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들리시나요?

 

놀랐다. 송수신기에서 그럴싸한 문장이 들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10년전 이것을 베티나에게서 받았을 때, 이런 은밀한 일이 생기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했다. 언젠가 여기에서 베티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길 기대하며 시도했던 게 수십 차례, 겹겹이 쌓인 실망 끝에서 이제는 인테리어용으로 용도가 뒤바뀐 것이 제 역할을 해내기 시작한 순간이라니!

 

들리, 시나요? , 려요?

 

내가 건네받았을 때부터 이미 고물이었던 탓인지, 아니면 지금 목소리의 주인이 내가 상상하는 곳 그 이상의 장소에 있는 탓인 건지 노이즈가 꼈으나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의 목소리로 확신할 수 있었다. 여성, 그것도 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내 쪽에서도 송신이 가능했던가?

 

들릴 리가 없지... 하아...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가 그저 이 세상 곳곳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표류중이라 생각한 건지 노이즈 낀 목소리임에도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 한때 내가 했던 낙담도 이러했을까.

메뉴얼, 메뉴얼을 어디에 뒀더라.

 

...싶어.

 

남자는 자고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필요할 때 없으면 귀찮은 것들을 으슥한 책상 서랍에 보관하는 족속이다. 그리고 필요할 때 없으면 귀찮은 것은 고물 송수신기의 작동 메뉴얼에 딱 들어맞는 설명이지. 그러니까, 요컨대, 수많은 단자 케이블이 담긴 서랍을 뒤졌을 때, 손바닥만한 크기의 메뉴얼이 찾는다고 또 찾아지는 현상은 그리 이상할 것이 못 된다는 거다.

, 어디보자. 송신이...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좋지 않다. 울먹이면서 시를 읊다니. 상당한 여자다. 외롭고 서러운 건 알겠지만 그래도 조금 부끄러운 짓이지 않나? 이러면 말 걸기가... 내 설렘은 겹겹이 쌓인 실망 속에서 피어난 것이란 말이다.

......

......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확실히 상당한 여자다.

아무튼 이 버튼이...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

 

들립니까?”

 

! %$#!

 

됐다! 송수신기 너머의 여성을 놀랠 생각은 정말로 진심으로 맹세컨대 없었지만... 겸사겸사 해냈다!

 

괜찮으세요?”

 

...대답이 없다. 좀 전 비명 소리 끝에 무언가 !’ 하고 찍히는 소리가 났었는데 송수신기를 던지기라도 한 걸까. 혹시 그러다가 고장이 나버렸나?

 

들리세요?”

 

당장 오늘 아침에 눈 떴을 때만 해도 몇 년 전에 했던 이 짓을 또 다시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 했는데... 그래도 그때와 지금의 큰 차이점은 대상이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나는 재주에도 없는 혼잣말을 할 수 있다. 물론 상대가 수치스러워 통신을 끊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미안합니다. 놀랠 생각은 없었어요.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사람 목소리를 들은 게 10년만에 처음이거든요.”

 

......

...끊겼나?

 

, , , , , 크흠!

 

오오!”

 

, 안녕... 하세요?

 

! 반갑습니다! 통신을 끊으셨나 싶었는데 아니었군요!”

 

....

 

! 저는 윌슨이라고 합니다. 그린란드에 파견된 환경조사원이고요. 혹시 성함이...?”

 

...

 

?”

 

...켈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켈리. 실례지만 지금 계신 곳이 어디신가요? 캐나다? 아이슬란드? 덴마크?”

 

그건... 왜요?

 

,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이 송수신기를 받았을 때 이거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오길 기대했었는데 그게 이뤄지다보니... 솔직히 지금 좀 많이 신났거든요.”

 

그런 거라면...

 

제대로 된 민간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거죠?”

 

, 그게, ... .

 

제게 이걸 주었던 사람의 말을 빌려보자면, 낭만이 없잖아요. 낭만이. 빙하랑 눈만 봐야하는 곳에 파견됐는데, 이런 일은 낭만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잖아요? 옛날 극지방 탐험대의 모집이 그랬던 것처럼.”

 

, ...

 

그래서, 지금 계신 곳이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낭만이라 하셨죠?

 

, 비슷하게는 로망이라고도 하죠.”

 

그럼, 맞춰, 보시겠어요? 제가 어디있는지.

 

지금 저에겐 그쪽의 통신 전파를 추적할 장비가 없는데요?”

 

환경조사원이시잖아요?

 

그렇습니다만.”

 

생물에 조예가 깊으시고요?

 

물론이죠.”

 

여기 주변엔 꽃과 나무가 많거든요. 내일 그걸 주제로 퀴즈를 낼까 하는데요...

 

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시고 계시군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래서, 어떠세요?

 

내 첫 통신이 이런 전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오히려 그래서일까? 더욱 마음에 드는 상황이 됐다.

그녀의 전문성에 따라 문제의 난이도가 널뛰기를 하겠지만 아무렴 틀린다고 비극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있으나마나한 나의 명예에 흠집이 난다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이곳의 조사 활동은 대체로 단체에서 지원받은 로봇을 통해 하고 있기에 그녀가 내는 퀴즈를 푼다고 업무에 지장이 생길리도 없으니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낭만이 넘친다.

어쩐지 시를 읊더라니까!

 

그녀의 질문에 당장 알겠다고 대답하자 노이즈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고운 미색의 웃음이 들려왔다.

 

그럼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좋은 밤.

 

, 좋은 밤.”

 

좋은 밤.

하루를 마치고, 다음 날 태양은 여지없이 떠오를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빌어주는 말을 끝으로 까마득한 어둠 아래에 놓인 그녀와의 통신은 그렇게 끊어졌다.

그녀 말마따나 내일이 찾아오면 통신은 다시 이어질 테지만 방금까지 들리던 상냥한 목소리가 마치 환청이었던 것처럼 실내는 고요했다. 과거에 두었던 설렘을 오랜만에 들이켜 가슴을 진정할 수 없던 나는 그 께름칙한 고독이 다시금 달라붙는 게 어쩐지 싫증이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와의 몇 분에 불과한 대화로 불결한 마음이 동한 것은 아니다. 설령 그런 마음일지라도, 가식을 떨고 있을 뿐일지라도, 사람 보기가 불가능한 그린란드의 한복판에 놓이길 자처한 나는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게 올바른 처사겠지.

그녀의 말이 신경쓰인 것도 그렇고 분위기도 바꿀 겸 난방을 위해 내려뒀던 창문덮개를 올리자 전자기기의 창백한 빛뿐이던 어슴푸레한 실내가 단숨에 환해졌다. 성에가 낀 창 너머엔 드물게도 쾌청한 날씨가 펼쳐져 있어 그곳은 온통 새하얀 세상이었다.

 

좋은 아침...”

 

연락이 오면 전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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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찾아왔던 쾌청한 낮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구름에 파묻이고, 그따라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은 하얀 밤. 그녀가 말한 좋은 밤은 이런 게 아닌 줄 알면서도, 이미 창문덮개를 내리고 어둠의 자식이길 택한 내게 지금은 분명 좋은 밤이었다. 무엇보다 기다림이란 그것만으로도 설레는 것이지 않던가.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가슴을 울리는 법이다.

쿵쿵.

때때로 들리는 노이즈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같은 착각을 수시로 하면서, 가슴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듯이 은근히 두근댄다.

 

, 아아, 윌슨? 있나요?

 

왔다.

 

, 윌슨 여기 있습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켈리.”

 

? , 좋은 아침이에요.

 

생각했던 반응은 이게 아니지만... , 아무렴 어떤가. 인사는 인사니까. 그보다 노이즈가 좀 덜한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저번이랑 음질이 조금 다른데, 뭔가 했나요?”

 

아뇨... 그냥 내부 청소랑 출력을 조금... 이상한가요?

 

아아, 좋아졌어요. 이상해지기는 커녕 조금 있던 노이즈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저는 조작 방법을 까먹어서 메뉴얼에 의존하는데.”

 

...

 

저는 괜찮습니까?”

 

, 아주 가끔... 끊길 때도 있지만 대체로 깨끗해서 듣기 좋아요. 사실 청소하고 출력...을 조절한 것도 끊기는 걸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했던 거였는데, 칭찬해주신 게 부끄럽게도 이건 사라지지 않았네요.

 

방금까지 끊긴 데가 있었어요?”

 

딱 한 번, 좋은...에요. 이렇게.

 

...”

 

그래서 반응이 심심했던 걸까. 아니면 묵음 처리된 부분을 유추하고서도 내가 알아챘단 사실을 몰라서 그랬던 걸까.

......

신경쓰지 말자. 나중에 내쪽에서 해결해보면 되겠지.

 

, 문제...

 

! , 문제. 그쵸 문제를 맞춰야죠. 문제 주세요.”

 

이 꽃은 말이죠... 봄이에요.

 

?”

 

, 봄이요.

 

“...벚꽃?”

 

후후후... 벚꽃은 아니에요. 이 꽃은 그렇게 화사하진 않거든요. 벚꽃이 벚꽃인 줄을 몰라도 머리 위에서 봄볕처럼 꽃잎이 흐드러질 때면 사람들은 전부 봄이 왔다고 생각해요. 미처 떨어지지 않은 한기가 있다 할지라도, 그 풍경은 허리 숙여 바라봐야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절로 알게 되죠. 봄이 왔구나, 하고. 하지만 이 꽃은 달라요. 허리를 숙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자줏빛 꽃잎을 보여줘요.

물론 이 꽃을 몰라도 봄은 오고, 이 꽃을 알아도 봄은 그저 흘러가죠. 그러나 이 자명한 진리 속에서도 이 꽃을 아는 사람은 이 꽃을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봄이 왔음을 느끼고, 봄 또한 그걸 알아서 매 봄마다 그 사람 곁에 이 꽃을 피워 놓아요. 마치 사랑을 하는 것처럼...

봄인데 벚꽃이 피지 않고 지나갔다면 모두가 놀라겠지만 만약 이 꽃이 그렇더라면 세상은 소란스럽지 않을 거에요. 그만큼 작고, 그만큼 들길에서 조용히 피는 꽃.

 

“...?”

 

?... , 이 꽃은 무엇일까요?

 

하하...”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으나 옛날 학부생 시절 오픈북 테스트를 치르는 기분도 낼 겸 혹시나 싶어서 켜두었던 아카이브 속 도감은 웃지 못했다. 아니, 사실 나도 웃겨서 웃은 것은 아니니 도감도 낙담한 날 보며 페이지를 너털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냥 포기하기가 싫어졌다.

 

혹시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물론이죠.

 

형상을 그대로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그대로. 꽃잎이 어떻다던가 잎사귀가 어떻다던가...”

 

...아니요.

 

그렇겠죠... 그건 낭만이 없으니까. 미안합니다. 괜한 소릴 해서.”

 

, ... .

 

그녀의 문제에 해설을 달기엔 너무 전문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감이다. 내가 잊어버린 꽃이름을 도감은 결코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하물며 사진까지 담겨 있는데, 이것에 기대지 않고서야 방금 전 그녀의 아리송한 문장이 가리킨 꽃을 알아낼 방도가 어디있을까.

그리하여 잠시 입을 닫고 막연히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라 생각하면서 도감의 봄꽃 카테고리를 살피던 나는 도감의 탐색기에 주워들은 정보를 채우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힌트, 많지 않나?’

 

벚꽃 이후에 피는 수수한 봄꽃, 보라색 꽃잎, 작은 크기, 들꽃, 아시아권, 감성적인 그녀의 출제 방식에서 볼 수 있듯 문제는 시의 일부일 것이고, 시로 쓰일 정도로 대중적이니 이름도 단순할 것이며 번식력도 왕성할 터. 이를 토대로 그녀가 내놓은 문제의 답이 될 꽃은 많아봐야 세 종류고 엄밀히 따졌을 땐 그마저도 하나가 줄어 두 종류밖에 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자세히 따져보면 문제가 생각 이상으로 쉽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그녀의 출제 방식은 여전히 괴상했다. 그것이, 나는 무척이나 거슬렸다.

 

역시... 어렵나요?

 

그렇지 않다. 그녀의 문제는 쉽고, 나는 답은 알고 있다. 찍어도 정답일 확률이 50%인 이지선다의 문제에 어렵고자시고를 논할 구석이 어디있을까. 내가 대답하길 머뭇거린 이유가 뭐냐 묻는다면, 그건 그녀의 언행이 다분히 의도적인 탓일 거다.

 

켈리는 내가 있는 그린란드에 대해 모른다. 낮밤이 뒤집힐 정도로 벌어진 시차를 모른다. 5월에 접어들면서 그린란드에 백야가 찾아왔음을 모른다.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그녀다. 지식이 편향돼 있다.

그녀가 퀴즈의 문제로 낸 꽃의 서식지역은 아시아권이다. 비슷한 종류가 다른 지역에서 관찰되기야 하지만 시차와 더불어 꽃잎의 색상을 따져보았을 때 그녀는 아시아권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내 고물 송수신기로는 통신이 불가능한 거리다. 배양한 거라면? 그렇다면 애당초 문제부터가 될 수 없다. 고로 그녀의 주변에 제비꽃은 없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어디부터가 거짓일까.

 

그녀의 낙심한 목소리를 끝으로 그럴싸한 대화가 오고가지 않는 수신기에선 아주 미약한 노이즈가 새어나왔다. 나는 기한도 없이 대답을 보류했고, 이보다 더 좋은 문제를 낼 수 없는 그녀 또한 침묵했기에 아주 사소한 대화에도 짓눌려 사라질 운명이었던 노이즈는 운좋게도 세를 더해서 점차 마음을 어지럽힐 정도가 되었다.

숨 쉴틈도 없이 울리고 또 울리며, 징징. 징징.

어떻게 해야 할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정답을 맞춰야 할까, 일부러 틀려야 할까, 아니면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어야 할까. 이대로 대화를 마치면 그녀는 내일 아침 나에게 인사를 해줄까. 새하얀 세상에서 그것도 없이 고독을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그럴리가 없다.

 

□□□, 맞죠?”

 

......

 

“...켈리?”

 

......

 

켈리, 들려요?”

 

......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어제와 똑같이 전자기기들의 빛으로나마 간신히 어슴푸레한 실내를 눈이 시릴 정도로 쨍한 빛으로하여 다시금 밝혀주길 바라며 덮개를 들어올렸다.

 

...”

 

눈보라가 창밖에서 웅웅거리는 희끄무레한 세상. 얼음과 바람뿐인 그곳에서 표류하는 나의 음성은 과연 닿을 수 있을까.

닿았을까. 하늘도, 구름도,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데.

망연히 창밖을 보는데 관측장비에서 알람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야외에서 활동중인 로봇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거나 기록할만한 정보를 얻었다는 신호. 방금까지의 고민을 잠깐 미루어 파견직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창문덮개를 내리자 실내는 어째선지 이전보다도 어두웠다.

 

좋은 밤...”

 

방금까지 들리던 송수신기의 노이즈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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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눈으로 덮을 듯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시간 앞에서 맥을 못추고 저물자 세상은 다시금 훤해졌다. 구름이 바람에 쓸려 사라진 덕분에 하늘은 푸른 낯짝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태어난지 얼마 안 돼 궁금한 게 많은 하얀 것들이 사방에 선망의 눈빛을 보내는 명랑한 세상.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던 자연의 지엄함이 마치 거짓이라는 듯 내숭을 떠는 이곳에서 눈삽을 꼬나든 나는 무자비한 정복자였다. 쉘터 주변에 쌓인 눈이 보내는 무구한 시선에도 거침없이 퍼나르는 내 모습이란 분명 그렇고말고.

켈리의 문제에 답을 외치고, 그 답신이 제 길을 잘 찾아갔을는지 걱정했던 게 일주일 전. 수집된 기상관측자료로 보아 앞으로 이번달 말까진 맑은 날씨가 지속될 전망이라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색을 달리하는 게 오지의 특성인만큼 마냥 안심할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선순위를 착각하는 우를 범할 수도, 제설을 멈출 수도 없었다.

내가 했던 말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아무개씨는 혹한 속에서도 뜨거운 땀방울을 빗어내는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체에서 지원받은 로봇을 쓰면 안 되냐고. 아쉽게도 저번에 울렸던 알람을 기억하는가? 기상악화로 누군가의 음성마저 무력하게 허물어지던 것에 우울해지려던 나를 파견직으로서 본분을 다하도록 이끌었던 신경질적인 알람. 그 알람의 정체는 구조요청같은 거였다. 이를테면 로봇의 작별인사... 아니면 유언, 쉽게 말해서 고장이 나버린 거다.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고.

물론 켈리와의 대화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기에 제설을 하면서도 귀 한 쪽은 송수신기를 향했지만 아직까지 그녀에게서 통신은 오지 않았다. 이따금 노이즈가 새어나오긴 했지만 아주 찰나에 불과했기에 통신이 걸려온 거라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나의 일방적인 침묵이 일주일이나 지속되었을 테니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아닌가? 욕이라도 하는 게 당연한 거일 수도. 뭐가 됐던 하루빨리 제설을 마치고 연락을 해야...

 

윌슨 응답 바람.

 

나의 고물 송수신기와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깔끔한 음성이 쉘터 안쪽에서 들려왔다. 번듯한 위성을 통해 전달된 목소리는 사무직들이 으레 그렇듯 다소 냉담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나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고.

 

윌슨, 살아있는 거 아니까 대답해.

 

“......”

 

나도 마음 같아선 네가 듣던지 말던지 신경 안쓰고 그냥 전달사항 말하고 끝내고 싶은데, 규정상 수신자 확인을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붙잡고 있는 거다.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

 

계속되는 재촉에 들고 있던 눈삽을 눈더미에 꽂아두고 응답했다. 평소라면 메일로 끝내던 걸 굳이 수신자 확인까지 해가며 전달한다는 건 그만큼 중하다는 거니까.

 

.”

 

건강 상태, 물자, 특이사항.

 

몸은 이상 없고 폭풍으로 쉘터의 관측장비에 경미한 손상, 탐사로봇 한 대는 완파됐다. 식량은 한 달치 남았고. 그래서 뭐냐.”

 

현 시간부로 네 업무를 중단한다. 일주일 뒤에 수송 헬기가 도착할테니 그동안 수집한 자료랑 물자 정리해서 복귀해. 원래라면 좀 더 빨랐어야 했는데 기상악화로 일정이 지연되면서 이제야 전달한다.

 

.”

 

?

 

갑자기 복귀하란 이유가 뭐냐고. 내가 자진해서 여기로 올 땐 이런 말 못 들었다.”

 

...뉴스 안 보냐?

 

안 봐.”

 

후우, 최근 삼안이랑 블랙리버간의 분위기가 안 좋아.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금방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정도라고. 펙스도 뭔가 아는 게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어디랑 붙어먹으려고 하는 건지 근래 움직임이 수상해.

 

그런 상황이 발생해도 상대적으로 위험지역에서 떨어진 나는 직접적인 피해가 있기 전까진 내 업무를 지속하기로

 

마더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다. 너뿐만 아니라 전원 복귀하라고.

 

마더. 와쳐 오브 네이쳐의 설립자이자 수장인 캐롤린 포스터를 향한 존경의 표출. 예전의 나였다면 존경심을 담아 거리낌없이 불렀을 그 이름도 지금에선 베티나를 죽음으로 내몰은 장본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래서라 했냐 지금? 철부지도 아니고 네 사적인 감정을 어디까지 끌고오는 거냐. 정신차려. 베티에게 있었던 일을 슬퍼하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선 아무도 없어. 너도, 나도, 그리고 네가 그토록 원망하는 마더도. 저마다 크고 작더라도 모두가 그래! 그럼에도 다들 제 할 일은 한다고.

 

과연 그럴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마지막은 베티나의 호소를 아무말 없이 무감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녀가 오지로 떠나는 날에도 안녕을 빌어주는 걸 본 적이 없고, 하다못해 베티나에게 있었던 비극에 일언반구의 언지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와서 슬퍼한다는 걸 남의 입으로 들어봤자 믿을 수가 있을까.

 

그녀는 당연히 그래야지... 안다면, 알고 있다면 당연히.”

 

언제까지 바이오로이드에게 살상 허가를 내려주지 않은 걸로 마더를 원망할 거냐? 애당초 바이오로이드가 투입된 파견지에 베티가 자진해서 따라나간 걸 왜 마더에게 책임을 물어?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무모했던 건 베티였어. 솔직히 너도 이젠 알잖아.

 

말렸어야지. 말릴 수 없었다면 파견을 중단했어야지. 사람이 죽을 뻔한 일이었고 결국 그렇게 됐는데.”

 

마더는 신념을 관철한 거다. 우리가 와쳐 오브 네이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던 신념을. 그걸 어떻게 탓할 수가 있냐.

 

놀랜드, 네가 나였어도 탓하지 않을 수 있냐?”

 

진짜 애새끼가 따로 없네. 윌슨, 너는 도대체 거길 왜 간 거냐.

 

“......”

 

알려고 간 거잖아. 너도 우리처럼 베티의 무모함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녀가 그렇게 부르짖던 바이오로이드의 외로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근데 지금의 너는 도대체 뭐냐?

 

나는...”

 

너는 뭐.

 

노골적인 짜증이 담긴 놀랜드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가 없었다. 놀랜드가 섯부른 오해를 한 거라고 둘러댈 수도 있다. 나는 네가 생각한 이유로 이곳에 온 게 아니라 말해도 녀석이 진위를 가릴 순 없으니까. 다만 10년의 세월을 먹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된지 오래인 녀석을 속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곳에서 10년간 꽉 얼어붙은 기억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금의 망설임을 도저히 방해라며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아, 솔직히 말이다. 나는 이번에 들을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뻔하디 뻔하게 바이오로이드도 생명이니까같은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우리와 달리 뭐라도 있는 것처럼 이해하려고 달려든 네가 10년이나 빙설뿐인 곳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리라곤 생각 안했다고. 근데 아니었어. 장담컨대 너는 지금 그 상태 그대로 10년 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똑같을 거다. 베티를 설득할 수도 없을 거고, 오롯이 슬퍼하지도 못한 채 마더를 원망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답을 찾아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겠지.

 

“......”

 

오래 묵혀두었던 감정을 쏟아낸 뒤에 찾아온 끈적하고도 불쾌한 침묵이 이어졌다. 뭐라 할 말을 찾는 게 불가능했던 나는 창 너머의 환한 세상에 공연히 시선을 던져두었다. 무언가를 찾으려던 건 아니다. 많은 것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언제 녹아서, 언제 바람에 쓸려 사라질지도 모름에도 반짝이는 게 너무나 신경이 쓰이고 쓰여서 보았을 뿐.

도저히 내게서 답이 돌아올 낌새가 없자 놀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옛날엔 그렇지 않았는데 이미 감정을 가라앉혔는지 처음 교신했을 때보다도 냉담한 목소리였다.

 

할 말 없으면 복귀할 준비나 해. 사명을 다해야지, 방주에서. 그린란드가 아니라.

 

통신은 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 일말의 노이즈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끊어졌다.

이곳에 온지도 벌써 10. 미련이 남을 법한 시간임에도 이별의 순간이 온 것에 미련이 남거나 하지는 않는다.

폭풍도 시간 앞에서 하릴없이 쓰러지는 게 세상이니까.

놀랜드의 일갈에 비겁한 변명을 읊을 수밖에 없던 내가 지금껏 보류해온 답이란 그런 거였다.

구차하게 말을 붙여보고 아니라고 부정도 해봤지만 지난 세월 서서히 식어버린 감정은 지금의 내가 베티나의 죽음을 더이상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허망한 죽음에 분노한 사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진실이겠지. 그렇고말고.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바람이 불지 않는다. 제설은 거의 마무리가 되던 참이라 여기서 그만둬도 수송 헬기가 착륙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설비를 정리하는 건 품이 좀 들겠지만 어차피 많지도 않아서 하루 날 잡고 한다면 여유일 게 분명하다. 다만 유일하게 걸리는 게 있다면 이거일 거다.

고물 송수신기.

켈리.

나에겐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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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죠?

 

?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

 

저기요?”

 

......

 

귀가 아플 정도로 난잡한 노이즈가 공기를 밀어내며 고막을 괴롭히는 순간. 불길한 소리따라 쉬이 불안해진 마음이 고개를 들어 무너진 천장을 매우고 있는 하늘을 보자니, 저의 기분이 무색하게도 날씨는 여전히 푸르고 맑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온화한 햇볕은 지금의 제 존재가 거짓이라는 것처럼 단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째선지 더 불길한 색입니다.

윌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분명합니다만 마지막에 문제의 답을 외쳤던 것으로 봐선 신변에 위협이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스스로를 환경조사원이라 밝힌 그가 눈과 얼음뿐인 곳에 지내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저로선 헤아리는 게 송구할 10년이란 세월인 걸요. 그런 일들은 무수히 많았을테니 그의 신변을 걱정하는 건 무척이나 주제넘는 감정일 겁니다. 아마도 기상이 나빠졌다거나 그런 일이겠지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의 마음입니다. 윌슨이 저 스스로도 불확실한 기억을 바탕으로 낸 수수께끼에 질려서 어물쩡 말을 흐린 채 떠난 게 아니라고, 그 누가 저에게 확신을 줄 수 있을까요. 확신이나 위로같은 건 남에게서 빌어오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노이즈가 울립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매 순간에 아쉬워하지 않기 위해서인듯 열성적으로 웁니다. 기계에 불과한 그것이 생명도 아닐진데 애처롭게 우는 것을 보고 있자면 말단이 간지러워지는 걸 참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울어달라고, 마음엔 스파크가 튀기 시작합니다.

미련하단 건 저도 압니다. 이런 짓을 계속한다고 제게 드라마틱한 일이 생기리라곤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두려우니까. 그와 영영 단절되는 게 두려워서 노이즈만 내뱉는 송수신기에 전력을 넣을 뿐. 그도 그럴게, 저는 유령인 걸요.

 

하아아악...으읏...”

 

아아, 옵니다. 머릿속에서부터 씨앗이 발아하여 뇌를 파먹는 듯한 고통이 옵니다. 처음엔 지끈거리는 것으로 끝나던 것이 점차 두개골을 뚫고 칠규와 등허리까지 단숨에 내달려 몰아칩니다. 고통을 인내하려 악 다물었던 입도, 현실을 외면하려 감았던 눈도, 노이즈라도 주워담으려던 귀도 단숨에 허물어집니다. 볼을 따라 흐르기 시작한 스파크가 통제를 벗어나서 몸을 속박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얗게 번져가는 시야.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

.

.

 

.”

 

주렴에 스치는 바람이 귓가에 맴돌다 떠나며 간드러지게 웃는 소리. 봄날을 자축하는 꽃들의 아우성에 못이겨 눈을 뜨자 공기에 섞여있던 텁텁한 먼지내음은 온데간데 없고 믿지 못할 풍경이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길가에 옹종히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사람들, 떠나간 바람타고 춤을 추던 벚꽃잎이 포근한 잔디밭에 드러누워 눈처럼 쌓인 자리에서 저는 방금까지 입고 있던 구속복이 아닌 하늘하늘한 연분홍빛 치맛자락을 발치에서 나풀거립니다.

 

켈리?”

?”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봄볕에도 색이 바랠듯 창백한 남자가 제 손을 꼭 쥐고 있습니다. 조금은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지만 수수하기 짝이 없는 데님바지와 무채색 맨투맨을 입고 있는 그의 가늘고 여린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저는 분명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내 평생의 사랑.

그래요. 오늘은 그의 퇴원 기념 봄나들이었습니다.

 

괜찮아? 돌아갈까?”

 

울음은 숨에서 먼저 드러나기에 금방이라도 흐려질 것같은 눈을 먼 산 위로 던져둡니다. 그에게 이런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지독했던 병세를 이겨낸 그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고 싶으니까.

 

아냐... 괜찮아...”

“...그래.”

 

분명 로버트는 눈치챘을 겁니다. 눈물은 감췄어도 이미 한 차례 물먹은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더하고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제 손등을 쓸어줍니다. 처음 사랑을 나눌 때처럼, 수술에 들어가던 순간 울먹이던 저를 안심시켰던 것처럼, 그리하면 제가 금세 모든 걸 잊고 당신을 의지할 줄 안다는 듯이.

로버트는 병석에서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도 저보다 반 걸음 앞서 꽃무리를 맞아줍니다. 생기가 부족한 머리칼 위에 점점이 수놓인 꽃잎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때로 돌아보며 웃는 그는 나의 사랑이라 미소에 화답하듯 꽃잎을 때어 한 손에 그러모아둡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 선물처럼 쥐어주겠노라 다짐까지 합니다. 분명 기뻐하겠죠.

저 모르게 새침한 숨이 마음에서 새어나와 마주한 얼굴을 붉힌 것은 또 얼마만일까요. 제가 그에게 시를 빌려오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흐릿할 정도로 서로의 감정이 어떤지 너무 잘 아는 우리의 나들이는 고요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이와 저는 자그마한 새의 포롱거림을 좇아 이따금 하늘을 보기도 하고 이제 막 흙을 비집고 올라온 새싹의 아릿한 풀내음에도 기뻐하며 가던 길 멈춰서서 인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반가운 얼굴을 만나기도 하죠.

풀잎에서 슬며시 고개 내민 자줏빛 꽃잎을 앞에 두고 쪼그려앉은 저는 말했습니다.

 

여기 봐봐, 로버트가 가장 좋아하는 꽃!”

? 뭐가?”

, 여기 있잖아.”

이 작은 꽃?”

! 예전에 로버트가 무슨 꽃이었는지 알려줬었는데... 뭐였더라?”

모르는데?”

“...?”

모르는데?”

, 그때 그랬잖아... 허리를 낮출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꽃이라고...”

모르는데?”

“...로버트?”

모르는데?”

 

순진무구한 눈을 하고 다가가는 손에 서서히 비틀어져가는 목.

!!!

 

하지마! 제발!!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멈춰... 제발, 제바알!! 죽지마...”

 

그의 깡마른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꽃그늘의 서늘함, 살랑이는 들풀, 꽃잎이 수놓인 푸석한 머리칼, 야트막한 언덕, 지나가는 사람들, 하롱대는 낙화, 맑은 하늘, 터질 듯한 머리, 미어지는 가슴.

 

... 싫어...! 싫어!!”

 

돌연 뻗어나온 스파크에 로버트의 머리가 꽃봉울처럼 만개하고.

 

.

.

.

 

하악!”

 

눈을 떠보니 무너진 외벽 너머로 새카만 하늘이 보입니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고 매끈한 비단처럼 어둡기만 한 밤하늘에선 여름의 열기를 찾아볼 수가 없어, 식은땀에 온통 젖어버린 몸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귀신처럼 울어대는 바람에 쉼없이 떨립니다

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로버트의 시체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만 다행이도 보이는 거라곤 작동을 멈춘 송수신기와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뿐. 이곳은 제가 기절하던 순간 그대로, 어딘지 모를 섬에 버려진 시설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안심해야 할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지...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 정신으론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로버트라는 남자의 죽음도, 로버트라는 남자도, 그 따스하고 괴이하던 풍경도 모두 누군가에게서 주입받은 기억이란 걸 이미 수차례 겪어봤지만 매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평생의 사랑을 이제 그만 사랑하고 싶어!

그의 가냘픈 손에 목이 비틀려 죽고 싶어!

그가 자신의 손으로 목을 조르다 머리가 터져죽을 바엔... 그가 죽을 바엔...

...

......

 

나도 이렇게 죽었을까...”

 

주먹 쥔 손을 펼쳐봅니다.

꽃잎은 없습니다.

무너진 건물 틈바구니로 비가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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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이가 빠진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 날이 저물면 불빛도 숨을 죽이는 곳이기에 그녀는 약간의 두통을 감내하며 미약한 전기를 방출해 눈앞을 비췄다. 청백색에 가까운 광원 때문인지 그늘진 그녀의 얼굴은 생기가 없었다. 가슴께에 소중히 품고 있던 기기가 그것에 반응해서 이따금 작동하고 멈추길 반복했으나 그녀는 놀라거나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몰아치고 있는 폭풍 앞에선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엿새간 뼈저리게 느낀 탓이다.

핏기가 돌지 않아 노랗게 질려버린 맨발이 계단을 때렸다. 차갑고 딱딱한 매정하기 그지없는 소리. 그것은 섬을 가라앉힐 듯 퍼붓는 빗소리에 섞이는 듯하다가도 곁따로 울리다가 금방 힘을 다해 사라졌다. 때리고, 울리고,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그녀는 미지근한 숨이 한 차례 입김으로 눈도장을 찍은 뒤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찌그러진 철문 앞에 멈춰선 그녀는 생각했다. 부질없음에 대하여.

철문을 밀어 복도에 들어서자 악취가 밀려왔다. 벽을 짚고 토를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냄새였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복도엔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실험의 부산물, 그리고 발길에 짖잇겨져 얼룩진 서류들이 가득해 얼핏 위험해보였지만 누군가가 통행을 위해 정리라도 해둔 건지 그것들은 복도 양끝에 밀려있을뿐 한가운데는 깨끗했다. 마치 이 길을 따라 오라는 듯이, 이 길 외엔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듯이 치워진 모습은 다분히 의도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복도 양옆에 도열한 문앞에 그것들을 한가득 쌓아놓는 노력을 해두었음에도 문들은 반쯤 열린 채 속내를 슬쩍 내비치고 있었다. 그 또한 누군가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 결과라는 걸 그녀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복도 한가운데로 지나며 문이 보내는 시시한 추파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품 속의 기기를 조금 더 단단히 안고는 점점 더 깊은 곳에 자리한 어느 방을 향해 수척한 다리를 뻗을 뿐이었으며 점점 더 심해지는 악취를 깊이 마시고도 그녀가 내딛는 걸음걸이에서 휘청거림이란 거짓부렁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복도 끝에 다다른 그녀는 다시금 만났다. 쓰레기처럼 무더기로 쌓여 썩어가는 그녀와 나아가 완전히 백골이 되어버린 그녀들 모두의 둥지를. 그녀 자신의 요람을.

 

No.75

 

배양관 상단부에 적힌 숫자를 눈으로 훑은 그녀는 이윽고 동력을 잃어 내부가 텅 비어버린 배양관 안쪽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그녀는 처음 눈을 뜬 순간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는 이곳을 가만히 바라보며 기억하고 있는 바를 되짚었다.

그녀는 신의 사자가,

그녀는 가족이,

그녀는 시티가드가,

그녀는 여동생 대신,

그녀는 수억의 빚이,

그녀는 국가에 헌신을,

그리고 나는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우그러진 입가에 눈물도 닿지 않는 밤. 그녀는 아기처럼 무릎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시구를 읊었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전부 가져다 붙여본다. 바람이 불어 떨어져 내리는 꽃잎도 생각해보고 꽃 피우기 위해 울어주던 소쩍새와 물가에 앉아 울던 꽃의 외로움도 빌어보지만 그 무엇도 제대로 떠오르는 게 하나 없었다. 허나 자신의 기억만큼은 거짓이 아닐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은 그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

 

로버트... 로버트...”

 

그녀는 사랑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기억이 거짓이란 걸 안다. 로버트는 실존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설령 로버트라는 남자가 실존한다해도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꿈속에서 그가 매번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녀의 손에 머리가 터져죽는 이유는 허구이기 때문이란 걸 안다. 그래야 기억이 거짓이라는 걸 아니까. 눈앞에서 썩어가고 있는 그녀들의 염원을 잇기 위해 그녀는 태어난 거니까.

헬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거짓에 비해 진실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누군가의 손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언제든 버려도 되는 물건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만이 눈앞의 시체와 자신의 요람을 설명해줄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녀는 엿새간 완전한 고독을 헤매며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을 피부로 느꼈다. 그들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배양관을 작동할 것인지, 아니면 모두의 기억을 끌어안고 여기서 멈출 것인지...

이미 여러번 힘을 끌어쓰다 기절한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터지기 전에 성공적으로 배양관에 동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해도 자신의 기억까지 이어받을 그녀를 온전히 만들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은 오래전에 버려진 시설이고, 그녀와 그녀들은 심히 우습게도 운이 좋아 존재할 수 있었을 뿐이니까.

 

로버트... 두려워...”

 

이미 저렇게나 많이 태어나고 죽었는데, 또 가능할까.

실패한다면 나는 내 죽음도 제대로 결정짓지 못한 채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그 이전에 성공적인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우리가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의미는 있을까.

나의 기억이 거짓이라는 걸 오롯이 받아들이고 나면, 나의 존재는 의미를 지닐까.

죽음이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

......

눈앞의 시체들이 자기에게 떠넘긴 결정의 순간을 두고 그녀는 선택했다.

다음으로 미루자고.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지독하고 엉터리인 문제에 해답을 내놓을 녀석을 대신 앉혀놓자고.

배양관에서 몸을 빼낸 그녀는 한 발치 뒤에 쌓인 시체더미에 송수신기와 몸을 뉘이곤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아.”

 

그러나 말과 다르게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붓기 위해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던 광원을 없애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완전한 어둠에 눈이 적응을 하려고 애쓰는 사이, 배양관을 작동시키기 위한 전력이 그녀의 몸에서 폭발하듯 쏟아져나왔다. 고통을 인내하려 꽉 깨문 입가에선 지금까지 닿지 못한 눈물 대신이라는 듯 선혈이 흘러내렸으며 스스로도 감당키 어려운 힘에 마비되어버린 근육이 곳곳에서 경련했다. 방금까지 어둠에 적응하려던 눈은 뇌내신경에서 터져나온 힘이 새어나와 흰자위로 뒤덮여 온통 새하얬다. 마치 윌슨이 있다는 그린란드처럼. 눈과 얼음뿐이 없는 그곳처럼.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에게서 꽃의 이름이라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누군가 보았더라면 영혼처럼 푸르렀노라고 경탄했을 빛이 주변에 산재한 시체들에서 역겨운 탄내를 피워올리며 나아가던 순간. 곁에 놓여있던 송수신기에서 노이즈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비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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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에 대하여.

 

분명 그랬다. 그 꽃의 이름은 제비꽃이었다. 태어나 죽기를 각오한 방금까지 무슨 짓을 해도 떠오르지 않던 꽃의 이름.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던 뇌리로 단박에 파고든 그 이름은 배양관을 향해 뻗어가던 푸른빛을 자기도 모르게 흩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내린 결정을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그릇된 일이었다. 감탄을 자아낼 듯하던 푸른빛은 수차례 전력을 써왔던 그녀가 죽고 싶지 않은 마음마저 무릅쓰고 몸 비틀어 짜냈던 최대 출력이었으므로 겨우 새된 숨만 들이쉬는 그녀 주위로 서서히 내려앉는 어둑은 최악의 결말이란 방증이었다. 허나 켈리는 곁에 두었던 송수신기를 바라볼 뿐 방전의 후유증일랑 완전히 남의 것인 듯 덤덤했다. 좀 전의 목소리가 환청일 리가 없다고 끊임없이 되뇌이면서.

 

저에게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거짓...말이요...”

 

......

 

호흡이 가라앉은 그녀는 송수신기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뭐가 거짓이냐고 따지면... 너무 없어보이겠죠... 그래요...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제비꽃도.

 

.”

 

꽃과 나무가 많다던 것도.

 

.”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려줄 수 있다던 것도.

 

... 전부 거짓말이었답니다.”

 

......

 

나름 단초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아셨나요?”

 

거기는 밤입니까?

 

다소 아귀가 안맞는 듯한 물음에 의아해하던 것도 찰나. 그녀는 금세 윌슨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서로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지도를 펼쳐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하물며 그는 자신이 그린란드에 파견나왔음을 밝히지 않았던가.

 

“...인사가 늦었네요. 좋은 아침.”

 

좋은 밤입니다.

 

이것만으로 알아챈 건가요?”

 

하하... 설마요. 지역이야 시차 덕분에 알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도감 덕분입니다. 와쳐 오브 네이처의 아카이브엔 지금껏 조사해온 정보들이 가득하거든요. 명칭, 효능, 생태, 생김새까지. 금방이라도 휘발되어서 잊혀지기 일쑤인 것들을 어떻게든 담아두려고 발악해온 결과물 덕을 조금 보았습니다.

 

...”

 

치사하다 생각합니까?

 

후후... 설마요. 말도 안되는 퀴즈를 낸 건 저인 걸요... 그리고 약속한 보상도 드릴 수 없는 저야말로... 치사하고 비겁하죠...”

 

지금 있는 곳이 어딥니까.

 

글쎄요... 모르겠네요... 오래 전에 버려져서... 곳곳이 허물어져서... 풀 한 줌과 꽃 한 송이 없이 삭막하거든요...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파도 뿐...”

 

어쩌다 그런 곳에 있게 된 겁니까.

 

어째서일까.

태어남과 동시에 품었던 의문이고 죽음을 선택한 순간에서야 덮어둘 수 있었던 의문.

이미 답을 내린 의문은 더이상 의문일 수 없음을 뻔히 알지만 그럼에도 아둔한 척 생각을 곱씹으면 살아갈 이유라도 되지 않을까.

...

.....

그녀는 눈앞의 배양관 위에 세겨진 숫자를 보며 모두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 거짓말을 했냐 하셨죠...”

 

.

 

저는 75번 배양관에서 눈을 떴거든요.”

 

...?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로버트란 이름의 남자죠. 그는 희귀병에 걸렸고 저는 그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생체 실험에 참여하기로 다짐했어요. 무엇을 위한 실험인지도 모르면서,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라면 견뎌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죠.”

 

......

 

하지만 아니었어요. 당장 눈앞엔 저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시체들이 쌓여있고, 저를 잉태한 이곳은 오래전에 버려져서 엉망이에요. 마치 네 기억은 거짓이야!’ 라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처럼 단호하기까지 해요.

상상이 되나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모든 게 죽어있는 곳에 혼자 살아있는 기분은 또 어떤지? 정말 슬픈 것은 당사자인 저로서도 마땅히 빚어낼 말이 없다는 거에요... 슬프고 슬프다, 외롭고 외롭다... 그게 제 최선이죠.”

 

......

 

하아아... 확신을 잃은 제가 도피하듯 눈이라도 감으면, 제 바램을 구현한 듯한 꿈속에서 로버트가 자살을 시도하다가 제 손에 머리가 터져죽어요. 그리고 다시 잠에서 깨죠. 그리고 보이는 건? 똑같아요. 시체, 폐건물, 도망칠 길도 없이 사방이 바다인 섬.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없는 섬...

하아... 눈을 뜨고 싶지 않은데,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게 너무... 외로워서...”

 

......

 

벅차오른 숨을 억누르려 안간힘을 쓰는 소리는 먹먹했다. 노이즈에도 섞이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 울먹이는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슴 깊은 저편에서 올라온 듯한 열기를 오래된 송수신기는 묵묵히 흘려보냈다.

윌슨은 그저 침묵했다. 방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가 품고 있던 응어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던 그에게 그것은 최선이었다.

한껏 맹맹해진 목소리가 쾌활한 척을 하며 다시금 말을 이어붙일 즈음, 윌슨은 자신의 송수신기에 세겨진 이니셜을 엄지로 쓸어올리며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후우, 아무튼! 저는 제가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됐어요. 제 기억이 거짓이라는 걸 확신한 뒤부터 어째선지 봉분처럼 쌓인 시체들이 남긴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랐거든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기로 각오했다면, 또 다른 저는 저마다의 사유로 헌신하기로 각오했다는 가짜 기억을 갖고 있었죠. 그리고 그들 모두가... 그리고 저도... 사람인 척을 하고 싶어했답니다.”

 

바이오로이드... 였습니까...

 

“......”

 

그렇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서로간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여느때와 같이 침묵 사이에 들어차는 것이라곤 어지러운 마음을 대변한 듯한 소음뿐으로, 그녀는 그의 입에서 멸시의 표현이 날아오진 않을까 싶어 애꿎은 송수신기만 손톱으로 긁어댔다.

일전에 그렇게 말끝을 흐리고 허공에 손짓하다 끊어졌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녀가 송수신기의 어느 음각에 손끝이 맞닿을 즈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했었죠. 로버트라는.

 

.”

 

하아, 제게도 있었습니다. 베티나라는 여자가. 지금은 행방불명이라 생사를 모르지만... 동료는 물론이고 저도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려던 곳은 바이오로이드만 파견되던 오지였거든요. 온갖 위험이 넘쳐나는 곳에, 오리진더스트로 강화수술도 받지 않은 평범한 여자가 어떻게 될지 모르면 바보죠. 문제는 그녀가 때때로 바보같이 억척스러웠다는 겁니다.

 

“......”

 

가면 죽을 거다... 죽진 않더라도 험한 일을 당할 거다... 바이오로이드를 파견했는데 왜 가려고 하는 거냐... 무의미한 모험이다... 모두가 그렇게 말렸고 저도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그녀가 뭐라 했는지 압니까? ‘그들 모두가 외로워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덥니다. 그리곤 며칠 뒤에 낭만이니 뭐니하며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선물이랍시고 던져주더니 홀가분하다는 듯이 떠났죠.

 

“...그럼 그 송수신기도.”

 

기억력이 좋네요... 맞아요. 제가 그녀에게서 받은 건 이 고물 송수신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이걸로 저에게 만큼은 연락을 하려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지난 10년 사이에 깨달았죠... 그러고보니 어쩌다가 통신을 하게 된 겁니까?

 

... 이거요...”

 

그녀는 품에 놓인 송수신기를 눈높이까지 들어올리곤 말을 이었다.

 

제 기억 속에서 그 누구도 이걸 건드린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 작동시켰던 거였는데...”

 

우연히 저와 통신이 됐고, 고장난 줄 알고 시를 읊었죠. 뭐였더라... 분명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았는데.

 

“...혼잣말이랑 지금은 다르니까요.”

 

그래서 시 제목이 뭡니까?

 

“‘낙화라는 시에요. 화무십일홍, 삶의 무상함에 대한 시죠.”

 

기억하네요? 저는 분명 제비꽃처럼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요.

 

아아... ‘제비꽃에 대하여말이죠?”

 

...‘제비꽃이 시 제목인 줄 알았는데요.

 

후후후, 아무렴 어때요. 탓할 사람도 없는 걸요.”

 

하하하, 그렇기야 하죠.

 

“......”

 

......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저를 탓하고 싶진 않나요?”

 

...당신이 거짓말쟁이라서?

 

“......”

 

저는 그걸로 나름 꽁한데... 이게 아니라면 당신이... 바이오로이드라서?

 

“....”

 

... 전혀요.

 

?”

 

외로웠으니까.

 

“......”

 

당신도, 나도. 그거면 된 거죠.

 

아침이란 꽃이 지는 때였다. 수없이 많은 꽃들이 눈물처럼 제 잎을 흘리던 밤. 그것을 지나 맞이하는 아침이란 그런 거였다. 지금껏 그것이 해의 탓이 아닌 줄 알면서, 또 그것이 달의 탓이 아닌 줄 알면서 모두가 원망만 하고 저물던 세월이었다.

제각기의 이유가 한데 얽혀 멈춰있던 섬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누군가가 태어나고 죽는 것에서나 있던 거였다. 그녀들의 삶과 죽음을 알아도 흐르고, 모르더라도 매정히 흐르는...

처음으로 제 앞에 멈춘 누군가가 기꺼이 허리를 숙여 보낸 시선에 그녀는 숙맥처럼 고개를 숙였다. 수풀 사이에 숨은 꽃처럼 고개 옆으로 머리칼을 늘어놓았다. 빛 한 점 없는 쾨쾨한 지하에 그녀의 머리칼 안쪽엔 성긴 반짝임이 먹먹한 마음 뒤로 다가와 맞닿던 때, 그녀는 말했다.

 

고마...워요...”

 

! 우리 통성명이나 다시 합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인 거짓말쟁이씨. 저는 윌슨, 그린란드에 파견된 환경조사원입니다.

 

제 이름은... 레이시... 쉴 곳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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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방주에 도착합니다. 착륙시 기체에 충격이 발생할 수 있으니 탑승자께선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오랜만이라 설레나? 윌슨?”

내가? ?”

왜긴 왜야. 10년동안 오지에 처박혀있던 놈이 아닌 척은.”

그러는 너는?”

난 너랑 달리 가끔 들렀지. 애초에 너 말고 방주에 10년동안 얼씬도 안한 놈은 없을 거다.”

 

착륙시 충격이 있을 거란 말과 달리 기체 안은 평온했다. 이따금 돌풍이 불던 하늘이 더 무서웠다는 생각을 속으로 삼키면서 방금까지 노닥거리던 스탠과 함께 헬기에서 내린 윌슨은 와쳐 오브 네이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방주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다.

 

거 봐라. 아닌 척은.”

신경 꺼라. 어차 금방 나갈 건데.”

? 나가다니?”

 

자신을 비꽜던 스탠의 무구한 의문을 가볍게 무시한 윌슨이 므네모시네의 안내를 받아 그보다 먼저 방주에 들어서자 안쪽엔 마더의 명령으로 모인 동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왔냐.”

 

오랜만에 군중에 속해 떨리는 기분을 나름대로 가라앉힐려던 윌슨을 향해 건조한 음성이 날라왔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 놀랜드였다.

 

그래.”

“...저번에

됐어. 신경 안쓰거든.”

“...그러냐.”

 

일전의 통신으로 서먹한 분위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일은 더 이상 윌슨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네 덕이기도 하니까.”

뭐가?”

모르면 됐다.”

그러냐...”

마더는? 어디계셔?”

 

윌슨의 입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호칭이 나온 것에 잠시나마 놀랜드의 눈이 커졌으나 이내 다시 단조로운 낯짝이 되어 대꾸했다.

 

현지 업무 때문에 늦으실 예정인데... ? 또 뭐라 말하려고?”

... 우리 수송기 중에 지금 쓸 수 있는 거 있냐?”

 

질문에 대답은 못할 망정 영문 모를 요구를 들은 그였으나 이런 기행은 익숙한지 들고 있던 콘솔을 살펴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좀 멀어.”

그러니까 어디.”

동아시아 어딘가.”

?”

힘드냐?”

그건 아닌데... 마더한테 뭐 할 말 있는 거 아니었냐?”

있었지... 근데 그냥 네가 대신 전해주라.”

?”

그녀가 외로워하고 있어서 자리 비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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