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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운명 부수기(1)




(매움 주의)



* * *





남자를 위한 연기는 일시 보류다. 우선 순위로는 남자와의 계약이 앞서지만, '연기'를 가능하게 해 준 아이가 미니다. 그런 아이가 죽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계약이고 뭐고 무시할 수가 없다.


영화관에서 헤어지고 일주일 뒤에 남자와 집에서 자리를 가졌다. 식탁 맞은편의 남자는 답지않게 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듯, 눈가부터 관자놀이까지 눈에 띄게 찌푸리고 있었다.


대화하는 자리라는 구색만 나타내기 위해 내가 준비한 에스프레소를 원샷하고, 남자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살해 당해."


3년 뒤, 2023년.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던 미니는 당연하게도 명망있는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무려 전액 장학금 대상자라는 것 같다.) 대학생 미니는 고등학생 미니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그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주위를 휘어잡으며 어느 곳에서나 중심 인물이 되는, 그러나 딱히 자신만의 그룹은 만들지 않는 아이였다. 고등학생 때의 교우관계(미니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찐친)는 물론 잊지 않았기에, 그 걸레같은 것들도 여전히 친구인 채다. 


입학부터 뒤따른 장학금을 포함해 재학 중에 타낼 수 있는 장학금은 모두 타낸다. 주변인은 그런 우수함을 우러러보듯 했고, 미니는 겸손해하면서도 조금은 거들먹대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변인들은 미니를 아꼈다고 하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거들먹거림이었을지는 보나마나다.


교수부터 학우, 찐친들에 부모까지. 모두가 갈수록 우수해지고 사랑스러운 빛이 강해져만 가는 그런 미니를 아꼈다. 한 명쯤은 아니꼽게 생각해 형태도 이유도 없는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 텐데,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환경까지 미니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 아이가 더욱 행복해지는 걸 모두가 보고 싶다는 듯이. 어쩌면 미니가 얼마든지 공격받을 수 있던 환경을 존재하는 것만으로 바꿔버린 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도무지 미니란 아이가 누군가에게 살해 당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미니란 아이의 모든 것이 행복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세계로부터 너는 언제나 행복할 것이란 약속이라도 받은 듯. 그런 아이가 누군가에게 적의를 살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문제의 시작은 2023년의 여름이었다.


장학금의 일부를 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니는 여름 방학을 틈타 어느 보육원의 자원봉사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장학금에 더해서 고등학생 때부터 해온 알바로 모은 돈을 합치면 꿈 꾸던 유럽 여행이, 조금 빡빡하게 예산을 짠다면 세계 여행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유? 그냥 '그런' 아이니까. 그것이 자원 봉사를 하게 된 동기였다. 틀림없이 불쌍한 아이들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계기가 되었겠지. tv, 인터넷,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지원을 호소하는 놈들 등등.


월 2~3만원의 정기 후원으로도 충분할 텐데, 그것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한 걸까? 혹시 후원금이 착복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미니라는 인간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그런 의심조차 피어내지 않았겠지. 미니는 나같은 년이 가질 시선은 상상도 못하는 인간이다.


봉사 활동 기간은 2주였다. 훗날의 취직에 도움이 될 이력을 위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아이들을 돕기 위해 보육원을 찾은 미니는 첫날부터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보육원에 종사하는 이들, 함께하게 된 자원 봉사자들에게도 그랬다. 아이들에게는 예쁜 누나나 착한 언니, 그 밖의 인간들에겐 요즘엔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로 통하면서, 미니는 하루하루 아이들을 위한 봉사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동화 읽어주기, 글 가르치기, 씻겨주기, 놀아주기, 아이들 취향의 레크리에이션… 그런 것들로 가득한 나날 속에서 미니는 이 보육원을 찾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아닌, 한 남자를 보며.

…물론 아이들도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라는 것을, 미니가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그게 다야?"


더 이어질 이야기를 내가 재촉하자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그 놈이야?"

"굳이 말 안 해도 알잖아."

"그 놈이야?"


칼같은 내 되물음에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남자 입으로 들어야 한다.


"그 놈이냐고 묻잖아."


"맞아." 남자는 내 눈을 피하고 말을 이었다. "그 놈은, 그 아이같이 원해서 봉사하러 온 녀석이 아니었어. 이 정도면 대강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는데."


진짜 문제는 다음이야, 라고 말한 남자는 피했던 시선을 맞추고 진짜 문제에 어울리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처음 그 놈에게 그 아이가 죽고 나서, 나는 시간을 거슬러 2023년 봄으로 갔어. 자원 봉사같은 건 꿈도 못 꾸게 하기 위해서였지. 그런 결말을 맞이할 바에야 여행이나 가서 그 동안 모은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는 게 더 낫잖아. 하지만, 뭐… 너도 알다시피 걔가 그럴 앤가. 똑같이 자원 봉사하러 가서 똑같이 눈이 맞고, 똑같이 죽더군. 그래서 다음에는 아예 그 보육원이 봉사가 필요하지 않은 곳으로 만들어버렸어. 그 덕에 그 아이가 자원 봉사 하러 가는 일은 없었지만, 똑같은 놈이랑 눈이 맞는 건 똑같더군. 장소가 어디였는지 알아? 너도 잘 아는 그 번화가였어. 보육원에서만 맞을 거라 생각한 눈이 거기서도 맞은 거야."


말을 잇기가 어려운지, 남자는 비어버린 에스프레소 잔의 주둥이에 검지를 대고 돌려갔다. 시선은 다시 피하고 있었다. 


재촉 않고 기다리자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뭐?"


"몇 번 더 다른 방법을 시도해도 안 되길래… 죽였어."


'죽였어'라는 울림에 괴로움이 있었다.


"그런데도 죽더라고. '살해 당한다.'가 '사고를 당한다'로 바뀌어버렸어. 그 놈을 죽인 그 날에 차에 치이기도 하고, 원래라면 그 놈에게 두들겨 맞는 날에 등산을 가서 실족사하거나, 그 놈은 없는 보육원에서 어이없는 사고를 당해 죽기도 했어. 한 번은 어린 아이들 앞에서 목이 잘리기도 했고…"


"끊지 마. 계속해."


"…한 번은 사고란 사고는 다 막은 적이 있는데, 그 때는 또 급성 질환으로 죽어버리더군. 살해 당하는 경우와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말이야. 그걸 마지막으로 그 아이에게서는 손을 뗐어. 뭘 어떻게 하든, 그 아이는 2023년 겨울에 죽었어. 겨울을 넘길 수 없었어. 어떤 흐름이었든, 원래 살해 당하던 날에서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어. 치여 죽은 건 원래는 살해 당하는 날로부터 3일 뒤, 보육원에서의 사고사는 4일 뒤, 급사는 6일 뒤… 그런 반복이었어."


나는 거기까지만 듣고 주방에 들어가 에스프레소를 한 잔 더 내려 식탁으로 가져왔다. 


에스프레소가 충분히 식을 때까지 기다리고, 원샷하고서 말했다.


"왜 못 막았어?"


냉랭하게 묻자 남자는 뭐라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입술을 조금 벌렸다.


"고작 그 정도가 최선이었어? 할 수 있는 만큼 다 한 거야?"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어. 네 상상력이 미칠 범위에서의 방법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할 수 없을 방법까지 모두 동원했어. 그런데도 죽었어."


"그래? 그럼 꺼져."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을 가리켰다. 이 집은 자신의 것이라고 받아쳐오면 할 말이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현관까지 배웅하는 것으로 뒤꽁무니를 압박하고,  남자가 현관을 나서기 전에 일러두었다.


"3년 뒤에 나랑 얘기 좀 해."

"……그 아이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되든. 어쨌든 2024년 직전에 얘기 좀 하자고. 마음 단단히 먹고 와."


"그 말은 3년 동안 꺼져 있으라는 건가?"


"아니. 내가 부를 때는 찾아와. 무조건 와야 돼. 1분도 아니고 10초만 늦어도 용서 안 할 거야. 만약 늦는다? 당신 쪽에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걸로 알겠어.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길게."


"뭘 어쩌려는 건데?"


"뭘 어쩌려는 건데? 그 아이가 죽는 걸 알아둬야 할 것 같다고 한 놈은 너야. 네가 그렇게 말해서 나는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된 거라고. 모르겠어? 넌 지금 그냥 듣고만 있어야 돼. 발언권, 없으시다고요."


"알겠어."

"말했어.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외에 문이 한 번 더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정직하게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려 한다면 여기서 한 번 더 열고 닫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쓸데없이 큰 아파트다 보니 그런 구조다.


그런데 닫히는 소리는 없이, 열리는 소리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살아있을 거지?"


살짝 열린 현관문으로 빼꼼 얼굴만 내밀어온 남자가 그렇게 물었다. 

자살하지 않을 거지? 라고 묻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씨발 그딴 게 걱정 되세요?"

"걱정은 안 하는데, 그래도 확인하려고."

"왜 걱정을 안 하시는데요?"

"넌 이제 자살 못할 거니까."


미니에 대해 말할 때의 기운없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입을 열어봐야 욕만 나올 것 같았으므로 말을 아꼈다.


"금방 죽지도 않을 거고."

"꺼져 이 씨발 새끼야!"


내가 신발장에서 힐을 꺼내는 것과 남자의 얼굴이 현관문에서 사라지는 것은 동시였다. 직후에 황급히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미니가 기말고사를 끝내고 방학을 1주 앞둔 시점에서 나는 패스트푸드점을 그만 둔 상태였다. 아쉬워하는 인간들은 없었고, 나 또한 아쉬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 의사로도, 돈이 필요해서 일한 것도 아니다. 그곳의 인간들 모두도 나를 그런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뭐 그런 인간 쯤으로 여겼지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미니와 카운터에 나란히 서서 인간들이 오가는 번화가를 멍하니 바라볼 수 없게 됐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그 아쉬움은 다음과 같이 무마하고 있다.


"야호! 언니! 나 왔어!"


이 집의 비밀 번호도 여분의 카드키도 모두 가지고 있는 미니는 주말마다 이른 아침에 찾아온다. 나는 늘 자는 척을 하고, 내 게으름에 질린 미니는 꿍얼꿍얼 궁시렁대다가 언제봐도 놀라울 따름이라는 아파트 탐색에 나선다. 


탐색이 끝났을 즈음에도 나는 자는 척하고 있다. 더 이상 내 게으름을 봐줄 수 없다는 듯한 미량의 분노가 섞인 꿍얼거림이 들린다. 하지만 정말 화를 낼 수도 없다. 거친 방식으로 깨우는 것은 싫지만 평범하게 깨우기도 싫다. 그런 의미가 담긴 손길이 목까지 덮은 이불너머로 전해진다. 약간의 망설임도 담겨있다.


쭈뼛쭈뼛 미니는 외투를 걸친 채로 이불 속에 들어와 뒤에서 끌어안아온다. "안 일어나면 장난 친다…" 그런 속삭임이 귀와 목을 간질여야 나는 눈을 떠준다. 이제 막 일어난 것치곤 말똥말똥한 내 눈을 보고 "일어나 있었지?" 그렇게 확인해온다.


마주보고 끌어안고서 내가 말한다. 


"처음도 아니잖아. 그나저나 이불 속에 들어오고, 오늘은 제법 과감하네?"


"잘 잤어?"


방긋 웃으며 내 앞머리를 쓸어넘겨준다. 나는 뺨과 목에 입을 맞춰주는 걸로 답하고 이부자리에서 나선다. 미니는 몇 분 뒤에 나왔다. 여전히 화끈거리고 있다는 걸 다 알 수 있는 얼굴로. 그러게 과감하다는 말을 경고로 들었어야지. 


아침을 먹는다. 요즘에는 미니가 대신해서 차려주고 있다. 주말 한정이라는 것이 신경쓰이는지 메뉴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다. 특히 국 요리는 과하다 할 정도여서, 이상한 집착마저 느껴진다. 다른 건 몰라도 국은 남기지 말라고 못까지 박는다. 애초에 남길 생각도 없었고 맛도 있으므로 나는 밥풀 하나까지 전부 해치운다.


그런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일을 괜히 그만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평일이 지나면, 지나가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주말이 그 아이와 함께 찾아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날들이 있었는가 하면, 더도말고 10초만 쉬고 싶다고 생각하던 날들도 있었다. 


봄만 되면 그 아이는 작년보다 성숙해졌음을 뽐냈다. 몸도 마음도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갔다며, 내가 평가해주길 바랐다. 내 평가는 심플했다. 17살에서 18살이 됐다고 딱히 변하는 건 없다. 18살에서 19살도. 19살에서 20살도. 매년 똑같은 봄의 평가를 듣고 미니는 '너도 똑같아!' 라고 성을 냈다. 칭찬인 건지, 깔보는 건지. 18살의 미니도 19살미니도 20살미니도, 직후에 괜히 말했다는 표정을 지었던 걸 봐서는, 깔보는 것에는 조금 못미치는 어중간한 의미였을 것이다. 


여름에는 바다를 찾았다. 미니의 친구들도 함께였다.


청명한 바다 앞에 서서 이것이야말로 여름이라고 귀엽게 포효하는 18살의 미니에게, 너다운 틀에 박힌 감상이라며 핀잔을 주고 진짜 바다에 대해 말해줬다. 안개, 비, 우중충. 미니는 친구들과 질색하며 언니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길래, 너희보다 어른이기에 안다고만 말해주었다. 


다음 여름. 지난 900년간 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였는지는 몰라도, '여자 고등학생'이라는 것은 잘만 꾸미면 그 나이 또래로 보일 나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생물이었다. 바다에 오면 바다를 즐겨야지 어쩜 그렇게 셀카들만 찍어대는지. 셀카야 여자라면 연령대를 불문하고 대부분 즐긴다지만, 이것들은 정도가 심했다. 나중에 가선 내가 참을 수 없어서 미니를 시작으로 1호, 2호, 3호 모두 강제로 바다에 처넣었다. 


또 그 다음 여름. 충분히 바다를 즐기고 난 후의 모두는, 나를 제외하고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야외에 마련된 샤워실을 이용하던 중에 미니를 습격해서 가슴과 그곳만 새하얀 것을 놀려주고 도망쳐나왔다. 본래도 내게 비견될 만큼 새하얀 피부의 소유자였기에, 그을림으로 인해 도드라진 새하얌은 충분히 놀림거리로 삼을 만했다. 


버스에서까지 볼과 귀가 잡아당겨지는 것은 샤워실의 소동을 떠올리는 것으로 버텨냈다. 가끔 놀려주기도 하면서. 그러다 미니가 눈부셨던 여름의 하루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잠이 들어버린 후에는, 아무도 모르게 뺨에 입을 맞췄다.


다른 계절과 달리 21년 가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로윈으로 떠들썩한 테마 파크에 가는 것을 내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왜 가지 않느냐는 미니의 물음에는 기를 쓰고 '그냥'이라고만 답했다.


그 다음 가을에는 결국 테마 파크를 가게 됐다. 이번에는 미니의 수험생이란 신분을 방패로 삼았으나 대학은 걱정 없다는 시원스러운 창에 뚫려버렸다. 이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나는 경을 쳤겠지만, 명문대에 진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엄하게 수험생처럼 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작년에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또 그 다음 가을은, 처음에 내가 거절했던 것과는 다른 이유로 테마 파크에 갈 수 없었다. 


겨울은 미니에게 일탈의 계절이었다. 그런 친구들을 찐친이라 여기고 있으면서 이제껏 담배는 물론이고 술도 한 적이 없다는 듯했다. 그런 아이가 왠지 18살의 겨울에는 술을 마셔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나나 그 아이의 친구들이나 '너는 이런 거 하지 마라.' 라고 말할 입장도 성향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탈의 자리는 내 집에 마련하기로 했다. 뭔가 힘든 일이 있어서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건가,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힘들다고 술을 찾는 미성년 특유의 치기도, 성인 특유의 나약함도 찾아볼 수 없는 아이다. 그런 인간으로 자라나지도 않을 것이다. ……20살에 죽지만 않는다면.


그날은 유난히 들떠버렸다. 첫술을 가르쳐준다는 의미가 '그런 쪽'의 첫경험을 선사한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쪽의 제대로 된 경험은 없지만 유경험자 못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기에 더한 경험을 해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날이 더더욱 중요했다. 비록 나누는 것은 몸이 아닌 술이더라도, 미니가 '제대로 된 첫경험'을 하길 바랐다.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던 내 아쉬움은, 분명 즐거워할 미니로부터 달래고 싶었다.


따라서 편의점에서 이천원도 안 되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소주가 미니의 '첫술'이 되어서는 안 됐다. 하지만 미니의 친구들은 그런 걸 준비할 것이 분명했고, 아니나 달라, 내가 장을 봐온 사이에 집에 침투해있던 미니와 녀석들은 이미 술자리를 펼친 상태였다. 과자 몇 봉지, 소주. 육포, 소주, 과일 통조림, 소주.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길게 볼 것도 없이 당장 자리를 치우라고 하자, 2호가 빨리 마시고 후끈해지자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혹시나 해서 취하려고 만든 자리냐 물었더니, 그것도 그렇고 소주가 맛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대단한 미각 세포의 소유자다. 소주를 맛으로 먹는다는 소리는 중학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주는 너희끼리나 마시라 말하고, 나는 미니만 불러 주방 옆의 다이닝 룸에 대기시켰다. 그런 다음 잔뜩 힘을 준 샴페인 줄렙을 만들어주었다. 직접 손질한 민트 잎을 듬뿍 넣어 과일 샴페인으로 어레인지한 나만의 버전이었다. 나는 가니쉬를 곁들여봐야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이기에 이런저런 과일 필은 제외했다. 첫술을 머금은 미니는 상쾌하고 달달하다며 좋아했다.


그 다음은 프리미엄 소주를 베이스로 베르무트와 배 시럽을 7:3으로 배합해 섞은 마티니를 내놓았다. 시럽은 넣기 싫었지만 그렇게 되면 갓 스물이 된 아이에겐 너무 드라이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샴페인 펀치를 준비하던 와중에 혀가 꼬였음을 알 수 있는 '언니'가 내 귓가를 건드렸다. 마티니를 관찰하는 얼굴이 붉어진 걸로 예상은 했어도, 이렇게 술이 약할 줄은 몰랐다. 나는 샴페인 펀치에서 픽 미 업으로 바꾸고 억지로 모두 마시게 하고서, 침대로 옮겼다. 이것은 부축해주면서 알게 된 것인데, 미니는 취하면 애교가 정말 많아진다. 당장 덮치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침대에서 실랑이를 했을 때는 살짝 위험했다.


그렇게 그날은 끝났다. 미니의 19살 겨울도 비슷한 흐름이었다. 나는 그런 두 번의 겨울 속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한 잔이라도 걸쳤다면 입술부터 시작해서 젖가슴, 그리고 그 아래까지 혀를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잠든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느닷없이, 하지만 몇 번이나 피어올랐던 죄책감이 또 끌어올랐다.


폐하를 내버려두고 이래도 되는 걸까?


더는 볼 수 없게 됐다고 해도 이래도 되는 걸까?


더는 볼 수 없게 됐기에 유독 행복한 게 아닐까?

나는,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곧 죽을지도 모르는 내가, 살해 당한다는 이 아이를 이용해도 되는 걸까?


나같은 년에게도 내일이 있다는 걸 알려준 이 아이를?


이제 좀 적당히 하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사고를 멈출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적당히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2023년. 12월.


"꺄아아아악!"


내가 살았던 남자 소유의 단칸 방에서 웬 멸치 새끼에게 맞고 있는 걸 이야기하려면, 미니 몰래 내가 틈틈히 해온 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지난 7월, 나는 미니가 자원 봉사로 향하게 된 그 보육원에 남자와 잠입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기에 보육원 부지가 한 눈에 보이는 위치에서 낮에는 관찰, 그 외의 시간에는 근방의 호텔에서 시간을 보냈다. 


관찰을 통해 미니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그 놈의 생김새를 파악하고, 봉사활동이 끝난 후로는 차분히 미행해서 사는 곳을 포함한 신상에 대해 조사했다. 남자(폐하)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미니와 관련된 일이니 처음부터 직접하고 싶었다.


조사는 7월이 끝나갈 무렵에 끝마쳤다. 이 무렵은 미니와 바다를 찾았던 때와 겹친다. 그 놈과는 이미 남자친구라 부를 사이가 되었음에도 내게도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니의 남자친구라는 놈은 아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2010년대부터 심심하면 화두에 오르던 촉법, 형사미성년자라고 하던가. 만 14세 미만이던 시기부터 그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할 짓 못 할 짓은 다하고 다녔던 것 같다. 눈에 띄는 이런 이력이야 귀여운 편이었고, 숨겨진 이력을 보면 과연 이것이 갓 20살된, 남자(폐하)의 말을 빌리자면 좆 만한 새끼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악마의 사산아가 어쩌다 살아남았다면 이런 존재가 되지 않을까 싶은, 그야말로 인간들이 뻔질나게 외치는 '올바름'을 정확히 180도 뒤집어 놓은 듯한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경제력이 나쁘지 않은 집안이지만 부모는 없느니만 못했고, 하나 있는 동생은 이 놈의 쁘띠 버전이었다. 이 정도면 놈과 그 가족 모두 미니의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좋다.


어째서 미니는 이런 놈과 눈이 맞은 걸까? 조사하면 할수록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답은 의외라고 할 것도 없이 간단했다. 이에 대해선 후술하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2월. 나는 노림수를 위해 12월이 오기까지,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8월을 기하여 데이트 폭력을 시작으로 미니가 오만가지 고초를 겪게 되었음에도, 나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미니도 자신의 그런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으려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드문드문 보이는 생체기나 상처에 대해 물어보면, 부주의로 인해 생겼을 뿐이라며 어물쩍 넘겼다.


나와 남자는 그 놈이 단골로 있는 번화가 역 근처의 pc방 앞에 있었다. 초저녁이었고, 눈이 내리려는 건지 하늘은 칙칙한 잿빛을 띠고 있었다. 


pc방으로 들어서서 놈을 찾는다. 먼 구석 자리에 헤드셋을 쓰고 있다.


여기는 이상한 곳이다. 나는 게임 따위 pc방 같은 곳에 찾아와서 할 정도로 즐기진 않으나, 게임은 즐겁기 위해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동전을 쓰는 오락실이 그렇지. 그러니 온라인 게임도 별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곳을 찾는 년놈들은 하나같이 애, 어른 할 것 없이 욕설을 갈겨대면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접근한 아이들도 그렇다. 어쩐지 스틸라인 온라인과 비슷한 게임을 즐기던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들은, 모니터에 욕설을 내뱉으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그 중 하나에게 말을 걸고 잠시 시간을 내줄 것을 부탁했다. 최대한 조심하면서.


"우와… 예쁜 누나…"


"고마워."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얘들아. 언니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뭔데요?"


"자, 여기 10만원씩 줄 테니까 너희가 쓰던 자리에 앉게 해줄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펄쩍 뛰며 기뻐하는 걸 말렸다. 시선을 끌면 안 된다.


총 30만원을 쥐어주고 다시 물었다.


"이제 누나 자리 맞지?"

"네. 잠깐만요. 자리 끄고 올게요."


자리로 돌아간 아이들은 잠시 뒤에 다시 와서 꾸벅 인사하고 pc방을 떠났다.


아이들이 앉던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내 우측에 앉았다. 좌측으로 두 자리 떨어진 곳에 그 놈이 있었다.


나는 먼저 놈이 즐기고 있는 게임과 동일한 게임을 켜두고, 10분 뜸을 두고서 접근했다.


"저기… 오빠."


놈이 헤드셋을 벗고 험악한 얼굴로 고개만 돌려 나를 확인했다가, 의자 전부를 돌렸다.


"어? 어?"


"오빠…" 나는 부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음…"


"어어, 뭔데?" 


놈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며 내가 꺼낼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도 이 게임 하는데 잘 모르겠어서요. 그래서… 음…"


"그래? 좀 도와줄까?"

"네! 조금만요!"

"어, 아니야. 그냥 같이 하자. 어디에 앉았어?"

"저기 바로 옆에요."

"자리 옮길게. 잠깐만."


놈이 헤드셋의 마이크에 무어라 말하고,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주위에 다 들릴 크기로 말하기 시작했다.


"씨발 좀 있다 하자니까? 혼자 돌리고 있어 씨발 좀. ……아 금방 간다고! 어매 뒤진 년아! 애미애비 시장바닥에서 야채파는 거 도와주고나 오든가!"


"ㅋㅋㅋㅋㅋ"


옆에서 남자가 소리죽여 웃는다.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에 자리 잡은 그 놈은 내 모니터를 보더니 로그인도 안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계정이 없다고 하자, 친절하게 계정을 만드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이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과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도 모르고.


같이 30분 정도 게임을 즐겼다. 그런 척했다. 게임 속 총구에서 뿜어져나오는 불이 이 놈에게 향하는 걸 상상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버텼다.


"잠깐만요, 오빠." 마지막 게임을 막 끝낸 뒤에 전화를 받는 척했다. "지민 언니.  응… 나 잠깐 pc방. 응. 응. 그냥 심심해서. 응. 알았어. 응.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 응. 미안."


"누구야?"

"아는 언니예요."

"이름이 지민이야?"

"네."

"그래? 내 여친도 지민인데. 혹시 oo대학 다니는 지민인가?"

"어? 맞아요."

"진짜? 걔야?"


…걔야?


"맞는데? 이 언니요."


갤러리로 들어가 의도적으로 바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어 씨! 맞네!? 진짜네!?"


거기서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미니를 내게 접근하기 위한 대화의 화제로 삼은 그 놈은, 그저 장단을 맞추기 위해 던지는 내 물음에 더해 묻지 않은 것도 떠들기 시작했다. 에둘러 자리를 옮기자는 의사를 전하여 자연스럽게 pc방을 나왔다. 은근슬쩍 걸어댄 스킨십을 통해 '그런' 여자라는 뉘앙스를 풍겼고, 그 놈도 눈치를 챘을 무렵엔 때마침 모텔이 즐비한 골목에 들어선 뒤였다.


참 불쾌하고도 알기 쉬운 놈이었다. 나를 밑에 깔아뭉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자, 내가 건네는 말은 말로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데 오빠, 요즘 언니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걘 괜찮아. 근데 너 존나 예쁘다." "후후… 고맙긴 한데요. 여자친구한테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닌가?" "신경 써줄 만큼 써주고 있어. 아 됐고, 손 잡아도 돼?" ……이런 식. 약 10m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의 살기가 코앞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모텔 골목을 지나자 놈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내 목적지가 여기가 아니란 것이 발목을 잡는 거겠지. 나는 이런 놈이면 거부할 수 없는 눈빛과 몸짓으로 놈을 애태우고, 맞잡은 손을 간지럽히듯 살살 어루만져 계속 걸을 것을 재촉했다.


걷고 걸어 내가 살던 원룸 건물에 도착했다. 정확히 내가 지내던 그 방에, 지금은 미니가 살고 있다. 대학생이 되어 자취를 하고 싶다기에 나와 남자가 소개해줬다. 이전에는 남자 혼자 소개했다는 것 같다.


"여기 걔 방인데?"


"응. 언니가 기다려. 같이 가자."


"아 왜? 딴데 가."


"오빠가 계속 기대했던 거, 언니랑 같이 해주려고 했는데? 싫으면 가."


씨발로 기쁨을 표현한 놈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콘돔 좀 사오겠다고 놈의 등 뒤에 외쳤다.


전신주 뒤에 있는 남자를 불렀다.


"혹시 이 건물 전체에 방음 처리좀 해줄 수 있어?"

"통째로 안 보이게 할 수도 있어."

"그럴 필요는 없고. 어쨌든 사전 처리 좀 해놔."

"뭘 하려고?"

"보면 알아. 10분 뒤에 올라와."


이렇게 해서 지금이다.








* * *






"꺄아아아악!"


내가 지내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사한 방은, 공처럼 내던져진 나 때문에 엉망진창이 됐다. 


"아 이 씨발년들이 진짜! 야! 너도 얘랑 짰냐? 나 엿먹어보라고 씨발년아!? 어!?"


나는 충분히 팼다고 생각했는지, 놈은 미니에게 향하려 했다. 전혀 아프지 않지만 일부러 아픈 척하며 그러려던 놈의 발목을 잡고, 나는 두들겨 맞게 된 짓을 한 번 더 했다.


"너 같은 놈한테 가랑이 벌려주려고 데려온 게 아니라니까? 그냥 자수해."


등에 발꿈치가 꽂힌다. 주먹은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역시 다리는 다리다보니 이번 일격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안 놔!? 안 놔!?"

"못 놔. 빨리 미니한테 사과하고 자수해."


"미니? 미니?! 뭐 씨발 저 년이 네 미니미라도 돼!? 하긴 저런 년이랑 친구 먹은 거 보니 너도 개븅신같은 년이겠지. 아 씨발 놓으라고!"


"못 놔."


계속 두들겨 맞으면서 미니를 관찰한다.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그러지말라 소리치던 미니는 나와 눈이 맞더니, 소극적으로 이놈을 말리려 덤벼들었다.


"때리지 마!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하루가 멀다하고 처맞더니 드디어 대가리가 맛이 갔냐? 이년이 먼저 나 엿먹인 거 못 봤어? 앙!?"


"때리지 마! 제발!"


"아나 이것들이 쌍으로 아주 위아래에 달라붙어서 지랄을 하네. ㅋㅋ 니들 이러다 진짜 뒤져."


"그만해!"


마음은 안다. 하지만 더 맞아야 한다. 

네가 살의를 불태울 때까지는.


그렇게 두들겨 맞았음에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기에 체력은 쌩쌩했다. 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태클로 놈을 제압… 하려다가 되치기를 재촉하듯 달라붙었다. 본능적으로 놈이 몸을 돌리는 움직임에 맞춰 쓰러져주고, 내 위에 걸터앉은 놈은 안면만 집요하게 두들겨오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맞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오는 아픔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나는 멀쩡했다. 솔직히 말해서 주먹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내 쪽에서 좀 더 세고 무자비한 위력으로 두들겨주길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맞으며 태연하게 생각했다. 맷집이 늘었나? 정말 하나도 안 아프다. 그 남자 주먹은 한 대만 맞아도 개처럼 헐떡거리게 되는데.


좀 더 맞아야 한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비명이 옅어질 때까지. 들리는 비명에 분노가 섞일 때까지. 슬슬 아픔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상처가 미약해지는 긴장감과 현장감을 높인다. 입안이 찢어져 녹슨 쇠 맛이 난다. 시야의 왼편이 좁아져간다. 방금 맞은 코에서 평범하지 않은 소리가 났다. 미니를 본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술이 보고 싶다. 떨리고 있을까? 질끈 물었을까? 여전히 아픔은 없지만 이제는 좀 적극적으로 반응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놈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할 테니까.


"여어. 오랜만인데."


피가 스며 붉어진 시야에 남자가 잡혔다. 내 위에 올라탄 놈 뒤에서, 언젠가 봤던 저승사자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갑자기 나타난 건지, 들어온 걸 내가 몰랐을 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남자는 놈의 어깨에 손을 올려 "천 년 만이구나." 라고 말했다.


다음 순간, 하복부가 가벼워졌다. 놈이 천장에 등을 찧고 냉장고 앞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남자의 손이 내 입을 덮는다. 무언가가 들어오고, 나는 꿀꺽 삼켜 목구멍 아래로 집어 넣었다. 이것으로 몸은 10초도 안되어 맞기 전으로 돌아가겠지.


내가 몸을 일으키는 걸 마지막으로 실내의 소리가 멈췄다. 

미니는 눈만 움직여 나와 남자를 교대로 확인하고서 입을 틀어막던 손을 내렸다.


"아, 아저씨가… 왜 여기에…"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딸을 구하러 아빠가 왔다는 상황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에요?"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냐." 남자가 미니 옆에 걸터앉아 상냥한 손길로 머리를 넘겼다. "얼굴이 이게 다 뭐야."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 생각해 보니 시간 여행자라면 연기력이 뛰어나야겠다 싶었다.


"…계단에서… 구, 굴러서…"


"이마가 찢어진 건 그렇다 쳐도, 굴러서 눈에 이런 멍이 생겨?"


"정말이에요…"


"화낸다."


쓰러져서 신음하는 놈을 노려보면서 남자가 다가왔다.


"…이제 어쩌려고?"


미니는 끝까지 분노하지 않았다. 

난이도가 올라갔다고 생각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먼저 확인해야겠어. 이 상황, 나만 빼면 미니가 저놈한테 죽었을 때의 상황이야? 같은 날이야!?"


남자는 천 년 전 일이라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빨리 떠올리라고 외치며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천 년 전을 더듬는 얼굴이 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끝까지 확신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괜히 물었다. 

저 놈이 남자가 손대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 있었고, 미니는 몇 달 전 미니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만 판단하기로 했다.

오늘, 혹은 내일, 내가 아니었더라도 미니는 죽는 것이다.


미니에게 손을 뻗어 침대에서 내려오게 했다. 신부를 에스코트하듯 이끌어 쓰러져있는 놈 앞에 앉히고, 주방 수납장을 뒤져 식칼을 찾았다.


미니의 등 뒤에 앉아 한 팔로 어깨를 끌어안고 다른 손의 식칼을 쥐여주었다. 이 행위의 의미를 파악했는지, 얼떨떨한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언니…?"


귓불을 깨물고 속삭였다.


"하자."

"뭐, 뭘…?"

"도와줄게. 하자."

"그러니까 뭘 하자는 건데!"

"죽여야지."


목에 입을 맞추고 혀로 핥고서 말했다.


"네 손으로 하는 거야."


저항이 있을 거란 건 예상했으므로 몸으로 등을 덮어 눌렀다.


"사실 언니는 있지. 네가 정말로 싫었어. 아무 조건도 계산도 없이 모든 걸 사랑하는 인간? 그딴 게 있을 리 없잖아. 어떻게 생각해 봐도 내숭이잖아. 너 그런 소리 자주 들었잖아. 정말이지,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한 줄 아니? 좀 좋아하려고 해도 잊을 만하면 개좆빠는 소리나 하니까 얼마나 정이 떨어지던지. ……아가. 이제 알겠니? 이게 현실이야."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가 내숭이라는 거야…"


"아니었다고 할 셈이니?"


"나는… 그게…"


"그래. 좋아. 모두 진심이었다고 쳐. 그래서야? 그래서 욕도 아까운 이런 놈을 사랑한 거야? 응? 그런 거지? 이 남자는 상처 받았을 뿐이다, 환경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얼마든지 괜찮아질 수 있다, 봉사 활동 현장에 나타난 것이 그 증거다, 내가 도울 수 있다, 내가 보듬어줄 수 있다, 그러니까 포기할 수 없다, 내가 옆에 있어줘야 한다…… 야. 네가 무슨 성녀야? 인간이 그렇게 쉽게 바뀔 것 같아? 세상엔 말이지. 너같이 순진한 년을 이용해 먹을 생각 뿐인 씨발 새끼들 밖에 없어. 이 새끼라고 다를 것 같아? 너 알아? 얘 너 없는 자리에서 있지? 네 보지가 얼마나 쫄깃한지, 엉덩이가 탱탱해서 떡감이 얼마나 좋다는지, 그딴 소리 밖에 안 해. 돈도 착착 빌려주니 벗겨 먹을 만큼 벗겨 먹고 버리겠다더라. 그 돈 유럽 여행 가려고 모아둔 거 아니야? 그런 돈을 이 새끼는 지가 하는 게임에나 쓰던데? 아가. 어째서니?"


"뭐, 뭐가…?"


"왜 언니는 안 됐던 거야? 왜 언니를 두고 이런 놈을 골랐어? 그냥 싫었어? 언니 그렇게 맞고 있는대도 화도 안 날 정도였어?"


"언니가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언니 사랑했어?"


어깨에 두른 팔로 뺨을 잡고 나를 보도록 억지로 돌렸다. 떨리는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린다.


"묻잖아. 나는 안 됐어?"


"어, 언니는… 언니니까…"


맞닥드린 상황도 잊고 식칼을 꼭 쥔 모습으로 그런 소리를 한다. 귀엽게스리.


"여자라서?"


대답이 없다. 그것을 대답으로 삼았다.


"있잖아. 언니는 바이야. 양성애자, 알지? 남자도 좋은데 여자도 좋아해. 너같은 아이면 남자보다 훨씬 좋아. 그러니까 이번에 물어볼게. 언니랑 잘래?"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왕 고백한다면 사귀자는 말로 충분할 것을, 괜히 겁주겠다고 헛소리나 해버렸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눈물의 양만 늘었다.


"뭐, 그래. 어려운 이야기지. 언니는 우리 미니 정말 따먹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이렇게나 널 존중해주는 언니 말고, 몇 번이나 강제로 널 따먹은 이런 놈이 좋다면, 그래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하나 더 고백할게. 언니, 사실 너 이용한 거야."


대답을 구하지 않고 식칼을 쥔 미니의 손에 내 손을 가져가 연인처럼 깍지를 끼워 넣었다. 연약한 저항을 강하게 찍어 누른다. 신음이 터져나온다. 이용했다는 게 무슨 말이냔 물음에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라고만 말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가 아니라 "있었어."라고 정정해야 하나 한차례 고민했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제 볼 수는 없으니까. 

볼 수 있다 해도 찾아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이제 하자."

"언니! 이러지 마!"


안 된다. 이것 밖에 없다.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폐하."


폐하라는 울림에 남자가 눈을 부릅 떴다.


"…뭐?"

"놀란 척 그만 하시고 좀 도우세요."

"뭘 도와?"

"와서 이것 좀 똑바로 세워봐요."


남자는 머뭇머뭇 다가와 쓰러져있는 놈을 냉장고에 기대게 만들고, 내게 확인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목을 잘 보이게 고개를 젖혀달라고 부탁한 나는, 멍청하게 눈을 껌뻑대는 폐하를 물러나게 하고 손에 힘을 줬다.


"언니!"


"내숭 그만 떨어." 미니의 등에 더 밀착한다. "죽이고 싶잖아."


"아니야! 싫어! 그만해!"

"하자… 응?"

"안 돼애!"

"네 손으로 하는 거야."

"그만해! 그만!"


"또 말해야 돼? 널 이 꼴로 만든 놈이야. 널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한 놈이야. 네 친구들이 네 문제로 나한테 얼마나 연락해댔는지, 네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네 대학 동기들이나 선배들이나 교수들은 또 얼마나 걱정했는지… 너 모르지? 성적은 떨어져, 강의는 안 나가, 모아둔 돈은 바닥 나, 친구들 연락은 다 씹어, ……다 이 놈 때문이잖아."


"아니야! 내가 선택한 거야!"


"으응… 아니. 아니야. 이게 문제야. 자." 목도 찌르는 부위 나름이라고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탄탄대로였던 네 인생길 다 뒤집어 엎은 놈... 살짝만 힘 줘서 여기 찌르면 끝장낼 수 있어. 응...? 하자?"


"싫어!"

"죽여."

"싫어!!"

"죽여."

"아아! 아아아!"

"죽여!"

"싫어엇!"

"죽이라고!"


푹.

콸.

콸콸.

푸슉푸슉.


꼭 목으로 웃는 것 같네, 라고 생각해서 웃어버렸다.


맞잡은 손도, 밀착한 몸도, 함께, 붉게붉게 물들어갔다. 


하필 이런 때에, 술을 가르쳐주던 때가 떠올랐다. 

이런 첫경험은 선사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선다. 맥동에 맞춰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맞고 있는 채로, 미니는 고장난 것처럼 죽어가는 놈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남자 앞에 서서 얼굴에 튄 피를 닦고 뒤처리를 부탁한 다음, 방에서 나와 귀가길에 올랐다. 어둠에 뒤덮혔어도 잿빛이 가시지 않은 하늘에는, 구름 뒤에 숨은 달이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두어 시간 걸어서 집에 도착하자, 가운 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넓직한 거실을 가로 질러 주방으로 가는 동안에도 시선을 주기는커녕 목석마냥 움직이지 않길래, 나는 온 더 락으로 위스키를 내리 네 잔 마시고 침실로 갔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스마트폰으로 오후 3시를 확인하고 주방으로 가서 또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위스키를 두 잔 마셨다.


마지막 잔을 마셨을 때 남자가 게스트 룸에서 나왔다.


"여기에 데려왔다. 애 부모한테는 말해뒀어."

"굳이?"

"어느 부분의 굳이냐?"

"둘 다."

"그럼 현장에 버려두리? 그 아이 부모랑은 아는 사이야."

"그건 알아."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무시하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은 타이밍에 남자가 들어왔다.


"묻잖아."


"뭔 짓을 해서 막았든, 원래 죽는 날에서 일주일 안에 죽는다고 했었지?"


"그래."


"그럼 일주일 동안 아무 일 없으면 괜찮은 거네?"

"아마도."

"그럼 일주일 뒤에 말해줄게."

"장난 칠 때가 아니잖아."

"물론 아니지. 어쨌든 기다려."

"뭘 기다려! 삼 년에 이어서 또 일주일이야!?"


"존나 어이없네. 이보세요. 당신이 심심하면 해댔던 짓이잖아요. 나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어요?"


"너 지금…"


"ㅋㅋ 참으세요. 너 해오던 짓에 비하면 삼 년이랑 일주일이 기다리는 축에 끼겠니?"


이불을 이마까지 당기고 손만 꺼내 꺼지란 신호를 보냈다.


100초는 거뜬히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일주일 간, 한 집에 있으면서도 남자와 나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배를 채우거나 취하기 위해서 방을 나서면 거실에 앉아만 있는 남자가 있었고, 없는 경우엔 게스트 룸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다 게스트 룸 앞에서 남자와 눈이 마주치면 들어가지 말란 시선을 보내오기도 했다. 


시체를 만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날, 늦은 새벽부터 남자는 나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잠이 올 리 없었기에 뜬 눈이었던 나는 즉각 불쾌하게 반응했다.


거실에 자리를 잡고 남자가 먼저 말했다.


"살았어."


나를 보고 말했지만 내게 말한 게 아니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 죽을 가능성은?"

"몰라. 하지만…"

"내일은? 모레는? 글피는? 1년 뒤에는?"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어. 분명히."

"왜? 너는 몇 번이고 일주일도 못 살렸어서?"


드리운 음영이 기미같은 눈으로, 남자는 무겁게 끄덕였다.


"어떻게 안 거야?" 남자는 조금 감탄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방법이 정답이란 걸, 어떻게 알았어?"


"그런 방법이라니?"


나는 남자를 고문하는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 아이 손으로 죽인다는 방법 말이야. 네 도움을 받았다지만."

"직감."

"직감? 직감이라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납득하려는 눈깜빡임을 보였지만, 당황스럽단 구김은 눈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다는 당신이, 유일하게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 그것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


"미니 말로는, 당신 참 좋은 사람이라던데? 그 아이한테는 좋으신 분이었나봐? 거기서 착안했지. 그렇게 아끼는 아이를 망가뜨리는 방법은 떠올리지도, 떠올릴 수도 없었을 거라고. ……씨발 쓰레기 새끼가 짜증나게 말이야."


"뭐냐. 갑자기."


"다시 들어야겠어."


남자 앞으로 다가가 다리에 힘을 줘 팽팽하게 만들었다.


"당신, 저 아이는 나를 살리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어."


"그게 어쨌다고?"

"진짜야?"


벌어진 남자의 다리 사이 공간에 무릎을 대고 몸을 기울였다. 


"왜 이래."

"묻는 말에나 대답해. 진심이었어?"

"그래."

"저 아이는, 그저 내 커뮤니케이션 능력 회복 수단에 불과했다. 맞아?"

"그래. 우리 계약을 위해서."

"그럼 미니는 당신한테도, 나한테도 이용 당한 거네?"

"그렇게 자조적일 필요는 없잖아."


"적극적으로 미니를 쪽쪽 빨아먹었는데 어떻게 그래? 정말로 행복했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그래서 이렇게 정신 멀쩡히 사지 멀쩡히 서 있는 건데. 뭐 어쨌든, 당신은 그저 도구 그 이상으로 보지 않은 거네? 그렇게 살리려 했을 정도로 아끼던 아이를?"


"…"


"맞아?"


"맞아."


"똑바로 말해. '나는 그 아이를 치료약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 해서 너에게 사용했다.' 자, 리핏."


"나는 그 아이를 치료약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했다. 그 치료약은 너에게 사용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공격적인 얼굴을 했다.

한계였다.


"이 씨발놈아!"


남자를 덮쳐 소파 째로 쓰러뜨리고 되는 대로 팔을 휘둘렀다. 손톱, 손가락, 손바닥, 팔꿈치, 이빨, 이마, 엉덩이. 사용할 수 있는 건 다 사용했다. 처음엔 저항 않던 남자는 슬슬 얼굴이 망가져 가자, 혀를 차더니 반격해오기 시작했다.


10초도 안 되어 제압 당한 나는, 진정을 못하는 고양이마냥 으르렁대며 등에 올라탄 남자를 계속 노려 보았다.


"이 개 씨이이발놈아!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새끼야! 넌 내가 무조건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씨발 새겨 들어라! 내가 죽인다고! 알겠어!?"


"보너스."


남자는 조소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뭐?"

"계약 보수.이번 건 잘했으니까 보너스 줄게."

"보너스? 잘했어!? 그게 잘했다고!?"


"잘한 거야. 뭐, 내가 너 비난이라도 할 줄 알았어? 아니. 너는 칭찬 받아 마땅해. 최고였어."


등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약해져갔다.


"자, 원하는 걸 말해봐. 내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는 뭐든 들어줄게. 지니에게 소원을 빌듯이 말하면 돼. 그 뭐냐, 우주의 비밀을 알려달라, 목성에 가고 싶다, 마리아나 해구 밑바닥에 맨몸으로 서보고 싶다, 같은 터무니 없는 건 안 돼."


그렇다면 정해져 있다. 남자를 치우려 등을 들썩이며 입에 분노를 담았다.


"너를 알고 싶어."

"오픈 중이라니까. 그런 걸로 보너스를 허비하지 마."


피하려 든다. 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다 말하라는 소리야. 말하기 싫은 걸 포함해서 사소한 것, 내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다 말해. "알 필요 없을 텐데." 라고 어물쩍 넘어가지 마."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건데?"

"널 죽일 거거든."

"그럼 죽이게 해달라고 하면 될 것을."


압박을 멈추고 일어선 남자는 양팔을 반만 펼쳐 아리송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tv가 켜졌다. 몸을 일으켜 남자가 막 앉은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이른 오후에 재방송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며 내가 말했다.


"고문할 거야."

"오호라."


"당신은 육체를 고문한다고 눈 한번 깜빡할 인간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네 정신을, 뇌를 고문해야지. 의자에 묶어두고, 뇌 구석구석, 네가 좋았고 싫었을 모든 기억에 침을 뱉을 거야. 제발 그만하라고 빌 때까지, 그럴 기미가 안 보여도 끝까지 고문하고 고문해서 죽여달라 빌 때까지 고문할 거야."


"추억을 고문의 재료로 제공해달라니. 지독하구만."


"너만 하겠어?"


"아니. 내가 너보다 못하지. 뭐, 좋아. 그런 걸 보너스로 바란다면 그래줄게. 서비스로 보너스에 하나 더 얹어주마."


보수에 보수를 더해주는 그 아량에 황송할 따름이었기에 비웃어주었다.


"앞으로 언젠가, 또 무너질 것 같으면 말해. 그때는 내가 직접 너를 죽여줄게."


"죽게 뒀으면 될 것을."


"그래서야 평범한 자살이지. 분명 너는 죽어가면서 후회했을 걸. 고작 이 정도 아픔 밖에 안 되는 거냐고. 기대에 못 미치는 고통에 후회하며 죽어간다니, 너무 모양 빠지잖아. 그러니까, 너는 상상도 못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줄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잘 알거든."


서로의 죽음을 약속한 것을 끝으로 대화를 마쳤다.

침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밤을 지나 새벽이 되어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게스트 룸에서 웅크리고 있을 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서이기도 했지만, 한 번 쏟아냈음에도 남자를 향한 분노가 오전과 다름없는 크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해가 뜰 때까지를 거쳐 그 원인을 찾아냈다. 이번에는 내가 소파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거칠 게 깨웠다.


"너도 똑같이 실패했던 주제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는 남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폐하를 왜 살리지 못했느냐고 감히 나를 비난해?"


"뭐야… 새벽부터…"


"너도 실패해 왔으면서 내 실패를 비난했느냐고 이 개새끼야!"


남자는 쩍 하품하고 눈을 비비고서, 눈을 깜빡여 나를 확인하듯 들여다 본 다음 말했다.


"나는 네 실패를 비난했던 게 아니야. ……성공이나 실패와 관계없는 짓을 한 걸 비난했던거지. 인류 최후의 방주인 오르카를 대학살의 현장으로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는데?"


"너도 봤을 그런 모습의 우리 폐하가, 핏물에는 반응을 했거든."


멱살을 잡혀 몸이 남자 쪽으로 당겨졌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모양새로 보이게끔 만들고 싶었단 거냐? 네 폐하가 무슨 네 개인 소유의 인형이라도 돼? 단순히 시각적인 자극에 반응했을 뿐일 텐데, 그 따위 소리를 변명이라고 해?"


나도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변명? 시각적인 자극? 아니. 폐하도 즐겼어. 인형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다웠어. 그거면 된 거야."


어제와 다르게 어느 한 쪽도 물러나려 하지 않는 흐름으로 갈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팬텀을 꺼내들 정신 상태였고, 남자도 내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걸 익히 안다는 듯, 할 테면 해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게스트 룸이 열리는 소리가 깼다.


"일어났니?" 남자는 눈치 빠르게 손을 멱살에서  내 등으로 옮겨 당겼다. "하하! 아저씨는 이제 막 모닝 키스 받던 중이었다!"


미니가 보지 못할 각도에서 얼굴만 가까이 하여 입을 맞추는 척한 남자는, 코앞에서 장단에 맞추란 시선을 보내왔다.


미니의 다음 말로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살인자들…"


"몇 달 만에 언니 집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게 뭐니."


남자를 밀치고 몸을 일으켜 미니 쪽으로 돌았다. 내가 입었었던 분홍색 파자마 차림의 미니는 '살인자들'이란 말에 담은 것이 그랬 듯, 원망 가득한 얼굴로 나와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화다운 대화는 할 수 없었다. 제 남자친구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사하고, 건강을 우려하는 말조차 듣고 싶지 않다는 한마디에 모두 튕겨나갔다. 사실 나도 미니가 들어줬다한들, 그 놈을 죽이는 방법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어떻게 포장한대도 직감 같은 것에 설득력이 깃들 리 없지 않은가.


당장 집(본가 말고 자취방) 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미니를 거의 제압하듯이 게스트 룸에 처넣고, 내 방과 이어진 테라스로 남자와 함께 나가서 담배를 물었다. 하늘의 색감이 비슷해서였는지, 머리 위로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하늘에서 뻗어나온 실처럼 보였다.


"혹시 말이야." 두 번째로 흡입하고 내가 말을 꺼냈다. "당신, 인간의 기억을 지운다던가 그런 짓은 못 해?"


"짓이 뭐냐 짓이." 눈을 찌푸려댄다. "능력이라고 하면 좀 좋아?"


"기억을 요래조래 뒤집어놓는 도구는 없어? 그런 바이오로이드는 없나?"


"네가 말하는 '기억을 지운다.'가 도대체 뭔데?"


기억을 주제로 하는 몇몇 영화나 드라마를 언급하며 핀잔을 주자, 남자는 신기하단 얼굴을 했다.


"거 참 영화 좋아하네."

"돼? 안 돼?"

"그런 영화들처럼은 불가능해."

"현실적으로는 가능하단 소리?"


"그런 걸 기억을 지운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만 되면 어느 정도는."


"당신 답지 않네. 되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해."

"돼. 그래서? 쟤 기억을 지워달라는 거야?"

"응. 그게 내 두 번째 소원."

"내가 언제 원하는 걸 두 가지나 들어준다고 했어?"

"지니한테 빌듯이 말해보라며. 지니는 세 가지 들어주잖아."

"허어…"


다음 담배를 꺼내 입에 가져가려는 남자의 손을 잡아챘다.


"안 되면 소원을 바꿀게요. '알고 싶다.'에서 '저 아이의 기억을 지운다.'로. 그럼 됐죠? ……폐하."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저 아이가 그렇게 좋아?"


내 눈을 제 팔목에 감긴 손과 교대로 쳐다보고 남자가 말했다.


"너 왜 자꾸 다 알면서 물어? 내가 거부 못할 거 알면서 저 아이 먹으라고 던져 준 주제에. 씨발 안 되면 안 된다고 해."


"알았어. 지워줄게. 둘 다 들어주마. 그러니까 첫 번째 소원은 수정할 필요 없어."


손이 뿌리쳐졌다. 손목에 통증이 일어 어깨가 안으로 말린 사이에, 남자가 테라스에서 나갔다.


침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날 오후가 지나 남자와 거실에서 마주쳤다. 앞으로 최소 이틀은 걸리며, 그때까지는 게스트 룸은 물론이고 근처에도 얼씬대지 말라고 남자는 말했다. 그냥 잘 때 외엔 나가있으라는 소리를 길게도 했다.


겨울 바람에 오래 노출되어도 거뜬한 차림을 하고 시간을 들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미니와 함께 할 때는 가능한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세계의 일면이, 지금까지 나를 기다렸다는 듯 눈 앞에 모습을 보여왔다. 남자와 함께 걷다가 난데없이 얼굴을 얻어 맞는 여자. 여자에게 형을 선고 받듯이 푹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비난 당하는 남자. 칭얼대는 아이를 욕으로 다스리는 부모.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것을 피하다 보니 인간들이 찾지 않는 곳을 걸어다니게 됐다. 고물이 산처럼 쌓인 야적장, 3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오는 정류장, 몇 년은 인간의 손을 타지 않아 잡초로 덮힌 공원, 조림 대상지로 선정 된지가 언젠데 밑둥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벌채 적지. 그런 곳에도 인간이 꼭 한 명 이상은 있었다.


돌고 돌아 도착하게 된, 자살 장소로 두 번이나 채택된 재건축 현장을 걸었다. 그곳은 21년의 겨울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건물이 들어서지 않게 된 것이겠지. 낮보다 밤이 더 나은 장소는 몇 없지만, 얼핏 폭격을 당한 것으로 착각될 이곳은 밤에 잠기는 것이 그나마 나을 듯했다.


빌라 근처에는 고양이가 많았다. 무리 지어 다니는 녀석도 있었고 단신으로 다니는 녀석도 있었다. 서로 크게 경계하지는 않은 것으로 대장격인 녀석인 걸 알 수 있었다.


호랑이도 재규어도 퓨마도 내게는 덩치 큰 고양이에 불과했기에 녀석들과 일시적으로나마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쩌다 발이 닿은 김에 녀석들과 놀아줬고, 녀석들도 나와 놀아줬다. 노하우를 하나 공개하자면 인외의 존재, 특히 고양이과와 소통할 때에는 접촉한 순간부터 맺어지는 암묵적인 양해를 깨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소통의 가능 여부와 관계없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설령 서로가 털어놓고 싶은 사정이나 고민이 많다는 기운을 뿜더라도.


깊은 밤까지 그러고 있으니 몸을 날리던 당시가 떠올라 버려 자리를 떴다. 그와 동시에 잠깐의 즐거움에 상승한 기분이 급강하 한 온도에 맞추듯 떨어져 내렸다. 


추위에 떨 만큼 떠돌 필요는 없다. 잠을 자는 장소란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없는 곳이라지만, 일단은 돌아갈 곳이 있다. 돌아갈 길도 안다. 분명히 안다. 그런데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잊어 먹었다. 귀소 본능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공간에 떨어진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도심의 불빛은 외계의 것이며, 내가 서 있는 이곳만이 투명한 막으로 쌓여 모든 것과 차단 되어버린 듯했다. 


모든 것과 동떨어진 기분으로 또 걷다 보니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처음도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그럼에도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다.


나는 여태껏 잃어왔다. 900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조금 뻔뻔하게 굴면 그렇게 포장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잃으려 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의탁할 곳을 잃으려하는 것이다.

이용해왔을 뿐이었다고 여겼던 것들을.

그러니 아쉬움 따윈 없어야 한다.


하지만, 어쩌라는 거지?

어찌할 도리 없이 몸을 저는 나란 년을, 어떻게 해야 좋다는 거지?






* * *






이틀이나 밖을 떠돌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에 수분을 먹혀 건조해진 탓에 머리부터 발까지 전부 빡빡했다.


가볍게 샤워하고 큰 컵으로 물을 연달아 마셨다. 테라스로 나가 담배나 피울까 싶던 차에 게스트 룸이 열렸다.


"들어와."


반절만 몸을 빼고 손짓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게스트 룸을 열어둔 채 안으로 사라졌다.


미니는 잠들어있는 건지, 침대 위에 이틀 전의 파자마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빛이라곤 탁상 조명 뿐인 어두운 방이었음에도 윤기를 발견할 수 있는 머리칼이 시트 위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많이 회복됐지만 작은 멍과 상처가 남아있는 얼굴은 평온하여, 어떤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남자가 말했다.


"마지막이야."


나는 문 쪽으로 반만 몸을 돌리고 물었다.


"당신이 그 마지막이란 걸 하면, 기억이 지워지는 거야?"


벽에 그려진 그림자의 머리가 아래로, 위로 움직였다.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뭔데?"


사실 반응하지 않으려 했다. 

언제든, 남자의 설명은 들어서 기뻤던 적이 없었으니까. 안 좋은 상황에서, 혹은 안 좋은 상황만 골라서, 안 좋은 사실만 밝힐 뿐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남자의 기색으로 보건대, 마지막을 남겨둔 이 상황은 제법 오래, 내가 돌아오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기억은 지워질 거야. 영화같은 방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럼 지워."


몸이 잡혀 돌려졌다. 어깨에 남자의 손이 얹혀져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끝낼 문제가 아니야." 남자의 얼굴은 조명이 닿지 않은 곳의 어둠보다도 어두웠다. "현실적인 기억의 제거, 소멸, 상실… 뭐가 됐든, 그것이 의미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뇌 손상이야. 이 이틀 간, 나는 특수한 환경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특수한 방법을 통해 이 아이의 뇌를 자극했어. 괴롭혔어. 고문이라고 해도 좋아. 외상을 통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아니,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웬일로 화를 안 내는구나."


"내가 부탁한 거니까."


"그래… 어쨌든, 자극에 따른 뇌의 전기적 신호를 살펴가면서 신중하게 작업했어. 그 결과 해마와 대뇌피질에 약간의 결손을 줄 수 있었지. 통상적 각성 상태에서 관찰 할 수 있는 뇌 손상으로 인한 신체 반응의 결손은 없었고,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역행성 기억 상실로 보이는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어. 무슨 소리냐면…"


"작업 이전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거잖아."


"맞아."


이 아이를 그런 식으로 이용한 주제에 심각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던져줬다는걸 깨달았어도 싹싹 먹어치운 나처럼 뻔뻔하게 굴면 될 것을.


"재주도 좋네. 자신 없다는 얼굴을 한 게 이틀 전인데 말이야."


"우리 마키나랑 엔젤은 그런 것도 가능하거든. 기억 제거 같은 특수한 사항을 목적으로 두면 성공률은 낮지만…"


"됐고,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건데? 사지 멀쩡하게 옛 기억만 사라지는 거 아니야?"


"문제는, 분명 네가 잊기를 바라는 그런 기억만 사라질 가능성이 적다는 거지. 성격이 변할 가능성도 있어. 인간 개개인의 특성은 고차적인 정신 기능의 영역이야. 공부를 잘한다, 선량하다, 생각이 많다, 이유없이 악하다 등등. 이러한 특성은 뇌 전체가 반응해야 나타나. 특성을 포괄하는 성격도 마찬가지지. 무려 두군데에 결손을 줬어. 분명 변하게 될 거야."


"괜찮아."


"네가 아는 이전의 그 아이는 사라져."


그래도 괜찮다.

기억을 지우지 않았더라도 똑같았을 테니까.


그날을 기하여 그 아이의 모든 것이 변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확인할 것도 없이, 단언할 수 있다. 

성녀가 평범한 인간이 된다. 됐다. 됐을 것이다.


사라진다.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짓을 하게 한 나같은 건 잊고, 본래 누렸어야 할 성공적인 사랑과 행복의 궤도에 오르면 된다.


"마무리해줘."


남자는 끄덕이고 내게 나가있을 것을 부탁했다.


남자가 일을 마칠 때까지 게스트 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10분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푸른빛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도 없었던 눈물을 조금만 흘려버리고 말았다.


15분 뒤에 게스트 룸에서 나온 미니는 마지막 기억으로 '고등학생. 1학년. 봄.'을 가지고 나타났다. 남자는 일화 기억, 즉, 고등학교 1학년 봄 이후의 에피소드만 사라졌을 뿐, 의미 기억은 남았기에 대학 강의를 따라가는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정말로 다행이다.

피에 젖은 그날이 사라져서 정말로 다행이다.

나와 함께 했던 그 시절만이 사라져서, 정말로 다행이다.


나는 잊고 남자만은 기억하고 있던 미니는 장난스레 "나 납치 당한 거예요!?" 라고 그 시절처럼 사랑스럽게 애교를 떨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언니! 안녕하세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대답 없이 침실로 향했기에 그런 흐름이 되어버렸다.


"물어보자."


다시 돌아와 내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계약. 지속할 거냐?"


"할 거야."


"그러냐. 묻는 게 바보 같았군. 그러기 위한 아이였는데 말이지."


"근데 왜 물어?"


"분명 계약을 그만 둘 정도로 내가 싫어졌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네가 예라고 대답하면 시원하게 정리할 생각이었어."


"지속할 거니까 꺼져. 혼자 있을 거야. 그리고, 너는 이 이상 싫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싫어하고 있었어."


"조언 하나 하지."


"무슨 조언?"


"앞으로 네 폐하 생각은 그만해. 계약 기간 동안에는 머릿속에서 배제해."


어조는 빼고 말의 내용만 보면 조언이 아니라 경고였다.


"무슨 개소리야."


"앞으로는 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으면 하거든.  네 폐하는 그러는데에 방해잖아. 3년 전은 일단 ok였다 뿐이지, 만족도가 낮았어. 그리고, 네 정신 건강을 생각한다면 마냥 싫은 이야기도 아니지. ……네가 이 계약을 통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폐하와 관련된 것.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폐하를 위해서 폐하를 배제하라는 거야."


"좋아."


"의, 의외로 시원스럽구만…"


"전에 말했던 보너스를 제대로 지키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럴게."


"나를 알고 싶다고? 알았어. 걱정 마. 바라는 대로 사소하고 쓸데없는 것까지 다 말해주마. 뭐 대단한 거라고."


"그 대단한 걸 알 필요 없다면서 매번 피하셨잖아요, 폐하."


"오냐. 안 피하마."


"그나저나 폐하와 관련된 게 도대체 뭔데요?"


"그건 비밀이라니까."


뭐가 좋은지 남자는 싱긋 웃고 방에서 나갔다.

직후 막 이불을 덮으려는 차에 다시 문이 열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많이 고문 재료를 모으고 싶다면 나를 떠올리도록 해."


"뭐요? 떠올려요?"


"응. 지난 시간 너랑 함께 했던 나. 잘 떠올려 봐. 재료로 삼을 만한 게 굉장히 많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오늘은 마지막이라며 손을 흔들고 방 문을 닫았다.

어쩐지 들려오는 걸음 소리에 묘한 흥이 섞여 있었다.






* * *





남자야 그렇고, 미니에 대해서다.


고등학생 1학년으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였던 미니는, 이상을 감지한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대학에 적응해갔다. 기억이란 연상할 수 있는 요소만 있다면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니까.


다만, 주변에서 말하는 금발을 가진 인형 같은 언니에 대해서는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매번 그 언니는 어떻게 됐어? 요즘은 안 만나? 같은 소리를 들어도 그런 언니랑 자신이 아는 사이였냐며 되려 물었다는 것 같다. 


그날 잠깐 본 모습으로 보건대, 기억 쪽은 지워졌으면 하는 부분만 지워진 듯해서 안심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듣기로는 대학교 3학년이 된 무렵부터 주변에서 성격 장애를 의심할 정도로 사람이 변한 모양이라, 부모님으로부터 진지하게 병원에서의 상담을 권유 받았다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미니라면 부모님의 그런 권유를 걱정끼치지 않겠다는 이유로 흔쾌히 승낙했을 것이지만, 아니, 애초에 그런 권유를 받지 않았겠지만… 변해버린 미니는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여겨 노발대발하며 자립을 선언했다나.


꽤나 다혈질이 되었다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뿐, 어디에서도 천사 소리를 듣는 선량한 인간인 것은 그대로였다고 한다.


그렇게 2045년.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시간을 보내다가 누구도 예상 못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는 것 같다.


'언니가 보고 싶어.'


그렇다. 잘못 말한 것이 아니다. 2045년. 그녀는 2045년에 자살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미니와 이별하고 2년. 나는 남자와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했다. 나름대로. 사실 성실했다기 보다는 남자의 요구가 너무 쉬운 것들 뿐이었기에 '아르망 추기경'처럼 반응해주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장장 2년간, 남자는 매번 거의 같은 것들을 요구했다. 카페에서 놀기. 보드게임장에서 놀기. 대형 서점에서 시간 죽이기.(따로 떨어져 있었다.)산책하기. 갓 개봉한 영화 보기.(이미 다 본 것들이다.) 드라이브 하기.(매번 같은 코스였다.)… 일일히 거론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별 것 없는 것들까지.


그러면서도 약속한 고문 재료의 제공 건에 관해서는 아주 열받는 태도로 일관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까지 다 말하라고 했다지만, '좋아하는 과일은 사과, 딸기.' '좋아하는 동물은 고양이.' '싫어하는 건 너.' '특히 네 어두컴컴한 부분.' '좋아하는 음료는 커피.' '싫어하는 술은 소주.' …이 따위, 재료로 삼을 수 없는 것들을 제공 받았다.


그런 흐름이 계속 되자 결국 나는 폭발했다. 리리스를 꺼내 냅다 쏴버린 적이 있었고(물론 못 맞췄다.) 방탈출 카페에 갔을 때는 하라는 탈출은 안 하고 칼부림을 한 적도 있었다. 남자는 고작 1년도 못 버티냐고 한소리 했지만 내게는 그 만큼이나 참아준 게 기적이었다. 


그러다 현재, 2025년 가을이 되었을 때 남자가 말했다.


"그 아이 독립했다더라. 자취한대."


남자는 드라이브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 입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른 곳에서 자려는 것이다. 요 2년간 제 집인 이 아파트에서 잔 날은 다 합쳐서 10일도 안 된다.


이 때는 그 아이가 독립을 선언하게 된 계기를 몰랐으므로 그저 '2년이 넘어도 죽지 않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운명같은 결말이 깨졌음을 기뻐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 * *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 아이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면서, 왜 폐하의 죽음은 막지 못했지?


거듭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다. 진짜 살리고 싶은 사람은 900년을 넘게 살리지 못하고 더는 볼 수도 없게 됐는데, 900년이 넘어서야 만난 아이는 3년만에, 그것도 한 번에 살려?


납득할 수 없다. 불공평하다. 진짜 살아야하는 것은 그런, 이용했을 뿐인 아이가 아니라 폐하여야 했다. 목숨엔 경중이 없다고 하는데, 개소리다. 정말 중요한 목숨이 있고 덜 중요한 목숨이 있고 개똥 취급해도 상관없는 목숨이 있다. 그 아이의 목숨은 덜 중요한 목숨이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가 않아서 그날은 거나하게 마셨다. 그래서 말상대가 필요해진 건지 몰라도, 남자를 못나가게 하고 맞은편에 앉혀서 내가 느낀 그대로를 말했다. 억지로 듣게 했다.


"상태가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위스키를 물 마시듯 하는 나를 보고 질린다는 얼굴로 남자가 말했다.


"아라 드께 마래!"


"그 아이를 구할 방법을 직감으로 알았다며. 오르카에서는 그런 직감을 발휘할 상태가 아니었던 게 아니냐는 거지."


"너… 지굼 나 위로애? 실패한 게 이해가 안 돼따고 한 새키가? 왜 맨날 마리 달라…? 웅…?"


"자라…"


압수라며 위스키병을 가져 갔다. 리리스를 전탄 발사해서 도로 가져왔다.


"내나!"

"이게 미쳤나!"

"쒸바… 져까는 소리 하네… 직가므?"

"그래. 직감."


위스키를 따르는 나를 보며 남자는 직감이라고 몇 번이나 혼자 중얼대더니, 재수없게 웃었다.


"왜 쳐우서."

"진짜 직감이었을까?"

"머어?"

"궁금해져서. 그 아이를 살린 게 과연, 그저 직감이었을까?"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잭 다니엘스, 보모어, 라프로익, 야마자키… 진열장에 들어있던 위스키란 위스키는 다 마셔버려서, 냉장고에 쟁여둔 맥주를 꺼내려고 일어서자 남자가 어깨를 감싸 부축해왔다. 


"자라."


"멀 자 씨바라! 내 오늘… 저 쒸팔년들 다 해치운다."


"취했잖아! 아까부터 혀 풀렸어!"


"안 취해써 개색키야! 나!"


"아학! 그만!"


"너 지굼 만져써!? 가슴 만져써!? 씨팍새키야. 나 머리는 멀쩡해. 다 기억하꺼야. 그러니까, 웅? 내일 봐!? 넌 디져써…"


정말로 머리는 멀쩡했다. 내일 뒤졌음을 선고한 다음 순간에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불에 지도 그리지 마!"

"멀 그려 미친너마! 내가 애야!?"

"그린 적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퍽이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못 마시게 하려고 별 소리를 다한다.


……살렸든 못 살렸든, 하나만 인정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살린 그 아이의 목숨과 폐하의 목숨은 똑같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된다.


인정해버리면, 멸망 전에는 널려있던 그런 식의 죽음과 폐하의 죽음이 같다는 소리가 된다. 죽음의 일상성이, 비일상적인 세계의 주민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게 된다. 인류 최후의 희망이 몇 번이고 겪은 그런 끔찍한 죽음도, 일상적인 죽음과 같다는 것이 된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목숨에는 경중이 있다.


도대체, 머릿속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잠들기 전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사랑했던 존재들의 목숨을 저울에 올리다니. 그 누가 가능한 짓이겠는가.





* * *





다음날. 자랑스럽지 않게도 이불에 지도는 물론 점 하나 그리지 않고 일어난 나는, 적당히 내 몫의 아침만 만들고자 주방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남자가 다가와 내 것은 어딨냐고 묻더니, 아침은 안 먹어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사라졌다가 캐리어를 들고 나타났다.


"짐 싸."


숙취로 머리가 울려서 그 말과 캐리어를 잇는데에 시간이 걸렸다.


"여행 갈 거야. 빨리."


카페나 드라이브 반복에서 벗어나, 이제야 버킷리스트다운 뭔가를 하려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저 아침을 만들었다. 빨리 짐 싸라는 재촉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묵묵히 식사를 했다.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이제 봄이네요. 

따로 난방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확 풀린 게 피부로 느껴집니다.

벌써 다음달이면 꽃망울을 볼 수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납니다.

시간 참 빨리 가네요.



스토리 완결까지는 한 4~5편 남은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