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한 분위기의 간이 재판 현장, 이 엄숙해야 할 장소에서 멀린은 항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린의 앞에는 판사를 맡은 아르망과 검사의 역할을 맡은 리앤이 그리고 멀린의 변호사로는 블라인드 프린세스가 위치해 있었다.


언제나 명랑, 발랄, 활기 그 자체였던 멀린이 이토록 당황한 것은 리앤의 봉사형 50년 구형과, 변호사 역을 자청한 블라인드 프린세스가 꾸벅꾸벅 조는 모습 때문이겠지. 지금도 50년 봉사형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멀린은 블프의 멱살을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야! 변호사라며! 너가 변호사라며! 왜 퍼질러 자고 있어! 어서 항변하라고!!"

"아, 미안해요 멀린... 어제 작은 저와 가볍게 쏘맥을 달렸더니..."


자못 신선한 광경이군. 평소 둘의 관계란, 빨간 녀석이 하얀 덩어리를 골려 먹다 무자비한 육체적 응징을 당하는 것인데, 오늘 만큼은 빨간 녀석이 하얀 덩어리의 멱을 잡고 뒤흔들다니. 참으로 지금 이루어지는 재판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멀린은 결국 멱살을 잡고 뒤흔들던 손을 내려놓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아아아! 차라리 통조림 시절이 더 나았어!! 그땐 적어도 나 대신 고통 받을 깡통이라도 있었지!!!"


결국 이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멀린의 입에서 충격적인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 차라리 카멜롯에 잘 보존된 통조림이던 시절에는 멀린 대신 펍헤드가 고통 받았으니까. 블프에게 짓궂은 장난을 쳐도 결국 쥐어 터지던 것은 스피커가 매달린 펍헤드였다. 그런 점에서 빗대어 볼 때, 직접 고통 받는 지금이 더 최악이리라.


"무, 물론 내가 블프 일행을 쫓아내기는 했지! 구조대와도 교전 했고!"

"호오~ 순순히 인정하시는군요? 존경하는 재판장 님, 피고인도 순순히 인정..."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하지만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아니, 애초에 리앤! 당신이 모두 밝혀낸 거잖아!"


확실히, 당시 리앤의 추리에 멀린이 수치사 했던 기억이 난다. 방청객에서 느긋하게 재판을 구경하던 나 역시, 당시 현장을 똑똑히 기억하는 바. 그래서 멀린의 항변에 공감이 갔다. 재판을 주관하던 아르망 역시 멀린의 항변에 긍정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피고의 말도 일리가 있군요. 따라서 제 권한으로 판결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본 재판에 특별 판사를 임명하겠습니다."

"특별 판사?"


특별 판사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런 제도가 있었는가 진지한 고민을 하던 도중 뜻밖의 말이 아르망에게서 흘러 나왔다.


"본 재판에 참관 중이던 폐하를 특별 판사로 지명함을 선언합니다."

"어... 나?"

"예, 폐하. 자 여기에 앉으시지요."


말이 특별 판사지, 그저 귀찮으니 떠넘기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르망은 빼꼼 혀를 내밀고는, 얌전히 자리를 권할 뿐이다.


'뭐, 재밌어 보이니 한번 해 볼까?'


가끔 열리는 약식 재판이라고 해봤자, 늘 이런 식이었다. 애초에 화목한 오르카에서 재판까지 갈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재판이라고 거창하게 칭해봤자 대부분은 어떤 할 짓 없던 오르카의 어느 남자가 바이오로이드의 팬티를 훔쳤다던가, 엘리랑 교미하고 싶다를 외치다 공연음란 및 아동 보호법 위반 혐의로 입건 되던가 하는, 가벼운 사건들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피고의 입장이던 내게, 누군가에게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리였다.


"흠! 흠! 그럼, 아르망의 요청에 따라... 에... 이번에 특별 판사를 할 사령관 입니다."


판사석에 앉아 멀린을 바라보니, 멀린은 믿음직하지 못한 술 주정꾼 변호사보다 눈 앞에 있는 나를 더욱 신뢰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만 보더라도, 함께 trpg 게임을 즐긴 전우를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멀린의 죄목이..."

"죄목이라니! 애초에 무고하다고!"

"...5년 추가."

"에엑?!"


감히 하늘 같은 재판장에게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소리치다니. 괘씸죄다.


"이, 이거 직권남용 아니야?! 야! 블프!! 일어나 이년아! 변호사면 변호사 답게 말 좀 해보라고!"

"으으... 사령관, 전 숙취가 심해서... 이만 퇴근해도 될까요?"

"뭐? 야! 퇴근이라니! 너가 변호해주겠다며! 어딜 가!"

"응~ 고생했고, 들어가서 푹 쉬어."

"그걸 또 진짜 퇴근 시킨다고?"


한가하게 손까지 흔들고 퇴근한 블프의 뒤로, 허망하게 남겨진 멀린은 완벽히 좌절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미쳤어... 여긴 미쳤어... 내가 왜..."

"아, 아무튼 판결하라고 했었지?"


대충 눈짓으로 아르망을 바라보자, 아르망은 다른 일처리를 하던 와중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수긍했다. 처음부터 바쁘던 그녀에게 이런 재판은 그저 귀찮은 일이 늘어난 것일 뿐이었겠지. 그럼 그녀의 요청해도 '내 뜻대로' 판결을 해 보실까.


"어디 보자... 구형이 봉사 형 50년? 그리고 괘씸죄가 5년 추가."

"에라이! 될 대로 되라! 맘대로 하셔! 배째!"


결국 멀린 역시 더 이상의 반론을 포기한 채 될 대로 되라는 반응을 보였다. 리앤 역시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듯 사태를 방관할 뿐이다.


"그런데 봉사형이 뭘 하는 거야?"

"아, 그건 보통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음, 오르카의 환경 미화 작업을 한다거나... 취사실의 설거지 도우미를 하는 정도야 왓슨."


규정집을 읽어 본 리앤의 대답에 나는 매우 유감스러움을 느꼈다. 뭔가 너무 시시한걸.


"뭐? 정말 그것들만 하면 되는 거야? 괜히 쫄았네..."


생각보다 가벼운 형벌임을 실감한 것인지 멀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나는 특별 판사의 권한을 조금 이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멀린의 경우에는 하나 더 추가하자. 그래도 되겠지?"

"음... 왓슨의 머릿속이 대충 보이지만... 상관 없으려나?"


담당 검사의 허가도 있겠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선고하는 것 뿐이다.


"에... 피고인 멀린에게 봉사형 55년을 판결한다. 그리고, 봉사 활동의 내용은 언제나 내가 원하면 비밀의 방으로 올 것. 이상."

"하~ 봉사를 수 십 년은 하라고 그러니까 쫄았는데 설거지에 환경 미화면 괜히 쫄았... 뭐?"

"자고로 봉사라 함은 역시 (성)봉사지."


멀린의 자기소개대로 PECS의 대악당이자 오르카의 귀염둥이 멀린의 육체를 복원하는 것에 들어간 자원이, 드디어 그 빛을 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