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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너무 많은 거짓말.




* * *





계약이 끝나기 일주일 전, 나는 귀가 직후 몸이 바라는 대로 침대부터 찾았다. 도중에 깨지도 않고 늘어지게 잔 것은 오랜만이었다. 잠들기 전에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어서 몇 시간을 잠들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수면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8시간 정도 더 잤다.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 해가 거실을 밝힌 뒤였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있던 남자가 눈인사를 건넸다. 적당히 응해주자 남자가 놀란듯한 얼굴을 한 것 같았다. 뭔가 싶어서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니 어깨동무하듯이 소파에 팔을 걸친 모습만 보였다. 입은 모닝쇼 캐스터의 대사를 따라하고 있었다. 


수면에 수면을 이었던 탓인지 도중에 깼을 때 느낀 쾌청함은 묵직한 두통이 되어 있었다. 커피 먼저 내리자고 생각만 하고 손은 멋대로 움직였다. 몸에 밴 습성으로는 에스프레소를 만들어야 보통인데, 프랑스에 다녀온 영향인지 트레이에 올려둔 것은 카페오레였다. 


이미 만들어버렸으니 그냥 마시자는 생각은 안 했다. 볼을 두들겨 정신을 깨우고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카페오레는 남자더러 처리하라고 하면 된다.


거실로 가서 테이블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크림과 설탕을 깜빡한 걸 깨닫고 주방으로 돌아갔다가 거실로 왔다. 남자는 따로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카페오레를 즐기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한소리 했겠지만, 머리 절반은 아직 수면에 잠겨 있었어서 뭐라 하기도 귀찮았다.


좀처럼 잠이 달아나지를 않아서 모닝 쇼가 끝날 때까지 커피를 두어잔 더 마셨다. 남자도 똑같이 마셨다. 내가 거실로 갈 때마다 "나도 한 잔 더."라고 말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남자 몫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그랬다는 걸 세잔째가 되어서 깨달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남자 몫을 챙기지 않는 것도 째째하다 싶어서 세 잔째도 만들어주었다.


시침이 정오를 알리고 tv는 주말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없던 남자는 재방송까진 볼 생각이 없었는지, 테이블의 커피 잔을 들고 주방으로 사라졌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나는 얼씨구나 소파 카우치에 드러누워 셋톱박스 리모콘을 집었다. 애플과 넷플릭스, 아마존을 두고 고민하다가 넷플릭스를 켰다. 


"배고파. 밥 줘."


아리스 인 보더랜드를 보다가 잠든 걸 깨운 것은 건조한 울림이었다.


입과 맞닿은 소파 부근이 침으로 축축했다. 입가를 닦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남자가 배 언저리를 원 모양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밥."


잠기운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치켜 뜨고 계속 남자를 보았다. 


"밥 달라고."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일어섰다. 키 차이 때문에 일어서도 치켜 뜬 눈을 했다. 목구멍과 그 아래 부근이 근질거렸지만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뾰로통해 보이기도 하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삼십 분 정도 지나 거실에 울리는 것은 식기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tv소리 뿐이었다. 테이블에는 밥그릇과 국그릇 두 개씩, 반찬 서너가지가 올라가 있었다. 그 중에는 계란말이도 있었는데, 남자가 만들어달래서 만들었다. 부탁했다고 고분고분 만든 것은 아니고, 잠결에 손이 움직였을 뿐이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대화는 일체 없었다. 저녁 드라마 속 인간들이 읊는 대사만 있었다. 중장년층에게나 인기몰이를 할 법한 그런 드라마의 그런 대사 어디가 웃긴건지, 남자는 멍청하게 피식대며 젓가락을 놀려갔다. 


한그릇 더 달라고 해서 챙겨주기 전에, 내 몫의 설거지부터 하기로 했다. 그러다 싱크대 안에 커피 잔이 있는 걸 발견했다. 커피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잔이었다. 손이 절반 들어간 고무장갑을 벗고, 거실로 가서 멍청하게 웃는 얼굴에 던졌다. 짜고 친 것처럼 tv속 인간도 비명을 질렀어서, 귀에 들린 것은 하나로 겹친 두 개의 비명이었다.


"갑자기 왜 지랄이야!"


"싱크대가서 확인해."


얼굴에 튄 물기를 손으로 문질러 지우고 남자가 주방으로 향했다. 내가 째려보느라 중간에 움찔거렸다.


남자가 돌아와 말했다.


"커피 잔?"


테이블 근처에 떨어진 고무장갑을 주워 다시 던졌다.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달려가서 떨어진 고무장갑을 들고, 괜히 피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휘둘렀다.


"알았으면 와서 묻지 말고 설거지나 해!"

"앗 따거! 알았어! 알았다고! 따갑다니까!"


살갗에 마찰하는 찰진 소리 사이로 짜증과 애원을 반반 섞은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테이블의 식기도 치우라는 내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러는 남자의 모습을 소파에 엎드려서 감시하고 셋톱박스 리모콘을 들었다.


중간에 잠들어서 못 본 회차까지, 아리스 인 보더랜드를 전부 보고 새벽에 잤다. 일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나 있었다. 잠에서 일어나는 청각이 식기의 맑은 소리를 감지하고, 후각은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뚱한 얼굴을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토스트를 썰고 있었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처먹을 거면 식탁가서 처먹어."


셋톱박스 리모콘을 조작했다. 그러자 내가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채널을 바꿨다.


"나 볼 거야."

"식탁가서 처먹으라고 했어."

"어제는 뭐라 안 했잖아."

"세 번 말하면 죽는다."

"싫어. 먹으면서 볼 거야."


tv가 안 되면 스마트폰으로 보면 그만이다. 리모콘을 남자한테 던지고 침실로 갔다. 등에 "저 우라질 년이!"라는 말이 꽂혔다. 침실로 가다말고 달려가 무게와 속도를 고스란히 살린 주먹을 날렸다. 






* * *





귀가 후 4일째. 드라마에 질려서 책을 펼쳤다. 프랑스에서 구매한 삼총사였다. 얼마 없는 건실함을 뽐낸다면 언어 능력 향상을 위해 원서를 읽고 있다고 해야겠지만, 영문판이다. 그마저도 중간에 읽기 귀찮아서 좀 더 편한 언어로 구성된 판본을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다. 지금은 한국어로 된 판본이 손에 들려있다. 


"우리 프랑스에서 유명해진 것 같아."


이제 막 달타냥이 파리에 발을 딛은 대목에 접어들려는데, 남자가 프랑스에서 발간한다는 일간지의 기사 1면을 전했다. 소파에 누워있던 터라 움직이기 귀찮았지만, 흥미가 생겨서 귀만 남자에게 집중했다. 


축약하자면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대통령이 기거하는 엘리제 궁에, 달밤과 함께 유령이 찾아왔다. 엘리제 궁의 지붕 방향으로 상승하는 사람 모양의 실루엣이 시민들에게 목격됐다는 것이다. 실루엣은 어떠한 종류의 빛으로 밝혀져 있었으나 엘리제 궁의 경호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유령들이 완전 헛것은 아니었는지, 지붕에서 무언가 돌아다닌 듯한 흔적이 날이 밝고서 발견되었다. 때문에 엘리제 궁이 조용하게 소란스러웠다는 모양이다.


이번에도 남자가 손을 써서 들키지 않은 거겠지.


엘리제 궁에 프랑스 대통령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알았어도 엘리제 궁의 옥상을 대화 장소로 삼았을 것이다.


삼총사는 읽다가 끝무렵에 덮었다. 제목이 관용어가 됐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라 재밌을줄 알았는데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다. 스토리는 그렇다 치고, 등장인물들의 행보가 까놓고 말해서 아주 개막장이었다. 거지 짓거리에 불륜에, 왜 이런 놈들이 유명한 걸까?


총사대의 행보가 뇌리에 남아있던 영향으로 영화로 된 삼총사를 틀었다. 2011년작에 주연이 올랜도 블룸이라고 하니 기대가 됐지만, 정작 보다 보니 올랜도 블룸은 의식에서 밀려나고 라스 미켈센과 크리스토프 발츠만 눈에 들어왔다.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어서 남자가 본인의 지정석인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나는 남자에게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샬럿을 보면 뭐라고 할까?"


"질문이냐?"


이미 대답을 정해놨으면서 뭘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정해져 있지. 알렉상드르 뒤마가 샬럿을 보면? 관짝을 뚫고 나와 직접 샬럿의 목을 칠 것이다. 아니다. 머스켓을 이마에 쏴버렸을라나? 아니지. 관짝을 먼저 뚫고 나와야 샬럿을 볼 수 있지. 그러면 관짝에 도로 눕지 못할 것이라는 걸로 하자.


"내가 뒤마였으면 있지. 그 추잡한 년을 목도하면 관짝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거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샬럿들 다 처죽일 때까지. 뭐, 소설의 달타냥도 썩 좋은 인간은 아니니까 고증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의외로 절반 정도는 살려줄 수도?"


"그럼 뒤마가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뭐 이 씨발아?"


남자가 리모콘으로 엔딩 크레딧이 흐르던 화면을 크리스토프 발츠가 등장하는 장면까지 되감았다.


"뒤마가 널 보면 뭐라 생각하겠냐고."


"뭐라 생각하긴 뭐라 생각해. 존나 자랑스러워하겠지."


" "씨발아."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불대는 추기경을 퍽이나 자랑스러워하겠다."


남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고 내가 기분 나빠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럼~ 이런 속물같은 추기경도 신선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겠지. 더러울 거면 완전 더러워야하지 않겠어? 어떤 추잡한 년처럼 애매한 것보단 그게 더 나아. 돈 좋아하고, 잘생긴 자지 좋아하고, 틈나면 좋아하는 남자 떠올리면서 자위하는 추기경님은 제법 매력적으로 보이겠지."


"지, 지랄한다."


"응~ 지랄~ 들어갈 때 tv 꺼."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하며 말했다. "더러운 추기경님은 낮술 걸치고 자위할 거야."


"미친 또라이 년아!"


"훔쳐보면 뒤진다?"


"뭘 훔쳐 봐! 진짜 이거 개또라이네!?"


"자위! 자위! 신난다! 자위!"


침팬지처럼 행동하니 리모콘이 날아와 머리를 스치고 주방 복도 쪽에 떨어졌다. 주워서 도로 던지자 "내 집이야!" 라고 남자가 노기를 담아 외쳤다. 제 집이니 젖어갈 예정인 침대도 제 것이라 말하는 듯했다. 이런 반응이면 더 자위하고 싶어진다.


주방에서 깔루아 밀크를 만들어 방으로 들어가 천천히 음미했다. 사고를 칵테일에 집중하자 온갖 술로 도배되어있던 진열장이 허전해진 게 떠올랐다. 다음에 장 보러 나가면 잊지 말고 술도 사자. 많이. 종류별로. 남자 돈으로.


술 생각에 자위 욕구는 사라져버렸다. 자위를 의식하고 있었더래도 하진 않았을 것이지만. 미쳤다고 저런 놈이랑 같이 있는 곳에서 씹구녕에 손가락이든 이런저런 도구든 쑤셔 넣겠는가. 한다면 남자가 골아 떨어진 시간에나 한다.


저녁나절까지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스마트폰에 눈을 처박고 있으려니 요 사이 며칠이 떠올라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식사도 걸렀다. 식욕에 끌려 저녁밥을 만들다보면 또 남자 몫까지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짜증나는 며칠이었다. 아무리 잠기운 때문이었다지만 내가 저 놈 식사까지 챙겨줬다니, 가까운 과거의 내게 욕을 퍼부으며 반성했다. 오늘부터나 내일부터 내 몫만 만들자.


"밥 안 먹냐?"


발소리도 노크소리도 없이 문틈에 걸쳐진 남자의 머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대답으로 깔루아 밀크를 담았던 잔을 던져버렸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여자 방에 노크를 안 한단 말인가.


"진짜 성질머리 드러워서…"


궁시렁대는 머리에 던질 만한 것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자 급한 기색으로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리고 식사만 문제가 아니었다. 태도 전반에 문제가 있었다. 너무 무방비했던 것이다. 너무 태평한 며칠이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아니라지만 상대가 상대다. 그런 놈 앞에서 슬립이 헐거운 나시에 짧은 츄리닝만 입고 소파에 엎드리거나 배를 드러내고 널브러져 있었다. 


잊지 마. 이상한 새끼야. 그것도 아르망 추기경만 좋아했다는 놈이라고. 혹시 모르잖아. 와이프랑 착각해서 덮치려들지. 그런 짓 안 한다고 호언장담했다기로서니 여기가 내 집인 양 굴면 안 돼.


"진짜 밥 안 먹냐?"


또 머리가 문 틈새로 들어왔다. 또 발 소리도 노크 소리도 안 들렸다. 협탁에 올려놓은 장갑을 착용하고 팬텀을 꺼내 던졌다.


"아 씨발 노크 했다고!"


팬텀이 꽂힌 문 너머로 남자가 외쳤다. 내가 못 들었으면 안 한 거다.


다음날부터 나는 태도를 바꿨다. 정확히는 원래 남자에게 취하던 스탠스로 돌아갔다. 절대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식사는 내 것만 만들어 혼자서 먹었다. 남자가 소파를 차지하고 tv를 보고 있으면 나는 방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대거나 노트북을 굴려대거나 했다.


그러다 이틀 더 지나고서, 원래 스탠스로 돌아간 것이야말로 더없이 남자를 의식하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지? 어제도 오늘도 남자는 내게 별 신경쓰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심드렁하게도 느껴지는 태도였다. 나도 신경 끄면 그만인 듯했지만,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절로 땀이 배어나오고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정도의 불안은 아닌데,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불안도 아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래로 남자의 어딘가가 변했다. 변한 것처럼 보인다. 


틀려. 사실 변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남자의 과거 일부분을 듣고, 그런 과거를 읊는 표정이 간혹 쓸쓸해 보였기에 지금도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자세한 이야기도 모르면서, 은연 중에 그저 와이프를 빨리 떠나보냈다는 사정을 측은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멋대로 슬픈 이야기라 단정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와이프를 떠나보낸 전모가 실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면 어쩌려고? 정신 차려. 버킷리스트니 죽은 와이프니 하는 슬픈 뉘앙스에 휘말린 거야. 쓸쓸해 보이는 걸로 착각하는 거라고.


나름 정리를 끝냈는데도, 남자에게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딱히 피할 이유가 없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요새 왜 말이 없어?"


직접 만들었다는 된장국을 후후 불어 삼키고 남자가 말했다.


나는 밥을 먹긴커녕 수저에도 손대지 않았다. 않은 건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뭐가 이렇게 불안하지.


"야."


원인이 뭐지.


"어이."


왜 이 새끼가 갑자기,


"아르망!"


사라져버릴 것 같지.


"오와아악! 또라이 년아!"


퍼뜩 정신이 들자 내 손에는 텅 빈 국그릇이, 그릇에 담겨있었을 내용물을 남자가 뒤집어 쓰고 있었다. 허둥지둥 펄쩍펄쩍 뛰면서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몇 초 뒤에 샤워기 소리가 들렸다. 좀 너무했나 생각했다. 아르망이라고 불린 게 한 두 번도 아닌데.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불안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수건을 머리에 걸치고 투덜대면서 나온 남자에게 물었다. 가운 차림이었다.


"다음은 언제야?"

"뭐?"


남자는 식탁에 흐르는 된장국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다음 리스트 언제 달성하실 거냐고."

"보채는 거냐?"

"종용하는 거야."

"왜?"

"왜냐니?"

"어… 왜?"

"그거 달성하겠다고 나 달고 다니는 거잖아."

"왜 종용하는데? 급해?"

"급한 건 아닌데."

"그럼 뭔데?"


"계약했잖아! 너 그거 달성하는 거 도와주면 폐하와 관련된 뭔가를…! …내가 거부할 수 없을 거라며. 그걸 위해서라면 빨리빨리 달성하는 게 낫잖아."


"그래. 그렇지."


또다. 묘한 쓸쓸함. 그것을 가리려는 듯한 장난스러운 미소.


남자는 주방에서 행주를 가져와 식탁을 닦고, 컵을 들고 다시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잔 받아와 앉았다.


"끝."


휙 날아가는 것처럼 들렸어서 되물었다.


"끝?"


"응. 끝. 계약은 끝이야. 고생했어."


"진짜? 프랑스가 끝이라고?"


"아, 그렇다니까 그러네."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나는 기뻐하지 못했다. 이렇게 쉽게 끝날 리 없다.  분명 뭔가 더 있기에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끝을 고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남자라면 틀림없다. 어떤 사실을 고할 때는 항상 좋지 않은 이야기만 꺼내던 놈이다.


"흥. 뭐가 더 있겠지. 빨리 말해. 다음은 뭘 하면 돼?"


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쉰 남자는, 무표정으로 쓸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 * *





간밤에 내린 비로 아스팔트의 움푹 파인 곳에 생긴 웅덩이가 납빛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젖은 보도에 들러붙은 낙엽은 가을이 실낱 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도 우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때문에 불행하게도 인간들에게 벌레처럼 짓이겨지고 문드러졌다. 유난히 낙엽이 많이 모여있는 곳은 벌레 사체가 즐비한 한여름의 가로등 아래를 떠올리게 했다. 


가히 겨울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음울한 가을의 평일이었다. 시간대도 시간대고 날씨가 구려서, 번화가에도 대로변의 상가들에도 인간들이 적었다. 흐린 날을 좋아하고 인간이 싫은 내게는 반가운 환경이다.


반가운 그런 환경인데 카페의 유광 백색 테이블에 하얗게 비친 내 얼굴은 냉랭하기만 했다. 테이블을 매개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도, 무표정이란 감상이 호평인 얼굴이었다. 머릿속은 겨울 같은 가을 하늘의 색깔에 한없이 가까운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동안 아파트에서 잠도 안 자던 그 인간이 일주일이나 넘게 지내면서, 늘상 건네던 아침 인사도 생략하고 좀 나가있을 수 없겠느냐 부탁해왔다. 나도 방에 며칠이나 틀어 박혀 있었으니 슬슬 나가볼까 생각하던 참이었고, 부탁 자체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며칠 간 느낀 불안만 아니었다면 부탁받은 시점에서 10분도 안 되어 나가줄 수 있었다.


아침의 대화를 떠올린다.


"왜 나가라는 건데?"

"누가 보면 쫓아내는 줄 알겠네."

"집에서 혼자 뭐하려고?"

"내가 뭘하든 기지배야. 반나절만 나가 있어."

"자위할 거야?"

"이게 며칠 전부터 입만 열면…"

"아르망 추기경 상상하면서 딸 칠 거야?"

"이 미친 년이 이젠 선을 막 넘네!?"

"네 와이프 말고."

"그럼 뭐, 네 상상하느냐고!?"

"그렇게는 말 안 했는데… 변태 새끼."

"안 쳐! 안 해! 변태 년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대고 앞머리를 정리했다. 


"…말이 너무 많았어."


혼잣말대로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럴 필요가 전혀, 전혀 없었다. '그냥 네가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정직하게 물었어야 했다. ……그렇게 물어봤어도 말이 많았을 것 같지만 단도직입적인 편이… 깔끔해 보이니까 좋다.


머리가 조여들듯 가볍게 지끈거렸다. 두통이 딱 좋게 청량제로 작용하여 사고의 방향을 바로 잡아줬다. 정직해? 깔끔해? 남자에게 내보이는 태도야 아무래도 좋잖아. 그런 놈을 배려라도 하는 거야? 불안한 이유만 딱 잘라서 말하면 그만인 거 아니야? 계약 보수 떼먹고 도망갈까봐 불안한 거라고 묻는 게, 그렇게 어려워? 


"떼먹고 도망갈 생각하지 마."


현관으로 들어서자 남자와 딱 마주쳤다. 왜 현관에서 서성였는지는 차치하고서, 프랑스에서 사온 옷이 어울린다고 칭찬하는 남자에게 곧장 물었다.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되물어오길래, '정직하게' 말했다.


"네가 사라질 것 같아."


"……으응?"


남자의 볼이 오목해졌다.


"갑자기 사라질 것 같다고! 항상 그랬잖아!"


"내가 왜 사라져?"


항상 그랬지 않느냐고 말한 건 10분 전도 아니고 지금이다.


"항!상! 그랬잖아!"


"…약 했냐?"


눈까지 뗑그래져서 얼빠진 얼굴이 된 남자를 끌고 테라스로 갔다. 담배를 물고, 주머니를 뒤져도 라이터가 안 나와서, 남자가 걸친 가운 주머니를 뒤지고 불을 붙였다. 남자는 양 눈깔에 의문부호를 큼지막하게 그려놨다.


"약 했냐고."


"안 했어 병신아!"


어조만은 심각한 게 짜증나서 욕으로 받아쳤다.

약을 모르는 인간이 아니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자, 그런 일부러인 태도는 곧 시작될 대화를 구태여 회피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문득 그런 직감이 들었다. 두 번째 담배가 직감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문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기억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어도, 가만히 돌아보면 오늘만 이런 식으로 회피하려든 게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황당할 정도로 하찮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남자가 테라스를 나갔다. 담배가 떨어져서 사온단다. 나는 남자의 등에 비스타를 주문하고, 종류 상관없이 아무 위스키도 사오라고 추가로 주문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찌푸린 눈살로 대답하고 현관 쪽으로 사라졌다.


한 개비 더 태운 다음 다이닝 룸의 식탁에 유리 재떨이를 두고 기다렸다. 집 안 조명은 모두 껐다. 식탁 위만 켜두었다. 


스마트폰에서 알고리즘이 추천한 올드 팝이 흐르고, 재떨이에 꽁초가 2개 처박힐 쯤이 되어 남자가 돌아왔다. 조명이 켜진 곳이 다이닝 룸뿐이라 남자는 빛에 이끌리는 벌레처럼 다가왔다.


흐르는 음악 때문인지 미국 귀신 튀어나올 것 같다고 남자는 궁시렁거리면서, 집 안을 그런 감상을 들게 만들어둔 나를 못생긴 희귀생물 보듯하며 담배를 꺼내놨다. 나는 내 몫의 담배를 챙기고 위스키 잔을 가져와 식탁에 올렸다.


두 잔에 위스키가 채워진다. 그 전에 얼음은 남자가 넣었다. 내 잔엔 세 덩이, 본인 몫의 잔에는 두 덩이. 자연스럽게 맞춰주는 것으로 보아 준비가 된 거겠지.


"준비되셨나요? 폐하."


말로 확인했다. 남자는 끄덕였다.


"아 참. 깜빡했다." 위스키를 식전주 바라보듯하며 남자는 잔을 돌렸다. "여행은 즐거웠어?"


나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되감기했다. 잘못 들었던 건 아닌지, 즐거웠냐는 울림이 잔잔하고도 불쾌하게 두개골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상냥한 어투는 모래알로 생긴 작은 파문처럼 퍼져 머리 중심에서 귓가까지 완만히 간질였다. 


둘 중 누군가는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자리는 심각해야만 한다는 나와 여행에서 쌓인 얕은 회포나 풀려드는 남자. 자리를 준비했단 점에서 나처럼 심각한게 자연스럽고, 대화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어투와 질문이란 점에서 남자 쪽이 부자연스럽다.


"나 즐겁자고 간 여행 아니잖아."


유치한 짓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정상이다. 오늘은 놔주지 않는다. 제 입으로 계약에 끝을 고했다. 그럼 끝이다. 아직 계약은 끝나지 않았다고 이상한 억지를 부려봐야 소용없다. 


"사실 너 즐거우라고 간 거야."


문장에서 '사실'을 빼고 '너' 뒤에 '도'를 붙여서, '너도 즐거우라고 간 거야.' 라고 했다면 어려워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뻔뻔한 거짓말. 본인 좋자고 프랑스에 간 것이고 나는 을의 위치에서 와이프를 연기했을 뿐이다.


잔이 입에 닿아 얼음이 달그락대는 소리를 낸다. 정면에서 마주쳐오는 눈빛이 따뜻하다. 웃음 지은 얼굴은 정말 잘생겼다. 그러나 그뿐이다. 다른 덜떨어진 년들이라면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한다. 


혹시, 미인계일까? 우스운 가정이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확실하다. 이 남자는 지금 절박하다. 미모를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내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않으려 몸부림을 쳐대는 것이다. 


이해가 어려운 인간이다. 그런 걸 보수로 내 건 이상 언젠가는 찾아올, 피할 수 없는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 할 거면 좀 그럴 듯하게 해."

"정말인데."

"그만하지?"


머리를 긁적이고 남자는 양팔을 넓게 벌려 테이블에 올리고서, 무게 중심을 뒤로 둬 등받이에 등을 깊게 묻었다


위스키를 홀짝여가면서 남자가 물었다.


"즐겁긴 했지?"


"아니."


"거짓말을 할 거면 좀 성의있게 해. 본 게 있는데."


확실히 너무 성의가 없었다. 여기서까지 아니라고 하면 되려 추해보인다. 당장 오늘 외출할 때도 뿌렸던 것이 발랑솔에서 얻은 몰리나르의 향수였다.


솔직하게 긍정하고 잠시 위스키를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적당히 얼음이 녹아 딱 취향에 맞는 맛이 났다. 옥수수와 바닐라를 섞은 듯한 향이 뜨뜻해진 목구멍에 아늑하게 달라 붙었다.


"보수라. 내 이야기 말이지."


남자는 술잔에 말을 걸듯 얼음에 파도처럼 철썩이는 위스키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잔에 시선을 둔 채로 남자가 말했다.


"어려워지지 않을까?"

"뭐가?"


나도 잔을 본 채로 대답했다.


"나를 알면 알수록 죽이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지독하게 증오스러운 놈의 이야기라한들, 듣다 보니 마음이 흔들려버린 나약한 감성의 소유자였다고 대화의 끝에서 깨달았으면 좋겠다. 아직 내 안에 옛적에 버린 인정이 실낱 만큼은 남아 있었던 것이라고, 그래서 아직 누군가에게는 연약하고 인간적으로 비춰질 존재였다면 좋겠다.


유감스러운 이야기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선을 넘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이 남자를 죽이고 싶다. 차분히 시간과 공을 들여서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다. 비명으로 떨리는 목이 보고 싶다.


곤혹이 묻어나오는 미소를 짓고 남자는 포기한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기뻐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고작 한 잔에 취한 건지도 모른다.


이제 잡담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료와 폐하라는, 본론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대화의 흐름은 내 바람대로였다. 중간중간에 남자의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샐 것 같으면, 적절히 조치를 취해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다만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프랑스행 비행기에서 들었던 에피소드같은 것들 뿐이었기에 도중부터는 하등 잡담을 나누는 것과 다름없어졌다. 도중에 그만하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어쨌든 남자 자신의 이야기인 건 맞으니까. 


게다가 말이 좋아 에피소드지, 이 자리와 아무 상관없는 인간이 듣는다면 자신이 얼마나 쓰레기인가를 자랑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이야기다.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준비해뒀던 재떨이에 쌓여가던 담배꽁초는 산이 되어,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식탁으로 와르르 쓰러질 만큼 높아졌다. 위스키 병은 진즉에 바닥을 드러냈다. 새벽이 지나 나타난 해가 창을 통해 우중충한 납빛깔 조망을 펼쳤다. 정오가 지났을 무렵부터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어느새 스마트폰은 더 이상 노래하고 있지 않았다. 눈이 그친 창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쓰레기가 집필한 단편집 열람은 내가 저녁을 인식한 때에 그쳤다. 


온갖 생리 현상도 무시해가며 꼬박 하루 동안 이야기를 들은 것이 된다. 그래도 잠이 오지는 않았고, 굶을 이유는 없었기에 간단하게 떼우기 좋은 걸 만드려고 주방으로 갔다. 그러자 남자가 멈춰 세웠다. 내가 만드는 것도 좋지만 간만에 배달 음식이 땡긴다나. 나는 내 몫만 만들 생각이었다 말하고 거실에서 대기했다. 가끔은 배달 음식도 나쁘지 않다. 직접 만들어 먹는 것도 귀찮을 때가 있다.


배달 음식은 구운 닭과 맥주였다. 닭과 맥주 냄새를 맡자 위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화 없이, 맥주를 곁들인 식사는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몇 끼 분의 허기가 너무 끔찍해서 도중에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허기가 정말로 싫다.


식사를 마치고 샤워했다. 뒷정리는 남자에게 시켰다. 배도 채워지고 몸에 온수도 끼얹은 다음은, 생리적 수순에 따라 잠이 몰려왔다. 식사 후에 곧바로 대화를 재개할 생각이었지만 졸음의 크기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기절하듯 잠들고, 도중에 깨서 충전 중이던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일출까지 4시간 남은 시각이었다. 밤이 되기 직전에 누웠으니 9시간 정도 잠들어 있었다.


가디건을 걸치고 테라스로 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쳐들어 연기를 뿜었다.


도시의 하늘에는 드물게 별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인류에게 더러워진 하늘이라 반짝임의 크기가 형편 없었다. 양초를 모두 녹이고 미약하게 살아있는 불씨만도 못해서, 금방이고 사라질 것 같다기보다는 아지랑이 속의 헛것에 가까웠다.


어째선지 그것이 남자를 연상시켰다. 멍하게 담배를 피우고 침대에 누워도 연상은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히 며칠 전 같은 불안은 없었으나, 수면에 방해는 될 정도였기에 다시 눈을 감지는 못했다.


일출까지의 4시간 동안 생각했다. 몇 년 전에 남자는 말했다. 떠올려 보라고. 자신을 고문할 재료는 나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 속에도 많을 것이라고. 떠올릴 게 따로 있다. 끔찍한 놈과 함께한 끔찍한 시간이 떠올린다고 쉽사리 떠오를 리 없다. 끔찍한 기억일수록 뇌리에 강렬하게 박히기 마련이겠지만, 그것도 적당히 먼 과거에 박혔어야 떠올릴 요소로 사용할 수 있다.


떠올려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떠올린 것도 있다. 멸망하는 세계를 함께 내려다보던 것이 기억나고, 한창 약에 절어 살 때 두들겨 맞은 것이 기억나고, 잘생긴 자지들 애태우다가 처맞은 것도 기억나고, ngo활동 중이라고 헛소리를 했던 것도 기억난다. 건실하게 살라고 한 것도 기억난다. 그보다 더 전의 일몇 가지도 기억나지만, 재료로 쓸 만한 것인지 판별은 안 된다.


날이 밝았다. 테라스에서 눈이 쌓인 거리를 보고 사고를 정지했다. 남자와 함께 한 과거를 떠올리려던 끝에, 떠올려달라는 그 말이 질나쁜 획책 내지는 노림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로 하여금 자신을 떠올리게 해서, 그렇게 자신을 의식하게 만들어서, 죽음을 회피하려는 계획인 것은 아닐까, 하는. 태평했던 요 며칠 간과 연계된, 그런 계획. 


생각이 너무 많다. 나는 이게 문제다. 900년 넘은 시간 동안 겪었던 일 중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르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곧 뒤질지도 모르는 지금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생각하되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무엇보다 넌 지금 미온적이다.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 남자가 극구 피하려 했던 주제들. 그래. 말하기 싫대서 넘어가줬던 것들. 그 부분을 파고 들어야 해. 그게 약점이야.


볼을 두들겨 정신을 환기시키고 방을 나섰다.


"도망갈 생각하지 마."


소파에 앉아 팩우유에 꽂은 빨대를 쪽쪽대던 남자가 또 시작이냐고 말하는 듯한 질린 얼굴을 했다. 안 봐준다. 대화도 쓸데없이 길게 할 생각 없다. 짧고 굵게 끝낸다.


카우치에 앉아 방석 베개를 무릎에 올리고 말했다.


"도망갈 거지?"

"아침부터 씨팔 뭐라는 거야…?"

"도망갈 거잖아."

"옷이나 똑바로 입고 나와 기지배야."


몸을 살피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슬립 나시까지는 좋은데 하체가 속옷 차림이었다.


"왜 자꾸 도망갈 거냐고 묻는 건데?"


실내복으로 쓰는 짧은 츄리닝을 입고 나가자 남자가 물어왔다.


"도망갈 생각이잖아."

"약 했냐?"

"안 했다고!"


힘없이 한숨 쉬고 남자가 일어서서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안쪽으로 움츠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너를 두고 달리 어디를 가겠어."


유성.


갑자기 눈에, 유성이.


"아무 걱정 마. 아르망."


"그, 그렇게…"


"응?"


"그렇게 부르지 마."


"뭘? 아르망이라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야! 너! 따로 많잖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아르망이라고 불렀는데?"


"내가 아니라 네 와이프 부른 거잖아!"


남자는 미소짓고 있었다. 아주 단조롭게. 가능한 감정적인 것만은 표정에서 배재하려는 것처럼.


"아르망. 나는 아무데도 안 가."


당혹스러운 짓을 해가면서까지 말하니 믿어 보자. 애시당초 이런, 당혹스러움을 맛보게 된 원인은 내게 있다. 내 멋대로 남자가 떠나지 않을까 불안했을 뿐이다. 


애처럼 떼를 쓴 것 같아 수치심 비스무리한 것이 가슴 속에 일었다. 지금 상태로나 앞으로 할 대화로 보나 술이 필요해져 버렸다. 


진열장에 얼마 남지 않은 술 중 아무거나, 라벨도 확인하지 않고 꺼내서 주방으로 갔다. 약을 들이키듯 네 잔을 삼키고, 어제 남긴 맥주도 삼켰다. 급성 알코올 중독 일보 직전이 되어 인지 능력이 떨어졌지만 정신은 아주 말짱했다. 


그 다음 순간에, 나는 남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다. 그런 상태라는 것을 인지한 다음은 공격적으로 굴자고 생각해서, 뛰어간답시고 뛰었다가 거실에서 나자빠졌던 게 기억났다.


"추기경님. 뭐가 그리 걱정이세요."


호칭이 신경 쓰였다. 왜 굳이 그렇게 부르는가 싶었는데 귀에 며칠 전에 본 영화의 대사가 들렸다. 삼총사다.


…잘 움직이지 않는 혀로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며칠 전, 하루를 꼬박 쏟아도 다 듣지 못한 남자의 사령관 시절 에피소드를 듣던 때다. 


나는 남자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도 틈틈히 얼굴이나 몸짓을 살폈었다. 좋은 시절이었다는 듯 시종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이야기가 몇몇 있었다. 


이제 다 지나간 이야기라 행복하게만 추억하고 싶다, 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죽으려 했다는 걸까. 기억하고 있다. 남자는 엘리제 궁전의 옥상에서 분명히 죽으려 했었다고 말했다. 사령관 시절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는 양 추억하면서, 정작 죽고 싶었다니.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엔 억지스럽게 행복했다고 뇌까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으려 했다는 것과 관련된 것은 이야기는커녕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그 수많은 에피소드에 단 한 개체만은 등장하지 않았다.


듣지 못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고작 하루 만에 풀어놓기엔 시간이 모자랐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남자는 숨기고 있다.


남자는 사령관 시절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했던 시절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자기 암시를 걸듯.


…어쨌든, 좋다. 마냥 행복했다고 하기엔 많은 것이 의문스러운 사령관 시절은 행복했던 것으로 치자. 의문을 제기하면 진짜 행복했었노라고 우길지도 모르고. 진짜 행복했던 시절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면 그 이후는? 나는 재료 생산 시기를 사령관 시절로 국한하겠다고 한 적 없다.


남자는, 사령관직에서 은퇴한 이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몇몇 에피소드는 감추고 있다는 추정에서 미루어보면, 시간 여행자로서의 이야기는 모두 감추고 있다는 게 되겠지. 프랑스에서 남자의 스마트폰을 통해 알게 된 것만 빼고.


이 부분이 폐부일 것이다. 시간 여행자가 된 이후의 이야기. 그 폐부를 찔러야 수천 년간 무엇을 겪었기에 그토록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질문했었지만, 그때는 그냥 오래 살았기 때문에 미친 것이라고 대답했다. 얼버무렸던 것이다.


뭐, 짐작가는 바는 있다.

그런 게 아닐까 꽤 전부터 생각해보기는 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발견해내기 어려운 답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내 쪽에서 부러 시선을 돌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면 남자는 부정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시간 여행을 하게 된 계기, 시간 여행의 목적…"


그럼에도 나는 확신한다.

이제 전부 알겠다.

그것 밖에는 없다.


고양이에게 구석까지 몰린 생쥐 같은 입장이 됐는데도, 남자는 지금까지 보였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코올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손상된 영사기 속 인물 같은, 새벽녘에 본 도시의 별 같은, 갑자기 사라질 인간이 지을 법한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아르망 추기경."


사형선고와도 같은 그 개체명은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열리려던 입을 다물고 남자의 허벅다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졸려서도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렇게 누워서 차츰 술기운이 날아갈 때까지, 나는 시간여행자로서 남자가 지닌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 * *






"고문, 기대하고 있을게."


소파에서 남자에게 기대어 잠든 것이 기억의 마지막 지점인 채로 집에서 나왔다. 첫눈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강설량을 기록한 겨울의 시작에, 뉴스도 신문도 올해의 겨울을 우려하고 있었다.


낙엽과 눈이 뒤섞인 길을 걸어 정처없이 걸었다. 어디를 들른다 해도 카페 같은 곳 뿐일 것이고, 몇 년 전 만큼 인간들이 더럽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버림받은 재건축 현장 같은 곳에도 발길이 가지는 않았다.


집을 나오면서 들린 말이 뇌리에 붙어 있다. 고문을 기대한다고. 표정을 본 것은 아니지만 어떤 표정으로 말했을지 잘 그려지는 어투였다. 


설마 진심으로 기대하지는 않겠지. 고통은 적응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알고 맞는 것과 모르고 맞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도를 넘어가면 아프고 괴로운 것은 똑같다. 고통이 익숙하니 즐길수도 있다고 자신하는 것들은 대개, 오래 못 산다. 살고 싶지 않으니 즐길 수 있다고 말하는 놈들은 더하다. 생생한 고통을 맛보여주면 한 시간도 안 돼서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다. 어떻게든 오래 산다? 진즉에 영혼이 찢기고 도려내지고 터져나간 상태라 사느니만 못하다. 멀지 않은 옛적의… 나처럼.


변화같은 걸 몇 번 맞이하긴 했지만 여전히 괴롭다. 여전히 죽고 싶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폐하를 볼 수 없다. 사는 목적이 없다. 남자를 죽인다는 목적이 있긴 하다만, 누군가를 죽일 목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내가 천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가난하고 밑바닥에 사는 인간이더라도 목적이라 부를 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살아있는 것, 그저 숨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

나는 아니다. 그냥 살아있는 게 목적이다? 짐승과 마찬가지 아닌가. 


예년, 900년 전, 800년 전, 700년 전, 그보다 가까운 시간대에서도 보았던 몇 번의 겨울들과 똑같이, 거리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긴 시간 수천 수만 번 들렸던 번화가에도 몇 개의 크리스마스용 트리가 들어섰다. 일주일쯤 지나면 올가미같은 알전구에 묶여서 의사와 상관없이 다채로운 빛을 뽐내겠지. 


은퇴한 사령관, 시간 여행자, 남자. 머릿속에 남자가 가득했다. 교묘하게 설계된 함정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버킷리스트 달성을 위한 계약의 진정한 목적은 나를 이러한 상태로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었을까……는 민망할 정도로 나 자신을 높이 생각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남자와 관련해 나 자신을 낮추자니 그건 또 싫었다.


결국 술을 찾았다. 술에 의지하는 인간이 아닌 즐기는 인간이 되자고 자주 마음 먹었는데, 수명이 거의 다한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술에 의존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예쁜 아가씨한테는 서비스! 20%dc 해줄게."


서비스해줬으니 또 와달라고, 나를 처음 온 손님처럼 대하는 술집 사장은 한 때 나를 단골로 대한 인간이었다. 아마도 사축으로서의 고충에 괴로워하던 때일까. 짜증나게 헌팅같은 것도 거의 없어서 혼자 즐기기 좋았었던 것 같다. 오늘도 그랬다. 취급하는 주류가 많고, 사장의 솜씨가 뛰어나 칵테일 맛도 좋다. 좋았다. 그리우면서도 그립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만 기억하고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나만 변했다.


한 때는 이런 생각으로도 괴로워했지. 뭐가 중요했다고. 그냥 폐하를 보기 위해 버텨야 하는, 거쳐야 할 시간이었을 뿐인데.


돌아온 과정에 대한 기억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코트를 벗어 던지고, 어떤 코디인지 기억 안 나는 차림들도 뱀 허물 벗듯이 벗어 던지고서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면서도 발소리만은 죽여가며 남자의 방을 확인했다. 골아 떨어져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이제 막 23시가 지났음을 확인했다. 빨리도 잔다.


다음 순간에, 나는 남자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필름이 끊기는 체질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알고 있다. 그래서 내 행동의 과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 남자에게 올라타고 있다는 것도, 뭐, 속옷 차림이라는 것이 다소 꺼려지긴 했어도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올라 탄 게 분명할 텐데 놀란다는 것도 우스웠다.


"웬일로 브라를 찼냐?"


눈이 말똥한 것이, 처음부터 자고 있지 않은 듯했다. 가슴께에 네 주제에 무슨 브라냐는 시선이 꽂혔다. 평소엔 브라를 안 찬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과 어투가 신경쓰였지만, 지금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닥쳐."


팬텀의 날을 세워 목 언저리에 가져다댔다.


"술 냄새…"

"닥치라고 했어."


팬텀에 힘을 준다. 어두워도 팬텀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실가닥 만한 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고문 준비는 끝난 거야?"

"닥치라고."

"고문 안 할 거야?"

"닥쳐!"

"기대하고 있는데?"

"닥쳐! 닥쳐닥쳐닥쳐!"


아아, 이럴 때, 두번째 오르카의 내가 대신해준다면 참 좋을 텐데.


"고문해줘."


이런 말을 하는 인간은 평이 안좋은 영화 속에서 밖에 본 적이 없다.


"설마, 준비 안 한 거야?"


남자의 눈알이 팬텀 쪽을 향했다. 팬텀의 끄트머리에서 뭔가를 감지했는지, 남자는 실망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어둠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구겨지는 움직임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안 했구나?"


맞다. 안했다. 못했다.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죽인다. 언젠가 죽인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 굳이 고문이 아니어도 된다. 어떤 식으로든 남자가 고통스러워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우리 폐하, 네가 어쩔 건데?"


이게 제일 중요하다. 폐하와 관련된 것. 

내가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거라 남자가 자신한 것.


창문 쪽에서 두둑두둑하는 불규칙적인 마찰음이 들렸다. 첫눈이 내리고 이틀도 안 돼서 비가 내리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갈게."

"뭐?"

"수명이 다해서 네가 죽더라도, 내가 갈게."

"우리 폐하한테, 네가 가겠다고?"

"응. 그러니까, 자."


팬텀을 통해 남자의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찔러달라 재촉하듯, 칼끝에 눌린 목이 좀 더 눌린 것처럼 보였다. 


죽여달라고, 남자는 죽여달라고 말하고 있다.

나를 대신해 폐하한테 가겠다고 말한 직후에, 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당신 죽여 버리면, 폐하한테 못 가잖아."

"어라!? 그러네!?"


이, 멍청한.

처음부터.


"너! 처음부터!"

"하하… 미안."


이 남자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 * *





방의 조명을 켜고 침대에 걸터 앉아서 확인한 남자의 얼굴은 어떻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이 표정이 조명을 키기 전 그대로였다 가정하면, 조금 무서웠다.


단 몇 밀리미터였다. 단 몇 밀리미터만 칼끝을 전진시켰으면 팬텀은 남자의 목을 파고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는 멈출 수가 없게 됐을 것이다. 그대로 살인자의 관성에 따라 칼끝은 남자의 목을 비집고 들어가 경동맥을 끊어내고서, 그 부근을 사정없이 휘저었을 것이다. 


나도 이 넓직한 침대도 피로 샤워를 하게 됐겠지. 뻔한 광경이 펼쳐졌을 텐데, 그것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 남자의 얼굴은 황홀경의 여운같은 것에 잠겨 있었다. 죽음이 가지는 공포와 아름다움을 각각의 눈에 새기고, 하나의 시선에 녹여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눈이었다.


"고백할 게 있어."


용수철처럼 상체를 일으킨 남자가 빠르게 무릎 꿇은 자세로 바꾸고 나를 당겼다. 안면으로 시트에 착지한 나는 몸을 일으켜 반사적으로 남자에게 손을 겨눴지만, 팔목이 잡혀 있었다.


남자의 손은 팔목을 타고 내 손을 감싸 기도하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의사와 상관없이 덩달아 기도하는 자세를 하고 있으려니, 청결한 느낌으로 빛나는 하얀 시트는 어느 종교라도 기꺼이 신단으로 채택할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용했어."


남자의 초승달처럼 가늘게 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를 신단 앞의 우상을 보듯 하면서,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손 안의 내 손을 강하게 문질렀다. 


눈물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노와 기쁨이었다. 

눈물의 온도가 결백의 척도라면 지금 눈앞의 남자는, 결백했다.


"네가 제정신이 아닌 걸 이용했어. 그래서 그런 계약을 제안했어. 이제 너도 알았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무슨…"


"처음부터 너한테 죽고 싶었어. 처음부터 너 대신 네 폐하에게 가겠다고 말하려 했어. 나를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를 혼란스럽게 할 생각이었어. 모두 진짜야. 너한테 죽고 싶었던 것도, 이번에는 내가 네 폐하를 돕겠다는 것도."


울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 남자가 맞는가 의심스러웠다. 유아독존을 신조로 삼은 것 같은 인간에게서 900년을 넘긴 시간 만에 보게 된 유약함은, 내게서 모든 말을 뺏어갔다.


남자는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눈물의 이유를 몰랐다.

단지 진실하다는 것만 알았다. 

 

더는 못 참겠어, 라며 남자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이밀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거리를 벌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뜨겁게 우는 인간에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부터 한 번만 말할게. 잘 들어줘."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남자가 손을 흔들어댔다. 나는 알았다고 홀린듯 답했다.


"레스토랑에서, 기억 나? 너한테 미안한 거 많다고, 거짓말 많이 했다고 한 거."


"기억 나."


"말 그대로야. 너한테 거짓말을 했어."


"무슨 거짓말?"


"전부. 전부 다. 너랑 만날 때마다."


"잘… 모르겠는데."


"너랑 처음 만났을 때도, 네가 내 카페에서 일할 때도, 너한테 전투를 가르칠 때도, 너랑 그 클럽에 쳐들어갔을 때도, 네가 사랑했던 그 아이를 떠나 보낼 때도, 네가 엄마였을 때도, 멸망한 다음에도… 또 네가 150년 전으로 떨어졌을 때도, 그래서 다른 150년을 살게 됐을 때도, 전부, 어느 시간대에서 만나든 전부 거짓말을 했어. 너한테 뱉었던 모든 말이 거짓이었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때는 너를 정말로 죽이고 싶었어."


"왜…?"


"네가 필요했으니까."


얼굴 간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서 잠깐 남자를 멈췄다. 여기가 교회나 성당도 아니니 기도도 풀게 했다. 


잠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만들다가 버리고 차를 새로 내렸다. 라벤더 같은 허브 계열의 차가 가진 진정 효과에 기대했다. 내 몫으로는 홍차로 했다.


차를 내리는 잠깐 사이에 조금 진정이 됐는지, 남자는 가운 소매로 눈과 코를 닦아내고 있었다. 유약하게 굴어서인지 혼쭐이 난 아이 같았다.


"그리고, 너도 내가 필요했지."


울음기가 살짝만 가셨을 뿐인데 그 목소리는 평소의 그것처럼 아주 재수 없게 들렸다.


부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면에서 남자가 필요했던 건 사실이다. 한창 남자의 카페에서 지낼 때는 몰랐지만, 바이오로이드가 탄생한 이후가 되어서 남자가 아니었다면 살아 남지도 못했을 거란 걸 알았다. 남자가 아니었다면 폐하도 볼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나중에 가서는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도움 받았다. 하나하나 짚어보자니 그에 대한 감사도 했었던 게 떠올랐다. 아마, 남자의 집에서 오메가를 작살내기 전이었던가.


잠시 생긴 공백 같은 침묵을 통해 홍차를 비우고 내가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뭐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거. 내 대가리가 단순해져서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기억이 나는 것도 어느 부분이 거짓말이란 건지 잘 모르겠어."


"간단해. 100년 전에 했던 말이 다르고 200년 전에 했던 말이 달라. 300년 전에 했던 말이랑 400년 전에 했던 말이 달라."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했다는 거야?"


"앞뒤가 안 맞다기보다는… 예를 들어서, 너 한창 약하느라 정신 못차릴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나?"


"건실하게 살라고."


"네가 처음으로 150년 전으로 떨어졌을 때는?"


"기억 안 나."


"너한테 위협이 되는 놈들은 먼저 찾아가서 조져버리라고 했어."


"…아, 그런 거야?"


"그래."


"왜 그랬는데?"


"그냥.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시간 여행자에게, 내일은 없어. 어제도 없지. 오늘은 오늘이 아니야. 그런데 너하고 있으면, 적어도 오늘을 오늘이라고 바라볼 수 있었어. 그래서…"


"어, 어쨌든,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는 거야?"


"맞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어."


"한 대 쳐도 돼?"


"그럼. 마음껏 쳐."


한 대만 쳤다. 얼굴을. 주먹에 온 힘을 실어서.

아프지도 않은 건지, 아픈데 내색을 않는 건지, 남자는 얼굴에 손 한 번 가져가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놈이야. 아르망. 나는 패배자야. 프랑스에서 이상적인 사랑을 못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루저라고 칭한 그 미친 놈이야말로, 최악의 패배자라고. 이상주의자들이 다 그래. 패배자식 이상주의의 말로가 뭔지 알아? 패배 의식에 찌든 심리학적 행동주의야. 자신이 견지했던 이상이 허상조차 못된다는 걸 깨닫고, 앞으로는 모든 걸 객관적으로 바라보겠다고 뒷짐지는 놈들이 되어버려. 정말이지 강한 척하는 루저의 전형이야."


"그러니까, 다른 차원에서 겪은 일 때문에?"


"그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여행을 할 필요가 없었어.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거지. 우리 닥터도 그랬어. 집 나가면 개고생 할 거라고. 나는 알고서도 사서 개고생을 한 거야. 내가 한 건 시간 여행도 차원 여행도 아니야. 그냥… 도망친 거지. 나중에는 말이지. 내가 왜 연고도 없는 차원을 떠도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당도한 곳이 내가 있는 차원이야?"


"꼭 그런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네."


남자의 사과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재료가 부족했다. 사과 자체도 두서가 없었다. 여행을 하게 된 이유도 여행의 목적도 아르망 추기경이라는 것은 이제 알았지만, 며칠 전에 들은 다른 차원에서의 이야기는 아주 일부라, 뭐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가만히 듣는 것 밖엔 선택지가 없었다.


남자가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아르망 추기경을 찾기 위해서다. 좀 이상한 소린데, 찾는다는 것은 '아르망 추기경'이란 개체 자체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남자는 아르망 추기경을 찾기 위해 수많은 차원의, 수많은 아르망 추기경과 끝도 없이 조우했다. 들은 것으로만 정리하자면 그렇다.


거기서 미루어보자면, 다른 차원에도 널려있는 아르망 추기경을 두고, 나와 몇 번이나 조우했던 것이 짐작이 간다.


"이제는 찾은 거야?"


"응. 찾았어."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얼굴로, 남자는 애처럼 활짝 웃었다. 


그날의 대화는 그 웃음으로 일단락되었다. 극적인 감정의 해소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이제 기억도 못하는 것들이 전부 거짓말이었느니, 사실 내가 필요했다느니 지껄여봤자 남자가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래서, 남자가 폐하에게 가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가정 하의 이야기지만, 남자는 죽이지 않기로 했다. 죽이면 남자가 폐하에게 갈 수 없게 되는 것도 그런데, 팬텀이 목을 파고들기를 바라던 그 얼굴을 보고 나니까 죽일 마음이 사라졌다. 딱 봐도 죽고 싶어하는 인간을 죽여서야 도와주는 꼴이지 않은가.  


물론 죽이지만 않는 것이지,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기로 마음 먹었다. 남자에게서 약속도 받았다. 한 번. 내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르겠다고.


"어제까지의 나는 잊어줘! 이제부터는 진짜 나를 보여줄게!"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고 있는데 남자가 다가와서 그렇게 외쳤다. 계란 샐러드를 만드려고 손질한 흰자를 집어먹길래, 삶지 않은 계란을 던졌다.


머리에 묻은 계란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남자는 내가 만든 샌드위치를, 허락도 구하지 않고 먹었다. 짜증이 났지만 뭐라 말하기도 어렵게, 참 맛있게 먹어줘서 별 말은 안 했다.


일주일 전의 나로 돌아간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카우치에 누워 넷플릭스를 뒤적거렸다. 마땅히 볼 것도 없었고, 남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초조해하는 개마냥 내 주변을 배회했다. 신경 쓰인다. 내 눈치라도 보는 것 같다. 


"조건이 있어."


남자는 tv왼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씨발 뭐?"


"왜, 왜 욕을 해…?"


그러는 너는 왜 그렇게 기죽은 반응이냐고 묻고 싶었다.


"뭔 조건?"


"너 대신 네 폐하에게 가는 것에 대한 조건."


리모콘을 집어 던졌다.


"조건? 조건!?"


"잠깐만! 진정해! 조건같은 조건이 아니야! 어려운 게 아니라고!"


"뭔 개소리야!"


"어, 그러니까, 간단해!"


일어나서 리모콘을 주웠다. 조건의 내용을 물은 것으로 착각한 덜떨어진 대가리를 리모콘으로 쳐댔다. 가능하면 머리가 망가져서 사람 눈 돌아가게 만드는 재주만 사라져버리길 바랐다.


"말해도 돼…?"


두 손 들었다. 신나게 얻어 맞고도 꼭 하고싶은 말인 듯했다. 


"죽으려고 하지 마. 그게 조건이야."


"약 했냐?"


"안 했어. 내가 너냐?"


일단 참았다.


"그 뭐냐, 앳지 오브 투모로우 보고서 했던 말, 기억 나?"


"아니."


"어떻게 잊을 수가 있냐…?" 남자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떠올랐다. "수백 년 전도 아닌데."


"뭐랬는데."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라고. 좋은 인간만 만나게 해주겠다고. 기억 안 나?"


"그랬어?"


"그랬어!"


"그래서?"


"그래서는. 그러도록 도와주겠단 거지. 앞으로는 바이오로이드에서 인간, 인간에서 바이오로이드로 오갈 필요 없게, 정말 인간처럼 살게 도와줄게. 어… 네가 그러고 싶다면."


"살아봤어. 몇 번이나. 바이오로이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니야. 그냥 네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야. 지난 시간 동안 너는 인간처럼 살았던 적이 없어. 그리고 있지. 내가 말하는 건 바이오로이드 탄생 이후도 포함이야."


"네가 '미끼' 주면 다들 내가 인간인 줄 알잖아."


"아이 씨발 진짜!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숨을 필요 없게 해주겠다고! …미끼는 필요하겠지만."


마음대로 하라고 생각했다. 바이오로이드가 개발된 이후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도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오래 살 거라곤 생각 안 한다.


"어때?"


"마음대로 해."


"약속이다?"


내밀어오는 새끼 손가락을 리모콘으로 쳤다. 마음대로 하랬지 새끼 손가락을 걸겠다곤 안 했다. 불결하다.


제멋대로 내가 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여긴 남자는 저 혼자 양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 약속!" 이라고 지랄을 하고서 얼터드 카본 1화를 틀었다. 볼 것도 없었으니 나는 그냥 보고 있었다.


10분쯤 지나서 남자가 헛기침 하고 말했다.


"아 참. 하나 보답해주고 싶은게 있어."


내가 무시하자 가까이 와서 tv를 막아섰다. 비키라고 발로 툭툭 치고, 꾹 눌러 밀어버려도 비키지 않았다.


"또 뭔데?"


한 발 더 다가와 남자는 내게 눈높이를 맞췄다. 그 동작 한 번으로 저항감의 여러 단계를 단숨에 돌파해 위협의 경계까지 들어왔다.


눈 앞에 눈이, 입 앞에 입이 있다. 

너무 가깝다.


호흡이 닿을까 숨도 못 쉬고 있는데 남자가 속삭였다.


"저기 저 tv속 주인공. 나랑 닮았댔지? 내가 더 잘생기긴 했지만… 뭐."


"그, 그랬는데…"


"인상 깊었어. 그런 식으로 칭찬해준 건 네가 처음이야. 뭐랬더라? 더티 블론드가 어울린다고?"


"좀 떨어져!"


"너도 닮았어."


"……누구를?"


나탈리 포트먼?


"상냥하게 웃을 때는 어린 소피 마르소를, 시니컬하게 웃을 때는 레아 세두를, 담배 피울 때는 아나 데 아르마스를, 신나서 막춤 출 때는 커스틴 던스트를 닮았어. 마이크 앞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땐 테일러 스위프트를 닮았어. 이들의 장점만 모아서 섞은 게 바로 너야."


멀어진다.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순식간에 들어온 것과 반대로, 거리가 벌어지는 속도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언제는 나탈리 포트먼 같다며?"


떠오른 기억을 이야기하자 남자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거짓말이었어."


직후에 남자는 엉뚱하게 담배 피우러 가자고 권했다. 방금 전 일로 힘이 쭉 빠진 나는 피우긴 피울 건데 같이 피우진 않겠다고 거절했다.







* * *






이미 지나간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에 뒤늦게라도 의미를 부여할 틈은 주지 않겠다는 듯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기록적인 강설량을 자랑한 첫눈에 올 겨울을 걱정한 인간들은, 눈이 아닌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만 내려대던 12월과 1월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오전에도 오후에도 리모콘을 만지작대는 매일이었다. 뭐라도 하자는 의욕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의욕을 끌어올리면 그 즉시 하고 싶었던 뭔가가 기억나지 않았다. 알고 있던 단어와 의미를 갑자기 까먹은 것처럼.


이미 다 본 프로그램을 매일 보기도 지겨워서 하루는 크게 마음 먹고 인터넷이나 종이 신문, 책자를 펼치고 해보고 싶은 것을 찾아 보았다. 의욕적으로 글자나 사진을 좇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은 금방 발견했고, 그것들을 즐기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을 구하러 다녔다, 라는 흐름이었다면 지금쯤 건실하고 활력 넘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


찾아 보기는 했다. 기호와 취향에 따라 선택지를 제외해버리면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없었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찾아봐도 똑같았다.


깜짝 놀랄 정도로 할 일이 전혀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 상태였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자 익숙한 허무감이 찾아오고, 그 허무감으로 내 처지를 실감했다. 고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패에 비탄하여 자살 하려던 나인데, 없던 의욕과 흥미가 생길 리 없겠지. 나는 단지 남자의 수작에 의해 살아만 있었을 뿐이다.


또 이렇게 비탄에 잠식되기 직전인 상태가 될 바엔 계약에 끌려다니는 쪽이 나았다. 남자를 죽일 재료를 모으겠다고 속으로 칼을 가는 편이 의욕적이었다. 남자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지만 않았더라도 지금 느끼는 공허함이 덜했을 것이다.


언제는 빨리 죽이고 싶은 놈과 맺은 빨리 끝내고 싶던 관계로 여겼으면서, 나도 끝까지 웃긴 년이다.


계약은 끝이라고 말하던 남자를 떠올려보니 의문이 들었다.


버킷리스트 달성은 끝난 걸까? 그렇게, 허무하게 끝을 고할 정도로 리스트가 빈약한 걸까? 카페, 드라이브, 산책, 서점, 영화…… 프랑스. 100년도 못 살고 죽는 평범한 인간들의 리스트가 더 알차겠다고 생각했다.


흥미가 생겼다. 살금살금 남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웬종일 집에만 있던 남자는 새해가 된 후부터 자주 외출했고, 오늘도 외출했다.


혼자 쓰기엔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방은 처음 이 아파트로 들어와서 살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침대, 붙박이장, 스탠드 조명, 행거. 있을 건 다 있고 생활감도 느껴지지만,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개성과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방이었다.


기본 옵션만 들여놓은 모델 하우스를 거니는 기분으로 행거에 걸린 코트부터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어서 침대와 근처의 협탁, 붙박이장을 살폈다. 없다. 버킷리스트가 작성된 수첩도 없는데, 붙박이장 자체가 휑했다.


몇 달이나 떠나지 않고 지냈으면서, 도대체 안 꾸미고 뭘 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잡동사니 하나 없는 방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붙박이장을 살피고서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옷도 이불도 앨범이 담겨있을 법한 박스같은 것도 없었다. 


다른 곳을 찾는다. 방 안쪽의 화장실 맞은편으로 나있는 복도를 지나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침실과 큰 차이는 없지만, 걸려있는 옷과 옷에 밴 베이비 파우더 향 덕에 사람이 살고는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든 빨리 움직인다. 빨리 찾아서 나가고 싶다.


행거에 걸린 코트를 다 뒤졌다. 없다.

다음으로 화장대를 살핀다. 충격적으로 휑한 침실을 본 탓인지 정돈된 캐어용품의 대열이 오싹했다.


찾았다. 

제일 아래쪽 서랍에 있었다.

작지만, 겉면에서 느껴지는 가죽의 감촉부터가 고급스러운 수첩이었다.


찾던 수첩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빨리 나가고 싶었다. 침실로 돌아와 복도의 맞은편에 위치한 베란다로 나가서, 베란다와 이어진 테라스를 통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현관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10초만 늦었다면, 하고 서늘한 짜릿함에 부르르 떨었다. 나쁘지 않았다. 공포 영화를 본 기분이다.


침대에 다이빙해서 이불을 덮었다.

수첩을 펼쳤다.


카페 가기.


노래방 가기.


서점 가기.


PC방 가기.



보드게임장 가기.


놀이공원 가기.(그 테마 파크 말고.)


드라이브 하기.



산책 하기.


영화 보기.


앞면은 평범한(작성된 시점에서는 평범하지 않았겠지만)항목들로 채워져 있어서 빠르게 촤르륵 넘겼다. 종이의 누런 잔상은 뒷장으로 갈수록 검은 잔상이 되어갔다. 다시 앞으로 넘겨 여백을 뜻하는 누런 잔상이 적당히 보이는 지점에서 멈추고, 수첩을 살폈다.


놀이공원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 해보기.(나는 무조건 고양이로 할 거야. 저도 고양이로 할래요.)


미라보 다리에서 키스하기.(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곳이어야 돼.)


퐁네프 다리에 사랑의 자물쇠 걸기.(채울 자리는 있겠지?)



오페라 보러 가기.(덴세츠 분들께 부탁드리면 되잖아요. 걔들 싫어. 정말!)


야외에서 서로 누드 데생 그려주기.(밝은 노을 아래의 공원에서. 어느 공원이요? 센 강변의 시민 공원!)


가면 무도회에 참여하기.(나는 고양이 가면. 또요? 자기도 고양이 가면 쓸 거면서 무슨.)


피레네 산맥에서 매 사냥으로 마멋 잡기.



아르투스트 호수에서 키스하기.(또 키스에요?)


뮤직 페스티벌에서 신나게 놀기.(나중에 싫다고 하면 안 돼! 폐하나 싫다고 하지 마세요!)



로데오 도전하기.(텍사스에서 제일 큰 소랑 대결하는 거야. 저 날아가요…)


스카이 다이빙 해보기.(완전 재밌겠다. 싫어요!)


타투 새기기.(가슴에 우리 자기 얼굴 새겨야지. 그냥 레터링으로 하자니까요!)


미국에서 카우보이, 카우걸 돼보기.(동부에서 서부까지 갈 거야! 힘들잖아요! 우리가 힘들어? 말이 힘들지.)


진짜 쿼카랑 셀카 찍기.(가짜 쿼카도 있어요? 자기 가끔 쿼카 닮았어언제? 비밀!)


"아르망."


팔에서 힘이 빠지고 몸이 튀어올랐다.

테라스와 이어진 투명한 미닫이문 너머에 남자가 서 있었다.


"재밌었어?"


방으로 들어온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노크하고 남자가 말했다.


"들어가도 돼?"


맥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온 남자는 바닥에 떨어져 매마른 소리를 냈던 수첩을 들고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재밌었냐는 물음에 몇 박자 늦은 대답을 하고 침대에 앉았다. 흘러내리려는 나시의 슬립을 고쳐 올렸다.


뜨겁게 울었던 그날 이후로, 남자는 딱히 변한 게 없다. 없는 것 같다.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상황이나 환경, 자리가 만들어질 계기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대화가 거의 없다시피했고, 있더라도 일상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내용의 대화였다. 거기에 짧기까지 했다.


남자는 관찰하듯이 빤히 나를 보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려는 것 같아서 거실로 자리를 옮기고, 뒤도 안 보고 식사하겠느냐 물었다. 


"달성 못한 리스트가 있던데."


식사 자리에서도 지속되던 침묵을 내가 먼저 깼다. 메뉴는 오므라이스였다.


"훔쳐보셨다시피. 들어온 흔적을 남기면 어떡해."


나름 조심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침입한 흔적이 될 만한 뭔가를 흘렸던 모양이다. 도중에 겁을 먹었으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살풍경한 방이 무서웠다는 말은 굳이 하지 말자.


"뭐, 까먹고 안 챙긴 내 잘못이야." 남자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에 턱을 괴었다. "수첩은 왜 봤어?"


"궁금해서. 이천 년을 넘게 산 인간이 작성할 버킷리스트 치고는 너무 빈약한 게 아닌가 생각했거든. 그리고, 뭐… 꽤 풍부하더라. 훔쳐봤다시피. ……괜찮은 거야?"


"뭐가?"


"달성 못한 리스트가 그렇게 많은데 계약 끝내도 좋은 거냐고."


"나 신경 써주는 거야?"


"아니야!"


이미 끝난 사항이다. 괜히 물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그릇을 치웠다.

주방까지 쫓아온 남자가 복도 코너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왜 궁금했는데?"


"할 게 없었다! 왜! 당신도 알다시피 계약 전의 나는 죽으려고 했어. 그러기 전의 유일한 목표가 당신을 죽이는 거였어. 당신이 우리 폐하한테 가겠다니 죽일수도 없게 됐지. 그게 보수라며. 얻을 거 얻은 계약은 끝났고 유일한 목표는 수행할 수도 없게 됐어. 이제 내가 뭘해야 되는데?"


"내가 제시한 조건을 수행하면 되지. 혹시 모르잖아? 내 조건을 어기면, 네 폐하한테 안 가고 어디로 휙 도망갈지."


"죽지 말아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라?"


"그래. 어렵지 않다니까."


몇 백 년 전의 나라면 몰라도, 지금의 내게는 무엇보다 어려운 조건이었다. 


계약의 보수가 곧장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너 대신 내가 폐하에게 가겠다.' 라는 막연한 것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의욕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질을 내고 나니 괜히 떼를 쓴 기분이었다. 결국은 의욕의 문제다. 남자는 죽을 거냐고 묻고 싶은 듯이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그럴 생각은 없다. 폐하를 위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게 나다. 더럽고 수치스러운 꼴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계약도 수락했다.


마땅히 할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이나 책자에서는 찾지 못했던 것들이 남자를 보니 얼마든지 떠올랐다. 정확히는 남자에게 의미 깊을 수첩의 리스트가 떠올랐다. 그것을 참고하기로 했다. 


"앉아봐."


식탁에 앉아 수첩을 꺼내라는 의미로 팔을 올려 겨드랑이를 가리켰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멀뚱거렸다. 제스쳐의 의미 파악이 늦어서 입으로 수첩을 꺼내라 말해야 했다.


식탁에 올라온 수첩을 뺏어들고 펼쳤다.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줄친 건 달성했다는 거지?"

"응."

"미라보 다리에서 키스하기에는 왜 줄쳐져 있는데?"

"응?"

"너 나랑 키스 안 했잖아. 볼에 쪽한 게 다잖아."

"야…"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하다는 듯이 눈을 피한다.

재밌는데. 이거 괜찮다.


"볼 뽀뽀만 했는데도 강에 던져버리겠다고 한 게 누군데. 연기도 멈추고 말이야. 키스하자고 하면 네가 했겠냐?"


"그걸, 그냥 키스한 걸로 친 거야?"


"어쩔 수 없잖냐."


몸을 수그려 얼굴을 남자에게 가져갔다.


"지금 할래?"


"뭐!?"


"뭘 놀라? 키스가 대수냐? 내가 얼마나 많은 자지들이랑 혀 섞었는데. 너도 알잖아."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남자가 거절해주길 바랐다. 그렇게 바라고, 내가 내뱉은 말을 곱씹어 보니 저항감이 피어올랐다. 황급히 몸을 뺐다. 


그날의 대화로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남자에게 '아르망 추기경'은 각별한 개체다. 그 동안 들었던 말로는 부부 관계였던 그 아르망 추기경만을 특별히 여길 것 같지만, 아니다. 그랬다면 차원을 오가며 몇 번이나 아르망 추기경과 조우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아르망 추기경과 조우한 끝에 찾아냈다는 개체.


그 부분이 '아르망 추기경이 와이프였다.'는 부분과 이어지자, 초점이 어긋나고 이명이 울렸다.


참 빨리도 알아챘다. 

아니. 아니야. 알아채? 뭘? 부정하기 위해 자문한다. 그게 뭐 대단한 의미라도 돼? 사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잖아. 그냥 가능성이 스쳐지나가면서 번뜩였을 뿐이야.


"뭐, 뭐야… 말하다 말고."


혀를 잘라내고 싶어졌다. 

표정을 지우고 항목들을 짚어갔다.


"야외에서 누드 데생 그려주기는 프랑스에서 하면 됐잖아."


"너 내 앞에서 다 벗을 수 있냐?"


"응. 이미 벗어봤잖아."


"언제?"


"너한테 싸움질 배울 때."


"…아니, 왜 그런 건 기억하냐고."


배우던 때 전부 다 기억나진 않는다. 강렬했던 것만 기억하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씨발놈이 가련했던 시절의 내 배떼지에 칼을 꼽던 것도, 내장이 흘러나와도 발로 차대던 것도.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보다 끔찍한 건 더 많고, 결과적으로는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그럼 야외에서는 벗을 수 있냐?"


"아니."


"그럼 그렇지."


"물어볼 수는 있었잖아."


"주먹으로 대답했겠지."


키득대고 다른 항목을 짚었다.


"마멋 사냥도 프랑스에서 하면 됐고… 인형탈 아르바이트는 바로 할 수 있는 거네. 어때?"


"야."


"웅?"


기계적인 미소를 짓고 고개를 측면으로 슬쩍 기울였다.


"웅? 아니 어쨌든… 지금 수첩가지고 뭐하는데?"


"하고 싶은 거 찾잖아."


"왜 굳이 내 수첩에서?"


"따로 하고 싶은 게 생각이 안 나거든. 그리고 인간처럼 살라며? 그럼 집에서 또 우울증 도지기 전에 뭐든 해야지."


"알았어. 알았는데, 왜 나도 같이 해야 된다는 것처럼 말해?"


"같이 해야 되니까."


"계약 끝이야. 할 거면 너 혼자 해."


"씨발럼이 겸사겸사 서비스해주겠다는데 왜 빼. 하자면 하는 거지."


궁시렁대는 소리를 들어가며 다른 항목들도 살폈다.


"로데오 재밌겠네. 미국 가보고 싶기도 하고. 야. 미국 데려다 줘."


수첩의 리스트를 머리에 입력하면서 시시껄렁한 대화를 이어갔다. 간혹 괜찮은 농담이 터지고 웃긴대로 웃다 보니 저녁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이 더 깊어지기 전에 남자는 떠난다고 했다. 계약이 끝나면 아파트를 떠나 따로 살겠다고 정했었다는 것 같다. 그러면 그런 것으로 알고 나는 붙잡지 않았는데, 내가 거듭 도망 갈 거냐고 물었어서인지, 남자는 '걱정하지 마라. 떠나지만 떠나는 게 아니다.' 라며 있어 보이지 않냐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병신같다고 대답했다.


"정말로 다 거짓말이었어?"


"그렇다니까."


남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들었을 때엔 입에 담배가 물려 있었다.


"다 거짓말이었어. 그 난리 치면 스토커랑 다를 게 없다고 한 것도, 피냄새 나니까 빨리 꺼지라고 한 것도 거짓말이었어. 네가 너네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를 죽이든 말든 상관 없었어. 너한테 던졌던 비난 전부, 거짓말이었어. 사실은 칭찬해주고 싶었어. 정말로."


남자의 수백 년전 폭력이, 이미 아물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처를 열고 찢었다. 상반되는 온정은 그 상처를 꿰맸다.


나는, 남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증오도 감사도 없었다.


배웅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한 고백을 듣고도 마음에 적막만이 감도는 것으로 정말 끝났음을 다시금 절실히 실감했다. 더는 남자와 입씨름 할 일이 없다. 이제 폐하와 관련된 문제는 내 손을 떠나 남자에게 갔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죽을 때까지 사는 것뿐. 그래야 폐하에게 남자가 간다. …그러지 않더라도 가줄 것 같지만.


스마트폰이 울려서 확인했다. 문자가 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폐하 신경 쓰지 말고. 너는 주어진 대로, 할 만큼 했어. 이제 네 인생을 살아. 원없이. 후회없이. 시간, 정말 빨리가거든.'


좋은 내용인데 왠지 짜증이 났다. 그래도 슬며시 지어지려는 미소를 참고 스마트폰을 껐다. 


폐하는 신경 끄고 하고 싶은 것인가.


하고 싶은 것…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


스마트폰을 켜서 메모장을 실행했다.


남자 괴롭히기, 라고 적었다. 일단 그렇게만 적어놨다.






* * *





남자가 떠나 아파트는 자연스럽게 내 집이 되고, 혼자 살기엔 쓸데없이 커서 월세를 줬다. 100평 넘는 아파트가 빨리 나갈까 의문이었지만, 의외로 들어오겠다는 인간이 많았다. 달달이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을 텐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다.


살던 곳의 절반인 50평 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몇 년에 걸쳐 이전 150년과 같은 요령으로 재산을 불리고 남자를 만났다. 큐빅이 박혀 알록달록해진 내 손톱을 징그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게 재밌었다. 다음엔 더 징그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자고 생각했다.


좋을 대로 살고 있는 지금의 나와 현실을 잇는 연결고리가 남자 뿐이라, 딱히 할 게 없는 시간이면 남자를 생각하곤 했다. 간단하게는 어디에 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살짝 깊게는 아르망 추기경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뭘까, 등등. 


남자에게 있어 각별한 나를 죽이고 싶었던 이유. 계속 숨기려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 와이프에 대한 이야기. 못다한 사령관으로서의 이야기. 내게 했다는 거짓말들. 궁금한 게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같이 살고 있을 때 물어볼까 생각한 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때는 또 지금 같지는 않았어서 곧장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나고 1년이 지나 만난 자리에서, 언젠가는 모두 이야기 해주겠다고 남자는 약속했다. 그리고 아마 질릴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사과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미 질린지 오래고, 질려할 걸 안다면 그냥 사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많게는 분기별로 한 번, 적게는 1년에 한 번 꼴로 만나게 됐다. 약속은 거짓말이 아니었어서, 하고 싶다는 게 있다고 말하면 남자는 뭐든 도와줬다. 특히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 비행기를 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보안 검색에서 남자를 쏠쏠하게 써먹었다. 푸켓과 괌을 다녀오고, 오키나와도 가봤다. 


도움을 받을 때마다 보답이라는 형식으로 남자의 나머지 리스트 달성을 도와줄까 고민이 들었지만,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내 안에서 도리를 담당하는 부분을 타일러도 봤지만, 그 부분을 뺀 나머지 모두가 승낙하지 않았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있는 저항감으로 짜낸 얇은 막이, 남자와의 동행이라는 행위를 밀어내고 있었다.


2032년. 여름.


혼자서 전국을 일주(차로)했던 32년의 여름은 연일 폭염이 이어져 예년의 평균을 웃도는 열사병 환자를 낳았다. 전체 비율의 15%가 사망했고, 인간들은 그 기가 막힌 수치의 원인인 전기세에 통탄하며 비난의 화살을 높으신 분들께 쏘아댔다. 


"미안해. 거짓말한 게 있어."


해변가의 카페 테라스에서 나는 노출이 높은 차림으로 버블티를, 남자는 알로하 셔츠 차림으로 탄산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최고의 천재라고 생각하는 예술가는 모네가 아니야. 사실은 따로 있어."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프랑스에서 그렇게 말했잖아. 기억 안 나?"


"아, 기억 나."


정겹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섬세한 화풍을 가진 영국의 화가. 그가 그린 그림 대부분이 알기 쉽고 귀여워서 나도 잘 알고 있다.


"루이스 웨인.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천재는 루이스 웨인이야."


그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이다.


"모네의 수련은 그냥 아름다웠을 뿐이야. 네가 아를의 밤을 그리 여기듯이 말이야. 나는 루이스 웨인의 작품 만큼 사랑을 훌륭하게 그려낸 작품을 본 적이 없어. 알고 있어? 루이스가 고양이를 그리게 된 계기는 아내였어. 이겨낼 수 없는 병마와 싸우는 아내를 위해 반려묘 피터를 그림으로 그려서, 안정과 웃음을 선물했지. 사랑이야. 결국 아내는 떠났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어. 루이스는 계속해서 고양이를 그렸고, 그 고양이 그림이 영국을 바꿨지. 설 곳 없던 애묘인들이 양지로 나왔고 박해 받던 길고양이들은 인간들의 품에 안겼어. 그림이, 사랑이 구원이 된 거야. 정말 아름답지 않아? 그 어떤 뛰어난 화가도 작품도 예찬을 받았을지언정 세상의 구원이 되어준 적은 없었어. 루이스야말로 최고의 천재야."


정작 그 구원을 가져다준 인간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다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최후를 맞이했지만 말이다.


거짓말이라고 해서 나와 관련된 건 줄 알았더니 별 것도 아니고, 미안하다고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김이 샜다.


이런 식의 고백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남자는 본인이 말했던 대로, 몇 번이나 내게 사과하게 된다.


2038년. 가을.


"그 아이들 안 보고 싶냐?"


했던 말 또한다. 청이와 백이 사이에 잠깐만 끼어들어도 그 아이들이 만들 가정은 파탄난다. 얼마 전에 떠올리기로는 지도 나한테 죄많은 여자라고 지껄였었던 주제에, 왜 자꾸 보고 싶지 않냐고 묻느냔 말이다.


"걔들 이미 결혼했지?"


"그럼. 첫째는 바이오로이드 개발 연구원이 되겠지. 딸은 사고로 죽던가."


그건 첫번째 때. 다른 때에는,


"어라."

"왜?"

"그 아이들 딸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


당연하다. 두번째 150년부터는 알아보지 않았으니까. 


혹시,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그 아이들의 자식이 죽는다면.

바꿀 수 없을까. 미니를 살렸던 것처럼.


2043년. 겨울.


외로운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심심한 새해가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남자와는 만날 때마다 심심함을 토로하자, 남자는 뭐든 하라지 않았느냐며 답답해했다. 공부, 학교, 운동, 게임, 여행……연애. 


학교는 안 된다.

게임과 연애 빼고는 조금씩 해봤다. 

여행 빼고는 몇 백년 전에도 다 해본 것들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은 공부 빼고 꾸준히 했다.


연애…는 조금 흥미가 있다. 흥미만 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온리 폐하이고, 못생긴 놈들이랑은 말도 하기 싫다. 잘생긴 남자는 폐하 뿐이다. …그리고 남자도.


똑같이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남자가 43년의 마지막 날에 찾아와서 말벗이 되어주었다. 똑같이 답답함을 내비치면서, 연애에 흥미가 생기면 그냥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위와 같이 대답했다. 죽을 때까지 온리 폐하. 못생긴 놈들 싫음. 폐하 빼고 다 못생겼음. …당신은 빼고.


"그럼 연애까진 아니더라도, 그래. 데이트라도 해봐."

"싫어. 더러워. 냄새나. 못생겼어."

"아 씨발 그럼 말을 말던가!"

"왜 지랄이야 병신아!"


남자는 온지 30분도 안 되어 떠나겠다고 했다. 찍고 턴이냐고 나는 빈정댔다.


"여전히 외모가 제일 중요하다?"

"당근빳다죠 쒸발."

"변하지 않았구만… 흠. 그러면."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 자세 그대로 턱을 문지르던 남자가 말했다.


"나랑은 데이트 할 수 있다는 거네?"

"하이고. 물론이죠. 더한 것도 한 사인데."

"이, 이상하게 들릴 소리 하지 말고."

"나랑 데이트하고 싶어?"

"하고 싶긴 한데, 그냥 해본 소리야."

"그럼 해. 내일 봐."

"끝까지 들어."

"아 뭔 말이 많아. 내일 봐."

"너랑 데이트 하고 싶어. 와이프 말고."


적막이 흘렀다. 10초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투덜대는 소리가 멀어져서 들리지 않을 때까지 문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2045년. 봄.


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문자로 왔다. 

사인은 자살.

유서에는 언니가 보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 같다.


45년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2048년.


나는 언제 죽는 걸까?


2050년.


아직도 살아있다.


2051년. 봄.


시간은 정말로 빨리 흘렀다. 의미를 부여할 새도 없이 흘렀다. 시간을 무의미하고 덧없게 느끼는 인간이 많은 것은, 어쩌면 의미를 새기기도 전에 시간이 지나가 버려서인지도 모른다. 인간들이 의미를 새기기도 전에, 너무하다 할 속도로 휙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2050년이 가까워지는 무렵부터 내 안에 새롭지만 익숙한 불안이 생겼다. 이대로 계속 살아있는다면, 내가 비관한 것과 다르게 한참이나 후에 죽는다면, 나는 또 바이오로이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끝도 없이 쫓기고 끝도 없이 도망쳐야 한다. 그게 싫다면 인간들은 찾지 않을 더럽고 남루한 곳에 처박혀야 한다. 처박혀 있어도 위험하다. 단 한순간도 위험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약 빨고 유니콘에 타서 허리를 흔들어대던 때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운이 좋았음에도 강간을 당할 뻔했다. 뭐,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분명 너무 빨리 흘러가버린 2052년 이전을 그리워하게 되겠지. 다 포기했었던 그때마저도 그립게 느껴지겠지. 바이오로이드 시대는 그런 시대다. 인간들이 만든 세상임에도, 인간들이 만든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목숨의 소중함에 대해 한 번이라도 되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죽음에 다이빙하려는 것들이 우글대는 세상.


앞으로 1년 뒤. 에바가 tv에 모습을 드러낸다. 몇 년 더 지나면 우리의 통령 라비아타도 출연한다. 


그럴 것을 생각하니 분명 그리워하게 될 지난 수십 년을 곱씹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행복했다. 대단한 뭔가를 해보지 못한 것은 후회됐다. 뭐든 부탁하는대로 들어주는 든든한 백이 있었는데, 주저 말고 저질러버렸으면 됐다. 하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대로 휘둘러댔으면 됐다.


…이렇게 오래 살게 되어서 또 바이오로이드 시대를 맞이할 줄 알았다면, 남자의 버킷 리스트 달성이라도 도와주는 편이 나았다.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왜 불가능한 건지는 설명을 못하겠다. 그냥 불가능하다. 


하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고 남자의 버킷 리스트를 참고하던 것도 처음 몇 번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행위라고 해야 할까. 해서는 안 될 행위를 저지르는 것만 같은 저항감이 일었다. 더 어길 금기도 없는데 금기를, 금기가 없는 인간에게만 부과되는 금기를 어기는 기분이었다.


51년은 울적한 시기였다. 부풀은 풍선이 급속도로 쪼그라들어 쭈글쭈글해진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순식간에 길고양이 같은 죽음을 그리고 최고의 공허를 바라던 때로 돌아가버린 나는, 질리지도 않고 계속했던 망상을 재개했다. 당연히 영화와 음악도 매일같이 틀어두었다.

 

한가지 다행이었던 것은(혹은 슬프게도) 수십 년만에 재개된 망상에 폐하는 없었다는 것이다. 수십 년을 나 좋을대로만 살아서인지,  망상은 오직 나를 위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한이 없었다. 은연 중에 폐하를 의식하여 늘 최소한의 선은 그어지던 망상에서, 선이 사라졌다. 그렇다보니, 망상에 사실성을 따지는 게 우습긴해도, 사실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망상이었다. 그래서, 정말 기분 좋은 망상이었다.


사실성이 없어서 기분 좋은 망상에 가능성을 첨가한 것은, 남자가 보낸 문자였다. 


문자로 남자를 의식하자, 내 망상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야? 뭔데 빨리 오라 그래?"


아파트 단지 바깥에서부터 맞이한 남자를 소파에 앉혔다. 나는 남자 바로 옆에 앉았다.


남자가 부담스러운 눈을 했다.


"뭐, 뭔데…?"

"하고 싶어."

"뭐!?"


떨어지려는 남자를 붙잡고 빠르게 뺨을 쳤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고."

"그, 그래…"

"들어줄 거지?"

"그럼. 약속했는데."

"진짜지?"

"진짜야. 신나 보여서 나도 기대되네."


나는 남자의 손을 잡고 무릎과 무릎 사이에 놓았다. 이 정도만 해도 웬만한 것들은 나를 거부할 수 없게 되지만, 남자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용 정리도 할 겸 망상의 첫운을 떼기 위한 준비를 했다. 이야기는 막힘 없이 전했다. 망상인데다가 짧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싫은 기색 없이 전부 들어주었다.


남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입이 천천히 열리고 눈가가 아치 모양이 되어갔다.


"완전 멋지잖아!"


당장 준비하겠다고 일어서려던 남자를 붙잡았다.

그렇게 간단히 진행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확답을 들어야 한다. 


나만의 망상을 현실에 펼치기 전에.


"당신, 앞으로 내가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렇게 약속했어. 바이오로이드 시대도 포함이라고 했어. 그건 진짜야?"


남자는 끄덕였다.


"진짜야."


"내가 또 무너질 것 같으면 말하라고 했어. 죽여주겠다고. 그것도 진짜야?"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날 위해서 죽어줄 수 있어?"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는…… 이미 너를 수백 수천 번 죽였어. 나라고 못 죽어줄 것 같아?"


그렇단 말이지.


"진지 빨지 마. 아니, 여기서만 진지해지지 마. 그냥 물어본 거야. 당신은 폐하한테 가야 되니까 살아야 돼."


"응응."


"마지막. 딱 한 번, 당신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어. 죽이는 대신에 말이야. 기억나지? 고통스럽게 해주겠다고 한 거."


"어… 응."


"떠올랐어. 당신이 고통스러워할 만한 것. 그때 기억 나? 내 앞에서 눈물 펑펑 흘리던 날. 그때 들은 이야기가 아주 괜찮은 재료더라고. 고문 도구가 완성됐다 이거야."


남자는 굳게 끄덕였다.

이걸로는 안 된다.


"할 수 있겠어? 아니지. 반드시 해야 돼. 약속했으니까. 그렇지?"


"응."


"내가 필요했다며. 앞으로도 내가 필요한 거잖아. 그렇지?"


"말해."


표정으로 보아 마음을 굳혔다. 그 굳힌 마음이 박살나는걸 상상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르망 추기경을 죽여줘."


제대로 못들었다는 듯이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되물었다.


"다시 말해봐."


"아르망 추기경을 죽이라고. 아예, 처음부터 태어나지도 못하게."


이 남자는 멸망하는 세계를 앞에 두고 내게 선택지를 제시한 적이 있다. 인류냐, 폐하냐. 


내가 사랑하던 인간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남자는 자신했었다. 정확히 기억한다. 두 번이나 그랬다.


나는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멸망도 막을 수 있는 인간이 아르망 추기경을 죽이지 못할 리 없겠지.

자신에게 각별한 그 개체를, 죽여야겠지.

내가 필요하다면.


이번에는 내가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아르망 추기경? 아니면 나?


남자는 멸망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발밑이 무너져 추락을 인지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 멸망 앞에서는 여유로웠던 인간이, 한 번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 인간이, 지금 내 앞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빨랐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르망 추기경이 개발되는 걸 막아달라는 거로군."


늘 경망스럽고 한량 같던 인간이 외모에 어울리는 표정과 어조로 말했다.


"가능하시겠어요?"


"당연하지. 다만, 묻고 싶은데. 너는 괜찮은 거냐?"


"응. 괜찮아."


"생각을 거치고 말해. 아르망 추기경의 개발을 막으면… 네가 어떻게 돼버릴 가능성이 있어."


"그러네. 사라질지도 모르겠네. 아르망 추기경이 개발됐다는 역사가 있기에 내가 오르카에서 복원된 거니까. 내 기원이 사라지는 거네. 타임 패러독스네. 어디서 읽기로는 시간 여행 자체가 타임 패러독스라던데. 당신이 하는 거 말이야. 히히. 어렵네. 근데 뭐 상관없어. 난 여행이 아니라 루프잖아? 어쨌든, 사라지면 사라지는 거야. 하라면 해."


"네가 어떻게 될지 나는 몰라. 그 누구도 모를 거야."


"응? 타임 패러독스 일으켜 본 적 한 번도 없어?"


"없어. 시간 모순 일으켜 본 적 없다고 말했잖아."


"언제?"


"니네 폐하 죽였던 후에."


그랬나. 그건 기억 안 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건 좀 의외네… 그런 척 하는 거려나? 어쨌든 막겠다고 했으니까 막아."


"알았어."


남자는 현관으로 갔다. 걸음도 대답도 어쩐지 결연한 느낌이었다. 내가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걸 더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나만 더 묻자."


배웅하러 현관까지 가자 남자가 말했다.


"개발을 막아달라는 이유가 뭐야? 그… 네 망상이랑은 하등 상관 없잖아."


"상관 있어. '아르망 추기경'이 없는 걸 전제로 하는 망상이거든. 그리고, 그냥 자기 만족이야."


"자기, 만족?"


"새삼. 나 존나 이기적인 년인 거 아시면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이용해왔는데? 당신이 던져준 그 아이도 다 알면서 쪽쪽 빨고 핥아 먹었잖아. 씨발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러니까, 당신도 이용하겠다고."


"그러냐."


"그래. 각오해."


현관을 나선다.

남자가 나서기 전에 뒤돌았다.


"현재 51년이니까… 좀 오래 걸릴지도 몰라."

"얼마나?"

"최소 10년 이상."

"알았어. 가."

"하나 더."

"뭔데?"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네가 여기 그대로 있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맞이해줘."


"좋아.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네."


"다녀올게. 필요한 건 현관 밖에 둘 테니까 챙겨놓고."


"네. 다녀오세요."


"죽지 마."


아주 만약, 

영화랑은 다르게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후에 내 망상을 펼치겠다.






* * *






2066년. 봄.


"다녀왔어. 아르망."


"어서오세요. 폐하."


개발은 막았다.


이제 세계에, 아르망 추기경은 없다.







* * *






"사실, 별로 걱정 안 했어."


배고프대서 차려준 식사 중에 남자가 말했다. 

걱정 안 했다고? 사실 나는 존나 무서웠다.


"무슨 뜻이야?"


"너 사라질 거란 생각 안 했다고."


"무슨 근거로?"


"기억 나냐? 여기는 이상한 차원이라고 한 거."


"언제?"


"니네 폐하 죽인 후에."


수저를 집어던졌다. 한 번 써먹은 말 또 써먹으면 없어 보인다.


수저에 맞거나 말거나 신경 안 쓴다는 듯이 남자는 활짝 웃었다.


"네가 있는 이 차원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그게 근거야."








* * *







혹시나 무서운 걸 인지조차 못하고 사라져버린다는 무서운 전개는 아니게 되었으니, 이제 하고 싶은 일만 남았다.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 해보고 싶은 것.


"영화 배우가 되고 싶어."


제조 목적에 따라서.


"영화 감독이 되고 싶어."


그러나 내 마음대로.


"그러니까 장르는…" 옛날에 들었던 내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처럼 남자는 눈알을 굴렸다. "짬뽕이군."


"액션, 스릴러, 호러, 범죄, 느와르… 다 찍을 거야."


"코미디도 넣는 게 어때…?"


"싫어."


코미디가 먹히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 나는, 제조된 기록이 없는 개체를 넘어서 개발된 적이 없는 개체다. 인간으로 통할 수단이 있다한들, 한순간이라도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들키면 위험해진다. 다른 15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내가 바라는 거다. 위험해진다는 것은 위협을 가하는 놈들이 있다는 것이고, 이 시대에서 그런 놈들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죽여버려도 상관 없다.


"다 죽여 버릴 거야."


근질근질 거린다. 피맛을 보고 싶어서 못 참겠다.


고백하자면, 2052년 이전의 시간들은 정말 할 게 없었다. 실은 의욕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그냥 52년 이전의 세계와 내 성미가 맞물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끔찍한 시간이 만들어낸 공허의 괴물에게 상상력을 잡아 먹힌 인간이, 뭔가를 참고해서 떠올리는 게 용한 거였다. 


미니와 남자의 도움으로도, 나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원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원래 씨발 존나게 가련하고 연약한 소녀였다.


"다 뒤집어 엎을 거라고."


나를 이런 성미로 만든 원인은 따로 있다.

공허의 괴물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내가 문제였던 게 아니다.

절대로.

이제 와서 남 탓 한다고 욕해도 좋다. 

그런 놈들도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촬영장은 저 바깥이야."


이 세상 전부를 촬영장으로 삼겠다.


"존나 재밌겠다."


꺄르륵대는 남자에게 묻는다.

확실하게 확인해둔다.


"전혀 건실하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거짓말이라니까."


남자가 등 뒤로 손짓하자 소총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 소총은 내게 날아와 안겼다.


"존나 끔찍할 텐데? 나 진짜, 죽이고 싶은 놈들 다 죽일 거야. 정말 도와줄 수 있겠어?"


"물론이지. 그렇게 오래 보고도 아직 나를 모르나본데, 나 무서운 놈이야. 쓰레기라고. 내가 다른 차원에서 한 짓 알면, 너 기절할지도 몰라."


궁금한걸. 나중에 들어보자.


"떠날 거야?"

"안 떠나. 이제는."


그러면 됐다.


소총을 남자에게 돌려줬다.

촬영 준비는 내일부터 하기로 하고, 술 한잔 걸치기로 했다.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재미로 이전에 썼던 글의 외전격 글을 쓰느라 늦어졌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요.

다음 화는 제가 제일 쓰고 싶었던 파트 중 하나라 재밌게 써보고 싶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