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그날 저녁 9시. 카페 아모르는 예정보다 일찍 문을 닫았다. 손님도 점원도 모두 자리를 찾지 않았지만 가게는 아직 불을 끄지 않았다. 거금을 내고 카페 아모르의 저녁 시간을 통째로 구매한 고객의 주문을 들어주기 위해 아스널은 퇴근하며 그 고객에게 열쇠를 넘겼다. 그녀의 격려를 받은 고객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며 닫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넓은 카페 안에서 고객은 자신이 초대한 이를 기다렸다.

 

“.....”

 

고객은 시계를 살폈다. 짧은 바늘이 9시를 가리켰음에도 자신이 기다리는 이가 아직 도착하지 않자 그는 애가 달았다. 조금씩 타는 애간장을 커피로 누르면서 그는 자신의 인내심을 더 끌어왔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지, 그가 조금 더 기다려보려고 생각하는 순간 닫혔던 카페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당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칸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리마토르를 미소로 반겼다. 카페 호라이즌과 더불어 오르카호의 사교 모임 역할을 하는 카페 아모르가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자신의 연인이 아예 전세를 내고 앉아있었을 줄은 몰랐다. 리마토르도 기다리던 이의 방문을 웃으며 축하했다.

 

“네. 시끄러운 거 안 좋아할 거 같아서 공간을 전부 빌렸어요. 둘만의 장소는 좋아하나요?”

 

“싫어할 리가 없지. 당신과 둘이 있는 건 언제나 좋아.”

 

“고마워요. 교수 일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요. 식기 전에 커피부터 들어요.”

 

그녀가 웃으며 답하자 리마토르는 그녀의 자리에 차려진 커피를 권했다. 아직 식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에 하얀 하트가 띄워져 있었다. 놓칠 수 있는 사소한 부분임에도 이런 식으로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칸은 조용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잘 마실게.”

 

커피가 입안에 흘러들자 온기도 같이 들어왔다. 부드럽고 고소한 우유의 향이 혀에서 시작해 입안 곳곳에서 춤을 추다 목 뒤로 넘어갔다. 하트를 삼킨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말을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이해하고 있었다.

 

“카페 아모르. 이름 참 좋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이름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Amor.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지. 이 단어가 들어가는 유명한 경구(警句)로 니체가 같은 상황이 영원히 반복되는 영원회귀사상을 제시하며 같이 말한 Amor Fati가 있지.”

 

“잘 알고 있네요. 스스로 나아갈 길을 만드는 위버멘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끌어안고 당당히 맞서죠. 그러니 운명을 사랑한다고 표현하고요.

 

그런데 칸, Amor의 뜻을 더 알고 있나요?”

 

“음? 사랑 말고 다른 뜻이 더 있어?”

 

칸은 눈꼬리를 길게 빼서 호선을 그렸다. 반쯤 눈을 감은 채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리마토르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잠시 멈췄던 숨을 고르며 그는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녀와 말을 이었다.

 

“Amor에는 본능적인 사랑이란 뜻이 있어요. 아무리 떨어뜨려놔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사랑이죠.”

 

“오, 그런 뜻이 있는 줄은 몰랐네.”

 

“우리는 살면서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죠. 전우애, 가족애, 인류애처럼 사랑이라는 말은 대단히 포괄적이에요. 그렇지만 많은 이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물으면 대부분 한 가지 형태를 떠올려요. 연인과의 사랑인 Eros죠.”

 

“에로스라... 그것도 아모르에 해당되겠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곧 성적 욕망으로도 이어지니까.”

 

“그리 볼 수 있죠. 그런데 칸, 저는 에로스가 연인과의 사랑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이는 걸 그리 안 좋아해요. 칸이 말한 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성적 욕망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하지만 그게 사랑의 전부인가요? 순수한 사랑을 의미하는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이 왜 연인과의 사랑을 뜻하는데 수식어로 쓰일까요?

 

이런 점을 종합했을 때, 저는 기존에 에로스가 가진 지위를 아모르가 대신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본능적인 사랑은 성적 사랑인 에로스를 포함하는 동시에 감정적으로 애끊는 사랑도 담고 있으니까요.”

 

“이야, 이거 훌륭한 지적인데. 이런 식으로 언어를 해석하는 걸 보면 왜 비트겐슈타인과 촘스키처럼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가 있는지 알겠어. 글자 이면에 담긴 이런 의미까지 보니 뜻이 더 넓어지네.”

 

칸과 리마토르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였음에도 새로운 지식이 반짝이는 진주처럼 대화의 물망에 오르자 그와 그녀는 대화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렇지만 단순히 학문적인 충족감이 아니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에로스가 아닌 아모르임을 알게 되며 둘은 사랑을 더 깨끗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본능적인 사랑이 몸을 타고 올라 둘 사이에서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상을 보는 시야는 달라지니까요. 괜히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교육을 강조한 게 아니에요.”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야. 나보다 먼저 세상을 살고 진리를 탐구한 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도 성장할 기회를 얻었으니까.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겠지.”

 

“모를 일이죠. 제가 가르쳐드린다고 해서 모두 철학을 공부하는 건 아니잖아요. 마주가 말을 물가에 데려다놔도 물을 마시는 건 말의 의지인 것처럼, 칸이 철학에 관심을 가진 건 순전히 칸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이에요. 이런 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제가 아니었어도 스스로 배움을 추구했을 거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 말이 목이 마르다고 해도 마주가 물가에 데려가지 않으면 목을 축일 수 없지. 야생마라면 스스로 물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난 오르카호에 매인 말이었어.”

 

“그럼 칸이 철학을 공부하게 된 데는 제 지분이 있는 걸로 하죠. 겸손하게 90% 정도만 받아갈게요.”

 

“뭐? 참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

 

“그래요? 그럼 80%로 하죠.”

 

“아니, 50%면 돼. 당신이 반을 만들고 내가 반을 만든 거야. 그러면 누가 우월한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가 되잖아.”

 

칸은 위트 있는 대답으로 그의 질문을 받아쳤다. 잘했냐며 한쪽 눈으로 윙크를 날리는 칸을 보고 리마토르는 흡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처음에는 상담자와 내담자로 출발한 선후 관계가 조금씩 좁혀지더니 어느새 둘은 같은 선에 서 있었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상처를 일방적으로 받아주는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사이가 되며 만든 변화는 아직 끝을 맺지 않았었다. 주머니의 무게감을 느끼며, 리마토르는 열린 가능성에 손을 뻗었다.

 

“좋은 말이네요. Amor의 3번째 뜻처럼요.”

 

“뭐? 또 다른 뜻이 있어?”

 

사랑과 본능적인 사랑에 이어 새로 등장한 아모르의 뜻에 칸은 흥미가 동했다. 그녀가 그가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리마토르도 칸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Amor가 본능적인 사랑을 뜻한다고 제가 그랬죠? 여기서 뜻이 한 번 더 확장돼요. 본능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의 대상자, 애인으로 이어지죠.”

 

“아아, 뜻이 확장된 거구나. 그럼 Amor는 사랑으로도 볼 수 있고 애인으로도 볼 수 있는 말이네.”

 

“그렇죠. 그러니 문장의 맥락을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Amor tui는 무슨 뜻일까요?”

 

리마토르는 갑자기 라틴어 문제를 던졌다. 그와 함께 라틴어를 조금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라틴어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칸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기억의 앨범을 넘기던 그녀는 배웠던 지식을 끄집어내 답의 윤곽을 조립했다.

 

“Tui가 아마 tu의 변형이었지. tu는 영어의 you에 해당하는 2인칭 대명사니까, tui는 ‘당신의’ 정도로 해석하는 게 좋겠지. 그럼 Amor tui는 ‘당신의 사랑’ 내지 ‘당신의 애인’으로 해석하는 게 맞지 않을까?”

 

“오, 정답은 아니지만 80점을 드리죠. 훌륭한 추론이에요.”

 

정보가 부족했음에도 좋은 귀납추론으로 정답에 근접한 칸에게 리마토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모르는 문제여도 아는 것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쌓아올려 답에 도달하는 그녀의 추론이 좋은 방식이라고 한 번 더 강조하고 답을 말했다.

 

“Amor tui는 ‘너를 향한 사랑’을 말해요. 이때 Amor는 본능적인 사랑을 의미하죠.”

 

“으음, 그게 그런 의미로 해석된다면 할 말은 없어. 그렇지만 그 말을 애인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석할 필연적인 이유가 잘 안 와 닿네.”

 

그의 답을 들은 칸은 이의를 제기했다.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었지만 리마토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돌고 돌아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를 잡은 그는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그녀의 질문에 답을 달았다.

 

“좋은 지적이에요. 제가 아까 말했죠. 맥락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요. Amor tui도 애인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각 상황의 전후 맥락을 보고 해석하면 보편적으로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볼 수 있는 거죠.

 

마치 저와 칸의 상황처럼요.”

 

리마토르는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말에 칸은 ‘당신은 한순간도 낭만을 안 놓치네’라고 답하며 볼에 그라데이션을 올렸다. 붉게 시작된 그라데이션이 귀로 번지자 리마토르는 말을 이었다.

 

“모든 상황에는 맥락이 있어요. 어느 순간 갑자기 툭 떨어지는 일 없이 하나의 선 위에서 인과관계를 따르죠. 칸과 저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는 마리와 제 견해 차이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었던 걸로 시작했지만 정의에 대한 설명은 아들러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갔었죠. 그때부터 서로 만나지 않는 평행선이 이끌려 교차하게 되었고요.

 

한 번 만난 평행선은 그대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어요.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다시 만나고, 또 만나고를 반복했죠. 그렇게 얽히고설킨 평행선은 풀리지 않은 매듭으로 단단히 묶이게 됐죠.

 

풀리지 않는 매듭은 분명 불편할 거에요. 어떨 때는 자유로웠던 선을 그리워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매듭이 된 게 아니라, 선이었던 시절부터 서로에게 감기기를 바란 결과라면 매듭이 되어도 행복할 거에요.

 

 

칸. 많이 불편할 거라는 것도, 때로는 다시 풀고 싶을 때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전 그럼에도 제 의지로 매듭이 되어 풀리지 않기를 바라요. 제 Amor는 당신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당신과 선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리마토르는 숨을 골랐다. 수십 번을 연습한 말이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입을 제대로 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됐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주머니 속에 감추어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네모난 사각형 상자는 위로 들려 속에 품고 있던 더 찬란한 물건을 세상에 드러냈다. 매듭을 마무리할 은빛 고리가 카페 아모르의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을 냈다. 

 


“칸,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는 거라고는 철학 밖에 없는 한심한 남자지만, 세상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해서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묶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의 반려가 되는 걸 허락해주겠어요?”

 


말을 마친 리마토르는 입을 닫고 급히 숨을 골랐다. 드디어 말했다는 안도감과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까를 두고 그의 심장은 폭주하는 열차처럼 쉴 새 없이 뛰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 귓가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안을 다스리는 데는 응급조치만 취하고 모든 정신을 밖의 자극을 받아들이는데 쏟았다.

 


“...당신은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네.”

 


칸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일부러 눈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인 그녀는 그가 볼 수 있는 입마저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조절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을 정황증거도 구하지 못하고,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답을 듣게 된 리마토르는 가쁜 숨을 참으며 그녀의 입에 이목을 모았다.

 

“멸망 전에 본 당신은 정말 상냥했어. 연구원으로 지낼 때 보여준 악한 모습이 당신을 덮어씌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켠에 상냥함을 버리지 않았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상냥함을 갖고 살아왔어. 이런 세상에는 너무 안 어울리게도 말이야.

 

그런 상냥함이 당신을 망칠지라도 당신은 상냥함을 버리지 않았어. 사랑한다고 말했던 이가 당신을 상처 입혀도, 당신은 자기 몸보다 먼저 상대방을 걱정했지.

 

그런 상냥함이 너무 좋아서,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난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이미 매듭에 묶일 대로 묶였는데 당신이 이런 말을 해주면... 내가 싫어할 리가 없지.”

 


칸은 눈을 가렸던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보여주었던 눈웃음이 더 확실히 휘어져 한 사람만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쌍의 반지 중 하나를 들어 리마토르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답을 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진심으로 사랑해, 리마토르. 당신의 반려가 되고 싶어.”

 


칸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은 리마토르는 반지에 손을 뻗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그녀의 왼손 약지에 앞으로 풀리지 않을 매듭 고리를 끼웠다. 서로의 관계를 증명하는 빛을 두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듭이 끌어당기듯 서로를 끌어안은 그와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공간을 채운 커피향기와 글자 그대로의 Amor가 넓은 카페 아모르를 비좁게 만들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근 카페였건만, 둘은 서로를 감싸고 지나간 바람을 똑똑히 느꼈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훈훈한 온도에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향기가 담겨 있었다. 서로의 향기였다.

 

 

칸은 살며시 다가와 그의 입술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내려앉았다. 몇 번이나 맞춘 그의 입술이 그토록 애틋하게 느껴지는 적은 처음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서로에게 말했다.

 

 


“당신만의 반려로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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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둘의 관계가 바뀌었네. 81편 말미에 관계의 재정립이 있을 거라고 예고했는데 드디어 결실을 봤어. 이대로 1부를 마무리하고 싶지만 청혼까지 와놓고 결혼 장면이 없으면 섭섭하지. 짧게라도 금방 써올게.


다들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오늘도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