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내리쬐는 도서관 한 구석. 책을 펴놓고 꾸벅꾸벅 졸던 한 젊은 남자 옆에 흰 머리가 성성한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잠에 취해있던 젊은 남자는 자신을 깨운 이를 확인하더니 소스라치게 놀라 바로 목례를 했다. 중년의 남자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품에서 커피 한 캔을 꺼낸 중년의 남자는 젊은 남자에게 말과 함께 휴식을 건넸다.

 

“공부하기 많이 힘들지?”


“아닙니다. 제가 선택한 길이니 해야죠.”

 

“유상 군은 늘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하지만 내가 뭐랬지? 결핍된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스스로를 혹사하는 건 악순환의 굴레에 빠지는 길이니 자기 효능감을 채워보라고 했지 않았나. 가끔은 도서관을 떠나서 산책이라도 해보는 편이 좋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실 거면 연구 과제를 줄여주시면 안 되나요? 순수이성비판을 원전으로 읽고 논문을 쓰려니 피가 말립니다.”

 

“학자가 되려는 이가 그 정도도 못하면 쓰나. 이런 시대에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1류가 되어야지. 이렇게 힘든 시간을 거쳐 박사까지 밟았는데도 2류면 서럽지 않겠나?”

 

젊은 남성의 볼멘소리를 일축한 중년 남성은 점심을 안 먹었으면 식사나 하자며 그를 데리고 나갔다. 도서관 1층에 자리 잡은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킨 중년의 남성은 젊은 남성이 제출한 논문을 주제로 말문을 열었다.

 

“석사 논문 잘 읽었네. 형이상학의 기초를 스스로 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였어. 그렇지만 기존 학자들의 연구를 취합한 게 전부라 이번에도 심사를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 본인의 의견을 더 많이 써오는 게 어떤가?”

 

“아이고, 또 떨어졌나요? 이것 참... 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석사 논문을 쓰는 것도 힘든데 벌써 3번째 낙방이라뇨. 교수님, 박사 과정에서 더 열심히 할 테니 석사는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석사 때 공부를 안했는데 박사 때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는 더더욱 힘든 법이지. 무엇보다도 철학은 평온한 생각에 파동을 일으키는 동적인 학문이야. 지금 생각하는 연습을 안 하고 박사 과정 때 하겠다니 당치도 않지. 안 그런가, 유상 군?”

 

성 교수는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유상의 주장을 일축했다. 흠잡을 데 없는 정론이었기에 유상은 더 할 말없이 대학원 진학을 택한 자신의 선택을 책망할 뿐이었다. 텅 빈 도서관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시 캠퍼스를 산책했다. 방학 중이라 사람 찾기가 더 힘든 곳에서 여유를 느긋하게 만끽하던 성 교수는 유상에게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대학도 많이 사람이 줄었어. 학생이 없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대학을 나와 봤자 실업이 확정이니 구태여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지. 중앙도서관도 내가 유상 군처럼 대학원생일 시절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는데, 이제는 관리용 바이오로이드를 빼면 이용자가 손발로 셀 수 있을 정도니 학자로서 안타깝지 그지없네.”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지금 입학하는 학생들 중에서 뭐라도 배울 요량으로 대학에 온 학생이 1명이나 될까요. 다들 기업 간부진들이 자기 자식들 치적 쌓기용으로 입학시키는 거죠. 본부에서도 거래를 받아들여 수업을 안 나와도 A+는 기본으로 뿌리고 졸업논문은커녕 리포트 한 편을 안 써도 학사 학위를 주잖습니까. 학위 줄 테니 취업률 올리는 거 도와달라는 거래가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라고 봅니다.”

 

“씁쓸해. 아주 많이 씁쓸해. 어쩌다가 대학이 기업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했는지... 상아탑이라는 말도 다 옛말이 되었어.”

 

성 교수는 혀를 차며 인문대 건물 사이를 지났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벽에 달아놓은 ‘문’ 자가 떨어져 ‘인 대’가 된 인문대 본관을 본 유상은 착잡한 심경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 심정을 느낀 게 그뿐만이 아니라는 듯, 성 교수는 긴 한숨을 내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현상학을 제창한 에드문트 후설이 그랬지. 지금은 철학의 위기라고 말이야. 20세기 철학의 포문을 연 양반이 했던 말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통용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문대가 몰락할 거라는 이야기는 산업혁명 이후로 쭉 나온 소리지만, 막상 실현되니 이토록 슬플 수가 또 없어.”

 

“저도 그렇습니다. 철학으로 먹고 살려고 대학원까지 갔는데 먹고 살 길이 없다는 현실만 더더욱 통감하고 있어요. 맹자가 말하길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던데, 제 항심이 사그러들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분위기를 풀려는 유상의 농담에 성 교수는 싱거운 소리를 하고 있다며 가볍게 웃었다. 캠퍼스를 돌아 중앙도서관이 다시 시야에 들어올 무렵, 두 사람은 대여섯 명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무슨 일인가 호기심을 느낀 성 교수와 유상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점점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얼굴이 뚜렷해지고 맞는 이의 얼굴도 명료해지자 성 교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와 반대로 유상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맞고 있는 이의 머리색은 햇빛을 받아 더 선명히 빛나는 녹색이었다.

 

“이게 뭐하는 짓들인가!”

 

관록이 느껴지는 호통에 발길질과 각목을 멈춘 여섯 명은 모두 꾸지람의 주인에게 시야를 돌렸다. 초로의 남성이 자신들을 꾸짖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일행 중 한 남자가 성 교수에게 협박 섞인 경고를 날렸다.

 

“이보쇼, 우리가 뭘 하든 신경 끄고 곱게 갈 길 갑시다.”

 

“난 이 대학 교수일세. 지금 당신들이 하는 행동이 우리 대학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참나, 거 교수면 교수답게 조용히 가라고요. 어디서 훈계질이야?”

 

성 교수가 흔들림 없이 말을 받아치자 일행 중 마스크를 쓴 여성이 그에게 날카로운 말을 날렸다. 적당히 겁을 주면 자리를 뜰 거라 생각했던 성 교수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들은 슬슬 위력행사를 불사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성 교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호히 경고했다.

 

“당신들이 폭행하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우리 대학 소속 바닐라 기체라네. 이 이상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사적 보복을 가할 경우, 기물 파손으로 시티가드를 부르겠네.”

 

“참나, 교수면 다야? 이거 바이오로이드 인권 들먹이는 빨갱이 아녀?”

 

“계속해보게나. 일을 키우고 싶다면 기꺼이 그리 해주지.”

 

각목을 들고 있던 남성이 성 교수를 툭툭 밀자 성 교수는 바로 시티가드에 연락을 취했다. 그가 제대로 신고를 하자 일이 귀찮게 되었다고 판단한 여섯 명은 모두 표정을 굳히고 자리를 떴다. 성 교수는 상처투성이인 바닐라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괜찮나요?”

 

“...구해줄 필요 없었습니다.”

 

봉변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도 날카로운 말을 날리는 바닐라의 독설을 듣고도 성 교수는 말없이 미소를 띠었다. 그는 먼발치에 서있는 유상을 불렀다.

 

“중도 가기 전에 의무실을 한 번 들르지.”

 

“저, 교수님. 왜 그런 판단을...”

 

“가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유상의 질문을 시침질하여 잠시 봉한 성 교수는 다리를 다친 바닐라를 유상이 업도록 했다.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존경하는 스승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던 그는 바닐라를 등에 업었다. 의무실로 가는 동안 판단의 이야기를 말해주겠다던 성 교수는 입을 닫았다. 덩달아 할 말이 없어진 유상이 바닐라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 번 그녀를 위로 올리자 바닐라는 바로 그를 매도했다.

 

“죄송하지만 만질 거면 은근슬쩍 만지지 말고 제대로 만져주시죠, 변태 자식.”

 

“...죄송합니다.”

 

속으로는 언짢은 마음에 그녀를 당장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속에 가둬놓아 삭이면서 의무실까지 간 유상은 마침내 그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바닐라를 내려놓고 밖에 나온 그는 의무실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성 교수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왜 구해주신 겁니까?”

 

“뭘 말인가?”

 

“바닐라 말입니다. 구태여 구해주려고 하시다가 교수님께서 위험해지실 뻔 하셨잖아요. 게다가 정작 구해줘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매도만 하는데, 구해주고도 저희가 손해 봤습니다.”

 

유상은 특히 자신에게 바닐라가 갖고 있는 안 좋은 이미지를 아시면서도 저에게 바닐라를 업혔냐며 불평을 덧붙였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성 교수는 그리 생각할 수 있다며 운을 띄웠다.

 

“그리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네?”

 

“곤경에 빠진 바닐라를 돕는 게 철학자의 일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가?”

 

성 교수의 역질문에 유상은 자신의 생각을 교정했다. 자신의 뜻을 전달하면서도 성 교수의 질문에 반박하기 위해 그는 생각 구성을 비틀었다.

 

“사회철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제가 그래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제 개인적인 문제로 바닐라를 돕는데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철학자라는 딱지에 요구되는 행위임은 인정하지만 딱지를 뗀 개인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유상은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성 교수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며 동의를 표하더니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볼 점 하나. 유상 군 말대로 어떤 철학자는 개인으로서의 삶과 철학자라는 직업의 삶을 고를 수 있다고 가정하지. 그러면 개인과 철학자 중 무엇이 어떤 철학자의 진실한 삶인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인가요?”

 

난제. 유상은 성 교수의 질문에 잠시 말을 주저하며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 그가 답을 머뭇거리자 성 교수는 자신의 질문 의도를 해설해주었다.

 

“백마비마론의 논리와는 다르지. 제자백가 중 논리학을 연구한 명가(名家) 사상가 공손룡이 주장한 백마비마론은 대상의 분류를 다룬 것이니까. ‘흰 말’은 ‘말’이라는 일반적인 동물에 ‘하얗다’라는 속성을 추가한 독특한 존재라서 ‘말’이라는 일반적인 존재와 구분된다는 주장이네.

 

내가 묻는 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로 살아가는 삶과, 다른 존재자들과 부대끼며 획득한 사회적인 삶 중에서 무엇이 진실되었는가라네.”

 

“음....”

 

유상은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도 명확히 답을 주지 않는 선택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성 교수는 빙긋 웃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쉬운 질문이 아니지. 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페르소나가 자아인지, 아니면 자아 그 자체가 진정한 자아인지를 묻는 거니까. 답을 내리는 건 유상 군이 해야 할 일이지만 생각의 틀을 넓혀주는 건 내가 할 일이니 지금부터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하이데거의 이름은 들어보았지?”

 

“잘 알죠. <존재와 시간>을 읽고 존재론에 대한 제 의견을 써야 했는데요.”

 

유상은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역본을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독일어 원전으로 해석하면서 모든 페이지를 꼼꼼히 살펴야했던 고통이 되살아나자 그는 빠르게 기억을 떨치려고 했다. 성 교수는 하이데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며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하이데거존재론에 자신의 삶을 바친 위대한 철학자지. 현상학을 제창한 에드문트 후설의 제자였던 하이데거는 스승의 주장을 이어 가장 원초적인 철학, 다시 말해 형이상학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관심을 두었다네. 그 결과가 존재론의 대두였으며, 이 불꽃은 나중에 사르트르가 받아 실존주의라는 화로에 옮기게 되지. 재미있게도 후설은 하이데거가 자신의 현상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했고, 하이데거는 사르트르가 자신의 존재론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했지만 말이야.

 

서론이 길었군.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이데거의 주장을 살펴보자고.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 제1장 ‘현존재에 대한 준비적 분석과제의 제시’ 9절 ‘현존재의 분석 작업 주제’에서 이 말로 말문을 열었지. ‘어떠한 존재자에 대해 분석하려면 그 과제로서 바로 우리 자신을 택할 수 있다.’ 대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 어떤 교재도 없이 정확한 장까지 짚어서 질문을 던지는 성 교수의 모습에 유상은 성 교수의 두뇌 용량이 얼마나 되는가를 두고 소리 없이 감탄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도 철학으로 박사를 받은 능력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힘을 기울이자 그는 미숙하지만 방패를 드는데 집중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시간성을 띤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자신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존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좋은 대상이 된다고 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상은 답을 하고 성 교수의 표정을 살폈다. 성 교수는 50점을 주겠다고 평하더니 가벼운 핀잔을 던지며 설명을 이었다.

 

“앞에 한 줄만 맞고 뒤의 내용은 손볼 부분이 많아. 그래갖고 어느 세월에 석사 따겠나? 하이데거에 대한 즉석 강의를 더 해볼 테니 처음 주어진 질문에 더 깊이 생각하고 답을 하길 바라네.

 

하이데거는 일상에서 혼용하는 존재의 개념을 구분했지. ‘~이 있다’라는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존재’고, 세상에 ‘존재’ 상태로 놓인 대상은 ‘존재자’라고 보았어. 이 말에 따르면 이 의무실도, 우리가 가려는 중도도, 나도, 유상 군도, 바닐라도 모두 존재자지.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하이데거는 의무실과 중도와 달리 우리는 특별한 존재자라고 말했다네.

 

인간은 중도나 의무실처럼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지. 왜 우리는 존재하지? 나라는 건 대체 뭘까?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 등장한 맥락과 흄이 말한 귀납적 회의가 등장한 맥락이 전부 하이데거의 질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네. 존재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고자 한 결과니까. 하이데거는 이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질문하는 인간에게 현존재라는 이름을 붙였지. 독일어로는 다자인(Dasein), 영어로는 There is being.

 

바로 이 점이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이라네. 앞에서 말한 <존재와 시간> 제1장 9절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상이 실존주의가 아니라 존재론으로 흐름을 명백히 밝혔는데, 그 점이 여기에 관계되지.”

 

성 교수는 말을 잠시 끊으며 유상에게 이해가 되냐고 물었다. 공들여서 읽은 만큼 내용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부분이 미심쩍었던 유상은 학생의 본분인 질문을 사용했다.

 

“교수님, 하이데거는 사르트르보다 앞선 학자 아닌가요?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나오나요?”

 

“예끼, 그렇게 곧이곧대로 들으면 쓰나. 하이데거의 사상이 존재론으로 흘렀다는 점을 말하는 거지 실존주의가 직접적으로 나왔다는 말이 아니야.

 

아무튼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에서 실존과 존재는 엄연히 구분된다고 밝혔다네. 실존은 존재하는 상태를 객체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현존재의 성격을 지닌 존재자에게는 실존이라는 말을 붙이기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지. 현존재는 객체화할 수 없기 때문이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대체 현존재란 뭐지? 하이데거는 세계에 객체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실존하는 존재자들을 바라보는 건 모든 존재자들이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네. 하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지. 인간만이 세계를 실존하는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고 자신 스스로 행위 그 자체가 되어 존재하니 말이야. 이를 가리켜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갖는 세계에 대한 의식은 자신의 존재 자체와 동일하다고 지칭했으며, 현존재인 인간은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이라고 말했다네.

 

이렇게 세상과 관계를 맺는 현존재는 한 가지 특징을 더 갖고 있어. 왜 존재하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 유상 군이 답한 인간의 시간성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네.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야. 자신이 바라지도 않았고, 왜인지도 모르는데 어느 순간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지. 유상 군이 태어나는 사건에 인과는 있지만 그걸 유상 군이 결정한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 이를 가리켜 하이데거는 인간을 피투(被投)되었다고 했지.

 

자, 앞에서 나온 실존의 쓰임을 다시 떠올려볼까?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은 객체적 존재의 상태라네. 세상과 관계를 맺는 인간은 스스로 행위하는 존재자이기에 객체화할 수 없는 현존재라고 명명한 하이데거였지만, 피투된 인간을 해체해서 접근하면 인간의 본질을 객체화하여 실존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지. 현존재인 인간은 실존한다고 볼 수 없으나 인간의 본질을 객체로 보는 건 가능하다고 본 거라네.

 

인간은 피투되었기 때문에 본질이 정해지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본질을 찾을 수 없음에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현존재이기 때문에 불안에 빠지지. 현존재로서 세상의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어보니 분명 다들 본질이 있는데 정작 자신만 없는 거야. 그러니 자신은 대체 뭔가 하고 생각하다가 절망하게 되지.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데서 기인한 실존의 불안이라네.

 

절망한 인간은 어떻게든 심연에서 벗어나려고 유행에 휩쓸리거나 공론의 장에 참여하는 등 스스로 목적을 부여하려고 하지. 그러면서 세상과 주동적으로 소통하는 현존재의 고유성을 잃고 객체화되어 실존으로 전락하고 말아. 이상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박제되고 마는 거지.”

 

“교수님, 그렇지만 박제된 대상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도 않나요?”

 

자신이 숨을 고르는 때를 노려 질문을 던진 제자를 보며 성 교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상의 질문을 받은 그는 아까 유상이 답한 내용을 끌어와 말을 이었다.

 

“그렇지. 그게 바로 유상 군의 50점짜리 답변에서 맞은 부분인 ‘시간성’이야. 존재 상태에 놓인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해. 때문에 시간 속에서 여러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변화시키지. 이런 변화의 끝에는 뭐가 있겠나? 완벽한 철학자? 성인? 만약 현존재로서 세상과 소통하며 모든 지식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거쳐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 뒤로 영원히 진리를 깨달은 상태로 있을까?

 

아니, 시간의 끝에는 죽음이 찾아오지. 소련을 쥐고 흔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도, 불로불사를 꿈꾼 진시황도, 단 3학기만 철학 수업을 듣고 쓴 논문으로 철학계를 뒤흔든 천재 비트겐슈타인도 다 죽었어. 모든 현존재의 시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나 다름없지. 석가모니의 이야기를 하나 보자고. 어린 나이에 죽은 자식을 살리고 싶다며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석가모니는 한 가지 주문을 했다네. 죽은 이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받아오면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집이 있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죽음이 누구도 피하지 않고 찾아옴을 깨닫게 된다네.

 

하이데거의 주장도 마찬가지야. 하이데거는 시간의 끝인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인간이 현존재로서 얼마나 많이,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고 하지. 입대가 예정되면 갑자기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미필처럼, 끝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한정된 시간을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는 거라네. 하이데거는 이런 자각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세상에 던지는 기투(企投)를 할 수 있고, 나아가 현재의 삶을 스스로 규정하는 본래적 실존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어.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상태를 시간과 엮어서 보았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제목을 <존재와 시간>이라고 지었지.”

 

설명을 마친 성 교수는 바싹 마른입을 침으로 적셨다. 침샘이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줄 때까지 숨을 돌린 그는 말없이 자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유상에게 처음 던졌던 질문을 다시 내주었다.

 

“자,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피투된 실존으로서의 삶과, 기투하는 현존재의 삶 중 무엇이 진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

 

성 교수의 질문에 유상은 답을 달지 못했다.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성 교수는 유상이 비로소 좋은 철학도의 자세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그를 내버려둔 성 교수가 슬슬 더 이상 충분한 시간을 줄 수 없다고 그를 재촉하려는 순간, 유상이 닫았던 입을 열었다.

 

“하이데거의 주장을 따르면 기투하는 현존재의 삶이 진실된 삶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피투된 실존 상태의 인간은 불안에 빠지지만, 시간의 끝인 죽음을 보고 자신을 스스로 던지는 현존재는 불안을 극복하니까요. 불안을 극복하는 순간부터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답변을 들은 성 교수는 주름진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철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중 첫 번째를 이룬 유상에게 그는 두 번째를 물었다.

 

“그런가? 그럼 피투된 실존 상태의 인간은 거짓된 삶인가? 상담심리학자로서 많은 내담자를 만나며 얻은 개인적 데이터로 미루어보건대, 세상에는 아직 피투된 실존 상태로 사는 인간이 훨씬 더 많다네. 그들은 모두 가짜 인생을 사는 건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존이 존재와 구분되는 것처럼, 본래적 실존을 회복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겠네. 그럼 그 대상이 인간과 매우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자라면 어떨까? 그래, 바이오로이드 말일세.”

 

성 교수의 말에 유상은 머리가 환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 바닐라를 업게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성 교수의 큰 그림에 그는 자신이 부처님 손바닥 위를 천하로 생각한 손오공이었음을 깨달았다. 손오공은 상황을 알게 된 후에도 석가여래에게 대들다가 오행산에 봉인되었지만, 그는 달랐다. 유상은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면서 새로운 논리를 짜내어 다시 성 교수에게 내밀었다.

 

“주장을 수정하겠습니다. 피투된 실존 상태의 인간과 기투한 현존재는 삶의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의 문제일 뿐, 철학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은 변치 않기에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이오로이드는 이 질문의 대상이 될 수조차 없죠. 인간이 아니니까요.”

 

유상은 자신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성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성 교수는 혀를 쯧쯧 차며 손오공을 오행산에 봉인한 석가여래처럼 유상의 자부심을 위에서 아래로 메다꽂았다.

 

“그만하지. 내 생각보다 아직 한참 못 미치는군.”

 

“....네?”

 

“유상 군은 내가 왜 이 질문을 꺼냈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내가 듣고 싶었던 답은 둘 중에 어느 쪽이 정답인가가 아니라, 그 둘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였다네. 그렇지만 유상 군은 기투와 피투,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라는 굳건한 흑백논리로 두 번이나 답을 했지. 이런 식이라면 석사도 박사도 따기 힘들 걸세.”

 

실망스러운 성 교수의 모습에 유상은 어떤 지점에서 어긋났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이 왜 그런 평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유상의 표정은 성 교수가 다시 입을 여는 신호가 되었다.

 

“유상 군. 철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네. 

 

첫째, 사소한 일에도 깊이 사색할 것. 

둘째, 사색할 때는 틀을 깨고 자유롭게 넘나들 것.

 

흑백논리에 갇히는 순간 철학자의 생명인 생각하는 힘은 멈추게 되지. 학자로서 자신만의 류(流)를 만드는 건 좋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내가 바닐라를 돕는 게 철학자의 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냐고 물은 것도, 개인과 철학자라는 이름표를 단 직업인 중 무엇이 진실된 삶이냐고 질문한 것 모두 유상 군이 흑백논리를 넘어 폭넓게 사색하기를 바래서 그랬는데.... 안타깝지만 아직 유상 군은 철학자가 되기에는 먼 것 같군. 중도에 가서 과제나 제대로 해오게나.”

 

자신에게 실망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성 교수의 말에 유상의 표정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말했지만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음을 직시한 그는 풀이 죽었다. 알겠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힘이 빠져있자 성 교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불어넣었다.

 

“유상 군. 완전히 실망하지는 말게나. 이런 좌절의 기억을 딛고 일어나면서 좋은 철학자가 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대학원 입학 후에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성적표만 받으니까 허탈하네요.”

 

성 교수의 격려에도 유상은 의기소침한 표정을 좀처럼 펴지 못했다. 하나뿐인 제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썩 편한 일이 아니었기에 성 교수는 다시 그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유상 군, 철학자들이 연구하는 것들을 따라가면 하나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네? 그런 논문이 나왔어요?”

 

“논문은 아니고 내가 생각한 바라네. 제자백가가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난 이유, 소크라테스가 산파술로 진리를 탐구하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이유, 하이데거가 존재론을 연구한 이유를 파고들면 모두 같은 결론이 나오지. 뭐일 것 같나?”

 

제자백가와 소크라테스, 루터, 하이데거. 좀처럼 공통 분모가 없어 보이는 이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생각을 잇던 유상은 조심스럽게 답을 말했다.

 

“음.... 진리탐구인가요?”

 

성 교수는 웃으면서 그것도 맞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바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단순하지만 중요한 내용이니 꼭 안고 살아가라고 운을 띄운 그는 유상에게 똑똑히 말했다.

 

모든 철학자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서 연구를 한다네. 특정한 시대 의식과 그런 걸 모두 초월하는 개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모두 우울과 한계상황 같은 절망을 극복하길 바라지. 철학은 절망을 이기는 학문이니까, 철학자의 연구도 같은 역할을 하지.”

 

“오... 그거 멋지네요. 절망을 이기기 위해서 철학을 연구한다니...”

 

“그렇지? 유상 군이 지금 겪는 절망도 이겨내면 철학자가 되는 밑거름이 될 거라네. 그러니 기운 내게나.”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성 교수의 말을 품은 유상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힘내라며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툭툭 두드려준 성 교수는 유상의 바로 옆에서 말했다.

 

“잘 새겨두게나. 필요한 순간이 분명 올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네?”

 

마지막 말이 귓가를 스치자 유상은 누군가 자신을 뒤에서 떠미는 느낌을 받았다. 성 교수를 지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굴러 떨어지던 그에게 성 교수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아...! 그래, 지금 난... 난....!”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을 두 번이나 겪어도 일어나야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을 모두 사랑으로 덮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세 번째 절망을 선사받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어나야 했다. 성 교수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입에 악물며 유상은 자신이 지금 누구인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세상에 기투했다.

 


“내 이름은 리마토르.”


 

멈출 줄 모르고 떨어지던 허공에서 자신의 의지로 방향을 틀자 어둠이 차차 걷혀갔다. 마침내 어두운 그림자조차 없는 밝은 빛 속으로 들어가자, 리마토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세상에 선언했다.


 

“절망을 이기는 철학자가 되겠어.”

 


그는 눈을 감았다. 추락하던 몸은 어느 순간부터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디로 올라가는지 몰랐지만 리마토르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 곳이 어떤 곳이든 자신의 손으로 절망을 넘을 결의가 그를 충만히 채웠다.

 

 

 

 

“오빠, 리마토르 오빠가 깨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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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84화 만에 리마토르가 더 성장했네. 원래 이번 편에는 공동체주의 덕 윤리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나올 예정이었는데, '절망'이라는 단어를 더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실존주의 계열 철학자 같아서 25편에 한 번 언급되었던 마르틴 하이데거를 등장시켰어. 매킨타이어는 다음 편에서 바로 등장할 예정이야. 이번 에피소드 말미에 나온 말은 법철학 특강을 들었을 때 인상 깊었던 부분을 따왔어. 철학의 제1덕목이 진리탐구이기는 하지만, 혼란한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회철학을 연구하는 리마토르에게는 진리보다 더 어울리는 말 같더라.


지도교수님과의 상담 끝에 대학원 진학 전에 병역을 끝마치기로 해서 2월 중순에 입대가 예정된 지금, 얼마나 더 진도를 나갈지 모르겠다. 그래도 최소한 1막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 끝내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 후반부 이야기가 전개될 방향을 미리 다 공개를 하고 나중에 다시 연재를 하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는데, 의견이 있다면 알려주길 부탁할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날씨가 다시 추워지는데 모두 건강 잘 챙기고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