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램파트 철충이 발포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거대한 망치를 양손으로 쥐도록 자세를 고쳐잡은 클로버 에이스가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것도 눈앞에서 날아오는 총알세례를 망치로 막으면서.


"내가 놈들을 붙잡고 있을테니 어서 도망쳐!"


램파트 철충과 거리를 좁힌 클로버가 그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후려쳤다. 철충은 방패를 들어 막긴 했지만 충격에 밀려나 옆에 있던 철충과 부딪혔다. 


"뭐야, 철충을 공격할 수가 있어!?"


"괜찮아! 이 정도로 안부숴져!"


클로버를 적으로 인식한 램파트 철충은 두 놈 다 그녀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난 여기 계속 있어봤자 싸움에 방해만 될 테니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데 클로버한테 완전히 어그로가 쏠린 게 아니었는지 내가 도망치는 걸 본 철충 한 놈이 내가 있는 쪽으로 총을 갈기는 통에 냅다 방향을 틀어 가까운 바위 뒤로 숨었다. 난 어째 가면 갈수록 도망치는 솜씨만 느는 것 같네.


잠시동안 숨을 고르다가 철충이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데를 쏘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살짝 고개를 내밀어 클로버가 철충들과 싸우는 현장을 돌아봤다. 적의 총탄을 피하거나 막으면서 틈이 보일때마다 망치로 공격하고 있지만 철충은 공격에 맞아도 잠깐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밀쳐지기만 할 뿐, 파괴될 기미가 안보였다.


그나저나 조금 전의 안부숴지니 괜찮을 거라는 말은 무슨 소리야, 적을 부숴버려야 하는 게... 아니 설마...


바이오로이드는 명령이 없으면 인간을 상대로는 상처 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정도만 가능하다고 들었다. 이 제약은 철충 상대로도 마찬가지여서 명령이 안떨어지면 철충을 파괴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리고 클로버 에이스는 지금 철충이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힘조절해가며 공격하고 있다. 이게 클로버의 '상처 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방식인가? ...이렇게 제약을 우회하는 것도 대단하다.


"인간!!"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도로 앞으로 돌리니 날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던 LRL과 그녀의 뒤를 쫓는 더치걸과 드론이 보였다.


"좌우좌!"


"인간, 무슨 일이 있었건 거야!? 방금 그 신호탄은 뭐고! 왜 트럭에서 나와있는... ...저게 무슨 상황이야?"


내 안위를 살피던 LRL은 금방 내 뒤의 싸움판을 눈치챘다. 금속끼리 쾅쾅 두들겨대는 소리가 저리 요란하게 들리니 당연한 거겠지.


"철충이 나타나서 쫓기게 됐는데, 때마침 히어로가 등장해서 구해줬어."


"히어로오?"


LRL이 지금 뭔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어투로 말꼬리를 늘리는 한편 더치걸은 저 앞에서 싸우고있는 클로버 에이스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엇...! 저 사람이야! 전에 날 구해줬던 그 언니!"


"그럼 저 자가 노움인 건가? 헌데 복장이 블랙리버 바이오로이드로 치고는 화려하구만."


"아니... 노움이 아니야."


클로버를 유심히 쳐다보던 더치걸과 드론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클로버 에이스. 덴세츠 출신의 히어로 바이오로이드지. ...내 말은, 히어로 역할의 배우 바이오로이드라고."


"덴세츠라면 그 미치광이 놈들? 군용도 아닌데 이상하게 강한 이유가 있었네."


LRL이 덴세츠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납득했다. 바이오로이드 사이에서도 덴세츠의 악명은 유명한가 보다. 3대 기업에 들진 못했어도 나름 거대기업 중 하나였다고 하니까.


"아무튼 잘됐네. 이 틈에 빨리 도망치자."


LRL이 따라오라고 손짓하자 나도 발을 떼려했으나 더치걸이 내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는 게 느껴지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더치걸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처로운 눈과 마주치자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건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 이대로 클로버 에이스를 두고 도망치는 게 정답일까?


제약때문에 철충을 죽이진 못하겠지만 클로버의 실력이라면 제 몸 성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멀리 떨어진다면 클로버도 알아서 후퇴하겠지. 따라서 지금 도망친다면 모두 다 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럴경우 헤어진 클로버와 두번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싸울 방법이, 클로버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좌우좌, 잠깐 도와줘.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


"어? 뭐야... 뭘 하려는 거야?"


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LRL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눈높이를 맞추자 그녀는 보기 드문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목걸이가 방해 전파로 내 뇌파를 가린다해도, 내 뇌는 분명히 이 머리 안에 들어있어. 서로의 머리를 최대한 가까이 두면 내 뇌파를 느끼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그럼 공격 명령도 내릴 수 있을테고."


설명을 들은 LRL의 표정에서 당황한 낯빛이 줄어든 게 보이자 나는 천천히 LRL과 이마를 맞댔다.


"...어때? 느낄 수 있겠어?"


"...아니. 머리를 가까이 대도 그만큼 이 목걸이도 나한테 가까이 오게 되잖아. 아무런 뇌파도 안느껴져."


LRL의 대답을 듣자 마음이 철렁했다. 이 방법도 안되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LRL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기 있는 철충의 뇌파도 안느껴지네."


"어?"


이윽고 LRL이 어디를 향해 소방도끼를 토마호크마냥 던지더니 뒤에서 콰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중에서 우릴 지켜보던 드론 철충이 도끼에 맞은 것이었다. 그 철충은 연기를 내며 땅바닥에 추락하더니 이내 안에서 빨간 철충 유충이 꾸물꾸물 기어나와 잽싸게 덤불 속으로 도망쳤다.


"그 목걸이를 우리 머리에 가까이 갖다대면 누구의 뇌파도 느끼지 못해. 명령은 못들어도 그동안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어."


LRL이 철충 유충이 빠져나가고 남은 드론 잔해에서 소방도끼를 빼내며 말했다.


"그럼... 공격시킬 때마다 내가 가까이 달라붙어야 해?"


"그렇게 되겠네."


"뭐 이런 이상한 편법이... 아니,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엘븐과 이그니스는?"


"뒤쳐졌네, 입고있는 장비의 무게때문에 말일세. 마침 저기 오고있는게 보이는구만."


LRL은 클로버 에이스가 철충과 1대2로 싸우는 현장을 힐끗 보고선 도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싸울거야?"


"작전이 있어. 이그니스! 여기 좀 와봐!"


***


'윽... 이거 슬슬 위험한데...!'


죽일 기세로 덤벼드는 적 둘을 상대로 봐줘가며 싸워야하는 상황. 적이 한 마리라면 비교적 여유로웠을 테지만 두 마리가 각각 다른 방향에서 기관총을 갈겨대니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클로버는 이쯤에서 후퇴해야 겠다고 느끼며 조금 전에 그 인간이 도망친 방향으로 힐끔 눈동자를 돌렸다.


그 인간이 아직도 거기 있었다. 심지어 어째 수가 늘어나있었다.


"왜 아직도 여기있어!?"


어이가 없어진 클로버가 소리를 빽 지르다가 램파트 철충이 또다시 공격하자 곧바로 정신차리고선 싸움에 집중했다. 아직 후퇴해선 안된다고 느낀 그녀는 망치를 쥔 두 손에 힘을 꽉 줬다. 그 때 인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버, 조금만 더 버티고 있어! 금방 도와줄게!"


"괜찮아, 친구들! 그 마음만으로 충분해! 여긴 나에게 맡기고 어서 가!"


악당과 싸우는 건 히어로의 역할, 민간인이 이 위험한 싸움에 나서게 둬선 안된다. 클로버가 저 기세만 넘치는 인간이 나서려는걸 극구 만류했으나 그 인간은 물러서질 않았다.


"너임마, 친구라고 불러줄거면 가끔은 그 친구한테도 의지하라고!"


친구. 저쪽에서 그 단어를 꺼내자 클로버는 순간 움찔했다. 오래전에 동료를 모두 잃은 뒤로 계속 혼자서 싸워왔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생소하지만, 동시에 그리 낯설지는 않은 감각이었다.


"인간님, 소각 준비 완료됐습니다!"


"시작해!"


인간을 등에 업은 이그니스가 철충이 있는 곳에 화염방사기의 포구를 겨누고 흰 가루를 분사했다. 주변이 순식간에 하얘지자 일순간 당황한 클로버와 철충의 시선은 금새 이그니스가 있는 쪽을 향했다. 그리고 LRL은 그 때를 노렸다.


"눈 감아!"


철충이 총구의 방향을 돌리는 것보다 빠르게 LRL의 왼눈이 엄청난 섬광을 내뿜었다. LRL의 말을 들은 순간 눈을 질끈 감은 클로버는 무사했으나 카메라 렌즈를 항상 열고다니는 철충은 아니었다.


"클로버, 후퇴해! 이쪽으로!"


눈을 몇번 깜박거리던 클로버는 자신을 부르는 걸 듣자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일을 벌이려는 것을 느꼈기에. 두 철충이 아직도 시야가 마비돼서 엉거주춤하는 사이 클로버가 인간 일행이 숨은 바위를 넘어왔고, 그걸 확인한 이그니스가 화염을 분사하자 거대한 분진폭발이 일어나며 그 일대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클로버와 인간 일행은 바위 뒤에 숨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제 때 숨지 못한 철충은 그 자리에서 폭발에 휩쓸렸다.


***


음. 어떻게 잘 끝난 것 같다. 이그니스가 입고있는 외골격 장비때문에 가까이 밀착하기가 힘들어서 엘븐의 도움으로 등 위에 겨우 매달렸더니 어떻게든 됐던 모양이다. 내가 가까이 붙어서 이그니스가 모든 뇌파를 감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나서야 철충이 있는 곳을 향해 화염방사기 스위치를 누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클로버가 내 말 씹고 계속 싸우겠다고 하면 쏘지도 못했을텐데 내 말을 들어줘서 다행이다.


클로버는 아직 열기와 연기가 남아있는데도 몸을 내밀어 현장을 살펴봤다. 바싹 타버린 철충 잔해 두 대를 직접 확인한 그녀는 한 손으로 망치를 세우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선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뜨거운 맛이 어떠냐, 이 악당놈들아!"


"신났구만."


"그럼! 신날 수 밖에! 멸망 후 처음으로 악당을 제대로 무찌르고 쟁취한 승리인데!"


"수... 숲이..."


한껏 들뜬 클로버와는 반대로 엘븐은 타닥타닥 타고있는 나무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한순간 이그니스를 짜게 식은 눈으로 째려봤으나 한숨 한번 내쉬고선 이겼으니 됐지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이그니스의 등에서 내려오자 클로버는 싱글벙글한 얼굴을 유지한 채 내게로 몸을 돌렸다. 


"멋진 작전이었어! 그동안 저놈들을 만나면 제대로 공격할 수가 없었는데, 덕분에 드디어 한 방 먹일 수 있었어. 그런데, 인간 맞지? 살아있는 인간을 본 게 몇십년 만인지 모르겠네."


"뇌파도 없는데 인간인 건 알아보는구나?"


"응. 그야 너 남자잖아."


"...그렇지. 정확하네."


하긴 멸망전부터 트루먼 쇼 당해서 인간이랑 바이오로이드를 구분 안하고 살아왔었지 얘는.


"저기... 그..."


더치걸이 우물쭈물하며 다가오자 한눈에 그녀를 알아본 클로버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 오랜만이야 작은 친구! 네 친구들과 다시 만나서 잘 지냈나보네. 다행이야."


"으, 응. 기억하고 있었구나... 헤헤."


클로버와 더치걸이 밀린 얘기를 나누는 한편 LRL은 나한테 다가왔다.


"그래서, 이제 어쩔건데? 저것도 우리 팀에 영입할 거야?"


"그랬으면 좋겠지만... 일단 물어볼 건 물어봐야지."


"뭐야, 내 얘기 하는거야? 궁금한 게 있음 뭐든 물어보라고!"


자신의 언급을 눈치챈 클로버가 관심을 보이며 도로 나를 바라봤다.


"그 전에, 구해줘서 고마워. 클로버. 네가 때마침 와주지 않았으면 정말 죽을 뻔 했어."


"뭘, 신경쓰지 마. 그 신호탄을 보자마자 달려온건데, 늦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지. 마침 이 근처에 살고있거든."


"저 마을에?"


"아니,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어. 너희도 봐서 알겠지만, 저 마을은 기계 제국의 잔당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거든."


"...그 기계 제국이 가상의 설정이라는 건 알고있지?"


"뭐, 알고 있기야 하지만. 사실 적들의 명칭 같은 건 상관없어. 모두의 행복을 위해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이번엔 내가 질문해도 될까?"


"얼마든지."


"저기있는 더치걸은 오래전에 일행과 함께 남하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돌아온거야?"


"너를 찾아왔어."


"나를?"


클로버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각지를 떠도는 생존자들을 찾아 모으는 중이야. 여럿이 모여 뭉쳐다니면 더 살아남기 수월할테니까."


"...그 얘기 자세히 좀 해봐."


작은 호기심에 안부를 물은 걸로 시작된 대화였으나 이번에 내 말을 듣자 클로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저쪽에 우리가 타고온 차가 있는데, 일단 차로 돌아갈까? 가면서 얘기해줄게."


***


"자. 하나, 둘...! 밀어!"


어린이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힘을 합쳐 넘어진 트럭을 일으켜세웠다. 트럭이 똑바로 선 걸 확인하자 다들 손을 떼고 숨을 돌렸다.


"이 차를 타고 다녔던 거구나. 튼튼해보이네."


"사람 더 탈 공간은 충분히 돼. 클로버,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물론! 내 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줄게!"


"어? 정말로?"


더치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자 클로버는 씩 웃어줬다.


"안그래도 슬슬 여길 뜨려던 참이었거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몸인데, 마지막으로 더치걸 너를 본 뒤로 악당 빼면 아무도 못만났었어. 이제 움직일 때가 됐지."


"일단 우리는 마을에 두고온 짐 챙겨올게. 이번엔 전부 다 가진 말고. 나하고 드론 아재랑, 더치걸만 가면 되겠다."


엘븐이 더치걸과 드론을 챙기고 도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럼 나랑 같이 남게 되는 건 LRL과 이그니스, 그리고 클로버 에이스. 전투모듈 있는 애들만 남긴다는 거구만.


"이제 남은 철충은 없을테니 다같이 가도 되지 않나?"


"그렇지 않아, 한 마리는 남아있어. 맨 첫번째로 날려버린 그놈은 아직 살아있을걸. 기억나지? 그 네발로 뛰어다니는 놈."


"아. 펍헤드 철충... 이름이 재퍼였던가. 그러고보니 드론 철충도 본체가 도망쳤지."


"괜찮아. 어떤 적이 나타나더라도 내가 지켜줄테니까. 당분간 잘부탁해, 대장!"


"...대장?"


"응. 네가 이 일행의 대장 아니야?"


"어, 그게..."


"맞습니다. 인간님이 저희들의 리더입니다. 다만 그동안 대장이라던가 그런 칭호를 쓰진 않았었죠."


"아, 그래? 그럼 뭐라고 불러야 되지?"


"클로버 양, 그 부분 말인데. 지금부터라도 당신이 말한대로 인간님을 대장님이라고 부르는게 좋을 듯 합니다. 계속 인간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잠깐, 무슨 말을-"


"하핫, 그래? 그럼 사양않고 대장이라고 부를게!"


이그니스가 깜빡이도 안키고 꺼낸 제안을 클로버가 덥석 물면서 졸지에 내 호칭이 대장으로 변겅돼버렸다.


"난 계속 인간이라고 부를거야."


LRL 빼고.


"어... 그래, 맘대로 불러..."


"그래서 대장, 다음 목적지는 어디야?"


클로버는 앞으로 시작될 새 모험에 들뜬건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딱히 정해진 목적지는 없어. 그냥 다른 떠돌이 생존자를 찾을 수 있기를 빌며 무작정 북쪽으로 올라갈 뿐이었거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고."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그 말을 꺼낸건 LRL이었다. 어째 늘 파티원을 늘리는 걸 반대했었긴 하지만 이번엔 또 왜? 아예 다른 생존자와 만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려는 건가?


"뭐? 어째서?"


"이번에 본격적으로 철충과 교전하게 되면서 철충이 우리 존재를 인지하게 됐어. 정확히는 살아있는 인간인 너를 말이야. 최소한 한 놈이 너를 본 채로 살아 도망쳤으니 머잖아 본대에 그 사실을 알리겠지."


LRL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자 자연스레 얼굴이 굳어졌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철충에 쫓기게 될거야. 철충은 인간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거 잘 알지? 그리고 너는 오르카의 사령관처럼 군대 단위의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야. 철충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LRL 양, 가끔 몇마리씩 마주친다 해도 계속 트럭 타고 달리면 따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님 이번처럼 힘을 합쳐서 그 악당놈들을 쫓아낼 수도 있어!"


"지리상 우리 바로 옆에 중국이 있다는 거 잊었어?"


"...! 그건..."


이그니스와 클로버 에이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멸망 전부터 AGS로 꽉 찬 나라였고, 이제는 그 많은 AGS가 고스란히 철충의 군대로 돌변했지. 계속 러시아 안에서 얼쩡거리고 있으면 늦든 빠르든 중국에 있는 철충이 떼거지로 몰려올거야. 뭔가 대안을 생각해야만 해."


LRL이 말할 대로다. 파티에 클로버가 들어와도 나까지 합해서 총 7명. 철충이 작정하고 군대단위로 공격한다면 쪽도 못쓰고 전멸할 거다. 짧은 시간안에 오르카나 펙스 급으로 몸집을 불릴 방법도 없고. 대안이라도 해봤자 뭐 지금처럼 철충 피해 도망다니는 것밖에 생각이 안나는데. 철충에게서 최대한 멀리, 철충이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바다..."


"뭐?"


"철충은 바다를 두려워 해. 바다로 나간다면 철충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어."


"철충한테 그런 특성이 있었어? ...확실히 바다 근처에서 철충을 본 적은 없긴 하네."


"오~ 대장, 박식한데?"


"하지만 그럼 배는 어디서 구해야 되죠? 러시아의 항구란 항구는 전부 레모네이드가 점령했을텐데..."


"글쎄. 애들 돌아오면 머리 맞대고 의논해봐야지."


***


시간이 조금 지나자 엘븐 일행이 짐을 한가득 들고 돌아왔다. 우리끼리 나눴던 얘기와 앞으로의 새로운 목표를 알려주자 드론이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흙바닥에 대략적인 러시아의 지도를 그렸다. 저 작은 몸뚱아리로 어떻게 그림을 그리나 했더니 무슨 프린터기마냥 수평으로 온몸을 쓱쓱 움직여서 순식간에 그려냈다.



"자, 이것이 대략적인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일세. 이쯤이 현재 우리 위치일테고..."


드론이 러시아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점을 찍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멸망 전에 유명했던 러시아의 항구도시일세."


이어서 지도 위 여러군데에 X자 표식이 찍혔다.


"바다로 나가야 한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적당한 항구도시에 가서 배를 한 척 탈취하는 걸세."


"그거 괜찮네! 사실 나도 너희와 만나기 전부터 바다로 나가려고 생각했었어. 대륙을 모험하는 동안은 어딜 가도 적밖에 안보였거든. 그래서 배를 구해서 이런저런 섬이나 모험해볼까 했지. 정작 배 모는 방법도 모르지만 말이지, 하하하..."


"...섬?"


클로버가 뜬금없이 바다 얘기를 꺼내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얘가 바다 위에서의 모험을 즐긴다는 소린 처음 듣는데?


"응. 기계 제국의 마수가 닿지 않은 섬같은 데라면 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거든. 특히 북극해에 있는 척박한 섬이라면 기계 제국도 눈독들이지 않았을테니 생존자에게 있어선 안전한 장소일테고... 왜 그런 눈으로 봐?"


눈 앞의 클로버의 정체에 대해 어떤 가설이 세워진 나는 슬쩍 미끼를 던져보았다.


"음. 그러고보니 루주가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는데-"


"어!? 대장, 루주를 알아!?"


"...세상에, 네가 바로 '그' 클로버 에이스였구나."


이 클로버 에이스가 원작에서 오르카에 합류했던 그 클로버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외전에서 왜 뜬금없이 클로버가 바다를 건너 스발바르 제도에 떡하니 나타난 건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뭐야, 둘이서 무슨 얘길 하는거야?"


"잠깐만 있어봐. 대장! 루주의 전언이란 게 뭐야? 설마 루주가 살아있는 거야?"


"아니, 죽은 거 맞아. 난 직접 루주랑 만나본 적도 없고. 그보다 이건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먼저 이 안건부터 먼저 끝내고."


나는 흥분한 클로버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다시 흙 위에 그려진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대부분의 항구가 서쪽에 몰려있잖아? 시베리아를 몸 성히 건널 방법이 없는 건 둘째치고, 러시아 서쪽은 유럽이야. 거긴 레모네이드 델타의 영역이라고. 서쪽에 있는 것들은 전부 아웃."


"가장 가까운 항구를 찍자면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네만."


"안됩니다. 거긴 항구도시이자 군사기지입니다. 경계가 특히나 삼엄한 곳이에요."


"그 전쟁광 레모네이드가 관리하는 곳 중 경계가 허술한 데가 있긴 할까... 이런 큰 항구도시가 아니어도 배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어업을 일삼는 바닷가 마을이라면 작은 배가 좀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 허나 이번엔 제주도를 탈출할 때와는 상황이 다르네. 낚시배 정도로 북태평양을 건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저기, 들어봐. 여기 항구는 어때? 내가 기억하기로는 경계도 좀 허술했던 거 같아."


"기억한다고?"


"옛날에 내가 미국에서 러시아로 밀항할 때 이 항구에 도착했었거든."


더치걸이 그리 말하며 러시아 지도의 동쪽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콕 눌렀다. 지도상으로 봤을땐 바로 옆에 북미 대륙의 알레스카가 맞닿아있어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로 보일 정도였다.


"거기는...! 더치 자네, 베링 해협을 건너왔던 건가!"


"응. 맞아."


"베링 해... 무슨 다큐에서 들어봤던 거 같은데, 뭐였더라... 뭔가 특징같은 거 있어?"


"한겨울 대게잡이."


"아, 생각났다... 끔찍한 악천후와 추위로 악명높은 바다잖아 거기..."


"잘 아네. 물에 빠지면 익사하기 전에 동사할 정도라고 하지. 하지만 거기도 배가 다니는 곳이야.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화물선이 여길 통해서 북미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을 왕복해."


"잠깐만, 철충을 피해서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아가리로 들어가자는 거야 그럼?"


엘븐이 당황한 얼굴로 묻자 더치걸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중국에서 몰려올 철충 대군을 피해 바다로 빠지는 게 우리의 목표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미국에 있는 동안은 철충한테 쫓길 위험이 적을테니 거기서 숨어지내다가 러시아가 잠잠해진 듯 하면 돌아오던가 하면 되잖아."


"조용히 숨어다니는 건 성미에 안맞는걸."


"클로버, 지금은 좀 참아줘..."


"결정됐군. 다음 목적지는 배링 해협이라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여기서 자고, 내일 해가 뜨는데로 출발하세."


향후 일정에 관한 논의가 끝나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지도를 지켜보고 있었더니 드론이 내 앞에 날아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아, 아니. 여태껏 먼 길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륙 단위의 지도로 보니 다음 목적지까지의 거리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는 게 체감되서 그래. 게다가 여기서 베링 해협까지 되게 멀어보이는데, 차 타고 간다해도 얼마나 걸리는거야 이거."


"정확한 지도 데이터가 없어 거리를 계산할 수가 없으니 나로선 대답해줄 수가 없군. 기차라도 타고 간다면 더 빠르게 도착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기차가 있어?"


"러시아 철도사업에 대해 못들어봤는가? 러시아의 넓은 국토를 횡단하는 초장거리 노선이 곳곳에 즐비해있네. 물론 지금은 전부 레모네이드의 관리 하에 있으니까 우리가 기차에 타게 된다면 그건 펙스에 포로로 잡힐 때의 이야기겠지."


"아, 그런가... 그럼 기대하면 안되겠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흙 위에 그려진 지도를 발로 쓱쓱 지운뒤 뻐근해진 허리를 쭉 폈다.


"빨리 잠이나 자게나, 대장. 철충과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내일 새벽일찍 출발해야 할걸세."


"알았어 알았어. 그나저나 계속 대장이라고 불리니 어색하네..."


"익숙해지게나. 그럼 난 이만 자리를 비켜주겠네, 둘이서 천천히 얘기 나누게나."


"뭐? 누구?"


"대장. 나한테 해줘야 할 말이 있잖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은 게 나 한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클로버가 줄곧 나랑 단둘이 있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그렇지. 미안.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괜찮아. 그래서 루주가 내게 남겨준 말이 뭐야?"


클로버가 본격적인 얘기를 위해 양반다리로 자세를 고쳐앉자 나도 도로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내 머리는 아직까지 클로버 외전의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내가 봤던 루주라는 이름의 아르망이 클로버가 기억하는 그 친구와 같은 인물인지 확인한 뒤 그녀가 보지 못했던 루주의 최후와, 원래대로라면 오르카호의 아르망을 통해 들었어야 할 루주의 전언을 들려줬다.


"클로버."


"응."


"여행은 즐거워?"


"응, 그럼."


"요즘도 연애소설을 즐겨읽는 편이야?"


"좋아하긴 하지만, 없어서 못보지."


"고기만 먹지 않고 샐러드도 잘 먹고있지?"


"윽...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라니..."


"클로버."


"...응."


"행복해?"


"..."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영웅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켜줄 수가 있겠어. 행복해야 돼."


"...하... 하하..."


"...어흠. 여기까지가 루주의 전언이야. 물론 진짜 루주였다면 존댓말로 했겠지만, 내가 말투까지 따라해서 말하기는 좀-"


"하하하하하하!"


클로버가 크게 웃기 시작하자 다른 일행들이 놀라 시선을 모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랑곳않고 실컷 웃다가 갑자기 내 어깨를 콱 붙잡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오늘 보여줬던 미소 중 가장 기뻐보이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처음 등장해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어보였던 웃음이나 철충을 성공적으로 무찔렀을때의 웃음보다 더 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그럼! 당연히 행복하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우의 맹세인데! 고마워 대장, 내 친우의 말을 전달해줘서. 사실 대장 일행이 안전한 곳에 무사히 정착하게 되면 떠나려고 했었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이제 안심해. 행복과 우정의 상징, 클로버 에이스가 여기 있는 모두의 행복을 지켜줄 테니까!"



가까운 미래의 오르카 아르망: 아니 분명 오늘 클로버가 스발바르 제도에 도착한다고 예측에 떴었는데


계속 인간인간 하고 불리던 라붕이에게도 대장이라는 호칭이 생겼다

원래 클로버는 사령관을 지휘관으로 부르지만 여기선 7명밖에 없는 소규모 파티라 적당히 대장으로 부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