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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봄은 성장의 계절이래."

"하하."


학생들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말하는 도중에도 눈은 책상을 향해 있었다.

곧 시작될 시험을 위해 정리노트를 보는 것이다.


"내 성적도 조금 성장했으면 좋겠다!"

"확실히 너는 여러모로 성장해야지. 그러다 시집도 못 갈 걸."

"무, 무, 뮤슨 소리냑!?"


그리폰의 말에 슬레이프니르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돌아오는 건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였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납니다. 그리폰도, 뗑컨도, 한 문제라도 맞추려면 집중하셔야죠."

"으, 응...."

"그 말이 맞지."

"그런데 그리폰. 아까는 그냥 장난이지? 나 시집 못 가는 거 아니야. 갈 수 있다구?"

"에휴, 그래, 그래. 당연히 농담이지. 응, 당연히 농담이야."

"히잉....."


잠깐 있던 소란은 사라지고, 다시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교실에 가득해졌다.


긴박한 고요함이 깔린 가운데.

한 소녀만이 여유로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벚꽃이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자 벚꽃처럼 은은한 분홍색이 휘날린다.

봄의 상징, 꽃가루가 그 소녀의 코를 습격했다.


"엣취!"


에밀리는 재채기를 뱉고도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이 왔어."

"......그러게, 봄이네."


에밀리의 뒷자리인 뗑컨이 창밖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벚꽃 구경하러 가고 싶다."

"공부나 하지 그래?"

"에헤이, 소녀의 로망이 없네. 개다리나무 같는 년아."

"개다리나무?"

"머리색이 판박이잖아."

"쓰으으읍-"

"히, 히익!? 졔성해여 체강그리폰님!!"


그리폰의 구타가 시작됐을 때, 또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하르페이아도 창밖을 봤다.


"그러네, 벚꽃이네... 구경가고 싶다."

"린티가 벚꽃 사이에 서 있으면 다들 린티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될 텐데~ 아이 참~"

"벚꽃하면 또 모모 양의 머리색이랑 비슷하거등요. 저번에 RGB로 찍어봤는데 색깔이 큰 차이가-"

"저, 모두들.. 공부해야지. 응?"


블하의 말로 각자의 꿈이 깨졌다.


"아."

"린티는 벚꽃이 더 좋아...."

"그럼 구경하러 가자."


끼어든 건 에밀리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탈을 권했다.


"아스널 언니가 알려준 장소가 있어. 벚꽃 구경하기 딱 좋다고."

"에밀리 언니 분은 분명 남자친구가 있으셨지?"

"철남이었나? 그분이랑 같이 간 거야?"

"응."

"헤에..... 린티는 에밀리가 부럽다."

"부러워?"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되잖아? 평생 책임져줄 멋진 언니가 있으니까. 린티는.."

"저기, 린티. 그런 얘기는...."


하르페이아가 말렸다.

그제야 린티도 정신을 차렸다.


"아, 으, 으흠...! 미안. 린티가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린티가 한 말은... 에밀리가 여유로워 보여서...."

"괜찮아."


에밀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항상 무표정이라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는데,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저기, 에밀리? 린티가 미안해. 사과를-"

"응? 아.. 아니야. 난 벚꽃 구경 갈 거야."

"지금?"

"지금."


에밀리는 홀연히 교실을 나섰다.

시험 좆까라고 떠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말한다.


"...에밀리는 정말 자유롭네. 부럽다."

"......글쎄요."


유일하게 흐레스벨그만이 부러움보다는 딱한 시선을 보냈다.


"목적 없는 자유는 공허함을 남길 뿐입니다."

"그런가....?"

"확실히, 에밀리는 좀... 뭐랄까, 엄청 행복해 보이지는 않긴 하지."

"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불행을 꼬집는 클라스. 역시 벽에 착 달라붙어 기생하는 굴이시다."

"와, 개다리나무 아닐까봐 말할 때마다 꽃가루 날리는 것 봐. 말로 사람도 죽이겠다, 에취! 좀 떨어지지?"

"이년이!?"

"먼저 한 게 누군데 이년아!"


그리폰과 뗑컨이 싸운다.

일상이라서 다른 이들은 평온햇다.


"그래도 자유로우면 된 거 아닌가? 린티는 에밀리가 엄청 부러운데."

"....모르는 일입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한 채 시험이 시작됐다.







에밀리는 혼자서 벚꽃 길을 걸었다.

하늘하늘 불어오는 바람 아래.

그녀는 벌을 품고 자연의 순환에 일조하는 벚꽃 나무를 보았다.


-벚꽃 구경가고 싶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뒤이어 의문이 떠오른다.


'왜?'


이걸 구경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것도 마음에 남지 않았다.


"엣취."


그저 재채기만 나올 뿐.


에밀리는 재미없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 때도 아닌데 돌아왔군. 시험 치는 날 아니었나?"

"....그런 일들이 있었어."


집에 온 에밀리는 아스널에게 그날 있던 일을 설명했다.


"그렇군. 벚꽃을 보고 왔나. 좋은 구경을 했군."

"좋은 구경?"

"벚꽃을 보는 건 년마다 찾아오는 행사지. 은은한 분위기에 취하는 맛이 있다."

"......."


에밀리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있었다.


"그런 행사를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않아? 왜 아무도 같이 안 갔을까. 같이 갔으면 조금 더 재밌었을지도 몰라."


에밀리는 반 학생들이 티격태격 거리는 모습을 보면 즐거웠다.

생기가 느껴지기 때문이었을 거다.


"사회적인 족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족쇄?"

"그래. 에밀리. 너에게도 족쇄가 차여져 있다."

"...?"


에밀리는 자기 발을 본다.


"없어."

"하하하, 지금 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평생 동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 뭐, 그렇다면 없는 거나 다름없긴 하다만."


아스널은 술을 홀짝이며 그렇게 말했다.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사회에 섞이지 않는 사람이 가끔 있다.

에밀리도 그런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였다.


"...어떤 족쇄야?"

"응?"

"족쇄. 무슨 족쇄야?"

"여유를 없애는 족쇄지."

"여유...."


아스널은 에밀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에밀리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건 그냥 넘기면 안 되겠군.'


그렇게 생각한 아스널이 조금 진지하게 말한다.


"린티가 널 부러워했던 건 네 삶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공허할지라도 말이지."

"여유?"


에밀리는 린티가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확실히, 여유롭다고 하긴 했었다.


"성적, 미래, 진로와 같은 압박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대비가 필요하지.

다들 젊을 때가 청춘이라고 하지만, 사실 학생들은 그리 자유롭지 않다.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에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너는 다르지.

맹해도 실력과 그로 인한 미래 전망이 확실하기에, 자유를 가지고 있는 널 부러워하는 거다."


에밀리는 보장된 미래가 있었다.

꼭 아스널의 품안이 아니더라도 어딜 가서도 밥을 굶을 일은 없을 거다.

그녀의 중장비와 그걸 다루는 실력은 세계에서도 손 꼽힐 정도니까.


".....그건 좋은 거야?"


에밀리가 아스널을 빤히 바라본다.

아스널도 에밀리를 빤히 바라봤다.


"관점에 따라 다른 법이다."

"관점에 따라....?"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손에 쥐지 않는 건 언제까지나 아이로 살면서 놀기만 할 수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 말이 에밀리의 귀에 박혔다.


"언제까지 놀 수는 없는 거야?"

"그렇다. 짐승도, 인간도, 언젠가는 둥지를 떠나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때가 온다. 그걸 위한 준비이자, 성장인 것이지. 막상 닥쳤을 때 모든 자유를 잃는 것보다는, 조금씩 잃어가는 게 덜 고통스럽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점자 자신을 길들이지. 보통은 그런 것을 성장이라고 말한다."


아스널은 말을 던지고 에밀리의 반응을 살핀다.

에밀리는 귀담아 듣고 있었다.

평소에는 멍한 눈으로 그냥 말을 흘릴 뿐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설마 이런 일이 계기가 될 줄은 몰랐거늘.'


세상사는 쉬이 짐작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같은 반 학생의 말 한 마디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성장...."

"에밀리. 네가 만약 남들처럼 평범하게 어울리고 싶다면, 너 역시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야 한다."

"....응."

"그럼 에밀리. 나와 함께 벚꽃 구경을 가겠는가?"


에밀리는 한참을 고민했다.

맹한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아스널이 권한 것은 단순히 노냐 마냐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앞둔 선택의 기로였다.


"....아니, 공부해야 해."

"알겠다."


아스널은 피식 웃었다.


"방으로 갈게."

"에밀리."

"응."


아스널은 술을 홀짝이며 씩 웃었다.


"좋은 친구를 뒀구나."

"......응."


소녀가 살짝 웃었다.






다음날부터 에밀리는 열심히 시험을 치렀다.

모든 과목 시험이 끝나자, 바깥에서 시든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벚꽃의 계절은 끝났다.

시험과 함께.


그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옆에 누가 섰다.


"에밀리, 시험은 잘 쳤어?"


하르페이아였다.


"아아아아 또 틀렸어어어어 역시 맞춰보지 말걸. 그냥 모르는 채 있을거어어어얼!!"


그리폰이 절규했다.


"야이 굴년아! 네가 3번이라며! 3번이라며!!! 으아아아아아!!"

"하하! 속았구나 개다리나무년아! 사실 4번이었다!!"

"이년이!?"
"그런데 나도 틀렸어. 막상 풀 때 기억이 안 나서 5번으로 체크했지 뭐야."

"푸하하! 지능도 굴이냐!! 넌 굴소스로 만들어도 유해식품일 거다! 먹으면 지능이 떨어질 테니까!!"

"이년이!?"


두 소녀가 머리채를 잡고 다툰다.


"....기운도 넘치네. 에밀리. 시험은 어땠어?"
"...조졌어."

"하하...."

"하지만 괜찮아. 최선을 다했어."


에밀리는 미소를 지었다.

며칠 벼락치기였지만, 어쨌거나 최선을 다했다.


"아아, 평소에 공부 좀 더 해둘걸...."


누군가 좌절했다.

에밀리는 원래 저 말에 담긴 감정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공부 좀 할 걸 그랬어."


에밀리가 그렇게 말하자 하르페이아가 살짝 놀랐다.


"....그럼 뒤풀이로 노래방 갈래? 후회 같은 걸 싹 날릴 수 있을 거야."


에밀리는 하르페이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저기, 저번에는 린티가 미안해. 말실수였어."

"...린티는 좋은 친구야."

"으, 응!?"
"정말로."


에밀리의 부드러운 미소에 린티가 압도당했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칭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후, 후후후! 맞아, 린티는 좋은 친구야. 노래방 가는 거지? 응?"

"어쩐지 표정이 밝아지셨군요, 에밀리."


지켜보고 있건 흐레스벨그가 팔짱을 낀 채 웃었다.


"마음의 변화라도 있으셨습니까?"

"...응."


에밀리는 바깥에서 마지막을 불태우며 사라지는 벚꽃을 보았다.


"봄은 성장의 계절이니까."

"....어느새 어엿한 아가씨가 되셨네요, 에밀리."

"고마워."

"그럼 같이 갈까요?"


블하가 손을 내민다.

에밀리는 그 손을 잡고 친구들을 따라간다.


흩날리는 벚꽃을 뒤로 하고.

소녀는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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