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헬렌. 문맹 노인들의 대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늘로써 나는 푸른 회색으로 덮인 공장을 벗어났다. 모자를 쓴 남자가 다가와 나를 안은 뒤 트럭으로 옮겼다. 창문 하나 없이 어두워서 싫은 느낌이 들었다.


"밖 볼 수 없다. 창문 없다?"


"글씨다. 탈출 방지라고는 하던디. 애초에 짐칸이기도 허고."


나에게 다리 따위는 없다. 아빠는 다리가 제작비를 늘릴 뿐인 장식품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방금처럼 누군가가 없다면 내게는 기어가는 선택지밖에 없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짐칸이라니 대우가 박하다.


"나 짐?"


"분류상은 그렇지. 왜. 어두운 건 싫으냐?"


"그래."


"허, 참.. 기다려 봐."


남자는 짐칸의 문을 닫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남자와 대화하는 듯했다.


"동상! 오늘은 나 혼자 갈테니께, 일찍 퇴근혀."



"네? 그러다 걸리면 어떡해요?"


"어차피 반장놈 일 안 하는 거 알잖여. 오후부터 안 보이는 거 보이께 또 B 구역이나 갔겄지."



"그래도 좀.."


"아, 오늘 결혼기념일이라며! 보내줄 때 가!"



"아, 맞다! 고마워요, 아저씨! 나중에 한턱 쏠게요! 내일 봐요!"


"쯧쯧.. 바가지 긁히려고 아주 애를 쓰는구먼."


.

.


"자, 뎠다. 읏차."


"나, 어디 간다?"


"으잉."


"밝은 곳 간다?"


"그려그려."


남자는 다시금 나를 안아 조수석으로 옮겨 손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시야가 한층 밝아져 기분이 썩 좋았다. 내 얼굴을 본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페달을 밟았다.


"나는 헬렌. 아저씨는 이름 뭐다?"


"이름? 알아서 뭣 하려구?"


"대화의 시작은 통성명."


"상덕이여. 김상덕. 근디 너는 말씨가 왜 그런다냐."


"내 목적은 글을 쓴다. 귀가 듣고, 손이 쓰고, 눈이 읽고, 머리가 생각한다. 언어 능력 필요 없다고 말했다."


"..누가 그딴소리를 혀."


상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실수라도 한 것일까.


"아빠가 그랬다. 돈을 아껴야 한다. 그래서 다리 없다. 난 시설에만 있는다."


"이런 미친.."


"상덕, 화났다? 미안하다. 용서 구한다."


"하.. 니한테 화난 거 아녀. 니가 잘못한 것도 없구. 내가 미안타.."


"왜 사과한다? 상덕 잘못 없다."


"그러게나 말이다.. 잘못 없는 놈 둘이 사과나 하고 있으니 원.."


" ? 이해 힘들다."


상덕은 부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꿨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가 거북했던 모양이다. 나와 상덕은 이동시간 내내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가족 이야기, 하는 일, 사는 곳, 취미. 살면서 활용할 수 없는 시답잖은 소재였다. 그렇기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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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도 왔네. 다 왔다, 헬렌. 앞으로 니가 살 곳이여."


"상덕, 같이 안 간다?"


"허이구, 나도 집에 가야지. 여기서 천년만년 살라구?"


"우리 그런 사이였다?"


"..그거 내가 가르쳤냐?"


"드라마 얘기할 때 나왔다."


"하아.. 어차피 집에서 몇 킬로 안 되니께 가끔씩 얼굴이나 보고 사는 걸로 만족혀."


"그럼 다음엔 언제 온다?"


"씁.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는 법이여. 참어. 그럼 복이 오니께."


"..알았다. 대신 상덕 약속 지킨다."


상덕은 트럭에 있던 박스를 찢어 휠체어를 꺼냈다. 그는 '걸리면 모가지'라고 얘기했지만, 표정에서는 후련함이 보였다. 상덕은 나를 들어 기구에 올리고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바퀴를 돌리는 데 힘이 들었지만 대필용 바이오로이드이기에 지속성이 뛰어났다. 나는 상덕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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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다? 나는 헬렌. 대필용 바이오로이드다. 내 자리는 어디?"


"저쪽."


"고맙다."


바퀴를 굴려 구석에 있던 컴퓨터 책상 앞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한다?"


"없어."


"이해하지 못했다?"


"없다고. 이런 깡촌에서 할 일 같은 건."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모르지. 알아서 쉬던가 해."


그녀의 말대로 한동안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안내원이었던 그녀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 밤이 되면 시설에 딸린 방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가구가 띄엄띄엄 놓여진 공간이었다. '만들라고 해서 억지로 만든 방'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첫 일이 생겼다.


"..책을 찾고 싶다?"


"어."


"하지만 도서관은 두 블럭 아래다? 여긴 동사무소."


"제목을 몰라. 그래서 가도 못 찾아."


"그럼 나도.. 아, 알고 있는 게 있나? 생각나는대로 말하면 살려는 드린다."


내가 만들어진 목적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의뢰인만큼 최대한으로 그를 돕고 싶었다. 그도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혹시 일부러..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애가 알려줬던 건데, 옛날 배경에 로맨스물이었던 거 같아."


"너무 넓다. 언제 만든다?"


"아.. 조선시대엔가 썼다고 하던데, 제목에 부인이 들어갔었어."


"..혹시나 해서 묻는다. 그 여자가 널 부르는 별칭이 있다."


"어떻게 알았어? '용'이라고 부르는데."


"..."


"나 내용 전부 안다. 전문 써줄 수도 있다. 받아 간다?"


"오, 진짜? 그럼 좋지."


"..기다려라."



생애 처음으로 겪은 딜레마였다. 그에게 수치를 주는 데 관여하는 게 옳은 일인가. 내 일을 하는 게 옳은 일인가. 답이 나오기도 전에 내 손은 유능하게 일을 끝마쳤다. 그는 기뻐하며 문을 나섰다. 상덕과 다르게 나는 그 남자의 미소를 보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저거 박씨부인전이지?"


"..알고 있었다?"


"쟤 빼고 다 알걸. 말하기 뭐해서 안 알려준 거고."


"그럼 헬렌, 괜한 짓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면 해야 할 일부터 해봐. 그럼 적어도 할 말이라도 생기니까."


"..조언 감사하다."


첫 의뢰 이후로 그 남자를 제외한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감사를 전해 왔다. 하지만 대필 의뢰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도서의 탐색과 필사 의뢰가 늘어났다. 어쨌든 일이 늘어 그 남자에게는 감사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자 나에게는 별명이 생겼다.


"알렌 언니, 뭐 하고 있어? 나랑 놀자!"


"알렌, 알렌 아가 있니?"


아카식의 '아'와 원래 이름인 '헬렌'을 합쳤다고 한다. 인형에 불과한 나에게는 과분한 별명이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평범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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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떠오르는 스토리와 엔딩. 다만 우로부치 작가님의 글을 읽은 후 생각난 소재라 엔딩도 비슷하다. 그러므로 다음 편은 쓰지 않는다.



콘 깜빡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