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정리해보자. 북한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중국 아님 러시아로 갈 수 있다. 중국은 멸망 전엔 바이오로이드를 전면금지하고 AGS만 대량으로 찍어냈었다. 홍콩이랑 대만은 중국에 먹히지 않고 건재했던 모양이지만, 그러니까 티에치엔이랑 소완이 나왔지.


요점은 중국은 철충 입장에선 그냥 뷔페라는 거다. 지금 중국 대륙엔 십중팔구 철충이 득실거릴테니 거긴 절대로 발을 들여선 안된다.


반면 러시아는... 뭐 러시아에 관한 설정은 별로 알려진 게 없네. 러시아에서 호드랑 발할라가 싸워서 호드가 이기고, 거기서 큰 공을 세운 케시크가 최초의 칸이 되었다는 거랑 레모네이드 시리즈의 창시자인 안나 보르비예프 박사가 러시아 출신이라는 것 뿐. 둘 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다.


이그니스의 정보에 의하면 현재 러시아는 레모네이드 감마의 영토라고 한다. 그 부분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별 수 있나. 중국보다야 낫겠지. 어차피 더치걸이 말한 또다른 생존자 바이오로이드(아마 노움일 거라고 생각한다)를 찾으려면 러시아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렇게 며칠간 트럭을 몰아 황무지를 횡단하고 두만강의 다리를 건넌 우리는 러시아 땅에 도착했다. 


"국경을 넘었는데도 살풍경한 건 여전하네."


"응. 이 근처엔 도시가 세워지지 않았었나봐. 건물 흔적도 없더라고."


엘븐이랑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던 중 더치걸이 뒷창문을 열고 끼어들었다.


"인간, 나랑 자리 바꾸자. 내가 길 안내해야 할 테니까."


"아, 그게 좋겠다. 잠깐 차 세울게. 괜찮지?"


"응. 그러자."


트럭이 끼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멈추자 나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쭉 폈다. 동시에 트럭 뒤에 연결된 트레일러의 문이 열리면서 더치걸이 내렸다.


"엘븐 언니는 괜찮아? 운전할 수 있는게 언니밖에 없잖아. 나랑 LRL은 키가 작아서 안되고, 이그니스 언니는 전투모듈이 있으니 기습에 대비하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인간한테는 운전을 안시켜주고 있는데."


"하핫, 뭘. 산에서 발로 뛰어가며 일하던 때에 비하며 이 정도는 힘든 축에도 못끼지." 


더치걸이 조수석에 들어가며 안부를 묻자 엘븐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트레일러 안에 들어가 문을 닫자 이그니스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LRL은 그냥 앉아서 쳐다만 보고 있었고. 트레일러 안에는 의외로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턱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LRL과 이그니스가 그 위에 담요를 깔고 앉아있었다.


"인간님, 여기 앉으세요. 더치가 앉던 자리라 아직 따듯합니다."


이그니스가 자기 옆 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자 사양앉고 엉덩이를 붙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트레일러도 덩달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동안엔 몰랐는데,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동안 이 딱딱한 자리 위에서 버티는 건 생각보다 힘들 것 같다.


"이거 엉덩이 좀 아파지겠는데..."


"아... 그럼 제 무릎 위에 앉을래요?"


"아니아니,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근데 드론은 어디갔어?"


"가방 안에. 지금 절전모드래."


나는 가방 안에 참치캔과 같이 담겨져있는 드론을 한번 보고선 이 트레일러 안 한가운데에 벨트로 묶어 고정시킨 엘븐과 이그니스의 외골격 장비로 눈을 돌렸다. 짐은 그것 뿐이었다. 더치걸이 쓰던 드릴은 쉐이드와의 싸움으로 못쓰게 돼버려 버리고 왔으니.


"이제 더치걸도 비무장 상태가 돼버린거구나. 비록 전투모듈이 없긴 해도 뭔가 무기를 들고다녀야 좋겠는데... 호신용으로라도..."


나는 현재 일행이 가진 무장을 한번 정리해보았다. 이그니스는 소각 장비를 화염방사기처럼 쓸 수 있지만 화염방사기라는 무기 자체가 대인전에서나 쓸만한지, 로봇 상대로는 큰 효과가 없다. 뭐, 미래 화염방사기니까 로봇들을 녹일 정도로 강력한 거일 수도 있지만... 게임에서도 이걸로 철충 잡기도 했고. 


엘븐은 초목 관리용 장비로 물대포를 쏘거나 집게손으로 직접 팰 수가 있다지만... 물대포로 적셔서 침수 상태로 만들어봤자 감전시킬 전기딜러나 얼려버릴 냉기딜러가 없다. 전투모듈도 없는데 총 쏘는 로봇들을 상대로 직접 다가가 팬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좌우좌는 눈에서 강렬한 빛을 내서 적을 일시적으로 실명시킬 수 있긴 하지만 그거 외엔 이 빠진 소방도끼 뿐이니 결국 얘도 비무장 상태나 다름없다. 드론도 아무래도 실질적인 전투력은 애매한 편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쪽에 있는 창문을 열고 운전석 쪽에 고개를 내밀었다. 더치걸이 엘븐한테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는 게 보였다.


"더치걸, 네가 새 무기로 쓸만한 뭔가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총이라도 찾으면 쓸 수 있겠어?"


"뭐? 난 총 쏠 줄 몰라. 내겐 전투모듈이 없다니까. 총 쥐는 방법도, 조준하는 방법도, 장전하는 방법도 몰라. 그냥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된다는 것만 알고있을 뿐이야."


"어... 그래도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바이오로이드 상대라면 허공에 총 쏘기만 해도 움츠러들겠지만 철충한텐 안먹힐걸. 맞출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야."


"그런가..."


"굳이 나한테 뭘 쥐어주겠다면 몽둥이같은 둔기류나... 아님 곡괭이, 그런 게 좋겠어."


전에 쓰던 곡괭이는 두고 왔는데, 더치걸이 중얼거렸다. 그 때 등 뒤에서 이그니스와 LRL이 얘기를 나누는 게 들리자 나는 창문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LRL 양은 항상 권총을 지니고 다니던데, 총을 잘 쏘는 건가요?"


"이건 비상용 조명탄이야. 진짜 총이 아니라. 내 위치 알려주는 용도로밖에 못 써."


 


나는 LRL이 허리춤에 차고있는 빨간색 조명탄을 바라봤다. 그래도 총은 총이니 사람한테 맞추면 최소 타박상과 화상 정도는 입힐 수 있겠지만 역시 철충이나 로봇한테는 안통하겠지.


***


"도착했어. 여기야."


차가 멈춘 곳은 한 산길이었다. 차에서 내린 뒤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더치걸을 따라 조금 걷다보니 무슨 건물 1층 높이만한 절벽에 도착했다. 절벽 밑은 울창한 숲이었다. 러시아면 막 시베리아처럼 뾰족뾰족한 침엽수가 잔뜩 깔려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있는 건 활엽수 뿐이었다. 아직 러시아의 남동쪽 가장자리라 그런가.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봤던 데가... 여기라고?"


"그 때 발을 헛디뎌서 이 절벽 밑으로 떨어졌었어. 가까운 곳에 올라갈 길도 없어서 난감해하던 때에 그 언니가 나타났지. 마침 그 근처에서 걷고 있었는데 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고 하더라고. 사정을 설명하니까 자기한테 맡기라면서 나를 등에 업고 이 절벽을 올라왔어. ...그 큰 가슴때문에 절벽에 달라붙는 데 애를 먹었지만. 나 때문에 옷도 좀 찢어졌고."


"와... 되게 좋은 사람이네."


"응. 그치만 결국은 이름도 안알려주고 떠났어."


"그런데, 걔는 왜 너희들과 합류하지 않고 떠났던 거야?"


"목적이 달랐거든. 우린 그냥 안전한 데 정착해서 조용히 살려고 했지만 그 언니는 더 많은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모험을 멈출 수 없다고 했어."


"헌신적인 분이네요. 꼭 영웅같아요."


마침 높이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보던 드론이 내려왔다.


"어때? 누가 보여?"


"전혀. 우리 말고 움직이는 거라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뿐일세. 사람은 커녕 사람이 살던 흔적도 안보이는구만."


"여기 없나보네. 그 노움이란 여자 찾는 건 포기하자. 솔직히 지금도 너무 많은데 여기서 더 늘어나는 건 질색이야."


근처에 없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LRL이 냅다 결론지어버렸다.


"또 그 소리... 전에 쉐이드한테 쫓길 때 잊었어? 그 때도 다섯 명이여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잖아. 더 위험한 적과 마주치기 전에 몸집을 불려야 한다고. 더치걸, 어디로 갔는지 단서가 될 만한 건..."


"없어. 하지만 내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 언니는 반대 방향으로 갔다는 건 기억해."


"으흠... 일단 계속 북쪽으로 가보자. 여기선 얻을 게 아무것도 없어보여."


마땅한 목적지도 없이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산길 한가운데서 노숙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엘븐 양."


"응? 무슨 일이야, 이그니스?"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면 이건 명심해두세요. 절대로 해안에 가까이 가서는 안됩니다."


"아아, 그 레모네이드의 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정말로 있습니다, 가까이에. 블라디보스토크는 현재 레모네이드 감마 양의 군사기지 중 하나입니다. 그 일대는 수시로 정찰기가 날아다니니 결코 발을 들여서는 안됩니다."


꾸준히 이름 뒤에 양을 붙여주는 것과는 별개로 감마의 위험성을 연신 강조하는 이그니스의 모습에 엘븐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저기, 이그니스? 잠깐 끼어들어도 될까? 내가 러시아 지명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 블라디보스토크가 어디쯤에 있는거야?"


"러시아 극동 지방의 최남부 가장자리에 위치한 군사기지 겸 항구도시입니다. 지리상 저희가 건너왔던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죠. 현재 위치에서 차를 타고 서너 시간 이동하면 도착할 거리입니다."


"서너 시간 거리면 아직 걱정하기엔 여유가 있는 거... 아닌가?"


"아뇨. 만약 저희들의 위치가 발각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인터셉터를 띄울 경우 그 인터셉터가 15분 내로 날아와서 저흴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으... 알았어. 최대한 서쪽으로 가면 되는거지?"


"엘븐 양, 서쪽은 중국인 걸 잊지마세요. 중국 국경에 가까이 갔다간 역으로 철충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 중간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거네 그럼... 지도도 없는데 이거 골치아프게 됐는걸. 일단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절해보긴 할게. 다들 차에 타."


***


한참을 달리다가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 때 즈음 유리창 너머로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폐허밖에 안남은 것으로 보아 레모네이드 감마가 점령한 장소가 아니라 인류가 멸망한 뒤 그대로 방치된 모양이다.


마침 차의 기름이 거의 다 떨어져가던 참이라 차에 탄 채로 마을 안까지 들어가는 대신 마을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이 마을에서 휘발유를 포함해 쓸만한 물자를 찾아야겠다고 판단한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렸고, 엘븐과 이그니스가 장비 착용을 마친걸 확인한 나는 한 걸음 앞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 잠깐."


정정한다, 들어가려고 했었다. LRL이 갑자기 불러세우지만 않았었다면 말이지.


"왜그래?"


"철충이 숨어있을 지도 몰라. 넌 트럭에 남아있는 게 좋겠어."


"엑."


나만 혼자 남겨두고 가겠다고? 마을을 슥 둘러봤으나 텅 빈 거리와 다 무너져가는 단층 건물, 그리고 도로에 널린 폐차밖에 안보였다.


"이런 깡촌에 철충이 남아있을까?"


"그걸 모르니까 이러는거지. 정말로 철충이랑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큰일이라고. 어서 이리로 와."


"아니,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당장 차에 타!"


LRL이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고 트럭 쪽으로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도 만류하긴 커녕 다들 LRL의 의견에 동조했다.


"LRL양 말이 맞습니다. 필요한 물품을 찾는 건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잠깐만, 난 지금 뇌파를 가린 상태잖아?"


"그러니까 더 숨어야지! 공격 명령도 내릴 수 없는 처지인데!"


"그게 아니라, 내가 뇌파를 뿜지 않은 이상 철충도 나를 인간이 아니라 바이오로이드나 그런 걸로 인식하지 않을까?"


"철충이 우리처럼 뇌파를 감지할 수 있다는 말은 못들어봤는데..."


"나도 확신은 없지만, 철충이 이상할 정도로 인간을 잘 찾아내는 데다가 바이오로이드랑 인간을 구분해서 인간만 죽이고 다녔었잖아? 그럼 걔들도 뇌파 감지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가능성은 있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인간이지. 그걸 들켜서 철충이 공격하기 시작하면 지켜주기도 힘들어. 그러니 얌전히 안에 들어가있어!"


어느새 트럭 트레일러 앞에 도착하자 LRL이 문을 열고선 내 등을 떠밀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먹을 거 잔뜩 찾아서 돌아올게!"


"그... 다녀올게."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인간님."


"이거 참, 자네 혼자만 남겨두기엔 좀 불안하구만. 그렇지만 탐색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으음, 별 일 없어야 할텐데."


다들 한 마디씩 하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심지어 드론까지.


"뭐야, 너도 가는거야? 넌 AGS잖아, 철충한테 감염될 수 있는..."


"난 사이즈 때문에 감염이 불가능한 몸일세. 너무 작아서 철충 유충이 나한테 기생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지. 게다가 내가 드론 08 모델은 아니더라도 짐 옮길 능력은 충분히 되네.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나."


드론이 말을 마치자 LRL이 허리춤에 차고있던 빨간 권총 형태의 조명탄을 꺼내서 내 손에 쥐어줬다. 


"자. 이거 갖고있어."


"이건 그... 조명탄?" 


"사용법은 보면 알지?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밖에 나와서 그걸 쏴."


"...알았어. 신경써줘서 고마-"


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다들 그대로 탐사에 떠나버려 이제 이 안에는 나 혼자밖에 안남았다. 그래도 차에 시동은 걸어놓은 채로 가서 춥지는 않다. 다만... 심심하다. 나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에 감옥에 갇혀있을 때가 생각나네. 그 땐 그래도 시계도 있었고 창문도 있었는데 여긴 사방이 막혀있으니 (운전석으로 이어지는 창문은 창문이라고 보기 힘드니까) 괜히 답답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감옥이 더 낫다는 건 아니지만.


말 나온 김에, 지금쯤 오르카호는 어디서 뭐 하고 있는거지. 장미 이벤트는 마쳤을테고, 장미 다음이 메인스토리의 9지역인데... 벌써 미국에 가서 감마의 군대랑 한바탕 했으려나. 아니, 9지역은 처음으로 각잡고 펙스랑 맞붙는만큼 오랫동안 준비를 해야 할 테니 아직 전쟁 준비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대규모 작전을 목전에 두고있다면 야생을 떠돌아다니는 두번째 인간 따위는 무시할 법도 하지. 어쩐지 추격대가 금방 안오게 됐더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애들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나? 아니, 떠난 지 얼마 안됐으니 돌아오려면 더 기다려야 되겠지. 게임에서도 탐색 한 번 보내면 몇 시간씩 나가있고는 했었으니까. 근데 그럼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거지? 휴대폰이나 책 같은 시간 때울 거리도 없고. 차라리 잠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잠도 안온다. 화장실 가고싶어지면 어떡하지? 애들 오려면 아직 멀었나...


...잠깐 바람 쐬고 오는 정도는 괜찮겠지.


다행히 애들이 문을 잠궈놓고 간다거나 하진 않았다. 문을 조금만 열고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직 탐사 마치고 돌아오려면 멀은 것 같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소리내지 않으려고 살살 열었는데도 끼익 소리가 났다. 


바깥은 벌써 밤이었다. 나는 트럭 근처를 벗어나지 않고 트럭 주변만 계속 맴돌거나 트레일러에 기대서서 멍하니 마을을 쳐다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 때 저 멀리서 뭔가 빨간 빛이 반짝였다. 뭐였지 싶어 자세히 보려했으나 방금의 그 빛은 더이상 나지 않았는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로 차에 타려고 문에 손을 대려던 그 때 뒤에서 쉬잉 하고 뭔가 날아오는 듯한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드론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였다.


"드론?"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내 뒤에 둥둥 떠있는 드론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그 드론은 내가 알고있는, 여태껏 나랑 같이 모험해왔던 그 수리용 드론이 아니었다.


어떤 다른 기종의 드론이, 그것도 철충에 감염되어 기괴하게 뒤틀리고 렌즈에선 붉은 빛을 내뿜는 드론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1m 남짓한 거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드론과 눈이 마주친 상황(그 상대방한테 달려있는 건 눈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지만), 나는 놀라서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망쳐야 하나? 어디로? 트럭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서 문 닫고 농성할까? 그보다 이 거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섣불리 움직이면 총 맞는거 아냐? 아니, 가만히 있어도 공격할텐데. 아니 잠깐, 왜 공격을 안하고 있지?


온갖 잡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동안에도 철충은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그 외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나고, 내 심장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커졌을 즈음, 그 철충은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나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냅둔채로. 철충이 멀리 떨어지자 경직된 몸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살았다. 뇌파를 가린 게 효과가 있나보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그렇다고 냅다 트럭에 타서 문 잠그고 숨지는 않았다. 철충이 눈에 안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지는 걸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기에 저 멀리 사라지는 철충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마을 방향으로 날아가던 철충이 다른 철충 몇마리와 합류하는 모습이 보였다. 새로 나타난 놈들은 형태를 보아하니 감염된 램파트 2기와 감염된 펍헤드 1기로 보였다.


빨리 어디론가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넷이서 무슨 얘기라도 하는건지 그 자리에 모여서서 빨간 불빛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들자 내 손은 자연스레 주머니에 쑤셔박아둔 조명탄으로 이동했다. 조명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언제든지 뛸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꿨다. 그 다음 철충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몸을 돌린 순간, 나는 곧장 하늘을 향해 팔을 치켜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


바이오로이드 네 명과 AGS 한 기로 이루어진 탐색팀은 아직까지 마을을 수색하고 있었다. 여기는 레모네이드 감마의 세력권 밖이라 비교적 안전하게 물자를 찾을 수 있었지만 다음으로 마주칠 마을이나 도시도 그렇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가능한한 최대한의 물자를 찾아놔야 했기 때문이다. 그 중 LRL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집중하지 못하고 트럭을 세워둔 방향을 쳐다봤다. 이미 트럭은 보이지도 않는데도.


"LRL 양. 인간님이 걱정되시나요?"


이그니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LRL은 대꾸없이 고개만 살짝 돌려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럼에도 이그니스는 상관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철충은 인간이 아닌 바이오로이드는 왠만해선 공격하지 않는데다, 쉐이드가 한 말에 따르면 AGS는 지금의 인간님을 바이오로이드로 인식한다고요. 설령 인간님이 들킨다 하더라도 공격하진 않을거에요."


"맞아! 좀 전에 봤던 철충 기억나? 그, 펍헤드에 기생한 모양새였던 녀석 있잖아. 그 녀석, 우리랑 마주쳤는데도 그냥 무시하고 갈 길 갔잖아. 인간도 괜찮을 거야."


엘븐도 같이 이그니스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LRL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선 그들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왠만해선, 이란 건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야. 철충이 바이오로이드한테 선공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 인간이 아니라 바이오로이드만 있었는데도. 우리가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철충은 공격하지 않는다고? 정말로 그리 평화로운 놈들이었으면 세상에 남은 바이오로이드 수가 더 많았겠지."


"걱정을 가중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LRL 말이 맞네. 실제로 그런 기록이 있었다고 하더군."


LRL의 반박에 드론까지 가세하자 오히려 안심시키려던 이그니스와 엘븐의 얼굴이 굳었다.


"어, 어...!? 저기!"


그 때 뭔가를 보고 놀란 더치걸이 손가락을 쭉 뻗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 방향으로 쏠렸다. 어두컴컴한 밤하늘 한 가운데에 왠 불빛이 길게 꼬리를 남기며 떨어지고 있었다. 조명탄, 그것도 트럭이 있는 방향에서 쏘아올려진 것이었다.


"인간!!"


눈을 치켜뜬 LRL이 여태 모은 짐도 다 내팽개치고선 그 방향을 향해 전력질주했고, 곧이어 상황을 파악한 남은 인원들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


달렸다. 뒤에서 날 쫓아오는 철충을 피해 미친듯이 내달렸다. 


뇌파를 감췄는데도 인간인걸 들킨건지 아님 그냥 억까당한건지 철충이 나한테 마구 총알을 퍼붓기 시작했다. 트럭 뒤에 숨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드론 철충이 쏜 미사일에 맞은 트럭이 옆으로 넘어지는 걸 보자 안되겠다 싶어서 무작정 뛰었다.


마을에 숨어야 엄폐물로 쓸 게 많을듯 했지만 하필 철충이 마을 방향에서 나타난 바람에 반대쪽인 숲으로 뛰었어야만 했다. LRL 일행이 그 신호탄을 보고 달려오고 있어도 내가 계속 반대쪽으로 움직여선 거리가 좁혀지지 않겠지만 다른 수가 없다.


램파트 철충은 이쪽을 향해 달려오면서도 사방에 기관총을 쏴서 내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드론 철충은 내장된 미사일이 방금 쏜 그거 하나 뿐이었는지 더 공격하진 않고 있지만 하늘 위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게 내 위치를 계속 다른 철충한테 알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펍헤드 철충, 이게 제일 곤란한 녀석이다. 비교적 이동속도가 느린 램파트 철충이나 직접 공격을 안하는 드론 철충에 비해 이 망할 사족보행 로봇은 사냥견처럼 집요하게 나를 쫓아오고 있어서 나를 잠시도 쉬지 못하고 뛰도록 강요했다. 마치 몰이 사냥을 당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좌우좌! 더치걸! 아무도 없어!? 누구든 좋으니 좀 도와줘!!"


그러나 대답은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총성만이 귀아프게 들릴 뿐이었다. 내 바로 옆에 있던 나무가 기관총에 맞아 문자 그대로 찢겨져나가는 걸 보자 식겁한 나머지 급하게 방향을 틀려다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땅을 몇바퀴 구른 뒤 상체를 일으켜보니 어느새 펍헤드 철충이 코앞까지 온 게 보였다.


놈이 몸통박치기라도 하려는 건지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데도 피할 수도 없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 때, 누군가 휘두른 무언가에 얻어맞은 그 철충은 골프채에 맞은 골프공마냥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어...?"


"이제 괜찮아! 어째서냐고? 내가 왔으니까!"


낯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왠 포니테일 여자가 다가와 씩 웃어보였다. 그녀의 전신을 보자 이전에 더치걸이 언급했던 인상착의가 떠오른 나는 이 여자가 바로 더치걸을 구해줬던 그 바이오로이드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근데 노움이 아니잖아?


쿵쿵대며 램파트 철충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눈빛이 변한 그 여자는 곧바로 나와 철충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가 움직임에 따라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다란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너는... 어떻게 여기에...!?"


"행복과 우정의 상징, 클로버 에이스! 너의 간절한 외침이 나에게 들렸다 친우여!"


이윽고 램파트 철충이 발포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거대한 망치를 양손으로 쥐도록 자세를 고쳐잡은 그녀는 적을 향해 돌진했다.




노움 합류를 기대했다면 유감이지만


포니테일+거유+바디슈트+강함

거짓말은 안했다잉


이번이 본격적으로 철충과 맞붙는 에피소드인데

그놈의 뇌파 설정 때문에 여러번 갈아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