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빛. 그늘져 차디찬 땅에서만 본색이 비추어지는 건조한 벽 옆에 홀로 눈에 띄는 무릎을 끌어안은 회갈색 머리가 있었다. 잘 들여다보면 회갈색 사이에 보랏빛이 껴있다. 그 작은 여성의 형상은 머리칼을 한번 흔들었다. 머리에서 잿빛 모래가 털어져간다. 바깥의 폭발음에 그녀는 움찔거렸다. 그녀의 팔이 움츠러들때마다 벽에 고정된 쇠사슬의 찰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 그만해요, 그만...


무서워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되뇌였다.


 - 무서워?


갑자기 들려온 사람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제복을 입은 남성이 그녀를 들여다보고있었다. 그녀는 그를 응시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주저하다가 손을 잡았다.


 



사령관은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들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LRL, 더치걸, 알비스, 또 경호 임무를 맡아 안절부절 못하며 귀만 쫑긋 세우고있는 하치코까지. 


 - 너도 같이 들을래? 하치코?


 - 그래도 돼요 주인님?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는 하치코에게 그는 괜찮다며 손짓했다. 리리스에게는 비밀로 할게. 그 말을 들은 하치코는 깡총거리며 그의 앞에 앉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래. 사령관은 눈 앞에 책장이라도 있는 듯 찬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무언가 생각 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 ... 임금님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공주가 발코니에 앉아 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광대아이가 하나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광대는 등에 당나귀를 지고 가고있었지요. 하하하하. 커다랗게 터진 웃음소리에 임금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공주야 방금 네가 웃은것이냐?


저기 보세요 아바마마. 당나귀를 등에 지고 간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요.


임금님은 그 즉시 병사들을 불러 그 광대아이를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임금님에게 끌려온 광대아이는 겁에 질려있었지요.


광대아이가 물었습니다.


임금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임금님은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습니다.


내 딸은 저주에 걸려 웃지 못하고 있었다.


공주를 웃게 했으니 너를 공주와 결혼시키겠다.


광대아이는 놀라 넘어지며 말했습니다.


임금님.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저 같은 광대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주님이 말했습니다.


광대 분. 저는 여지껏 슬픔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저를 웃게 할 수 있으니, 저와 결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공주님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광대아이는 마음을 돌렸답니다. 

그렇게 저주가 풀린 공주님과 광대아이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목소리로 연기까지 해가며 그는 이야기를 끝맺었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옆에 서 같이 이야기를 준비해주던 부관은 어느새인가 아이들의 틈에 섞여 귀를 쫑긋 세우며 경청하고 있었고 그도 그런 아탈란테를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 자, 오늘은 여기까지. 들어가서 다들 자고 내일 저녁에 보자.


아이들이 일어났다. 개중에는 이미 배게를 안고 눈을 부비는 아이도 있었다. 그는 딱딱한 철바닥이 차가울까 깔아둔 요를 집어들었다. 아탈란테는 언제 이야기를 듣고있었냐는 듯 자연스레 그에게서 요를 빼앗아 정성스레 개기 시작했다.


 - 오늘 이야기는 재밌었어?


 - 무슨...! 그대는 제가 이런 동화에나 정신이 팔려 듣고있었을 것 같습니까?


당황하듯 튀어나온 대답에 그는 웃었다.


 - 매일같이 아이들 옆자리에서 앉아 듣고있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지.


아탈란테는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채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손에서 떨어질 뻔한 요를 가까스로 잡아올리며 말했다.


 - 저는 그저 그대가 미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풀려버린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줄까 지켜보던 것 뿐입니다. 이 아탈란테가 품은 사람이라면 그런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그는 알겠다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 뾰로통한 그녀의 얼굴을 감싼 후 이마에 입을 맞췄다.


 - 가... 갑자기... 무슨..!


그는 그 언제보다도 상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 왜, 싫었어?


 -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어야...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을 이불에 푹 묻고 사령관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다 찬찬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은 서글픈 표정이었다.


 


사령관의 책상에는 명패가 없었다. 종잇더미를 오른편으로 넘기고 개운한 듯 기지개를 켜기가 무색하게 아탈란테는 손에 든 서류철을 건넸다.


그는 아탈란테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그를 마주보자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가 전 서류더미를 받아들었다.


 - 마지막 면담자는...


사령관이 신상서류를 한장 넘겼다. AC 31구역에서 발견한 레프리콘이었다.


들어와. 한 마디 말에 대답대신 울리는 발걸음소리가 있었다.


서류철에서 시선을 올리자 사진을 옮겨놓은 듯 한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다.


 - 저... 사령관 각하. 저는 다시 전장으로 가게되나요?


 - 왜. 싫어?


 - 아니,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굳어버린 듯 한 레프리콘의 모습에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섬이 있어. 좀 많아.


난데없는 이야기에 레프리콘이 당황한 듯 표정을 이었다.


 - 우리도 식량이 필요하고 물자가 필요하잖아. 뭐. 어떻게 보면 보급부대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도 있지. 부대같은 느낌은 안나지만 말야.


그래서말인데. 네가 싸우기 싫다면 그곳에서 농사를 돕던, 뭐. 목축을 돕던 그렇게 살아도 돼. 


선택은 네가 해.


레프리콘이 고개를 푹 숙였다. 면담 시간이... 사령관은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시계를 확인했다.


 - 제 앞에서 죽어간 브라우니가 벌써 몇인지 모르겠어요.


사령관이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 저 혼자 그런 곳에 가 살아도 괜찮을까요? 우리 막내 제 맞후임은 다 죽었는데도?


레프리콘은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감싸안았다.


 - 더 빨리 구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레프리콘이 고개를 저었다.


 - 밖으로 나가면 포츈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포츈에게 무기를 반납하고 분해조치가 완료되면 대기 해줘. 나흘 후에 배를 보내줄게.


그가 아탈란테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레프리콘을 부축해 밖으로 안내했다.


그는 숙연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아탈란테를 향해 말했다.


 - 레프리콘을 안아줬다고 질투하는 건 아니지?


 - 무... 무슨소리를...


얼굴이 빨개진 아탈란테를 보고 그는 웃었다.


사령관 각하라... 그는 언제 그녀를 놀렸냐는 듯 생각에 잠겼다. 



오르카의 점심시간은 왁자지껄하다. 규율이 잡혀있는 스틸라인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하는 브라우니들의 합창이나 가슴을 키우느니 키를 키우느니 하는 이유로 서로의 우유를 빼앗으려는 둠브링어의 장교들. 오이를 싫어하는 LRL에게 오이를 먹도록 달래는 에이미까지. 

보통같으면 사령관실에서 밥을 먹겠지마는 오늘 그는 소완에게 휴가를 주고 취사장에서 다른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 소란스런 곳을 쳐다보다가 정원을 향했다.


자신이 그 사이에 끼어있다고 생각하자 묘한 이질감이 들어서였다.



 - 엘븐 씨. 물을 그렇게 막 뿌리시면 곤란해요. 


 - 이래야 풀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지. 


 - 미관상 보기 안좋은걸요. 저희가 가지치기 하는 수고도 생각해주세요.


 - 보기 안좋다고 막 쳐내는 건 식물들한테 몹쓸 짓이라고는 생각 안해?


아탈란테는 여기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란을 피해 찾아온 곳에서도 엘븐과 다프네가 싸우고 있을줄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리를 옮길까 고려하고 있었다.


 탕.


큰 소리에 놀란 정원관리사들이 총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싸움은 다른데 가서 해주지 않을래?


다크엘븐의 장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용히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 두사람은 언제 싸웠냐는 듯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제서야 아탈란테는 자신의 요깃거리를 펼쳐놓았다. 


 긴 빵을 찢어다가 고기를 얹었다. 한 입 베어 물려는데 발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 옆에 앉아도 되나요?


파란 모자에 깃털 하나. 샬럿이었다. 그녀는 샬럿이 꺼림칙했다. 그녀 뿐만 아니라 덴세츠 사의 바이오로이드들 모두에게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아탈란테는 조용히 끄덕였다. 샬럿이 벤치에 앉았다. 다소곳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 저기, 아탈란테. 궁금한 게 있어요.


그러시겠지. 그녀는 우물거리던 빵을 온전히 삼키고 샬럿을 응시했다.


 - 그 이야기 들었어요? 폐하께서 부관으로 선택하시는게 사실 반려를 정하시는 거였대요.


한 입 더 베어물려던 아탈란테는 놀라 기침했다. 


 - 그게 무슨...!


 - 뭐, 저도 들은 이야기긴 하지만요. 그래서말인데요. 당신은 대체 어떻게 폐하 눈에 든거에요? 


그녀는 부관으로 내정되던 때를 생각한다. 그 전까지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었는데...


그러다 그녀는 볼을 툭 툭 쳤다.


 - 저에게는 히포메네스가... 아니, 저는 아르테미스님께 순결을 약속한 몸입니다.


흐응. 하는 말을 샬럿이 길게 내뱉었다. 계속되는 시선에 아탈란테는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어둑한 밤에 작은 사색하나. 눈은 슬슬 눈앞에 있지 않은 것을 본다. 작디작은 생각에 


그녀는 뛰놀고있었다. 초원을, 아니 신전을. 그녀가 돌아본 곳에는 히포메네스가 자신을 따라오고있었다.


 - 히포메네스?


그녀는 뜻없이 이름을 불렀다. 그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생겼었나? 아탈란테는 다가간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그대는...?


그녀는 히포메네스에게 사령관의 얼굴을 본다. 놀라 소스라친 그녀의 머릿속에 불호령이 울렸다.


 - 감히 나의 아버지의 신전에서 남자와 뛰놀아? 그것도 내게 순결을 약속했던 네가?


그녀는 놀람을 상기시켰다. 나는 이 준엄한 꾸짖음에 놀랐던 것인가?


하늘에서 들리던 꾸짖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두사람, 네사람. 수백명의 목소리로. 그들은 환호하고 있었으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포메네스도 사령관도 없었다. 평탄한 흙밭. 황토와 비슷한 색의 담벽. 철창 사이 주린 듯 눈을 빛내는 사자. 


아탈란테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기시감이 있는 공포에.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인가 방패와 창이 들려있었다. 벌이다. 아탈란테. 나를 능멸하고 사랑놀음을 한 대가다.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사냥꾼. 아탈란테였으니까.



축축해진 몸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장, 또 작은 냉장고 위에 올려진 캐모마일이었다. 누군가 보고싶었다. 저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려줄 누군가가. 그녀는 방문을 열었다. 야간임에도 오르카의 복도는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똑, 똑.


 - 들어와.


아탈란테는 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사령관은 아직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는 아탈란테를 보고 생긋 웃고는 다시 펜을 분주히 움직였다.


 - 아직 주무시지 않았군요.


 - 아까 저녁 먹고 너무 많이 졸아서. 밀린 일은 끝내두려고.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았다. 작은 의자에 등받이는 없었다.


 - 안색이 별로네?


그는 왼팔을 벌려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딱 거기까지. 그녀는 그 배려에 감사했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안기고싶다는 생각을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 그대에게 묻고싶은 것이 있어요.


 사령관은 그녀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엷게 웃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인지 아탈란테가 재차 입을 열었다.


 - 부관을 임명하시는게 반려를 선택하려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 그래서?


그게 문제냐는 듯 짧게 되묻는 그에게 아탈란테는 다시한번 물었다.


 - 그대는 왜 저를 선택했죠?


 - 그런 점 때문에.


그런 점? 그녀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귀엽게 느낀 사령관은 한번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너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잠이 안오면 조금 더 있다가 가. 옛날이야기라도 하나 들려줄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은 펜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손바닥이 눈을 감싸자 그녀는 푸근했다. 너무 푸근했다. 경직되어 움츠러든 그녀의 어깨에 긴장이 풀리자 그는 아탈란테를 당겨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한가한 오후. 아탈란테는 지휘관 회의를 위해 집무실을 비운 사령관을 대신해 간단한 작업을 하고있었다. 서류철을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레이시였다.


 - 무슨 일이시죠?


 - 사령관은 없나요?


기운이 빠지는 목소리였다.


 - 회의중이니 제가 대신 용무를 듣겠습니다.


 - 약을 한 종류 더 받아도 될까 해서요.


 -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아마 안된다고 하셨을 것 같군요.


레이시는 머리에 손을 올렸다.


 - 잠을 자면, 옛날 일이 떠올라요.


아탈란테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 실험... 그래. 그 고문이라던가, 멍청하게 참고있던 제 모습 같은거요. 도망치면 저희 가족, 제 남편, 제 아이까지 실험시키겠다던 그 인간들 앞에서 무릎 꿇고 빌며 제발 그러지 말라던 그때가 말이에요.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마지막 실험때, 그 실험만 끝나면 집으로 돌려보내준다던 그 때. 그 악마들이 저를 환상에서 풀어줬어요. 나는 가족도 없고 자식도 없고 인간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박아넣은거에요.


그 때가 떠오를 때면...


 - 닥터에게, 가보세요.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자르듯 소리쳤다. 레이시가 그런 그녀를 쳐다보고 머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 당신은 그렇게 되지 않길 빌게요.


레이시에 말에 아탈란테는 날이 선 듯 쏘아붙였다.


 - 그게 무슨 말이죠?


 - 깨지 않길 빈다는 뜻이에요.


 - 저는 환상 속에 산 적이 없는데요?


레이시는 건조한 웃음을 띄웠다. 문이 닫히는 사이로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 네, 현실이 깨지 않길 빌게요.





 나른한 오후. 꿈결같은 시간의 마성에 진 사람은 오직 아탈란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주 꾸던 악몽탓에 필요 이상의 잠은 청하지 않으려 했지만 고통보다 참기 힘든 편안함에 그녀는 굴복했다. 


 몇 안되는 날이다. 오르카 호가 부상해 햇빛을 충분히 쬐는 날은. 방금까지도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던 메이드들도 햇빛이 밝혀준 먼지들을 아름답다 느끼고 있었다. 아탈란테는 조그마한 소리에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렸다. 사령관이다. 그 행복한 느낌에 순응해 몸을 조금씩 일으켰다.


그가 아탈란테를 끌어안는다. 그녀는 기쁜 듯 눈을 감았다.


조용한 목소리. 귀에 스미듯 나지막이 들리는. 그녀는 그 감각에 깜짝 놀랐다.


 - 그대, 아니. 죄송합니다. 졸려고 한 것은...


아탈란테가 허겁지겁 일어나 그의 품에서 멀어져갔다. 그는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멀어지는 걸음만큼 내딛어 그는 다시한번 그녀를 끌어안았다.


 - 이러면, 저는...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히포메네스. 그 이름을 말하고싶지는 않았다.


 - 당신은 내가 싫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 무슨 일 있나요?


 - 무슨 일 없으면 이러면 안돼?


사뭇 진지한 듯 보이는 모습에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사령관이었다.


 - 좀 있다가 출정이니까.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 그렇게나 위험한 일이라면 나가지 않으시는게...


 - 무슨소리야. 며칠이나 나가있을지 모른다는 건데. 그동안은 당신을 못보잖아.


아탈란테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능글맞은 그를 보다가 다시 서류정돈을 하려 몸을 돌렸다.


사령관의 다녀올게. 하는 소리. 미세하게 떨린 말꼬리에 이는 노파심이 있었다.


아탈란테는 사령관을 쳐다보았다.


 - 정말 별 일 아닌거죠?


사령관이 그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그를 위태로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응.







아탈란테는 비질을 한다. 돌아올 시간이 한참 남은 그를 기다리면서.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오히려 단순한 작업에 몰두했다.


 - 아탈란테 당장 나와.


사령관실의 문 앞에서 노한 듯 한 레오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아탈란테의 앞에 섰다.


 - 레오나 대장...


 - 사령관은 어딨어?


 - 저도 모르겠어요.


레오나가 말했다. 그래? 그녀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탈란테의 따귀를 날렸다.


 - 당신이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 ... 정말이에요. 저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나신 거에요.


 - 그러니까. 당신이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레오나가 덧붙였다. 생각 해.


 - 부관한테 말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지? 왜 당신한테 말하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해? 당신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곳이니까 어디로 떠났다고 말하지 않았겠지.


레오나는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그녀에게서 뒷걸음질쳤다.


 - 생각해 내. 사령관이 당신에게 말하기 힘들었다는 걸 감안해서 더 재촉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당신이 꾸물거리다가 사령관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용서안해.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아탈란테가 끄덕이자 레오나는 돌아섰다.


그녀는 사령관의 책상에 앉았다. 그를 찾으러 가야 할까? 그녀는 고민했다. 그는 유일한 인간이다. 혹은 우리의 사령관이며... 그녀는 여러 이유들을 하나씩 대어보며 자신의 이 충동과 합당한지 판단하고 있었다. 


벌이다. 아탈란테. 그녀는 그 꾸짖음에 다시금 몸부림친다. 아닙니다. 아르테미스님. 사랑놀음이 아닙니다. 저는...


그녀는 두려움에 떨다 책상에 엎드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금 투기장이 떠오른다.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 때가.


무서워요.


무서워?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나뭇탁자 앞에 앉아있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 보이는 제우스의 신상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에 놓인 포도주를 들이키려다 놀란 듯 일어나 앉는다. 이럴 때가 아니다.


 -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아탈란테.


그녀는 어느새인가 눈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본다. 시야가 흐려서인지 얼굴을 제대로 가늠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그 형상의 이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 히포메니스.


그녀는 그의 사랑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애타게 그리워하던 그 이름 앞에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 그간 어떻게 지냈어?


짧게 손을 내밀며 건네는 질문에 그녀가 잠시 쭈뼛거렸다. 그러기도 잠시. 그녀는 홀린 듯 대답했다.


 - 아르테미스님에게 벌을 받고 있었어요. 살아남아서, 투기장에 끌려가서 콜로세움의 검투사들마냥. 괴물들을 죽이고...


그녀는 눈물짓는다. 목구멍부터 올라오는 눈물은 그녀의 목소리를 가늘게 흔들었다.


 - 무서웠겠네. 


몸서리치던 고개를 끄덕였다.


 -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괴물들 하며, 아르테미스님 하며...


그리고 그녀는 말 끝 그 꼬리에 달라붙는 편안함을 느꼈다. 말을 재촉하는 듯 그녀를 응시하는 히포메네스에 그녀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 다시금 그 벌을 받는 것도 무서워요. 제가 제가 아니게 되는게 무서워요. 그 황토냄새도. 주린 침 사이로 흘러나오던 울음소리도. 손아귀도. 탁상도. 잠수함도. 캐모마일도. 그 사람....


아탈란테는 말을 멈추었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목소리.


그녀의 눈망울이 조금씩 넓어졌다. 그 얇은 틈새에서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 목소리였다.


무서워?


 - 당신이 없는 삶도 무서웠고 저를 잃을지 모르는 삶도 무서웠어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에요


그 사람.


 - 그 사람이 제 옆에 없는게 제일 무서워요.


그녀의 눈망울이 파르르 떨렸다. 


 - 그 사람을 구하러 가야해요.


 - 왜?


왜 라는 질문에 그녀가 멈춰섰다.


 -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


당신. 그녀는 사령관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그녀에게... 그녀는 여러가지 수식어구를 떠올린다. 그러다가 고개를 한번 젓고는 말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


히포메니스는 웃는다. 서글퍼보이는 웃음이었다.


 - 그렇다면 나는?


 - 미안해요. 히포메니스. 하지만... 

당신은 나랑 만난 적도 없잖아요.


그녀는 탁자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잘 가. 아탈란테. 그렇다면 여기 아탈란테는 두고 가.


그녀는 허공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머리의 월계관을 집어들고 탁자에 던졌다.


사령관의 책상엔 눈물방울이 가득했다. 아탈란테는 기침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창을 챙겼다. 머리에 얹은 월계관은 땅바닥에 팽개쳐져있었다.


기다려줘요. 당신.



어두운 밤에 스산하게 바람이 불었다. 오랜만에 밟는 흙의 감촉에 그녀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품속에서 그녀는 지도를 꺼낸다. 붉은 동그라미 표시. 그가 나에게 언급하고싶지 않았던 장소.


그녀는 행선지를 염두해두고 그 방향을 향해 갔다.


 


 사령관은 온 몸을 감쌌다. 생각보다 많은 철충들 사이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벗어던진 웃옷을 꼭 안고는 추위에 떨었다.


열감지 기능이 있는 철충의 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 이러다간 먼저 얼어죽겠군...


그는 철컥거리는 구동음을 들었다. 그것이 벽너머로 점점 가까워 지는 것 같자 재빨리 옷을 던졌다. 바로 옆에 있는 부서진 석상의 머리를 껴안고 체온이 내려가기를 빌 뿐이었다.


무너진 벽 너머로 서있는 철충의 기름냄새는 그도 맡을 수 있을 법 했다. 그는 안고있던 제우스의 머리통을 던질 생각을 하고있었다.


더이상 가까워 질 수도 없을거라고 판단한 그는 뒤돌아 일어서서 석상의 머리통을 기름냄새의 근원을 향해 던졌다. 그것을 맞은 철충은 합선을 일으키며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 번개의 신이라더니...


 - 그대...?


그는 그리운 목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합선을 일으킨 철충에게서 창을 뽑아드는 아탈란테가 보였다.


 - 아, 그게... 마음대로 나와서 미안해.


 - 왜 혼자 이런 곳 까지 온거죠?


 - 다른 녀석들은 바쁘니까. 혹시 생존자가 남아있다면 데리고 가야 하잖아?


 - 위험을 안고 찾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습니까?


 - 하지만 당신, 예전에 여기서 울고있었는데?


그는 울 듯 구겨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따귀 한대정도는 내주어야지. 그는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곱씹었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게 다가온 그녀를 안을 생각도 못하고 입맞춤이 끝날때까지 그는 얼어있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그는 진정시켰다. 그는 그녀에게 이곳에 온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신전과 콜로세움. 검투는 그녀에게 트라우마였기 때문이었다.


 - 일단은 빨리 돌아가죠. 길을 뚫고 있겠습니다.


 - 방금... 신전에서... 나한테?


아탈란테는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 저는 당신이 해주는 옛날 이야기가 좋았어요. 신이 나오고 마법이 나오고... 


저한테 신화는, 마법은, 아탈란테는 진짜였어야 했으니까요.


아르테미스가 없다면. 지옥도를 견뎌내고 만나야 할 히포메네스가 없다면. 저는 대체 왜 그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했을까요?


사령관이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는 창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창 끝에 걸리는 철충의 장갑을 어렵잖게 찢어냈다.


 - 그런데, 저는 아탈란테가 아니었나봐요.


그녀는 방패에 창을 맞부딪쳤다. 창에 묻어있던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사령관이 무언가 물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방패로 어렵잖게 튕겨내고 말했다 


 - 잠시만 벽에 기대 계세요. 퇴로가 확보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알았어. 조금 졸려서 그런데 자고 일어나도 될까?


 - 그렇게 해두세요. 


그는 벽에 몸을 기댔다. 창을 휘두르는 아탈란테의 모습이 흐려져간다. 그의 눈꺼풀이 닫혀갔다.


잘있어요. 그대.





 오르카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눈을 떴다. 그 사이의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그는 분명히 돌아왔고 의식은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 이어져있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그는 입을 열어보았다.


 - 밖에 누구있어?


 - 사령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레오나였다. 울상이 된 레오나가 그를 타박했다. 이어서 들어오는 마리와 콘스탄챠와...


그중에 아탈란테는 없었다.


사령관은 그 후로 오르카 호에서 아탈란테를 볼 수 없었다.


 




오르카 호를 벗어난지도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아탈란테는 펜을 쥐다가 힘을 풀었다. 이건 창이 아니지. 천막에 가까운 보금자리를 나서자 알렉산드라가 그녀를 맞았다.


 - 자, 선생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생긋 웃었다. 준비한 스케치북을 들고 공터를 향했다.


평평하게 깎은 통나무 위에 아이들이 앉아있었다. 밤바람이 차다. 그녀는 모닥불을 아이들 가까이에 놓았다. 그녀는 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머그컵에 가득 담기다시피한 차를 알렉산드라가 건넸다.


 - 뭘요. 다른 분들에 비하면...


그녀는 오른손에 당겨지는 감각을 느꼈다.


곰인형을 안고있는 LRL이 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마시고 싶나요?


어린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아탈란테는 곰인형을 받아내고 컵을 건넸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알렉산드라 편에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째서 여기 당신이...?


 - 참. 깜박하고 말을 안했네요. 손님이 찾아왔어요.


 - 오랜만이야.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보다. 그래, 그녀가 상정하던 것보다 훨씬 더. 그녀는 그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녀의 보금자리에 그를 초대했다.


무슨 말로 말문을 틀지도 모르겠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다 시선을 돌렸다.


 - 여기서 하는 일은 어때?


 - 마음에 들어요. 예전에 그대가 아이들에게 해주던 것 처럼. 저도 옛날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 그래...


 - 당신이야말로,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요? 


 - 나는 뭐... 내일까지 휴가를 썼거든.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말을 고르려는 듯 여러 추임새들을 늘어놓다 결국 한숨을 뱉었다.


 -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어?


아탈란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 애초에, 왜 떠난거야?


그녀는 고개를 한번 뒤로 젖혔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천장으로 가려진 먼 곳을 보았다.


 - 샬럿은 왜 샬럿일까요?


로미오와 줄리엣? 그는 생각했다.


 - 그녀는... 결투가이며 총사대원이죠. 


그런데 왜 뒤마의 소설의 다르타냥이 아니라 샬럿이죠? 


그는 입을 다물었다.


 - 저는 사냥꾼이에요. 월계관을 쓰고 순결이라는 데에 목을 매고있는. 그런데 왜 저는 아탈란테인가요?


 - ....


애달픈 눈을 한 아탈란테는 사령관의 침묵을 받았다. 받아 말을 이었다.


 - 그녀는 다르타냥이 아니더라도 샬럿으로 남겠죠. 그녀에겐 그것이 그저 캐릭터이고 닮은꼴이니까요. 그럼 저에게서 아탈란테를 떼버리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요? 그게 제 인생이었는데.


레이시의 기분이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당신. 혹시 예전에 해주던 이야기 기억해요? 그대가 해주었던 이야기중에 제가 제일 싫어하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어요.


 - 돈키호테.


 아탈란테가 쿡 하고 웃었다.


 - 맞아요. 돈키호테. 자신이 기사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산 멍청한 평민. 우스꽝스러운 분위기 하며 웃고있는 아이들까지. 뭐가 그렇게 우습죠? 그땐 화가 났지만 이제 알것 같아요. 저는 공주가 아니라 광대였어요. 


 - 아탈란테...


 - 물어볼게요 그대. 저는 대체 뭐죠? 제 삶은 뭐였죠? 벌이라고 생각해서 받았던 것은 제 죄가 아니었고, 지켜야 할 품위와 이름은 제 것이 아니었어요. 차라리...


그녀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문간을 쳐다보았다.


 - 선생님...


그녀는 눈을 부비다 들어온 LRL을 맞았다. 그녀는 조그마한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 무서운 꿈을 꿨나요?


LRL은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죠. 좋은 꿈 꾸세요.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천막을 나섰다.


 - 선생님. 저 아저씨는 누구에요?


 - 그러게요. 누구라고 해야 할까요? 


 - 선생님 이야기 해주세요.


아탈란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고 어르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 선생님은 예전에 나쁜 괴물들과 싸웠답니다. 그 때 죽을뻔 했던 선생님을 구해준게 저 아저씨에요. 그 때부터 선생님이 좋아하던 사람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그녀는 옛 생각에 잠겼다.


 - 그렇게 어쩌다보니 선생님은 여기에 오게 됐네요. 


 - 선생님 그런데...


 - 뭐가 문제라도 있나요? 우리 공주님.


 - 이 이야기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안끝나요?


그녀는 말문이 턱 막혔다.




 날이 밝자 그녀는 섬의 여기저기를 사령관과 둘러보았다. 사령관은 오랜만에 배에서 떠난 요안나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에게, 아탈란테가 처음에 그랬듯 땅 위에서의 나무라던가 꽃. 그리고 흙내음같은 것은 정말 오랜만의 것이었다.


사령관이 손을 마주걷는 그녀의 손에 뻗었다.


둘이 걷는 내내 그가 아탈란테의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할 말이 있었다. 그들을 재촉한 것도 시간이었다.


 - 저기 말야.


아탈란테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지 알고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보았다. 보랏빛 밤하늘이었다. 이제 슬슬 그가 돌아갈 시간이었음을 눈치챘다. 그랬기에 입을 연것이리라.


 - 말씀하세요.


 - 나랑 같이 돌아가면 안될까?


아탈란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코 긍정의 의미가 아닌 그 웃음에 사령관이 말을 바꾸었다.


 - 아니, 미안한데 당신.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내 부관으로 돌아와줘.


 


아탈란테가 입술을 움직였다. 선홍빛 입술이 오므라들며 작은 주름이 생겼다. 그 말이 소리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말을 짜냈다.


 - 왜 제게 그렇게 집착하시는 건가요?


저는 아탈란테가 아니에요. 평생을 광대마냥 남의 이름을 쫓으며 살았어요. 용모야 오르카에는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무것도 없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아탈란테는 울먹임을 머금고 말했다. 그녀의 눈망울이 붉게 익어가고 날숨 소리가 들릴만큼 호흡이 거칠어졌다.


사령관은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 시선을 돌렸다.


 - 난 누구야?


 - 그대...?


사령관은 은은하게 웃었다.


 - 이래서 당신은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야. 


 아탈란테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사령관. 각하. 주인님. 권속. 사장님. 폐하. 다들 뭐. 나를 그렇게 부르지. 그런데 그건 내 이름이 아니잖아? 아무도 내 이름을 물은 적 없어. 그럼 그녀들이 나를 부르는 그 호칭은 뭔지 알아? 


그녀들한테 필요한 사람.


 아탈란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 나는 한번도 사령관이 되겠다 말한적이 없고 한번도 그녀들의 주인이 된다고 한적이 없어. 내 이름은, 뭐 그녀들이 지어준거야. 당신은 사령관이다. 권속이다. 주인님이다. 사장님이다. 그럼 사령관이 아닌 나는? 주인이 아닌 나는? 


거기서 사령관도 아닌 주인도 아닌 그냥 나. 나만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당신 뿐이었어. 그래서 당신이 특별해. 당신이 아탈란테라서가 아니라 당신이라서.


그녀는 떠올렸다. 사령관은 한번도 자신을 아탈란테라 부른 적이 없음을.


그는 손을 뻗었다. 아탈란테의 뺨에 손이 다가간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불안한 눈빛이었다.


그는 손을 멈추기도 잠시. 다시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 돈키호테는, 음. 니 생각보단 꽤 명작이었어. 조소가 아니라 감탄을 더 받았지. 


부드러운 손바닥. 언젠가 그녀를 구해주었던 그 감촉.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의 눈가에서 맺혀 떨어지는 눈물을 숨기려 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 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리고,


사령관이 서두를 꺼내곤 뜸을 들였다.


 - 아직 당신은 연기가 어색해.


아탈란테는 풋 하고 웃었다. 웃는 그녀를 보고 사령관도 엷은 미소를 띠었다.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 미안해요.


아탈란테가 말했다. 사령관은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서글픈 표정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 잘 있어.


그는 간신히 이별의 말을 꺼냈다.


사령관이 돌아간 후의 천막은 적적했다. 홀로 쓸 천막에 빈자리는 한사람 몫 이상이었다. 그녀는 배게를 안았다. 공허함이 들었다. 바깥에 두었던 신발을 안으로 들였다. 허전함이 남았다. 그녀는 빈 천막을 상념으로 채웠다.


그녀가 떠올리는것은 얄궂게도 사령관의 기억이었다. 

그녀는 낮잠을 자던 사령관을 떠올린다. 

그녀는 자신에 이마에 입맞추던 사령관을 떠올린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령관을 떠올린다.


 선생님,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안끝나요?


이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탈란테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아직 당신은 연기가 어색해.


그녀는 들여온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미친듯이 사령관을 향해 달려나갔다.





 - 여기까지 오셔서 즐거우셨나 모르겠네요. 사령관.


 - 뭐, 꽤 재미있었어. 요안나. 


그는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마중을 나온 요안나와 인사치레를 나누고 속절없이 항구에서 떨어진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배의 고동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주 천천히. 배는 항구의 오른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 잠깐만요.


그는 단말마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탈란테가 그를 향해 오고있었다.


 - 당신...?


배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배가 움직이는 반댓방향으로 걸었다.


아탈란테는 사령관을 쫓고있었다. 그녀는 배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걸었다.


 - 제 연기가 그렇게 어색한가요?


 - 한 번 해볼래?


아탈란테가 숨을 골랐다.


 - 왕자님. 말씀을 거두어주세요. 저같은 광대가 어떻게 그럴수 있겠습니까?


사령관이 웃으며 화답했다.


 - 가련한 광대 아가씨. 저는 여지껏 슬픔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저를 웃게 할 수 있으니, 저와 결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저는 별볼일 없는 광대입니다. 당신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배가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순항하기 시작했다.


 - 괜찮습니다. 


사령관은 배가 움직이는 반댓방향으로 달렸다.


 - 저는 여지껏 다른 사람의 생을 흉내내기만 했습니다. 


 아탈란테는 배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달렸다.


 - 알고있습니다.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 저는 당신이 기대하던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달리면서 그녀는 오열하고 있었다.


 - 다시 한 번 청하겠습니다. 광대아가씨.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손을 내밀었다. 배는 항구를 떠났다. 


그녀는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흐느끼며 끄덕일 뿐이었다.


 - 기꺼이.


그녀는 땅을 박차고 뛰었다. 내민 사령관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탈란테는 사령관의 손을 잡는다.


사령관. 주인님. 권속. 그리고 그대.


아탈란테. 돈키호테. 광대. 그리고 당신.


전편링크)


왈츠 인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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