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우선 앉으시죠.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네요.”

 

사령관은 리마토르에게 착석을 권했다. 신체재건장치로 새로운 몸을 얻은 그는 한눈에 보아도 아픈 기색이 없었다. 조금의 위안을 느끼던 사령관은 그것이 곧 오만임을 깨닫고 반성했다.

 

‘이런, 리마토르가 내게 처분을 내리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자신을 용서하려고 했어. 받을 수 없는 사과를 억지로 주고 난 사과했다고 주장하는 죄악을 범할 뻔했군.’

 

심판권자가 자신에게 처분을 내리기 전까지 자신은 일개 죄인에 불과했다. 사령관은 자신의 처지를 다시 새기며 입을 열었다.

 

“몸은 잘 회복되셨나요? 닥터에게 신체재건장치를 가동해도 된다고 했는데, 새 몸에 불편함은 없으실지 걱정입니다.”

 

“신경써주신 덕분에 문제없습니다.”

 

리마토르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차갑게 사령관을 훑었다. 사령관이 절대 계산 없이 자신을 부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는 이번에도 긴장을 곤두세우고 사령관의 의도를 읽으려고 했다.

 

‘장성이 교수를 납치하는 대형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날 부른다.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아. 나한테 어떤 식으로든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겠지. 하나씩 추려보자고.’

 

“사안의 보고는 들었습니다. 사령관으로서 부하의 일탈을 통제하지 못한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리겠습니다.”

 

사령관은 말과 동시에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오르카호의 절대권력이나 다름없는 그가 체면을 내려놓는 모습에서 리마토르도, 옆에 있던 아르망과 리리스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소탈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해도 개인으로서의 사령관과 오르카호 대표로서의 사령관이라는 상황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사령관의 사과에 놀란 리리스가 이에서 뿌득하는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악물며 리마토르를 쏘아보자 아르망이 그러지 말라고 그녀를 제지했다. 아르망이 말리니 리리스도 별 도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리마토르... 밥버러지 주제에 감히 내 주인님께 모욕을 주다니...’

 

리리스는 아예 보기 싫은 듯 눈을 감았지만 그녀가 눈에 품은 도끼는 눈꺼풀로 다 덮이지 않았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는 리리스에게서 사령관의 의중을 파악한 리마토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사과를 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뒤에 있는 측근들이 위력행사를 한다. 탁월한 설계군. 형식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전달하니까. 이렇게 되면 난 사령관과 독대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3:1인 셈이지. 같은 전략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어.’

 

“아유, 왜 이러십니까. 고개 드세요. 사령관님께서 고개 숙여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리마토르는 손사래를 치며 사령관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의 만류에도 사령관은 그에게 사과를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불찰로 벌어진 일이니 뭐라 변명할 수도 없군요.”

 

“아닙니다. 이것 참... 이러실 일이 아닌데...

 

아, 그러고 보니 저와 같이 온 일행이 있어서요. 같이 안에 들일 수 있을까요?”

 

사령관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그를 적극적으로 만류하던 리마토르는 적당한 틈을 봐 도발수를 두었다. 형식상으로는 사령관과 독대하는 자리인데, 그곳에 일행을 들인다는 선택지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결례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아르망은 표정을 굳혔고, 리리스는 블랙 맘바를 만지작거렸다. 사령관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가 말을 꺼낼 처지가 아니었기에 리마토르의 요구를 수용했다.

 

“네, 그러시죠.”

 

“알겠습니다.”

 

사령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마토르는 밖에 서 있던 두 명을 안으로 들였다. 방안으로 들어온 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리리스는 아예 대놓고 감정을 얼굴로 표출했다. 아르망도 상황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하고 리마토르의 속셈을 파악하기 위해 계산을 시작했다.

 

“칸과 아스널이 동행했을 줄은 몰랐는데요.”

 

“제가 병상에서 일어나려하자 혼자는 못 보내겠다고 하도 만류해서요.”

 

리마토르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칸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널도 사령관 앞인 만큼 장성으로서 체면을 차리고는 있었지만 혹시라도 칸이 허튼 짓을 할까 힐끔힐끔 리마토르를 바라보았다.

 

“...뭐, 두 분이 동행해도 제가 드릴 말씀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사령관은 불편한 심경을 넣어두고 자신이 원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에게 사과하려고 계획한 건 칸의 돌발행위를 통제하지 못했던 사안만이 아니었다. 이 말이 입 밖으로 떠나면 더 이상 자신과 리마토르의 관계에서 평화라는 말이 정착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면서도, 그는 이 말을 해야만 했다.

 

“리마토르 씨, 저는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령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한데 모아졌다. 사령관의 다음 말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두고 다섯 명은 동상이몽을 꾸었다. 누군가는 그 말이 어떻게 이용될지를 고민했고, 누군가는 그 말이 나오게 된 경위를 되짚어보려고 애썼으며, 누군가는 그런 말이 나왔다는 자체에 분노를 품었다. 각자의 감정이 교차하는 와중 리마토르는 그의 말을 받았다.

 

“무엇인데 그러시나요.”

 

사령관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이 남자의 말투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단단했다.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걸 공개하냐 마냐는 서로가 꺼낼 수 있는 패의 범위를 여태까지의 양상과 판이하게 바꿀 터였기에 사령관은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감내할 각오를 다졌다.

 

“최근에 있었던 스프리건의 찌라시 사건은 제가 지시한 건이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사령관실의 응접용 소파는 그리 큰 말소리가 아니어도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동시에 작지도 않은 일상적인 말소리로 밝혀지는 그동안의 모략에 사령관을 제외한 다섯 명의 생각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공개적으로 꺼내지 않은 사실의 베일을 걷는 일은 폭탄의 뇌관을 당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폭탄에 누가 먼저 손을 대느냐에 따라 폭발을 뒤집어쓸 이는 달라질 터였다. 그 사실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괜히 폭탄을 잘못 건드리려하지 않고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자신들의 측에 유리하게 돌릴 수 있는가를 두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고요하지만 요란했다.

 

‘사령관이 시인했다. 주사위는 던져졌어. 여기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사안의 주도권이 넘어갈 수도, 내 손에 들어올 수도 있어. 머리 잘 굴려. 

 

만약 내가 수용한다는 반응을 보이면 어떨까? 사령관과 아르망은 움직이지 않겠지만 리리스는 발끈할지도 모르지. 사령관의 충복인 컴패니언 일원 중에서도 가장 충성심이 깊으니까. 내가 사과를 받아들이면 자신이 모시는 사령관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이미 한 번 전례도 있으니 신중히 움직이자.

 

만약 내가 역정을 낸다면? 이때부터는 사령관의 반응이 중요해져. 일반적인 반응이라면 내 분노를 받아내려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겠지만 상대는 사령관이야. 그것도 마지막 인류로서 뛰어난 권모술수를 쓸 줄 알 뿐만 아니라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지. 그렇기에 역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내세워서 주도권을 뺏을지도 몰라. 여기에 리리스와 아르망이 가세하기라도 하면 사령관보다 입지가 작은 나는 분명 수세에 몰리게 될 거야. 칸과 아스널이 날 변호한다고 해도 최선은 현상 유지, 최악은 호드와 캐노니어의 입지도 줄어들겠지.

 

결론은 섰어. 난 여기서 사령관의 사과를 수용하는 수밖에 없군. 그렇지만 그냥 사과를 받으면 내가 사령관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겠지.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반응하자.’

 

 

‘사령관이 이 모든 걸 계획했다니... 의심은 했지만 모든 게 밝혀졌어. 도무지 참을 수가 없군. 이유라면 짐작은 가. 리마토르가 자신의 입지를 약화할 수 있다는 것처럼 정략적인 이유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사람을 쓰레기고 몰고 가는 걸로 모자라 완전히 매장하려고 들어?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마토르가 당한 일이라고. 이대로 어물쩍 넘길 수 없어.’

 

 

‘심증은 있었지만 결국 그대가 주도했던 일일 줄이야. 믿을 수가 없군. 다른 이도 아니고 우리에게 언제나 온화한 모습을 보였던 그대가 어떻게 구 인류와 다를 바 없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자리가 그대가 칸의 돌발행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아까 리마토르에게 들었어. 그 이야기를 하고 스프리건의 찌라시 사태를 언급한다는 건 이 모든 일이 그대의 손 위에서 벌어졌음을 의미할지도 모를 일이지. 칸의 감정이 폭주하는 걸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찌라시 사건을 일으켰다면 이 찌라시 사건부터 칸의 폭주까지 전부 일직선상에 놓이게 돼.

 

이 부분을 자세히 물어야겠군. 만약 그대가 계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예전처럼 그대를 신뢰할 수 없겠어.’

 

 

‘주인님께서 한낱 철학자 나부랭이에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다니. 이건 모욕이야. 그것도 참을 수 없이 치가 떨리는 모욕!

 

리마토르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그냥 보내지는 않겠어. 오르카호에서 유일한 인간은 주인님 뿐이고, 누가 이곳에서 갑이고 누가 을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면 이 치욕을 씻을 수 있겠지.

 

자, 어서 지껄여봐. 내가 주인님의 모욕을 갚게 명분을 주라고.’

 

 

‘폐하께서 직접적으로 사과를 꺼내셨어. 이제 공은 리마토르 교수에게 넘어갔군. 리리스 양의 상태를 보아하니 리마토르 교수가 무슨 말을 꺼내든 총을 꺼내들 것 같은데 제때 제지하지 않으면 유혈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어. 칸 대장도 벌써 눈에서 열기가 느껴지지만 여태까지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아스널 대장이 잘 제지해주겠지.

 

중요한 건 리마토르 교수의 반응이야. 여태까지의 데이터를 분석하면 리마토르 교수는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방법보다 간접적으로 손을 뻗는 방법을 택했지. 폐하와 대면했던 경우를 근거로 분석해보면 리마토르 교수가 직접 무언가를 요청한 적은 단 한 번, 스프리건 사건 때 논평을 부탁했던 거였지. 하지만 이마저도 논평이라는 방법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 선택지를 골랐던 거야.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리마토르 교수는 폐하의 사과를 받는 선택지를 고르겠지. 사과를 받고 폐하와의 관계를 정상화한 후 뒤에서 새로운 계책을 모색할 거야. 비록 리마토르 교수가 구 인류와 같은 부류가 아님이 증명되었다고 해도 여태까지 자신이 최고 지도자에 의해 공격당했음을 알게 된 이상, 절대 손 놓고 있지는 않겠지. 리마토르 교수가 그런 멍청이도 아니고.’

 

 

각자의 생각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사령관의 사과에 말을 하는 것만이 남은 상황에서 사령관과 리마토르를 제외한 네 명은 답변권을 쥔 리마토르의 입에 집중을 쏟았다. 리마토르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실로 충격적입니다. 믿기 어렵군요.”

 

“죄송합니다. 제 잘못에 있어 추호도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리마토르가 한숨을 쉬며 예상 밖이라는 말을 꺼내자 사령관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왔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으나, 이 사안에서 사령관 자신은 자신의 죄업을 속죄해야만 했다. 죄는 씻을 수 있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을 파멸에 이르도록 고난에 내몬 죄악을, 당사자의 반응이 어떻게 돌아오든 자신은 사과해야만 했다.

 

“사령관님.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왜. 리마토르는 정곡을 찔렀다. 어째서 사령관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내몰았는가 그는 알아야만 했다. 여러 정황증거를 통해 여태까지의 공작을 지시한 배후가 사령관일 것이라고 파악은 하고 있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만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닥터가 전해준 쪽지로 사령관이 자신의 과거사를 알아낸 것이 공작의 근거라고 믿고 있기는 했으나, 그것도 완벽한 물증은 되지 못했다.

 

‘이번에 사과를 한다고 해도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대체 왜, 뭐가 문제였는지 알아야 추후 의심을 살 싹을 자를 수 있어.’

 

리마토르는 사령관의 말을 기다리며 어떻게 주도권을 쥘지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한 수가 그의 머리에 차가운 총구를 들이밀었다.

 

“이런 무례한! 주인님 앞에서 무슨 말버릇이야!”

 

“리리스!”

 

사령관이 입을 떼기도 전, 리리스는 블랙 맘바를 리마토르의 이마에 겨누었다. 단 3기만으로 라비아타를 상대할 수 있다는 명성에 걸맞게 그 자리의 그 누구도 리리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중도에 끊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령관이 다급히 그녀를 제지했으나, 리리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말리지 마세요, 주인님! 주인님께 이런 무례를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 해요!”

 

“입 다물어.”

 

리리스가 리마토르를 노려보며 분풀이를 하려는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목소리에 반응한 리리스가 고개를 돌리는 속도보다도 빨리 손 하나가 그녀의 인중을 노렸다.

 

“씁.”

 

하지만 그걸 잡지 못할 리리스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노리는 손이 몸에 닿기 전에 다른 손으로 잡아냈다. 비록 제동거리가 부족해 주먹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지만 충격을 최소화한 그녀는 자신을 저지한 이에게 도끼날을 들이댔다.

 

“칸 대장, 이게 무슨 짓이죠?”

 

“남의 연인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짓이 경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리리스의 말도 날카로웠으나 칸의 말은 흡사 잘 벼려진 냉병기의 날 같았다. 서늘하다 못해 영하로 떨어질 것 같은 말로 리리스에게 암묵적인 경고를 날린 칸은 단 한 사람만을 담은 눈을 치떴다.

 

“칸! 그만해요!”

 

“칸 대장. 그 발언, 주인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해도 되겠지요?”

 

리마토르가 칸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칸의 말을 들은 리리스가 눈을 빛내며 노란 눈동자에 한 사람을 물들였다. 그 누구도 아닌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느라 혼탁해진 그녀들의 눈동자는 자신이 눈에 담은 사람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만! 둘 다 이럴 상황이 아니야!”

 

아스널은 고함을 질러 상황을 전환했다. 서로를 향해 날린 손을 떼지 않고 있는 리리스와 칸을 완력으로 떼어낸 그녀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를 명확히 했다.

 

“사령관이 리마토르 교수에게 사과를 전달하는 중대한 자리다. 이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의 심각한 결례를 저지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다.”

 

“하, 아스널 대장. 당신도 대학원에 다니더니 뇌에 유교라는 헛바람만 들었나요?”

 

리리스는 아스널의 상황정리에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보기에는 칸도 아스널도 모두 리마토르에게 붙어먹은 잠재적 반란분자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리마토르에게 사과를 구한다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따르지는 하겠지만, 그녀는 충분히 껄끄러운 상황을 더 분노가 충전되는 상황으로 만드는 다른 요인들을 제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만해, 리리스! 당장 숙소로 돌아가!”

 

그녀가 다시 블랙맘바에 손을 뻗는 순간, 사령관이 노기를 띤 목소리로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을 뒤로 물린다는 사령관의 판단을 납득하지 못한 리리스는 사령관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주인님! 리리스는 주인님을 위해-”

 

“두 번 말하지 않아. ‘명령’이다.”

 

그러나 사령관의 뜻은 변치 않았다. 잘 사용하지 않는 명령권까지 사용함을 판시하며 그녀에게 이 자리를 뜨기를 종용한 사령관의 모습에 리리스는 거스를 수 없는 바이오로이드의 본성을 느꼈다.

 

“...네, 알겠습니다.”

 

명령.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명령. 리리스는 꼿꼿하던 고개를 숙이고 사령관실을 빠져나갔다. 소란을 일으킨 원인이 하나 정리되자 리마토르도 남은 원인을 정리했다.

 

“칸, 숙소로 가 있어요.”

 

“뭐? 당신, 그게 무슨 말이야. 리리스가 먼저-!”

 

“알아요. 그러니까 돌아가 있으라는 거에요.”

 

리마토르는 칸을 억지로 자리에서 물렸다. 그의 말에 불만이 있다는 눈치를 팍팍 낸 그녀였지만, 그를 조각내서라도 가지려고 했던 그녀의 추악한 욕망을 받아준 그였기에 그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분란을 일으킨 두 명이 방을 나가자 상황은 2:2로 정리되었다. 사령관은 헛기침을 몇 번하며 끊겼던 대화를 복구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리리스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아닙니다. 저도 칸이 그렇게 대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휘하의 바이오로이드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령관으로서 실격이군요.”

 

칸의 폭주에 이은 리리스의 단독 행동. 사령관은 전에 읽었던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를 떠올렸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나는 법.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자유를 주고자 했던 그였건만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의 방임이 두 번이나 일어난 광경을 목도하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마토르에게 진실된 사죄를 하기는커녕 죄업을 하나씩 추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사령관은 점점 초조해졌다.

 

‘사령관, 당신이 여기까지 노림수를 두었을지도 모르겠군. 처음부터 이럴 요량으로 리리스를 배치했던 건가.’

 

그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리마토르는 경계심의 고삐를 더 바짝 죄었다. 무사히 지나가서 망정이지, 리리스가 방아쇠를 당기기라도 했으면 자신은 손 한 번 못 써보고 함정에 빠져 죽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스프리건의 찌라시를 필두로 자신을 담그려고 했음을 시인한 사령관이 만든 자리였기에 그는 더더욱 사령관을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대의 성격상 리리스를 이유 없이 옆에 두지는 않았겠지. 그대여, 그대는 정말 내가 아는 그대가 아니게 된 건가?’

 

의심을 한 겹 더하게 된 건 아스널도 마찬가지였다. 위기일발이었던 상황을 되새긴 그녀는 사령관이 리리스를 일부러 방관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던졌다. 그녀에게도 심어진 불신의 씨앗이 싹을 틔우려는 무렵 리마토르는 끊겼던 질문을 재차 던졌다.

 

“아까 못했던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왜 저한테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닥터의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리마토르 씨께서 과거에 어떤 분이었는지를 적은 보고서였습니다.”

 

‘역시 그랬군. 그 보고서가 모든 원인이었나.’

 

사령관의 말에 리마토르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에 마침표를 찍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 보고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와 사령관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갈등을 맞을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었다.

 

“이해합니다. 그 보고서에 적힌 제 과거는 사령관님께서 혐오하는 구 인류의 모습과 판박이였을 테니까요. 아니, 제가 구 인류 자체였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 그 보고서는 닥터가 결재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왜-”

 

“그건 제가 물을 일입니다. 기억 재생 시술을 받으셨다는 걸 왜 제게 비밀로 부치신 거죠?”

 

사령관은 리마토르의 말을 끊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잘못과는 별개로 그 역시 리마토르에게 알고 싶은 점이 있었다. 리마토르는 넘어간 주도권을 되찾을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주도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모든 책임 소재를 자신이 떠넘겨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말을 하나하나 통제했다.

 

“...저 역시 제 과거에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떤 인물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만약 제가 구 인류였다면 돌아올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기억 재생 시술을 비공개로 진행해 제가 먼저 제 과거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을 꺼낼지 단어 하나하나가 검열을 거치기는 했으나 리마토르는 솔직하게 답변했다. 사실을 털어놓음과 동시에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함정을 판 그는 사령관을 함정으로 밀어 넣었다.

 

“사령관님께서 저를 합류 초기부터 믿지 못한 정황을 여럿 보여주셨기 때문에 제가 구 인류라고 밝혀진다면 즉결 처분 당할지도 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안 믿어주실 것 같았습니다.”

 

상대방에게 책임 떠넘기기. 리마토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공부할 때 읽었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의 16번 방법을 사용했다. 여태까지 구 인류를 배척하겠다고 주장한 사령관의 견해를 역이용해서 책임 소재를 떠넘긴 그는 대화의 주도권을 되찾아오며 바로 29번 방법을 사용했다.

 

“사령관님께서 구 인류를 증오하심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구 인류를 증오하고요. 그렇지만 제가 사령관님께서 증오하는 구 인류라면 제가 이런 말을 하든 말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령관님께 있어 저는 지워버릴 대상인데요.

 

제가 변화했다고 주장해도 사령관님이 안 믿으실 겁니다. 그 보고서에는 제 어두운 기억만 적혀있을 뿐, 밝은 곳으로 걸어온 기록은 없으니까요. 

 

그렇죠, 아스널?”

 

29번. 상대방에게 질 것 같으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라. 리마토르는 대화 주제를 ‘자신이 숨겨야 했던 이유’에서 ‘사령관의 오판’으로 재빠르게 바꿔치기 했다.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논쟁적 토론술을 개발한 쇼펜하우어의 전략을 취한 그는 사령관과의 대화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리리스의 위협도 그렇고, 이 자리는 명백한 함정이야. 사과를 명분으로 내 의중을 떠본 뒤 거취를 결정하려고 했겠지. 여기서 내가 승리를 거두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 집중해.’

 

리마토르가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무는 동안 사령관도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씻을 수 없는 과오가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걸 본 사령관은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자기혐오에 자신을 던졌다.

 

‘젠장, 젠장, 젠장! 나란 놈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군. 검증이란 명목으로 다른 사람에게 잣대를 들이밀면서도 반대의 가능성이 있다는 데는 조금도 집중하지 않았어.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알 수 있었는데, 결국은 이 모든 사태가 나 때문에 벌어진 거잖아.... 이런 제기랄....’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를 매섭게 채찍질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었다. 그 선이 지켜져야 함에도, 자신이 지켜야한다고 누차 강조하면서도 예외를 들먹이며 그 선을 마음대로 넘은 대가가 아프게 그를 몰아세웠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가책이 그를 내리쳤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양심이 그를 갈기갈기 찢자 넝마가 된 그는 리마토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 오판으로 리마토르 씨에게 갚을 수 없는 고통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이러지 마세요. 일어나세요, 사령관님.”

 

사령관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당황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당황한 건 아스널도 마찬가지였다. 사령관이 무릎을 꿇는다는 전무후무한 선택지를 고른다는 건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엄연히 상하관계에서 하에 해당하는 자신이 앞에 있는데도 무릎을 꿇은 사령관의 모습에서 그녀는 언어를 뛰어넘는 진정성을 느꼈다.

 

‘사령관은 진심으로 리마토르에게 사과하고 있어.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일련의 사건을 사령관이 전부 계획했다고는 보기 힘들어. 만약 본인이 계획했다면 최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을 거야.’

 

그녀는 물어보려했던 질문을 삼켰다. 묻지 않았지만 이미 전해진 진심은 질문의 답이 되기 충분했다. 리마토르는 사령관의 사과를 받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사령관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사령관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사령관님께서 제가 어떤 변화를 더 겪었는지 파악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구 인류가 아니라는 사실만 사령관님께서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무릎을 꿇는다고? 말도 안돼. 아무리 보여주기 위한 쇼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파격적으로 진행할 리가 없어. 그럼 뭐야. 함정이 아니었던 거야?

 

진짜 나한테 사과하려고 했다고?’

 

리마토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생각한 모든 계산과 속내를 떠보려던 시도가 한순간의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자한 사령관의 모든 마음이 그에게 그라데이션처럼 물들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심에 가려져있던 진실한 마음이 느껴졌다.

 

“리마토르 씨, 제가 정말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저는 구 인류를 혐오한다고 말하면서도 구 인류와 다를 바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철학을 연구해달라고 리마토르 씨에게 부탁했음에도 저 스스로 신뢰를 깼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 외에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닙니다. 서로의 입장이라는 게 있죠. 제가 사령관님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사령관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사령관님은 제가 아니기 때문에 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죠. 그런 차이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저는 그런 점을 감안하기에 사령관님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사령관님께서 제가 구 인류가 아님을 확실히 해주시기만을 다시금 당부하겠습니다.”

 

의심이 벗겨진 자리에는 신뢰가 새로 자리 잡았다. 믿지 못했던 서로를 믿을 수 있게 된 사령관과 리마토르는 어떻게 과거의 문제를 풀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지 알고 있었다.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눈 둘은 합의에 도달했다. 사령관이 즉석에서 써준 임시 증서를 받은 리마토르는 아스널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이렇게 일이 해결될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사령관이 그런 인물이 아닌데 그대를 그렇게 공격할 줄은 몰랐네.”

 

“아스널 입장에서는 그러겠네요. 제게는 사령관님이 이렇게 도덕적으로 예민한 점이 있는 줄 몰랐어요.”

 

“흥미로웠네. 인간에게는 누구나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도덕적으로 보인 인물에게 비도덕적인 면이 숨겨져 있다니. 이걸 바탕으로 탐구를 해보고 싶군.”

 

“좋아요. 논문으로 써서 심사 올려주시면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사령관님의 임상심리검사를 첨부하시길.”

 

“알겠네. 아, 심리검사라 하니 하나 떠오르는 게 있군.”

 

“음, 뭔가요?”

 

“하르페이아의 심리검사 결과라네.”

 

리마토르는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스널은 지휘패드에서 문서를 찾더니 그에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로르샤흐 테스트, HTP, SCT 총 3개의 검사를 진행했는데 결과가 꽤 특이하네. 그대를 향한 연심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 연심이 불안정해. 보호자에게 갖는 지지감과 연인 관계에서 갖는 에로틱한 감정이 혼재되어서 나타나는군.

 

리마토르, 그대가 하르페이아에게 한 상담 내용은 하르페이아로부터 전해들었네. 그대는 이 감정을 지지감으로 해석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저는 임상심리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상담심리를 배운 경험에 입각해 내린 결론이-”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야.”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가 하려던 말이 그녀가 물은 바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녀는 질문을 바꾸었다.

 

“질문을 풀어서 묻도록 하지. 그대라면 하르페이아의 감정에 에로스가 섞여있음을 눈치 챘겠지. 그런데 하르페이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지지감에 해당하는 부분만 설명해서 밀어붙였더군.

 

내가 아직 정식 상담심리사는 아니지만, 상담자는 내담자의 심리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접근해야한다는 상담심리사 윤리가 있는 건 알고 있다네. 그런데 그대가 보여준 모습은 두 개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살폈다기보다는 그대가 원하는 쪽으로 밀어붙여서 해석했다는 인상이 더 강하더군.

 

리마토르, 지금 내가 받은 느낌이 사실인가?”

 

“....”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복도에 서서 우두커니 서있던 둘은 서로의 입이 열리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리마토르는 입을 열고 정적으로 찬 대화의 공백을 말로 환기했다.

 

“네, 사실이에요.”

 

“어째서 그랬나. 그대라면 그런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을 텐데.”

 

리마토르가 의혹을 시인하자 아스널은 대체 왜 그랬는지 물었다. 평소 다른 이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새로운 세상을 위한 철학을 연구하던 그가 어째서 평소의 모습과 배치되는 행동을 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사랑하는 건 칸뿐이니까요. 하르페이아의 사랑을 제가 받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하르페이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제가 그 감정에 대해 명백히 선을 그으면서도 하르페이아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설명을 해야 했었죠.”

 

“....그대여.”

 

한 사람의 마음을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러뜨린다. 리마토르가 취한 선택에 아스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칸이 감정에 휘둘렸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눈으로 똑똑히 본 그녀였기에,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선택지를 마냥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리마토르의 행동이 옳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에게 경고를 남겼다.

 

“한 사람의 마음을 그대의 뜻대로 재단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거라네.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대의 선택지가 옳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보기에 그대는 이미 칸과의 일로 그 대가를 치른 것 같다만.... 사람 일은 어찌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짓을 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가기를 바라서는 안 되죠. 제 업은 결국 제가 치르게 되어있으니까요.”

 

리마토르와 아스널은 복도를 걸었다. 꼬일대로 꼬였던 매듭이 마침내 풀렸음에도 둘은 개운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분명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찝찝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스널은 그에게 남긴 경고를 곱씹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홀로 복도를 걷던 리마토르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의자에 피곤한 몸을 앉힌 그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악이라고 할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네. 결국 나도 선한 이는 될 수 없으니까.”

 

선과 악 사이. 지향하는 바와 처한 상태의 사이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철학을 연구하는데 1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쳤지만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그는 한 번 번민했고, 지향하는 철학을 찾으면서 두 번 번민했다.

 

끝나지 않는 번뇌 속에서 그는 잠으로 도피했다. 점점 가라앉는 의식을 뒤로 한 채, 그는 칸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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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여태까지의 갈등이 다 해소되었네. 사령관이 건넨 임시 증서가 무엇인지는 다음 편 도입부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질 거야. 78편에서 나왔던 하르페이아의 심리 검사 결과 떡밥도 회수했네. 이번 편을 읽고 리마토르가 갑자기 ㅈ간으로 느껴진다던가, 사령관이 빛간인지 ㅈ간인지 쉽사리 분간이 안 된다면 글을 제대로 읽은 거야. 일부러 이번 편은 사령관이 가진 빛간인 면을 조명하는 동시에 리마토르의 어두운 면도 조명해서 '선악이 쉽사리 갈리지 않은 캐릭터'의 특징을 살리려고 했거든. 이 소설이 초반부터 선한 인물이라는 경향성은 있어도 완벽하게 선한 이나 악한 이가 있다고 정의하지는 않은 만큼, 1부의 마지막에서 이 점을 살리고 싶었어. 혹시라도 이해가 잘 안 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적극적인 의견 제시 부탁할게. 그런 부분은 수정할 의향이 있어.


앞으로 딱 2편을 더 올릴 생각이야. 기존의 갈등을 다 해결했으니 순애도 끝을 봐야지. 미리 예고를 하자면 다음 에피소드는 폐기했던 아이디어를 재활용할 예정이야. 연초 특선으로 올렸던 외전에서 기회가 되면 본편에 넣고 싶은 소재가 있었는데, 그걸 되살려보려고. 순애는 언제나 최고 아니겠어?


부족한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