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가는 늦은 겨울, 이제는 살며시 얼굴을 비추는 따사로운 햇빛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지금의 나들이를 반겨주었다. 일방적으로 질문하면, 그 질문에 대답할 뿐이던 므네모시네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기에 자연스레 그녀에게 시선이 향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꽃이 고개를 내밀고, 하얀 설원이 녹색으로 덮이는 지금 시기를 본 개체는 좋아합니다."

"확실히 므네는 꽃을 좋아했었지."


들꽃에 관한 정보를 수백, 수천, 수 만 번 열람했던 므네모시네였기에, 그녀가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간단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얀 설원이 펼쳐진 대지와 어울리지 않는 햇빛, 그리고 그 설원 틈 바구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이란, 므네모시네가 왜 꽃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충분히 공감이 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리라.


그런 그녀를 따라 자연스레 작은 꽃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면, 므네모시네는 자연스럽게 꽃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건... '자주범의귀'군요."

"자주범의귀?"


아주 작은 하얀 꽃에 눈이 쏠린 것을 알아챈 것인지 므네모시네는 조심스레 그 꽃잎을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치 감정이 없는 컴퓨터와 같은 무미건조한 어조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고 아름다웠다. 지금 그녀가 쓰다듬는 이 하얀 꽃처럼, 고고하고, 청명한 아름다움.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명화와 같았다.


"학명은 saxifraga. 라틴어로, 산의 둔덕이나 중단을 뜻하는 saxum에서 유래했습니다."

"척박하게 느껴졌던 스발바르 제도에서 이런 꽃이 핀다니... 자연은 참 신기하네."

"이 꽃은 건조지와 습지 모두에서 자생합니다. 종종 바위의 틈에서도 자라기도 하죠. 이곳 스발바르 제도에서 가장 번성한 종입니다."


사실 꽃에 관한 관심은 적은 편이었으나, 이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없던 흥미마저 생겨났다. '사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보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꽃을 설명하는 그녀는 행복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저, 므네모시네 개체는 기억의 방주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진 기종. 긴 시간을 이곳 스발바르의 방주에서 보내왔으니, 이 꽃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언제일지 기약 없는 재회를 기다리며 오로지 혼자 모든 관리를 떠맡아온 그녀이기에,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섬에서 자생하며 세월을 함께한 꽃에 애착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러 세대를 걸쳐 지금 나와 그녀가 만나기까지. 그녀는 이 섬에서 얼마나 고독한 세월을 보내왔을까.


"관리자 님."

"응?"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아주세요. 영원한 기다림은 없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여러 시대를 거치며 결국 저는 관리자 님과 만났으니까요."


'그리하여, 저에게 주어진 사명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짧은 독백이 유독 시리게 가슴 한편에 아른거리는 흔적을 남겼다. 긴 시간을 보내오며 꽃과 자연을 벗 삼아, 그녀는 지금까지 우리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리고?"


짧은 망설임. 그녀 답지 않게 달뜬 한숨을 내뱉으며, 므네모시네가 손을 잡아오며 미소를 보였다.


"제 이름 '므네모시네'는 기억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기억하고, 기록하며, 보존해왔을 뿐이지만..."


어느새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접근하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살며시 볼에 따스한 봄의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단순한 정보의 나열인 기억이 아닌... 추억으로 채워나가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이어질 그녀의 기억에, 지금의 추억을 덮어 녹여내고 싶다는 수줍은 고백. 그녀의 수줍은 고백이 차가운 바람에 따스하게 녹아내리며 훈훈한 봄의 온기로 나에게 전달되었다. 비록 먼 훗날을 기약할 정도로 형편이 녹록하지 않지만, 그녀의 바램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이번엔 이쪽에서부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 함께 써나가자. 앞으로의 추억을, 너와 내가 함께."

"....네. 관리자 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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