오르카가 평화로운 시간 끝에 침몰하는 거나 구경하든가."


"시끄러워."


"마음대로 해라. 나도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똑같은 대답 듣는 거 이젠 진짜 싫어. 너 두 번째 망치고 돌아왔을 때처럼 두들겨 패기도 싫고. 니네 오르카야. 니네 사령관이야. 니네 일이라고. 가르칠 건 옛날에 다 가르쳤어. …내가 너한테 뭘 더 가르치겠냐?"


아래를 본다.


장난감 블록같은 회색 주도에는 붉은색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비명 소리는 약해졌고, 너무 늦게 울린 공습 경보 사이렌이 포탄과 총알 세례에 흩어졌다. 인간들의 눈길을 끌어야 할 거대 홀로그램은 인간이 사라진 곳을 향해 무의미한 몸짓을 반복 중이었다.


홀로그램의 사지가 사라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머리마저 사라지자 남자가 말했다.


"아니면, 멸망을 막던가. 말만 해. 아직 안 늦었어. 난 가능해."


"필요 없어." 


"그러냐." 남자가 힘없이 웃었다. "아들 있을 때랑은 다르게 확고한 건 좋군. 간다."


짜증나는 새끼.


다시 아래를 본다. 헷갈릴 여지없는 완벽한 멸망이었다. 다섯 번째다. 무너지는 건물, 메아리치며 잦아드는 비명, 일렁이는 화염의 산, 붉은색 위를 걷는 검은 군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그 모든 멸망의 구성을 통해 나는 다시금 시간이 흘렀음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몇번이고 반복된들 모두 멸망으로 귀착하고 만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괴로웠다.


있는 것이다. 이 반복 속에.

내 아들이었던 아이가.


하필이면, 하필이면 남자가 마지막에 그 따위 소리를 한 게 문제였다.


담배 다섯 개비 분의 시간이 지나갔다. 마지막 여섯 개비째는 절반도 안 피우는 사치를 부렸다.


있는 것이다. 이 반복 너머에.

폐하가.


나는 이미 정했다.


돌아가자.


700년치의 공허한 마음에 격랑이 일기 전에.







* * *






217x년. 오르카.


그간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실상을 말한들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거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 했다.' 가 맞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뭐만 하려고 하면 원래 아프던 머리고 갑자기 몸이고 미친듯이 아파와서, 고작 연명을 하는 것이 다였다.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게 다였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오르카에 오른 것이 기적인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그것이 화근이었다. 마땅히 세워 둔 대책은 없는데 실낱같은 의욕은 남아 있는 게 문제였다. 그걸 다른 말로 뭐라하는지 아는가? 초조다.


어떻게든 폐하만은 살려야 한다는 초조함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혹시 이 오르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닐까?'


결과적일 것도 없이 당연히 틀린 소리였다.


"아르망! 잠깐만! 진정해 봐! 그거 내려놓고 얘기하자. 응?"


파멸이 거의 다가왔을 때, 폐하가 함교에 있을 때를 노렸다. 나는 폐하에게 겨눈 리리스를 내리지 않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폐하를 겨눈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그러면 따라오세요. 여기서 나가셔야 해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폐하의 팔은 들짐승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차분하게 오르내린다. 이런 걸 본 적이 있는데. 하여튼 나는 들짐승이 아니다.


"무기 내려!" 


함교 출입구로 바이오로이드가 쏟아져 들어온다. 다 나를 조준하고 있다.


"비전투 개체. 무기 내리고 투항해라." 


레드후드다.


"레드후드! 아니야! 잠깐만!" 폐하가 레드후드와 나 사이를 막는다. "다 괜찮으니까 너희부터 내리도록 해. 괜찮아. 그렇지? 아르망."


폐하가 미소 짓는다.

유성같은 눈을 빛내며 미소 짓는다.


나를 감싸고 있다.

이런 건 이상하다. 감싸야 하는 것은 내 쪽이다.


"…웃지 마. 웃지 마!"

"그래. 그럴게. 응. 자."


편린이 입꼬리에 남아있다. 잘 지워냈다고 여기는 듯한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어 보일 것 같았다.


"떠는구나. 무서운 거라도 있니? 들어줄게."


있다. 말할 시간은 없다. 여기서 나가면 다 괜찮아진다. 이때까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인님!" 


다시 열린 출입문으로 또 바이오로이드가 쏟아져 들어온다. 방금 외치며 들어온 것은, 콘스탄챠다.


멍해져 버린 사이에 콘스탄챠는 폐하 옆까지 다가왔다. 내 손에 들린 건 아랑곳도 안 했다. 


"안 돼, 콘챠. 나가 있어. 금방 끝날 거야."


"총구 내리세요!" 콘스탄챠는 폐하의 팔에 제지당하면서도 앞으로 나서려든다. "이게 뭐하는 건가요! 얌전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누구한테 총을 겨누는지 알고는 있나요!?"


틀렸다.


폐하는 나갈 생각이 없다. 나를 진정시켜야 할 불안정한 개체쯤으로 여기고 있다. 다른 것들과 같이 감싸 안아주면 안정을 찾을 개체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데도 바이오로이드가 이렇게 많다. 콘스탄챠도 있다. 나갈 이유가 없다. 나갈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만들기로 한다. 초조가 극단으로 치닫는다. 굉음같은 이명이 울리고 복강이 폭발하듯 파열할 것만 같다. 몇 개의 칼날이 긋는 듯이 심장이, 머리가 아팠다.


폐하를 쏜다. 노리는 것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위다. 그렇게 되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폐하가 즉시 분노하거나, 일단은 따르거나. 전자면 그냥 죽기로 하고, 후자면 충분히 오르카와 떨어진 뒤에 제압해서 육지로 간다. 그렇게 하기로 한다.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신경을 집중한다.


그때까지, 나는 정말로 발사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발단은 함교에서 보이는 해상이었다. 일순 창에 떠오른 것이 스코프의 반사광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챈 나는 옆으로 굴렀고, 바이오로이드 무리가 움직였다. 동시에 초조가 폭발해서 낙법을 통해 사격하기 좋은 자세를 갖춰 폐하를 쐈다.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라기엔 비통함이 너무 많이 담겨 있었다.

그야 그럴 수 밖에. 맞은 것은 폐하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느려진다.


폐하를 감싸느라 뒤돈 자세가 된 그대로, 콘스탄챠가 쓰러져 내린다. 머리가 바닥에 닿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그런 생각을 마칠 때까지도 콘스탄챠의 머리는 허공에 있었다.


순간적인 임팩트로만 보자면 두 번째나 다섯 번째보다 더 클 것이라고.

물론, 폐하에게.


그 뒤로 내 눈은 그저 죽어나가는 바이오로이드를 담았다. 내가 죽이는 게 아니었다. 머리 아래로 달린 여러가지들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멋대로 죽여댈 뿐이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 멈추려고 했다.


…어쩌다 보니, 그래.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마지막까지 서 있는 건 나였다.


피로 칠해진 함교 중앙, 콘스탄챠를 품고 앉아있는 폐하의 머리에 바이저가 씌워진다. 


"…모든, 모든 승조원에게 알린다."


아니야. 


"아르망 추기경을 적성 개체… 최우선 제거 대상으로 지정."


아니라고.


복도를 달린다.

스피커가 울린다.


"당장 잡아와!"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폐하를 도우려 했던 거라구?


정말이야.


안 되면 죽을 생각이었어.

원한다면 죽이셔도 상관없어.


목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다.


그러면 너는 지금 왜 달리고 있니?


뒤이어 남자의 말이 떠오른다.



… …


… …



맞아.


다 저지르고서야, 또 저지르고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스토커다.

그 이하다.


내가 문제다.

내가 파멸이다.

내가 콘스탄챠를 죽였다.


이제는 내가 폐하를 죽이고 있다.

이제까지 내가 폐하를 죽여온 것이다.


나는, 죽었어야 했다.

예지가 불가능해진 그 순간부터 죽어 있었어야 했다.


나는, 오르카에 올라선 안 됐다.

다섯 번째에서는 복원될 아르망 추기경에게 맡겼어야 했다.


나는, 750년 전에 사라졌어야 했다.


복도 끝. 후미의 창 너머에 그것이 보인다.

센티널.

눈이 맞았다.

나를 칭찬하듯이 붉게 번뜩인다.

창이 검게 뒤덮인다.


콘스탄챠가 죽고 일주일이 지나야 나타나는데, 왜?


…뭐, 괜찮아. 


나는 복도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이번에는 반드시 죽기를 기도했다.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이제부터 매운 게 차차 사라질 예정입니다.


빨리 여기까지 오길 바랐습니다.


또 봅시다.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