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사라졌어...!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잖아! 그보다 그거 가동정지된 거 아니었어?"


"어디로 간 거지? 아니, 그보다 그 커다란 로봇이 움직이는 걸 아무도 못봤다고?"


누구는 겁을 먹고, 누구는 당황하고,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다행히 패닉 단계까지 들어가진 않고 다닥다닥 붙어서 자연스레 원진을 형성했다.


"움직여서 숨은 게 아냐... 사라진 거지."


"인간님. 쉐이드라는 AGS에 관해 더 아는 게 있습니까?"


이그니스가 화염방사기의 포구를 이곳저곳 겨누면서 물었다.


"쉐이드는 광학미채 기술이 적용된 모델이야. 말 그대로 투명해질 수가 있지. 게다가 팔에 총도 달려있고 칼도 달려있고... 결론은 굉장히 위험한 살육병기라는 거지. 아마 지금도 가까운 곳에서 모습을 감춘 채로 우릴 지켜보고 있을걸.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돼."


"진형을 유지한 채로 천천히 이동하도록 하죠. 당장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면 경계를 늦춘 때를 노리는 걸지도 모릅니다. 


철수하기로 결정하자마자 우리는 곧장 유턴해서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들어오는 동안엔 그냥 어둡기만 한 통로였는데 이제는 그 어둠 속에 암살자가 숨어있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가슴을 옥죄여왔다.


"그 녀석, 혹시 저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타나서 기습한다거나... 아님 출구에 매복해있을지도..."


"확인해보면 되지. 투명해져도 그 자리엔 있다는 거잖아?"


LRL이 바닥에 떨어진 돌맹이만한 크기의 기계 부품을 몇 개 주워서 앞을 향해 하나씩 던졌다. 톱니바퀴나 나사 따위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땅에 부딪혀 떨어졌다. 공중에 떠있는 동안 아무것도 부딪히지 않았으니 적어도 이 앞 복도엔 그 투명로봇이 없다는 뜻이었다.


"좌우좌, 나도 그거 하나만 줘봐."


"어딨는지 알 것 같아?"


LRL이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작은 톱니바퀴를 하나 쥐어줬다. 어딨는지 아는 거냐고? 그럴리가, 오히려 그 반대지. 보통 게임이나 영화 보면 이런 장면에선 투명해진 암살자가 'right behind you'하면서 뒤에서 기습한다. 나는 내 등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해두고 싶었기에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톱니바퀴를 내 어깨 뒤로 휙 던졌다. 저 톱니바퀴가 날아가는 동안 무엇에도 부딪히지 않는다면 소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한 번만 날테니까-


퉁, 툭, 데구르르르...



"엄마야."


뒤에있다 뒤에있다 뒤에있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


"꺄악! 저리가!!"


엘븐이 곧장 뒤를 향해 고수압 펌프를 발사했다. 허공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맞자 그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물대포를 쐈고, 쉐이드의 표면이 물에 흠뻑 젖자 클로킹 기능이 풀려버리며 다시 그 모습이 드러났다. 물대포의 수압에 몇 미터 밀려났으나 물탱크에 저장돼있던 물이 다 떨어져버리자 쉐이드는 이내 방어 태세를 풀었다.


더치걸이 쉐이드를 향해 드릴을 발사하자 쉐이드는 재빠르게 팔에 내장된 히트 블레이드를 꺼내 자신한테 날아온 드릴을 반으로 갈랐다. 쉐이드의 눈 역할을 하는 렌즈에서 휘번뜩 빛이 났다.


"뛰어!!"


있는 힘껏 내지른 내 목소리가 복도에 울린 순간 다들 두 말 할 것도 없이 앞만 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쉐이드가 양 팔을 들어 손목에 내장된 기관총을 갈기자 우린 황급히 모퉁이를 돌아 옆길로 빠졌다.


"잠깐만, 여긴 출구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됐으니까 그냥 뛰기나 해...! 엘븐 언니! 저 기둥을 부숴!"


뛰는 도중 더치걸이 내린 지시에 엘븐은 자신의 장비에 연결된 집게손을 휘둘러 통로를 지탱하던 기둥 하나를 부쉈고, 통로가 일부 무너져내렸다. 사람이 겨우 비집고 지나갈만한 공간만 남은 지라 전고 2m를 넘는 로봇인 쉐이드가 쫓아오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오...! 잘했어! 이틈에 도망치자!"


"어디로? 방금 그걸로 출구로 가는 길도 막혀버렸다고..."


"잠깐 내 말 좀 들어주겠나? 우리가 폐광에서 발견했던 그 문은 인간용이었네, 저 쉐이드라는 AGS는 쓸 수 없는 높이였지. 따라서 AGS가 드나들기 위한 다른 문이 있을 것이 분명하네!"


"일단 쉐이드가 돌아오기 전에 계속 움직이자. ...근데 이그니스, 뛸 수 있겠어?"


"허억.... 무... 문제 없습니다... 허억..."


말로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이그니스의 얼굴에선 땀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었다. 기동에 불편한 중장비를 입고 전력질주하려니 금방 지칠 수 밖에 없는 모양새였다. 아까같은 기세로 뛰려면 이그니스가 낙오될 판국이고, 그렇다고 이그니스의 장비를 버리고 맨몸으로 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적당한 속도로 뛰어야만 했다.


***


어디에서 나타날 지 모르는 암살 로봇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던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막다른 길이었다. 우릴 가로막은 정면의 벽에는 문 하나만 달려있을 뿐이었다. 


"이런...!"


문 너머에 다른 길이 없다면 쉐이드랑 정면으로 맞붙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 우리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안으로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문은 자동문 타입이었으나 전력이 끊겨 열리질 않는 상태였다. 이에 이그니스가 육중한 강화외골격 슈트를 입은채로 어깨를 부딪히니 철문이 부숴지며 길이 열렸다.


문 너머에 있는 건 밀폐된 방이었다. 방 안의 모습은 라오 기지시설에 있던 기록물 보관소와 흡사했었는데, 특이한 건 방 구석에 누군가 살던 흔적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가운데 수상한 검은 보따리가 보였기에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보따리를 풀었다. 방수포처럼 특이한 재질의 검은 천이 감싸고 있던 건 왠 금속 재질의 뼈 무더기였다.


"이게 뭐야... 왠 해골 모형?"


내가 금속으로 된 해골을 집어들어 보여주자 다른 일행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그런가 하니 더치걸이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건 해골 모형이 아니야... 진짜 해골이야... 바이오로이드의 뼈라고...!"


나는 도로 손에 들고있는 해골로 시선을 떨구고, 이내 검은 보자기에 감싸져있던 뼈 무더기로 시선을 돌렸다. 해부학을 전문한 건 아니지만 두개골이나 흉곽 등 눈에 띄는 뼈가 하나씩밖에 없다는 점으로 보아 사람 한 명의 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다른 바이오로이드 누군가가 들어왔었다가 이렇게 막다른 길에 몰리고, 쉐이드한테 살해당했던건가. 그런 불길한 생각을 하던 중 쇠가 거칠게 뜯기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쉐이드가 문틀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는 게 보였다.


"이 방에 있는 것을 손대지 마라! 당장 여기서 나가!"


"뭣...!?"


"다들 제 뒤로 물러서세요!"


쉐이드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이 이그니스가 외쳤다. 그녀의 화염방사기 포구에서 하얀 가루를 분사하자 무슨 짓을 할 지 예상이 간 우리는 냅다 피했고, 곧이어 이그니스가 헬멧을 쓰고 완전무장한 뒤 불을 뿜자 문 밖에서 분진 폭발이 일어났다.


불길과 열기가 사그라드는 건 금방이었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나는 마른 기침을 하며 손을 휘휘 저어 연기를 치웠다.


"다들 무사하신가요?"


"일단은 그런 것 같네만... 밀폐된 공간에서 그리 불을 뿜는 게 정말로 좋은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구만."


"그건...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드론이 핀잔을 주자 헬멧을 벗은 이그니스는 머쓱하게 대꾸했다. 나는 이그니스의 옆으로 가 문 밖을 살펴봤다. 벽 천장 바닥 가릴 것 없이 복도가 새까맣게 그슬려있었는데, 쉐이드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해치운 걸까요?"


"그랬다면 시체가 남았을거야. ...로봇한테 시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표면의 물기가 마르자 클로킹 기능이 재활성화된 것 같다. 이거 안좋은데...


"일단 물러나게는 했네. 인간, 이 틈에 도망치자. 그 해골은 그만 내려놓고!"


LRL의 말에 나는 아직도 품에 쥐고있던 금속 재질의 해골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름 모를 바이오로이드의 유골. 뭔가 생각난 나는 이 해골을 찾았던 검은 보따리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기다려봐."


나는 해골을 내려놓고 보따리 안의 뼈 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뒤졌다. 그 안에서 뼈가 아닌 물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단도 한 자루와 기관단총 한 정이었다.


"총이잖아요? 이걸 찾아내다니, 대단하세요. 이걸로 반격할 수단이 생겼군요."


"...팬텀..."


"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단도와 기관단총, 팬텀의 무기. 그리고 이 까만 방수포같은 보자기는 잘 살펴보니 후드가 달린 망토의 형태였다. 즉, 팬텀의 은폐장 망토다. 이건 필시 팬텀의 유골일테고.


나는 의아해하는 이그니스를 제치고 다시 문으로 가서 섰다.


"쉐이드! 거기서 듣고있는 거 다 아니 여기서 말하겠다!"


"인간님!? 지금 무슨 말을...?"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네 말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나갈테니 공격을 멈춰주길 바란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몇 초 정도 지나니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복도의 어둠 속에서 어떤 실루엣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몇 가지 확인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쉐이드가 은신을 풀고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그니스가 다시 화염방사기를 겨누자 나는 손짓으로 제지했고, 쉐이드는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너희는 현재 펙스의 레모네이드를 위해 일하고있나?"


"아니. 여깄는 애들 전부 펙스를 떠난 몸이야. 난 처음부터 펙스 소속이 아니었고, 보면 알겠지만."


"그렇다면 이 시설엔 왜 들어온 거지?"


"노숙자 신세라서 집으로 삼을만한 곳을 찾아 떠돌다가 우연히 폐광에서 문을 찾았을 뿐이야."


"펙스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있나?"


"증거? 그건... 인간인 내가 여기 있다는 게 그 증거지? 펙스가 살아있는 인간을 보유하고 있었으면 이런 위험한 데에 보내진 않았겠지. 안그래...?"


"인간이라고?"


쉐이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스캔 결과 네게선 인간의 뇌파가 감지되지 않을 뿐더러 체내 오리진더스트 농도는 명백히 인간의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을 상회했다. 바이오로이드의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쉐이드가 말을 마치자 이번엔 이그니스가 저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휩노스 병을 막기 위해 바이오로이드 비슷한 몸으로 개조했을 뿐이야. 뇌파를 감지할 수 없는 건 목에 찬 이 구속구가 방해전파를 내뿜기 때문이고. ...근데 AGS 눈에는 내가 바이오로이드로 인식되는 거야? 드론?"


"아니, 내겐 스캔 기능이 없어서 몰랐지. 난 그냥 카메라 렌즈에 비춰지는 것만 보고 판단한단 말일세."


드론이 살짝 억울하단 듯이 투덜거리는 동안 쉐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날 응시하고 있었다. 10초인가 십 몇초인가 지나고 나서야 쉐이드는 판단을 끝냈다.


"네 주장은... 논리적이군"


이어서 팔의 칼날을 도로 수납하고 공격태세를 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해를 끼친 점은 사죄하마. 연구자료를 훔치러 온 펙스의 첩자로 오인했었다."


"그럼 바로 공격하진 않았던 이유는 뭐야?"


"버뮤다 팀의 내부정보를 알고있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남성형 바이오로이드가 있었길래 상황을 지켜봤을 뿐이다."


"그럼 이 녀석은? 얜 정말로 펙스의 첩자여서 죽인거야?"


LRL이 팬텀의 유골을 가르키며 묻자 쉐이드는 즉각 부정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건 내 친구의 유골이다."


"친구라고...?"


"자넨 이걸 다 알고있었던 건가?"


"팬텀과 쉐이드가 같은 버뮤다 팀 소속이라는 정도는... 팬텀이라면 몰라도 쉐이드 쪽에서 친구라고 불러줄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저 인간의 말대로, 나는 팬텀이 살아있는 동안 한번도 그녀를 친구라고 불러준 적이 없다. 그녀가 내게 있어 친구라는 존재라는 걸 깨달은 건 그녀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제서야 고독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


성대가 아닌 음성장치를 통해 말하는 것임에도 왠지모르게 쉐이드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저 팬텀은 그럼... 철충한테 당한 거야? 아님 펙스의 공격에 의해?"


"사인은 아사. 과거 멸망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버뮤다 팀 연구원들은 팬텀과 내게 이 시설을 지키라는 명령을 남기고선 시설을 봉쇄하고 떠났다. 그러나 그 자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팬텀은 식량 부족으로 굶어죽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목소리에는 깊은 곳에 응어리진 분노가 실려있었다.


"시설을 지키라는 명령 탓에 나가서 식량을 구할 수도 없었다. 인간이 쓰려고 남겨둔 식량까지 꺼내서 먹였지만 그것도 곧 한계가 찾아왔었다. 외부에 연락을 취해도 그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팬텀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정신을 붙들기 위해서인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었었다. 당시의 나는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말 동무가 되어주질 못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유골을 지켜주는 것 뿐이다."


이번엔 목소리에 슬픔이 실려나오나 했더니 이윽고 무미건조한 기계 톤으로 돌아왔다.


"...실례했다. 너희에겐 말할 이유가 없는 건데 말이 길어졌군."


"아냐아냐, 괜찮아. 안좋은 일 있음 털어놓기만 해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법이니까."


"나는 AGS다."


"그래도 감정은 있지. 보면 알아. ...그냥 기분이 그래."


쉐이드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잠깐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네가 이 일행의 대표인가?"


"그런데. 왜?"


"거래를 요청한다."


***


쉐이드가 출구를 가르쳐주는 댓가로 요청한 건 양지바른 곳에 팬텀의 유해를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드론이 예상했던 대로 폐광에 있던 문 외에도 다른 출입구가 있었고, 바깥에 나온 우리는 곧장 적당한 곳를 찾아 묘지를 만들고 팬텀의 유골을 안장했다, 그녀가 생전 쓰던 물건들과 함께. 죽고 나서야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치걸에겐 남 일 같지가 않았는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내 시선을 눈치채자 홱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그 버뮤다 팀 시설에서 사는 건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겠다. 다만 그 전에 팬텀을 잘 묻어줬다는 사실을 쉐이드에게 알려줘야 해서 버뮤다 시설로 돌아가자 왠 트럭 한 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 옆에 서있던 쉐이드가 우리 인기척을 눈치채고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선물이다. 타고 가라."


"오... 설마 멀쩡히 움직이는 차량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보다 이런 거 줘도 괜찮은 거야?"


"주인 없는 물건인데 가져간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나."


트럭 컨테이너는 이그니스나 엘븐이 장비를 입은 채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쉐이드의 말로는 중요한 연구 장비나 실험체를 옮기기 위해 만들어진 차량이라 방탄 처리는 기본으로 되어있을 정도로 튼튼하다고 한다. 다들 차에 가까이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엘븐은 외골격 장비까지 벗어던져서 운전석에 탄 다음 시동을 걸었다.


"쉐이드 넌? 같이 가지 않을래?"


"인간이 전부 사라진 이상 이곳에 묶여있을 이유는 없다만, 명령 때문에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 입장이다. 나는 문을 열 수는 있어도 문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넘을 수가 없다. 인간으로 인식되는 자가 없으니 기존에 입력된 명령어를 새걸로 덧씌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대신, 이것엔 그런 제약이 걸려있지 않다. 이것도 가져가라."


쉐이드는 내게 음료수 캔 사이즈의 유리병을 건네주었다. 유리병 안에는 조그만한 녹색 씨앗같이 생긴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이거 설마... 유전자 씨앗이야? 누구의?"


"모른다. 이 시설에서 연구했던 실험체 바이오로이드라는 것만 안다. 그것이 여기 보존돼있던 유전자 씨앗 중 유일하게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왜 이걸 나에게 주는거야?"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씁쓸하지 않나. 시설의 바이오로이드 제조기는 모두 고장나서 여기선 제조할 수 없다. 언젠가 다른 바이오로이드 제조기를 찾게 된다면 그녀에게도 빛을 보게 해다오. 마지막으로 본 인간이 너같은 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목걸이를 벗고, 네 눈에도 인간으로 인식될 수 있게 되면, 너를 데리러 돌아올게."


"너는 내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게 그럴 이유가 뭐가 있지?"


"혼자 남겨진다는 건 너무 씁쓸한 결말이잖아."


"...네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 어서 가봐라."


어느새 다들 필요한 물건을 다 싣고 내가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LRL과 이그니스, 더치걸은 트럭 짐칸에 들어가있었고, 운전석에 탄 엘븐이 손짓했다. 아쉽지만 여기선 쉐이드와 헤어져야 한다. 나는 쉐이드에게서 등을 돌려 트럭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안전벨트를 메자 표정이 한껏 밝아진 엘븐이 팔꿈치로 툭 쳤다.


"어떻게 일이 잘 풀렸네! 차도 얻었고 말이야. 이제 어디로 갈까?"


"글쎄... 일단 계속 북쪽으로 가보자."


"또? 남쪽에서 뭐가 쫓아오기라도 해?"


"그럴지도 모르지."


"뭐야, 그게."


엘븐이 액셀을 밟자 트럭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버뮤다 시설의 야외 입구와 그 안에 처량하게 서있는 쉐이드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새 주변이 한 때 밭이었을 땅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이, 인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반대로 돌리니 트럭 컨테이너에 타고있을 더치걸이 트럭 뒷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응? 어어, 더치구나. 거긴 탈만해?"


"그럭저럭. 그보다 용케 그 AGS를 말로 구워삶을 생각을 했네."


"음, 뭐... 칭찬 고마워."


"칭찬이라기보단 순순히 궁금해서 그래. 정말로 AGS를 말로 설득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확신은 없었지. 그런데 쉐이드가 그 방에 들어온 우리를 보고 냅다 공격하는 대신 말을 걸었고, 내가 들고있던 게 쉐이드와 같은 팀 소속이었던 팬텀의 해골이었으니... 쉐이드가 팬텀의 유골이 손상되기를 원치 않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일단 AGS도 인격체니까 상대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다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했어."


"...두 번째 질문. 왜 그 팬텀이라는 바이오로이드가 쓰던 무기를 가져오지 않고 같이 땅에 묻은거야?"


"그건 그냥... 망자에 대한 예우...? 뭐, 그런거 있잖아?"


"그럼 지금 우리가 타고있는 트럭은?"


"시시콜콜 따지지 마셔... 팬텀이 가진 물품은 정말로 그 단도와 총, 망토 뿐이었으니까."


"흐음..."


더치걸은 턱을 괴고 나를 잠시동안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너, 정말로 다른 인간이구나."


"다르다니?"


"하나같이 내가 봤던 인간들이 하던 말하고는 정반대거든."


"...하긴, 구인류 머리에선 안나올 발상이지. 그래."


"응. 그러니까 제대로 사과할게. 나 혼자 제멋대로 착각해서 너를 공격했던 것에 대해서."


가볍게 얘기를 나누던 도중 그 안건을 도로 끄집어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아니,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니까 그냥 넘어가도..."


"난 너를 정말로 죽이려고 했었어.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서 될 일이 아니야. 쉐이드도 우릴 공격했던 것에 대해 사과했었고, 나도 그럴거야. 그 때 다짜고짜 공격해서 정말 미안해."


더치걸이 머리를 푹 숙였다. 나는 물론이고 운전대를 잡고있던 엘븐도 놀란 듯이 더치걸을 쳐다봤다. 뒷창문으로 더치걸의 머리만 내놓은 상태라 좀 애매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잠깐 멍해있다가 이내 정신차리고선 더치걸의 머리를 몇번 쓰다듬어 헝클어줬다. 손이 닿은순간 더치걸이 움찔했으나 금방 얌전해졌다.


"괜찮아, 괜찮아. 다 용서할게."


"...그리 쉽게 용서해도 되는거야? 벌은...?"


더치걸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미 좌우좌한테 혼났으니 벌은 그걸로 됐어."


"...응. 고마워..."


더치걸은 헝클어진 자기 머리를 살살 메만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맞다.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그... 다른 생존자를 찾아 모아야한다는 거 말인데... 한 명 아는 사람이 있어."


뜻 밖의 정보가 내 귀에 들어오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누구?"


"이름은 몰라. 그게... 예전에 언니들한테서 떨어져서 고립됐던 적이 있는데, 처음보는 바이오로이드가 나타나서 날 도와준 적이 있었어."


"아, 그 때 얘기구나! 나랑 이그니스는 그 바이오로이드를 직접 만난 적은 없고 더치걸한테 들어만 봤지만..."


"응. 그 언니는... 긴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묶었었고, 몸에 착 달라붙는 슈트같은 걸 입고있었어. 가슴도 컸고. 느낌상 펙스에서 만든 바이오로이드는 아닌 것 같아. 그리고 또, 군용 바이오로이드인 모양인지 힘이 나나 언니들보다 더 세더라고."


나는 더치걸이 나열한 그 바이오로이드의 특징들을 정리해봤다. 거유에 포니테일, 바디슈트, 군용 바이오로이드, 그리고 남을 지켜주고 챙겨주는 성격...


"노움인가..."


"어? 누군지 알아?"


"블랙 리버의 스틸라인 부대에 소속된 군인 바이오로이드야. 우리보다 뛰어난 전투능력과 군사적 식견을 가지고 있을테니 합류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거야.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아?"


"아, 아니... 어디서 사는지는 몰라. 그냥, 마지막으로 본 게... 우리가 러시아 땅을 헤메고 있을 때라는 것 뿐이야."


"그래? 일단 마지막으로 본 장소라도 가서 찾아보자. 그 근처에서 살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엘븐, 이대로 쭉 북상하자!"


"오-케이!"


엘븐이 차의 속도를 높였다. 더치걸이 꼬물꼬물 컨테이너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자 이번엔 이그니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인간님. 그 러시아로 간다는 결정 말인데요... 반대하는 건 아닌데, 알아둬야 할 게 있습니다."


"응? 뭔데?"


"러시아는 레모네이드 감마 양의 영토입니다. 제가 거기서 제조됐거든요."


"뭐!?"


러시아가 감마 땅이었다고!? 그건 몰랐는데? 미국 유럽 러시아 그 거대한 땅들은 다 레모네이드 과격파 셋이 나란히 먹은 상태였던 거야!?


"아, 그치만 레모네이드 감마 양은 수군 위주로 운용하는 모양이라 그녀의 주요 거점은 전부 해안에 배치되어 있으니 내륙 안에서만 움직인다면 비교적 안전할 겁니다. 뭣보다 그녀 본인은 거의 항상 바다에 나가있는 편이고요."


"그... 그래? 그래도 일단 주의는 해둬야겠네, 그럼..."


러시아에서 만나게 될 건 아군일까, 적일까, 아님 둘 다일까. 우린 불안감을 마음 한 구석에 새겨둔 채로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음... 저기, 인간님. 하나만 더 묻고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응? 괜찮아, 뭔데?"


"휩노스 병이란 게 뭔가요? 무슨 위험한 병인가요?"


"...잠깐, 너희들 인류가 멸망한 게 휩노스 병 때문인거 모르는 거야?"


"네? 철충 때문에 멸망한 게 아니었나요?"


"어? 나도 철충한테 다 죽은건줄 알았는데? 얘, 더치걸! 넌 알고 있었어?"


"아니... 금시초문인데..."


"나와 LRL은 휩노스 병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있다네. 레모네이드가 그것 때문에 냉동수면 상태의 펙스 회장들을 깨우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사실도. 애초에 오르카호에 첩자로서 투입된 이유가 그 병의 치료제를 알아내기 위해서였으니 필요한 만큼의 정보는 들었지."


"뭐야, 펙스 회장이 계속 동면상태를 유지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 처음 들어!"


생각해보니 이그니스와 엘븐은 멸망 후 제조된 개체인데다 레모네이드가 딱히 역사 공부를 시켜주지도 않았을테고, 더치걸은 멸망 전 생존개체라 해도 딱히 인간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하면서 임종을 지켜본 것도 아닐테니 모를 법도 했다. 그냥 전쟁통에 숨어살다가 어느날 잠잠해지자 인간이 다 죽었다고 짐작하고 밖으로 나온 거라고 했으니.


"그게, 철충이 인류의 수를 한 9할 정도 줄이긴 했지만 전쟁 막바지에 결정타를 가한 건 휩노스 병이야. 휩노스 병이란 게 뭐냐면..."


어차피 시간은 차고 넘친다. 나는 가는 길 동안 느긋히 다른 애들한테 역사공부나 시켜주게 되었다. 게임 밖 출신인 내가 게임 속 인물들한테 그 게임 세계관을 설명하고 있다니, 뭔가 묘한 느낌이다.



-그래,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를 위해서-


이걸로 북한 에피소드도 끝. 결국 쉐이드는 영입하지 못했고 신원불명의 유전자 씨앗만 받아왔지만

다음편에선 제대로 여섯번째 동료 각 볼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