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오르카"



"대체 이 미친 업무량을 혼자 다 어떻게 처리한 거야.."


동쪽의 한 반도 지형 구석에서 주워진 한 남자가 사령관에 오른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에 와서는 기록 저장소에 있는 수많은 데이터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초대 인간 사령관의 역사적인 업적인데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모르는 소리. 역사는 한 갈래에서 시작됐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나가는 법이다. 아마 우리도 그렇게 되겠지. 그 사람이나 우리나 연대표로만 보면 별 차이 없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망할 아버지야.. 메뉴얼은 남겨놓고 가던가.."


제일 먼저 갈라진 7갈래니까.



1.

필연일까. 고의일까. 아버지가 들었다면 어느 쪽이든 기분 나빠했겠지. 그 정도로 질 나쁜 농담이었다. 아버지도 직접 겪진 못했겠지만, 알파 씨의 얘기는 알고 있을 테니 본인도 이 기묘한 우연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임신시킬 수는 없었다. 당연한 얘기다. 당시에도 수만 명은 있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명중시켜도 90년은 턱없이 모자라다. 인공 교배라는 방법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들이 원했던 것은 사랑의 결실이지, 과학의 결실이 아니었다.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는 계급과 직책에 상관없이 가장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7명의 어머니를 선정해 진실한 사랑을 나누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생으로 했다는 뜻이다. 그 덕에 나도 태어난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사람은 참 좋은데.. 정말 어떻게든 안 되는 문제였던 걸까.


"아들~!"



"여, 여기까진 무슨 일이세요? 오늘은 쉬시는 날이잖아요?"


"얘는! 엄마가 아들 보러 오는데 이유도 필요하니? 산책 겸 나왔다 들러봤어~."


아 제발. 왜 지금.


"그래서 뭐 하고 있었니?"



"아, 뭐, 그냥 보고서 올릴 게 좀 있어서요.. 앗."


"잠깐 가져와 봐. 어디.."



"아니에요. 휴일에는 쉬셔야죠. 이리 주세요."


"어차피 내가 볼 건데 뭐~. 흐음.. 이럴 줄 알았어. 아들?"


오 마이 오르카.


"양식부터 틀렸네? 이건 폐하가 아니라 다른 부서와 공유하는 용도니까 1번이 아니라 12번 양식을 따랐어야지. 그리고 복지 제도 개선에 쓸 최신 자료는 5번 기록 저장소에 있어. 또 습관처럼 3번으로 갔지? 보면 알아. 그리고 6번째 페이지 12번째 줄에 오타도.."


저 좀 구해주세요.


"말해준 것들 수정해서 내일까지 책상 위에 올려 주세요. 아셨죠?"



"네, 어머. 아니, 실장님.."


"호호. 그럼 집에서 보자꾸나. 술은 적당히 마시고."


문이 닫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앉은 자세가 풀어졌다. 세상에. 쉬는 날에도 직장에 와서 보고서를 체크하고 가는 어머니 겸 직장 상사라니. 이게 과연 맞는 인사 처리인가. 평소에도 아버지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오늘은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 식사 때 보자'는 어머니의 작별 인사도 '집에서 보자'는 상투적인 문구로 바뀌어 있었다. 그 좋은 능력을 아버지 골려 먹을 때도 사용하셨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필시 끓어가는 내 속도 예견하셨을테지. 그렇게 구시렁거리며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술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비가 왔으니 혼자 잔을 기울일 일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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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에 가기 싫어."


보드카가 깔린 글라스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몇 번째 잔인지도 잊어버렸다. 아무래도 간단한 산수 능력조차 술과 함께 들이켠 것 같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내 간은 일곱 명 중에서도 제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튼튼한 편이었다. 내 간아! 내 정신을 알코올과 함께 분해해 혈관 속으로 흝뿌려주렴! 그렇게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간에 대한 기도문을 올리고 있으니 바의 정문에 걸린 방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벌써부터 얼마나 드신 겁니까."



"댁이랑 먹을 양은 남겨뒀으니 걱정 마."



"하하. 그건 고맙네요."


들어온 녀석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주먹인사를 했다. 일부러 알고 들어오는 거 아닌가 싶은 정도로 녀석은 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을 때를 귀신같이 골라서 문을 여는 일이 많았다. '저런 것도 유전이 되는 건가' 싶어 언젠가 한 번 물어볼 생각이지만, 여기 온 걸로 보아 또 제 어미와 한 따까리 하고 온 게 분명해 목까지 차오른 마음을 오늘도 남은 술과 함께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건배!""



""건배.""



""건배..""



""짠.""



""짠..""


바텐더 아가씨를 병풍 삼아 한참 동안 술을 마시며 떨어진 텐션이 친구 놈을 만나 올라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명사가 감탄사로, 또 감탄사가 취성이 강할 뿐인 한낱 비커 간의 비탄성 충돌로 인한 부산물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취성, 취성이라.. 얼마나 우리와 어울리는 단어인가. 구부러질지언정 제 한 몸 바쳐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저마다의 파동을 외치며 명예를 지킬 우리여!.. 그래도 지금은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응석이나 부리게 해줬으면 한다.


.

.



"그러니까! 대체 왜 휴일에 출근을 하는 거야! 집에서 10km는 떨어져 있으면서 산책은 무슨! 속 보이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어차피 자기도 태어나서 해본 게 일밖에 없으니까 휴일에 할 걸 못 찾아서 다시 일하러 온 거잖아!"


오늘따라 푸념이 격하다. 아마 오늘은 뭔가 좀 안 풀린 모양이다. 지금껏 똑같은 레파토리를 수없이 듣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온종일 사무 일만 하다 보면 몸 안에 쌓인 화를 내보내기란 쉽지도 않고 기회도 적다. 지금 이 순간 실컷 풀고 가면 내일은 또 평소처럼 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녀석을 안쓰럽게 쳐다보니 이번에 푸념의 대상이 나로 바뀌어 있었다.



"야! 왜 나만 얘기해! 너도 뭐 있으니까 술 먹으러 온 거잖아! 빨리 말해! 안 그럼 못 가!"


어차피 마지막에 술병 껴안고 쓰러져 내 등에 업혀갈 녀석이 입만 살았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어서 변명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에 가기 싫어.."


정말 가기 싫다. 내 연구실에 있는 라꾸라꾸 침대에서 자게 해줘. 눈 뜨면 온갖 서류와 약품투성이인 곳이지만, 그래도 집보단 낫다. 적어도 연구실에 '어머니'는 안 계시니까.



"아, 음 어.. 똑같네."



"똑같지.."


짧은 문답이 끝난 후, 냉각된 분위기를 살리고자 녀석이 뱉은 말의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야, 근데 익숙해질 때도 안 됐냐?"



" ! 이 새끼가 지 일 아니라고!"



"아니, 20년 넘게 봤으면 이젠 그럴 만도.."



"그러니까 더 문제지! 이 복에 겨운 새끼야! 니가 뭘 알아!"



"야!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잖아!"



"지금 나이가 중요해?! 키가 문제라고 키가!"



"시발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새로운 몸 만들어서 기필코 우리 어머니 박아 넣는다! 알아들어?!"



"아, 알았으니까 소리 좀 줄여. 어머니한테 '박아 넣는다'가 뭐야."



"어! 꼭 키 170 넘는 장신으로 만들 거라고!"



"알겠으니까 닥쳐! 이 온수 속성 효자 색기야!"


아르민이 부탁한 냉수를 한껏 들이켜자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듯했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 바텐더를 포함해 주변에 사과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정신이 맑아질 것 같아 보드카를 한 잔 더 마셨다.



"맞다. 어머님은 아직 연구실에 계시냐. 문의할 거 좀 있는데."



"있긴 하지. 근데 야근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별로 안 좋아할걸."



"그럼 낮에 한 번 들를게. 내일 봐, 마스터."


오늘은 드물게 자기 발로 귀가하는 아르민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아까 연구실엔 어머니가 없어서 좋다고 했던가. 거짓 명제는 아니다. 아니지. 관점과 해석에 따라선 참일 수도 있겠다. 나 같은 마스터와 달리 우리 자랑스런 닥터께서는 어머니와 지도교수가 비율 좋게 얽혀계신 상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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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콘 못 찾음. 다음 편은 몰루? 반응 좋으면 쓸 수도. 그리고 댓글 바로 못 달아줘서 미안해요. 군인이라 확인을 못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