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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환자들





* * *








남자가 폐하로서 주문해올 요구와는 다른 방향의 준비에 몰두하게 된지도 3주가 됐다. 달력은 다음 주에 춘분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꽃잎은 영영 모습을 안 보일 듯이 꽃망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채였다. 어느 해든, 2020년대든 2060년대든 2월과 3월의 차이는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개천변을 찾은 인간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단순히 월 앞에 적힌 숫자의 뉘앙스 때문일 것이다. 2,3외에 달력에 적히는 다른 숫자들도 비슷하다. 봄 같은 7월, 가을같은 10월. 시기에 맞지 않는 기온에 투덜대는 건 어리석은 기대를 상상하는 일에 방해를 받아서겠지. 그런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시간대를 반복한 입장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인간들 모두 달력에 적혔다는 이유만으로 숫자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버린다.


그 의미들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단연 지금, 3월이다. 나는 그런 인간들에 아랑곳 않으며 단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했다. 당연히 남자를 죽이기 위해서다. '죽기 위해 회복한다.' 가 죽이기 위해 회복한다로 바뀌어버렸다. 끄기 위해 지른 불은 살의를 연료로 살벌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춘분이 지나고서 처음으로 남자의 연락이 왔다. 약속 시간은 이른 오후, 장소는 돈 많은 놈들이 '서식'하는 한적한 곳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충분히 접근하자마자 팬텀을 휘둘렀다. 결과는 간단히 실패였고, 분노하리라 생각한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대낮의 주택가에서 칼을 휘두른 나를 가리켜 '전보다 나아졌다.'고 말했다.


4월. 이번에는 만개해가는 꽃을 주렁주렁 단 나무들이 쓸데없이 많은 곳, 짜증날 정도로 햇살이 깨끗한 날이었다. 확성기 소리와 미어터지는 인파로 무언가의 축제 현장이란 걸 알았다. 


그런 곳이란 것도 상관 않고 나는 또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남자의 정장 자켓에 작은 흠집을 내며 두 개 달린 단추 중 하나를 내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남자는 웃지 않았지만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해서, 이번에는 내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다음에는 죽이겠다.


"정말 대단한 의심병 환자구만. 계약만 아니었으면 평범하게 굴복시켰을 거야."


3일 뒤의 만남에서 내 팔을 뒤로 꺾고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 보잖아."


걸어서 찾아가기엔 불편한 곳에 있는, 한 명이 먹기엔 너무 작은 딸기 케이크에 3만 5천원이란 가격을 매긴 베이커리 카페였다. 이번에는 남자가 그 딸기 케이크를 즐겁다는 듯이 혼자서 먹고 있을 때를 노렸다. 


결과는 또 실패. 타이밍은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뭐 이런 게 다 있을까.


"보라고 해. 여기서 발가벗을 수도 있어."

"…보통은 제압 당한 쪽을 발가벗기지 않아?"


항상 무기를 필요로 하는 놈들이나 그런다고 남자는 내 말을 정정했다.


"원래는 계약서에 사인한 날에 말해주려고 했는데." 남자는 우려하는 얼굴로 찾아온 점원을 유연한 미소로 돌려보내고 말했다. "역시 좀 기다리는 편이 나았군."


남은 거 먹으라는 말과 함께 접시가 앞에 내려왔다. 딸기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크다. 나는 남자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괜히 3만 5천원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계약에 따른 요구 사항을 알려줄게."


먹지도 않을 케이크라서 포크로 들쑤시며 남자의 말을 들었다.


"연기해."

"연기?"

"응. 연기." 남자가 끄덕였다. "우리 와이프를 연기해."


'나는 아르망 추기경을 사랑했어.' 라고 남자는 말했었다. 


포크를 내려놓고 눈을 치켜 떠 남자를 살폈다. 대화가 잠시 중단되고 수십 초가 지나갈 때까지 남자의 표정은 진지 그 자체였다. 농담하는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요구를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물어보기로 했다.


"왜?"


"그냥 하란 대로 하라고 했을 텐데."


남자는 즉답했다.


"이유를 알아야 당신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임할 수 있는 내용의 계약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르망 추기경은 연기를 위해 태어난 개체야. 최소한의 정보 만으로도 매번 다른 무대에서 매번 다른 캐릭터가 되는데 특화되어있지. 캐릭터에 대해 해석할 시간이 없어서 완벽하다고 말할 순 없는 연기를 보였다 해도, 그 캐릭터로 보이기엔 충분한 역량을 가졌어. 너는 그런 아르망 추기경이야. 그런 아르망 추기경에게 아르망 추기경을 연기하라고 요구하는 건데, 어렵나?"


내가 품은 궁금증의 방향과는 다른 대답이었거니와, 대단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란 듯이 그런 말을 단숨에 할 정도로 쉬운 일도 아니다.


나는 아르망 추기경이 아니게 된 지 오래다. 추기경은 내 손으로 죽였다. 그냥 연기만 할 뿐이라면 누가 됐든 훌륭하게 연기할 수 있겠지만, 아르망 추기경은 논외다.


"장소 알려줄 테니까 내일 시간 맞춰서 나와."


남자는 그렇게 무뚝뚝하게 말하고 먼저 카페를 나섰다. 


방으로 돌아와 매트리스에 누웠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어서,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고 볼륨을 작게 설정했다.


잠이 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이런 때이기에 잠이 잘 오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계약했다. 이 마당에 와서도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아르망 추기경이 되어야 한다. 그가 와이프라 부르는 여자를 연기해야만 한다. 


남자를 죽이는 시도는 일단 남자가 계약에 따른 요구를 하기 전까지라 정해놨었고, ―물론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어떤 요구가 됐든 거절 자체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거절한다는 선택지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 결정에 나 자신의 존엄이나 자존심 같은 것은 단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기에. 


생각이 너무 많다. 지금은 생각이 많아지게 된 원인만 생각하자. 그 원인에 대한 분노만 품어두자. 내가 거절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알아내고, 얻어내면, 모든 분노를 토해낸 다음 죽어버리자.


다음날. 남자가 지정한 장소는 번화가 인근의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어스름이 낀 저녁의 날씨는 맑았고, 겉옷이 필요 없을 만큼 온화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 살피자, 바로 측면의 2인석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판단하기 어려운 평범한 차림의 남자는, 내가 마주앉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교보재를 소개해줄게."


하는 말을 듣고만 있으려니 남자는 알아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전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충분히 어려울 것을 안다. 네가 그러기도 힘들 상태란 것도 이해한다. 그러니 교보재를 마련해주겠다.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연기니까.


"저기 봐."


남자의 손끝은 손님 응대에 성실히 임하고 있는 점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발랄한 팝음악만 흘러 지루해진 매장을 색다른 발랄함으로 물들이는 목소리, 선명한 쌍커풀을 가진 큰 눈, 떨어져 있어도 잘 보이는 보조개, 그런 보조개를 만들어내는 꾸밈없는 미소, 일자로 깔끔하게 정리해 눈썹 위에 걸친 앞머리, 쇄골 위까지 내려오는 옆머리, 귀여운 몸짓에 살랑대는 단정한 포니테일.


그 누구라도 한번은 돌아볼 외모의 여자였다. …라고 생각했다가, 소녀로 바꾼다. 여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다음 주부터 저 아이랑 여기서 일하도록 해."


그 말이 내 귀를 향한 것이라는 걸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말이 익숙한 목소리로 울렸기에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남자는 밀크쉐이크에 꽂힌 빨대를 소리내어 빨면서, 방금 한 말은 나에게 향했던 것이라는 눈짓을 했다.


"여기서, 일하라고?"


남자는 방금과 같이 반응했다.


내가 왜, 라고 묻기 전에 멈췄다. 내가 지난 2020년대에서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도, 노동을 오래 할 필요가 없던 여자였다는 것도 이 남자는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땀 흘려 돈을 버는 건실한 생활을 하라고 강요할 인간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호전될 내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계약 이행에 있어 이 남자에게 내 상태나 사정같은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잊어선 안 된다. 남자는 어디까지나 연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임을. 


저 소녀가 그것을 위한 교보재겠지.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나는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밀크쉐이크 컵을 버리고 돌아온 남자가 앉지 않고 말했다.


"할 거야?"


싫다면 여기서 계약을 파기하겠단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듯, 남자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무언으로 긍정의 의사를 내비치자 남자가 다가오라 손짓하며 카운터로 향했다.


"어! 아쟈씨! 웬일!?"


다른 손님의 주문을 막 받았던 소녀는 남자를 보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남자는 너 오기 전부터 바로 앞에 앉아있었는데 못 봤느냐며 섭섭한 척했다.


"어우씨, 꼬맹이. 열심인데." 남자가 막 다가온 내 어깨를 끌어 제 앞에 세웠다. "다른 게 아니고 소개나 시켜주려고. 여기, 내 딸이다. 다음 주부터 너랑 같이 일 할 거야. 너보다 언니다."


나는 고개만 꾸벅여 인사하고 남자의 손을 치웠다.


이 마당에 와서도 폐하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어울려주겠다. 남자의 거짓말일 뿐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참해서 좋다.


막 한가해진 틈을 타서, 소녀는 카운터에서 나와 내 정면에 섰다.


"와… 진짜 예쁘다…"


남말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예쁜 건 나도 알지만, 이 소녀도 만만치 않다.


"당연하지 임마. 아빠가 누군데."


확인하지 않아도 재수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맞아맞아. 그 아빠에 그 딸이네." 짜증나게 소녀는 긍정했다. "역시 서양인은 다른가?"


"다르긴 뭐가 달라. 그냥 내가 존나 잘생긴거지."


이번에는 긍정하지 않고, 소녀는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 나를 가리키며 꺄르륵댔다.


"언니도 싫은가봐." 나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 듯했다. "언니! 안녕하세요! 저희 사장님이랑 아저씨가 아는 사이셔서 저도 종종 뵈었어요. 그래서 좀 친…한데… 어… 아저씨, 우리 친해?"


그럼 안 친하냐고 남자가 소녀를 쥐어박았다. 


그렇게 남자와 소녀가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 담소를 나누는 걸 보고 매장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몇 분 뒤에 나타나 일일히 입에 물기도 귀찮다는 듯 담배를 꼬나물었다.


행복의 온상이 되어가는 번화가를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바라보다가, 남자가 다음 담배를 꺼내들고 말했다.


"반년 뒤에 올 거야. 잘해봐."


남자와는 적게는 백 몇 년, 수십 년만에 만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반년이라는 말 자체는 놀랍거나 기가 차지 않았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마이페이스를 내보이는 게 어이가 없는 것이다.


"똑바로 해. 네가 제안한 계약이야." 그래서 내 어조는 거칠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곧 저세상 티켓 끊는다고."


"또 엄살이군. 바이오로이드는 튼튼하다니까?"


주머니를 뒤적거린 남자는 언젠가 봤던 작은 무언가를 꺼내 내 머리에 댔다가 "974"라고 읊조렸다.


"생각보다 더 늙었네. 그러게 내가 약하지 말라고 했지. 아, 그래. 조항 추가. 마약성 약물 금지. 담배는 상관없는데 그건 무조건 금지야. 또 손대기만 해봐. 그땐 국물도 없어."


"언제는 국물이라도 줬다는 듯 말하네."


"줬었잖아."


혹시나 무기를 주고 전투법을 가르쳐준걸 말하는 거라면 옹졸한 구석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네가 똑바로 하라니까 하는 말인데, 똑바로 하기 위해서 반년이란 시간을 둔 거야."


내가 노려보기 시작하자 남자도 나와 비슷한 정도로 눈에 힘을 줬다.


"아무리 아르망 추기경이라고 해도, 지금의 너를 도저히 내 와이프 대역이라곤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거든. 지금의 너는 그저 패배자야. 그러니까 반년 동안 저 아이한테 많이 배워. 최대한 참고해. …너야말로, 똑바로 해야 할 거다."


"하겠다잖아!"


지나가던 인간 몇몇이 고성에 반응했다. 그 중 몇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런 적 없다는 듯 빠르게 사라졌다.


"큰 기대는 안 해." 남자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고작 반년으로 극적인 변모를 이룰 거란 생각은 안 한다고. 변화야 두 말할 것도 없지.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도 회복하도록 해. 그걸로도 만족해줄 테니까."


하고 싶은 말만 기분 나쁜 화법으로 토해낸 남자는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큰 보폭에 빠른 걸음이라 쫓아가서 뭐라 대꾸할 틈이 없었다. 

정말이지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단말기가 울렸다. 남자와 나만 가지고 있을 물건이기에 발신인은 당연히 남자였다. 떨떠름하게 연락을 받자, 남자는 아까처럼 할 말만 하고 연락을 끊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부녀관계인 것으로 하고, 가족관계증명서도 동일하게 만들어두었다는 게 연락의 내용이었다. 그런 관계였던 적은 몇 번이나 있으니 낯설 것 없는 통보였다. 그 밖에 생활에 필요한 건 방에 준비해 두었으니 확인하란다.


욕설을 중얼거리며 방에 도착하자 협탁에 신분증, 포스트잇, 카드키, 그외 여러 장의 카드가 놓여 있었다. 카드키는 일단 나중에 보기로 하고, 신용카드만 챙겨서 도로 나와 담배 보루를 손에 들 수 있는 만큼 샀다. 술도 일주일 내내 마셔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샀다. 최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을 전세 내는 인간이니 타격은 전혀 없겠지만, 자신의 돈이 그런 식으로 쓰였다는 불쾌감은 느낄 것이다. 그것에 만족하고 나는 일주일 내내 담배와 술을 끼고 지냈다.








* * *







2020년 9월.


"언니. 이제 퇴근하자. 야간조 언니들 왔어."


늘어서 있던 줄의 마지막 손님에게 응대하고 락커룸으로 가서 환복했다. 퇴근길의 출발점에 서자, 가을 기운이 미량 함유된 바람에 앞머리가 들썩였다.


"톡할게! 내일봐!"


흔들어오는 손에 손으로 답하고 퇴근길에 올랐다.


"어서오세요, 아가씨.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아트 라운지를 지나 아파트 로비로 들어서면 늘 듣게되는 목소리에 적당히 답해주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언제부턴가 데스크에 앉아있는 놈들 전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른다. 그 남자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거라면 괜찮지만, 그 외의 이유라면 조만간 경고해줘야 할 것 같다.


집에 들어왔다. 바로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대충 먹을 만한 샐러드를 만들었다. 다이닝 룸에서 해치워버리고, 거실 소파에 몸을 뭍은 뒤에 담배를 두 개비 피웠다. 알아서 작동된 공기청정기의 작은 소음이 점점 선명해질 즈음에, 내 방으로 들어갔다.


23시가 되기 5분 전이란 잠들기 애매한 시간에 잠을 청했다. 깨어있어봐야 딱히 할 것도 없고, 집이 쓸데없이 커서 금세 고립감에 휘말릴 뿐이다.


다음날, 로비에서 온 연락에 눈을 떴다. 스마트폰에는 오전 11시라고 적혀 있었다. 보통은 휴일에 잠만 자지만 오늘같은 날은 다르다. 오늘같은 날이기에 로비에서 연락이 온 것이기도 하고. 그 외엔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방문객이 오는 일은 없다.


"꺄! 언니! 기다렸지!? …응?"


선물로 보이는 작은 상자를 들고 현관에 들어선 소녀는, 파자마 차림의 나를 위아래로 훑고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이젠 준비도 안 하고 있네… 완전 게을러."


남에게는 절대 안 보이는 모습이라고 말해줘도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오늘의 손님을 거실로 들이고 잠이 덜 깬 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우와… 이게 다 뭐야?"


왼쪽부터 차례대로 밀푀유, 몽블랑, 마카롱이라고 알려줬다. 마카롱은 알고 있다고 짜증을 내길래, ―선물부터가 마카롱이었다.― 마시고 있는 것은 포트넘 앤 메이슨의 얼그레이라고도 알려줬다. 그러자 완전히 찌푸린 인상이 됐다. 나는 얼그레이가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언니 집은 올 때마다 놀랍다… 어떻게 아파트가 100평이 넘어?"


대답해주지 않아도 되는 질문을 마구 던져대며 소녀가 신기하단 눈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올 때마다 이런다. 나는 항상 아빠가 세를 놨었던 곳이라고 대답할 따름이다. 소녀가 자세히 알고 싶다는 눈을 해도 들어온지 이제 반년인 곳이라 내 대답은 항상 같다.


"언니는 맨날 이상한 거만 본다?"


관행이 된 방 탐험을 마치고 거실에서 넷플릭스를 켜서 얼터드 카본을 검색했다. 나는 이미 몇 백 년 전에 봤지만 소녀는 모른다. 놀러올 때마다 항상 소녀가 본 적 없는 것 위주로 선정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드라마 시리즈를 보게 됐으니까, 대략 5편 정도 보고 외출하는 흐름이 될 것이다. 


"진짜 잘생겼다! 언니언니, 주인공 배우 이름 뭐야?"


조엘 킨나만이라고 알려주자 소녀는 생각에 잠긴 듯 "으음…"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아저씨랑 똑같이 생겼다는 감상을 내놨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쳤다. 남자 쪽 말고 주인공이 잘생겼다는 부분에.


어쨌든 오늘도 싱글벙글대는 걸 봐서 괜찮은 선택이었다. 역시 잘생긴 게 최고다. 


주인공의 차가운 미모에 빠져든 소녀의 얼굴이 귀엽다. 선정적인 것엔 내성이 없어서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을 돌리는 게 사랑스럽다.


그런 아이다. 이 소녀는. 감정 표현의 단편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을 표정의 변화부터해서, 소녀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외모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외모도 빼어나지만, 그것은 이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구성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나는 소녀를 '미니'라고 부르고 있다. 본명의 발음을 늘인 것으로, 어감이 가지는 깜찍함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미니도 딱히 싫어하는 반응은 없었다. 


약 반년 전, 미니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진 첫감상은 이런 인간이 있었다니, 였다. 


정말로 처음봤다. 900년 분의 시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고, 길게 지껄여 설명하기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주위의 모두를 그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휘어잡는 아이. 이 아이와 마주한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귀가 후에 소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처음에 소녀는 인간이 아닌 아주 강렬한 불쾌감의 덩어리로서 다가왔다. 이런 인간이 있을 리 없다, 누구에게나 웃어주고, 심지어는 진상에게도 똑같이 웃어주는 이 소녀는 분명 고단수다, 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웃음엔 틀림없이 다양한 저의가 담겨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에 무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첫만남부터 반년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모습만 보여준다면 그것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이 그런 사랑스러운 인간이란 걸 자각조차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내보이는 그 모든 것은 본모습 그대로인 걸지도 모른다. 


욕을 안 한다.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피어난 감정에 솔직하지만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무언가다. 따라서 미니가 짓는 것은 미소와 웃음 밖에 없다. 그런 아이라 수많은 남자를 착각에 빠뜨리고 진상을 스토커 수준으로 끌어올려버려 사건이라 부를 일도 있었는데, 미니는 언제나 웃었다. 정말로 사랑스럽게.


얼핏보면 그냥 헤헤 웃기만 하는 바보라고도 보일지도. 언젠가 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바보 소리 들을 거라고. 그랬더니 미니는 불같이 성을 내면서, 그럼에도 욕은 일절 안 하면서 내 말이 틀렸음을 조목조목 읊기 시작했다. 거의 막바지에는 "언니 진짜 나쁜 구석이 있어!" 라며 자신이 보기에 문제라고 생각한 내 모습 하나하나를 따진 뒤, 조속히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래. 지시. 알바 선배로서의 지시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사랑스러우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미니를 함부로 대하는 동료는 없다. 간혹가다 나타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이래봬도 제대로 돼먹은 고등학생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서 귀엽다. 가끔 급식이라고 놀리면 화낸다.


시간이 되어서 미니의 양손에 직접 만든 디저트를 두둑이 챙겨주고, 저녁 식사로 국밥을 먹었다. 메뉴 선택은 미니가 했다. 국밥은 생각 날 때마다 먹어줘야 한다나.


"바래다 주지 않아도 돼?" 식사를 마치고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내가 말했다. "혼자 갈 수 있겠어?"


"그럼. 혼자 갈 수 있지."


옆으로 누운 브이를 뺨 근처에서 흔들며 미니가 받아쳤다.


"우리 꼬맹이야말로 괜찮아? 같이 안 들어가줘도 돼?"


이럴 때면 얘는 고작 5cm 더 큰 걸로 나를 꼬맹이 취급한다.


"너 혼난다."

"느 헌냰댸~"


버스가 도착했다. 창가에서 손을 흔드는 것까지 잘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테라스로 가서 담배를 피우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이제, 미니만 왔다가면 찾아오는 잠 못드는 밤을 견뎌낼 차례다.






* * *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미니라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 어떤 거대한 행복이 있다한들, 지금의 내게는 이 소소함이 가장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와 있다.


모든 게 이상했다. 다시 150년으로 떨어지자마자 느꼈던 그 감각은 진짜였다. 죽음 밖에 떠올릴 수 없는 그런 감각이었다. 그런 걸 느꼈으면서 반년이나 넘게 살아있는 데다, 최근엔 그런 오싹한 감각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반년 살아남았다고 또 150년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한다. 어찌되었든 기대 수명은 천년이다. 죽을 때가 왔으니 그런 감각이 찾아왔던 게 확실하다. 별로 길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고, 미니와 만나기 전엔 살아있다는 자각마저 없었다.


그렇다. 진짜 이상한 것은 다른 쪽이다. 내 질긴 생명력은 어찌됐든, 미니와 시간을 보내며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쪽이 문제다. 왜일까? 생각건대, 남자의 말대로 내가 엄살이 심했을 뿐인 것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고, 더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중얼거린 게 일년도 안 됐다. 그런 주제에 남자가 소개해준 소녀 하나를 통해, 메울 수가 없을 것 같던 공허함에 뭔가가 하나 둘 채워져가는 감각을 느끼고 있다면, 남자의 말이 맞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이른 바 힐링이라는 걸까? 나는 이불 속에서 코웃음쳤다. 세상에 없다고 믿던 그런 포옹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음에, 수명이 다해가는 지금에 다다라 그 포옹을 받고 있음에 기가 찼다.


수백 년 간 그런 포옹 몇 번 받는다고 나아질 거라 생각한 적 없던 내가, 이제와서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는, 그런 뭐라 말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다. 어느 부분이 나아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어이가 없다. 


난 뭘하고 있는 거지? 미니가 놀러온 날은 항상 그랬듯, 나는 나에게 묻는다. 


살아있는 것이, 제멋대로 호흡하는 것이 고통이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복되고 있는 것 같다? 뭐에서 회복된다는 건데? 지나온 시간? 폐하? 그게 회복될 수 있는 종류의 상처인가? 고작 수명의 막바지에서 만난 소녀가 그런 네 900년분의 공허와 상처의 치료제라고?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이 뭐가 되는 걸까? 

등등.


대답을 했던 적이 없다.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늘은, 대답하기로 한다.

변명하기로 한다.


살아있는 것이 낫다고.

살아있어야 폐하를 떠올릴 수 있다고.

그게 기쁘다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다고.


그러니까, 폐하를 떠올리기 위해서만이라도 조금 더 살고 싶다고.


미니는 그러기 위해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 * *






"주문을 한지가 언젠데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굶길 작정이야!?"


돌아온 한주의 시작부터,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진상에게 걸렸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길게 뻗어나온 지저분한 머리칼. 검은색 반소매를 입어서 눈에 잘 띄는 어깨의 비듬. 안면 곳곳에 찌든 검댕같은 떼. 노숙자같은 놈이 성격도 더럽다.


"곧 나오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내 말을 듣더니 진상은 모자를 올려서 고쳐쓰고 삿대질을 해왔다. 나는 이렇게 생겼던 놈이었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마주치는 게 무섭다는 듯 항상 눈을 가리던 놈이었으니까.


"너 말투가 왜 그래?"


내 말투가 어쨌다는 걸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응했다 생각하는데.


"제 말투가 어쨌는데요?"

"봐, 이거. 이게 문제잖아!"

"그러니까 뭐가요."

"야이 싸가지없는 년아!"


여기서부터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진부한 전개였다. 


카운터가 소란스러워지자 대기 중인 다른 손님들이 나간다. 키오스크를 이용하던 인간들도 나간다. 점장 나오라는 고함에 정말로 점장이 나온다. 점장이 자신의 기세에 쩔쩔매자 더 기고만장해진 진상은 한층 목소리를 키운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나도 언젠가 이놈같은 짓을 했던 것 같다고 태연하게 생각한다.


진짜 죽여버릴까.


"앗! 단골 아저씨다!"


고함이 계속 커져가는 가운데, 휴게실에서 돌아온 미니가 진상을 두고 반갑다는 듯 외쳤다. 긴장된 공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버리는 깜찍한 울림이, 점장과 진상을 동시에 굳게 만들었다.


미니는 내쪽을 슬쩍 보고, 진상에게 다가가 팔짱을 낀 다음, 애교 가득한 얼굴로 속삭여가면서 매장 출구까지 유도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나 점장이나 주방에서 나와있던 다른 근무자들까지 모두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아저씨… 미안해요…"


어조 자체는 힘이 없는 뉘앙스였지만, 출구를 앞에 두고 미니가 다 들리는 크기로 말했다. 그런 크기로 말하면 이유없이 괜히 부끄러워질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화 풀어요… 응? 선물 줄게."


다음에 쓰려고 아껴둔 모바일 쿠폰이라고 말하면서, 미니는 스마트폰 화면을 진상에게 내보였다. 진상은 출구에 선 후부터 지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출구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가, 진상은 미니의 스마트폰을 제 스마트폰으로 찍은 후에 도망치듯 나갔다. 공짜 쿠폰을 놓치기엔 역시 아깝다는 걸까. 추레하기도 하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던 걸 보아 행색과는 다르게 노숙자도 아닌 모양이고. 


점장은 내게 아무리 네가 그분의―남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딸이라 해도 이번이 몇 번째냐며 한 소리하고서, 있어야 할 자리로 사라졌다. 점장으로서 할 수 있는 소리라 나는 그러려니 했다. 애초에 점장은 신경 안 썼다. 


내가 신경쓰는 건 미니 쪽이다.


점장의 말대로,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미니는 내가 '이런 일'을 벌일 때마다 나 대신 직접 해결해왔다. 그런 다음엔 몇 번이나 반복되는 실수를 타박하지 않고, 나를 안아주며 정신에 입었을 데미지를 걱정했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이렇게나 반복되면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언니. 괜찮아?" 카운터 안으로 들어온 미니가 사랑스럽게 미소짓고 나를 껴안았다. "좀 쉬고 올래?"


새삼스럽지만, 뭐 이런 아이가 다 있담? 저보다 나이 많은 인간들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감정과 관련된 문제를 손쉽게 처리해버린다. 대단하게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방법을 안다. 오직 미니 자신만 가능한.


여기서 울어버리면, 괜찮지 않다고 한다면 껴안는 것보다 더한 것을 해주지 않을까. 안겨서 위로받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다. 


목덜미에 한 번, 뺨에 한 번 입을 맞췄다. 미니는 놀란 듯 내 등에 댄 손에 힘을 주더니, 천천히 내 얼굴 앞에 얼굴을 가져왔다.


방금 뽀뽀한 거냐는 물음이 다 끝나버리기 전에 입술에 입술을 포개고, 재빨리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다른 소동을 각오한 행위였지만, 미니는 잠깐 당황해 했을 뿐 언니에게 첫키스를 뺏겼다고 활짝 웃었다. 문장만 보면 평생의 저주감으로 삼겠다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해버리니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날, 퇴근길에 참을 수가 없게 된 나는 미니에게 그간 하고 싶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런 질문을 친해지고 반년이나 되어서야 꺼낸다는 게 부자연스럽게도 느껴졌지만, 그럴 만큼 나는 미니라는 존재를 경계하면서 가까이 두려고 했다. 게다가 10년을 넘게 친구로 지내도 서로를 잘 모르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나 치고는 굉장한 붙임성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고등학생이 어째서 알바를 하느냐. 지금까지 내 앞에서 내숭을 떤 적이 한 번은 있지 않았느냐. 가족은 몇 명이냐.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 영화나 드라마, 책이나 작가, 음식이나 디저트는 무엇이냐… 갈수록 질문이 단순해져감에 따라 이 아이에게 빛내는 내 눈빛도 단순해져갔다. 미니가 단번에 알아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그 눈빛이 얼마나 노골적인 속성을 띠고 있었을지. 귀가 후에 돌이켜보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는 분명히,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


수백 년을 돌고돌아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때, 아주 먼 옛날에 청이라는 아이를, 미니와 같은 연령대의 아이를 사랑했다. 다른 게 있다면 청이를 사랑할 때는 폐하를, 지금은 나를 우선한다는 것이다. 


청이는 폐하를 보기 위해 이용했다. 미니는 순전히 나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


폐하를 생각하니 피어오르는 죄악감에 나는 또 변명해본다. 지금은 누구를 이용한들 폐하를 만날 수도 없다. 나를 우선해야, 일단은 살아있어야 폐하를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러기 위해 살아 만 있을 뿐이다. 


미니는 그러기 위한 인간일 뿐이다… 라고 결론짓고 싶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그러지 말라고 아우성친다. 성별같은 것은 상관없으니 딱 한 번만이라도 너 자신을 위한 사랑을 하라고 아우성친다.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말해도 좋으니 아무 조건도 계산도 없이 너에게 접근한 인간을 받아들이라 아우성친다.


…그런 아우성에 신경을 쏟아봐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미니에 대한 것으로 사고의 방향을 선회했다.


내 질문에 돌아온 미니의 대답들을 떠올렸다. 가족은 다섯, 부모님 둘에 나이차가 나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다고 한다. 알바를 하는 이유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 싫어서. 자기가 쓸 돈은 직접 모으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다. 학원은 안 다니고 야자는 하고 싶지 않으니, 그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부모님은 성적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흔쾌히 허락했다. 여기까지 말하고 미니는 이래봬도 성적이 좋은 편이라며 그간 모아온 돈까지 자랑했다. 언젠가 유럽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 같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미니를 보고 있자니 그 밖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얼굴만 떠올리는데에도 벅차서, 그 아이의 기호나 취향같은 건 떠올릴 틈이 없었다. 


인간들은 보통 자신의 가족사를 숨기기 마련이지만, 미니는 숨길 이야기 따윈 없다는 듯이 하나하나가 모두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얼굴로 내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남동생이 얼마나 귀여운지, 내년에 남동생과 같은 학교로 들어가는 여동생이 얼마나 예쁜지, 부모님의 금슬이 얼마나 좋고, 매년 있는 기념일이나 명절에는 또 얼마나 행복한 일들만 있었는지. 거기까지만 듣고도 어떻게 미니같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사랑. 너무 뻔한 답이지만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답. 요컨대 미니의 됨됨이를 떠나서, 미니의 가정은 딸아이가 원하는 걸 다 해줄 만큼 유복하지는 않지만,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것을 가졌다. 세상 그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것을 가졌다. 그런 가정을 가질 수 있다면 좀 가난해도 좋으니 얼마든지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인간들이 줄을 설 정도로, 사랑과 행복의 농도가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높은 가정이었다.


그런 가정이라면 누구든 미니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석구석 세세한 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했으나 필시 행복을 기조로 하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가정이겠지. 환경 자체는 여타 다른 가정과 특별히 다를 것 없겠지만, 확실한 차이점이 있는 음식을 먹고 공기를 마시며 자라오지 않았을까.


나는 상상한다. 사랑과 행복에 냄새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니가 사는 집에 감돌고 있으리라.


종종, 그런 생각도 했다. 인간의 수많은 유형을 본딴 바이오로이드이지만, 미니와 같거나 조금이라도 닮은 유형의 개체는 없는 것 같다고. 


당연히 없을 수 밖에. 바이오로이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인간이다. 오로지 인간에게만 허락된 사랑이다. 인간조차 낯설어하고 부러워하는 행복이다.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인간을, 인간조차 그리기 힘든 인간을 본딴다니. 미니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차이를, 그야말로 존재 자체로 알려주는 존재인 것이다.


질투심은 들지 않는다. 태생적인 차이에서 오는 패배감도 없다. 그저 미니의 짧기만 할 생의 한 폭을 장식하고 있음에 기쁠 따름이다. 나는 반년 전의 그 만남에 감사한다.







* * *







2020년 10월.


주말. 미니와 함께 새 스마트폰을 사러 거리로 나왔다. 빌라에서 투신하기 전에 스마트폰을 던져버려서, 새로 스마트폰을 구입하게 됐던 반년 전에도 함께였다. 


사실 등록해둔 연락처는 점장과 미니, 그리고 공백 뿐인 문자를 보낸 후로 연락 한 번 없는 남자가 다라서, 굳이 산다면 스마트폰일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최신형일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기능 문제를 우려하여 가장 비싼 모델을 고른 것은, 순전히 미니와의 연락에서 짧디짧은 두절도 용납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날은 많은 일이 있었다. 미니가 내게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오픈해준 만큼, 나도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오픈하게 된 날이었다. 정확히는 그럴 수 밖에 없게 된 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랑하는 이야기는 아닌데, 미니나 나는 떨어뜨려놔도 눈에 확 띄는 편이다. 그런 여자들이 함께 다니면 당연히 배로 눈에 띈다. 요컨대 똥파리가 꼬였다는 소리다.


150년 전으로 떨어질 때면 처음으로 눈에 담게 되는 곳. 그 남자 외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공원을 목적 하고 있던 우리는, 이 시대의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하루를 즐기고 그 여운에 젖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서로의 속도를 배려하느라 걸음걸이가 빨라지거나 느려지기를 반복하면서. 작월보다 차가워진 밤공기를 마시면서.


그렇게 공원의 지름길인 인적 드문 골목을 걷고 있을 때였다. 


"거기, 스톱."


미니가 지나쳐간 무리를 향해 아무 경계심 없이 뒤돌았다. 처음 겪는 상황인 거겠지. 이럴 때는 대답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게 최선인데.


들려온 목소리의 내용만으로 전부 파악이 끝난 나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고 굳어버린 미니를 등 뒤에 뒀다.


"오. 예뻐."


편견 없이 보려고 해도 양아치처럼 생긴 놈이 말했다. 새겨진 타투가 '이런 놈에게 새겨지기 싫었다.'고 한탄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팔뚝이 얇았다. 옆에 있는 놈은 경제력은 바닥을 칠 것 같이 생긴 주제에 온갖 고가 브랜드 의류와 악세서리로 떡칠 돼있고, 그 옆의 놈은 첫 번째 놈과 반대의 의미로, 타투가 한탄 할 만큼 두툼한 지방을 자랑했다.


"야. 같이 가자?"


같이 놀지 않을래? 도 아니었다. 내가 따라오라면 따라와야 한다는 말투로 보아 앞뒤 안 가리는 놈이다. 


요즘 영화에서도 채택 않는 설마설마했던 전개와 지긋지긋한 이런 것들에겐 한마디조차 아까워서, 나는 말을 삼갔다. 등 뒤로 미니가 떠는 게 느껴졌다. 


표정 변화 없이 반응이 없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돼지가 다가와 위협적으로 내 손을 잡았다. 

직후 돼지의 팔은 뒤집힌 기역 자가 되었다.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흩뿌리는 땀냄새가 불쾌해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나섰다. 가운데에 있던 놈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다리를 니은 자로 만들었다. 얄상한 놈은 당황하여 내가 그러기까지 어떠한 대처도 해오지 않았다.


"미친년이 돌았냐!?" 얄상한 놈의 외침이 비명을 뚫고 들어왔다. "기도해라 이 씨발년아. 넌 뒤졌어."


주머니에서 꺼낸 걸 휘적휘적 흔들어 직각으로 고정한다. 뭔가 싶었더니 발리송 나이프다. 치는 대사나 움직임이나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어서, 나는 미니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만 살짝 돌려볼 생각이었다. 얄상한 놈은 그때를 노렸다.


미니가 없었다면 찌른다는 행위에 망설임이 없는 행동력을 칭찬해줬을 것이다. 나는 얄상한 놈의 타투가 새겨진 팔뚝을, 앞의 두 놈보다 정성 들여 부러뜨리고, 다리 관절까지 작살낸 다음 미니를 확인했다.


"오빠! 괜찮아요!?"


오빠? 괜찮아?


미니는 돼지 옆에 쪼그려 앉아 부러진 팔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만져도 되나 안 되나 망설이는 팔이 돼지에게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가자."


미니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잡아 끌었다. 그러자 미니는 내 팔을 뿌리치고, 쪼그려앉은 자세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언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전혀 예상 못한 반응이었다. 이 아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반응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빨리 와."


"놔!" 미니가 재차 내 팔을 뿌리쳤다. "사람한테… 어떻게… 어쩜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어!? 벼, 병원… 구급차 불러야 돼…"


날 잡아서 심하게 다쳐볼까, 라고 생각했다.


팔을 뻗어도 계속 뿌리치길래 기술적으로 미니를 끌어서 현장을 떠났다. 미니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오빠들'을 걱정했다. 


누구에게나 솔직하게 친절하고 착한 것은 좋다. 하지만 이 정도면 병적인 수준이다. 방금같은 특수한 상황일 것도 없이, 따지자면 이상한 것은 미니고 그런 미니를 이상하게 보는 인간들 쪽이 정상일 것이다. 그런 세계다. 인간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공원에 들어서자 어렴풋하게 들려오던 고통스러운 비명은 적막에 모두 먹혀버렸다. 붙잡혀있던 미니도 진정이 되어, 불어오는 바람에 과열된 호흡음을 숨기고 있었다. 


입구와 가장 떨어진 곳에 있는 구석진 벤치에 앉자, 끄트머리만 색감이 달라진 듯한 나뭇잎 하나가 무릎에 떨어졌다.


옆에 앉은 미니가 최대한 차분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어조로 말했다.


"…방금은, 언니가 잘못한 거야."


그렇다고 치자. 미니가 무사했으니 됐다. 나는 네가 충격 받을까 상당히 힘을 뺐다는 마음이었지만, 여기서 따지거나 변명했다가는 틀림없이 더 나은 해결법이 있었을 거라며, 내게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소리를 할 것이 뻔했다.


천천히 쓰러지듯 몸을 옆으로 기울여 미니의 무릎을 베개로 삼았다. 세로로 확대된 어둑한 시야는 차츰 많아져 가는 낙하의 무리를 담고 있었다. 나뭇잎, 매미의 사체, 가로등 빛의 스펙트럼. 그런 것들을 무상하게 바라보고 있자, 가장 기다리고 있던 것이 내 얼굴로 다정하게 낙하했다.


"그래도… 고마워. 미안해. 언니도 그러기 싫었을 텐데. 언니가 안 그랬으면 이렇게 언니 얼굴도 만지지 못했을 거야."


나는 비웃는 척하며 물었다.


"너…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그러진 않지?"


도대체 어떤 고등학생이 이런 대사를 읊는다고. 솔직히 그런 걱정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미니는 나 만한 인싸가 없다고 평소의 어조로 대꾸했다. 그리고 얼굴을 숙여서, 내 뺨에 입술을 맞췄다. 


"언니 사랑해."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정말로 병적이다. 

그런 병적인 면모가, 누군가는 질색할 그런 면모가 나는 좋다. 내 안의 공허를 메워버린 이 사랑이 좋다.


"나도 사랑해."


입술이 떠나가기 전에 재빨리 얼굴을 돌려 입술을 포갰다. 그때와는 좀 다른 느낌으로, 그러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은 느낌으로.


이 아이는 알까. 본인이 꺼낸 사랑한다와 내가 꺼낸 사랑한다의 의미가 다르다는걸.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키스보다 더한 것을 통해 이 아이의 몸이고 마음이고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가, 가장 소중한 부분까지 침범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 문제 삼는 것이 장소일 뿐이라면 곧바로 침대로 향하고 싶었다.


…성인도 아닌데다 순수하기까지 한 아이에겐 너무 지나치겠지. 바람은 바람으로만 두고 무릎에서 일어났다. 몸을 붙여 미니의 고개를 손으로 고정시켜 얼굴을 확인했다. 밤에 물든 미니의 눈은 살짝 촉촉했고, 그 아래는 묘하게 달뜬 것처럼 보였다. 


돌아가잔 말도 없었는데 우리는 어느새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잘 가. 내일 봐. 공원에서 이어져온 긴 침묵 끝에 오간 그 두마디로 그날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남자가 찾아왔다.







* * *






침대에서 눈을 뜨자 방문 앞에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잠든 와중에도 기척을 느끼는데, 이 남자라서 느끼지 못했다. 지난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불쑥 나타나고 사라졌어서 이제는 느낄만도 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남자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신경을 남자에게 쏟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었으므로,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경우가 아닌 한, 나는 여전히 남자의 등장을 미리 알아챈 적이 없다.


남자를 지나쳐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삶아뒀던 계란 꺼내 배를 채웠다. 집을 살펴가며 느적느적한 걸음으로 다가온 남자는 냉장고에서 1.25리터 우유를 꺼내 한 번에 비웠다.


위로 향한 입에 우유 방울을 털어 넣으면서 남자가 말했다.


"돼지우리가 돼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인걸. 제법이야."


대답할 생각은 없었어서 거실로 향해 tv를 켰다. 일기예보는 가을 한파를 예고하고 있었다.


남자는 상석처럼 외따로 있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도 기대 이상이야. 좋아. 이제 시작해도 되겠어."


예의 계약을 말하는 것 같고, 뭐가 기대 이상이란 건지 모르겠어서 내가 물었다.


"내가 어쨌는데?"

"깨끗해졌어. 반년 전보다는."


깨끗하단 말의 의미를 불결하게 느끼게 하는 표정이었다. 씨익 입가를 찢은 남자는 현관 방향으로 사라지고서, 이번에는 알기 쉬운 말을 했다.


"다음 주에 오지. 연락할 테니까 시간 어기지 말고 맞춰서 나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문을 통해 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반년 간, 남자와는 계약 관계가 됐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고백하자면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나 미니에게 푹 빠져 있었던 건가. 성별에 상관 않고 나 같은 여자도 반하게 만드는 아이니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미니와 만나겠다고 살아있던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꺼낸 폐하라는 단어에 혹해서 살아있는 것이지. 


그러고보니 미니와 만나게 된 것은 남자 때문이다. 남자는 미니를 알고 있었고, 미니도 남자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꽤 친해보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자와 미니를 결부시켜 생각해보니, 왜 나는 그러지 않았을까하는 가벼운 후회가 들었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을, 나는 여태 미니에게 묻지 않았다.


"응? 언니 아빠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


출근하자마자 남자에 대해 물으니 미니는 왜 그런 걸 나한테 묻느냐는 얼굴을 했다. 나도 뱉은 후에야 아차 싶었다. 나는 남자와 부녀관계인 것으로 되어있다. 아버지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딸이라니. 그런 부녀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겠지만,  나는 이 패스트푸드점에 '아버지'의 소개로 온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할 정도의 관계라면, 아버지와 대화조차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아아, 응…" 나는 황급히 말을 고쳤다. "혹시 나한테는 보이지 않는 면이 있는가 해서… 왜, 그런 거 있잖아. 딸에게 만은 보이기 싫다, 같은."


흥미가 동했는지 미니가 눈을 빛내며 정면으로 바라봐왔다.


"언니한테는 어떤데?"

"좀… 엄격해."

"진짜? 그 아저씨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놀라길래, 많이 뒤틀린 엄격함이라고 정정하여 그 남자의 맨 얼굴을 낱낱이 폭로하고 싶었다.


"음… 나한테는 있잖아." 라며 미니는 왠지 모르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엄~청나게 잘해줘. 좀 짓궂은 면이 있긴한데, 아빠가 한 명 더 있는 느낌? 언니 아버지 엄청 좋은 분이야. 우리 부모님하고도 아는 사이다?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 것도 아저씨 덕이야. 부모님한테 허락 받았대도 어디든 급식은 잘 안 받아주더라고…"


너라서 지금 그 말을 개소리 취급하지 않는 거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나는 단조롭게 대꾸하고 매장 출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왜왜? 뭐 때문에?"

"그냥. 궁금해서."

"아! 뭐 준비하고 있구나? 뭔데? 선물? 이벤트?"


선물이라고 하기엔 어떨지 몰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죽이기 전의 이벤트. 약점으로 작용할 정보들을 이용해 고문하고 또 고문해서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아주 공을 들여야 하는 이벤트. 그 전에 최대한 남자에 대해 알아둬야 제압하기도, 죽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도 쉬워진다. 


내 생각은 변함없다. 계약으로 남자에게서 얻어낼 걸 모두 얻어내면, 죽인다. 반드시.


"여어, 꼬맹이들."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멀쩡히 웃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가다가 들렀다고 미니와 담소를 나누며, 나는 잘하고 있느냐고 쓸데없는 것까지 물었다. 미니는 잘한다고 하기엔 뭐하고 못하지는 않다며, 내 반응을 살피듯 꺄르륵대며 말했다.


"다음 주에 시험이지?"

"웅! 끝나구 친구들이랑 놀러갈 거지롱~"


미니는 이런 새끼한테, 애교를 섞어서 말한다.


"벌써부터 놀 생각하는 거 보니 성적은 기대 못하겠구만."

"뭐래. 나 저번 모의고사도 순위권이었거든?"

"모의고사랑 학교시험이랑 같냐?"

"다르지~ 더 쉽지~"


남자는 사악하게 웃고 출입구로 향했다.


"그래. 시험 잘 쳐라. 일 열심히 하고. …너도."


삿대질하듯이 나를 가리키고 남자는 정직하게 출입문을 통해 사라졌다.


"진짜네…" 미니가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왠지 언니한테는 좀 쌀쌀맞네."


"엄격하다니까."


"그래서 언니가 여기서 일하는 건가? 엄격한 부잣집 딸내미를 조기교육하겠다는 건가?"


갑자기 이 아이의 내면에 구축된 내 이미지가 어떤지 몹시 궁금해졌지만, 미니는 맥락없이 아! 하고 놀라며 귀여운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뭐야? 갑자기?"


몰라도 돼! 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슬쩍 주방을 들여다보니 얼굴이 조금 붉어진 미니가 있었다.


공원에서의 일을 떠올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 * 





일주일 뒤. 주말.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이랑 놀러가겠다던 미니는 나와 있었다. 미니만이 아니라 미니의 친구들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스마트폰을 켜서 문자를 확인한다. 3일 전에 수신된 문자의 내용은 정확히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꾸미고 나와. 늦으면 가만 안 둬.' 라고 마지막에 적혀 있는 걸 봐서 남자가 보낸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 착오가 있던 것이 아닐까하고 펼쳐져있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어째서, 미니와 미니의 친구들이 남자가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 있지? 그 답은 번화가의 가장 바쁜 편의점 앞에서 꺼낸 남자의 첫마디로 유추 할 수 있었다.


"야! 빨리 말해! 넌 뭐라고?"


"나는 히말라야."


s컬이 들어간 사이드뱅 머리라 성숙해 보이는 여자 아이가 대답했다.


"무슨 히말라야?"


"히말라야가 에쎄 밖에 더 있냐!?" 여자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이왕 사주는 거 두 갑 쁠리즈."


"너는?"


"난 아블 원~" 목소리부터가 애교넘치는 아이가 말했다. "나도 두 갑. 웅?"


"너는?"


"나는 썸머 웨이브." 키가 크고 시크한 스타일의 아이가 말했다. "난 한 갑. 아직 피우는 거 있어."


접수, 라고 답한 남자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으… 흡연충들 진짜…"


내 옆에 딱 붙은 미니가 부러 소름돋는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나도 미니가 말하는 흡연충이다.


"찌민, 또 내숭 지랄 시작할 듯 ㅋㅋ"


남자가 들어가자 애교 많은 아이가 표정을 싹 바꾸고 미니를 가리켰다.


"아 떨어져! 냄새 나!"

"ㅎㅎ 멘솔 냄새~ 상쾌한 냄새~"


애교많은 아이가 미니에게 들러붙어서 입을 쩍 벌리고 날숨을 뱉었다.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그 아이가 내게 흥미를 보였다.


"이 예쁜이는 누구? 찌민 동생?"

"언니거든! 아저씨 딸이야."


나머지 두 아이의 시선도 내게 모였다.


"뭔 언니야. 딱봐도 중학생인데."


"와 씨빨 인형이야? 존나 예뻐… 쿨톤 개잘먹혔네?"


외모 품평을 당하는 건 그러려니 싶었고, 신경이 남자에게 쏠려있었어서, 무려 미니의 친구들이라 해도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눈으로 본 상황을 정리하자면, 남자는 나만이 아니라 미니와 그 친구들까지 부른 듯했다. 문자에 적힌 시간과 장소와 정확히 일치하는 곳에. 의도적으로.


반대의 경우는 상상할 수 없다. 어떤 미성년자가 아저씨를 상대로 불러낸다고. 


그리고, 지금은 담배를 사다주려 하고 있다. 

무려, 미성년자에게. 


"미친… 새끼…"


"뭐야? 왜 욕해?"


시크한 아이가 눈썹을 튕겼다. 미니의 친구들로 보이기에 신경을 세우고 싶진 않았다.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닌데? 분명 욕했는데?"


"아 뭐래. 언니가 왜 욕하는데?" 미니가 나를 감쌌다. "담배 때문에 머리 썩어서 환청 들리나 봐."


"어, 어어… 맞아… 환청 들림… 너 죽이라는… 윽… 환청이…"


"아! 붙지 마! 담배 냄새! 진짜 짜증나!"


이후로도 무슨 말만 하면 미니는 장난의 대상이 됐다. 아무래도 미니는 친구들의 중심에 있는 모양이다. 외모나 여자 특유의 기싸움으로 차지한 것이 아닌, 순수하게 예쁨 받아 위치하게 된 자리. 친해보여서 보기 좋다.


친구들은 모두 미니의 빼어난 외모에 걸맞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물론 미니가 그런 인간들만 골라서 사귀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다보니 끼리끼리 모이게 된 것이겠지. 의도했든 안 했든, 아니, 의도하지 않을수록 인간은 더욱 비슷한 부류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일견 비행을 즐길 것 같은 친구들도 내면은 미니와 엇비슷할 것이다.


그게 안심이 돼서, 이 아이들이 내게 보이는 흥미에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단숨에 가까워질 즈음이 되자, 남자가 나타났다.


"야! 히말라야 품절이래! 썸머 웨이브는 안 판댄다!"


이런 번화가의 편의점에서 썸머 웨이브를 안 파는 게 말이 되냐고 시크한 아이가 외쳤다. 성숙미가 느껴지는 아이는 아예 남자에게 화를 냈다.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따지는 남자는 갈수록 아이들에게 밀리기 시작해서, 나는 속으로 미니의 친구들을 응원했다.


통성명도 했지만 일일히 이름을 외울 사이가 될 것 같지는 않아서, 성숙한 아이를 친구 1호, 애교많은 아이를 2호, 시크한 아이는 3호라 명명했다. 친구들은 담배를 구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남자를 포함해 나나 미니까지 끌고 가서 번화가 일대의 편의점을 전부 돌았다. 미니는 흡연충들 싫다고 투덜댔지만, 나는 남자가 질린다는 얼굴을 해서 대놓고 기뻐했다.


어떻게든 원하는 만큼의 담배를 구하자, 남자는 우리를 끌고 그 일대에서 가장 큰 노래방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저녁도 아닌데 코노도 아닌 노래방을 가냐며 남자의 선택을 타박했다. 남자는 듣는 척도 안 했다.


"키야. 넓다 넓어." 안내받은 8인실로 들어서서 남자가 말했다. "야. 노래 예약하지 말고 있어라. 재떨이 가져온다."


남자가 그렇게 말한 것도 가볍게 무시하고 아이들은 저마다 먼저 부르겠다며 리모컨 쟁탈전을 펼쳤다. 미니는 그 틈을 타 기기에 직접 번호를 입력해서 먼저 마이크를 잡게 됐다. 선곡은 태연의 그대라는 시였다.


아이들끼리 다투는 소리를 감안하고 들어도, 잘 부른다. 따로 연습한 흔적이 느껴지는 실력이었다.


노래가 끝나고도 다투는 아이들 사이로 조용히 박수를 쳐주자, 미니가 수줍게 웃으며 움츠러들었다. 


조용하고 은밀한 교감을 마친 직후 남자가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1호가 마이크를 잡고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를 열창 중이었다.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한 남자는, 룸을 한차례 돌아보고 다른 마이크를 집어들어 1호의 열창에 난입했다.


1호도 잘 부른다. 남자에 대한 감상은 딱히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춤사위가 징그럽고 더러웠다. 왜 굳이 춤까지 추나 싶었다.


2호가 볼빨간사춘기의 여행을, 3호가 헤이즈의 UnderWater를 부르고 나서 차례는 남자나 나에게 돌아왔다. 딱히 못 부를 것은 없었기에 남자에게 누가 먼저 하겠느냐고 시선으로 물었다.


"드디어 내 차례다." 좀이 쑤셨다는 듯이 아저씨같은 감탄사를 내뱉고서, 남자가 리모컨을 들었다. "잘 봐라, 이 허접한 기지배들아. 노래란 건 이렇게 부르는 거다."


남자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기기에 나인뮤지스 - Dolls라고 떠올랐다. 모르는 곡이었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모두가 환호했다. 나만 빼고. 나는 그저 경악할 따름이었다. 


인정하긴 싫어도 노래 실력 자체는 굉장히 뛰어났다. 이뿐이면 경악할 일이 없었겠지만, 문제는 남자가 블랙핑크 때처럼 춤을 췄다는 것이었다. 


그것에 경악했다. 당연히 칭찬이 아니다. 그, Dolls라는 곡의 안무는 남자의 춤사위로 보건대, 굉장히 여성스러운 안무인 듯했다. 그런 안무를, 쓸데없이 잘 소화하는 모습이 몹시 기분 나빴다. 어쩜 그리도 허리를 잘 돌리는지. 블랙핑크에서 예상 했었어야 했다. 반주가 끝나고도 남자의 춤사위가 아른거렸다. 


"박수 소리가 작잖아!"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 남자는 표정을 잔뜩 구겨 껄껄 웃었다. 


룸을 감돌던 강렬한 여운이 점차 가시자,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남자가 테이블의 리모컨을 밀어 내게 전달했다. 중간중간에 뒤졌던 차트 목록의 번호들을 시간을 들여 머리속에서 굴리고, 리모컨을 조작했다.


반주가 흐른다. 첫소절의 타이밍을 알리는 번호가 나타난다. 이내 입을 떼려고 하자,


"아니. 다른 거 불러."


남자가 곡을 캔슬했다.


"뭔 놈의 윤하야. 안 돼."


윤하의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 곡의 뭐가 마음에 안 든 건지, 남자는 의아해 하는 아이들도 아랑곳 않고 다시 선곡하라 지시했다.


인내심을 발휘해 남자의 말을 따랐다.


다음 곡은 거미의 혼자만 하는 사랑. 그 곡도 첫소절 직전에 캔슬됐다.


"아 진짜 눈치 없네. 좀… 어? 알잖아. 아빠 실망시킬 거야?"


한 번 해보자는 것 같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Bang Bang을 선곡했다. 곡은 캔슬되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나는 제시제이와 니키 미나즈의 파트까지 빠짐없이 모두 소화했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나는 곧바로 도자 캣의 Boss Bitch까지 완곡했다.


마이크를 내려놔서 생긴 에코가 아주 크게 들렸을 만큼 룸은 조용했다. 인접한 룸의 소리가 심심해진 우리 룸을 비집고 들어와 최소한의 흥은 유지하게 했다.


"키야 ㅋㅋ" 남자가 입을 틀어막듯 하고 감탄했다. "역시 우리 딸. 아빠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어. 야! 봤어!? 이게 내 딸이야!"


남자가 그렇게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니를 제외한 아이들 모두가 달라붙어 내 실력을 칭찬했다. 전부 진심어린 칭찬이었지만 기쁜 것은 전혀 없었다. 싱글벙글하는 남자야 어쨌든, 걱정하는 듯한 표정인 미니가 신경쓰여서였다.


"아이씨! 아저씨! 왜 캔슬했어! 이렇게 잘 부르는데 다 부르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3호의 외침에 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쟨 그런 곡 금지야."

"왜 금진데?"

"차였거든."


차였다 앞에 굳이 고백했다가, 좋아하는 남자한테, 같은 말은 안 붙여준 점에 감사했다. 


감사의 마음이 지나가고, 통제하기 어려운 분노가 끓기 시작했다.


"헐…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런 언니를?"

"그러게나 말이다~ 존나 멋있거나 존나 병신이거나 둘 중 하나일 듯~"


세 가지 위로의 말이 내 귓가에 울렸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옳겨진 이목을 따라 아이들은 남자 옆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아이들이 옳겨가 생긴 빈 자리에 미니가 다가와 앉았다.


"언니.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이상하게 듣지 마?"


그런 말로 양해를 먼저 구한 미니는, 작게 심호흡하고 질문해왔다.


"아저씨… 진짜 아빠야?"


차였다는 부분을 물어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의 질문이 날아와 당황스러웠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 직전에 미니가 남자 쪽을 가리켰다. 남자는 여자아이 셋과 사이좋게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아빠가 노래방에 와서 딸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냐구. 내 친구들이야 아저씨랑 원래 알던 사이였다지만, 좀 너무해."


담배 냄새…라고 질색하는 미니에게 보란 듯, 나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런 딸이니까. 그 딸에 그 아빠야."

"우웃…"


입에 머금은 연기를 미니의 얼굴에 뿜었다. 적당히 떨어지라는 의미였는데, 미니는 눈을 질끈 감아 가만히 버텼다.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전에 말한 남친이랑은 잘 되고 있냐?"


"아 그 씨발 새끼? 헤어짐."


"왜?"


"왜긴 왜야. 바람났지.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침대에서 몇 번 뒹굴고 다른 년한테 튀었음 ㅋㅋ"


"콘돔은 똑바로 썼지?"


"아저씨는 진짜 이상하다. 보통은 내가 죽여줄까? 그 새끼 데려와! 이러지 않아?"


"왜, 누가 그렇게 해준다디?"


"아는 오빠들이 존나 극성이었음. 내가 괜찮다는데 왜 지랄들인지. 그런 새끼 패죽여서 뭐해?"


"이야. 어른이다 어른. 그래 이 기지배야. 콘돔만 똑바로 썼으면 된 거야. 알겠냐!? 콘돔은 꼭 써라!"


"자꾸 콘돔콘돔 하지 마!"


"이년 태세 전환 개웃겨 ㅋㅋ 언제는 콘돔 없이 해보고 싶다면서."


"뭐 이 씨팔! 죽는다! 하지 마!"


"왜 아저씨가 지랄임? 얘 얘긴데? 아저씨가 얘 아빠야?"


"콘돔 껴! 아니면 니들이 약이라도 먹던가!"


"아저씨아저씨. 나는 아저씨 같은 사람이랑은 피임 안 해도 되는데~"


"이게 미쳤나."


"급식 먹고 싶다고 존나 들이대는 새끼들 개많은데? 하지만 절대 안대쥼 ㅎㅎ. 그런 급식이가~ 아저씨한테는~ 한 번 줄 수도 있는데~ 앗… 언니 들었나…?"


"그만 까불어. 장난도 정도껏 쳐."


"왜 갑자기 정색하구 그래…"


미친 새끼. 


"…미니, 나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이상하게 듣지 마?"


귀엽게 끄덕인 고개를 보고 마저 물었다.


"저런 애들을 친구로 둬도 괜찮은 거야?"


미니는 다시 끄덕이며 나쁜 아이들은 아니고, 좀 자유분방한 거라고 대답했다.  발랑 까진 걸 자유분방함이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명이 몇 곡만 더 불렀을 뿐, 보너스 시간까지 부르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우리는 카페, 식당, 카페, 오락실, 베이커리 카페를 차례대로 들리고서 해산했다. 


중간에 따로 나와 들른 가게에서 내가 골라준 옷을 들고, 미니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미니에게 똑같이 응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너 진짜 미친 새끼냐?"

"뭐?"


나는 보지도 않고 답한 남자는, 밤이 되어 더욱 붐비게 된 번화가를 바라보며 담배를 물었다.


"이상한 새끼랑 미친 새끼 중에 하나만 해. 도대체 어떤 아빠가 씨발 고딩들 데리고 노래방가서 담배 피워대고 노는데? 미니 얼굴 안 봤어? 걔가 그러더라. 너 진짜 아빠냐고."


"그게 신경 쓰이냐?"


"씨발아. 네가 소개시켜준 아이야. 보고 배우라고 했던 아이라고. 그렇게 말했던 주제에 넌 그런 아이 앞에서 담배 뻑뻑 피워대면서 걔 친구라는 애들이 던져대는 유혹이나 즐겨?"


"누가 즐겼다는 거야."


"내 생각은 안 하느냐고! 너 설마 그게 그저 장난이라고만 생각했던 건 아니지? 그거 절반은 진심이었어. 알아 이 병신아?"


잘생긴 게 죄지, 라고 남자는 태연하게 내 속을 뒤집는 소리를 꺼냈다.


내가 왜 이런 놈한테 열을 내는가 싶어서, 포기하고 다시 말했다.


"친구라는 그년들도 웃긴 년들이야. 어떻게 미니같은 애한테 그런 애들이 들러붙은 거야. 딱봐도 공부도 존나 못해서 술집 유망주나 될 것 같은 년들인데."


"어차피 딱 한 번, 짧은 시간 살다 가는 것들이야. 담배를 피우든 이른 나이에 성에 눈을 뜨든, 일탈 좀 할 수 있는 거잖아. 본인이 좋다고 하면 괜찮은 거라고. 범죄만 안 저지르면 되는 거지. 그리고, 걔네 공부 엄청 잘해."


어이없다는 듯이 남자는 말했다. 어이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뭐, 됐어." 남자는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껐다. "중요한 건 네 눈에 걸레처럼 보이는 걔들이 아냐. 네가 미니라고 부르는 걔도 아니고. 나한테 중요한 건 너야."


"…뭐, 어쩌라고?"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너도 짐작했겠지만, 오늘은 연습 겸 테스트였어. 다음부터가 진짜야. 다음은 너랑 나 둘이서만 다닐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라."


남자는 더도 말고 오늘처럼만 해도 충분하다며 인파 속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계약한 거 잊지 마. 다음 주에 만나면, 그때는 폐하라고 불러."






* * *





시간이 흘러 토요일이 왔다. 나는 저번 주와 똑같은 장소에서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30분이나 남았다. 아슬아슬하게 맞춰 나오는 것이 베스트였지만, 그 집도 남자의 것이라 의식하게 되어버려서 마냥 빈둥거리기도 뭐했다. 


한적한 주말 오전의 번화가에는 중년이나 노인이 많았다. 그 덕에 홀로 서있어도 시선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런 시선이야 이제 익숙해졌다 해도 짜증나는 것은 여전한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유독 인간들의 시선이 신경쓰일 수 밖에 없는 차림이었기에, 번화가를 메운 인간들이 대부분 내게 관심없는 부류인 것은 남자를 기다리는데에 도움이 됐다. 그 개새끼, 1시간이나 늦어버렸다. 나는 1시간 30분을 기다린 것이 됐다.


나타난 남자는 내 정면에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나를 위 아래로 훑고, 뭐라 혼자 중얼대더니, 품평하듯 입가를 가리고 다시 전체적으로 훑었다. 


"어울리네."


치켜 뜬 눈으로 노려보듯 하다가 거리를 벌렸다. 스커트가 애매하게 짧아서 막 불어온 바람에 들춰질까 불안했다. 블라우스는 작은 사이즈를 입는 나한테도 갑갑할 정도였다.


"설마 진짜로 입고 올 줄은 몰랐어."


스마트폰을 꺼내 조건을 맞추지 않으면 계약 파기라는 협박 문자를 보여줬다.


"그래. 그러니까 진짜로 입고 올 줄 몰랐다고."


소리없이 기분 나쁘게 웃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대여점에서 취급하는 교복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한테 빌렸어?"


"미니."


"아. 그래. 듣고보니 걔가 입던 교복이네. 잊고 있었어."


"따로 입으려고 일부러 줄여둔 건데, 입을 일이 없었대. 갑갑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한테는 딱 맞을 거라나."


"딱 맞아?"


"아니. 갑갑한데. 사이즈는 맞는 것 같은데 왜이리 껴? 원래 교복은 이렇게 작게 나와?"


남자는 대화를 멈추고, 재밌다면서 따로 챙겨왔다는 겉옷을 건넸다.


"걔가 그렇게도 좋냐?"


나는 무슨 소리냐는 시선을 보냈다.


"너 지금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막 나불대잖아. 네가 욕 없이 이 정도로 길게 말한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어."


입으라고 지시할 게 뻔했으니 남자가 건넨 겉옷이나 걸쳤다. 품이 넉넉한 네이비색 가디건이었다.


"그렇게 입으니까 딱 그 나이대 애들 같구만." 기분 나쁘게 남자는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 그러면 나는 어때?"


"너, 뭐?"


"학생들이 할 법한 차림이냐고."


남자를 대략적으로 살폈다. 흑색 와이셔츠에 검은 슬랙스, 길지만 남자의 키 때문에 적당한 기장감을 뽐내는 차이나 코트. 싹 다 검은색이다. 


학생들이 할 법한 차림이냐고? 음지에서 이름 좀 날리는 무서운 놈 같은 차림이다.


"…아니?"


머리스타일은 가르마가 들어간 포마드다.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칭찬이라도 해줬을 만큼 손질이 잘 됐다.


그런 머리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눈을 씻고 봐도 학생같은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 폐하라고 불러."


웃음기를 순식간에 지우고 남자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나를 와이프 대용으로 삼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일단은 따르기로 한다. 안 그러면 또 계약을 들이밀며 협박할 것이다. 볼 수 없게 된 폐하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기고 말 것이다.


그렇게 마음은 먹었는데, 도저히 이 남자를 향해 발음하기가 어려운 단어였다.


"…폐하." 


나는 거의 웅얼거리듯 내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부를 거면 똑바로 불러."


"…네. 폐하."


"좋아."


처음과 별 차이 없는 크기였는데도 만족해줬다.

빨리 익숙해지도록 하자.


"아르망." 


남자가 한 발 성큼 다가와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아는 그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나 오늘 어때?"


개체명으로 불린 것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어서, 대답을 잘 할 수가 없었다.


"응? 어때?"


외모를 평가해달란 소리라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그러나 당황이 가시지 않아 반사적으로 답했다. 


"그냥 평범해."


다 뱉고나서 멈칫했다. 그랬음에도 남자는 '그런' 표정이었던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 반응만으로도 남자가 어느 부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지 알았다.


남자에게 있어 방금 대답은, 내가 계약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있다고 비춰질 수 있는 반응이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폐하라 부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하고 파악했는가. 계약의 내용을 망각하지 않고 있는가. 이 두 가지 항목에 점수를 매기고 있던 것이리라.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 '그냥 평범해' 가, 아르망 추기경이 할 법한 대답이야?"


나는 침묵했다. 웬만한 인간들에게선 느낀 적 없던 아우라와 시선이 뒤통수를 묵직하게 눌러와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며 한 두 번 본 인간이 아닌데, 내가 몰랐던 면이 있었다. 


'그런' 얼굴. 그와 대비되는, 느껴본 적 없는 적의로 구축된 아우라. 남자는 여전히 그런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진심으로 분노한 듯했다.


"다시 해."


경극 배우가 가면을 바꾸듯 험악한 얼굴에서 다시 '그런'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몰랐으나 명확히 지시한 것이 있으니 그에 따르기로 했다.


"나 어때?"

"잘생겼어요."


그 어떤 긍정적인 인정은 죽어도 하기 싫은 인간이지만, 모든 걸 떠나서 바라보자면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뭐라 사족을 붙일 것 없이, 그냥 솔직하게 잘생겼다. 이런 외모니 주름있는 아저씨더라도 고등학생이랑 놀 수 있구나 싶었다.


"진짜? 진짜 잘생겼어?"


엄청 해맑은 미소로 물어온다.

…본인 와이프한테는 이런 인간이었던 걸까.


"네… 잘… 생겼어요. 스타일도 마음에 들어요. 올블랙은 금발에 가장 잘어울린다고 생각… 하거든요. 폐하같은 더티 블론드에는 더욱이요."


"헤헤…"


"조엘 킨나만… 닮았어요."


"으응?"


대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남자는 조엘 킨나만? 이라고 중얼거리고, 떠오른 게 있는지 익숙한 기분 나쁜 웃음을 보였다.


"아… 얼터드 카본?"


세상에. 먼 과거의 영상물을 아는 바이오로이드가 있다니. 그렇게 비아냥거리듯 혼잣말 한 남자가 몸을 숙여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재밌는 거 알려줄까?"


2인칭 대명사로 불렀다는 건 '와이프'가 아니라 '나'에게 말하고 있다는 뜻인 듯했다.


너무 가깝게 다가온 남자는 한동안 내 얼굴을 관찰하듯 보더니, 귓가 쪽으로 입을 옮겨 속삭였다.


"이게 내 원래 외모랑 가장 가까운 얼굴이야."


귓가에서 시작된 미세한 저림이 등줄기까지 이어졌다.


"아르망도 예뻐. 교복 진짜 잘 어울린다. vr세계에서 봤던 모습이랑은 완전 다른 느낌이야. 응… 예뻐."


'나'에서 곧바로 '와이프'로 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말투였다. 완전 제멋대로다. 하란대로 하면 된다지만, 그것도 장단을 맞출 여유를 줘야 가능한 이야기다.


남자도 내 입장도 무엇도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철저히 수동적으로 임하기로 했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될 뿐이라면, 내가 먼저 뭘 하려고 나설 필요는 없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것 같아서 나는 무감정하게, 남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게 주의하며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한동안 번화가를 걸었다. 내가 알던 폭력적이기만 했던 남자는 배려한다는 걸 단숨에 느낄 수 있는 강도로 내 손을 잡은 채, 위아래로 흔들거나 제 뺨에 대거나 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최대한 남자에게 신경을 끄고 방금 전에 남자가 보인 아우라에 대해 생각했다.


냉엄냉혹하다기엔 모자란, 그렇기에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스산함. 대놓고 무겁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위압감. 


나는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그 동안 이 남자를 봐왔음에도 몰랐다. 


나는 생각했다. 이 계약은 남자에게 있어 그렇게 분노할 만큼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계약에 있어 조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나 본인의 와이프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이 남자의 성역을, 나도 모르게 더럽힌 걸지도 모르겠다고.







* * *







저번 주에 연습 겸 테스트라고 남자가 말했던 것은, 저번 주나 오늘이나 동일한 경로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했던 것 같다. 편의점, 노래방, 카페, 식당, 카페, 오락실, 베이커리 카페. 찾았던 장소까지 똑같았다. 심지어 노래방에서는 똑같이 저번 주의 8인실을 찾았다.


어디서든, 남자가 말하면 나는 적당히 '아르망 추기경'처럼 대꾸했다. 그 이상이나 이하는 없었다. 스킨 십은 어디까지나 손을 잡거나 내 손이 사랑스럽다는 듯 제 뺨에 대거나 하는 정도가 다였어서, 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는 크게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는 적응이 됐다.


좋든 싫든 함께하다보니 사고의 흐름에 중심이 되었던 것은 남자였다. 미니는 말했다. 엄청 잘해주는데다 좋은 사람이라고. 확실히 오늘 남자가 노래방이나 카페에서 보인 모습은 예의 바르고 교양있는 인간의 그것이었다. 교양 면에서는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는 배려심이 느껴졌고, 예의와 교양이 필요한 그런 순간이 지나가면, 입만 안 열면 정말 괜찮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이거 어쩐지 그거 같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하게 돼서 평소보다 언행에 주의하려고 신경을 쏟는 남자. 남자에게 대입하기엔 너무 미숙하고 어린 이미지가 아닌가 싶었지만, 외모의 연령대를 지우고 생각해보면 엇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즉, 남자는 오늘 평범하게 데이트를 하러 나왔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할 것 없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 남자 와이프의 대역. 남자가 요구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다. 본인의 와이프와 부합하는 이미지를 내게서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나야 남자의 와이프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처음 외에 내 와이프같지 않다고 화낸 적은 없었으니 적절히 행동하고 있는 거라 생각할 따름이다.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내게도 이런 관계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남자의 '와이프'로 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는 것이고, 중간중간 '나'로 돌아갈 때는 공짜밥 먹으니 좋다고 넘기면 그만이다. '와이프'를 '나'에게서 철저히 분리해 놓으면 된다. 무엇보다 남자와 함께 하면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수단도 있다. 미니가 그 수단이다.


벌써 밤이 깊었다. 정신에 방벽이 구축된 시점부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남자의 차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익숙한 도로에 올라 있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차가 향한 곳은 번화가나 그 외 익숙한 거리가 아니라 영화관이었다.


"고생했어. 오늘 연기는 여기까지만 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수석 문을 열었다. 족쇄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버스는 끊겨서 집까지 꽤 걸어가야겠지만, 산책 나왔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괜찮으면, 영화나 한 편 보러 가도 되고."


남자가 운전석에서 나와 말했다. 


"이미 다 봤어."


나는 영화관 건물의 외벽을 가리켰다. 수백 년 전에 다 본 것들 뿐이었다.


"그러냐. 그럼 들어가라."


배웅하는 말이었어서 남자도 운전석으로 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일 텐데, 왠지 남자는 대로변으로 올라가 다리를 고정하고, 영화관 건물과 바닥을 번갈아봤다. 


휑해진 대로를 밝히는 가로등 바로 아래였어서인지, 그런 남자의 뒷모습은 손상된 영사기가 쏘아내는 화면처럼 늘어나거나 희끄무레해지거나 번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수명이 다해가는 내 뇌의 문제였나 싶었지만 오감은 확실히 붙들려 있었다.


어쩐지 처연해 보였다. 남자의 몰랐던 모습을 또 하나 보게 됐다고 생각하자, 내 다리는 왠지 대로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친 거 아니냐고 머리 한 구석이 호소했으나 다리는 멋대로 움직여갔다.


남자의 옆에 서서 그 말을 하기 직전에 다시 호소가 들려왔다. 남자에게서 떨어지고 싶은 것은 맞지만 너무 떨어져서도 안 된다고 나는 머릿속을 설득했다. 


언젠가 이 남자를 죽여야 한다. 그냥 죽여서는 안 된다. 고통스럽게 고문한 끝에 죽여야 한다. 그 고문에 필요한 정보가 필요하다. 왠지 지금의 남자라면 그런 정보를 조금이라도 흘릴 것 같다.


"가. 어차피 내일 쉬어."


남자의 팔을 툭 치고 먼저 영화관으로 향했다.


심야의 영화관 매표소는 휑했다. 딸려있는 오락실은 가동을 멈췄고, 팝콘기가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여운 목소리에 비해 늙어보이는 얼굴을 가진 여점원은,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다가 남자를 보자 두 배는 커졌다.


영화는 재개봉한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보기로 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 좌석은 두 자리 맞으신가요?"


"네. 이왕이면 커플석으로 주세요. 할인되잖아."


남자가 그렇게 요청했다.

기시감을 느낀다.


매표가 끝나고 남자에게서 티켓을 받았다. 좌석이 적힌 부분이 신경써서 그린 듯한 하트 모양의 원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상영관으로 들어서고, 자리를 잡고, 광고가 지나가고, 톰 크루즈가 2번 죽을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대화 한 번 오가지 않았다. 남자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러면서도 영화에 집중하지 않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오늘 고생했어." 남자가 평탄하게 말하며 영상 속 리타에게 미소지었다. "나쁘지 않았어. …연기."


나는 톰 크루즈가 세 번째 죽었을 때 말했다.


"전에 오픈한다고 했던 거, 아직도 오픈 중이야?"

"그래."

"그러면 알려줘."

"말해."

"당신 와이프를 연기하라는 이유가 뭐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을 텐데."


와이프와 관련된 건 오픈하지 않겠다는 것 같다.


밀어붙이기로 한다. 기운 없어 보이는 지금이 기회다.


"넌 나에 대해 알면서, 왜 나는 몰라야 되는데?"

"알 필요 없으니까."

"불공평하다고 생각 안 해?"

"어. 안 해."

"개새끼…"


스피커에 가려졌을 욕설이 들리기라도 했던 건지,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고 코로 한숨을 쉬었다.


"말하면?"

"말하면이라니?"

"말하면, 왜, 연기에 보탬이 될 것 같아?"

"…글쎄."

"더 몰입이 될 것 같아?"


나는 한호흡 틈을 두고, 팔걸이에 올라온 남자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 정도는 가능할지도."


남자는 비웃는 듯한 곁눈질을 하고서 톰 크루즈가 네 번째 죽었을 때 말했다.


"버킷리스트야."

"버킷리스트?"


"응. 버킷리스트. 우리 와이프랑 약속했었어. 언젠가 모든 걸 끝내고, 평화가 평범하게 여겨지는 세상이 오면, 하고 싶었던 거 다 하자고. 미리 정해놓자고. 그런 리스트야. 오늘 했던 건 그 리스트의 1번이었어."


"…그냥 데이트?"


"그냥 데이트라니. 나도 사령관이었다니까. 멸망한 세계에 영화관이나 카페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얼마나 달성하기 어려운 거였는데."


"아르망 추기경은 없다고 했지?"


"아르망 추기경의 기능을 가진 도구가 없다고 했지."


"그게 그거잖아. …어쨌든, 왜? 당신이 거느린 바이오로이드는 모두 죽었다며. 당신 와이프도… 죽었겠지. 근데 왜 아르망 추기경만 없어?"


"너무 빨리 떠났거든. 이런 식으로…" 두 칸 떨어진 좌석 쪽에서 소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닥터가 우리 아가씨들을 담아두는 게 가능할 정도로 대단해지기 전에, 떠나버렸어."


"그래서 나를 대역으로 삼았다?"

"…그렇지, 뭐."

"너 시간여행자라며."


스크린에 내내 고정돼있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그게 뭐?"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다음에 할 말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러면 그 대역이 꼭 나일 필요는 없잖아. 그냥 아르망 추기경이 흔해 빠진 시간대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아무리 고급 개체라지만 결국은 바이오로이드야. 쓰일 곳엔 얼마든지 쓰였고, 너처럼 돈 많은 놈은 주문제작도 가능해. 아르망 추기경은 접하기 어려운 개체가 아니야."


"왜 하필 너냐고 묻고 싶은 거야?"


"그래. 왜 하필 나야? 혹시 당신 와이프는 나처럼 오르카에서 복원된 개체였어? 아니… 분명 복원 개체였겠지."


"맞아. 너랑 똑같은, 할로윈 전에 복원된 개체였어."


"그래서야? 내가 당신 와이프랑 똑같은, 오르카에서 복원된 아르망 추기경이라서?"


"아니야."


칼같이 대답한 남자는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다음엔 반대편 팔을 가져와 다른 팔에 붙어있는 내 손을 떼어냈다.


이후로 몇 가지 더 물었지만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내 말은 안 들린다는 듯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부럽지 않냐?" 라고 남자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한 적 있을 것 같은데."


있다. 한편으론 멋있는 톰 크루즈가 아주 짜증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고작 죽기 하루 전으로 떨어지는 게 뭐가 힘들다고? 현실의 나는 하루 전도 아니고 150년 전으로 떨어진다. 


"부럽진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하루 전은 너무 빡세. 부러워할 거라면 적어도… 2년 전으로 돌아가는 게 나아."


"복원돼서 폐하를 처음으로 만나는 날. 맞지?"


맞다. 어쩜 이리도 속을 잘 읽는지. 하루 전도 아니고 150년 전도 아니고 딱 2년 전이라면, 막 복원된 그 시점이라면 조금은 해볼 만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폐하에게 반해버리는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50년 전이 아니라 2년 전이라면 '떨어진다.' 가 아니라 '돌아간다.' 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고립감이 덜한 표현이 가능해진다. 오르카에서 끝나 오르카에서 시작하게 되는 거니까.


다 쓸데없는 망상이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공상의 루프는 현실의 루프에 비하면 녹록한 구석 투성이다. 나 외에 똑같이 루프를 하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는 150년보다 짧은 간극을 반복하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영화가 다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화관 앞에서 남자는 내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오늘, 미안했어." 뒤돌아서 집으로 향하는데 남자가 말했다. "화낸 거, 미안해."


수백 년 동안 몇 번이나 들은 저 놈의 사과도 지긋지긋하다. 이 정도면 병주고 약주는 게 아니라 병만 주는 꼴이다.


"저기, 잠깐만."


내게서 아무 대답도 못 들은 게 아쉽기라도 했건 건지, 남자는 빠르게 따라와서 내 앞에 섰다.


"뭐야. 연기 끝이라며. 왜 이리 질척여?"

"…좀, 괜찮으냐고."

"뭐?"

"제대로 살아있을 수 있겠냐고. 그걸 묻는 거야."


요컨대 또 자살할 거냐고 묻는 것 같다. 

나는 피식대고 남자를 지나치며 옆구리를 툭툭 쳤다.


"누구 씨가 막는 바람에 김이 샜네요. 저 그냥 이러다 죽으려구요. 우리 폐하 그리면서요."


"힘들지?"


남자는 반만 몸을 돌리고, 시선은 땅에 둔 채 말했다.


"인간들이 싫지?"


"응. 싫어. 좆같아. 그 인간들 중에서도 네가 부동의 원탑이야."


"그래도 인간들이 좋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성큼 다가와서, 남자는 내 앞에 단정히 섰다. 

늦은 시간의 바람이 남자를 훑어 베이비 파우더향을 흩뿌렸다.


"좋은 인간들은 많아.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런 인간들이 어느 시대에든 존재한다는 걸 너도 알 거야. …바이오로이드가 나타난 후로는 많이 줄긴 해도 말이지."


"아는데, 씨발 꼬이는 것들이 벌레만도 못한 것들뿐이잖아. 누군 좋아서 인간 싫다고 몸서리치니? 바이오로이드인 제가 좋아서 인간이 혐오스럽다고 몸서리 치겠냐구요."


"그럼 앞으로는 좋은 인간들만 만나."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니까! 가만히 있어도 꼬인다고! 너도 봐서 알잖아! 보지랑 땀샘에서 흘러나오는 꿀 한 번 빨아보겠다고! 혓바닥 낼름대면서 달려들잖아! 하. 벌레가 다 그렇지, 안 그래? 이 시대에서 바이오로이드는 제일 예쁜 꽃이니까. 바이오로이드 시대에는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꽃이니까."


"내가 도와줄게. 좋은 인간만 만나게 해줄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인간부터가 안 좋은 인간인데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 그래야 오래 살 수 있어. 폐하를 그리면서 죽겠다며. 그럼 최대한 오래 살아야지."


"씨발놈이 또 지 할 말만…"


"네가 미니라 부르는 아이는 교보재만이 아니라 그러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어."


그 아이를 도구 취급한 것에 화가 나서, 몸이 튀어나갈 뻔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말해줘도 될까."

"안 듣겠다고 해도 말할 거잖아."

"아니. 아니야. 듣기 싫다면 말 안 할게."


미니 덕에 좀 나아졌다지만 너덜너덜한 상태인 것은 똑같다. 그런 내게 듣기 싫고 좋은 이야기같은 구분은 의미가 없다. 


말할 거면 하라고 고개를 튕겼다.


"그 아이, 3년 뒤에 죽어."


"뭔데, 왜 갑자기 그 따위 헛소리를 하는데?"


"헛소리 아니야. 정말로 죽어.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지금 너한테 그 아이 만큼 중요한 것도 없잖아."


"…진짜야?"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몇 번이나 봐왔어. …내가 이번에 그 아이를 보게 된 건, 거의 천 년 만이야."


시간여행자만이 할 수 있는 소리였기에, 거짓말로 들리지 않았다. 표정도 진지했다. 이런 꼴이 된 내게 남자가 일부러 거짓말 할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미니는 전부 끝나고 만난 아이다. 900년과 오르카와 폐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아이다. 폐하께 다다르는 길을 막아서던 좆같은 새끼들도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이 실려 있었다. 바람은 계속 불어, 영화관 앞은 차츰 낙하의 무리가 늘어가던 그 공원과 유사한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의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기분이었다. 오늘의 나뭇잎은 낙하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것을 품고, 바닥에 떨어져 꺼림칙하게 바스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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