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잘 오셨어요, 아스널 대장.”

 

아스널은 리앤의 마중을 받으며 칸이 있는 병실 문 앞에 섰다. 오르카호에 다섯 밖에 없는 장성 계급 중 하나가 저지른 전대미문의 사건이 갖는 막중함을 지적이라도 하듯 칸의 병실은 들어오는 입구부터가 080기관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이 사안에 내가 호출될 줄은 몰랐군.”

 

“글쎄요, 아스널 대장 외에 달리 부를 분도 없었죠.”

 

자신도 개인 자격으로 찾아왔으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으리라고 생각한 아스널은 자신을 부른 사령관의 속내를 슬쩍 떠보려고 질문을 던졌다. 사령관과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리앤에게서 뭔가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리앤은 능수능란하게 아스널의 낚시찌를 피해갔다. 리앤은 원하는 정보는 주겠지만 주도권은 자신이 쥐겠음을 넌지시 암시하며 아스널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리죠.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내드린 서류를 읽으셨을 테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현재 칸 대장은 철저하게 대화를 거부하고 있어요. 왓슨에게서 리마토르 교수와 칸 대장을 접촉해도 된다는 허가가 내려왔지만 형사의 경험상 이 상태로 둘을 대면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요.

 

사건 동기는 무엇이며, 그 결과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는지 개괄적인 물증과 심증은 있어요. 하지만 그걸 엮어내기 위한 다리는 부족한 상황이라 칸 대장의 진술이 필요한 상황이죠. 아스널 대장이 칸 대장과 리마토르 교수와 오랫동안 교류한 만큼 라포(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정서적 유대감)도 많이 쌓여있고,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제가 부탁드린 부분을 알아봐주었으면 해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에 아스널은 이 자리가 감정적으로 많이 껄끄러웠다. 그녀가 공인된 임상심리학자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내담자의 심정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채 심리를 파헤치라는 일방적인 지시가 학문을 배우는 자이기 이전에 보편 윤리를 따르는 자의 입장에서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감정적인 불편함만으로 이 사건을 덮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마토르가 병상에서 헤겔을 강의하면서까지 칸을 붙잡아두려고 했던 광경을 바로 옆에서 본 그녀로서 둘의 관계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꼭 알아내고 싶었다. 사랑을 알고 싶어서 임상심리학자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만큼 아스널은 사랑의 연속된 극단을 보여주는 이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려운 부탁이군. 일단은 해보도록 하지.”

 

“부탁해요.”

 

아스널은 병실 문을 열었다.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병실 안에 있는 칸의 냉혹한 방어기제의 영향을 받은 듯해 그녀의 본능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음에도 전선이 주는 긴장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떨림에 아스널은 숨을 삼켰다.

 

병실 안의 칸은 그녀가 들어오자 눈동자만 굴려 얼굴을 훑었다. 껍데기만 남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칸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찰나지만 온 몸에 돋는 소름에 불현듯 아스널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공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라고 착각할 정도로 가득 차 있는 심연이 칸의 눈동자에 있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심연을 들여다보게 될 것을 직감한 아스널은 집중력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심연을 들여다보는 동안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볼 것이기에, 그녀는 심연에 먹히지 않기 위해 이성의 밧줄을 몸에 두르고 나아가야만 했다.

 

“칸, 이야기는 들었네.”

 

“그럼 돌아가. 할 말 없어.”

 

말의 첫 운을 떼려는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스널이 무슨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칸은 단칼에 대화를 거부했다. 축구가 시작하고 3초도 안 되어서 첫 골을 먹힌 상황에 아스널은 당황 반, 멋쩍음 반으로 리앤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앤은 ‘이런 상태에요’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스널은 시작부터 봉착한 난관에 마른 침을 삼키며 분석에 착수했다.

 

‘방어기제가 매우 단단해. 다른 이도 아니고 오르카호에서 심문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경력과 실력을 가진 리앤이 칸의 진술을 받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이미 그 견고함은 입증이 됐어.

 

이 견고함의 근거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방어기제가 굳건하면 어떤 태도로 나오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자신은 듣지 않겠다는 자세야. 대표적으로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거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이 둘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

 

칸의 경우에도 이를 대입해보면 윤곽이 잡혀. 칸은 자신의 행동이 철저히 옳은 선택지를 고른 결과라고 믿고 있는 거야. 리마토르의 상태가 어떻게 되던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 가지 분석을 덧붙일 수 있겠지. 리마토르가 다치든 말든 그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으며 핵심은 따로 있다는 것.

 

이 핵심이 뭐지? 둘의 관계가 연인이었음을 고려하면 여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관계 문제로 귀결돼. 칸은 리마토르가 자신에게 주는 사랑이 진실하지 않음을 의심했고, 리마토르는 칸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 둘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점이 형성되었다면 큰 문제없이 상황이 유지되겠지만 이 둘 사이의 균형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로 불거지지. 리마토르가 칸에게 주는 사랑이 많은 경우라면 자녀 계획을 몇 명으로 하는가가 문제가 될 테고, 칸이 리마토르를 향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가 더 많은 경우라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겠지. 현 상황을 보면 불행히도 후자가 벌어졌던 것 같아.

 

사랑의 순수함을 의심하게 된 칸은 리마토르의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야. 리마토르가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들이밀어도 칸이 채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칸은 이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리마토르에게서 찾았겠지만 사실은 본인에게 달려 있었어.’

 

일련의 생각을 쭉 잇자 아스널은 현재 칸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절반정도 알 수 있었다. 더 구체적인 심리 상태를 알고자 여러 검사를 시행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남아있는 칸의 심리 절반을 읽어내야만 했다. 여태까지 얻은 소결론과 근거들을 모아 연결점을 맞추던 아스널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어느 시점부터 칸은 리마토르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어. ‘인간 리마토르’와 ‘리마토르의 사랑’을 별개로 보고 접근했고, 그 결과 인간 리마토르가 어찌되든 리마토르의 사랑을 손에 넣으면 된다고 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리마토르의 팔을 부러뜨리고 마약까지 주사하는 행동까지 했겠지.

 

칸이 보기에는 자의를 잃고 인형이 되어버린 리마토르라도 자신에게 사랑을 주면 충분했을 테니까.’

 

결론에 도달한 아스널은 식은 땀 한 줄기가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입 밖으로 꺼낸 것도 아니고 생각을 갈무리한 것에 불과한데도 간담이 서늘했다. 사랑을 위해 다른 이를 수단으로만 보는 경우는 사례집을 보다가 몇 번 읽은 기억이 있지만, 수단화한 대상이 사랑하는 연인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망가뜨려서라도 사랑을 얻고자 했던 칸의 의지가 깊이 모를 심연을 채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널의 눈에 새카만 칠흑이 비쳤고, 눈동자에 비친 칠흑은 아스널을 눈에 담았다. 그녀 속의 칠흑 속의 그녀 속의 칠흑. 셀 수 없이 유한한, 어쩌면 무한할지도 모를 연쇄에 빠진 아스널은 자신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깨달았다. 가장 안쪽의 근육부터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것 참. 이래서는 안 되지. 내담자를 두려워하는 상담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아스널은 자신이 누구로 왔는지를 상기했다. 칸의 동료이자 둘 사이의 관찰자로 온 게 아니라, 이 사건에서 칸의 심리를 풀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임상심리학자로서 온 것이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을 명료히 한 아스널은 심연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원인이 보이자 해답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칸은 리마토르와 그의 사랑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어. 그걸 통합하면 방어기제는 알아서 허물어지겠지. 칸트가 나눈 인식계와 물자체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한 헤겔처럼, 나도 칸의 사랑을 꿰뚫는 절대정신을 제공해주는 거야.’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기억에서 얻은 철학적 지식과 심리학도의 길을 걸으며 공부한 심리학적 지식을 합쳐 길을 만들었다. 칸의 마음에 걸린 자물쇠를 풀 열쇠를 찾은 그녀는 닫았던 말문을 열었다.

 

“칸, 리마토르와 리마토르의 사랑이 별개일까?”

 

아스널의 질문에 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를 포착한 아스널은 그녀가 정곡을 찔렸음을 파악했다. 인간이라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미세한 장면까지 모두 읽을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의 이점을 십분 발휘해 아스널은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다.

 

“리마토르의 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단 하나. 그 출처가 리마토르이기 때문이지. 그럼 이 둘은 처음부터 한 덩어리잖아? 안 그래?”

 

“듣기 싫어. 궤변 늘어놓지 말고 나가.”

 

칸은 방어기제를 두르고 그 안에서 빗장을 걸어 잠갔다. 내담자가 상담을 거부하면 더 이상 진척할 수 없지만, 아스널은 빗장을 분해할 수 있도록 밖에서 만능열쇠를 넣고 핀을 돌리는 선택지를 골랐다.

 

“리마토르의 사랑에서 수식어를 제거하면 남는 건 ‘사랑’뿐. 칸 네가 추구하는 게 사랑이라면 수식어가 누가 붙든 안 중요하겠지. 사령관의 사랑이라고 해도 문제없지 않나?”

 

“입 다물어! 마음대로 지껄이지 마!”

 

“네가 말하는 이분법에 따르면 성립하는 논리야.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관계는 그 자체로는 보통 명사에 불과해. 유대감, 증오 같은 보통 명사를 고유 명사로 바꾸는 건 ‘누구의 감정’이냐는 수식어지. 탈론 페더의 유대감, 오메가의 증오처럼 말이야.

 

사랑도 마찬가지지. 사랑을 추구하는 건 보통 명사로서의 사랑을 좇는 데 지나지 않아. 누구의 사랑인지가 사안의 핵심이지. 칸 네가 ‘리마토르의 사랑’을 위해 ‘인간 리마토르’를 무시했다면, 넌 이미 사랑을 이루는 데 실패한 거야. 거칠게 말하면 사령관의 사랑이든, 펙스 일곱 노괴의 사랑이든 ‘사랑’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이려고 했겠지.”

 

“닥쳐!! 그 입을 찢어버리겠어!!!!!”

 

정도를 넘는 아스널의 발언에 칸은 격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폭발했다. 힘으로 결박을 뜯어내다시피 해서 푼 칸은 아스널의 입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스널에게 닿기도 전에 리앤이 재빠르게 전기충격탄을 발사해 칸을 제압했다. 칸은 전기충격 때문에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면서도 분노에 찬 눈을 치뜨고 아스널에게 뛰어들었지만, 이번에는 아스널의 주먹이 더 빨랐다. 강건한 주먹으로 칸의 뺨을 정통으로 후려갈긴 아스널은 바닥에 동댕이쳐진 칸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왜. 아픈가? 자신의 사랑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나?”

 

“죽여버리겠어....!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닭모이로 뿌려버릴 거야...!”

 

찢어진 입안에서 흐르는 피를 한 움큼 뱉어내고도 칸은 아스널을 향한 분노를 불태웠다. 아스널은 감정이 올라와 방어기제가 흩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리마토르도 이런 심정이었을 테다. 리마토르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었어. ‘칸을 위한 사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고유명사였지. 리마토르는 고유명사로서의 사랑을 주려고 했지만, 본인의 심정이 어떻든 그건 보통명사로 격하당하고 신뢰받지 못했겠지.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사랑을 받을 상대인 칸, 바로 너한테.

 

리마토르를 사랑해서 이런 짓을 벌였겠지. 하지만 넌 아주 중요한 점을 간과했어.

 

사랑은 그 자체보다 출처가 더 중요하다는 점 말이야.”

 

아스널의 말이 활활 타오르는 칸의 머리에 차갑게 박혔다. 자신의 사랑을 모욕한 아스널을 잿더미로 만들 것처럼 맹렬한 분노는 거울 앞을 마주하자 잠시 움찔거렸다. 거울에 비친 분노의 상은 그녀가 아니라 리마토르였다.

 

“....”

 

칸은 입을 다물었다. 리마토르에게 어떤 수단을 취해서라도 사랑을 얻어낸다면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사랑을 받은 이가 자신임을 확고히 하면 하르페이아도 떨어져나갈 테고, 불안해진 리마토르와의 관계도 전처럼 견고해질 거라 믿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위한 일이라고도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칸, 지금 옆방에는 리마토르가 있어. 네가 진정 리마토르를 사랑하는 게 맞다면 제대로 보라고.”

 

칸의 생각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타격은 입었다고 판단한 아스널은 리앤에게 도움을 구해 칸을 옆에서 받쳐 들었다. 만일에 대비해 전기충격탄을 칸의 몸에서 떼지 않은 둘은 리마토르의 병상에서도 칸을 멀찍이 떨어뜨려 놨다. 아스널은 칸의 방어기제를 완전히 해체하기 위한 쐐기를 박았다.

 

“네가 사랑을 얻고자 한 결과, 리마토르는 혼수상태에 빠졌어. 이래도 성공한 거야? 넌 리마토르의 사랑을 얻어냈어?

 

칸, 이게 정말 사랑이야?”

 

감정이 담긴 단호한 어조로 울려 퍼지는 아스널의 질문에 칸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그를 안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도, 그도 아무것도 그녀의 옆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뉜 것처럼 보였던 리마토르와 리마토르의 사랑이 사실 하나였다는 아스널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니야... 아.... 아니야... 난... 아니야...”

 

칸은 부정했다. 자신이 바란 건 이런 결과가 아니었다. 사랑을 추구했었지, 절대 그를 이렇게까지 악살박살내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니라는 말을 되뇌었다. 자신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아니야, 난 절대 이런 걸 바라지 않았어. 내가 이런 게 아니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의도가 없었다는 부정을 넘어 상황 자체를 부정하는 칸의 모습에서 아스널은 그녀의 방어기제가 무너졌음을 파악했다. 칸의 생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아스널은 한 번 더 강수를 두었다. 서류에서 읽은 리마토르의 몸상태를 떠올린 그녀는 리마토르의 병상에 다가가 상의를 들췄다. 그의 옆구리에는 아직 피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Carpe Diem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이 글씨를 새긴 건 너야, 칸.”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내가 그럴 리가 없어. 리마토르한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난 아니야. 절대 내가 한 게 아니야. 나는... 나는...”

 

“아니, 전부 네가 한 일이야.”

 

부정을 멈추지 않는 칸에게 아스널은 또박또박 말했다. 현실로 돌아오라는 엄중한 선고를 받은 칸은 더 이상 합리화의 영역에 머무를 수 없었다. 아니라는 말을 아무리 갖다 붙여도 감출 수 없는 진실을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리마토르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다는 사실.

 

찢어진 입에서 흐르던 피는 어느새 굳어 검붉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칸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이 검붉은 색이 아니라 새빨간 색인 착각을 느꼈다. 갓 몸에서 나온 빨간 피는 리마토르를 근원으로 두고 있었다. 한순간 보였다가 사라진 착각이었으나, 칸은 착각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은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은유였다.

 

칸은 더 이상 이성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결과를 마주한 그녀는 의식을 놓는 선택지를 골랐다.

 

“앗! 칸 대장!”

 

“이제 됐군. 일어나면 심문에 제대로 응할 걸세.”

 

의식을 잃은 칸이 쓰러져 축 늘어지자 리앤은 다급히 그녀의 건강을 살폈다. 예상 밖의 상황에 황급히 대처하는 리앤과 달리 예상 안의 결과라고 생각한 아스널은 담담히 의뢰 성공을 통보했다.

 

“대단하시네요... 칸 대장을 그렇게 밀어붙일 줄은 몰랐어요.”

 

리앤이 감탄하며 놀라운 시선을 보내자 아스널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자신의 상담 과정을 돌이켜본 그녀는 자신이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다고 한계를 인정했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감정적으로 공격해서는 안 돼.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칸에게 접근했어. 이래서는 심리학도로서 실격이야.”

 

“그런가요? 제가 보기에는 안 그런 거 같은데요?”

 

“아니, 아직 난 멀었어.”

 

리앤의 되물음에도 아스널은 고개를 저었다. 둘은 쓰러진 칸을 원래 병실로 옮긴 뒤 사령관에게 보고를 올렸다. 상황을 들은 사령관은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젠장...”

 

두통의 근원은 죄책감이었다. 아스널의 보고로 칸의 사랑이 얼마나 뒤틀려있었는지 밝혀지자 리마토르의 평가도 더욱 올라갔다. 수틀릴 대로 수틀린 칸의 사랑을 오롯이 받아내려고 한 리마토르의 인격적인 그릇은 그가 의심했던 구 인류의 모습을 아주 조금의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칸이 그에게 했던 잘못이 명백할수록 자신이 그에게 저지른 죄업도 커져갔다.

 

“내 독단으로 한 사람이 산산조각 났어. 구 인류와 다르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구 인류와 같은 부류일 거라 예단하고 공작을 지시한 결과가 이런데... 난... 제기랄...”

 

사령관은 쓰린 속을 억누르며 관자놀이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오르카호를 위협할 구 인류를 타인에게서 열심히 찾았지만 그건 그른 판단이었다. 구 인류는 자신이었다. 철충에 맞서 싸웠지만 사실 자신이 철충 감염체였다는 걸 깨달았던 라비아타와의 첫 대면 때처럼, 타인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사실상 죽는 결과까지 방치한 자신이야말로 그토록 제거하려고 했던 구 인류였다.

 

속이 메스꺼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알량한 자기합리화에서 나온 것 같아 사령관은 머리를 조이는 두통처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사령관은 씻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지만, 조금이나마 수습해야할 책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닥터에게 연락을 건 그는 리마토르를 위한 구체적인 치료 방법을 지시했다. 사후약방문일지라 해도 그는 리마토르에게 책임을 져야만 했다.

 


“닥터, 신체재건장치 가동을 허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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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리마토르가 의식을 못 찾은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봤어. 사족으로 이번 편에서 나온 심리학도 아스널의 모습에 대해 조금 부연하자면, 이 소설에서 아스널은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지 상담심리학을 전공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캐릭터성을 살리기 위해 심리검사를 하는 장면을 넣으려고 했는데 내가 그 분야를 전공한 게 아니라 지식이 없기도 하고, 심리검사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서 올리는 게 오염(수검자가 검사를 조작하는 행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찾아서 이번 편은 상담심리학자로서의 측면을 더 부각하게 되었어. 임상심리학자 아스널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 묘사할지 더 고민해서 등장시킬게.


부족한 글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다. 다들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