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특선으로 써오려고 했는데 결국 신년 특선이 되었네. 초기 아이디어와 에피소드로 만들려고 구상하다가 폐기한 스토리에 살을 덧붙여서 조금씩 써왔어. 재미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IF물-만약 칸이 하렘을 받아들였다면

 

(68편 시작 시점)

 

“대답해, 당신. 이거 대체 뭐야.”

 

리마토르의 얼굴에 바짝 패드를 들이민 칸은 그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패드에 띄워진 화면 속 하르페이아는 그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상황이 가진 사실의 내용보다 부정을 먼저 듣기를 바라는 그녀의 바람이 그에게 느껴졌다. 리마토르는 바싹 마른 입안에 침을 삼키며 말문을 열었다. 

 

“불륜은 아니에요. 하르페이아의 일방적인 감정이었어요.”

 

“말 돌리지 마. 일방적인 감정인데 왜 당신이 받아주냐고.”

 

“정말이에요. 영상을 봐요. 제가 하르페이아에게 호응했다면 더 자연스러웠겠죠. 하지만 이 영상에서는 하르페이아가 갑작스럽게 먼저 다가오고 놀란 제가 아무런 대응을 못하는 데 더 가까워요.”

 

두괄식으로 칸에게 자신이 전달하려는 바를 말한 리마토르는 차근차근 그녀를 설득했다. 그의 말을 따라 영상을 돌려보던 칸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이 있네. 좋아, 당신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점은 믿어줄게.”

 

칸이 자신을 향한 혐의를 한 겹 벗기자 리마토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말이 곧 자신의 완전한 안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지적이라도 하듯이 칸은 다른 해명을 그에게 요구했다.

 

“그럼 설명해봐. 왜 하르페이아가 당신에게 입을 맞춘 건데.”

 

“...조금 긴 이야기에요. 차분히 들어줄 수 있겠어요?”

 

“.....”

 

칸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는 건 눈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둘은 눈으로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 칸은 한 발 물러서서 그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커피 한 잔 줘.”

 

“알겠어요.”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촘촘하던 분위기는 커피 한 잔으로 서서히 누그러졌다.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던 칸과 리마토르는 분위기가 아까보다 누그러졌다고 느끼자 차분히 대화에 들어갔다. 뮤지컬 뒷풀이 때 벌칙주를 잔뜩 들이마신 하르페이아가 취중진담을 꺼냈던 일, 실용주의를 이야기했던 날 하르페이아에게 고백을 받은 일.

 

“...그렇게 된 거에요.”

 

“.....”

 

리마토르가 말에 마침표를 달았지만 칸은 마침표를 자신의 끝이 아닌 앞에 달았다. 같이 있었으면서 보았던 장면 뒷면에 가려져 있던 내막을 알게 된 그녀의 생각은 나선을 그리며 아래로 향했다.

 

“.....”

 

칸이 계속 대답이 없자 리마토르는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잔을 연신 홀짝이며 자신의 인내심도 점점 밑을 보이는 것에 조바심을 내던 그는 칸이 입을 열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신.”

 

“네.”

 

칸은 리마토르를 불렀다. 대화의 시작을 열고서도 본편을 꺼내는 데 뜸을 들이던 그녀는 한숨을 한 번 가볍게 쉬었다. 남은 커피를 남김없이 비운 칸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하르페이아를 사랑해?”

 

“.....그건 아니에요.”

 

답을 하고서도 혹여 잘못된 건 아닌지 리마토르는 칸의 미묘한 변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력을 바짝 모았다. 그의 생각을 눈치 챈 그녀는 입에 고인 미소를 모아 말로 빚었다.

 

“괜찮아.”

 

“그렇다고 해도, 저는 아니에요. 제가 사랑하는 건 칸뿐이니까요.”

 

선물을 사양하는 것처럼 리마토르는 칸의 말을 되돌려주었다. 하지만 칸도 다시 그에게 말을 내밀었다. 자신의 뜻을 전하면서도 받는 그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그녀는 부드러운 말로 포장을 한 겹 덧댔다.

 

“알고 있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단지, 나 말고 다른 이를 계속 신경 쓰고 있는지 묻고 싶어서 그래. 당신은 정말 상냥한 사람이라서 당신에게 마음을 주는 이를 모질게 내치지 못하니까. 그래서 계속 마음을 쓰고 있는지 알고 싶어.”

 

칸의 목소리는 나비처럼 날아 리마토르의 귀에 날개를 접었다. 나빌레라 전해진 그녀의 심정에 리마토르는 마음의 문을 하나 더 열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위해, 자신을 위해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솔직히 신경이 쓰여요. 이 마음이 칸에게 가진 사랑과 동일한 건 아니에요. 뭐랄까, 제가 잡아주지 않으면 하르페이아가 무너질 것 같은 책임감 같아요.”

 

드디어 그의 마음을 들은 칸은 잠시 입을 닫았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녀가 알고 있는 리마토르의 모습에 부합했기에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온갖 상념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상화를 그리고 있었기에 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야만 했다. 칸딘스키의 <구성8>처럼 자신의 마음을 가로지르는 선을 따라 나타나는 수많은 생각을 좇아 그녀는 겹쳐지고 나눠졌다.

 

“리마토르.”

 

“네.”

 

3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답을 기다리던 리마토르에게는 3시간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사귄 이후로 늘 불러주던 ‘당신’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니 그는 속으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긴장을 바짝 조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생각을 절실히 이해해버린 순간, 칸이 본문의 포문을 열었다.

 

“그게 당신의 마음이라면, 내가 받아들여야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자신의 뺨을 강하게 날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의 입에서 자신을 이해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리마토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되묻는 것과 별개로 칸은 그에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다.

 

“당신이라면 <제2의 성>을 쓴 철학자 시몬 보부아르를 알 거야.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다는 점 외에도 남편이었던 장폴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 관계로 유명했었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방식으로 둘의 결혼 생활을 이어갔어. 부부라는 이름하에 최소한의 제약만을 걸었을 뿐, 서로의 자유로운 사생활을 최대한 보장했지.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하면서 2명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3명의 여제자들과 동성연애를 하는 등 다자연애관계를 가졌다는 점을 보면 이 계약 결혼이란 게 정말 파격적인 제안임이 와 닿을 거야.

 

난 이런 계약 연애 관계를 원치 않아. 이름뿐인 관계보다 더 깊이 들어가 서로의 감정에 손을 뻗을 수 있을 정도로 라포가 형성되길 바라. 당신이 내게 그랬고, 내가 당신에게 그랬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마음을 준다고 생각할 때... 참을 수 없이 아팠어.

 

그렇지만 계약 연애에서 한 가지 배울 점이 있더라. 상대방의 감정에 손을 뻗어 만질 수 있어도, 그 감정의 주인은 상대방이라는 사실 말이야.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에 당신의 사랑에 손을 대고 싶지만, 그 사랑이 나에게 온전히 향하지 않는 걸 바꿀 수는 없어. 내가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은 당신 거니까.

 

그러니 전부 이해할게. 당신이 하르페이아에게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 감정이 계속해서 뒤돌아보게 되는 감정이라면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게. 당신이 하르페이아에게 감정을 준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래는 건 아니니까.

 

고생 많았어, 당신.”

 

칸은 손을 내밀어 리마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 이상으로 훈훈하게 와 닿는 칸의 마음이 리마토르의 마음에 산들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은 그녀의 그릇에 탄복하며 그는 칸이 가리킨 길에 발을 내딛었다.

 

“정말.... 고마워요, 칸. 칸에게 주었고, 주고 있고, 앞으로도 줄 사랑에서 책임을 피하지 않을게요. 그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고마워, 그럼 이제 하르페이아를 불러볼까?”

 

이후의 일은 순탄히 잘 풀렸다. 칸과 하르페이아, 리마토르 간의 삼자대면을 통해 하르페이아는 자신의 연심을 다시 한 번 리마토르에게 고백했다. 그의 감정을 받게 된 하르페이아는 환히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꼬일대로 꼬였던 매듭이 풀린 자리에는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날 밤, 리마토르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어려운 숙제를 풀어낸 안도감과 감정적으로 큰 양보를 한 칸에게 감사를 느끼며 그는 내일 케이크라도 사서 갈까 생각했다. 자리끼까지 마시고 불을 끄는 순간, 침대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그를 위에서 눌렀다.

 

“벌써 자려고? 책임을 진다고 했으면 확실히 져야지. 오늘은 안 재울 거니까 각오해♥

 

“교수님... 논문 심사 탈락시킨 건 너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교수님을 통과시켜드릴게요...♥

 

침대 위로 몸을 뉘인 칸과 하르페이아가 입맛을 다시자 리마토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는 내일 하면 안 되냐며 자비를 구했지만 두 사람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느새 상의를 벗은 칸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귓가에 속삭였다.

 

“저렇게 살이 오른 몸보다 근육이 잡힌 마른 몸이 더 좋다는 거 알려줄게.”

 

“그래도 제가 가슴은 칸 대장님보다 더 크거든요?”

 

칸의 도발에 위기감을 느낀 하르페이아도 옷을 벗고 리마토르에게 몸을 밀착했다. 탄탄하고 폭신한 촉감이 양쪽에서 느껴지자 리마토르는 이 곳이 극락인가하고 생각하며 그만 탈출 의지를 놓아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칸은 그를 품에 안았다.

 

“앗! 먼저 시작하시는 건 반칙이에요!”

 

선수를 뺏긴 하르페이아도 더 늦기 전에 리마토르의 품에 안겼다.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은 오르카호의 깊은 밤이 두 사람의 교성으로 칠해졌다.

 





#IF물-만약 리마토르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면

 

(76편 끝-77편 시작 시점 사이)

 

“.....”

 

칸이 나간 뒤 병실 안에는 계속 적막이 감돌았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던 리마토르는 옆으로 한 번 돌아누웠다. 자세를 바꿔도 무거운 심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가려고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와 그녀의 관계가 묶여있었는지, 지금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어디인지. 어느 것도 일말의 실마리조차 내주지 않았다.

 

“....”

 

리마토르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 다시 누웠다. 말을 꺼내려고 해도 성대의 떨림은 닫힌 입을 넘지 못했다. 일어서지도, 앉지도, 눕지도 못한 어중간한 상태 그대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어중간하게 버려두었다. 감정이 달라붙은 몸이 무거웠다. 팔 하나를 드는 데도 상당한 근력이 필요하자 그는 부들거리다가 이내 체념했다. 사실은 근력보다 심력의 문제였고,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그의 마음은 떠오를 기미 없이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

 

칸. 옴짝달싹 못하는 입을 열어 부르고픈 이름이 흘러나오다가 도로 삼켜졌다. 리마토르는 자신이 말을 삼킨 게 아니라 말이 삼켜진 걸 어렴풋이 느꼈다. 말이 넘어간 자신의 목구멍이 끝 모를 심연으로 이어져 다시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는 끌려들어간 말을 꺼내보려고 애타게 속을 뒤졌지만 휘저은 손끝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만해

이제 포기할 때야

결국 넌 변치 않았어

 

 

빨려 들어간 말 대신 체념이 나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리마토르는 귀를 막을까 생각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체념. 아니면 절망. 어쩌면 둘 다. 그를 노리는 어두운 감정들이 뭉치고 뭉쳐 그의 목을 핥았다. 서늘한 살기가 몸에 전기처럼 타고 퍼지며 찌릿한 감정을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생생한 정신과 달리 몸이 죽어있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리마토르는 조용히 생각했다. 

 

‘갈바니의 동물전기 실험처럼 뒷다리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자의든 타의든 움직이고 싶었다. 한 번만 강한 움직임이 있으면 이 좌절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기 때문이라도 움직일 개구리 뒷다리 따위도 없었다. 그저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포르말린과 다름없는 우울과 비탄에 절여져 박제된 채 멍하니 숨 쉬는 게 전부였다.

 

‘...어쩌면 청개구리가 나보다 낫겠어.’

 

그는 자신이 표본실의 청개구리만도 못하다고 느꼈다. 이미 죽은 청개구리는 포르말린에 몸을 맡기고 떠있을 뿐이지만, 자신은 산 채로 우울에 절여져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있어야 했다. 폐포 하나하나까지 차오르는 우울은 포르말린처럼 그가 부패하지 않게 해줄 터였다.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닌 시체가 되어서, 주변인 모두에게 버림받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될 예정이었기에 한 인간으로서의 리마토르는 구 인류와 같은 쓰레기라는 비명(碑銘)을 얻게 될 게 뻔했다. 바라지 않는 오명은 그를 부패하지 않은 청개구리로 만들 것이다.

 

“.....”

 

속이 좋지 않았다. 어느새 기도를 타고 넘어오는 공기에 함유된 우울이 몸 속 깊은 곳까지 물들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형벌이 된 것처럼 괴롭자 그는 익사가 머지않음을 느꼈다. 고통이 목을 조르자 그는 심연에서 말을 건지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칸....”

 

칸이 보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해줄 그녀가 눈앞에 그려졌다. 리마토르는 힘겹게 꺼낸 말을 허공에 흩뿌리며 다시 같은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칸의 형상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끝이 뾰족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러지 말아달라며 고개를 젓던 리마토르는 그 시선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사랑을 믿을 수 없다는, 이제는 흔들리고만 그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던 모습이었다. 방금 전까지 믿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한 자신의 사랑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랐다.

 

“.....”

 

미안했다. 그럼에도 사랑했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해 마지않는데, 그 신뢰를 깬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하르페이아의 감정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의도가 어떻든 단초를 자신이 제공한 건 사실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어깨에 놓이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다.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이었지만 그는 형벌이 괴롭지 않았다. 자신의 사랑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칸의 말이 이미 감각체계를 조각냈기에, 그는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몸으로 고통을 끌어안았다.

 

“.....”

 

칸. 자신의 어둠을 밝혀준 빛. 자신의 죄, 그리고 영혼이여. ㅋ-ㅏ-ㄴ. 혀끝이 아랫니 뒤쪽에서부터 타고 올라 앞니 뒤쪽에 놓였다. 칸.

 

그는 오래 전에 읽은 <롤리타>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소설을 읽으며 그는 주인공 험버트의 사랑이 얼마나 폭력적이기에 한낱 소녀인 롤리타에게 집착하는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사장(死藏)된 프로이트의 이론이라도 끌고 와서 성(性)으로 점철된 질척한 폭력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사랑했듯이 그도 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어떤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랑’. 그는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금 입에서 굴렸다. ㅋ-ㅏ-ㄴ.

 

“미안해요...”

 

그는 베갯잇을 벗겼다. 자신이 그토록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할 정도로 그가 그녀에게 준 사랑은 컸다.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나 크고 무거워서 그는 꿇은 무릎을 펴지 못했다. 모든 죄를 안고 가겠다는 속죄의 마음으로 그는 자신을 담을 고리를 만들었다. 움직이지 않던 몸은 다시 제대로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속죄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옆에 있던 책 한 권을 들었다. 귀하게 여긴 멸망 전의 책 안쪽을 뜯어낸 그는 펜을 들었다. 모두에게 미안했지만, 가장 미안한 칸에게 사죄하는 글을 뼈를 깎는 심정으로 써 내렸다. 

 

 

펜을 내린 그는 리마토르로서 마지막 용기를 냈다. 그의 목에 걸린 하얀 고리는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모든 죄를 끌어안은 리마토르의 표정은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리마토르, 안에 있는가?

 

칸이 말을 전해... 리마토르?!”

 

 

리마토르의 죽음이 알려진 건 순식간이었다. 칸이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는 소식을 전해달라고 아스널에게 부탁했으나, 아스널이 들고 온 건 수락이 아니라 부음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들은 칸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칸을 급히 수복실로 보낸 아스널은 이 사실을 즉시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아스널로부터 리마토르의 자살을 전해들은 사령관은 머리를 싸매 쥐었다.

 

“제기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목에서 가래가 끓었다. 종이컵에 거칠게 가래를 뱉어낸 사령관은 현 상황이 자신을 향한 화살로 돌아옴을 바로 예측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만으로 막강한 위치가 부여되는 현 상황에서 유이한 인간을 죽일 동기를 가질 이는 두 번째 인간의 존재로 손해를 보는 이, 바로 자신 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리마토르를 향한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면 화살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을 죽일 바이오로이드도 없고, 죽일 수도 없으며, 죽이려고 해서도 안 돼. 그럼 소거법으로 남는 답은 하나, 내가 지시했다는 것밖에 안 남지. 리리스의 과잉충성이 문제였다고 해볼 수도 없어. 아무리 날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리리스를 곤경에 빠뜨리는 짓을 할 수는 없지. 게다가 리마토르를 흔들어보라고 지시한 건 나였고.

 

결국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건 나만이 해야 할 일이군. 내 잘못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어.’

 

부인하려고 해도 자신이 저지른 짓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피할 수 없는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인 사령관은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죄업의 바위를 피하지 않았다. 시지프스처럼 바위를 받아낸 그는 마땅한 처분을 받을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기 전에 아스널에게 합당한 지시를 내렸다.

 

“상황 공개해. 시티가드 수사 지시하고.”

 

“알겠네. 하지만 상황 공개는 이미 탈론 페더가 특종으로 뿌린 상태라 그대의 지시가 소용없을 것이네.”

 

“...그럼 됐어. 시티가드 측에서도 인지수사에 들어갔을 테니 굳이 건들 이유 없어. 들어가서 쉬어.”

 

사령관의 지시가 내려지자 아스널은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그녀는 품에서 청심환 한 알을 꺼내 씹었다. 수많은 철충 앞에서도 떨리지 않고 호방하게 전의를 드러낸 그녀였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은 전쟁이 주는 충격과는 상이하게 달랐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의 심정을 그나마 수습해주길 바라며 그녀는 입안에 남은 청심환의 쌉쌀한 흔적까지 모두 삼켰다.

 

“칸에게 다시 가봐야겠어. 소식을 듣자마자 기절할 정도면 리마토르를 믿지 못한다고 말했어도 심적으로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사달을 당하다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급히 수복실로 향하던 아스널은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모골이 송연해진 그녀는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칸 외에도 리마토르에게 깊은 감정을 갖고 있던 이는 더 있었다. 자신이 칸에게 정신을 쏟느라 다른 이들을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아스널은 더더욱 속도를 올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칸이 실신할 정도인데, 그보다 훨씬 멘탈이 약한 둘은 견디지 못할지도 몰라. 제발... 늦지 말았으면...”

 

아스널은 복도를 꺾고 보이는 방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무례하더라도 자신이 너무 늦지만 않기를 바라며 그녀는 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하면서 방에 들어갔다. 방안에서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늦지 않을 수 있었다.

 

“하르페! 내려와!”

 

“놔! 다 놓으라고!”

 

“이러지 말란 말이야!”

 

리마토르처럼 천장에 고리를 만들고 그 안에 목을 넣으려는 하르페이아와 그런 하르페이아를 저지하려는 스카이나이츠 대원들 전원이 달라붙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스널은 가쁘게 차오른 숨을 한 번 가라앉히며 호통을 쳤다.

 

“하르페이아, 이게 무슨 짓인가!”

 

아스널의 호통이 휘몰아치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혼잡한 상황을 순식간에 정리한 아스널은 하르페이아에게 걸어가 천장에 걸린 줄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단단히 묶은 천이 휴지처럼 힘없이 끊어지자 하르페이아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어 쓰러진 하르페이아와 시선을 맞춘 아스널은 작지만 단단하게 속삭였다.

 

“많이 힘들지?”

 

“....네.”

 

하르페이아의 목소리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기억에서 읽은 지식을 넘겨 그녀의 영혼을 묶어줄 수 있는 말을 찾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정한 아스널은 하르페이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금 속삭였다.

 

“그래도 괜찮다.”

 

“.....”

 

잠시 하르페이아의 숨이 멎었다. 그리고 다시 숨이 쉬어졌다. 입을 덜덜 떨며 가쁘게 호흡하는 하르페이아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자 아스널은 하르페이아를 안아주었다. 아스널의 품속에서 하르페이아는 목놓고 펑펑 울었다. 다른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은 듣지 못했지만 아스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하르페이아의 울음소리에서는 슬픔이 아닌, 상처의 고통이 배어나왔다. 아스널은 하르페이아를 토닥이며 연신 되뇌었다.

 

“울어도 괜찮다. 지금은 힘든 거니까, 단지 그뿐이다.”

 

리마토르도 그렇게 말했을 거라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아스널은 하르페이아를 안고 달랬다. 한참 뒤, 하르페이아는 울음을 그쳤다.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운 그녀의 손목을 잡은 아스널은 잠시 하르페이아를 데려가겠다며 같이 방을 나섰다. 하르페이아의 손을 잡고 복도를 달린 아스널은 자신이 이끄는 캐노니어의 숙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도 문을 부서져라 열면서 들어간 그녀는 찾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에밀리!”

 

“괜찮습니다, 대장.”

 

비스트 헌터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서 모든 정황을 읽었다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눈물에 젖은 휴지가 한가득 쌓인 탁자 옆 소파에서 에밀리가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그 옆에서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레이븐과 파니가 아스널에게 인사를 하자 아스널은 이번에도 급했던 숨을 내쉬며 땀을 닦았다.

 

“다들 고맙네. 에밀리가 큰 충격을 받았을까 걱정이 들었는데, 못난 대장이 바로 오지 못했음에도 훌륭한 대원들이 적절한 조취를 취해두었군.”

 

“고생은 대장이 더했지. 옆에 하르페이아 보면 뭔 일이 있었는지 다 보여.”

 

목을 축인 파니가 눈이 퉁퉁 부은 하르페이아를 가리키며 말하자 하르페이아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비스트 헌터는 파니와 레이븐에게 가서 쉬어도 된다고 말한 뒤 아스널에게 쪽지를 건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파악했습니다. 리마토르 교수의 죽음으로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종이에 정리해두었으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맙네, 덕분에 수고를 덜었군.”

 

“대장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죠. 하르페이아는 저희가 데리고 있을 테니 대장은 칸 대장에게 가보길 바랍니다.”

 

“아니. 에밀리도 데려갈 생각으로 왔는데, 에밀리가 자고 있는 걸 보니 안심이 되는군. 나는 하르페이아와 함께 칸에게 가볼 테니 에밀리를 잘 돌봐주길 부탁하겠네.”

 

“걱정 마시죠. 제대로 하고 있겠습니다.”

 

비스트 헌터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아스널을 배웅했다. 든든한 부관 덕분에 마음의 짐을 하나 던 아스널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하르페이아를 데리고 칸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칸의 병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하르페이아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이 안에는 칸이 있네. 칸과 어떤 관계인지는 알고 있으니 우선 내가 들어가고, 내가 중간에 신호를 주면 들어와 줬으면 하네. 어떤가?”

 

“네....”

 

하르페이아가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답하자 아스널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자신의 가슴께까지 밖에 오지 않는 그녀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가늠하지 못한 아스널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하르페이아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불안하면 자신을 바로 부르라고 당부한 아스널은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갔다.

 

“칸, 몸 상태는 어떤가?”

 

“...돌아가.”

 

칸은 아스널이 있는 곳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를 문전박대했다. 침대를 비스듬하게 세우고 누운 칸에게 다가간 아스널은 쪽지를 들어 보여주었다.

 

“현재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리한 종이라네. 이걸 읽고 같이 논의하고 싶군.”

 

“...더 말하고 싶지 않아. 돌아가.”

 

아스널이 뭐라 말해도 칸은 계속 거부의사를 드러냈다. 그러나 아스널은 물러서지 않고 더 깊숙이 수를 두었다.

 

“산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네. 리마토르를 위한 일이야.”

 

“....”

 

“나도 아직 이 쪽지를 보지 않았다네. 그래서 지금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지. 하지만 확실한 점은, 여론이 어떻든 리마토르의 명예는 회복해주어야지 않겠나.”

 

“....”

 

칸이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도 아스널의 말은 이어졌다. 여전히 일방적인 주장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걸 알아챈 아스널은 말투까지 바꿔가며 칸의 감정에 더 깊이 손을 댔다.

 

“칸, 리마토르에게 불륜남의 오명을 남기고 싶지는 않잖아. 너도 그게 사실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그래.”

 

“몰라, 그깟 바람둥이 따위.”

 

칸은 아스널의 말을 세차게 거절했다. 매몰찬 거절이었지만 아스널은 칸이 심하게 갈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상대를 향한 특정 감정이나 생각이 강할수록 반동효과로 말미암은 부정도 큼을 떠올린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다음 수를 두었다.

 

“리마토르가 정말 하르페이아와 불륜을 저질렀을 거 같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이제 와서 내 알 바 아니야. 나만 사랑해준다고 했으면서... 하르페이아랑 양다리 걸치는 쓰레기를 내가 신경 쓸 이유는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이제 리마토르가 죽었으니 영원히 불륜남의 딱지를 붙여도 되지? 두고두고 두 번째 인간을 언급할 때 구 인류와 다름없는 색마에 윤리 의식 따위는 결여된 인격 폐기물로 기억되어도 괜찮지?”

 

“시끄러워! 리마토르는 그렇지 않아!!”

 

아스널의 날선 목소리를 듣던 칸은 말하고 있는 아스널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질러 반박했다. 놀란 내면을 감추기 위해 포커페이스에 더욱 힘을 준 아스널은 비로소 칸이 솔직해졌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마토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위해서 손을 뻗는 상냥한 사람이잖아.”

 

“....알고 있어. 그래서... 그래서 더 아파... 내가 힘든 걸 알고 안아줬으면서, 왜 하르페이아한테도 그런 건데....”

 

속에 차오른 상념을 다 뱉어낸 칸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아스널은 그녀의 옆에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겨우 감정에 솔직해진 칸이 다시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잡아주기 위해, 아스널은 칸의 감정을 빠르게 분석했다. 

 

‘전반적으로 보이는 감정은 부정. 반동 효과로 나타난 부정이 덮으려는 원본 감정이 리마토르를 향한 호감임을 고려하면 현재 칸은 심한 혼란상태라고 볼 수 있어. 정분을 나눌 정도로 깊은 사랑을 가진 리마토르가 자신이 아닌 하르페이아에게 같은 사랑을 주었다는 점에서 리마토르가 보여준 사랑의 본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어야만 해.

 

리마토르는 칸의 감정을 배신하지 않았고, 오로지 인격적인 이유로 하르페이아를 달래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생각을 마친 아스널은 무슨 말을 꺼낼지 방향을 잡았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칸과 자신 모두가 알고 있는 리마토르의 기억을 꺼냈다.

 

“칸, 리마토르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고 있지? 리제를 위해 강의를 해달라는 아쿠아의 부탁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들어줬잖아. 그런 감정이 네게 준 감정과 같을까?”

 

“...그건 아니지.”

 

“맞아. LRL과 에밀리에게 한문을 가르쳐줄 때 기억나? 에밀리가 리마토르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까지 했지만 그때는 모두가 웃고 넘어갔었지. 그 이유가 뭐겠어?”

 

“에밀리가 말한 사랑과 내가 말하는 사랑이 달라서... 그랬겠지.”

 

칸의 생각을 유도할 미끼를 칸이 잡는데 성공하자 아스널은 바로 낚싯대를 감았다. 리마토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능숙한 화술을 선보였다.

 

“그렇지. 에밀리가 말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보면 후견인에 대한 안정감으로 보는 게 적확해. 비유하자면 부성애에 가까운 거지. 이처럼 같은 ‘사랑’의 간판을 달고 있어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에로스와 거리가 먼 사랑도 많아. 

 

하르페이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하르페이아가 말한 사랑을 보면 주로 ‘인정’에 가까워. 다시 말해, 하르페이아는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걸 리마토르와의 감정 관계에서 추구했다고 볼 수 있지. 그걸 에로스로 잘못 받아들이고 사랑이란 제목을 붙였을 수 있고, 리마토르는 갈팡질팡하는 하르페이아를 잡아주려고 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리마토르가 어제 헤겔까지 들고 와서 사랑을 증명하려고 할 이유가 없잖아.”

 

아스널은 칸의 우려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두 사람에게 사랑을 주면서 어느 쪽에게도 진심이 아니었던 바람둥이를, 한 사람만 바라보면서 다른 이에게는 인격적인 베풂을 나누길 멈추지 않은 인격자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자 칸은 점차 생각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스널의 말을 듣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칸은 열린 틈 사이로 질문을 던졌다.

 

“....아스널, 대답해줘.”

 

“뭘?”

 

“리마토르가.... 정말 나만 사랑했던 거야.....?”

 

아스널은 최후의 확인을 받고 싶어 자신에게 열쇠를 쥐어준 칸에게 다시 열쇠를 쥐어주었다. 말을 물가에 데려다주어도 물을 마시는 건 결국 말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 다만, 그녀는 애타하는 칸이 물에 입을 적실 수 있도록 한가득 물을 떠서 부어주었다.

 

“당연하지.”

 

한 마디. 흐름을 막고 있던 마지막 돌부리까지 치우자 막혀있던 물이 세차게 흘렀다. 그동안 믿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를 매정히 대한 자신이 보였고, 그 사랑의 끝에 서있던 리마토르는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를 내친 자신을 보며 칸은 오열했다. 자학과 절망이 섞인 울음소리가 듣는 이의 심경을 뒤흔들었다.

 

“...읽어보게나.”

 

아스널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리마토르의 죽음을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오는 이가 발견하기 쉽게 가지런히 놓여있던 그의 유서였다. 고이 접힌 마지막 편지의 수신인은 칸이었다. 칸은 떨림이 가시지 않는 손으로 종이를 폈다.

 

‘칸에게

 

이 편지를 읽을 때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죠. 칸을 혼자 두는 결정을 내려서 정말로, 많이 미안해요.

 

오르카호에 처음 승선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매우 힘들었어요. 제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사령관님을 포함해 모든 분들이 저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봤으니까요. 그런 곳에서 제가 무해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어요. 그러면서 하루하루 지쳐갔죠. 항상 제가 안전한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해 행동 하나, 발언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어야 했으니까요.

 

그랬던 제가 칸 앞에서는 항상 편하게 있을 수 있었어요. 칸을 만난 후로 참 행복했어요. 기쁠 때는 칸에게 가고 싶었고, 힘들 때는 칸을 보고 싶었고, 쓸쓸할 때는 칸의 곁에 있고 싶었어요. 사랑의 어원을 들어봤나요? 항상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생각할 사(思)에 측량할 량(量)자를 써서 사랑이라고 했대요. 제게는 칸이 그랬어요. 칸을 생각하는 제 마음을 잰다면 큰 단위를 세는 수사(數詞)를 새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크겠죠. 그래서 언제나, 항상 칸만을 사랑했답니다. 이토록 따뜻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제게는 과분한 삶이었겠죠. 동면 전에도 그랬고, 후에도 평생 닿지 못할 인연을 제게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칸에게 해준 게 하나도 없네요. 역으로 칸에게 불안과 의심만 잔뜩 안겨줘서 정말 미안해요. 믿지 않겠지만, 칸을 향한 제 사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답니다. 하르페이아와의 일을 들어 반박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건 하르페이아의 불안을 잡아주기 위해 격려를 했을 뿐이고, 하르페이아의 독단에 의한 행동이었어요. 

 

제 사랑의 위치가 칸에게 향해 있음을 더 확실히 드러냈으면 그런 일이 안 벌어졌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하기는 늦었죠. 그래서 칸에게 더 미안해요. 저 때문에 상처를 더 안고 가는 것 같아서요.

 

믿을 수 없는 불안이 제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을 통해 확신으로 바뀌기를 간절히 바래요. 부디 제 마음을 알아준 뒤에는 꼭 저를 잊고, 새로운 행복과 사랑을 찾아 오랫동안 누리길 바라요. 제가 많이 사랑했음을 알아주고, 꼭 잊어주세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죽음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변치 않는 마음. 한 사람의 목숨으로 쓰인 증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칸은 종이를 떨어뜨렸다. 사랑했기에 잊혀지기를 바란 그의 마지막 선택을 두고 칸은 비탄을 그치지 못했다. 푸르게 타오른 리마토르의 혼불이 그녀를 활활 태웠다. 잿더미가 되고도 멈추지 않는 불길은 칸이 스러지기 전까지 그녀를 붙잡아둘 터였다. 

 

아스널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영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칸이 울부짖는 모습을 보며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칸의 울음을 단순히 슬픔이나 오열과 같은 단어로 함축할 수 없었다. 아스널은 밖에 서 있던 하르페이아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끼리 상처를 잡아주는 선택지가 리마토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이들이 배운 그의 철학이었다.

 

 

비스트 헌터가 건넨 종이를 편 아스널은 그윽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주인님, 반동분자를 전부 섬멸하셔야 해요.”

 

“아니, 리리스. 어쩌면 이게 옳을지도 모르겠어.”

 

사령관은 자신의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탄원서를 보며 말했다. 꼬박 하루를 걸려 다 읽은 탄원서의 수가 수백에 달했음에도, 모든 갈래가 가리키는 방향은 리마토르의 복권(復權)으로 동일했다.

 

“리마토르는 주인님께 반기를 들었어요. 반란 수괴가 자결한 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추종세력이 많이 남아있으면 오르카호의 안보에 큰 위험이 될 수밖에 없어요.”

 

“생각해보면, 내가 지나친 예단을 하면서 시작된 일이었어. 리마토르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고 증명하는 건 닥터가 쓴 보고서 한 장뿐이었지. 

 

모든 존재는 변화하기 마련이야. 인간도 그렇고, 바이오로이드도 그렇지. 그런데 난 변화의 가능성은 하나도 보지 않은 채 리마토르가 여전히 구 인류와 같은 부류라고 단정 지었어. 오르카호에서 보여준 리마토르의 모습은 도덕성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던 구 인류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는데 말이야.

 

내 억측이 무고한 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데... 다행히 오르카호에는 내가 옳지 않음을 말하는 이가 이렇게나 많이 있어. 유이한 인간이라는 틀을 유일한 인간으로 고치는 죄악을 범한 나라는 죄인을 심판대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깨어있는 거야.”

 

“주인님. 오르카호의 그 누구도 주인님을 처벌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 않아, 리리스. 나도 인간이고 불완전해. 그래서 이번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그런 잘못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인간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면 새로 만들 세상이 멸망 전과 다를 게 없어지잖아.

 

내가 이 일에 책임을 져야만 해. 그러니 이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사령관은 리마토르의 복권을 최종 결재했다. 탈론 페더의 보도 이후 리마토르에게 동정 여론이 크게 일면서 리마토르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증언이 여럿 나온 게 재평가 분위기에 불씨를 지폈다. 특히 칸을 향한 일편단심을 담은 유서의 공개가 불륜 프레임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되었었다. 순식간에 뒤집어진 여론을 보며 사령관은 선동당하는 무비판적인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소수의 탄원서에서 비판적 사고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금이나마 마음의 불편을 덜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사죄를 구하기도 부족하지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리마토르 교수.”

 

사령관이 저항군장(葬)으로 주재한 장례식에서 공개 사과를 함으로써 긴 스캔들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무고한 희생을 치른 오르카호와 상처를 안고 갈 이들은 아무도 위로받지 못했다.

 







 

#변신 (병맛)

 

 

“리마토르,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칸과 같이 소파에 누워 주말을 보내던 리마토르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칸은 지휘용 패드를 들어 그에게 새로 나온 탈론 허브 뉴스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합류한 클로버 에이스라는 바이오로이드는 변신 기능을 갖춘 덴세츠 엔터테인먼트 출신이래. 닥터가 이 변신 기능을 차용해서 다른 바이오로이드도 변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대.”

 

 

“진짜요? 닥터의 기술력은 봐도봐도 신기하네요.”

 

 

자신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가 감탄하자 칸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슈크림을 발라주며 장난치던 눈빛이 어른거리자 순간 불안감을 느낀 리마토르는 커피를 타오겠다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칸은 그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 한 번 닥터한테 가볼 생각 없어? 비전투원이라고는 해도 포티아나 소완도 상당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는데 당신도 변신하게 되면 제 몸 정도는 챙길 수 있게 되잖아. 한 번 생각해봐.”

 


“음... 확실히 일리가 있네요. 그런데 칸, 정말 목적이 그거 하나뿐인가요?”

 

 

“그것도 그거지만 왠지 재밌어 보여서.”

 

리마토르가 그녀의 속을 슬쩍 떠보자 칸은 씩 웃으면서 답했다. 자신과 함께 지내면서 진중한 모습보다 장난스러운 모습이 부쩍 늘어난 그녀의 변화에 리마토르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말 나온 김에 바로 가보죠.”

 


리마토르가 수락하자 칸은 그의 손을 붙잡고 닥터의 공방으로 향했다. 들어와도 괜찮다는 닥터의 수락이 있자 방에 들어간 둘은 닥터에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닥터, 변신이 가능한 도구를 만들었다면서요?”

 


“어. 그렇지만 아직 프로토 타입이야. 실전에 투입하려면 조금 더 손을 봐야 해.”


 

“상관없어. 원래 프로토 타입이 본 모습보다 더 인상적으로 나오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니까.”


 

연구실에 앉아있던 클로버 에이스가 닥터의 말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리마토르와 칸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자신의 변신 기능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시작했다.

 

 

“내 드라이버는 클로버 계열의 언데드를 봉인한 라우즈 카드를 사용해서 라이더 시스템을 불러오는 거야. 이 힘을 통해 기계제국 쇼커와 맞서 싸우는 거지.”


 

“...칸, 어째 설정이 많이 바뀐 것 같은데요?”

 


“그런갑다 해. 작품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야.”


 

아무렇지도 않게 제4의 벽을 깨버리는 발언을 하는 칸과 제멋대로 설정을 뜯어고치는 클로버 에이스를 보며 리마토르는 자신이 잘못된 건가 고민했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닥터는 손바닥을 짝짝 두드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자, 주목해줘. 프로토 타입이라도 상관없다면 리마토르 오빠가 이 물건을 쓰는 건 반대하지 않아. 중요한 건 오빠의 동의지.”

 

 

“뭐... 안전하죠?”

 


“그럼. 안전성은 안심해도 돼. 한 10% 정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닥터, 작은 글자 뭐에요. 이거 괜찮은 거에요?”


 

“좋아! 동의했으니까 변신이다!”

 


“아니 작은 글자로 말한 거 뭐냐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리마토르의 의견은 배제된 채 변신 준비가 이루어졌다. 닥터는 두 개의 홀더가 달린 빨간 드라이버를 리마토르의 허리에 채우며 말했다.

 


“내가 만든 더블 드라이버는 클로버 에이스 언니의 드라이버를 한층 더 개량한 물건이야. 기존의 라이더 시스템은 한 사람의 무력과 판단력에 의존해야했지만, 더블 드라이버는 하나의 육체를 두 사람의 의식이 공유하는 형태라 지력과 무력 모두 2배가 되는 거지.”

 


리마토르가 어색한 허리의 감각에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리자 칸의 허리에도 드라이버가 채워졌다. 닥터는 변신 준비가 끝났다며 둘에게 USB를 닮은 물건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닥터, 이건 뭐지?”

 


“드라이버로 두 사람의 의식은 연결되었어. 남은 건 육체 강화뿐. 지구의 기억을 추출해서 만든 가이아 메모리가 칸 언니와 리마토르 오빠에게 힘을 줄 거야. 육체로는 칸 언니가 더 강하니 칸 언니가 전투 방식을 결정하고, 지력으로는 리마토르 오빠가 더 앞서니 전투에 사용할 속성을 결정하면 돼. 그럼 변신해보지 그래?”

 


눈을 빛내면서 흥미를 보이는 칸과 달리, 리마토르는 이게 과연 옳은 결정인가를 두고 영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칸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해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가이아 메모리에 손을 올렸다.

 


「Cyclone!」

 

 

「Joker!」



 

"변신!"

 


리마토르와 칸이 각각 자신의 드라이버에 가이아 메모리를 꽂자 리마토르의 메모리가 칸 쪽으로 전송되었다. 눈앞에서 순간이동이 벌어지는 광경에 리마토르가 당황한 사이 칸은 드라이버를 좌우로 펼쳤다.


 

「Cyclone! Joker!」

 


 

“어?! 잠ㅅ-”

 

 

질풍이 불어 실험실의 기자재들을 흩날리자 리마토르의 몸에서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뭔가 잘못되었다 싶어 급히 실험 중지를 요청하려했지만 리마토르의 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 사이 칸은 판이하게 바뀐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이게 변신인가...”


 

“닥터, 의식이 이렇게 사라지는데 안전하다니... 어?!”

 

 

녹색과 흑색이 가운데 은빛선을 기준으로 반반으로 나뉜 칸의 새로운 몸이 공간을 존재감으로 가득 채웠다. 검은 쪽에서 칸의 혼잣말이, 녹색인 쪽에서 눈이 빛나며 리마토르의 목소리가 나오자 닥터는 쾌재를 불렀다.

 

 

“실험 성공이다!”

 

 

“잠깐, 닥터. 왜 내 몸이 보이는 거죠? 칸?”

 


“걱정할 거 없어. 비로소 둘이서 하나인 학자가 된 거니까.”


 

“그게 뭔 소리에요?!”

 


당황한 한 사람과 만족스러워하는 세 사람이 모르게 천장에 숨어있는 하르페이아와 탈론 페더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아니네...’

 

 

‘휴, 센도 에루의 변신이 아니네.’

 

 

 

 자신이 생각하는 변신이 아니어서 괜히 앞에 못 나서고 있는 두 사람의 아쉬움과 안도가 교차하는 와중에 아래쪽의 시끌벅적한 소리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클로버 에이스 처음 나왔을 때 블레이드랑 더블 다시보고 구상한 단편. 막상 플룻을 짜고 보니 재미가 없어서 그대로 폐기.

 

 


 

 

 

#분명 바둑물이었는데... (병맛+스포츠)

 

 

 

“하핫, 교수님. 이번 판도 제가 먹겠슴다!”

 


“이런...”

 

 


바둑알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리마토르는 활로를 뚫기 위해 생각을 모았다. 재미 삼아서 브라우니 하나한테 바둑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상상 이상의 재능을 갖고 있어 며칠 만에 그를 압도하는 천재 기사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처음 브라우니에게 패배한 날 그녀가 ‘교수님 바둑은 힘 줄 깜냥도 안됨다!’라고 매우 강력한 도발을 걸었기에 약이 바짝 오른 그는 그에 맞서 참치캔을 걸고 내기바둑을 하고 있었으나 9전 8패에 곧 9패가 될 형국이었다.

 


‘씁, 이거 도무지 둘 곳이 안 보이는데.’

 

 

판을 반도 채우지 않았건만 자신의 대마란 대마는 족족 끊어놓고 확실한 끝내기로 흩어진 집들을 연결하지 못하게 약을 쳐놓은 브라우니의 실력에 리마토르는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가 바둑돌 두 개를 판 위에 올리자 브라우니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참치캔을 쓸어 담았다. 리마토르는 착잡한 속을 커피로 달래며 다음 판을 진행할지 멈출지를 재단했다. 벌써 200개가 넘는 참치캔을 뜯겨 몇 판만 더 두면 그 학기 강의를 열고도 적자가 날 판국이었다. 떠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게 1류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탈탈 털렸지만 그래도 1류로 남는 편이 2류 3류로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손을 털었다.



“이만 일어나죠. 많이도 잃었군요.”

 


“교수님, 다음에 올 때는 현현기경 더 읽고 오십쇼. 월간 바둑이라도 읽으시겠슴까?”

 

 

“흠흠, 복기는 제대로 할 테니 걱정 마시길.”


 

거금을 쥔 기쁨이 채 안 가신 브라우니는 트래쉬 토크를 멈추지 않았다. 패배의 아픔을 괜히 더 끌고 가기 싫었던 리마토르는 분노를 삭이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 순간, 브라우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의 귀에 박혔다.


 

“교수님은 바둑 실력이 정말 허접하심다!”


 

그 말은 정확히 리마토르의 이성을 찔렀다. 다른 욕은 몰라도 게임 못한다는 욕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남성의 본능이 그에게도 내재되어있었기에 그는 끓어오르는 감정이 이성을 증발시키는 걸 느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 가시는 거 아니었음까?”

 


 

“한 판. 찐막으로 한 판만 더.”



 

그에게서 투지가 느껴지자 브라우니는 오늘 일확천금을 거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반색했다. 그의 도전을 받은 브라우니는 참치 50개를 꺼내며 말했다.

 


 

“뭐, 이기시면 저녁 든든하게 드실 값은 쳐드리겠슴다.”


 

“아니. 올인입니다.”

 

 

강자의 여유를 보여주는 브라우니를 압도하겠다는 듯이 리마토르가 꺼낸 남은 참치캔 100개는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날 둔 판에서 가장 많은 판돈이 걸리자 브라우니도 흥이 올랐다. 그녀는 참치캔 대신 들고 온 가방을 통째로 걸며 말했다.

 

 

“그리 나오시면 저도 올인임다. 오늘 덕분에 두둑히 따 가겠슴다.”


 

“해보세요. 돌아갈 차비는 남겨드릴게요.”


 

팽팽한 기싸움은 어느 쪽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조금도 밀릴 틈 없이 빠른 속도로 바둑을 두기 위해 둘은 1분 초읽기 3번만 주어지는 초속기 대국을 선택했다. 백돌을 쥔 리마토르는 브라우니의 흑돌이 화점에 놓이는 순간 거침없이 포석을 시작했다.



돌은 쉴 새 없이 놓아졌다. 1분이 채 지나기 전 모든 수를 생각하고 돌을 놓아야 기회를 보존할 수 있었기에 둘은 상대방이 놓기 무섭게 바로 자신의 돌을 놓았다. 작은 연구실을 채운 돌 놓는 소리와 보이지 않는 뜨거운 기운이 방 안의 리마토르와 브라우니를 짓누르고 있었다.


 

‘몸이 분해될 거 같아. 조금만 더 버텨.’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를 닦으며 리마토르는 속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프로 기사라면 은퇴할 시기인 30대 초반의 그가 한창 기량을 떨칠 신체나이 17세인 브라우니를 상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을 다 끌어와야 했기에 리마토르는 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제자 이창호 9단을 상대할 때 와기(臥棋)를 둔 조훈현 9단이 이런 심정이었나 느끼며 그는 다음 수를 놓았다.


 

“흐흐, 아무래도 이걸로 끝난 것 같슴다!”


 

 

탁.

 

 

 

브라우니의 착수에 리마토르는 판을 내려다보았다. 중원에서 집을 짓던 브라우니의 세력을 피해 묵적지수를 고수하며 약간 왼쪽에 치우쳐진 곳에 세력을 만들었는데, 빙 돌아서 뒤를 치는 브라우니의 공격을 예상하고 방어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본진이 브라우니 세력한테 먹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뿔싸!’


 

대마가 끊겼다.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허리를 꿈틀거리던 말이 허리를 펴기도 전에 무너진 모습을 보며 그의 뇌리에 위기십결(圍棋十訣) 3번째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공피고아(攻彼顧我). 먼저 내 발밑부터 살펴야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어. 이제 어떡하지?’


 

머리를 쥐어싸매며 바둑판을 봤지만 대마가 살아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초읽기 기회가 한 번 날아가고 새로 1분이 시작되자 그는 더욱 초조해져서 판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함에도 하늘은 답하지 않고 초읽기 기회가 또 날아갔다. 마지막 1분이 시작되자 그는 마음을 놓았다. 숫제 체념의 그것이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바둑은 포기하고 강의나 열심히 뛰어야지...’


 

마지막 초읽기가 20초 흐르자 브라우니는 이번에도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며 흑돌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리마토르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자 다시 한 번 트래쉬 토크를 구상했다.

 

 

“아~ 역시 교수님 실력은 여기까지인가 봄다. 교수님 바둑 개못두심다!”

 


‘!’

 


모든 걸 포기하려는 찰나 브라우니의 말이 그의 귀에 다시 한 번 꽂혔다. 자신을 자극하는 뜨거운 도발이 사라졌던 투지를 다시 이끌어냈다. 리마토르는 어금니를 깨물며 필사적으로 수를 찾았다. 사그라들었던 머리가 푸른 빛 불꽃으로 타오르며 다시 팽팽 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초읽기가 끝나기 4초 전, 그는 길을 보았다. 돌을 집어든 그는 하얀 머리에 안경을 쓴 안한수 감독의 모습으로 브라우니에게 물었다.


 

“브라우니. 저뿐인가요? 아직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리마토르는 돌을 내려놓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브라우니는 그가 마지막 허세를 떤다고 생각하며 대꾸조차 않고 다음 수를 놓았다. 초읽기 기회가 아직 3번이나 남은 자신과 이제 정말 궁지에 몰린 리마토르의 격차는 확연했다.


 

“이런 말 들어봤어요? 대마불사(大馬不死).


대마는 죽지 않아요. 어떻게든 살려내니까요.”

 


리마토르는 조용히 읊조리며 다음 수를 놓았다. 그의 입가에 엷게 드리운 미소를 보면서도 브라우니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착수하자마자 그가 둔 돌에 그녀는 기존의 생각을 철회해야했다.

 

 

“이건 말도 안됨다. 분명 확실히 끊었는데...”

 


“가장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경계해야하는 순간이에요.”

 

 

리마토르는 뒤집은 전세를 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가 찾은 활로로 돌을 이은지 세 번 만에 잘렸던 그의 대마가 부활했다. 그는 강철허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린하이펑 9단을 떠올리며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래도 안 봐드릴 검다!”

 


“그래요. 그래야 재밌죠!”

 


처음 계획한대로 차근차근 따라가 리마토르의 세력을 섬멸하는 게 수포로 돌아가자 브라우니는 즉각 계획을 바꿔 난전으로 들어갔다. 집 하나 하나를 두고 난타전을 벌이던 둘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치고받으면서도 상대방이 빈틈을 보이지 않는가 탐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유 넘치게 시작한 대국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로 둘러싸이자 브라우니도 집중력을 끌어 모아 리마토르를 상대해야만 했다. 생각과 생각이 충돌하는 광경 속 두 명의 기사는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길 멈추지 않았다.

 

 

먼저 흔들린 건 브라우니였다. 그녀가 돌 하나하나를 따먹은 패싸움을 벌이던 중 다른 돌을 잡으려고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자 리마토르는 놓치지 않고 기존의 세력을 휘어잡았다. 반전을 꾀하다가 역으로 먹혀버리는 실책을 저지르자 브라우니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말이 있죠. 초보는 돌 따먹기에 집중하고 고수는 판을 보는 데 집중한다. 고기를 더 잘 잡기 위해 어장을 옮긴 건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치했으면 안 됐죠.”

 

 

순식간에 10집이나 깎아먹는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자 브라우니는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했다. 브라우니의 심리를 읽은 리마토르는 훈수를 가장한 트래쉬 토크로 그녀를 더 흔들며 압박에 박차를 가했다. 점점 초조해진 브라우니는 실수를 만회하고자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초읽기 2번을 통째로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다. 시간으로도 세력으로도 유리했던 브라우니가 완전히 자신과 같은 급이 되자 리마토르는 서봉수 9단의 기풍을 떠올리며 돌을 내려놓았다.


 

‘처절할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고추장 바둑. 서 명인에게 배우고 갑니다.’


 

그는 브라우니가 했던 것처럼 난타전으로 상대를 끌고 갔다. 하지만 그 양상은 전혀 달랐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서 버티는 사람과 난타전을 벌이면 소모전으로 흘러가지만, 이미 상대방이 무너지기 시작한 상황에서 전력을 온존하고 있는 쪽이 걸어오는 난타전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한 총공격이었다. 

 

 

마침내 브라우니의 대마를 끊게 된 순간, 리마토르는 담담히 말했다.

 

 

“왼손은 거들 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전패로 끝나자 브라우니는 애통함에 부들부들 떨었다. 바둑돌 두 개를 올려 불계패를 선언한 그녀는 뒤로 드러누우며 리마토르에게 말했다.

 

 

“그건... 바둑물에서 나오는 대사가 아니란 말임다...”

 

 

이후 리마토르는 판돈을 챙겨 칸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은 같이 뭘 먹을까 고민하던 그는 ‘교수가 방에서 대마를 키운다’는 토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시티가드에게 체포되었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취미 중 하나가 바둑이라 바둑 역사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를 만들까 생각했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소재라서 폐기한 아이디어. 쓰다가 슬램 덩크 영화 나온다는 광고를 봤더니 갑자기 끝에 패러디를 넣고 싶어졌고, 바둑용어 대마(大馬)랑 마약 대마(大麻)랑 동음이의어인 걸 사용해 병맛 결말을 내려고 했는데 결국 이도 저도 안 돼서 아쉬운 단편.

 

 

 

#커플 젠가 (순애)

 

 

“이봐 교수, 이번 판은 진 거 같은데 포기하지 그래.”

 

“잠시만요. 생각해보면 이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워울프와 체스를 두던 리마토르는 입에 불을 안 붙인 담배를 물고 체스판을 째려봤다. 나이트를 한 번만 더 움직이면 체크메이트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동시에 조금이라도 계산을 잘못하면 비숍에게 체크메이트를 허용하도록 길을 뻥 뚫어주는 꼴이 되었기에 그는 머릿속으로 착실히 가능한 경우를 생각했다.

 

“샐러맨더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제가 승기를 쥘 수 있다고 보나요?”

 

“글쎄? 나야 이긴 쪽에게 술만 얻어먹으면 그만이라고.”

 

리마토르는 슬쩍 샐러맨더를 떠보려고 했으나, 샐러맨더는 능글맞은 미소로 그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이 찾은 최선의 수를 두었다.

 

“체크메이트. 이번 판은 제가 이기겠습니다.”

 

그가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 힘이 들어간 말투로 말하자 워울프는 입꼬리를 씨익 웃었다. 그녀는 룩을 움직여 나이트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막으며 손가락을 저었다.

 

“이렇게 하면 체크메이트는 철수해야지.”

 

“예상한 바입니다. 퀸을 움직이면 끝났죠.”

 

“오, 이건 묘수인데. 그런데 어쩌지? 내 나이트는 이미 퀸의 예측 범위에 있었다고.”

 

워울프가 구석에 가려두었던 퀸을 꺼내 리마토르의 퀸을 잡자 샐러맨더는 워울프의 승리가 확실해졌다면서 박수를 쳤다. 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판을 바라보던 리마토르는 탈론 페더를 보며 비디오 판정을 요청했다.

 

“탈론 페더 씨, 제 기억 상 워울프 씨의 퀸은 저 위치에 있지 않았단 말이죠. 비디오 한 번만 감아주세요.”

 

“에헤이, 왜 그래 교수? 두 번째 인간이 이렇게 쪼잔해서 되겠어?”

 

“제가 워울프 씨한테 참치 털린 게 한두 번이면 이런 말 안하죠. 탈론 페더 씨, 비디오 판정 가능하죠?”

 

워울프가 리마토르의 제안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그는 필경 워울프가 손장난을 썼다고 판단하며 탈론 페더에게 비디오 판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탈론 페더는 뭉그적거리면서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흐음~ 교수님, 맨입으로 그러시면 곤란하죠~”

 

“...내 이럴 줄 알았어. 원하는 게 뭐에요?”

 

“오늘 밤에는 칸 대장님과 뜨겁게 밤을 불태워주세요! 로리 칸 대장님도 추가해서 3P이면 더 좋고요! 과거와 현재의 자신이 교차하는 존재론 철학의 밤에서 새로운 존재를 잉태하는 영상을 제 캠코더에 담게 해주세요! 저까지 껴서 4P면 훌륭하기 그지없죠... 헤헷...”

 

“그냥 제가 졌다고 할게요. 워울프, 참치 5개 가져가세요.”

 

탈론 페더가 제안을 하면서 점점 눈이 맛이 가고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리자 리마토르는 깔끔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내기 전에 꺼내놨던 참치 5개를 워울프에게 민 그는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려서 풀었다. 퀵카멜이 그에게 파스를 발라줄까 묻자 리마토르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이걸로 6전 2승 4패야.”

 

스카라비아가 전자칠판에 승패를 기록하자 워울프의 승전란에 파란 선이 하나 더 그어졌다. 워울프는 그에게 아껴놨던 시바스 리갈을 꺼내 따라주면서 형식적인 위로를 건넸다.

 

“게임하다보면 질 수도 있지. 이거 한 잔 마시고 다 잊어버려.”

 

“혹시 이거 한 잔에 30참치 이러는 거 아니죠?” 

 

“와, 눈치가 빠르네.”

 

“전에 당한 수법인데 또 당하면 제가 바보죠. 이겼으니까 한 턱 내세요.”

 

리마토르는 워울프에게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고 선언하며 술잔에 입을 갖다 댔다. 입에 술이 닿자 혀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신맛에 그는 급히 혀를 뗐다.

 

“읍! 이거 레몬즙이잖아요!”

 

“꺄하하! 또 당했네! 이걸로 바보인증이야 ㅋㅋㅋㅋㅋㅋ”

 

“이런 망할...”

 

그가 낭패를 본 모습에 워울프와 샐러맨더는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무표정한 스카라비아조차도 입에 웃음을 머금고 상황을 바라보았고, 탈론 페더는 아예 이 광경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더 있으면 무슨 봉변을 추가로 당할지 모르겠군요. 이만 일어나렵니다.”

 

“에이, 이 정도로 가려고?”

 

샐러맨더가 그를 붙잡았으나 리마토르는 시계를 흘낏 보더니 어차피 강의가 잡혀서 가봐야 한다고 대꾸하고 방을 나갔다. 그가 호드의 숙소를 나가자마자 워울프는 탈론 페더에게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아니요, 다음 강의는 4시간 뒤에나 있는 야간 강의에요. 그냥 도망치신 거죠.”

 

“큭큭, 조금 더 골려먹을 수 있었는데 아깝네.”

 

“다들 적당히 하세요. 대장님이 보시면 화 내실지도 몰라요.”

 

사령관에게 불려갔던 케시크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으나 탈론 페더는 선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퀵카멜은 좀체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탈론 페더의 말을 받아쳤다.

 

“오르카호에서 선이란 선은 다 넘고 다니는 분이 그런 말을 하니 퍽이나 신뢰가 가네.”

 

“에이, 너무 나쁘게 보지 마세요. 이래봬도 전 칸 대장님의 사랑을 이뤄드리려는 큐피드거든요.”

 

“페더. 너 같은 큐피드가 있으면 전 세계가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을 거야.”

 

샐러맨더가 웃으면서 탈론 페더에게 면박을 주었으나 탈론 페더는 자신의 마음은 틀림없는 진심이라고 항변했다. 자신을 통 못 믿는 호드 대원들에게 증거를 보여줘야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젠가를 꺼냈다.

 

“제가 대장님의 사랑을 위해서 이런 것도 특별히 준비했다고요.”

 

“그냥 젠가 아니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젠가 블록을 하나 빼들어 본 케시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케시크의 반응을 본 다른 대원들이 뭐냐면서 다들 젠가 블록을 하나씩 들고 거기에 쓰인 글귀를 읽자 모두의 반응은 ‘역시 탈론 페더야’로 모아졌다.

 

“이게 바로 커플 젠가랍니다! 이거 하나 넣고 방문을 걸어 잠그면 두 분이서 절대 그냥 끝나지는 않을 거에요, 후후후...”

 

“참 페더답네. 이거 봐, 상대방 귓불 깨물어주기가 적혀있어.”

 

“이건 한 술 더 떠요. 30초 안에 상대방 흥분시키기...”

 

“상대방 손가락 빨아주기, 뒤에서 안아주기, 키스마크 2개 이상 남기기... 젠가 블록이 총 몇 개더라?”

 

“이건 30개. 일반적인 젠가와 달리 블록을 다시 위에 쌓지 않으니까 금방 끝나겠네.”

 

저마다 커플 젠가를 보면서 평가를 내놓자 탈론 페더는 다들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면서 운을 띄웠다. 그 말을 하는 상대가 오르카호 최고의 변태 후보에 오른 탈론 페더였기에 다들 대체 어떤 발상이 또 나올까 싶어 침을 꿀꺽 삼키고 이목을 집중했다. 탈론 페더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젠가 30개를 다 쓰거나, 중간에 블록을 무너뜨릴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뭐, 벌칙이 있겠지?”

 

“그렇죠! 그 자리에서 바로 섹스하는 거에요!”

 

그녀가 아예 눈동자에 하트까지 띄우고 벌칙이 이뤄지는 상황을 상상하자 퀵카멜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젠가 블록들을 모아 통에 넣었다. 상자를 든 그녀는 처음에 탈론 페더가 제시한 논제로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래서 이걸 교수님 방에 두고 오면 되는 거지?”

 

“그냥 대장한테 바로 주자. 뭐든 직선으로 돌파하는 게 우리 호드잖아.”

 

 

 

-> 칸과 리마토르의 관계가 한창 달달하던 59편-64편 쯤에 구상한 에피소드. 구상하고 초반부를 쓰면서 달달할 것 같은 느낌에 개인적으로도 많은 기대를 걸었는데, 막상 자료조사하면서 장면을 구체화하다보니 생각만큼 달달하지 않을 것 같아서 보류했어. 그러면서도 잘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서 만지작거리다가 끼워 넣을 타이밍을 놓쳐서 결국 초반부만 남게 되었어. 지금 봐도 아쉬운 에피소드.

 


 

#폐기한 초안과 스토리 변천사

 

 

 

원래 이 소설은 <어느 학자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총 30편짜리 중편 소설로 구상되었어. 기억을 잃은 철학자가 오르카호에서 강의를 한다는 전체적인 틀만 빼면 세부적인 내용은 아주 달랐지. 리마토르의 과거도 평범한 대학원생이었다가 동면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었던 걸로 가벼웠고, 히로인은 아예 등장할 예정이 없었어. 한 명의 철학자가 오르카호에 적응하며 새로운 시대의 인간을 연구한다는 담백한 이야기였지. 사령관과의 대립이 있기는 했지만 초반에 나오는 의심 수준에서 그칠 예정이었기에 전체적으로는 갈등 구조도 평이했어.

 

 

 

그러다가 중간에 이 소설을 50편으로 줄거리를 갈아엎었어. 이때부터 리마토르의 과거가 암울해졌어. 철학자로 처음 블랙리버에 채용되어 연구를 진행하며 라포를 형성한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을 지키려다가 죽은 PTSD와 동면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었다는 내용으로 전보다 무게가 더해졌지. 이를 보정하기 위해 분위기 반전 카드로 히로인을 등장시킬 예정이었어. 그렇다고는 해도 히로인과 리마토르의 관계에 비중이 할애되기보다, 리마토르가 보여주는 철학자로서의 모습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었기에 전체적으로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더 그리려고 했어. <레옹>을 떠올리면 무슨 느낌인지 올 거야. 히로인으로는 15편부터 등장한 에밀리가 들어갈 예정이었어. 중간에 기억을 되찾은 리마토르가 칩거에 들어갔을 때 마음의 문을 두드려주는 따뜻한 치유의 사랑을 그리려고 했었지. 사령관과의 갈등은 초반과 후반에 걸쳐서 총 2번 등장할 예정이었어.

 

 

 

여기서 스토리가 한 번 더 갈아엎어져. <분노의 늑대 송곳니> 스토리를 쫙 보고 나니까 칸이 가진 상처와 강박에 바로 눈길이 가더라. 그래서 히로인은 에밀리에서 칸이 되었고, 적당히 무거웠던 리마토르의 과거도 마음을 준 상대가 2번이나 자신 때문에 죽는 걸 보고 구 인류의 악의까지 보다가 타락까지 한 철학자로 더 어두워졌어. 그렇지만 에밀리가 갖고 있던 '치유의 사랑'이라는 플룻은 유지하고자 했어. 스토리에 맞추어 칸이 가진 상처를 리마토르가 치유해주고, 리마토르의 상처를 칸이 안아주는 상생적인 사랑으로 조금 비틀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랑을 통해 칸과 리마토르도 구원받는 이야기를 쓰고자 했어. 지금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지만 전체 흐름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이런 플룻을 완성하고자 칸의 캐릭터성을 분석하다보니까,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장성 계급 바이오로이드가 사령관 기준으로 과거 행적도 명확히 안 밝혀진 외부인에게 넘어가는 걸 사령관이 방치하는 게 개연성이 부족하더라. 그래서 사령관과의 갈등을 초반, 중반, 후반에 전부 배치해서 리마토르와 맞붙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어. 이 과정에서 사령관이 악인으로 묘사하는 걸 경계하고자 선 vs 선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는데, 에피소드 두어 개만 넣으면 될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스토리 전반을 고쳐야하는 일이었어. 반동인물이지만 악인이 아니게 묘사하는 작가들이 대단하더라.

 

 

 

그렇게 70편 정도에서 스토리를 끝내려고 했으나, 이 소설 스토리를 구상하며 지도교수님과 가까이 지내는 다른 교수님들의 조언을 구한 결과 이대로 끝내면 리마토르가 연구하는 인간과 세계가 맥거핀으로 끝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처음에 예고한 것보다는 굉장히 맥빠지는 결론으로 날 것 같다고 판단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스토리를 더 연장하다보니 리마토르는 아직 더 고통 받아야 하고, 파국이 절정에 이르러야 리마토르의 연구가 빛을 본다는 결론이 나오더라. 이런 사유로 이야기를 더 구상하게 되어서 소설이 80편 이상 연장될 것 같아. 지금 상황에서 보면 1부의 대단원이 끝나가는 중이고, 2부는 막을 올리기 전이랄까. 분량 축소는 고사하고 전체 소설이 심하면 200편에 육박하는 대하소설이 될 지경이니 이제 끝까지 갈 수 있을지 확신보다 의문만 남네. 한참 올라서 산 정상에 오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직도 초반인 기분이야.

 

 

 

 

 

 

 

그 외 단발성 아이디어 단계에서 폐기한 것들

 


-귀신 소동이 벌어져서 굿 하나 하기로 했는데, 그걸 구타하는 걸로 알아들은 브라우니가 귀신을 물리적으로 퇴마하는 단편

 

-닥터의 성장약을 잘못 마시고 키가 197이 된 LRL의 일상

 

-닥터 '티타니아' 프로스트

 

-리리스로 <남산의 부장들> 패러디

 

-엘라를 둘러싼 샬롯 v 하르페이아의 친모 분쟁

 

-수많은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령관이 부모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패러디

 

-라비아타와 사령관의 드라마 <도깨비> 패러디

 

 

다 쓰고 보니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글들이네. 폐기한 아이디어들을 돌아볼 때는 괜찮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역시 이렇게 쓰고 보니 왜 폐기를 결정했는지 납득이 가는 글이라 괜히 꺼내왔나 싶기도 하네. 본편은 보기에 더 만족스러운 글로 뽑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다들 건강과 행복 모두 잡는 신년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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