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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지금, 블라인드 프린세스의 일장연설을 무릎을 꿇은 채로 두 귀로 또렷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멀린의 옆에는 두 귀처럼 생긴 스턴건을 축 늘어뜨린 펍헤드가 나란히 앉아 같이 혼나고 있었다.


평소 둘의 관계를 아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상상하기도 힘든 광경일 것이다. 보통은 주로 빨간 쪽이 하얀 쪽을 골려먹다가 물리적으로 응징당하거나, 하얀 쪽이 차마 보기 힘든 추태를 부리고 있으면 빨간 쪽에서 반박할 수 없는 일침을 가하다가 물리적으로 응징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멀린이 프리드웬에 통조림 상태로 매여 있을 때에는 대행으로 세워 놓은 펍헤드의 스피커가 휘어잡혔다면, 자유로워진 지금은 적갈색의 투톤 헤어 머리채를 직접 붙잡히게 되는, 딱 그런 정도의 차이만 제외하면.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건가요? 정말 위험해졌으면 어쩔 뻔했나요?"


그런 점을 감안하면, 멀린이 이렇게 블프의 설교를 달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하는 기색까지 내보이는 건 정말로 보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멀린의 머리채를 잡지 않고 설교하는 블라인드 프린세스와, 완전히 세가 눌려서 잘못한 아이처럼 벌 서고 있는 멀린까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등장인물까지 포함해서.



**



멀린의 무릎이 블라인드 프린세스 앞에서 얌전히 꿇려지기 두어 시간 전, 멀린의 두 무릎은 잠시 후에 있을 일을 상상하지도 못하고 오르카 호의 복도를 발랄하게 누비고 있었다. 프리드웬에서 풀려나고 나서 멀린의 텐션은 항상 이런 느낌이었다. 신나게 돌아다니고, 신나게 말썽을 피우고, 신나게 즐긴다. 억눌려 왔던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듯이, 멀린은 모든 일에 정력적으로 임했다. 퍼마시고 곯아떨어진 블라인드 프린세스의 이마 위에 빈 맥주캔을 5개 이상 쌓는다거나, 아서가 업무를 보고 있어도 아랑곳않고 부관인 오렌지에이드와 유리가 깨지도록 수다를 떤다거나, GAL9000과 함께 대원들의 모의 전투 시뮬레이션을 짠다든가.


오늘도 더없이 충실하면서도 꽉 찬 나날을 보내고 있는 멀린의 눈에, 복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펍헤드 모델이 들어왔다.


"여어~ 안녕하신가, 멀린 양! 오늘도 순찰 수고하네!"

"옙, 펍헤드 경위님! 경위님도 불철주야 고생 많으십니다!"


애교 섞인 경례를 붙이며 멀린은 잠시 감회에 젖었다.


펍헤드는 멀린에게 있어서 의미 깊은 AGS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카멜롯의 펍헤드와 오르카의 펍헤드는 다른 개체이지만, 그 점잔 떠는 행동거지에서 멀린은 자신의 친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항상 틱틱대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눈, 손, 발이 되어 준 그 펍헤드. 카멜롯에서 그녀를 도와서 엑스칼리버 원의 이름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던 그 펍헤드. 블라인드 프린세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자신의 진짜 몸상태를 공유했던 그 펍헤드.


"으, 으음. 밝히긴 불명예스러운 일이네만, 지금 이 몸은 경사로 강등되었는데... 그래서 켈베로스 경장이 도맡던 순찰을 이렇게 돌고 있는 것이고..."


펍헤드의 귀가 축 늘어지며 멀린이 잘못 알고 있던 계급을 정정해 주었다. 멀린은 빙긋이 웃으며 풀이 죽은 펍헤드에게 두 걸음 다가갔다. 몰래 가져온 선물을 허리춤에 숨기고서.


"에이~ 어차피 계급이란 건 내려갈 때도 있고, 올라갈 때도 있는 거죠~"

"끄응... 우리 같은 공무원들에게는 멀린 양의 말처럼 계급이 파도치는 일은 잘 없네만... 뭐, 순찰 도는 거야 그럭저럭 좋아하지만."

"그래요~ 강등된 덕분에 패트롤도 마음껏 나갈 수 있잖아요? 어차피 닥쳐온 일, 좋은 면만 보자구요~"

"흠흠, 그렇지. 계속 이렇게 주눅들어 있을 순 없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데, 왜 우울해야 하나?"

"그래요! 그거라구요! 그리고 이렇게 순찰도 열심히 도시다 보면...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멀린의 등 뒤에서 슬며시 튀어나온 선물을 보고, 펍헤드의 두 귀가 쫑긋 섰다.


"...간식이라던가?"

"어, 어떻게 그걸!"


마치 침을 흘리는 강아지처럼 잔뜩 흥분한 펍헤드를 보니 멀린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멀린은 원자력 전지를 끙. 하고 살짝 힘겹게 내려놓았다.


"그건... 방, 방사성 동위원소의 반감기에 발생하는 폐열로 발전하는 구시대의 전지! 핵분열 발전은 효율도 나쁘고 처리할 폐기물도 많이 발생해서 수 세기 전에 도태됐을 텐데... 어떻게 그, 그런 귀한 것을!"

"이야~ 한 눈에 알아보시네요? 뭐, 운 좋게 구식 핵분열 발전소와 연이 있어서요. 근데~ 이런 건 있어봤자 쓰기도 어렵고, 어차피 처치 곤란이라서요. 아~ 누군가 대신 폐기해주지 않으려나?"

"...내가! 내가 하겠네!"


방방 뛰는 펍헤드를 보며 멀린은 이걸 꿍쳐두길 잘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 전지에 쓰인 플루토늄을 사용하던 발전소는 철충과 함께 버섯구름이 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잔해에서 쓸만한 것은 제염을 거치면 어느 정도 회수할 수 있었다.


"아~ 나는 이거 무거워서 여기 내려놔야겠다~ 으음, 잃어버려도 어쩔 수 없으려나? 누가 주워가버려도 할 말 없지 뭐~"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연기하는 멀린을 보며, 펍헤드는 능청스럽게 감사를 표했다.


"아, 앗차! 여, 여기에 누가 이런... 분실물을? 게다가 방사선을 마구 뿜어대는 방사능 물질 아닌가! 잘 차폐되어 있지만, 원래 이런 취득물을 처리하는 건 경찰의 본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말과는 다르게 펍헤드는 어느새 동체에서 악어클립 케이블을 뽑아내고 있었다. 더 참기 힘든지, 여기서 맛볼 생각인 모양이었다.


"흐, 흐흐... 항상 윤택하고 건강한 맛인 핵융합 발전 전기만 맛보다가 이게 웬 떡이냐! 방사선 때문에 회로가 다 타버릴 수도 있어서 몸에 나쁘다지만... 그래도 그런 불량스러운 맛이 한 번 맛보면 끊을 수 없지!" 

"후후, 그렇죠? 게다가 맨날 여기서는 특식이래봐야 밍밍한 수력발전 전기나, 금방 질리는 수소이온 전지같은 것만 나오니까요! 딱 이런 패스트 푸드가 땡길 거라고 생각했죠!"

"허, 허어?! 바이오로이드인 멀린 양에게 미식에 대한 이런 안목이 있을 줄이야!"

"헤, 헤헤... 뭐, 제가 원체 특이한 경력이 있어서... 그런 쪽도 체험할 기회가 있었달까..."


프리드웬의 핵융합로를 주식으로 삼던 때를 떠올리며 멀린은 작게 혀를 내밀었다.


"항상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멸시당하던 내 취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니...! 감격, 감격이다!"


펍헤드는 공급용 전선을 빼놓은 것도 잊고 작게 몸을 떨었다. 예전에 로크를 통해 전해 들었던, 그 귀한 리튬 전지를 면전에서 내던진 에키드나의 일화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오늘은 기쁜 날이야! 맛있는 음식과,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까지 얻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하루지!"

"어우, 별 말씀을~"

"하하하하! 그럼, 잘 먹겠습니..."


그렇게 스멀스멀대며 앞에 놓인 진미를 만끽하려던 펍헤드의 클립이, 돌연 잠시 멈추었다.


"흠... 그러고 보니, 이런 귀한 것을 혼자만 즐기는 것도 그렇군. 역시... 같이 나누며 감상할 친구가 있어야..."

"...?"


펍헤드의 디스플레이가 멀린 앞에서 한 번 크게 끔뻑였다.


"...그러고보니 멀린 양. 멀린 양처럼 훌륭한 취향을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이 귀한 전력원을 어떻게 평가할 지 궁금하군."

"네? 에... 뭐... 저도 궁금하긴 한데... 지금은 물리적으로 저걸 즐길 수 없는 몸이랄까..."

"흠... 그거 아쉽군. 정말로 아쉬워. 첫 입은 멀린 양에게 양보하려 했는데 말이야."


펍헤드의 머리가 애석함으로 푹 숙여졌다. 멀린은 그런 펍헤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좋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나부터 한 입..."


하지만 실망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아쉬운 기색을 걷어낸 펍헤드는 두 클립을 전지의 접속부에 푹 꽂았다.


"으으음?!"


펍헤드의 두 귀가 전례 없을 정도로 쫑긋 솟았다.


"오오오...! 오오오!!! 이 맛! 이 짜릿함! 회로를 물들이는 이 기름진 전하들! 아아, 너무 황홀해! 너무 자극적이야! 너무... 너무 맛있어!"


펍헤드는 야단법석을 떨며 감상을 주절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펍헤드를 바라보는 멀린의 눈도 심상찮게 변하고 있었다.


"아, 이 스파이시함! 이 다채로움! 싸구려 같으면서도 싸구려만의 미학이 있어!"


다른 누구도 그런 펍헤드에게 공감할 수 없을 테지만, 멀린은 달랐다. 멀린은 펍헤드가 지금 어떤 감각을 표현하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황홀함을 느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직 멀린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친환경 에너지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회로가 타버려서 폐급 고물이 되어 아자즈에게 분해당하더라도 나는 지금을 즐기겠어!"

"저... 즐기시는 와중에 죄송한데..."

"응?"


펍헤드는 갑자기 끼어든 멀린을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저도... 한 입만... 먹어봐도 될까요...?"


홍조를 띄고 군침까지 흘리고 있는 멀린의 두 손에는, 작은 쇠젓가락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기꺼이!"


펍헤드는 흔쾌히 자리를 비키며 양보했다.


그리고...


파지직!


"으게겍."


눈꺼풀 안쪽에서 불꽃이 튀고, 멀린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



개구리처럼 다리를 떨며 기절한 멀린과,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의료반을 호출하려던 펍헤드를 마침 지나가던 블라인드 프린세스가 발견하기까지 10여 분이 걸렸다. 간신히 멀린이 자력으로 깨어나기까지는 또 10분이 더 걸렸고, 이 한심한 상황극의 전말을 청취하고 블라인드 프린세스에게 이해시키기까지 20분이 더 걸렸다.


다행히도 친구의 명예를 위해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비밀을 지켜 줄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설교는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몸을 되찾아 놓고는, 어디 가서 차마 말할 수도 없는 쪽팔린 이유로 전기구이로 만들 뻔했잖아요!"

"미, 미안... 내가 뭔가에 홀렸었나 봐... 다신 안 그럴게, 블프..."

"그리고 펍헤드 씨도! 사고가 날 게 뻔히 보였으면 말렸어야죠!"

"미, 미안하네... 멀린 양이라면 난 다를 줄 알고..."

"나 참! ...멀린은, 진짜 몸 괜찮은 거 맞죠? 탄내 조금 가시면 말려도 제가 의무실로 끌고 갈 거예요."

"하, 하하~ 나도 전투용이라 꽤 튼튼하다니까. 걱정 붙들어매도 돼."


어색하게 웃으며 멀린은 블라인드 프린세스를 진정시켰다. 펍헤드까지 옆에 두고, 이렇게 블프까지 있으니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면서도 그리운 조합이었다. 멀린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러서 혼나는 중임에도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몸 쪽에는 조금 위화감이 남았다.


'으, 가슴이 조금 뛰고... 아, 아랫배가 살짝 저릿거리는데... 진짜로 의무실 가 봐야 하나...?'


그런 체험을 하고 난 멀린이 이상한 성벽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