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집



아직 해가 지기엔 조금 시간이 더 지나야 하는 늦은 오후. 그러나 그날 하룻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번째 인간은 특히나 심하게 피로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이 세계로 넘어와서 발견된 이후부터 오늘까지 도저히 힘을 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몸이 무뎌질 찰나에 기지를 발휘하여 겨우 블랙 리리스를 사살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으읏...!!"


"괜찮나? 그냥 내가 부축해주겠다."


"...신세 좀 지지..."


"이봐 감마... 우린 지금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고 있는데...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맞아. 대체 왜 우릴 구해준거야? 그리고 우리가 여기 있었던건 어떻게 알고?"


"...이 대답은 너희쪽 인간이 기운을 좀 차린 다음에 다 같이 얘기를 해야겠군."




혹시나 자신을 감시했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으로 두번째 인간은 섣불리 메이와 레오나에게 이 일을 설명을 해줄수가 없었다. 감옥 안에서도 독방에 감금되었고, 도망치는 와중엔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야했기에 설명해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적도 불분명하다면 우린 더는 따라갈 수 없어."




레오나가 그렇게 멈춰섰다. 레오나 입장에선 바로 3일 전까지만 해도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들을 죽이려했고, 실제로 발할라 인원들중 일부가 그들의 손에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날 따라오지 않는다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꺼지? 완벽한 비무장 상태에서 이 외딴 섬에서 뭘 할껀가. 나무뿌리라도 캐먹을껀가?"


"그건..."


"방금 전에도 말 했지만. 그 이유를 비롯해서 모든건 내일 이 인간이 기운을 차린 다음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해주도록 하지. 지금은 그냥 잠자코 따라오는게 나을꺼다."


"저기... 베라 언니... 나 너무 힘들어..."


"옳지 옳지 알비스... 조금만 더 참아..."


"...알았어... 오늘은 일단 신세 지도록 하지... 알비스?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렴?"




그렇다고 해서 레오나가 여전히 살아남아서 자신을 따르고 있는 잔존 발할라 인원들까지 무시할수는 없었다. 어린 알비스가 베라에게 부축을 받는걸 모른 척 할수 없는 레오나였기에, 일단은 레모네이드 감마를 따라갔다.




"메이 대장님... 저 감마라는 자를 믿을 수 있나요?"


"모르겠어 실피드... 하지만... 저 여자가 하는 말이 지금 당장은 맞아... 인정하긴 싫지만... 오르카에서 장비를 뺏긴걸 넘어서 아예 다 부숴버렸잖아... 지금 우린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어..."


"3일 전엔 우릴 잡아먹으려 들다가 갑자기 이렇게 구해주고는... 병 주고 약 주는건지..."





둠 브링어도 발할라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기를 들이대면서 싸웠고 발할라는 자매들까지 그들의 손에 잃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것 역시 사실이었기에 지금은 그저 감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도 오르카 기술부에 의해 모든 장비들이 몰수되어 파괴되었기에 두 발로 직접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

.

.



얼마 후, 숲 반대편을 지나 다른 해안으로 나오자, 해가 지는 노을과 함께 포세이돈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함선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앗! 필승! 감마님! 멀린님! 무사히 돌아오신걸 환영합니다! 그 분들은...?"




배의 입구 앞에 도착하자, 해군 근무복을 입고 현문당직을 서고 있는 마이티R 개체가 감마와 멀린에게 경례를 하였다.





"오늘 구출한 두번째 인간 일행들이다. 모두 통과 시켜라. 그리고 더 올 녀석도 없으니 현문당직 임무는 이만 끝내고 이 녀석들 안내좀 해."


"네 알겠습니다. 모두 승선을 환영합니다. 여기 출입기록부에 개체명 작성 부탁드립니다."


"감마님. 전 먼저 올라가서 생활관 준비와 함께 식당에도 얘기해두겠습니다."
"어디 보자... 둠 브링어 인원 6명에 발할라 인원 4명... 그리고 두번째 인간님까지 하면..."


"야 빨리빨리 좀 세고 올라가 임마! 계단 다 막고 있잖아!"


"아아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너네 부관 원래 저런 애야?"


"잊어버려라..."




멀린이 먼저 쌩하고 올라갔고, 일행은 마이티R이 건넨 출입기록부에 한명씩 서명을 하였다.




"어디 보자... 응? 인간님께선 이름을 안 적으시구요?"


"이름은... 잊어버렸다... 여기... 왔을때부터..."


"아아... 네.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안내해드릴께요."


"이봐 인간. 계단은 네가 직접... 응?"


"Zzzz..."



결국 두번째 인간은 쏟아지는 피로를 이겨내지 못 하고 계단 한쪽에 기대어 잠에 빠져버렸다.




"손 많이 가는 녀석이군..."


"미안... 우리가 대신 부축할께."


"아니. 이 녀석은 일단 의료실에 데려가야한다. 너흰 마이티나 따라가도록 해. 녀석이 여기저기 안내해줄꺼다."




메이와 레오나가 대신 인간을 부축하려 했지만, 아직 인간에게 가진 감마의 의문은 한가지가 더 있었다. 3일 전 오르카 호에 숨어들어갔을 때 두번째 인간을 향한 사령관의 조롱에서 그녀가 이해하기 힘든 한 마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 "왜? 좆같아? 꼬우면 네가 먼저 발견되서 첫번째 인간 하고 사령관이 됐던가? 아니다. 너 나랑 뇌파가 달라서 명령도 못 하잖아? 너같은게 과연 이 많은 인원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할수 있을꺼라 생각해?" '



"(그 오르카의 사령관 새끼가 그때 말 했던거... 이 인간... 그 새끼와 뇌파가 다르댔어... 그리고 바이오로이드들이 자발적으로 따른다라... 그럼 바이오로이드들과도 뇌파가 틀리단건가?)"




이런 의문을 뒤로 한채 감마는 아직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두번쨰 인간을 의료실에 데려다주고 오늘의 일정을 모두 끝냈다.


.

.

.

.

.

.



잠시 후. 포세이돈 함선 내 식당. 식탁 한켠에서 둠 브링어, 발할라 인원들도 배식을 받아 식사 중이었다.




"저... 나앤 대령님...? 저 레모네이드 감마라는 자를... 믿을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발키리 중령... 근데 아까 메이 대장이 말 했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요. 제 스텔스 장비까지 전부 파괴되었고... 발키리 씨의 소총도 이제 없잖아요."


"솔직히... 아직 믿기지가 않네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희 발할라는 죽을 뻔했고... 실제로 그렘린과 님프, 샌드걸은 돌아오지 못 했으니까요..."


"... 혹시 그 답은 저 인간님께 있지 않을까요?"


"인간님요...? 분명 저희와는 다르게 바로 의료실로 데려가셨던데..."


"까놓고 말하면... 저희는 두번째 인간님이 같이 데려와줘서 같이 꼽사리로 이렇게 올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는건 좋은 목적이든 나쁜 목적이든, 감마의 관심사는 일단 저 인간님께 있다는거죠."


"설마... 펙스 회장들의 부활에...?"


"그럼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어야 정상일꺼에요. 인간님만 필요했다면 저 여자 성격상 우린 그냥 버려두고 갔겠죠."


.
.
.
.
.
.


같은 시간. 감마와 멀린의 방.




"에...에... 에취!!! 쓰읍..."


"감마님? 감기 걸리셨어요? 손수건 드릴까요? 아니면 물티슈?"


"시끄러 임마..."


"아하하... 으흐흐흠... 저 근데... 요즘 감마님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뭔가... 회장님들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 하신 이후부터... 뭐라고 해야하지... 매너리즘이라 해야하나?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들어보여서요..."


"... 후우... 역시 이젠 나도 물러터졌군... 어이 멀린. 예나 지금이나 비수 꽃는 실력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군."


"...진짜 이유가 따로 다 있었던거죠? 이제 말씀 해주실수 있으신가요?"



"... 회장이 죽은 이후에도... 우린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왔다. 하지만 철충 녀석들은 오로지 인간만 노릴 뿐.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은 안중에도 없어. 녀석들과 싸우는 것도 전부 우리가 먼저 선제공격을 쳐서 일어난거지."


"아무래도 저희 뇌파에는 반응을 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전쟁이라는건 말이야. 상호간에 할 마음이 있을때 박진감 넘치게 치고 박고 싸우는게 있어야 진정한 전쟁이다. 한쪽은 관심도 없다가 두들겨 쳐맞는건 전쟁이 아니라 그저 학살일 뿐이야."


"뭔가... 저도 처음엔 감마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나 싶었는데... 역시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것 같습니다."


"난 전쟁을 하되 학살은 할 마음이 들지 않아.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건 내 성미에도 안 맞을뿐더러, 상무정신을 무시하는 강약약강의 떨거지들이나 하는 짓이야."


"이제... 전쟁이라는 행동에 회의감이 드신거죠?"


"그 오르카 새끼들한테도 싸움을 걸었을때도 마찬가지다. 본대는 도망치고 숨는데나 바쁘고, 기껏해야 죽으러 나온 저 인간과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고작...!!"


"저기... 대체 그... 오르카 호에 가셨을 적에... 대체 뭘 보신건가요...? 대체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까지 분노하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 너도 많이 놀랄꺼다..."




감마가 오르카 호를 언급할때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떠는 모습에서 멀린은 계속 의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마에게 오르카 호에서 그녀가 보았던 모든 것들을 들었을 땐, 멀린 역시 충격과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이런 미친 새끼들...! 감마님께서 왜 저 인간님을 데려오시려 했는지... 단박에 이해했어요..."


"뭔가 저 인간이라면... 우리를 바꿔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인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임전무퇴와 상무정신으로 가득찬, 그리고 아까 그 블랙 리리스를 일섬에 제압하는걸 봤듯이 뼛속까지 군인인 녀석이다."


"이제 저희는... 불필요한 전쟁을 그만두는건가요? 전쟁광의 성향을... 지워버리는게... 바이오로이드에게 심어진 성향 그 자체를... 저 인간님께서 바꿔주실수 있는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아마 도박이라 해야겠지. 어떤 세계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진짜 말 그대로 이 세계의 이방인이니까. 하지만 걸어볼만 하다. 마치 인간과 인간끼리 대하는것 같은. 뇌파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들의 자발적 의지로 저 인간과 소통을 할수 있는것 같으니 말이야."



----------------------------------------------------------------------------------------------------------------------------



분량 조절 실패했다... 너무 바빠서 일주일이나 걸린듯...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