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헬렌, 바이오로이드다?  https://arca.live/b/lastorigin/6882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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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낮인데도 날이 어두웠다. 구름 아래 모든 것들의 색이 한층 더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공장에서 처음 나와 짐칸에 들어갔던 일이 떠올랐다. 안내원에게 나 같은 경험은 없겠지만 그녀도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 날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반가운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렌, 있어?”

 

 

“네, 그렇다. 오랜만인가?”

 

 

“별 건 아니고 의뢰를 좀 하고 싶어서..”

 

 

“얼굴이 흙빛. 무슨 일 있다.”

 

 

“니, 니가 신경 쓸 문제가 아냐! 의뢰나 받아!”

 

남자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짐칸에 갇혔던 적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눈은 닥쳐올 강풍에 미리 돛을 접지 못한 듯 흔들리고 있었고, 볼과 보조개는 파도와 같았다. 나는 그가 걱정되어 안부를 물었지만, 그는 호통을 치며 답장을 거부했다.

 

 

“어이, 말버릇이 그게 뭐야. 얘도 일단은 직원이라고. 의뢰든 민원이든 넣고 싶으면 예의부터 갖추고 와. 여긴 반려동물 출입 금지니까.”

 

 

“크윽..”

 

안내원은 남자의 태도에 화가 난 듯했다. 평소보다도 얇은 눈초리로 남자를 째려보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왠지 모르게 속이 후련해지는 듯했다. 감정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던 나는 멍하니 남자와 안내원, 그 사이를 초점 없이 응시했다.

 

 

“..미안, 알렌. 신경이 예민해졌어.”

 

 

“나, 화나지 않았다. 그것보다 의뢰 있다? 빨리 말한다.”

 

 

“그.. 책을 하나 써줬으면 하는데..”

 

 

“책? 도서의 탐색이다? 아는 게 있다면 바른대로 말한다.”

 

 

“그게 아니라.. 새로운 소설을 하나 써줬으면 해.”

 

 

“‘새로운’..?”

 

이 남자는 첫 만남이나 지금이나 나를 당황케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나는 잠깐 고개를 들어 생각을 정리하고 남자의 요청에 답했다.

 

 

“당신의 의뢰는 ‘새로운 소설의 창작’. 맞다?”

 

 

“그래.”

 

 

“그렇다면 불가능. 다른 의뢰를 부탁.”

 

 

“어, 어째서.. 내가 화낸 것 때문이면 이미 사과했잖아!”

 

 

“이 새끼가 진짜!”

 

안내원은 책상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이 이미 험악해져 있어,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안내원을 말렸다.

 

 

“괜찮다. 소연. 나 얘기할 수 있다.”

 

 

“알렌..”

 

 

“현동. 나는 헬렌. 대필용 바이오로이드다. 나의 기능은 전적으로 대필에 특성화 확정. 따라서 당신의 의뢰 ‘새로운 소설의 창작’은 불가능. 양해하라.”

 

 

“그럴 수가..”

 

 

“알아들었으면 슬슬 돌아가. 어머님이 병원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 아냐.”

 

 

“소연. 남자. 엄마 있다?”

 

 

“뭐? 아, 어.. 그야 있지. 그러고 보니 요즘 동사무소에 안 오셔서 몰랐나.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셔.”

 

 

“무슨 일이다?”

 

 

“글쎄.. 무슨 병인지까지는 모르는데, 돈이 좀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어.”

 

 

“혹시 방금 일과 연관이 있다? 현동 호출 요청하다.”

 

소연이 현동에게 전화를 걸자, 동사무소의 유리문 앞 바닥에서 소리가 들렸다. 끌려 나가다시피 했던 그는 안색이 잿빛이 될 정도로 미련이 있어 떠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바퀴를 굴려 오랜만에 시설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유리문을 밀면 밀수록 휠체어가 뒤로 밀려 할 수 있는 건 노크가 전부였다. 현동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는 문을 당겨 열어주었다.

 

 

“알렌, 감사 표한다. 물어볼 게 있다. 당신의 엄마는 이 일과 연관이 있다. 맞다?”

 

 

“그걸 어떻게.. 아니지. 그래, 맞아.”

 

 

“상황에 따라 나는 현동 돕는다. 하지만 거짓말 발견? 소연에게 보고. 당신 출입 금지다.”

 

나는 소연의 얼굴을 흉내 내며 최대한 얼굴을 찡그렸다. 현동은 내 얼굴을 보고 긴장이 풀린 듯 입 밖으로 얕은 웃음을 뱉었다. 아무래도 나는 연기에 재능이 없었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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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상으로 돌아가 현동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상대로 그는 어머니의 병원비로 이미 대량의 돈을 사용해 입원비는커녕 자신의 생활비도 떨어진 상태였다. 현동은 최대한 남은 돈을 털어 수납을 하고 나오던 길에 게시판에 붙어 있던 덴세츠 엔터테인먼트의 신작 시나리오 공모전을 보았고, 내가 생각나 동사무소로 왔다고 한다.

 

 

“그렇다.”

 

 

“그래. 하지만 너도 못 한다고 하고 공사판이라도 가봐야 하나.. 하지만 이미 사람이 들어갈 자리 같은 건..”

 

 

“헬렌, 아니 ‘알렌’은 현동에게 정정 요청. 가능하다.”

 

 

“하, 하지만! 방금은 안 된다고..”

 

 

“당신의 의뢰. ‘새로운 소설의 창작’은 불가능. 하지만 이걸 읽어라.”

 

나는 현동의 이야기를 들으며 타이핑한 10쪽 정도의 인쇄물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잠깐만, 엄청 재밌잖아! 잠깐 이거 좀 내고 올게!”

 

 

“기다린다. 먼저 대답한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알겠다?”

 

 

“어.. 그냥 전형적인 판타지 소설에 클리셰 비틀기를 한 거 아냐?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재밌어!”

 

 

“과거의 소위 ‘이세계 전생물’의 클리셰를 분류, 클래식 판타지 소설에 첨가한 것이다. 대략 20가지의 작품 사용. 이름 댈 수 있다?”

 

 

“아니, 전혀.. 아!”

 

 

“‘새로운 소설의 창작’은 불가. 하지만 담당자가 알지 못하는 작품을 사용. 인식하지 못함은 존재하지 않음과 식별 불가. 이해했다?”

 

 

“그럼 이건 왜? 이것도 충분히 재밌는데?”

 

 

“현동, 예상컨대 책 많이 안 읽었다. 맞다?”

 

 

“그, 그건.. 그렇긴 한데..”

 

 

“부끄러울 것 없다. 이야기 돌린다. 책 좀 읽은 사람. 10개 정도의 이름 댄다. 하지만 공모전 담당자는 그의 수십 배 읽었다. 현동도 어디서 본 것 같다. 그 사람은 어련한가?”

 

 

“그렇겠지..”

 

 

“공모전 마감과 현동 엄마 다음 수납 언제다?”

 

 

“그게.. 공모전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고, 수납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라 3일.. 밖에..”

 

 

“그럼 수납에 쓸 돈 남았다?”

 

 

“아니.. 그래서 좀 빌리려고..”

 

 

“..현동, ‘군계일학’이라는 말 안다? ‘닭무리에 있는 학’이라는 뜻이다.”

 

 

“알긴 하는데.. 그게 돈 빌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공모전 마감 신경 불필요. 담당자 내 작품 뽑게 된다. 현동. 알렌이 당신의 ‘봉황’이 된다. 부족하다?”

 

 

“아니.. 엄청 든든하네.”

 

소연은 이쪽을 돌아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벨트를 채워주며 웃던 상덕이 떠올랐다. 나는 소연을 보며 3일간의 휴가를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현동이 긴장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 일부러 뜸을 들이며 간신히 허락하는 척을 했다. 현동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내 손을 잡고 감사를 전했다.

 

 

“아, 현동. 손 놔라. 현동 말대로 나 ‘의뢰나 받아’야 해서 방으로 돌아간다.”

 

 

“아까 화 안 났다며! 역시 아직 삐졌지? 미안하다니까! 알렌? 알렌!..”

 

현동에게는 미안하지만, 소연의 연기에 긴장하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얼굴 연기는 어색해도 몸으로 하는 연기는 능숙해서 내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다.

 

[나흘 후]

 

 

“이건 누가 쓴 거지? 알렌?”

 

 

“보나마나 듣보잡이겠죠. 적당히 아는 작가 선에서 컷하는 게 어때요? 그게 훨씬 빠르기도 하고, 어차피 같은 바닥인데 얼굴 붉힐 것도 없잖아요.”

 

 

“호오.. 자네 이름이 뭐지?”

 

 

“‘자네’? 헙..”

 

 

“이름표도 없는 신입 중에 신입 주제에 일처리를 그따위로 하다니.."



"..."


자네 간이 참 크구만! 하하하!”

 

 

“하하하?..”

 

 

“어이!"



"예."


"이 새끼 데려가서 간 빼다가 자기 눈으로 크기 확인시켜." 



"그리고 공모전은 끝이다. 이 ‘알렌’이라는 놈, 아니 ‘분’을 정중하게 모셔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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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것 같지 않았던 2편. 이곳에 등장.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막판에 알렌도 그리고 싶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