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각자의 싸움이 있고, 그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 저마다의 삶을 이어간다. 여기, 특별히 힘든 싸움을 등에 이고 있는 이가 있다. 그의 싸움은 범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겠지. 누구도 시키지 않았으며, 그가 바란 싸움도 아니었지만, 그 스스로가 그를 밀어 넣었다. 그는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사람이다. 고통스러운 채찍은 공기를 찢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그리고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양 그의 등을 강하게 후린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주변에는 도움의 손길이 가득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들은 그에게 있어 마음의 안식처이자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작은 불씨, 희망을 불태우는 좋은 연료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면 좋겠지만, 그는 이루지 못하였다. 몇몇 이들에게 이미 그는 숭배의 대상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대등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존재를 원했고, 거기에 부합하는 이는 극소수만이 존재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죠?”


 “바닐라 생각.”


 “태연하게도 말씀하시는군요.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시다면 쌓인 업무부터 처리하시죠.”


 “알겠어, 고마워. 바닐라.”


 “뭐가 고맙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냥, 고맙다고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뇌에 야한 거와 일 외에 들어있긴 했군요. 놀랐습니다.”


 익숙한 바닐라의 독설을 들어가며 사령관은 쌓일 대로 쌓인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보고서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러다 보니, 사령관이 올린 제안이 여러 지휘관의 도장이 찍힌 채 보고서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그 내용을 사령관은 나지막이 읊었다.


 “전선에 사령관이 나서서 사기 증진을 꾀한다...”


 “뭐라고요?”


 “응? 전선에 사령관이 나서는 작전이라고 했어.”


 “...전 반대입니다.”


 “별일이네. 네가 반대를 하다니 말이야.”


 “야외의 환경은 변수가 많은 법입니다. 사령관님이 부끄러운 꼴을 당하기라도 하시면 부관인 제 면목이 없어집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말이야. 내가 얼굴을 비치고, 잠깐 말 몇마디 하는 걸로 사기가 증진되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제가 막더라도 하실 거죠?”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할 수 있을 거야.”


 “한낱 부관인 제가 어떻게 막을까요. 적어도 말실수는 하지않게 연습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을 내리고, 며칠간 바닐라와 함께 연설용 대사를 다듬고, 모두의 앞에 서는 연습을 했다. 모든 게 순탄하게만 흘러갔고, 대대적인 철충 소모 작전중, 사령관은 오르카호에서 벗어나 작전지역까지 갔다. 그곳에는 공병들이 짬을 내서 만든 연설용 단상이 있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꽤 높은 위치에 있었다. 바닐라는 언제나처럼 사령관의 한 발짝 뒤에서, 그의 등을 살짝 밀어주며 웃는 얼굴로 격려해줬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인님.”


 사령관은 바닐라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에 연설용 단상에 섰다.


 “...모두들, 정말로 고맙다...”


 가벼운 감사의 인사로 시작한 연설은 약 3분 내외의 짧은 시간으로 끝이 났고, 사령관이 그대로 단상을 내려가려는 찰나, 멀리서 큰 총성이 들리는 듯했고, 그는 곧이어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그는 익숙한 천장을 봤다. 가끔 철야로 쓰러질 때 신세를 지던 수복실의 천장이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그곳에는 녹색 머리의 바이오로이드, 바닐라가 침대에 몸을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 자신도 모르게 바닐라의 볼을 콕콕 찔렀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바닐라는 세 번쯤 찌르자 눈을 떴다. 그러고는 일어난 사령관을 보고는 못 믿긴다는 표정으로 눈을 몇 번 문지르더니, 그제야 꿈이 아닌 걸 알고는 그를 꼭 안아 줬다. 그 작은 몸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웠던 것이겠지. 사령관은 조용히 바닐라를 안아주려 했지만, 어딘가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


 “바닐라?”


 “...네, 주인님?”


 “잠깐 왼손 좀 보여줄래?”


 “안 됩니다.”


 “이건 명령이야.”


 평소라면 절대 명령권을 쓰지 않는 그지만, 갑자기 덮쳐오는 불안한 예감에 사리 분별없이 명령권을 썼다. 바닐라는 조금 꺼리는 표정으로 왼손을 사령관에게 내밀었다. 사령관은 곧바로 흰 장갑을 벗기고 맨손을 봤다. 왼손약지에 있어야 할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넌 다른 바닐라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녀는 그 반지를 무슨 일이 있어도 끼고 다닌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네 맞습니다. 전 사령관의 부관으로 있던 바닐라 기종이 아닌, 그녀의 기억을 가진 다른 바닐라입니다.”


 “뭐라고?”


 사령관의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닥터가 수복실로 뛰어 들어오더니 사령관의 품에 폭하고 뛰어들어 안겼다. 그녀의 얼굴은 다크서클과 퉁퉁 부어버린 눈,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사령관은 잠시 동안 그녀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킨 다음에 질문했다.


 “닥터, 물어볼 게 있어.”


 “응? 뭐야 오빠?”


 “그녀는 어디있어?”


 “... 좀 나아지면 얘기해줄게,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없을까?”


 “아니 지금 말해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래.”


 “알았어, 걱정하고 있는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후에, 데려다줄게. 전부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알겠어. 빨리 다녀올게.”


 사령관이 방을 나서고, 바닐라와 닥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령관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어린 바이오로이드 들이나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에게 자신은 괜찮다는 사실을 빠르게 전한 후에 닥터에게 돌아왔다.


 “닥터, 빨리 가자.”


 “...응 알았어 오빠. 말려도 갈 거지?”


 “...미안해.”


 “미안한 건 나지.”


 닥터는 사령관과 수복실 근처에 새롭게 증설한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무균실처럼 유리 벽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그 너머로 마치 잠을 자는 듯한 그녀가 보였다.


 “...이거 몰카야?”


 “뭐라고?”


 “이거 몰카지? 그렇지?”


 사령관은 떨리는 손으로 닥터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도 그럴게, 갑자기 저렇게 된다고? 그녀는 건강했단 말이야.”


 “오빠.”


 “빨리 주모자를 데려오라 그래, 지금이라면 용서해 줄 수 있다고도 전해주고.”


 “오빠.”


 “바닐라도 빨리 일어나라 그러고, 자는 척하기도 힘들 거 아니야?”


 “오빠!”


 “...몰카지?”


 “아니, 사실이야.”


 사령관은 혼이 나간 듯이 터덜터덜 걸어서 바닐라의 곁으로 갔다. 닥터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그의 맘도 모르는 얇고 투명한 유리가 야속하게도 둘을 갈라놓고 있었다. 문이 열린 후, 사령관을 곧잘 곁으로 가 그녀의 왼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듯이 잡았다. 언제나처럼 반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된거야?”


 “기억 안 나?”


 “모르겠어. 총성이 울리고, 정신을 잃었어.”


 “...단기 기억상실증이네.”


 “기억을 상실했다고?”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뇌에서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어. 그런 경우 일 거야.”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건 말이지...”


 그녀가 말해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스토커의 아종 같은 연결체가 나타난 것이다. 다행히 나타난 구역에 파견한 스쿼드는 화력 면으로는 부족한 면이 없어서 금방 연결체를 궁지에 몰았지만, 연결체는 재빠르게 도망치고는 그 커다란 총신을 허공으로 향하고 발사한 것이다. 스쿼드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연결체는 이미 빈사 상태여서 한 발에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발사된 총알이 문제였다. 그 총알은 연설이 끝나고 돌아가던 사령관의 급소를 정확히 노렸고, 그대로만 갔으면 관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바닐라만이 그 이변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사령관을 끌어당기며 서로의 위치를 바꿨다. 본디 사령관의 몸에 박혀야 했을 납탄은 바닐라의 가슴을 꿰뚫고 몸을 헤집어 놨다. 바닐라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사령관은 그 광경을 보고는 잠깐 멍하니 있었다.


 곧이어 쓰러진 바닐라의 뺨이라도 어루만지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다른 경호용 바이오로이드 들이 그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던 탓에 그녀의 곁에 가는 게 늦어졌다. 끝끝내 호위를 뿌리치고 바닐라에게 가자, 그녀는 평온한, 잠자는 듯한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사령관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고, 곧이어 거기에 일어난 바닐라가 사령관의 볼을 어루만지며 몇 마디 했고, 곧이어 그 손은 힘없는 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사령관의 뇌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대로 그 장소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렇구나, 내가 가자고 해서...”


 사령관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마치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듯, 얼음장같이 차가운 볼이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숙연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닥터,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있니?”


 “많이 낮아...”


 “얼마나?”


 “1% 미만의 확률이야. 심장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도 다 엉망진창이었어. 바이오로이드라 즉사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렇구나.”


 “아직... 제대로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는데.”


 “기대한다고 처음으로 말해줬는데.”


 사령관은 기대한다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낸다. 활짝 웃은 그 얼굴은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자신의 앞에서 그저, 잠들어 있다. 사령관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서야 고장이 난 수도꼭지처럼 그 눈에서 눈물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