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날이 밝자마자 엘븐과 이그니스가 찾아왔다. 어젯밤에 나만 노숙시키는 게(정확히는 좌우좌랑 드론도 같이였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며 오늘부턴 나도 엘븐네 일행과 같은 집 쓰며 같이 자도 된다고 했다. 어제 극구 반대하던 더치걸도 왠일인지 오늘 아침이 되니 마음이 바뀌었다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도로 지하실 안에 들어왔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내가 소파에 앉자 엘븐이 담요를 덮어주고 이그니스가 끓인 물을 컵에 담아줬다. 내가 감기라도 걸렸을까봐 걱정하는 건가. 지극정성이구만.


"인간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그니스가 그렇게 말하더니 내 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움켜쥐었다. 손에 힘을 줘서 구속구를 비틀거나 뜯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안했다. 오르카호에서 만든 작품이니 바이오로이드의 근력을 상정하고 튼튼하게 만든 건가.


"으음... 죄송합니다 인간님. 제 힘으로는 어떻게 안되네요..."


"그러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컵에 담긴 뜨거운 물을 후 후 불어서 식힌 뒤 살짝 홀짝였다.


"휴. 그러면... 이제 앞으로 어떡할 지 논의 좀 해보자."


"저흰 인간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이제부턴 인간님이 저희들의 리더니까요."


"뭐?"


이그니스가 냅다 꺼낸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리더? 내가? 이 그룹의?


"아직 명령권자 등록도 안했잖아?"


"그렇다 해도 당신은 인간님입니다. 저희는 인간님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바이오로이드고요. 당신이 살아남으셔야 인류를 재건하죠. 펙스의 회장이나 그 오르카 사령관이 아닌 당신이."


"어... 너무 저자세로 나오는 거 아냐?"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게 바이오로이드로서 각인된 본능같은 거라..."


"그럼 이제부터 인간한텐 존댓말로 말해야 해? ...요?"


엘븐이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런건 상관없으니까 그냥 편한 쪽으로 말해."


"헤헷, 그래? 알았어! 편하게 대할게!"


"...더치걸은? 반대하지 않아?"


"상관없어."


더치걸은 컵에 든 물을 쭉 들이키고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주인이 된 인간'님'. 우리한테 뭘 바래? 그 오르카의 인간한테 복수하는 거라도 도와줘?"


님 자를 강조하는 게 왠지 비꼬는 것 같았지만 뭐 넘어가고, 거기에 대답을 해주자면...


"복수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선 현실적으로 무리지. 당장 살아남기도 바쁜 마당인데. "


"그럼 앞으로도 생존활동을 계속한다는 거네! 아, 근데 여기서 계속 살거야? 여긴 다섯명이서 살기엔 조금 좁을지도 몰라서."


"이보게, 여섯일세."


"아니... 거기 드론 아저씨는 부피가 작아서 차지하는 공간이 얼마 되지도 않잖아. 까놓고 말해서 서랍에 넣어도 되는 크기인데."


"좁은 건 둘째치고, 여긴 철충의 공격에 취약해. 철충이 몰려와서 이 위에서 쿵쿵대면 지반 무너지고 우린 싹 다 매립될걸."


"걱정할게 뭐 있어? 우리가 여기서 몇 달을 살았는데 철충은 한 번도 못봤어."


"그 동안은 여기 인간이 없었지만 이젠 있으니까. 철충이 귀신같이 알아채서 쳐들어올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거처를 옮겨야 겠군요."


여기서 사는 걸 허락받자마자 집을 옮겨야하게 생기다니, 가구한 팔자구만.


"이그니스 언니, 그렇게 말해도 마땅히 갈 데가 없는 게 문제야."


더치걸이 말한 대로였다. 이제와서 남한 땅으로 유턴할 수도 없고. 전처럼 뭐라도 찾기를 빌면서 무작정 북상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려던 차에 엘븐이 말을 꺼냈다.


"잠깐만, 거기 있잖아! 기억나? 그 지하에 있던 튼튼해보이는 시설!"


"엘븐 언니, 거긴 못들어가는 곳이잖아."


엘븐과 더치걸이 뭔가 자기들만 아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 너희들, 무슨 말을 하는거야?"


"예전에 저희가 머물만한 곳을 찾아 떠돌던 중에 찾은 지하 시설입니다. 폐광에서 문을 찾았죠. 두꺼운 금속재질의 문으로 보아 멸망 전에 지어진 벙커 내지는 군용 시설로 추정됩니다만... 자세한 건 모릅니다."


"문을 뚫으려는 시도는 안해봤어?"


"억지로 뚫어서 이득을 본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꽁꽁 봉인된 시설이면 높은 확률로 경비 AGS 따위가 배치되어있어.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갔다간 순식간에 벌집이 된다고. 쓸 수 있는 전력이 한정된 상태인만큼 내 드릴도 전력을 온존해둬야 했고."


어제보단 말을 많이 하네. 그럼 내가 직접 물어봐도 대화가 제대로 진행될 것 같다.


"그 지하 시설이 숨겨진 폐광의 위치는 기억해? 거리는 어느정도야?"


"대강 기억하긴 해. 몇 시간 정도만 걸으면 되는데... 가보려고?"


"아직까지도 별 탈 없이 봉인돼있다면 그 안은 안전하다는 뜻이잖아? 가서 살펴보고 아무도 없으면 우리가 거기 가서 살자."


"만약 살 곳이 못된다면?"


"그럼 뭐... 대신 폐광에라도 눌러앉을까? 거긴 지붕은 있을 거 아냐?"


"..."


"그것도 싫다면 다같이 살만한 다른 데를 찾아서 떠나면 되지...?"


더치걸이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길래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할까요?"


"음...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 근처에 식량이나 물자 그런 건 남아있나?"


"아니, 이 일대는 진작에 싹쓸이했지. 안그래도 물자 수색 범위를 늘리려던 참이었어."


"그럼 지체할 이유가 없군.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떠날 채비 하는데 얼마나 걸려?"


"어, 지금? 그게... 시간이 좀 걸릴텐데, 괜찮겠어?"


"챙길 짐이 많아?"


"많다기보단... 무거운 게 문제지."


엘븐이 난색을 표하더니 벽장 문을 열고 그 안에 놓여져있는 두 대의 외골격 슈트를 보여줬다. 하나는 엘븐이 쓰는 초목 관리용 장비, 다른 하나는 이그니스가 쓰는 소각용 장비였다.


"있었구나, 저거. 저건 그냥 입고 움직이면 되는거 아냐?"


"저걸 지하실에서 지상으로 옮기기가 힘들거든. 우리가 저 슈트를 입으면 계단이 못버텨."


"사실... 처음에 이 집의 지하실을 발견했을 때 제가 소각장비를 입은채로 계단이 발을 디뎠다가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지금 쓰고있는 계단은 더치와 엘븐이 새로 만든 거에요."


"아..."


큰일났네, 이런 건 생각 못했는데. 저 유용한 장비들을 두고갈 수도 없고.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자 더치걸이 해답을 내놓았다.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지금부터 지상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땅굴을 뚫는 것. 여긴 지하1층밖에 안되니까 하루 넉넉히 잡고 땅 파면 돼. 다른 방법은 먼저 몸만 올라간 뒤 언니들의 장비는 줄로 묶어서 직접 끌어올리는 것."


"...두 번째 방법으로 하자."


"왜, 첫 번째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별로야?"


"방금 네 드릴의 전력이 한정돼있다고 했잖아. 가능하면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써야지, 나중에 정말로 그 드릴이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모르니까."


"흐음... 맞는 말이네. 좋아, 그렇게 하자."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되자 일이 척척 진행되기 시작했다. 엘븐 일행이 그동안 모아둔 식료품과 우리가 찾은 보존식을 모두 모아 배낭에 집어넣고, 지상으로 올라온 뒤 바닥문을 뜯어냈다. 지하에 남은 더치걸과 드론이 이그니스와 엘븐의 외골격 장비를 밧줄로 꽁꽁 묶어 고정시킨 뒤엔 더치걸이 밧줄을 잡고 올라왔고, 그 다음 다같이 줄다리기하듯이 밧줄을 쥐고 당겨서 장비 2개 다 꺼낼 수 있었다. 


엘븐과 이그니스가 각각 장비를 착용하자 게임 일러스트에 나왔던 그 익숙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완전히 어깨깡패가 됐네. 


그런 약간의 해프닝을 거치고 나서야 우린 그 정체불명의 시설이 숨겨져있다는 폐광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


"아직 멀었어...?"


"좀 닥치고 걸어, 인간."


거대한 드릴을 땅에 질질 끌며 걷고있는 더치걸이 지겹다는 듯이 대꾸했다. 평소라면 나도 여기서 입 다물었겠지만 지칠대로 지친 나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아니, 출발이 조금 늦은 걸 상정해도 저녁 즈음이면 도착한다고 했잖아... 벌써 밤이라고..."


기세좋게 출발했었으나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길을 헤메고 있었다. 엘븐의 말로는 이 일대가 전부 황무지라 이정표로 삼을만한 구조물이 없어서 길을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보게들, 저기 동굴이 보이는데 저기서 쉬었다가 가는 건 어떤가? 야생동물 같은 것만 없다면 말이지."


"동굴? 어디에?"


엘븐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응시하더니 이내 기운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야! 그 폐광! 도착했어!"


입구는 그냥 평범한 동굴같이 보였으나 안에 들어가자 목재 지지대로 덧댄 갱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LRL이 안대를 벗고 왼눈의 불빛을 키자 확 밝아졌다. 다만 LRL이 시선을 돌릴때마다 그녀의 눈동자를 따라 불빛이 비추는 곳이 휙휙 이동했기 때문에 더치걸이 따로 손전등을 꺼냈어야 했다.


"근데 좌우좌 네 눈에서 나오는 빛은 생체 에너지로 작동하는 거야? 그럼 빛을 오래 뿜을수록 배고파진다거나, 하는건가?"


"내 연비는 걱정할 필요 없으니 걷기나 해."


"아니,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지..."


그 숨겨진 시설의 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냥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니까 철문이 떡하니 길을 막고있더라.


"인간, 저리 비켜. 지금 구멍 뚫을테니까."


더치걸이 제 몸집만한 드릴을 번쩍 들어올리고선 정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나는 팔을 들어 더치걸의 앞을 가로막았다. 더치걸이 뭐하자는 거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길래 나는 차분히 내 생각을 읊었다.


"이미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아침에 들어가자. 자는 사이에 문이 달아나는 것도 아니니까."


"어, 여기서 자겠다고? 실내가 눈앞에 있는데?"


"여기도 안이야. 동굴 안."


"아니, 그치만... 어젯밤에 밖에서 재웠다고 삐진거야 혹시!? 야, 이그니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야영 준비를 하겠습니다. 엘븐 양, 장작을 모아와주세요."


"엑, 진짜로..."


딱히 텐트나 천막을 칠 필요없이 모포만 깔면 되다보니 야영 준비는 금방 끝났다. 환기 문제로 입구 근처에 모닥불을 피우고(이그니스의 화염방사기로 불 붙이나 했더니 평범하게 라이터를 썼다) 불 주변에 모여앉아 내일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정리하고 자시고 할 게 뭐있어? 문 부수고 들어가서 안이 괜찮아 보이면 그대로 눌러앉는다, 끝이잖아."


"아직까지 저렇게 봉인돼있다는 건 안쪽이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뜻일테고, 그럼 더치 네가 말했던 대로 경비 AGS나 방어 시스템이 남아있을 지도 몰라. 멸망 전에 지어진 수상한 비밀 시설 따위라면 특히나 더. 

정문으로 침입하는 것보단 우회해서 들어가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은데, 더치걸 네 굴착기술로 입구를 우회할 땅굴을 파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흠. 일리가 있네. 그렇게 할게. 언니들, 도와줘."


"쉬고 계세요 인간님. 길은 저희가 만들어놓을게요."


더치걸과 이그니스가 당장 일할 기세로 일어서자 엘븐이 동공지진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얼굴 표정만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니, 잠깐 기다려. 니들 지금 뭐하는 거야...?"


"내일 아침에 들어가려면 지금부터 작업 시작해야 돼."


"내일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하라는 뜻이었어 그건. 장비 내려놓고 잠이나 자."


내 말을 들은 더치걸이 놀란 눈빛으로 날 쳐다보다가 이그니스가 도로 자리에 앉자 그녀도 머뭇거리다가 앉았다. 그리고 엘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그니스는 그냥 태어나서 처음 본 인간에 봉사 정신이 철철 넘치는 모양이지만 더치걸은 오랜만에 인간을 봄으로서 멸망 전에 좆간 밑에서 일하면서 각인된 노예 근성이 발동된 듯 하다. 쟤들이 괜히 제 몸 해치지 않게 하려면 내가 확실히 잡아줘야겠지.


"이번에도 불침번은 내가 맡지. 알람 서비스도 해줄테니 안심하고 눈 좀 붙이게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로봇이라도 주기적으로 전원 끄고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들에 비하면 딱히 문제없네만. 24시간 내내 가동되는 기계 처음보나?"


"이거랑 그거랑 같은건가...?"


그렇게 하나둘 모포에 눕거나 침낭에 꼬물꼬물 들어가자 나도 몸을 눕힐 수 있었다. 하루종일 걷느라 피로가 누적돼서인지 불편한 잠자리에도 아랑곳않고 금새 잠들 수 있었다.


***


나를 잠에서 깨운 건 드론의 알람소리가 아닌 왠 드릴소리였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보니 나만 쏙 빼놓고 지들끼리 굴착 작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오, 자네 깼나? 역시 좀 시끄러웠나 보군."


"...언제부터 시작했어?"


"7분 23초 전부터. 새 갱도를 팔만한 곳을 고르고 필요한 것들을 챙긴 뒤 방금 막 드릴에 시동 걸고 작업을 시작했다네."


더치걸이 금속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암벽을 드릴로 뚫는 중이었고 LRL은 눈에 불을 키고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더치걸 안전모의 헤드라이트 기능은 고장난 지 오래여서 그 대신 LRL의 눈에서 내뿜는 불빛으로 작업 현장을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엘븐이랑 이그니스는 어디갔어?"


"밖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는 중일세. 땅굴을 깊게 파게되면 통로를 지지할 나무기둥도 필요하고, 파낸 흙더미나 돌덩이를 옮기기 위한 수레도 필요하니 말일세."


"내가 도울만한 일은?"


"자네가 할만한 일은 나중에 수레에 파낸 흙 싣고 옮기는 일 정도겠군."


"인간 니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그래? 약해빠진 주제에."


"잠깐, 눈부셔...!"


안대를 벗은 상태의 LRL이 말하면서 내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왼눈에서 나오는 빛이 내 얼굴에 직격했다. 등대용으로 쓰던 최대출력이 아니라 좀 강한 손전등 정도의 불빛이라 눈이 멀지는 않았지만 눈부신 건 마찬가지였다.


"LRL, 시선 딴 데로 돌리지 마! 내가 안보인다고!"


더치걸이 따지자 LRL은 도로 더치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저께 둘이 대판 싸웠을 때는 또 싸우는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럭저럭 잘 협력하고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놓인다.


비록 땅을 파는 건 더치걸 한 명 뿐이었지만 굴착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우리들 중 가장 큰 떡대를 자랑하는 소각용 슈트를 입은 이그니스가 드나들 수 있을만한 너비의 통로 몇 미터만 파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간혹 더치걸이 자신의 폭탄 드론이 남아있었다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텐데 하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갱도가 조금씩 깊어지면서 더치걸 주변에 흙더미가 쌓이기 시작할 무렵 엘븐과 이그니스가 낡은 수레에 나무 기둥과 삽을 실어 돌아왔다. 기둥은 근처의 폐허에서 뽑아왔다고 한다.


엘븐이 통로에 지지대를 세울 동안 나와 드론, 이그니스는 빈 수레에 흙과 바위를 실어 옮겼다. 이그니스가 난 쉬고있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한 명이라도 더 거들어야 빨리 끝날테니 나도 돕겠다고 했다. 내가 삽으로 흙을 퍼나르는 동안 드론은 무거운 돌덩이 위주로 옮겼는데, 그 중엔 더치걸의 드릴 만큼이나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들어올렸다.


"이건 수레에 싣기는 힘들겠군, 내가 바깥에 버리고 오겠네."


"...대체 그 작은 몸 어디서 그만한 힘이 나오는거야?"


"난 이래뵈도 골든 워커즈 사에서 만든 공업용 로봇이란 말이지."


나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바위를 옮기는 드론의 모습에 잠시 아연질색하다가 흙이 또 쌓이기 시작하자 허둥지둥 삽질을 계속했다.


***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니 드릴소리가 멎었다. 더치걸이 암벽에서 드릴을 뽑으니 벽 너머의 빈 공간이 드러났다. 


"다들 모여봐! 안쪽이 보이기 시작했어!"


내부 시설이 눈앞에 있음을 확인한 더치걸이 막판 스퍼트로 힘 내서 드릴을 팍팍 휘두르며 갱도를 마저 뚫었다.


더치걸이 드릴의 시동을 끄고 안을 훑어보기 시작하자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중 LRL이 와서 눈빛을 비추려하자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만. 불을 꺼봐."


"왜, 안에 뭐 있어?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을텐데."


"불이 켜져있어."


천장의 전등은 전부 불이 꺼진 상태였지만 복도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있는 비상등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고있었다. 덕분에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벽인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더치, 그 대사는 안돼...!"


"으... 굉장히 음산해보여... 꼭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아."


"걱정 마세요, 엘븐 양. 세상에 유령이란 건 없으니까요."


"아니, 그야 알고는 있지만... 기분이란 게 있잖아. 기분이."


시설 내부는 녹슬고 낡긴 했지만 파괴흔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이외에 철충이 침입해서 교전이 일어났었다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시설에 불이 들어오는 걸 보면 방어 시스템이 건재했을 지도 모르겠네. 정문을 부수지 않은 건 정답이었어."


"당장 눈에 보이는 위험요소는 없긴 한데... 일단 한번 물어보겠는데, 이 중에서 전투모듈 있는 사람?"


"나. 오메가한테 개조받았거든."


"저도 전투모듈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모네이드 감마 양은 저를 화염 방사병으로 쓰려고 복원했었거든요."


LRL과 이그니스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그니스는 감마한테도 '양'을 붙여서 부르는구나. 


"그럼 엘븐이랑 더치걸은 못싸우는 건가?"


"애초에 우린 노동용으로 제조됐었으니까. 그래도 근력은 강하니까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정도는 할 수 있어. 내가 인간 너 죽이려고 했던 거 기억하지?"


"말을 해도 꼭..."


"나, 나도 전투모듈은 없어도 싸울 수 있어! 이 슈트가 낼 수 있는 힘은 엄청 강하다고!"


엘븐이 자신의 장비에 달려있는 거대한 나무 심기용 집게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은 자신만만하다기보단 겁먹은 모습을 감추려고 억지로 용기있는 척 하는 것 같았다.


"그렇군... 일단은 싸울 수 있는 인원이 다섯명은 되는거구나."


"어이 잠깐, 그 다섯이 나를 포함해서 다섯인건가 아님 자네를 포함해서 다섯인건가?"


"그야 드론 너를 포함해서지, 나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넌 아까 보니까 바위도 번쩍 들어올리더만."


"그걸로 뭘 어떻게 싸우란 건가! 그래 뭐, 상대 머리 위에 바위를 떨굴 수는 있겠지. 그 상대가 가만히 서있는 허수아비라면 말이야!"


"그리고 또... 레이저 빔도 쏠 수 있잖아?"


"레이저 커터! 그건 공구지! 무기가 아니라!"


"그래도 비상시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지. 알았으니 이제 한번 들어가보자."


내가 시설 안으로 발을 옮기려하자 이그니스가 내 어깨를 붙잡아 멈춰세웠다.


"인간님이 선두에 서시면 안됩니다. 저와 LRL 양이 전열을 맡겠습니다. 엘븐 양과 드론 씨는 후열, 인간님과 더치걸 양은 그 가운데에서 이동하도록 하죠."


"그리 위험해보이진 않은데, 굳이 그렇게-"


"이건 중요한 사안입니다."


"좋은 말로 할때 얌전히 따라, 인간."


이그니스가 왠일로 강하게 나온데다가 LRL까지 그녀의 말에 찬동했다. 내가 반드시 앞장서야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냥 의견을 굽히기로 했다.


"...알았어."



포지션이 정해지자 이그니스와 LRL이 먼저 안으로 진입했다. 이그니스는 거대한 화염방사기의 포구를 들어 주변을 경계했고, LRL은 다시 왼눈의 불을 켜 길을 밝혔다. 맨 뒤에서 불안에 떨고있는 엘븐은 숲에 물 뿌리는데 쓰는 그 호스를 총처럼 쥐고 주변을 여기저기 겨누면서 따라왔다.


시설 곳곳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복잡해보이는 기계가 깔려있었는데, 그 중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먼지 쌓인 컴퓨터 모니터랑 유리로 된 원통이 깨진 바이오로이드 제조기 정도였다.


"이 투박하고 단조로운 인테리어를 좀 보게, 펙스에서 지은 게 아니로구만. 펙스 시설이면 훨씬 더 정교하고 깔끔하게 지었을텐데 말이지."


"내가 펙스를 싫어하긴 하지만 저 드론 말에는 동의해. 삼안도 아니고... 블랙 리버에서 지은 시설인 것 같네."


드론이 시설의 건축 양식을 분석하자 더치걸이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블랙 리버라면 군사 시설일 확률이 높겠군요. 무기로 쓸만한 걸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건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LRL이 멈춰선 곳은 왠 유리창이었다. 벽의 널찍한 유리창으로 방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는데, 방 안에는 철로 만든 수술대 같은 게 하나만 놓여져있었던 반면 천장에선 별 흉흉한 수술도구가 달린 기계팔이 잔뜩 나와있었다.


"저거... 수술대야?"


"아니, 실험대야. 바이오로이드 개조하는 데 쓰는."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 아..."


"아니아니,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병원일 수도 있지 않겠나? 다른 방에는 뭐가 있는지도 보고나서..."


드론이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했지만 다음 방을 보게되자 드론도 조용해질 수 밖에 없었다.


"저거... 설마 사형수한테 쓰는..."


전기의자. 아까보다 작은 크기의 옆 방 안에는 전기의자 하나만이 놓여져 있었다. 백 보 양보해서 좀 전의 방이 사람 치료하는 데 쓰는 수술실이라고 해도 바로 옆에 사형실이 붙어있는 배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대체 뭐하는 장소였던건지, 그 해답은 복도 끝에 있던 문을 열자 알 수 있었다. 무슨 연구동으로 보이는 넓은 공간과 그 한가운데 전원이 꺼진 채로 방치되어있는 한 로봇. 다들 저게 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나는 저 AGS를 잘 알고 있었다. 


"쉐이드..."


"뭐? 인간, 저게 뭔지 알아?"


"그래. 그리고 여기가 어떤 곳인지도 알겠어."


나는 쉐이드의 뒤편에 있는, 정면의 벽 정중앙에 새겨진 엠블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버뮤다 팀의 연구시설이야."


도로 일행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다들 긴장한 낯빛으로 내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분위기로 봐서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좋은거' 정도로 인식한 모양이다. 하긴, 버뮤다 팀은 080기관처럼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는데다 기록 말소까지 당했었으니까.


"버뮤다...?"


더치걸이 의문을 표하자 나는 내가 알고있는 지식을 전부 말해주기로 했다.


"블랙 리버에 소속된 연구팀이지. 초능력자 바이오로이드를 만들겠답시고 온갖 비인도적인 생체 실험을 했던 놈들이야. 여긴 버뮤다 팀의 북한 지부인 모양이고."


"그 부분은 정확히 따지자면 대한민국 북부 자치령 지부일테지? 블랙리버가 여기에 자기들 시설을 세웠을 때라면 십중팔구 자네가 말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라진 뒤였을테니까 말일세."


"...그래, 그거."


드론이 중간에 끼어들어 틀린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쉐이드한테 시선을 옮기며 설명을 계속했다.


"저 AGS의 이름은 S12 쉐이드. 버뮤다 팀에서 개발한 암살용 로봇이야. 존재 자체가 은폐되어 비밀 작전에만 투입됐다고 하니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그럼 너는 그 기밀정보를 어떻게 다 알고있는건데?"


"...내가 오르카호에 있는 동안 자료실에서 멸망 전의 기록을 열람할 권한 정도는 있었어."


대놓고 게임이나 전술교본 사이트에서 봤다고 할 수는 없어서 마자막 질문은 대충 둘러댔다.


"어쨌든 간에, 중요한 건 여기가 과거에 어떤 곳이었냐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 만한 장소가 되냐는 거지."


"저기 있지... 남아있는 위험요소는 없는 것 같긴한데, 그래도 여긴 너무 어두워. 전에 쓰던 지하실은 작아서 천장에 전구 박은 것 만으로도 괜찮았거든? 근데 여긴 굉장히 어둡고... 그런 주제에 넓으니까 꼭..."


"유령 나올 것 같다고?"


엘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븐 언니 말대로야. 이런 어두컴컴한 지하감옥에서 평생 산다는 건 광산으로 돌아가는 것 만큼이나 싫어. 광원이라고는 정전 시 켜지는 비상등밖에 없는데, 평생 비상등에만 의지해서 바닥을 기어다니며 살자는 건 아니겠지?"


"배전실을 찾아보는 건 어떤가? 뭐, 시설에 전력이 돌아오면 우리가 모르는 방어 시스템 같은게 우릴 공격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여기가 그런 위험한 연구소였다면 철저히 외부인을 배제하도록 만들어졌을-"


"인간, 인간!"


LRL이 갑자기 내 팔을 툭툭 치면서 불렀다. 평소와는 다른 다급한 느낌에 나는 LRL 쪽으로 돌아봤다. 그런데 LRL은 나를 불러놓고선 나한텐 눈길도 안주고 뭔가를 보고있길래 나 역시 그녀의 시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나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왜그래? 뭐가 지나가기라도 했어?"


"생쥐라도 본건가? 설마 유령이 나왔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사라졌어."


LRL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봤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뭔가 제대로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던 쉐이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갑자기 분위기 공포겜

보여선 안될 것이 보이는 거랑 보여야 할 것이 안보이는 것, 어느 쪽이 더 무서울까


전에 장편소설 쓸때는 한편당 5천자 정도로 썼는데 지금건 진행해야할 스토리가 길다보니 한편당 1만자씩 쓰게 되네

물론 후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