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화: https://arca.live/b/lastorigin/69514176


다니엘의 미소에 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여제의 아드님이 데이트를 해주신다는데~ 근데 말이야, 난 질투가 좀 많아서 그런가? 이 애도 같이 따라가야 하나?"



천아의 하얀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터니티도 못마땅한 듯 그녀를 째려보았지만 다니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터니티를 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터니티.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주인님, 여제님께선 옆을 비우지 말라 말씀하셨어요."

"그런 명령을 한 사람도 없잖아. 오랜만에 이터니티도 바깥 공기 쐬는 건데. 편안하게 쉬고 있어. 할 이야기도 있고."



다니엘의 부드러운 미소를 본 이터니티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 천아는 빈정거리듯 물러 선 그녀에게 툴툴거렸다.



"어머~ 우리 이터니티님께선 한시라도 주인님이랑 떨어지기 싫으신가 봐? 하긴. 뒤지면 관짝 안까지 따라가겠다는데 어련하시겠어?"

"천아양을 위한 무덤도 지금 만들어드릴 순 있어요. 장화양이랑 같이 순장 시켜드릴까요?"

"이터니티, 잠깐만 이야기 좀 하고 올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다니엘은 다시금 부드러운 어조로 이터니티에게 말했다. 그제야 가까스로 이터니티가 물러났다. 우아한 자태, 죽은 연인을 보내는 듯한 처연하고도 고결한 그 모습에 천아는 혀를 내둘렀다. 저런 음습한 바이오로이드도 좋아하는 인간이 있다니. 다니엘이 한 걸음 발을 내디디자 천아도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랜만에 밟는 모래알의 부드러운 서걱거림을 느끼며 그는 천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천아양이 직접 제게 온 거라면, 먼저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신 거겠죠?"

"흐흥~ 도련님. 생각보다 여자 마음을 잘 아시는데? 멸망 전에 제법 여자 좀 후리고 다니셨나 봐?"

"미안하지만 전 냉동 캡슐에 들어가기 전까지 여자를 사귀어 본 적... 아니, 정확히 말씀 드리죠. 밖을 제대로 돌아다녀 본 적이 없었어요."


다니엘은 파편처럼 갈레갈레 찢어진 기억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마치 얼음 알갱이 같았다, 깨끗하게 비치면서도 자신의 온전히 비추기보단 흐릿한 형상들을 얼기설기 나열한 느낌이었다. 블랙리버가 이미지 쇄신을 위해 형식 상으로 후원했던 연합 대전의 고아들을 거둔 보육원에서 우연히 여제의 눈에 자신이 띄었다. 몇 번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그녀는 자신을 양자로 들였다.



"사실 전 진짜 어머니가 누군지 몰라요. 아마 전쟁 때 돌아가셨겠죠. 기억나는 거라곤 큰 차를 타고 어머니 집으로 가던 것 밖에 없었네요."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네. 그래도 고아원에서 썩는 거보단 밥은 잘 나왔겠어?"

"글쎄요. 어머니라고 부르긴 했지만, 어머니는 앙헬을 죽이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죠. 절 키워준 건 어머니가 아니라 이터니티였으니까요."



다니엘에게 익숙한 여자는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아닌 이터니티였다. 사실 다니엘도 생각해보건대, 입양을 했으면서 정작 책임은 바이오로이드에게 무책임하게 던졌었다. 자신이 앙헬의 사람들에게 습격 받아 다쳤을 때, 마리아는 괜찮냐는 말 대신 이터니티를 구타했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온 년이 뭘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었다고. 물심양면으로 키워주었던 하나 뿐인 그의 바이오로이드에게 마리아는 자비가 없었다. 자신을 키워주고, 유일하게 말동무를 해주었고 심지어 가정교사의 역할까지 충실했던 다니엘에게 바이오로이드는 도구라기 보단, 하나의 인격체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던 천아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멸망 전의 인간 놈들이랑 왜 다른가 싶었더니. 그런 구석이 있었네~ 도련님?"

"있죠? 전 사령관님 만큼 생체 능력이 좋지 않아요. 휩노스 병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시술만 받을 정도였거든요. 명령으로 앙헬을 찾아내 복수를 명령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이었어요."

"뭐, 도련님도 결국 여제의 도구였다는 건가?"

"... 그런 셈이죠? 그래서 전 장화씨를 이해해요. 저랑 별 다를 바 없이 다뤄졌잖아요."



철충의 침공이 시작되고 인류는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때도 마리아의 머릿속은 온통 앙헬에 대한 복수 뿐이었다. 심지어 휩노스 병이 창궐해 의식 상태가 몽롱했던 와중에도 그녀는 마치 다니엘을 세뇌시키듯 말했다. 앙헬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있었고, 자신은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고. 다니엘은 무성하게 자란 앞머리를 연신 넘겼다. 천아는 살아 있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공허하고 텅 빈 동공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장화를 만났었을 때의 모습이 얼핏 그와 겹치다 사라졌다.



"결국 너도... 사냥개였다 이거네?"

"그런 셈이죠."

"절 죽였던 앙헬이나, 어머니나... 솔직히 별 생각이 없어요."

"도련님 말 잘 해야 할 걸? 그 꼰, 아니, 바르그. 그년이 물고 뜯고 한 년이 마리아였다고. 뭐, 너랑 성질 더러운 그년은 좋은 기억이 없었겠지만 바르그 그 년은 꽤 많이 사랑을 받았었나 봐?"

"..."

"자기 아들보다 사랑했던 바이오로이드라... 웃기지 않아?"



천아의 비아냥에 다니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아씨."

"응?"

"제가 왜 천아씨랑 먼저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 알아요?"

"흐음~ 글쎄. 왜 네가 나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제일 만만해서 그랬으려나?"

"사령관님한테 들었어요. 그나마 제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분이라고요."

"그래?"

"칼을 들이밀었던 건 조금 의외긴 했지만요."

"븅신~ 설마 내가 진짜 널 죽이려고 들이 밀었겠어? 여제의 아들이라 그러길래, 어떤가 싶어 반응을 보고 싶었지. 사냥개 주제에 목을 물려는 거냐, 뭐 어쩌려는 거냐. 반응도 궁금했고."



천아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장화만큼은 아니었지만 마리아는 자신 또한 그리 좋은 대접을 해주지 않았었다. 암살자로서 임무를 성공하고도 어떠한 지원 없이 홀로 추적을 따돌려야만 했고, 그렇게 추웠던 산야를 해매고 해매 나타났던 그녀에게 보상은 없었다. 그것이 리오보르스 가문의 바이오로이드에게 처해진 운명이었다. 바이오로이드는 병사이며 소모품에 불과했다. 인간이 전쟁에서 죽으면 명예로웠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소모품이었고 전략 자원에 불과했다.


로크에게 듣기론, 앙헬은 바이오로이드에게 감정을 품은 인간들을, 감정을 줄 수 없어 도구에게 준 자들이라며 경멸했다. 그리고 그런 앙헬을 증오했던 마리아도 그를 증오했을 뿐, 그저 그와 다름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아니, 적어도 앙헬은 자식들에게 바이오로이드 시술을 하진 않았으니 그녀가 더 지독한 인간이었을 지도.



"재밌는 이야기었어~ 뭐, 그래봤자 그 성격파탄자를 설득하는 건 꽤 오래 걸리겠지만 말이야."

"장화씨 말씀이신가요?"

"응. 사령관한테도 너라고 부르면서 뻗대는 년이, 네 목을 따고 싶으면 따고 싶겠지. 절대 공감해주진 않을 거야."

"잘 때 목을 잘 숨겨야겠군요. 천아씨."

"필요하면 백아라도 빌려줄까?"



천아의 목에 감긴 하얀 뱀이 혀를 낼름거렸다. 다니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이 뱀. 내가 직접 길들인 뱀이거든. 꽤 말은 잘 들을 거야?"

"그 뱀, 바이오로이드 아니었나요?"

"내가 직접 길들인 뱀이야. 백아. 내 이름의 유래랑 연관된 동물이라서 그런가? 좀 친근하게 느껴졌어서. 이 뱀도 앙헬의 추격자 놈들을 따돌리면서 도망칠 때 만났던 뱀이었거든."



천아는 쓱쓱 백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을 배신하고 앙헬 쪽에 붙은 블랙리버의 간부를 사살하고 쫓겼을 때 울창한 열대우림에 몸을 숨겼었다. 물론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초월하는 신체 능력을 지녔지만 남미의 정글은 그녀에게 꽤나 가혹했었다. 핫팩은 필요 없었지만 그녀를 노리고 쫓아 오는 추격자들과 가혹한 정글의 환경 속에서 그녀는 알비노 뱀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눈에 띄는 색 때문에 밥조차 먹지 못하고 힘없이 기어가는 뱀을 보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동질감에 사로잡혔다. 죽어서도 무소속의 바이오로이드로 죽어야만 했고, 고독하게 혼자 다녀야하는 그녀와 퍽 어울리는 친구 같았다.



"천아, 바르그씨와 장화씨 같이 신화에서 유래된 이름인가요?"

"응~ 한반도 밑에 큰 섬의 수호신? 에서 유래한 이름이야. 뭐 넌 관심 없겠지만."

"잘은 모르지만, 나중에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재밌게 듣겠습니다. 천아씨."



다니엘이 웃자 천아는 픽,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데이트를 또 잡아두는 거야. 쑥맥 도련님?"

"그런 거라고 해두죠?"

"무드 없긴. 그럴 땐 그냥 지금 이야기 해달라며 떼 쓰는 게 답인 거야. 쑥맥 도련님~ 사령관은 너랑 비하면 여자경험이 많은 건지, 그래도 제법 잘 캐치하는데."

"재밌네요. 멸망 전에는 바이오로이드랑 사귀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했는데 말이죠."

"어쩔 건데 씨이~발? 바이오로이드든 인간이든 남자랑 여자랑 섹스해야 아기가 생기는 거 아냐 어쨌든?"



거침없는 천아의 대답에 다니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천아는 그를 훑어보았다. 사령관보다 조금 여리여리한 체구, 실험실에서 보냈다는 말이 사실인 듯, 그는 다부진 체격의 사내라기 보단, 성인과 소년의 경계에 걸쳐진 외모를 지녔다.



"진짜 쑥맥이네 너 말이야. 설마 같이 다니는 그 음습한 애랑도 안 해본 거야?"

"에? 그... 이터니티 말씀인가요? 이터니티는... 제 엄마랑 가까운 사람이라고요. 무, 무슨..."

"와. 너 진짜 고지식하다? 아까 살짝 봐도 너 엄청 좋아하는 거 같은데~ 몸 달을 때까지 익힐 생각이야?"

"... 이, 이터니티는. 제 보모에요."

"뷰웅신~ 인간들이 다 뒤진 마당에 뭘 그런 걸 가지고 꺼려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다니엘을 보자 천아는 그를 괴롭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멸망 전 스틸라인을 지휘했던 지휘관 바이오로이드 '불굴의 마리'가 이런 경향의 남자를 취향으로 여긴다는 것을 천아는 소문으로 들었던 적이 있었다. 참 특이한 취향의 바이오로이드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남자를 보니 조금은 이해를 할 것만 같았다. 조금 더 놀려보고 싶은 생각에 천아는 바짝 얼굴을 그에게 기댔다. 그리고 두 갈래로 갈라진 미끈한 혀를 살짝 내밀어



"나 말이야. 이렇게 말은 해도..."



다니엘의 귓바퀴를 핥았다. 다니엘은 축축하면서도 따스한, 그러면서도 까슬한 미뢰 돌기가 부드럽게 피부를 쓰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내 이름의 유래 때문에, 처녀를 지키고 있거든?"

"처, 천아씨!"

"뭐, 내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다면, 그땐 몸을 줄 생각이라서. 애석하게도 너한테, 어른의 세계를 알려주긴 힘들 것 같네~"



이내 천아는 그 말캉한 두 갈래의 혀를 다니엘의 귓구멍 안으로 살짝 넣었다. 매끈한 혀가 가르고 들어오려는 쾌감에 다니엘은 아랫도리가 제법 묵직해짐을 느꼈다. 애써 버둥거리다 결국 뒷걸음질 치자, 호탕하게 천아가 웃었다.



"푸하하하~ 븅신! 그래서 사냥개들을 길들일 수 있겠어?"

"저, 저는 길들일 생각 없어요!"

"그래? 널 싫어하는 그년은 좀 거칠게 다뤄줘야 할텐데? 뭣하면 네 보모랑 연습 좀 해보는 게 어때?"

"이, 이터니티는 제 어머니랑 다름 없는 존재에요 천아씨!"

"아~ 그러고 보니까. 멸망 전에 어떤 야동들은 자기 엄마랑 하는 컨셉? 그런 게 있던데. 그러면 괜찮지 않."

"천아씨! 제발요!"



천아는 낄낄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덩그러니 홀로 해변에 놓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걸어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보라색 눈동자와 넘실거리는 백금발. 그리고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짓는 이터니티를 보던 다니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 이터니티?"

"네, 주인님?"

"... 이터니티는 날 계속 케어줬잖아?"

"그렇죠. 주인님?"

"... 그럼 이터니티는 날 어떻게 생각해?"



다니엘의 질문에 이터니티는 꼭 다니엘을 품에 안았다. 얼추 자신보다 조금 큰 키를 가진 그녀는 마치 아이를 다독이듯 그를 꼭 끌어안곤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지켜야 할 주인님이죠. 그리고 영겁의 시간을 함께 할 동반자기도 하고요."

"... 그 시간에. 지금도 포함이 돼?"

"그럼요."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뭐야?"

"제가 만들어진 이유가 그것 아니겠어요? 요람부터 무덤까지."

"... 그게. 혹시 나에 대한 복종 같은 거야?"



이터니티는 잠시 말을 멈추곤 입을 꾹 닫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니엘은 비슷한 질문을 이터니티에게 던지곤 했었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반작용 때문이었는지, 어릴 때부터 그린 그림에는 마리아의 얼굴 보다는 그녀의 얼굴이 그려질 때가 더 많았다. '엄마' 라는 글씨를 삐뚤빼뚤하게 썼던 적도 있었고, 실험실에 있었을 때는 그녀를 스케치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그에게 있어 이터니티는 소중한 존재였다. 마리아는 다니엘을 그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도구'로 취급했다. 자신, 그리고 엠프레시스 하운드보다 아주 조금 '급이 높은 도구'였었다.


블랙리버의 사내정치에 휘말린 아이. 그리고 그 밑에서 똑같이 상처받은 도구들. 그것이 리오보르스 가문과 블랙리버가 남긴 그와 그녀들의 상흔이었다. 이터니티는 그를 한 때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커가며 그에 대한 알 수 없는 저릿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필연적으로 그녀 또한 '여성'이었고 오로지 '다니엘 리오보로스'를 바라만 봐야 했었기에,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기도 했었다. 다만 그것이 인간들이 줄곧 이야기 했던



"혹시 그게 사랑은 아니겠지?"

"예?"

"아, 아냐. 그럴 일 없겠지. 이터니티는 날 늘 어린 애 취급 했으니까."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과분함 감정 같았다.



"잘 모르겠네요 주인님."

"내가 살아남는 법만 배웠지. 누구랑 이렇게 감정에 대해서 대화해본 적은 없었어."

"주인님."

"... 이터니티는 똑똑한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땐 이것저것 다 대답해줬으면서. 왜 마음에 관해 질문하면 알쏭달쏭하게 대답했는지 모르겠어."

"죄송해요 주인님..."

"맨날 같이 관짝에나 들어가서 함께하잔 말만 하고. 그 마음이 뭐냐고 물으면 맨날 모른다고 하고."

"... 주인님?"

"왜?"



이터니티는 슬쩍, 포옹하면서도 다니엘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가라앉았지만 몸을 밀착했다면 은근하게 불룩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주인님이 제게 첫 자위를 들켰을 때가 기억나는군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었어요."

"이, 이터니티! 그, 그런 거 안 떠올려도 돼!"

"고민이 조금 들었어요. 여제님도 안 가르쳐 주셨고, 저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몰랐어요. 뭐, 인터넷을 찾아보기도 했었는데. 멸망 전 인간님들은 그냥 바이오로이드랑 자면서 그런 걸 배웠는데 말이죠?"



다니엘은 당혹스러운 듯 팔을 휘저으며 이터니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천아 때문에 불끈거리는 느낌은 황홀하면서 동시에 불쾌하기도 했다.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던 메이드에게 욕정하는 자신이라니. 게다가 이터니티가 꺼낸 기억은 그에게 있어 아주 치욕적인 기억이기도 했다. 어깨 너머 자위하는 법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자신에게 떠오른 사람을 떠올렸었는데, 그게 부끄럽고 죄책감 드는 일이었지만.



"필요하시다면, 주인님께 제 몸을 허락해드릴게요. 비록 미천한 바이오로이드지만..."

"아, 아냐! 이터니티! 넌 날 키웠던 사람이라고!"



그게 죽어도 이터니티라는 것을 떠올리기도 싫었다.



"주인님. 멀리 가시면 안전지역 바깥으로 나가시게 돼요. 무기도 챙겨오지 않았는데..."

"떠, 떨어져 있어 이터니티!"

"주인님... 혹시 그때처럼 숨어서 또 하시려는 건..."

"아, 아냐! 저, 저리가!"



**



얼마 뒤, 사령관은 몸이 점차 괜찮아진 다니엘을 사령관실로 호출했다.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던 터라, 환자복을 입은 채 들어 온 다니엘에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다니엘씨?"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다니엘씨를 부른 건, 앞으로 다니엘 씨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여쭤보고 싶은 마음에 부른 겁니다."

"어떻게 하다뇨?"

"라비아타가 연구소 자료를 훑어보다 당신의 기록을 겨우 발견했어요. 거의 감금되다시피 자라셨더군요. 학교 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채로 말이죠."

"... 그게. 앙헬 사람들이 제 목숨을 많이 노려서요."



사령관은 솔직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한 이 어른 아이에게 철충과의 전선을 맡기는 것은 상당히 불안했다. 물론 어느 정도 레오나에게 교육을 한다면 되겠지만, 여전히 미심쩍으로 다니엘을 보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많았다. 만일 리오보로스의 가문의 남자가 아니었다면 대하는 태도가 나아졌을까. 사령관은 고민에 빠졌다. 안전지대에 하선하게 한 뒤 요안나 아일랜드 개척지를 관리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바이오로이드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저항군에겐 큰 의미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존재가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걸, 철의 교황도 깨달았을 텐데. 이 와중에 전혀 두 번째 인간이 나타난 것은 어쩌면 큰 위협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오르카의 지휘관들은 모두 다니엘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야 그를 인정할 분위기였다. 델타를 상대했을 때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마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바르그를 굴복시켰던 일 아니겠는가. 지금은 바르그가 오르카에 복종하고 있었지만 여제의 아들이 나타난 마당에, 다시 불손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고도 말했었다.


다시 말해, 오르카 내부의 불안을 종식 시키면서도, 두 번째 인간에 대한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밑에서 철충을 상대하는 법을 익혀, 공훈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그의 과거가 안타까웠지만 사령관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다니엘씨."

"예."

"현재 오르카의 지휘관은 당신이 불행한 과거를 가졌어도 리오보르스 가문의 일원인 점과, 바르그가 충성을 했던 여제의 아들이란 사실에 조금 불편해하고 있어요."

"... 그렇군요."

"그렇다고 배제하거나 비전투 인원으로 하선시키면 펙스나 철의 교황이 어떤 짓을 꾸밀 지 모르는 일이고요."

"이도 저도 할 수 없다는 거군요. 사령관님."



사령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곤 한숨을 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이 모든 걸 타파하기 위해선, 저와 함께 전장을 다니시면서 인간의 능력을 입증하시는 것밖엔 없습니다."

"예? 제, 제가요?"

"어쩔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르카의 부대들을 당신의 휘하에 둔다 한들 반발이 조금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참모로 활동하기엔... 경험이 많이 부족하니. 현장 지휘를 해보셔야 하는데..."



고민하던 사령관은 다니엘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가장 큰 육상 전력인 '스틸라인'을 운용할 수 있는 전략적 식견을 알 리 없었고,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와 '앵거 오브 호드'처럼 특수 작전 부대에게 즉각적인 전술을 요구할 수 있는 경험도 없었다. 당연히 '호라이즌'과 '머메이드'를 운용할 수 있는 해상 전술 지식도 없었다. 다른 지휘관들 모두 위험이 큰 일이라 했지만, 그와 어쩌면 잘 맞을 수 있는 소규모 특수 부대를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부대원의 전투력도 상상 이상이며, 동시에 유약한 두 번째 인간의 말을 어느 정도 들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부대.



"엠프레시스 하운드 부대를 당신의 휘하로 변경해드리겠습니다."

"... 예? 어머니의... 부대를요?"

"물론 장화가 많이 반발하겠지만... 일단 바르그가 당신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죠. 적어도 다른 지휘관들 보다는 편하게 대하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전... 전술에 대해선 잘 모르는 걸요? 사령관님께 괜히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지휘관은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병사를 당신의 부관으로 배속 시키도록 할게요."



사령관의 말과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들어오라 말하자, 문이 열렸고 스틸라인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쓴 전투 슈트의 여병사 한 명이 들어 와 그에게 경례했다.


"승리!"

"어. 그래. 들어왔니 레프리콘?"



붉은 장발을 휘날린 그녀를, 얼핏 다니엘도 기억하고 있었다. 블랙리버의 주 전력인 '스틸라인'에서 수많은 브라우니의 분대장을 겸하고 있는 그녀, 'T-3 레프리콘' 기체였다. 물론 이터니티와 그때 만났던 천아 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또한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렇게 그는 생각했다. 왜냐면 지금 그녀의 볼에는 미약한 흉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 소장이 가장 아끼는 병사 중 한 명입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전공을 세웠던 역전의 용사였거든요."

"... 아, 그렇습니까?"

"철충에 대한 지식도 있는 편이고, 중대장까지 올라갔던 개체인 만큼. 어느 정도 지휘에 대해선 다니엘님께 도움이 되드릴 순 있을 아이일 겁니다."

"두 번째 인간님이시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프리콘입니다."



무뚝뚝하지만 기백 있는 어조로 레프리콘이 손을 내밀었다. 얼떨떨하게 다니엘은 그 손을 잡았다. 사령관은 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레프리콘. 다니엘씨에게 네가 배웠던 것들을 가르쳐 드려. 조금 시간이 촉박할지도 몰라. 2주 뒤에 바로 작전에 투입될 거거든."



사령관은 패널을 치켜들며 말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지도가 보였고 그는 몇 몇 붉은 지점을 클릭한 후 말했다.



"오메가는 도망쳤어도 미 동부 ags 공업 단지들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야. 이미 나한테 한 번 당했던 뒤라 방비도 철저할 거고, 대규모 작전을 다시 벌이기 보단, 단지를 마비시켜 덩치를 갉아먹는 형식으로 공략이 이뤄질 거야."

"그렇군요..."

"아직 델타도 완벽히 몰아낸 건 아니야. 일단 양면전선이 되진 않아야겠지. 마침 엠프레시스 하운드가 딱 거기에 맞는 부대잖아. 테러 및 공작, 폭파 부대 말이야. 레프리콘은 거기서 다니엘씨를 도와 ags의 종류와 대처 반응을 설명해줬으면 좋겠어. 너도 펙스와의 전투 경험은 많은 편이잖아?"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다행이도 레프리콘은 사령관의 말을 잘 따른 듯했다. 다니엘도 웃으며 레프리콘에게 말했다. 한 수 잘 부탁드린다고. 순조롭게 두 번째 인간, 다니엘의 직책은 만들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사령관 새끼가 쥐약이라도 쳐 잡수셨나 씨발!"

"... 말을 가려라. 장화."

"씨발, 지금 내가 미친년 아들 명령을 따르란 거야!"



엠프레시스 하운드 숙소, 레프리콘, 그리고 이터니티와 함께 들어 온 다니엘이 사령관과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장화가 던진 말이었다. 아니 말과 함께 그녀는 손에 착용하고 있던 건틀렛의 손가락을 펼치기까지 했다. 만약 와이어를 이터니티가 휘어 잡지 않았다면 다니엘의 목은 순식간에 와이어에 잘려 떨어졌을 것이었다.



"장화양... 상당히 무례하시군요?"

"아~ 네가 그 이터니티야? 너 꽤 세다면서?"



장화는 전례 없이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이터니티를 쏘아보았다. 그도 잠시 그녀는 다른 손의 와이어를 그의 방향으로 쏘았다. 그리고 그 와이어는 다행이도 바르그에 의해 저지당했다.



"뭐하는 것이냐. 장화?"

"놔. 이 똥개 새끼야."

"... 사령관의 명이다. 소속된 우리는 따라야 하고."

"너나 따라 씨발... 난 그 좆같은 리오보르스 똥구멍 다시 핥긴 싫으니까."



홍련을 죽이려 했던 때의 장화처럼, 그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빛내며 다니엘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라고 언젠간 

다니엘에게 암컷타락하실 장화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여기서 수위씬 적으면 19금 게시판으로 옮겨야 하나?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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