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고 앉은 금란이 특유의 낮고 차분한 어조로 짧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런 금란의 대화 상대는 이제는 낡아버려 글귀조차 희미해진 차가운 대리석제 비석만이 홀로 남아 흘러간 세월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금란은 여전히 이 장소를 찾아오곤 하는 것일까. 본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금란이었기에 왁자지껄한 도심지의 광장 한 복판에 서있는 이 비석을 매일 방문하는 광경이란 금란을 잘 아는 인원들에게는 충분히 고개가 갸웃거릴 지경이지만, 이곳을 관리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익숙한 광경인 듯 그 누구도 금란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꽃이며, 작은 다과 거리를 챙겨, 금란에게 조용히 전해주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


"선선한 바람이며, 햇빛도 따스하니... 주인님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석하게도 금란의 대화의 상대가 된 비석은 조용하고 묵묵하게 있을 뿐이다. 금란 역시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 듯, 자연스럽게 비석을 향해 손을 뻗어 얕게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며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주인님의 감촉은 변함이 없을 터인데... 촉감이 달라져서 그런지... 차갑습니다..."


금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흘러가는 세월 앞에, 결국 평생을 맹세한 주인과 이별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이렇게 홀로 남겨져 오늘과 같이 주인의 마지막 흔적을 어루만지며 그리움을 느끼리라는 것을.


"오늘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날씨가 좋아 나들이를 겸해 주인님을 찾아왔습니다."


주인과 약간은 긴 이승에서의 이별을 겪기 이전, 종종 함께 나들이를 다니고는 했으니 습관처럼 지금의 드레스를 차려 입게 되었다. 언제나 '예쁘다' '어울린다' 와 같은, 낯 뜨거운 애정이 녹아든 인사를 건네준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드레스를 입고 이 장소를 찾아오면 언제나 첫사랑에 빠진 풋풋한 소녀와 같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록 주인의 육신은 죽어 멀리 떠나갔어도, 서로의 마음은 여전히 이어져 그 온기를 발하는 것처럼.


"비가 오면 같은 우산을 쓰고... 햇빛이 따가우면 같은 양산 아래에서 햇빛을 피하듯...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아온, 사랑하는 이와 함께 서로를 위했던 기억들이... 여전히 소첩의 마음에 남아있기에... 눈물을 보이는 일을 없을 것이옵니다."


'주인님께서 바라셨던 것처럼, 소첩은 충분히 행복했으니까요.'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같은 장소를 공유하며 살아온 세월. 천 년은 족히 살아갈 수 있다는 바이오로이드의 기준에서 주인과 함께한 수백 년의 세월은 짧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겨진 그 아름다운 추억을 슬피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에 금란은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주인님께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소첩이 왜 따사롭고 맑은 햇살을 좋아했냐 물으셨던 적이 있었지요."


당시에는 창피하여 말할 수 없었지만 이라는 말을 집어 삼키고 금란은 그 어느 때 보다 밝은 미소로 말을 이어나갔다.


"햇빛을 양산으로 가리면... 햇빛에 밝게 비추는 주인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아했었지요."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인 탓에 차분히 연모하는 주인의 얼굴을 또렷히 보는 행위는 하지 못했었기에, 금란은 그런 방식으로 주인의 얼굴을 기억에 남겼다. 물론 예민한 감각이 방해되었지만, 그것은 소중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얻은 능력을 대가로써 치른 것. 그래서 불평하지 않았다.


"양산만 있다면 밝은 곳에서도 눈을 뜰 수 있기에... 주인님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답니다."


마치 풋풋한 첫사랑의 마음을 고백하는 소녀와 같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 금란이 옆에 가지런히 놓인 양산을 펴 햇빛을 가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단아한 호박색 눈동자를 살며시 뜨고는, 비석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한번 어루만졌다.


"소첩, 조금이라도 더 이 장소에 머물고 싶으나... 아무래도 순번을 기다리는 다른 자매들이 있기에..."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낮고 차분하게 그러나 정중한 어조로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끝낸 금란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온화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금란의 주인이 아름답다 말해준 그 미소를, 다시금 주인에게 보이며 금란은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 나들이를 나갈 때면, 그 때에도 소첩의 양산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한 걸음 더.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서로의 몸이 밀착할 정도로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