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 때, 리마토르 교수는 칸 대장의 처벌을 원치 않는 것 같아. 오르카호 형사사건 처벌규정에 의거하여 이 사건에 적용되는 감금죄와 상해죄는 모두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하지 않아 칸 대장의 처벌을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참작은 해주는 게 어때?”

 

리앤의 말에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자신을 찾아와 병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상세히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불편함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걸 느꼈다. 사령관은 리앤의 의견을 들어 적절한 처분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들어가 쉬라는 인사를 건넸다. 리앤이 보고서를 정리해서 올리겠다는 말과 함께 사령관실로 나서자 사령관은 비로소 감춰왔던 말을 내뱉었다.

 

“나란 놈은... 제기랄...”

 

유린. 그 말이 딱 어울렸다. 칸에게 몸을 유린당한 리마토르가 그녀를 내치기는커녕 포용한다는 선택지를 내린 시점에서 유린의 주체는 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리마토르를 유린하도록 사실상의 원인을 제공했고, 그 전에도 여론조작으로 그가 병실 신세를 지도록 조장한 사령관 자신도 리마토르를 유린한 장본인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오판이 부른 참사에 괴로움을 떨치지 못했다.

 

“폐하, 그렇게까지 괴로워하실 줄은...”

 

“주인님, 그렇게까지 마음 쓰실 일이 아니에요. 주인님께서는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거에요.”

 

그의 손이, 어깨가,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리는 걸 목격한 아르망과 리리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사령관은 갈수록 무거워져만 가는 죄책감이 자신을 짓누르는 걸 떠받쳐야만 했다. 죄책감 아래에 깔린 입을 간신히 위로 들어 올린 그는 고해성사마냥 죄를 인정했다.

 

“아르망, 리리스. 몰랐다는 말은 면죄부가 될 수 없어.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모른 게 아니니까. 만에 하나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리마토르 교수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해서 진행했으니까.

 

모든 일의 시작을 내가 저질렀으니 끝도 내가 책임지고 매듭지어야지.”

 

담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령관의 말에서는 깊은 책임감이 묻어났다. 사령관이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지를 알고 있는 아르망과 리리스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다시금 항변했지만 사령관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둘의 입을 막은 사령관은 지휘패드를 들고 리마토르가 있는 병실을 호출했다.

 

“사령관입니다. 리마토르 교수는 지금 사령관실로 찾아와주시길 바랍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별 일 없어보이도록 가장을 몇 겹이나 덧씌운 사령관의 모습은 잘못을 지은 어린아이가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지은 잘못을 알면서도 받게 될 처벌이 얼마나 클지 가늠하지 못하고 떠는 모습. 하지만 사령관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형벌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기 위해 형벌대 위에 선 그는 팔을 펼쳤다. 그는 리마토르가 오르카호에 합류하고 처음 한 강의를 뇌까렸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지.”

 

“...인정할 수 없어요.”

 

“뭐?”

 

“인정할 수 없어요! 어째서 주인님이 사과하셔야 하는 거죠? 잘못은 리마토르가 저질렀는데!”

 

“리리스 양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저도 폐하께서 전부 사과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선택에는 저희도 책임이 있습니다.”

 

“...”

 

리리스가 그의 선택에 반발하자 아르망도 동참의 뜻을 내비쳤다. 자신을 옹호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일까지 자신을 지지해서는 안됐기에 사령관은 둘의 답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침묵은 때때로 그 어떤 말보다 더 확고한 부정을 나타냈다. 그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르망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리마토르 교수가 스프리건의 가짜뉴스 사건으로 시위대의 린치를 당해 입원했을 때를 떠올려주시죠. 폐하께서는 리마토르 교수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저를 불러 자문을 구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리마토르 교수를 합리적인 수준에서 구 인류와 같은 부류로 판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시는데 저의 오판도 영향을 미쳤기에 저 역시 책임을 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아니, 그때 분명 아르망 너는 리마토르 교수가 구 인류가 아닐 가능성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충분한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다고 했지. 넌 양시론(兩是論)을 들었을 뿐이야. 결국 모든 판단은 내가 내렸어.”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리마토르 교수가 구 인류라 할지라도 오르카호에 이바지한 바를 감안해서 형량을 낮출 수 있는가를 제게 물으셨을 때, 저는 지도자의 업무가 방위자의 업무임을 들어 리마토르 교수에게 칼끝을 향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양시론이 아니라 리마토르 교수를 쳐내야한다는 의견에 더 손을 들었으니 책임이 따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리마토르를 공격하는 모든 일은 전부 제가 행했으니 저도 책임이 있어요. 주인님은 결재만 했을 뿐이니 책임이 없다고요.”

 

아르망이 자신의 책임소재를 주장하자 리리스도 숟가락을 얹었다. 최종 결재를 한 건 사령관일 뿐, 실질적인 구상은 자신들이 했다는 주장에 사령관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책임은 없는 것이 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화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그 선택지를 고른다고 해서 그녀들이 그를 싫어하지도 않을 테니 그로서는 꽃놀이패가 따로 없었다.

 


“....”

 



어서 골라. 넌 무사할 수 있어.

 



사령관은 자신의 안에서 나온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과실의 끝이 어두운 심연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손을 뻗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귀 옆을 타고 흘렀다.

 



뭐가 문제야? 이건 기회라고.

 



선택. 사령관은 자신이 지금 갈래길에 서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선택지는 좌우가 아니었다. 위와 아래로 갈라진 길 사이의 중간점이 그가 서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보자 그는 무엇이 정답임을 알 수 있었다. 일순간 머리가 번쩍하며 전에 읽었던 논문의 첫 장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리마토르가 처음 합류한 날 같이 발견한 존 롤스의 <정의론> 1절이었다.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래, 그랬지.”

 

사령관은 자신이 가야할 길에 발을 내딛었다. 내면의 목소리가 어서 자신이 지시하는 선택지를 고르라고 외치는 데서 귀를 닫은 그는 자신이 가야만 하는 길에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네, 주인님. 잘 생각하셨어요. 주인님의 잘못은 하나도 없-”

 

“그렇지 않아, 리리스.”

 

자신의 혼잣말을 긍정이라 생각하고 리리스의 화색이 밝아지자 그는 부정을 명백히 표하며 그녀를 제지했다. 밝았던 리리스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지자 아르망도 말없이 표정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구절들을 그녀들에게 읽어주며 입을 열었다.

 

“<정의론> 1장 1절은 정의의 역할을 다루고 있어. 그곳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

 

사상 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덕목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평등한 시민적 자유란 이미 보장된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리마토르 교수가 보여준 많은 모습을 종합하고, 더 온건한 방법을 썼다면 충분히 알아냈을지도 모르지. 그럴 수 있었음에도 난 이미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한 리마토르 교수를 공리를 명목으로 공격했어. 평등한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더 상위명제인 정의를 논할 수 있겠니. 처음부터 정의롭지 않았다는 결론만 나올 뿐.

 

그 부정의를 지시한 건 나야. 모든 책임은 내가 지는 게 옳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주인님...”

 

아르망과 리리스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령관의 굳은 뜻은 돌릴 수 없었다. 추가로 꺼낼 말을 찾지 못한 그녀들은 끝내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의지가 그러시다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리리스도... 나쁜 리리스가 되고 싶지만 주인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착한 리리스로 있을게요.”

 

그녀들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자 사령관은 감사를 표했다. 자신을 향한 마음이 큰 둘이기에 더더욱 자신을 막아설 줄 알았으나, 예상보다 빨리 포기한 둘의 모습에 그는 내심 놀랐다. 동시에 그 둘이 얼마나 큰 심리적인 부채를 짊어졌을지 느낄 수 있었기에 그는 둘의 짐을 덜고자 손을 뻗었다.

 

“다들 이해해줘서 고마워. 나는 최종 결정권자로서, 정의를 세우고자 했으면서 정의를 파괴한 모순을 저지른 자로서 책임을 져야만 해. 그 선택이 내 실각이나 파멸을 부르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사령관의 말을 들은 아르망은 고개를 숙였다. 리리스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는지 입을 움찔거렸지만, 차마 더 꺼내지 못하고 아랫입술만을 꾹 깨물었다. 자신의 죗값을 치를 준비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사령관은 담담히 자신을 찾아올 심판관을 기다렸다. 일부러 이런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그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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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사령관이 사죄하는 장면을 쓰려고 했는데, 빌드업을 쌓다보니 이대로 한 편을 써버렸네... 사령관이 결코 악인이 아니며, 고뇌하는 한 명의 인간임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이번 편과 다음 편에 걸쳐서 잘 드러났으면 좋겠네. 다음 편에서는 사령관과 리마토르가 대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독대는 아니고 각자 대동한 인물이 있는 상태지. 리마토르와 함께 사령관을 맞게 될 상대는 누굴까?


입대가 4일 앞으로 다가오니 점점 초조해지네. 가기 전까지 사령관과의 관계와 칸과의 관계를 모두 풀고 싶은데, 욕망이 현실을 따라갈 수 있도록 손을 분주히 놀려볼게. 따로 부를 구분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의 1부가 마무리되니 더 열심히 해봐야지.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적극적인 지적과 의견 제시가 좋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니 수정점이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길 부탁한다.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