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스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리마토르는 상황 파악을 마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로운 몸으로 교체했다는 사실이 체감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몸을 이래저래 움직여보았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칸은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있는 얼굴로 그에게 눈을 맞추었다.

 

“당신...”

 

그녀는 오른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살결을 더듬던 칸은 습기가 찬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여기... 많이 아팠지....? 당신이랑 나랑 이어진다는 증표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당신을 생각하지 못했어... 미안해...”

 

Carpe Diem. 인생을 즐기라는 말을 그와 공유하고 싶었지만 정작 그 말을 체감한 건 그녀뿐이었다.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을 즐긴 대가가 파경으로 치달아도 값싼 대가를 치른 것인데, 자신을 내치기는커녕 끌어안고 달래주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사죄 말고는 그에게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괜찮아요. 이제 칸이 저를 믿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이 아닌, 진심을 가득 담아. 리마토르는 상처투성이인 그녀가 더 다치지 않도록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지워진 자신의 흔적과는 달리 아직 피가 말라붙어 아물지도 않은 그녀의 허벅지에 시선을 주며 상처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많이 아프죠?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았는데... 칸의 마음을 새기고 싶었으면 커플링처럼 같이 해도 좋아요.”

 

그녀의 허벅지에 그어진 Carpe Diem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던 그는 칸이 더 슬퍼하지 않도록 일부러 마지막 말에 농을 한 숟갈 더했다. 그의 농담이 효과가 있었는지, 칸은 얼룩진 말에 웃음을 담아 답했다.

 

“그래? 그럼 지금 새겨줄까?”

 

그의 목을 졸랐을 때처럼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칸이 손을 들자 아스널과 리앤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리마토르도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으며 할 말을 잃자 칸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농담이야. 그거 알아? 당신이 당황한 표정이 엄청 귀엽다는 거.”

 

“흠, 그건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그러겠지. 나한테만 귀여워 보이니까.”

 

짧은 시간에 그를 두 번이나 농락한 칸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발자국인지, 그가 좋아서 불이 켜진 발그스레한 신호등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칸은 리마토르를 보며 그저 미소 지었다. 어느새인가 그녀는 어두운 죄책감에서 떨어지기를 멈춘 상태였다. 그녀가 추락하지 않도록 잡아준 그의 손이 가진 온기가 그녀의 마음을 애틋하게 달구었다. 칸은 입을 열었다. 따뜻하게 덥혀진 마음의 증기가 말로 나와 그를 향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난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모든 존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달하는 끝은 죽음인데, 어차피 죽을 거 왜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사는 걸까 계속 생각했거든.

 

그 질문에 답을 달아준 건 동료들이었어. 내가 케시크였을 때 지키지 못했던 내 상관, 이제 지켜야만 하는 호드 부하들, 같이 전선에 서는 오르카호 저항군들. 내가 지켜야할 이들을 지키는 게 내가 죽더라도 살아야만 하는 의미라고 믿었지.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저 질문이 안 사라지더라. 의미가 있다고 해도 결국 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해갈되지 못한 질문의 갈증에 답을 찾으려고도 했지만, 난 당신처럼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에 눈길을 안 주기를 택했어.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오늘날 삶의 채무를 지면서도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난 이유를 찾았던 거야. 내 삶을 다 바치더라도, 죽음을 맞더라도 삶을 살아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의미를 알게 되어서 그랬어.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삶은 어둡고 혼탁한 액체에서 그 의미를 녹여낸 값지고도 빛나는 용액이 되지. 미동조차 없던 액체가 소용돌이치는 그 장면조차도 아름다워.

 

뿌옇던 내 삶은 당신을 만나고 색채를 입게 되었어. 알록달록한 그라데이션으로 물든 나의 삶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는데... 당신이 거부한다고 느낀 순간 다시 빛을 잃고 어두워져만 가더라.

 

하지만 이제 확신이 들어. 당신은 내 삶을 밝힐 수 있는 의미를 내게 주었고, 그 불빛을 거두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나도 당신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 그 죽음이 갉아먹는 내 삶을 전부 당신에게 양보하고 싶어.”

 


칸은 눈을 감고 그의 입에 잠시 입을 맞추었다. 감정을 담은 진한 키스가 아닌, 잠깐 스쳐지나가는 짧은 입맞춤. 리마토르는 문득 화상을 입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워진 그녀의 마음을 따라 그는 그녀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에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자국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하이데거의 궤적을 읽은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이데거의 사상을 알고 나니 더 알겠어요. 칸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저도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물음표 대신 마침표로 끝마친 문장. 질문처럼 보이는 진술에 칸은 완전히 눈물을 멈추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그녀는 그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당신.”

 

리마토르는 말없이 그녀의 몸에 팔을 둘렀다.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에 아스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디선가 팝콘과 델X트 오렌지 주스를 꺼내 제대로 구경에 들어갔다. 닥터도 그 옆자리에 앉아 팝콘 뜯기에 동참하자 리앤은 싱거운 웃음을 남기고 병실을 나왔다. 이대로 사무실에 돌아가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려고 하던 그녀는 생각과 함께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을 바꿨다. 때로는 글보다 말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리앤은 사령관에게 연락을 걸었다.

 


“어, 나야 왓슨. 보고할 사안이 있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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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참, 쓸 때는 오래 걸렸는데 왜 분량이 이 모양이지... 이번 편은 문장 구성에 힘을 들여서 문학적인 시도를 많이 해보았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특히 감명을 받아 상징적인 단어로 얀데레 에피소드의 후일담도 완전히 매듭지으려고 했는데, 막상 문장을 다듬느라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결과물이 영 그러니 아쉬운 맛이 남네. 그런고로 최대한 빨리 한 편을 더 올리도록 할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다들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