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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길고양이 주의보



(매움 주의)



* * *





장고를 참고하자고 정한 후부터의 행동은 신속했다.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먹는 놈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먼저 들른 곳은 코헤이의 비밀 지부들이었다. 


이 비밀 지부들은 가톨릭의 영성체 의식에서 참고한 이름 모를 의식을 통해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신도들에게 제공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고기는 빛의 육체를, 피는 지혜를 상징한다.


우리가 모은 정보를 정리하는 알렉산드라에 따르면, 코헤이는 비밀 지부를 없는 취급한다고 한다. 따라서 파견된 천사도 없단다. 돈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이비더라도 종교로서의 긍지는 있다는 거겠지. 


괜히 비밀 지부는 아닌지 하나 같이 찾아가기 귀찮은 곳에 있었다. 여름임에도 황색으로 말라 죽은 논을 배경으로 둔 곳에 있기도 했고, 사방팔방 나무 밖에 없는 곳에 있기도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에는 공통점들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무릎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장고에서는 장고가 스티븐의 무릎을 작살내고, 킬빌에서는 빌이 키도의 무릎을 쏘겠다고 위협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처먹겠다고 격오지까지 찾아간 놈들은 모두 무릎이, 다리 채로 날아갔다. 우리가 찾아간 모든 곳에서 그랬는데, 여기에는 남자의 '애니'를 이용했다. 장고처럼 날뛸거면 당연히 리볼버를 써야한다고 그가 주장했고, 맞는 말이라 나는 바로 수긍했다. 그리하여 한 놈당 두 발의 총알을 먹여줬다.


"이건 뭐 리볼버가 아니라 한손으로 쏘는 대포네."


마지막 지부의 마지막 한 놈을 작살내고 내가 말했다. 


"꽤 센 편이지. 우리 아가씨들은 다 그래."


"그러고보니 우리 닥터가 그런 적이 있어. 똑같은 참수검인데 내가 가진 참수검이랑 티아멧의 참수검이 왜 다르냐던데. 당신 아가씨들은 다들 그래? 이 애니처럼 끝내줘?"


"우리 아가씨들은 터프했거든. 다른 건 몰라도 화력은 무조건 강한 걸 좋아했어. 그럴 필요도 있었고."


평범한 애니의 리볼버로도 철충을 작살내는데는 충분할 텐데. 그 주인에 그 휘하라고, 이 남자의 아가씨들은 주인 닮아서 평범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나 보다.


무릎이 작살나는 고통을 잘 알고 있어서였는지, 무릎만 작살내서 죽여버리는 것은 내가 기대하던 것 이상으로 통쾌했다. 총으로 어디를 맞든, 무릎을 맞아서 지르는 비명은 다른 비명과 비교 불가다. 몸 안에 있는 모든 걸 내지르는 듯한 소리라고 할까. 대항하겠다고 어떻게든 목청을 억눌러 보려는 놈들은 없었다.


유난히 비굴하게 굴던 한 지부장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라 다음 목적지는 일본이 되었다.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먹는 씨발것들이 있다는 것은 유통하는 놈들이 있다는 것이고, 어느 업계든 유독 튀는 놈이 있다. 이 개같은 업계에서 가장 튀는 놈은 통칭 '영업부장'이라고 불리는 놈이었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유통이 어렵게 되어서, 현재는 일본에 기존보다 큰 규모로 거래를 틀려 한다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일본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매일을 격오지만 다니다 보니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몇 주간 재충전 시간을 가지면서 유통업자의 소재를 파악하고 동향을 살폈다. 아마도 놈에게 코헤이의 비밀스러운 지부들이 작살났다는 소식이 들어갔던 건지, 영업부장을 잡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맞출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재충전의 시간은 좀 더 늘어나게 됐고, 겨울이 되어서야 어느 으리으리한 술집에서 계약을 목적으로 자리를 가질 것이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 * *




2087년. 겨울. 일본.


영화를 참고하자는 남자의 아이디어는 마음에 들었다. 예전이든 영화를 참고하는 지금이든, 똑같이 총이나 칼로 죽여대는 것은 변함없어도 몰입할 캐릭터가 있다는 점이 재미를 배가 시켰다. 완전히 몰입하면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 시선과 사고가 배제되는 느낌이 들어서,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더욱 더 영화 캐릭터들에게 몰입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정하니까 생각난 건데, 비밀 지부를 박살낼 때 장고 흉내를 냈던 것은 재밌긴 했어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의 어느 부분에서 부족하다 느낀 걸까.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본 결과, 복장이 문제였음을 알아냈다.


"그렇구만. 장고가 평범한 여자처럼 입고 다니진 않지."


"카우보이… 카우걸처럼 차려 입었으면 더 재밌었을 거야."


남자가 긍정했다.


"물론. 연기에는 알맞는 복장이 필수지. 어때? 카우걸처럼 꾸며볼까?"


남자는 나보다도 더 기대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떤 복장이 됐든 상상만 해도 좋았기에 당장 카우걸로 변신하고 싶었지만, 영업부장이 나타날 곳에 더없이 어울리는 복장은 따로 있었다. 


"장고는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베아트릭스 키도야."


그 이름만 들어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겠다는 듯 남자는 호텔 라운지를 나섰다. 기다리고만 있어도 그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나는 객실로 돌아갔다.


게이오 플라자 호텔 상층 창가는 통유리라서 신주쿠의 부분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우리 객실 기준으로 정면에는 걸어서 20분 거리인 신주쿠 역, 좌측으로는 히가시신주쿠, 우측은 교엔의 녹림이 보인다.


객실의 각도가 절묘해서 히가시신주쿠 쪽의 하나조노 신사에 있는 도리이도 보이는데, 여기는 간밤에 다녀왔다.


호기심으로 찾아간 도심 속 밤의 신사에는 인간이 한 명도 없었다. 바람은 소리없이 불었고, 같은 신주쿠에 부는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한마디로 을씨년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일본의 여름 특유의 기괴함이 겨울 속에서 꿈틀대는 것 같은 느낌. 공포에 있어서 개성적인 세계관을 가진 일본답다고 해야 할지, 신사를 감싼 어둠은 어둠에 익숙한 나조차도 으스스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밤이 되어 거리로 나왔다. 이틀 전을 떠올리며 두 번 다시 어느 신사든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신오쿠보 방면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다양한 언어로 가부키초 1번가를 알리는 홀로그램 간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나는 그 간판 너머를 보고 하나조노 신사만 그랬던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하여튼 신사에서 느꼈던 꺼림칙함은 신사 고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다. 신사에서 느낀 오컬트적 불쾌함과는 비교도 안 된다. 반대로 이 거리는 오컬트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정신이 나갔다.


아마도 일본의 유흥가는 다 이런 느낌이겠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일본은 그 유명한 키리시마 법의 발안지니까.


갑자기 찾아온 현기증을 버티려고 남자의 코트 자락을 쥐었다. 복장을 구해오고서 한마디도 안 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래 살았어도 못 본 것들이 많지?"


그 말대로다.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신오쿠보 방면으로 걷고 있었는지도 잊고 말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네온과 홀로그램이 안 보이는 곳까지 갔다. 


조용한 골목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고서야 나는 남자에게서 손을 뗐다.


메론빵을 집으며 괜찮겠어? 라고 묻는 남자에게 말했다.


"여기서 돌아갈 순 없어. 영업부장인지 뭔지하는 새끼는 반드시 잡을 거야. 그리고…"


남자를 흘긋 봤다. 계산도 안 하고 빵을 우물거리던 남자의 입에 녹색 크림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뭐?"

"아니야. 아무것도."


이 남자면 부탁하는대로 다 들어주지만, 아무리 열받았어도 거리 통째로 없애버리고 싶다 말하긴 뭐했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와 캔커피를 이용해 정신을 추스리고, 계속해서 신오쿠보 방면으로 향했다. 남자가 차를 쓸데없이 그쪽에 주차해놨다기에, 타려면 그곳까지 가야했다. 


유료 주차장에 도착했다. 밤에 나온 이유는 '사전답사'다.

롯폰기로 향한다. 


이마를 댄 차창 밖을 최대한 담담하게 바라보려고 했지만, 중간에 가부키초가 보여서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로, 최악이다.


"나는 원래 이런 나라에서 제조됐던 거네."


차창에 이마를 댄 채로 말했다.


"그렇지. 이제 아르망 추기경이란 개체는 없지만 말이야."


"키리시마 법인지 뭔지, 좆같은 새끼들이 사람을 뭐로 알고…"


"사람? 바이오로이드가?"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이마를 떼고 고개를 돌려보니까 딱 그 말투에 어울리는 얼굴이 보였다.


"농담을 하는 건 좋아. 근데, 앞으로도 상대 기분 안 봐가면서 하면 있지. 그때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끄도록 해.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알았어?"


"무슨 짓을 하려고?"


"알 거 없어. 걱정은 마. 너한테는 아무 짓 안 해."


떨떠름하게 입을 실룩댄 남자는 롯폰기까지 전방을 주시했다.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기분 좋았다.


롯폰기에 도착해서 역 앞에 잠깐 차를 세워두고,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알렉사? 통화되니?"


스피커 모드로 전환된 스마트폰에서 알렉산드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시 대기 중입니다."


"우리 알렉사랑 떨어져있는지 3일인데? 설마 3일 동안 안 잔 건 아니지?"


간드러지고 느끼해서, 못 들어주겠는 말투다. 


"3일 정도는 괜찮습니다."


"잠은 자야지. 통화 끝나면 바로 쉬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러면, 주인님. 필요하실 정보를 전달드리면 될까요?"


"추가 정보를 벌써 모은 거니?"


"주인님이 준비해주신 것을 뒤적거린게 전부인 걸요. 설마 시티가드의 데이터베이스까지 손바닥에서 마음대로 굴리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쩜 말을 이리도 예쁘게 할까."


"아, 정보도 그렇지만, 3일만에 주인님과 닿아 기뻐진 이 마음부터 전해도 될까요?"


"아아… 역시 우리 알렉사 밖에 없어…"


"야 이 씨발 새끼들아."


"물론 아가씨와도 닿을 수 있어 기쁩니다."


내가 욕하기를 노린 듯한 타이밍과 말투였다. 이년은 요령이 좋다.


알렉산드라에게서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받은 남자는 내 스마트폰에도 넘겨주었다. 그렇게 정보를 열람하려던 타이밍에 불법 주차 단속 중인 인간들이 보여서, 일단 차를 옮기기로 했다.


다음에 차가 선 곳은 규모가 큰 유곽을 본딴 듯한 디자인의 술집이었다. 우리는 알렉산드라가 전달한 정보와 그 술집을 거듭 대조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남자는 스마트폰과 술집의 간판을 가늘게 뜬 눈으로 번갈아봤다.


"어디 보자…" 나도 남자처럼 스마트폰과 간판을 번갈아봤다." 니시아자부에 있는… 녹엽정. 맞지? 저거 한자, 녹엽정이라고 읽는 거지?"


"맞아."


남자의 긍정에 곧바로 몸이 전율했다. 설마 정말로 녹엽정이란 이름의 술집이 있을 줄은.


킬빌 1편 후반부의 전투는 녹엽정이란 술집에서 펼쳐진다.


"대박… 진짜 있었네. 촬영 장소가 된 그 술집은 따로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음… 정보를 보면, 바이오로이드 탄생 이후에 지어졌다는군. 그리고 내일 밤 7시에 영업부장이란 이름으로 예약돼있다… 라고 돼있네. 또 뭐냐, 영업부장이 컨택한 놈들은 요새 한창 주가를 달리는 놈들이라는군. 뒷세계에선 죽음의 99인회라고 불린단다. 인간이든 바이오로이드든 가리지 않고 팔아대고…… 어휴. 몰라. 네 스마트폰으로 읽어봐라."


다른 정보는 관심없다. 장소와 그 쥐새끼같은 놈의 소재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술집 내부 곳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 옆에 나란히 선 남자가 녹엽정이란 간판 아래에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알파, 라고 울린 나직한 목소리 직후에, 술집 자체가 빛난 것으로 착각될 만큼 강한 스파크가 퍼뜩였다. 


남자의 손에 전자동 미닫이 문이 힘없이 열린다.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cctv는 고개를 떨궜다.

스마트폰으로 기동하는 케스토스 히마스라니, 기술도 좋다.


"회로 재복구시켜야 하니까 빨리 보고 나가자."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볼 것도 없었다. 그곳은 간판만이 아니라 내부 구조까지 킬빌의 그곳과 완벽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10분도 안 되어 내가 먼저 녹엽정에서 나오고, 남자는 30분 더 지나서 나왔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한참 지나 있었다.


"아 참. 그 복장 말이야." 씻으려 들어가려던 남자가 샤워실 앞에서 몸을 돌렸다. "안 입어 봐도 되냐?"


나는 대답 않고 tv근처에 놓아둔 쇼핑백을 챙겨 침대로 갔다.

이미 입어봤다. 사이즈는 문제 없다.


피곤했다. 그래도 내일, 영업부장이 나타난다면 펼쳐질 상황이 너무나 기대돼서 잠이 오지 않았다. 녹엽정이란 간판도, 그 건물의 구조도, 남자가 구해온 복장도 킬빌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북받쳐오른다. 


죽음의 88인회가 아닌 것은 아쉽지만, 11명 차이다. 상관없다. 키도에게는 상대가 적은 편이 좋았을지 몰라도, 나는 많은 편이 좋다.


머릿속에서 킬빌의 한장면을 복습하는 중에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가운 차림에 덜 마른 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씻고 나온 듯했다. 그것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나는 펼쳐질 내일에 젖어있었다.


"그래서…" 내 쪽으로 침대에 걸터앉고서 남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어쩔래? 혼자 할래? 아니면 좀 도와줄까? 너 재밌자고 하는 거긴 해도, 꽤 위험할지도 몰라."


"괜찮아. 99인회라고 진짜 99명은 아닐 걸. 킬빌에서도 진짜 88명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참 기묘한 일치로군. 영화광 아르망 씨에게는 이보다 좋은 것도 없겠어."


잘 자, 남자가 말하고 침대 시트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이만 자기로 했다. 남자가 바로 옆 침대에서 자는 것은 조금 신경 쓰였지만,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해가 빨리 뜨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 바람에 응하듯 해는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을 흐르는 시간은 거의 느끼지 못했고, 오후에는 한 번 더 해에게 바랐다. 빨리 꺼져줘. 이번에도 해는 내 바람을 들어주었다. 없던 다리도 만들어서 달려가듯, 해는 빠르게 사라져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 * *




"아 참. 깜빡하고 전달하지 못했습니다만, 참고하실 만한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영업부장의 스마트폰에 설정된 벨소리는 '작별'입니다. 아시지요?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오후 6시부터 잠입한 녹엽정의 바에서 시간을 죽이는 와중에 알렉산드라의 연락이 있었다. 연락을 통해 또 하나의 일치를 발견한 나는, 또다른 일치가 있기를 기대했다.


킬빌에서도 스코틀랜드 민요인 작별이 나온다. 


총 두 번. 한 번은 교회에서, 한 번은 녹엽정의 화장실에서. 소피 파탈의 핸드폰 벨소리로, 키도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그 벨소리를 듣게 된다. 결혼식 리허설이 핏빛으로 물든 그날, 무자비한 폭력에 당하던 그날, 분명히 들려온 적의 벨소리. 


복수를 위한 시간이 지나, 그 벨소리를 녹엽정의 화장실에서도 듣게 된다. 


그 직후에는 어떻게 되느냐고? 킬 빌 같은 유명한 영화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테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화장실에서 키도와 마주한 소피 파탈은 구타 당하고, 녹엽정의 무대 앞에서 팔이 잘린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오렌 이시이!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대사는 다르지만, 한 시간 후의 나도 키도와 똑같은 곳에서 똑같이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화장실로 가서 남자가 준비한 이소룡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십 수년이 지나 다시 금발로 돌아왔기에 키도와 비슷한 길이로 머리를 잘랐다. 그렇게 딱 칼부림을 할 준비를 마친 타이밍에 작별이 들려왔다.


조심조심 좌변기석 문을 열었다. '영업부장'의 어감으로 남자라 생각했던 그 인간은, 여자였다. 생각해보니 남자였다면 내가 화장실에서 작별을 들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의외의 사실에 놀라기에 앞서 나는 기뻐했다.


작별을 벨소리로 설정한 너는 그야말로 소피 파탈이로구나, 하고.


생긴 것도 멀끔하고 깔끔한 차림인데, 뒤에서는 식인종들에게 고기를 공급한다 이거지?


누군가와 통화하던 영업부장의 뒤통수를 잡아서 머리를 세면대에 꽂았다. 다섯 번쯤 박으니 물기에 붉은색이 섞였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러고서 다시 두들겨 패고, 킬 빌의 그곳과 똑같은 무대 앞으로 끌고 나갔다.


"야 이 야쿠자 개새끼들아!"


목표만 생각한다면 영업부장을 잡았으니 그대로 녹엽정을 나가도 됐지만, 바이오로이드 고기로 큰 돈 만져보려는 새끼들을 못 본 척 할 수 없었다. 칼도 휘둘러보지 않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2층의 미닫이 문에서 공격적으로 뛰쳐나오는 놈들이 있었다. 따로 확인할 것도 없이 그놈들이 야쿠자였고, 그들 사이에서 나는 오렌 이시이를 찾았다. 소피 파탈도 있는데 오렌 이시이가 없으면 섭섭하잖은가. 


"있다…"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또다른 일치가 그곳에 있었다. 


그때, 귀에 건 인이어 무전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건 범죄 사양이야. 무조건 죽여."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 남자는 범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에겐 자비가 없다. 


어려운 주문도 아니니 접수했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금란을 똑바로 바라보며 영업부장의 팔을 깔끔하게 잘랐다.


비명이 공기를 찢고 피가 대기를 적신다. 일상의 냄새가 지워진다.


비명은 비명을 낳는다. 방금까지만 해도 춤을 추던 녹엽정의 고객들은 모두 동일한 톤의 비명을 지르며 출구로 도망친다. 바이오로이드 종업원들은 슬금슬금 물러나며 제각기 안 보이는 곳으로 몸을 피한다.


잡념을 덜어내 비워진 머릿속에는 킬 빌의 첫 번째 트랙인 낸시 시나트라의 bang bang이 재생된다.


영업부장에게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쏘아대던 금란의 입이 움직인 듯했다. 2층에서 노려보던 놈들 중 하나가 공중제비를 돌며 1층에 착지했다. 감히 내게 맞서려는 첫 번째 놈이다. 


작은 호수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 너머에서 짧은 시간 대치해오던 놈은, 이내 호기롭게 덤벼들었다.

기세는 좋았고, 기세만 좋았다.


핫토리 한조의 검이 복부를 뚫는다. 그대로 들어올려져 구름다리 옆의 사각형 호수에 내던져진다.


"찢어버려!"


금란의 외침에 일본의 오니와 같은 시늉을 내며 야쿠자들이 대열을 갖춘다. 우선 세 명. 계단으로 내려온다. 그나저나 이것들. 인간이면서 어째서 금란의 지시에 움직이는 걸까. 별로 관심없다. 구도가 킬 빌의 그것과 똑같으니 뭐가 어땠든 다 좋다.


세 명 또한 한조의 검에 쓰러졌다. 뒤따른 두명도.


머릿속 트랙은 Bang Bang에서 The grand duel로 바뀐다. 


여섯이 쓰러진 이 다음은… 다음은 그 녀석이 나와야 하는데.


"Hi~"


여자의 발랄한 목소리. 설마 싶으면서도 목소리가 들린 쪽에 시선을 돌렸다.


또 하나의 일치가 거기에 있었다.


교복 차림의 토모가 철퇴를 들고 계단을 내려온다.


이렇게까지 킬빌과 똑같을 수는 없어서 무심코 웃어버렸다. 거의 천 년을 살면서 이렇게 순수히 즐거운 적이 있었던가.


"좋아! 네가 고고 유바리야!"

"그게 누구야?"


토모는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만 의문을 가졌다. 예고도 없이 칼부림을 시작한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런 게 있어. 자, 부디 오래버텨 줘."

"너… 재밌다? 언니! 얘 내 맘대로 할게!?"


토모의 말에 금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는 철퇴와 냉혹한 포식자의 미소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 좀 붙어볼 만한 것이 왔다 싶어서, 나는 전투에만 가능한 예지를 펼친다. 내 앞에서도 제 자신이 포식자인 줄 아는 이년에게, 누가 진짜 포식자인지 알려주기로 한다.


"아르망. 그년도 금란이랑 똑같아. 무조건 죽여."


따로 말 안해도 알고 있다. 야쿠자랑 붙어먹는 년이니 당연히 똑같겠지.


이후, 고고 유바리와 똑같은 토모에게는 고전했다…… 라고 하면 거짓말. 즐기겠다고 일부러 당해준 것만 빼면, 키도와 다르게 나는 고고 유바리를 상대로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구태여 토모를 고고와 같은 최후를 맞게 하겠다고 조금 힘을 뺐을 뿐이다.


측두부에 못이 박힌 토모는 피눈물을 흘리며 죽었다. 


이제 이 다음, 바로 이번에야말로 클라이맥스다. 


"99인회. 온다." 무전기가 말했다. "알고 있지? 전부 봉쇄 할 거야. 절대 죽지 마."


"안 죽어. 내가 누군데. 그건 그렇고, 잠깐 들어와 봐."


내가 말하고 5초도 안 되어서 남자가 나타났다. 어디에 있나 궁금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봐선 처음부터 안에 있었던 것 같다. 팬텀처럼 은폐장이라도 썼겠지.


"쟤가 영업부장이야." 나는 검으로 영업부장을 가리켰다. "데려가."


"안 죽여?"

"왜 죽여. 아깝게. 나중에 쓸 거야."


남자는 알았다고 답하고서 영업부장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정직하게 출구로 나가려다가, 뒤돌고 금란에게 외쳤다.


"야 이 씨발년아! 설마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취급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아!? 너는 장고의 스티븐 같은 년이야! 마음 같아선 내가 죽이고 싶은데! 넌 우리 딸 거니까 참는다! 어!? 나 정도되는 인간이…… 아르망."


"왜?"


"네가 베아트릭스 키도면 나는 뭐지?"


당연히 핫토리 한조이지 않느냐고 나는 손에 든 참수검을 들어보였다. 복장은 킬빌의 우마 서먼 그 자체지만, 아쉽게도 무기는 그럴 듯한 일본도가 없어서, 그냥 티아멧의 참수검에 핫토리 한조의 검이란 설정을 붙여놨다.


"아니지. 핫토리 한조는 검만 만들어주잖아. 난 너를 가르친 아버지이자 스승이라고."


"그럼 빌로 해."


"빌은 키도한테 죽잖아!"


"어쩌라고 씨발아! 바쁘니까 빨리 나가!"


"역시 파이메이가 제일 어울리지. 좋아. 난 파이메이야. 야! 씨발년아! 나는 파이메이다! 알겠냐!? 곧 뒤지겠지만 기억해둬라!"


금란은 팔이 잘린 영업부장을 볼 때와 같은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영업부장을 들고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직후에 교대하듯이 성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99인회가 등장했다. 여기에서도 또 하나의 일치가 있었다. 대장격으로 보이는 놈이 유가휘와 닮았다. 나머지도 다 검은 가면을 쓰고 있다.


"미리 말할게." 기쁨을 억누르고 나를 포위한 99인회에게 선고한다. "여기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너희는 전부 내 것이 됐어. 알겠니? 어디 하나 바치지 않으면 절대로 못 나가. 아빠. 문 막아."


녹엽정의 곳곳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울린다. 내가 난리를 치면 99인회가 진입할 것이고, 그때 남자가 자신의 방패 아가씨들로 문을 막는다. 그러자고 맞춰두었다.


밖에서는 못 들어온다. 안에서도 못 나간다. 통신도 불가능하다. 내가 질 리도 없으니 이놈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다 죽는다.


사무라이처럼 자세를 잡고 주위를 살핀다. 정면은 검날 위로, 후면은 도신에 비친 피사체로 확인한다. 피를 보채듯 티아멧이 공기와의 공명음을 흘리며 서늘하게 떤다. 


뒤에서부터 덤벼왔다. 기합과 함께 내질러진 티아멧이 둘을 튕겨내고 앞에서 덤벼온 놈의 복부를 가로로 갈랐다. 영화와는 다르게 내장이 쏟아지며 발에 엉기고, 전혀 당황하지 않은 나는 림보하듯 허리만 젖혀 후방에서 노려오던 놈들 셋을 한 합에 정리했다. 


이후의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영화같지는 않았다. 유가휘를 닮은 놈과 합을 주고 받을 때 복부를 당해서, 여유가 사라져버렸다. 위기에 처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흥분이 극에 달해서 완급 조절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재미 좀 보려면 천천히 죽였어야 했는데. 복부의 상처 자체는 얕았어서, 다 끝났을 땐 왜 그리 흥분했나 싶었다.


칼이나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칼을 맞대고 눈을 뽑아보기도 하고, 단칼에 목을 쳐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칼을 그렇게 많이 써왔는데 참수해본 적은 없었다.


1층과 2층을 종횡무진 오가는 것도 재밌었지만, 가장 재밌었던 상황은 다시 한 번 포위 당했을 때였다. 어쩌다보니 쌍수에 검을 쥐고 있었고, 한시적으로 베아트릭스 키도가 된 나였기에,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는 움직임으로 바닥에 찰싹 붙어 회전을 시작했다. 


윈드밀을 돌 때마다 검을 쥔 손가락에 짜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은 회전을 거듭할수록 붉게 물들어갔다. 종종 살점과 내장 조각이 튀기도 했다. 나 자신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미러볼이 된 듯했다. 그 미러볼은 오직 붉은색 레이저만 쏴대서, 붉은색이 옅어질 것 같으면 숨겨둔 칼을 꺼내 회전시키는 살인기구였다. 


99인회는 내 손에 스러졌다. 진짜 99명인지는 킬 빌에서도 그랬듯 알 수 없었고, 아직 목숨을 잃은 이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잘린 팔이나 다리를 바라보며 신음하고 있다. 


2층의 난간에 서서 나는 베아트릭스 키도처럼 고한다.


"살아있는 놈들은 알아서 도망 가라. 하지만 잘려나간 것은 두고 가라. 이젠 내 거니까."


흥분이 다소 가셨어도 기분은 최고였다. 


이제 대단원이다. 죽음의 99인회도 고고 유바리도 작살났다. 남은 것은 오렌 이시이 뿐이다.


놈들이 자리잡고 있던 방을 지나 뒤뜰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허공도 바닥도 폭신한 눈에 잠긴 정원의 안쪽에 금란이 서 있다. 입고 있는 기모노 때문에 정원과 일체화 된 듯이 보인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결코 정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네 년의 무례함은 일단 덮어두겠다. 묻고 싶구나. 어째서 그리도 천박한 검기를 휘두르는 게냐."


금란과 여덟 걸음 떨어진 곳까지 가서 대답했다.


"재밌으니까 휘두르지. 내 마음에 안드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기로 했거든."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이 단지 재미를 위해서렸다?"


"주제도 몰라? 아니지. 너희랑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진지하게 임했으면 네가 거느린 토모나 99인회는 몇 십 분 더 빨리 죽었어."


"이번에는 그럴 수 없을 게다. 없는 수준까지 아득바득 긁어서 그 천박한 검에 실어야 할 테니 말이다."


검집에서 자태를 드러낸 금란의 일본도에 눈이 내려 앉는다. 


"그나저나 나도 묻고 싶은게 있는데, 왜 네가 기모노를 입고 있니? 그것도 모자라서 왜 일본도를 들고 있어? 그런 모습은 금란에 대한 모욕이잖아. 지금 당장 벗고 살려달라고 하면 한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은 줄 수 있는데."


"천부당 만부당. 금발답게 한마디 한마디가 덜떨어진 울림을 발하는구나."


금란이 눈을 떴다. 오르카에서도 본 적이 없어서 평범한 금란의 눈이 어떤 색인지는 모르지만, 내 눈 앞에 있는 이년은 연분홍색이었다. 어떤 종류의 광기를 발하는 그 눈은 달빛을 받아 재수없게 반짝였다.


"오너라."


오라니까 갔다. 

전투는 10초도 안 가 끝났다.

지금까지는 킬빌과 거의 똑같았는데, 마지막만 달랐다. 똑같은 건 오렌 이시이처럼 머리 뚜껑이 날아갔다는 것 밖에 없었다.


머릿속 트랙은 얼마 재생도 안 된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에서 The Lonely Shepherd로 바뀐다. 피가 튄 표면을 조용히 내리는 눈이 흰색으로 덧칠하고 있었다.


"끝났어. 데리러 와."


내 말에 남자는 정원 안쪽에서 나타났다. 


"정말 잘 싸우네. 멋있었어. 진짜 베아트릭스 키도 같았어."


나는 브이 사인을 보이고, 다른 의미 없이 웃고 싶어서 웃었다.


내가 녹엽정에 만들어둔 시체와 잘린 사지들은 훗날, 일본 뒷세계에 한 줄의 선을 긋게 됐다.


아무리 법 없이 산대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 그것은 식인 행위이며, 바이오로이드를 먹는 것도 식인이다. 


바이오로이드를 먹는 것을 두고 식인이라고 한대서 코웃음 치지 말라. 무시하지도 말라.


녹엽정에 분 피바람이 너에게도 불 테니.


내 이야기는 일본에서 대충 이런 식으로 전해지게 됐다는 것 같다. 거창한 것을 좋아하는 야쿠자들이라서 그런가. 당사자로서 듣자니 오글거렸다.






* * *





영업부장을 잡은 것도 좋고,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다루려는 야쿠자 일파를 작살낸 것도 좋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금란이 우두머리일 리가 없어. 분명 대가리가 따로 있을 거야."


아침에 호텔로 돌아와서 내가 말하자, 남자가 왠지 내 눈치를 봤다.


"아, 그거 말인데. 내가 한 놈은 죽였어."


"뭐?"


"죽음의 99인회를 이끌던 금란이 속한 일파의 우두머리. 세 놈이야."


"그 중에 한 놈은 네가 죽였다? 말도 없이?"


"화내지 마."


이미 화내고 있었다.


"씨발 내 건데 왜 네가 가져!"

"야! 네거내거가 어딨어!"


안 된다. 다 내 거다.

다 내 손으로 죽여야 된다.


나는 남자를 타박해 당장 그 놈들의 위치를 불게 했다. 놈들의 위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며 창 밖을 가리킨 남자는, 이 호텔에서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저격할 수 있는 위치다?"

"저격도 저격인데, 건물 통째로 전부 야쿠자야."


다시 말하자면 건물 째로 날려버려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남자를 끌고 호텔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문이 잠겨 있어서 남자에게 부수게 했다.


야쿠자들의 건물을 확인하고, 난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저격할 수 있는 화기가 없어서, 나는 말없이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부러 내 시선을 즐긴 건지, 아니면 뜻을 모른 건지, 10초쯤 바라 보고서야 아스널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대물저격총을 견착하자, 이걸 들고 공원을 뺑뺑 돈 적도 있었단걸 떠올렸다. 한창 체력단련 한다고 미친듯이 굴러서 괴로웠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물론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저기. 패밀리마트 옆에 있는 빌딩?"


1.5 키로미터 밖에 있는 건물을 스코프로 포착하고 내가 말했다.


"중앙공원에서 한 블록 뒤에 있는 패밀리마트 보고 있는 거지?"


"맞아. 8층에 대머리. 그리고 뚱보. 맞지?"


"응. 걔야. 저격할 줄은 알지? 다 가르쳐 줬으니까."


남자에게서 풍속을 듣고 곧바로 쐈다. 뚱보의 대가리가 목 째로 터졌다. 바로 대머리를 노리려는데, 당황하지도 않고 도망가서 놓쳐버렸다.


"한 놈 놓쳤어." 


스코프에서 눈을 뗐다. 그 순간 겨누던 건물이 통째로 무너졌다.


"통째로 날려도 된다니까."


저격총이라기엔 너무 우악스러운 것을 어깨에 걸치고 남자는 미소지었다. 무고한 인간들이 말려들었으면 어쩌느냐고 물으려 했다가, 어제의 가부키초가 생각 나서 관뒀다.


"걱정 마. 대머리랑 야쿠자 빼고 아무도 안 죽었어."


"그걸 어떻게 알아?"


"난 다 알아. 휴~ 우르를 쓰는 것도 오랜만이야."


"우르?"


저격총인 게 분명한 것을 가리키고 내가 물었다.


"우르 몰라? 플라즈마 라이플."


"몰라. 그게 뭔데."


"왜 우르를 몰라? 티아멧이랑 비슷한… 아, 니네 오르카는 장화 만나고 가라앉는댔지."


남자에게 아스널을 휘두르고 던졌다. 더는 갈 수도, 갈 생각도 없는 오르카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알겠다는 듯, 남자는 귀가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업부장을 들고 정직하게 비행기로 돌아갈 순 없었기에 밀항선을 이용했다. 돈만 주면 뭐든 용인되는 세상이라, 한 인간을 납치 중이라는 걸 대놓고 말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영업부장을 고문해 다른 유통업자들의 소재를 알아냈다. 가능하면 놈들의 우수고객에 대해서도 알아내고 싶어서 아주 세심하게 정성들여 고문했다.


그리하여 다음 타겟은, 내가 사는 나라에 있는 식인종 새끼들 전부가 됐다.


바이오로이드 고기와 관련된 문제는 질려서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었기에, 남은 유통업자는 우리 연꽃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리리스는 현장의 지휘를, 알렉산드라에겐 총책을 맡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관리한 녀석들이니, 잘 해내리라 믿었다.


나와 남자는 우수고객들을 타겟으로 삼고 움직였다. 다음으로 갈 곳은, 수도권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이었다.


상류층 중에서도 비밀스러운 놈들만이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즐긴다. 그런 놈들 앞에 평범한 차림으로 가면 섞이긴커녕 말도 못 붙일 것은 자명했으니, 재단의 소유자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외형으로 꾸미고 접근해야 했다. 


"꼭 사교계에 갓 데뷔하는 소녀를 보는 것 같군." 


교양 넘치는 자리를 방문하게 되어서인지, 묘하게 재수없어진 말투로 남자가 말했다. 


"좆같은 눈 치우고 준비나 하고 와."


곧 출발인데, 이 남자는 츄리닝에 나시라는 동네 아저씨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금방 해. 너나 잘 꾸며."


가치를 감정하듯이 나를 위아래로 훑고 남자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과연 얼마나 잘 꾸미고 나올지 두고 보자고 생각했다.


한 시간 뒤, 남자가 테라스에 나타났다. 그냥 평범한 수트 차림이었다.


"씨발새끼가 꼴랑 한 시간 준비해놓고 뭐? 너나 잘 꾸며?"


남자가 펄쩍 뛰어올랐다.


"야! 이게 얼마나 차려 입은 건데!"


"지랄한다! 차려입긴 뭘 차려 입어! 머리도 씨발 그냥 무스랑 왁스 범벅 올백이잖아!"


어이없다는 얼굴의 입이 막상 뭐라 말할지 모르겠다는 듯 붕어마냥 뻐끔거렸다.

남자 뒤에서 나타난 알렉산드라가 끼어들었다.


"아가씨. 그냥 수트 차림이 아닙니다. 주인님의 말씀대로 이 차림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뭐 이 씨발년아?"


"미친 년아! 우리 알렉사한테 욕하지 마!"


알렉산드라가 쓴웃음 짓고 설명했다.


"점잖은 베이지 색상의 스트레이트한 팬츠와 적당한 기장감의 녹황색 타탄체크 패턴이 들어간 벨벳 수트. 언뜻 보시면 포멀하여 단정해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목하셔야 할 것은 알맹이인 타이입니다. 펜슬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회백색 셔츠에 올리브 브라운의 페이즐리 타이. 윈저노트로 매듭하셨군요.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악취미라고 평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역시… 보는 눈이 있어."


"니들끼리 뭔 소리를 하는거야?"


"아가씨. 포멀의 기본은 통일과 균형입니다. 헌데 이 타이를 보세요. 타이 하나가 주인님의 모든 부분을 언발란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밝은 톤의 샴페인 골드, 혹은 수트와 완전히 대비되는 색상을 고르셨다면 높은 점수를 드렸을 겁니다. 셔츠의 색상도 바꾸셨다면 만점입니다만, 주인님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배치를 하신 것이니 어쩔 수 없지요. 무엇보다도 최악인 것은 페이즐리 패턴을 구성하는 색상입니다. 보색 한 쌍이 뒤섞인게, 마치 페이즐리가 아니라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같지 않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타이를 만드는 곳도 있느냐고 여쭙고 싶어요. 차라리 무지 타이를 고르시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구요."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사교계에서 언발런스는 터부시 됩니다. 즉, 주인님은 타이 하나만으로 모든 것에 거부 의사를 나타내고 계시다는 거죠. '나는 너희와 섞일 마음이 전혀 없다.' 지금부터 두 분이 향하시는 곳에서, 주인님은 타이로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다. 이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주인님의 매력에 알아서 먼저 접근하든 당겨지든, 어쨌거나 주인님과 붙어있게 된다면 허울뿐인 교양을 걸치고 있을 뿐이라고 자백하는 꼴이 되겠죠. 그리고, 주인님은 그런 인간들에겐 관심 없으실 겁니다. 알고서 접근 않는 인간들이 목적이시죠. 그렇지 않으신가요?"


"이야. 이거 놀라운데."


"그렇다 해도 주인님께 접근하지 않기는 어려울 겁니다. 타이에 담긴 의미는 아주 교묘하게 감춰졌으니까요. 행거치프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커프스링. 갖출 것은 다 갖춰서 타이에 비꼬는 의미를 담아놨다는 걸 감추고 계세요. 거기에 더해 바로 이것까지. 교양 좀 갖춰서 꺼드럭대고 싶어하는 인간이라면, 절대 주인님을 외면할 수 없겠죠."


알렉산드라가 남자에게 바이올린 모양의 목재 케이스를 건넸다. 케이스 모양이 그러니 안에 담겨있는 것은 바이올린일 것이다. 


"우리 알렉사가 내 타겟이었다면 큰일 치렀겠네."


"과찬이십니다."


평소에도 지들끼리 교양 넘치는 대화를 하니까 나는 그러려니 했다. 


"아니. 정말로. 어디에 있는 누구랑은 달라. 하여간 나이를 뒷구녕으로 먹었는지."


"……야. 알렉산드라. 그러면 나는?"


알렉산드라는 조심스럽게 나를 훑고 어색하게 웃었다.


"…갓 사교계에 데뷔하는 어린 소녀에게 코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린 미모가 모든 것을 용인하니까요. 왜, 얼굴이 곧 패션이라는 말도 있고요."


"으하하하하하!"


"교양 없어서 미안하다! 개 씨팔놈들아!"


먼저 시골 마을에 주차된 차로 가기로 했다. 여기에 더 있으면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 * *





씨발 새끼들. 내 코디가 어떻다는 거지. 상류층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최대한 힘을 줬다. 그러면서도 단정함을 추구했다. 클래식한 크림색 블라우스. 보커시베이지 플리츠 롱스커트. 울 소재의 화이트 하프 가디건. 너무 방어적인 차림일까 앵클렛으로 포인트를 줬다. 이 정도면 최소한 무난하다 소리는 듣겠다 생각했는데, 뭐? 어린 소녀에게 코디는 중요하지 않아?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날렸다. 또 생각해봐야 기분만 나빠진다. 목적을 생각하자. 진짜 상류 사교계에 데뷔하자고 이런 곳에 온 게 아니다. 죽일 놈들을 찾으러 왔지.


영업부장에게서 얻은 정보를 떠올린다.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 공연을 감상한 뒤에 근처의 호텔에서 만찬이 열린다. 연회장과 중앙 홀을 모두 쓰는 거대한 모임으로, 그곳에 식인종 중의 식인종 새끼들이 모여든다. 즉, 오페라가 끝나고 난 다음에 식인종들을 가려낼 수 있다.


"뭐하고 있어. 빨리 와."


입장권을 배부 받고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는 길이었다. 주차하고 현장에 들어설 때까지 시종 나를 놀리던 남자는, 어째서인지 공연장 홀 곳곳에 걸린 현수막을 아찔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뭘 그리 멍청하게 봐? 카르멘이잖아."


남자가 몇 초 늦게 대답했다.


"어… 아니야. 가자."


남자는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를 머금고 내 손을 잡았다.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곳에선 여전히 부녀관계인 척하고 있다.


표에 적힌 좌석을 찾아서 앉고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공연이 끝난 다음의 연회 일정을 알아봤다. 그러는 사이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맞다. 카르멘이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우리 칸이 나를 조사하겠답시고 멸망 전의 공연 자료를 열람했던 적이 있어. 5번째 오르카였었나? 참 나. 그년이 뭐랬는 줄 알아? 나보다 패널 너머에 있는 아르망이 더 아르망 같…"


입이 심심해서 꺼낸 내 이야기를, 남자는 듣고 있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괜찮아?"


몸 어딘가가 급작스럽게 잘못된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남자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나는 알 수 있었기에, 남자를 데리고 공연장을 빠져 나왔다. 


곧바로 남자를 화장실로 가게 했다. 안색으로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남자는 한참이나 지나서 입가가 젖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타이와 셔츠의 깃도 조금 젖어 있었다.


"공황이라도 왔었나 보지?"


센 척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남자는 깔끔하게 끄덕였다.


"카르멘은 별로라서 말이야."

"아르망 추기경?"

"…어떻게 알았냐?"

"눈치 못 채는게 이상한 거지. 다른 차원?"

"그래. 다른 차원.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어."


거기서 더 묻지 말라는 듯 입을 꾹 다문 남자는 나를 지나쳐 로비로 나갔다. 내가 뒤따르자 로비를 따라 걸려있는 현수막을 쭉 돌아보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정말 많은 아르망을 만났거든. 카르멘의 주연을 맡은 아르망도 있었고, 기상 캐스터, 쇼 프로의 mc, tv드라마 배우, 뮤지컬 배우, 그리고…… 사창가의 에이스, 마약중독자, 버림받은 아이, 공공재. 다양했어."


"……도망갔다고 했었나?"


"그랬지. 길게는 묻지 마."


한심하지 않느냐고 남자는 너스레 떨듯 웃었지만, 그 웃음은 한없이 공허했다.


"왜 도망갔는지 알 것도 같네."


"따지고 보면 자초한 거야. 말했잖아. 집 나가면 개고생일 거 알고 있었다고. 멸망 전 세계가 어떤지도 알고 있었어."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아르망 추기경을 찾는다고 해도 굳이 다른 차원을 갈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었어? 멸망 전일 필요도 없는 거 아니야? 당신은 시간여행도 할 수 있잖아. 그러면 그냥 당신 와이프한테 가면 되는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했던 거야?"


"즉, 내 와이프가 죽기 전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거지?"


"맞아."


"그런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 그래." 남자가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생각은 해도 행동은 엄두도 못 내."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겠지. 그것도 시간 여행자의 고민이라면 들어봤자 이해도 안 될 것이다.


"그럼 됐어. 앞으로 성질 긁지나 마."


"내가 언제 성질을 긁었다고."


"집에서 어땠는지 그새 까먹었냐!? 씨발놈이 내가 필요하다는 새끼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도 못 해!? 네가 찾던 아르망이 나라며! 그럼 똑바로 해야겠다는 생각 안 해!?"


"알았다. 안 그럴게."


말은 잘했다. 앞으로 또 언제 실수할지 벼르기로 하고 만찬이 열릴 호텔에 미리 가 있기로 했다.






* * *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고부터 연꽃의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하루하루를 쉼없이 보냈다. 일주일 뒤에 열릴 만찬에 시간을 맞추려면 수백 명으로도 모자라서, 일머리가 좋은 개체들을 추가로 구매하기까지 했다. 


예술의 전당을 찾았던 그날, 호텔에서 식인종 새끼들을 가려내는 것은 쉬웠다. 아니, 가려낼 것도 없었다. 남자에게 몰려든 것들 전부가 식인종이었으니까. 나는 남자의 옆에서 기특한 딸을 연기하며 유령 저택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제작한 초대장을 돌리기만 하면 됐다. 그래도 마냥 수월하진 않았는데, 큰 문제는 없었고 단지 내 인내심이 문제였다.


유난히 들러붙던 노인네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늙은이 냄새가 밸까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해주시죠. 외동이라서 버르장머리가 없습니다."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미처 못 봤다는 듯 내게 싱긋 웃어보였다. 역겨운 새끼들. 버릇은 있다. 이런 새끼들한테 보일 버릇이 없다 뿐이지.


알록달록한 핑거푸드로 가득한 테이블과 샴페인 잔을 운반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스쳐지나가며 식인종을 끌어모으는 남자를 관찰했다. 그런 놈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요령있게 잘 하던 남자는, 은근슬쩍 자신을 견제하려 드는 놈들까지 끌어들이고자 바이올린을 꺼내게 됐다.


"제 뮤즈, 나이팅게일 소개하지요. 그녀는 알프스 출신으로, 크레모나의 장인들을 통해 완벽한 밤의 꾀꼬리로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민감한 아가씨일수록 낮과 밤에 내는 소리가 다르답니다. 제 뮤즈는, 특히나 밤에 아름다운 소리로 울지요."


"오호. 그래서 밤꾀꼬리군요."


"그렇습니다. 여러분과의 만남으로 아름다워진 이 밤, 허락하신다면 그녀와 제가 작은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신지요?"


"어머~ 부탁해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을 연주하겠습니다. 앞에 계신 숙녀분? 피아노를 전공하셨다고요?"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네. 맞아요." 


"저 쪽에 피아노가 있군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무리 지은 식인종들이 남자를 뒤따른다. 몇 분 지나 저택 별채에서 심심하면 울려 퍼지던 멜로디가 들려왔다. 남자가 알렉산드라하고 놀 때 간혹 들을 수 있는 곡이었다.


멍청한 놈들. 저 새끼는 사실 세상 제일가는 또라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남자에게 접근하는 놈들은 허울 뿐인 교양을 둘렀을 거라더니, 알렉산드라의 말대로였다.


연주가 끝난 남자에게 가서 식인종들에게 웃음을 팔며 초대장을 돌렸다. 


저희 저택에서 곧 만찬을 가질 예정이랍니다. 여러분과 같은 신사 숙녀분들이어야 가치를 알 수 있는 미식이 오를 예정이오니, 부디 참석해주세요.


…이런 과정으로 엮어낸 식인종이 약 140명. 이런 놈들을 족칠 미래를 상정하고 만든 유령 저택이다. 초대에 응하여 저택에 발을 들이면, 절대로 나갈 수 없다. 죽어서도 못 나간다.


바쁜 시간이 흘러 미식 만찬회 당일. 유령 저택에 손님들이 모여든다. 시골 마을의 어귀에서부터 연꽃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에스코트 받은 손님들은, 유령 저택의 품위있는 자태에 넋을 잃었다. 그들이 멍하니 저택을 감상하는 사이에 발렛을 맡긴 차는 모조리 작살났고, 대동한 바이오로이드는 유령 저택의 일손을 거들게 됐다.


저택의 중앙 홀에서는 연꽃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까미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연주하고 있다. 기나 긴 교육의 결과물이다. 손님들은 배정된 방에서 대기하며, 소완을 중심으로 한 주방팀이 만들어낼 미식을 기다린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리리스와 소완, 알렉산드라에게 맡긴다. 나와 남자가 맡을 놈들은 따로 있다.


위험한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맛을 들인 놈들이 있다. 그놈들은 특별히 남자가 별채에서 대접하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 간다.


휑랭하던 별채는 오늘 한정으로 화려하다. 만찬장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절제된 바로크 양식을 바탕으로 온갖 명화와 조명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예전에 남자와 프랑스에 갔을 때 본 것이 대부분이다. 복도 끝에는 거대한 순록의 뿔이 걸려 있어 유일하게 이질적인 빛을 발한다. 아마도 예술의 전당을 찾을 때 걸친 타이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비꼬는 의미를 담은.


만찬장이 가까워질수록 느긋한 웃음소리가 선명해진다. 저택이 훌륭하다, 복도부터 남달랐다, 이런 시골에 어떻게 저택을 세울 생각을 했는가…… 부탁하지도 않은 유령 저택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야 마음에 쏙 들 수 밖에. 처음부터 너희같은 것들을 조질 걸 상정하고 지은 곳이거든. 비싸고 화려한 것엔 껌뻑 죽는 놈들이니까… 나도 모르게 중얼대고 있었다.


만찬장 앞에 섰다. 나는 지금 들어갈지 말지 한 차례 고민하고, 본채로 돌아가 옷을 갈아 입었다. 고매하고 지체 높으신 미식가 여러분을 맞이하려면, 예술의 전당 때와 같은 수수한 코디는 영 아니라고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만찬장 앞에 섰다.

처음엔 들리지 않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A5와규와 함께 대퇴살을 준비해 봤습니다. 올리브유에 구운 마늘과 그뤼상 꽃소금, 시즈오카에서 공수한 생와사비. 기호대로 즐겨주시면 됩니다만, 오리진 더스트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시고 싶으시다면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해산물을 선택하신 분들께는 뽈뽀를 준비해 봤습니다. 두 다리 생물의 간을 집어넣어서 뽈뽀라고 하기엔 애매합니다만, 감자와의 궁합이 훌륭하니 분명 마음에 드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숙녀분들을 위한 산구이나초 돌체입니다. 돼지 피 대신 이터니티의 피를 듬뿍 넣었습니다. 그릇은 발렌시아산 오렌지이며, 곁들여진 블랙베리와 까치밥나무 열매는 프랑스의 코스 뒤 케르시에서 공수했습니다. 돌체에 담겨있는 스위트는 파네토네를 조각내 튀긴 것으로, 초콜릿이 묻은 그대로 즐겨주시면 됩니다."


진심으로 즐거운 건지, 연기가 뛰어난 건지 헷갈릴 정도로 들뜬 목소리였다.


느긋하지만 주위에 흘기는 듯한 재수없는 웃음 소리와 식기가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린다. 

좆같은 입이 그려진다.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삼키려고 벌어지는 입. 입술 사이로 늘어진 군침. 비상식적으로 뒤틀린 혀. 


나는 만찬에 참석하지 않는다. 단지 처먹을 만큼 처먹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달그락대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걸로 보아 잘들 처먹고 있는 듯하다. 역시 별 거 아닌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좋아하면서, 처먹고 있는게 바이오로이드 고기가 아닌 것도 알아채지 못한 형편없는 미각의 소유자들. 


시간은 20분쯤 흘렀고, 달그락대는 소리가 약해졌다. 슬슬 포만감이 주는 아늑함을 즐길 타이밍이시겠지. 나는 가발과 복장을 재차 점검하고, 만찬장을 박차고 들어갔다.


"우리 딸. 왔구나."


내가 들어가자마자 눈길도 안 주고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문 밖에서 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듯했다.


"소개하지요. 제 하나 뿐인 아름다운 딸입니다. 딸? 손님들께 인사드리렴."


인사해준다. 

총으로.


12명 쯤인가. 기다란 테이블에 늘어 앉은 놈들을 빠르게 스캔하고, 상석에 있는 남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놈을 쐈다.


은재 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놈에게 일제히 시선이 쏠린다. 내가 한 발 움직여 소리를 내자 다시 내게 시선이 쏠린다.


비명을 지르는 놈은 없다. 다들 내가 막 들어왔을 때의 얼굴 그대로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내 저급한 차림이, 총성과 살인에 대한 놈들의 당혹감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손님 여러분." 겨누던 리리스를 내렸다. "혹시 시드 비셔스의 연인인 낸시라고 아시나요?"


"뭐… 무슨…"


웅얼거리는 놈을 쐈다.


"모르시니까 그렇게 당황하시는 거죠? 그냥 저급하고 측은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다 간 여자라고만 알아두세요. 지금 제 복장은 그녀를 참고한 펑키 스타일이랍니다. 여러분들은 끔찍해서 자지러지는 아주 저급한 차림이요."


"오. 웬 가발을 썼나 했더니."


남자가 킥킥 웃고 부러 의자를 끌면서 일어섰다.


"저는 좀 느긋하게 가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희 딸이 더는 참을 수 없는 것 같군요. 그러니 할 말만 빠르게 하도록 하죠. 여러분. 여러분이 드신 것은 바이오로이드가 아닙니다."


그제서야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바이오로이드를 먹은 게 아니란 사실에 비명을 지르는 건지, 방금 뒤진 두 놈 때문에 지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테이블에 오른 것은, 여러분께 고기를 대던 분들입니다. 혹시 영업부장이라는 분을 알고 계시는 분, 있으십니까?"


대답으로 돌아오는 것은 비명 뿐이다. 다들 의자에서 일어나 벽으로 붙었다. 그런다고 총에 안 맞는 것도 아닌데.


"없으시군요. 알겠습니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음… 초대 드린 입장에서 드리기엔 뭐한 말씀입니다만, 받으신 게 있으니… 이제 상응하는 것을 주셔야겠습니다."


"뭐야… 뭘 달라는 건데! 당신들 이게 다 뭐하는 짓이야!"


"부디 죽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제정신을 차렸는지 한 놈이 지랄하기 시작했다.


"당신들, 미쳤어! 당장 시티가드를 부를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 너희 사람 잘못 건든 거야.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갈…"


지랄하는 놈을 쐈다.


"아아, 여러분. 시티가드는 이곳에 올 수 없습니다." 남자는 방금 죽은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의의 불방망이는 돈에 좌우되거든요. 이런 쌩 시골에 작은 서는 커녕 지구대라도 있을 것 같습니까? 이곳에서 반경 10km이내에는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유령 저택인 겁니다."


"그래서 유령 저택인 거 아니야."


"응? 그랬어?"


내 말에 남자가 뒷목을 긁적였다.


"뭐, 하여튼, 여러분이 죽기 싫다 하셔도 죽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저기 험악한 얼굴을 한, 제 딸한테요. 그러면 재미들 보십시오. 저는 이만."


"기다려!"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이 외쳤다. "당신들… 이럴 목적으로 우릴 초대한 거였어!? 처음부터 죽이려고!?"


"그렇습니다만?"


"미친놈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무슨 잘못이라뇨. 알고 계시잖습니까. 잘 알고 있으니,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먹는게 떳떳하지 못하단 걸 알고 있으니, 이 유령 저택으로 오신 게 아닙니까. 은밀하고 고급스러운 취향을 즐기겠다고 감언에 넘어오신 거잖습니까. …이, 식인종 새끼들아."


"…좋아. 당신 말이 맞다고 쳐. 그래도 살인을 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쏴죽여! 당신 딸은 미쳤어! 그 딸에 그 애비일 테니 당신도 정상은 아니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진짜 인간을 우리한테… 식인을…"


"같은 인간이라야 살인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라야 식인이라 할 수 있는 거고요. 여러분은 방금 죽은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방금 드신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나요? 전 그렇지 않습니다만."


"와, 완전히… 미쳤어…"


"맞습니다. 미쳤습니다. 그러니 죽어주세요. 제 딸을 위해서 죽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제 딸은 심각한 망상증 환자거든요. 제 딸은 오늘을 위해 아주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바로 망상 가득한 이야기의 한 페이지에 여러분을 집어 넣겠다고요. 그런 제 딸의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여러분은 기꺼이 망상의 재료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웃기지 마! 우리가 그런 걸 먹었을지언정 당신들하고는 이제 두 번째 보는 사이잖아! 당신들한테 뭘 잘못 했냔 말이야!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남자는 굳은 시선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속죄, 그리고 사랑입니다."


"…뭐라고?"


"……아버지로서의 사랑입니다. 딸이 그러고 싶다는데 거절할 아버지가 어디에 있나요. 아무리 못된 짓이라 해도 어떻게 거절하겠냔 말입니다. 아뇨. 정정하겠습니다. 사랑 앞에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만일 사랑하는 상대가 악하다한들, 윤리를 들먹이며 말리기보다 동조하는 쪽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정말로 사랑한다면 살인 쯤이야 우습게 해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면, 이렇게요."


남자가 애니를 꺼내고, 여태 대화 상대로 삼던 여자를 쐈다. 좌측 흉부가 통째로 날아갔다.


한층 커진 비명에 아랑곳 않고 남자가 계속 말했다.


"애초에 미쳤다느니, 어떻게 이러느냐느니, 번짓수를 잘못 잡으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같은 윤리관이나 통념을 공유하지 않거든요. 저와 제 딸은 다른 시간대 출신이라서 말입니다. 아무리 들먹이셔도 소용 없어요."


그러고는,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할 말은 끝났으니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듯했다.


"그러면," 나는 이러는 이유만 말해주기로 한다. "여러분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하복부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감각이 머리까지 전해졌다. 부글부글 끓는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고 폐가 공기를 갈구한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일 가까이에 있던 놈을 쐈다. 


"그 사람을 만나려면 150년이라는 너무나도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괜찮았어요. 저는 사실 바이오로이드라서요. 인간에겐 두 번 살 수 있는 시간일지 몰라도, 바이오로이드의 신체에는 고작 15년 크기의 부하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계산했거든요. 고양이 셈법이라고 아시나요? 인간에겐 1년이 고양이에겐 10년… 인간에겐 10년이 바이오로이드에겐 1년… 어쨌든, 시간 자체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 시간 속에 있던 것들이 문제였죠. 바로… 너희 같은 놈들."


마지막에 쏜 놈 옆에 있던 놈을 쐈다.


"조용히 기다리겠다는데, 얌전히 시간 죽이겠다는데, 왜 날 가만 내버려두지 않은 거야. 왜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쫓고, 못 살게 굴었느냐고. 알아? 너희만 아니었으면, 좀 살 만한 구석이 있었으면, 내가 우리 폐하한테 그런 짓을 할 일도 없었어. 오르카를 침몰하느니만 못한 곳으로 만들 일은 없었다고. 이, 좆같은 새끼들아. 바이오로이드 고기가 그렇게 맛있냐? 공공재를 강간하고, 통제구역에서 산 채로 찢어버리고, 경기장에 가둬놓고 싸움 붙이는게 그렇게 재밌어? 너희 눈에 바이오로이드는 정말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너희처럼 말하고 생각하는데 생명체로 안 보여?"


대답이 없다.


"말해."


"그게, 아가씨…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말씨가 고운 노인네였다.

쐈다.


"아무도 대답 못하네? 도구로 밖에 안 보인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나? 아니지, 도구도 그렇게는 안 다뤄."


"살려주세요…"


이 자리에서 제일 젊어보이는 여자였다. 미성년자인지 의심스럽다.


리리스를 거두고 문을 열었다. 


"좋아. 시간 줄게. 최대한 도망쳐봐."


혹시 또 쏠까 내 손에 들린 리리스를 경계하며 주춤대던 놈들은, 내가 피스톨을 감추자 부리나케 만찬장에서 뛰쳐나갔다.


얼굴에 튄 피를 얼룩진 냅킨으로 닦았다.

남자를 봤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관심 없어. 알고 싶지도 않아. 어차피 나는 얼마 안 가 죽을 거고,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걸 하고 있을 뿐이야. 당신은 그걸 거드는 거고. 그런 약속이었잖아."


남자는 팔을 축 늘어뜨리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이 찾던 아르망 추기경이라 해도, 나는 아르망 추기경이 아니야. 이런, 이런 아르망 추기경이 도대체 어디에 있어."


"저기…"


"시끄러워. 가서 방송이나 해. 지금부터 다들 시작하라고. 유령 저택의 진짜 파티는 이제부터야."


만찬장에서 나와 걸음걸이를 빨리했다. 정원으로 나오자 별채의 스피커에서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본채에서는 이미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유령 저택에서 만찬을 즐기던 손님들이 정원으로 튀어 나온다. 피범벅이 된 손님이 보이고, 팔이 잘린 손님도 보인다. 숲과 이어진 저택의 출구를 향하는 몸짓에서 교양과 품위가 떨어져 나간다. 


멍하니 그런 광경을 감상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건드렸다. 알렉산드라였다.


"삶의 미련을 버려달라 정중히 부탁드렸는데…" 알렉산드라가 저택 출구를 먼 곳을 보듯 하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 모양이군요. 추하게도요."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손님들의 차량은 모두 고물이 되었고, 대동한 바이오로이드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 모두 처분했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세요."


"쟤들 다 고기 먹었지?"


"네. 빠짐없이 먹었습니다. 방금 드신 건 유통업자들이라고 하니 꽤 볼만 했습니다."


"그러면 됐어. 이제 알아서 움직여. 잘 할 수 있지?"


"이날을 위한 교육이었는걸요. 눈 감고도 쫓을 수 있습니다."


"그래. 시골 마을 안 상하게 조심하고."


"아가씨는 어쩌실 건가요?"


"알아서 할 거야. 너희도 즐기렴. 바이오로이드에게 인간 사냥 할 기회는 좀처럼 없잖니."


"알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본채로 돌아가는 알렉산드라가 정원으로 뛰쳐나온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지시한다. 지시를 받은 녀석들은 재빠르게 알렉산드라를 뒤따라 사냥에 필요한 수칙과 장비를 정비한다.


어디, 가능한 멀리 도망쳐봐라. 이 유령 저택의 반경 10km이내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홀로 움직인다. 숲으로 들어선다. 테레민의 멜로디같은 으스스한 겨울 바람 소리가 스친다. 시드 비셔스의 연인 같은 모습을 한 미친 년이 한 밤의 도망자들을 뒤쫓는다.


어둠을 좋아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어둠은 모든 것들의 환상을 공평하게 깨부순다. 빛을 내려주는 태양에겐 개인적인 호오를 꺼낼 여지와 여유가 있을지 몰라도, 어둠 앞에서는 다들 그럭저럭 단념할 수 밖에 없다. 


인간 사냥은 해가 뜨고 다시 져서야 끝났다. 거의 근교까지 도망간 것이 있었던 반면, 저택으로 돌아와 목숨을 애원한 것도 있었다. 썩은 나무 밑둥에 숨어들거나, 진흙을 몸에 처바르고 진흙밭에 누워 위장을 꾀한 것들도 있었다. 살겠다고 별짓을 다했다.


별채에서 죽은 것들을 포함해 총 140명 중에서 120명을 죽였다. 남은 20명은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라 총으로 곱게 죽여주기는 너무 아까웠다. 이 20명은, 천천히, 정말 천천히 죽이고 싶어서 따로 관리에 들어갔다.


사냥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두통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창 오르카로 가겠다고 버티던 때의 두통이 아니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아, 나는 최대한 갈 데까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2094년. 가을.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제까지 인간들을 사냥하면서 적게 잡아도 백 번 정도 같은 질문을 들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는 아무 잘못 없어… 


도대체 어떻게 그 따위 소리를 할 수 있는 걸까? 살려달라는 외침을 들어봤을 텐데, 자기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이 없는 걸까? 지능이 떨어져서일까? 단순히 인지능력이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애초에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애초에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통제 구역이란 구역질 나는 곳에 모여드는 것이다.


"안돼안돼안돼안돼!"

"돼돼돼돼! 씨발 닥쳐!"


손가락 하나만 자르겠다니까 아주 지랄 발광을 한다. 

벌로 팔목을 잘라버렸다. 이놈이 마지막이었다.


바이오로이드 고기 관련 문제를 일단락시키고 6년. 이 6년간 나는 꼭꼭 숨어있는 식인종과 유통업자를 끈질기게 찾아내 모두 작살내고, 타겟을 통제구역으로 바꿨다. 이번에 찾은 통제구역은 세 번째. 살아남은 놈은 없다.


통제구역을 나오자 테마파크의 따스한 일면이 나타났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따끔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버렸다. 빛에 적응할 때까지 대관람차 아래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나왔던 통제구역으로 바이오로이드 한 무리가 서둘러 달려가고 있다. 이미 늦었다고 속으로 놀리고, 나는 남자의 무릎을 베개 삼았다.


"가끔은 말이야."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인 남자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무서울 때가 있어."


"당연히 무서워해야지. 더 죽일 거야."


"죽이는 것 자체가 무섭단게 아니고, 방식이 무섭단 거야."


나는 지난 통제구역들을 떠올리고 말했다.


"인간님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 다 인간님들 보고 배운 거라고. 나 같이 가련한 소녀가 잔혹해봤자 거기서 거기야."


"농담치곤 재미없네."


재밌으라고 한 농담 아니다. 거기서 거기? 당연히 거짓말이다. 위험한 경계까지 상상력이 뻗쳐있는 것들은 인간 외에도 있다. 바로 나다.


그렇다고 해도, 식인종들과 달리 통제구역의 이용객을 족치는 것에는 심리적 난이도가 존재했다. 식인종들은 제 자신이 잘못 됐다는 걸 인정하진 않아도 인식은 하고 있는데 반해, 통제구역은 그런 게 없다. 바이오로이드로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니까. 그저 어뮤즈먼트 시설의 목적에 맞게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잔혹하다 생각하는 것은 바이오로이드들 뿐이다. 


이해는 한다. 그러려고 만든 바이오로이드니까 좀 즐길 수 있지. 바이오로이드를 구워 삶든 산 채로 곤죽을 만들든, 나는 상관 없었다. 나한테만 손대지 않았다면. 


조금, 주인님이었던 그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한때는 나의 주인님이셨다 해도, 나를 통제구역에 넣었던 그때를 잊을 수 없다. 살인 인형들과 박살나던 샬럿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통제구역을 박살 내겠다고 난리를 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심리적 난이도는 첫 번째로 찾아간 통제구역에서 싸그리 무너졌다. 그냥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해도, 도가 너무 지나쳤다. 항문에 넣어선 안 되는 걸 넣는 그 광경을 보고, 아주 오랜만에 이성을 놓아버렸다. 나는 그 놈들을 똑같이 죽여주자고 생각했다.


납치해서, 저택으로 끌고 가 지하에 처박았다. 그리고 통제구역의 바이오로이드들과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었다. 


총 네 명, 엎드린 자세로 공중에 매달리게 해서, 원통형 플라스틱 관을 깊게 항문에 꽂는다. 첫 번째 놈에겐 팔팔 끓인 알코올, 두 번째 놈에겐 메틸 수은, 세 번째 놈에겐 플라스틱 관 대신 불 붙인 양초, 네 번째 놈에겐 심플하게 끓인 물을 넣었다. 싫다고 저항하면 두들겨 팼다. 그런 짓을 했으면 당할 각오도 했어야지.


첫 번째 놈이 제일 먼저 죽고, 그 다음 네 번째, 세 번째, 두 번째 순으로 죽었다. 점막으로 흡수시켰기 때문에 두 번째가 금방 뒤질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은 중독이란 게 인간을 그리 빠르게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못했다. 


두 번째로 찾은 통제구역은 첫 번째만큼 끔찍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불쾌했다. 내가 찾아갔을 때만 진행된 테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면으로 바이오로이드의 정신을 홀랑 벗겨 버리고 강간하는, 그러고 나서 강간 당한 기억이 없는 바이오로이드를 보고 즐기는, 그런 곳이었다.


"흐응… 그래. 최면물인지 뭔지 하는 게 있었구나. 그런 걸 좋아해?" 두 번째 통제구역에서 납치해온 놈들에게 물었다. "알고 있니? 최면에 걸린다고 해도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아. 최면 상태는 어떤 신경도 억누르기는커녕 오히려 달궈내는, 각성 상태거든. 즉, 최면에서 깨도 너희한테 당한 개짓거리를 바이오로이드들은 다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이… 못생긴데다 냄새나고 역겨운 새끼들아."


"이러는 이유가 뭔가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또였다. 

이러는 이유가 뭔가요. 살려주세요. 

넌더리가 났다.


"복수야."


"예…?"


"니들은 기억에 없겠지만, 너희는 나한테 복수심을 심어줬거든."


"저는 당신을 처음 본다구요!"


"그러니까 기억에 없을 거라니까. 다른 150년이었으니까. 자, 그래서 있지. 너한테도 각성 상태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바이오로이드만 그런 화끈한 걸 즐기기는 아깝잖아? 내가 이런 건 또 잘하거든."


정원에서 길러내던 은방울꽃과 양귀비를 쓰게 된 때가 이 날이었다. 나중에 남자에게 들켜서 한소리 들었지만, 사용처를 말하니 넘어가주었다.


의식을 현재로 돌렸다.


"슬슬 저택을 날려버려야 할 것 같아." 남자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요전에 알렉산드라가 말하더라. 슬슬 수사망이 좁혀온다고. 하긴, 지금까진 사라져도 문제 안 되는 놈만 죽였으니까. 상류층 140명이 한 번에 사라졌는데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지."


"좀… 아깝네." 


"아까울 것 없어. 쓸 만큼 썼어."


"우리가 구해낸 바이오로이드는 어쩌지?"


아차 싶어서 몸이 튀어 올랐다. 곧이어 놀랄 이유가 없다 생각하고 차분히 말했다.


"버려야지."

"어, 어떻게 그래!"


내 말에 안절부절 못하던 남자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맞다! 그 친구한테 맡기면 되겠네!"


"당신 친구도 있어?"


"내가 넌 줄 알아!? 아니… 친구란 건 그런게 아니고…"


어쨌든 자신이 해결할 테니 절대 버릴 수 없다고 남자는 엄포를 놨다. 나는 딱히 상관 없었다.


저택 정리는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정리라고 해봤자 갈아입을 옷이나 현금을 챙기는게 다라서, 대부분의 시간은 테라스와 지하에서 보냈다.


저택을 떠나는 마지막 날, 지하를 둘러보기로 했다.


"아, 어서오세요. 아가씨."


사육장으로 쓰이는 지하 2층을 관리하던 포티아가 인사했다.


"애들 밥은 잘 먹니?"


"그럼요. 처음엔 꿀꿀이죽도 안 먹더니 요새는 주는대로 다 받아 먹어요."


코를 찌르는 악취를 참아가며 철봉과 철책으로 만들어진 20여개의 축사를 돌았다. 암컷 여덟, 수컷 열 둘이었는데, 최근 너무 접붙인 탓에 뒈져버린 암컷의 축사가 비었다.


비어있는 축사 옆의 수컷에게 말을 걸었다. 돼지로 길러내기엔 너무 잘생겨서 아까웠던, 그렇기에 더욱 정성 들여 길러낸 녀석이었다.


"오빠. 안녕?" 6년만에 처음으로 인간을 대하듯 했다. "밥 잘 먹고 대소변 잘 가리고 있지?"


돼지는 말이 없다. 


"나, 오늘 떠나. 오빠랑은 작별이야. 히히… 오빠. 6년간 재밌었지? 암컷들 실컷 따먹고 새끼도 숨풍숨풍 낳아서 생명으로서의 본질에 충실한 시간이었지? 응?"


돼지는 말이 없다.


"옛날 기억난다… 오빠도 기억 나? 나한테 살려달라고 빌었던 날, 내가 말했잖아. 오빠에게 가장 복합적인 공포를 선물해 주겠다고. 오빠는 그게 뭐냐고 했지?"


돼지는 기분이 나빠진 것처럼 신음했다.


"그래서 내가 수치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는구나. 사랑과 증오를 느낄 때 뇌의 동일한 부분이 관여한다고 했었지? 극과 극의 감정이어도 느끼는 부분은 동일하다고. 하나의 동전에서 양면을 맡고 있을 뿐이라고. 공포와 수치도 똑같아. 사랑과 증오처럼 극과 극이라기엔 애매해도, 동일한 부분이 반응해. 그래서 수치는 곧 공포라고 했어."


돼지가 분한 듯 울부짖는다.


"이상하지? 수치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유발할 순 있어도 벌벌 떨게 만드는 경우는 많이 없잖아. 오빠. 아니야. 수치야말로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최고의 공포이자, 명약이야. 오빠에겐 맹독이었겠지만 말이야. 수치는 인간을 좀먹어. 좀먹힌 부분은 회복이 불가능해지지. 자기 혐오를 유발하고, 분노와 저항감을 스스로 억누르게 만들고,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게 돼. 따지고 보면 수치를 당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 수치를 당해 마땅한 인간이라 자조하게 돼. 공포에 무기력해진 것과 완전 똑같아지는 거야. 그래서, 마지막은 결국 어떻게 되는지 알아?"


포티아가 들고 다니던 여물통을 빼앗아 돼지에게 씌웠다.


"너처럼 돼. 이 씨발 식인종 돼지 새끼야. 아 참. 네가 이제껏 낳은 새끼들은 전부 개들한테 먹이로 줬으니까 그렇게 알아둬. 어차피 곧 뒤지겠지만."


발작하기 시작한 돼지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3층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아가씨." 알렉산드라가 맞이했다. "통제구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하 3층은 나만의 통제구역이다. 통제구역을 이용하던 놈들을 이렇게 저렇게 꾸며줘서, 지금은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바이오로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인간인 주제에.


여기를 꾸밀 때는 두 번째 오르카 때 저질렀던 짓을 많이 참고했다. 오메가를 닮은 여자는 눈과 혀를 뽑고 꽃을 꽂아줬다. 그 전에 눈과 혀는 그냥 뽑기 아까워서, 재떨이로 썼다. 안구에 담배를 비벼 끄는 건 꽤 재밌었다.


포이를 닮은 여자는 머리 뚜껑을 따버리고 뇌에 침을 꽂아놨다. 전기자극을 주기 위한 장치를 설치하겠답시고 그렇게 해놓은 것인데, 전기를 흘려보낸다고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이거나 하진 않았다. 지성의 결핍이 이런데서 발을 잡을 줄은. 뇌과학 공부라도 좀 해둘 걸 그랬다. 이 여자는 지금 숨만 붙어있다.


남자는 위의 두 여자를 보고, 설마 이게 바로 오르카에서 저지른 그것이냐며 질색한 적이 있다. 나는 바이오로이드에게 그런 것도 아니니 약한 척하지 말라고 했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최면을 걸어대던 놈은 좀비가 됐다. 마약은 자신 있어서 양 조절은 분명 잘 했는데, 이 놈이 약했던 건지 헤로인으로 바꾼 시점부터 정신을 놓기 시작하더니, 한 달 정도 지나서 이 꼴이 됐다. 지금은 목에 연결된 호스로 영양분을 제공받으며 연명하고 있다.


나머지는, 평범하다. 괜히 자리만 차지한다고 생각될 정도다. 아, 한 놈은 술로 담궈버렸다. 인간 술 맛은… 영 마실 만한 건 못 됐다.


정원으로 나와 남자와 합류했다. 연꽃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남자 뒷편에서 도열하고 있었다. 무슨 군대도 아니고, 마지막 날이라지만 너무 힘이 들어갔다.


"이거야 사령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인데." 남자가 도열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지. 오르카에 있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어."


"이제 터뜨릴 거야. 빨리 해산시켜."


"급하긴. 그 쪽에 데려다 줄 때까진 같이 있어야 돼."


마지막으로 본채에서 나온 스틸 라인 개체들이 외친다.


"준비 다 끝났습니다! 단말만 조작하시면 됩니다!"


"그럼, 나 먼저 내려가 있는다?"


수백의 바이오로이드와 남자가 저택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택과 마주선다.

폭탄 단말기의 버튼을 누른다.


바라보는 기준으로 저택의 왼편이 먼저, 그리고 오른쪽, 중앙순으로 터졌다. 네댓번의 연쇄 폭발이 일어난 후에 별채도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정원으로 엉겨붙은 화염은 소정원으로 옮겨가서, 알록달록한 정경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저택에서 등을 돌리고 출구로 향했다. 이제 남자의 스카디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만 말소시키면, 나는 다시 유령이 된다. 다른 150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 * *









우리가 보호하던 바이오로이드는 파랑새 재단이라는 곳에서 맡아주게 됐다. 파랑새 재단은 2094년 가을에 연꽃 재단과 연을 맺은, ngo활동과 청렴함으로 알아주는 곳이었다.


오늘은 보호를 목적으로 한 바이오로이드 양도와 관련된 서류 검토를 위해, 파랑새 재단의 이사와 직접 만나기로 되어 있다. 장소는 내가 자주 들러서 블랙만 마시던 레스토랑. 한때는 바이오로이드 출입금지인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을 치고는 따뜻한 날.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에 연락이 왔다. 파랑새 재단이었다. 필시 약속 장소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20분이나 늦었으니 내 쪽은 서둘러야 했지만, 레스토랑이 가까워질수록 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그 익숙한 번화가 한복판에서 거의 주저 앉아 있었다. 내가 한심할 법도 한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동행한 남자는 끈기 있게 싫은 내색도 없이 기다려주었다. 그런다고 내가 다시 일어날지 못 일어날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는데.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여 레스토랑 앞에 왔다. 약속 시간은 40분이나 지나 있었고, 부재중 통화는 세 통 더 늘었다.


한심하다는 듯한 한숨이 들려서 남자를 보았다.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얼굴이 아니어서, 이내 내가 낸 한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게 또 한심해져서,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형님!"

"오! 동생!"


파랑새의 이사가 된 주인님이었던 남자와 우리 아빠가 포옹했다. 이사와 함께 앉아있던 트위드 소재 정장 차림의 여성은 내게 부러 발걸음하게 만들었다며 정중히 사과했고, 나는 이쪽에서 먼저 보자고 한 것이며, 늦어서 죄송하다고 비슷하게 사과했다.


그 뒤로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빠와 이사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색상만 다를 뿐 나와 같은 정장 차림, 금발, 푸른 눈, 아르망을 똑닮은 얼굴의 조형.


분명한, 나의 앨리스였다.


앨리스와는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에 거의 없다. 외모가 닮은 것은 확실히 주제로 삼았다. 


그 외에는 바이오로이드 대상 범죄(사회는 범죄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사례에 대해 논했던 것 같기도 했고, 만남의 목적에서 벗어난 대화도 했던 것 같다. 취미나 취향, 남자 이야기 등등… 내가 먼저 대화를 리드한 적은 없었다. 예와 아니오 외에 다른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어른들이 대화를 끝마친 때가 되어서야, 나는 겨우 먼저 입을 열었다.


"ngo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꿈, 이루셨네요."


끝에 언니, 라고 덧붙였다. 한때는 나를 언니라 부르던 여자에게, 지금은 내가 언니라 부르고 있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요?"


속으로는 실수한 것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께 들었어요. 이사님의 따님은 꿈이 ngo활동가시라고요."


"아~ 그렇구나." 앨리스가 눈부신 미소를 보였다. "아르망도 대단해요. 그 나이에 벌써 재단을 운영 하다니."


모두 남자의 독단에 혼자 운영할 따름이었지만, 나는 그저 황송해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의 반응을 보일 여유도 없었다.


"앨리스는 곧 서른인가?" 남자가 짓궂게 웃었다. "만나는 남자는 있어?"


"아-니요? 만나 줄 남자가 있어야 만나죠."


"그럼 아저씨는 어때?"


테이블 밑으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조금만 젊으셨다면 형님께 시집 보냈을 텐데요."


이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다.


"캬- 역시 동생이야." 아픈 척도 안 한다. "앨리스. 아저씨가 임마. 젊었을 때 한 인물했어."


"지금도 한 인물 하세요~"


남자가 다시 한 번 캬, 하고 감탄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우리 아가씨들은 그쪽으로 보내면 되는 거지?"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억 나시죠? 보육원 있던 곳. 지금은 저택이 되었으니까 형님이 보호하시던 숫자는 전부 수용 가능합니다."


"고맙군. 부탁 좀 하겠어."


"알겠습니다. 엇, 형님. 저희는 슬슬 먼저 가보겠습니다. 또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고생해."


"따님도 만나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이사가 자리를 나서고, 앨리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라고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없으시다면 저도 이만…"


"연꽃 재단의 심볼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네?"

"연꽃 위에 웅크린 고양이. 아르망이었네요."

"무슨, 말인지 잘…"

"그러게.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신가요…"

"그냥 왠지 아르망에게서 따온 게 아닐까 싶었어."


남자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앨리스를 막았다.


"우리 딸 괴롭히지 말고 빨리 아빠 따라 가라."

"괴롭히다니! 누가!"

"아빠 기다릴라."

"알았어! 또 봐? 아르망도 또 봐요!"


앨리스가 레스토랑을 나섰다.


건너편 자리로 넘어간 남자가 원래 앉던 자리에 있던 커피 잔을 당겼다.


"정말로 닮았어. 아르망 추기경이 성장했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어. 묘하구만. 아르망은 너 뿐인 세계인데."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꼴렸냐?"

"미친 년아!"


피식 웃고 커피를 마저 마시고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잘 가요.

나의 파랑새.


2094년 부로 연꽃 재단은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비어버린 자리를 메우듯, 파랑새 재단은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각계각층의 지원을 받아 연꽃은 뻗지 못한 곳까지 손길을 내밀었다. 그 손길은 바이오로이드 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닿아서, 어느 해는 보호하는 인원들이 수 천에 육박했다고도 한다.


보호를 받게 된 대부분의 인원은 파랑새의 전신인 원더랜드로 가게 됐다는 모양이다. 다툼도 반목도 없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한 나라. 언제까지고 파랑새가 날아다니며 행복을 노래하는 환상의 나라.


그 환상의 나라와 환상의 나라를 지키는 파랑새는, 멸망 전까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행복을 노래했다는 후문이다.






* * *





2100년. 봄.


그것은 갑자기 찾아왔다. 드문드문 두통이 재발하게 된 때부터 예상은 했다. 수명이 다해 죽을 때가 도래했음을 알았어도, 갑작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타이밍 때문이었다.


저택을 떠나 호텔을 전전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통제구역을 작살내고 다녔다. 가끔 붉은 아레나가 열리는 경기장도 작살냈다. 


"아르망이다 이 씨발 새끼들아!"


한때 내가 갇혔던 통제구역을 장고처럼 차려 입고 습격한 날이었다. 시설 보안실을 쓸어버리고, 통제구역에서 희생될 여분 재고들이 갇힌 곳을 찾았다. 천장이고 바닥이고 전부 하얀 곳이었다.


"뒤지기 싫으면 다 나가."


LRL과 샬럿이 눈치를 보며 바깥에서 대기 중인 남자에게 갔다. 그때의 그 녀석들인가 싶었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폭탄을 설치하고 자리를 떴다.


통제구역에서 피어 오르는 폭연을 등에 엎고 테마파크를 빠져나가는 길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통제구역 이용객이 있었음을 주차장에서 알았다. 나는 남자를 두들겨서 빨리 쫓을 것을 명하고, 어둑한 시내의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선루프로 상체를 내밀었다.


"도망쳐라 이 개새끼야! 넌 죽었어!"


도로 조수석으로 내려온 타이밍에 도망치던 차의 뒷범퍼를 쳤다. 도망자의 차는 전봇대에 처박혔고, 우리 차는 뒷범퍼에 고정되어 있었다. 


충격으로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삐뚜름해졌지만, 고쳐 쓰지 않았다. 사이드 미러로 본 그런 내 모습에서, 위대한 레보스키의 두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려서 도망자를 끌고 오려다가, 놈의 뒷좌석에서 볼링 공을 발견했다. 이 무슨 우연인가. 위대한 레보스키하면 빼놓을 수 없는게 볼링이다. 기가 막힌 처분법을 떠올린 나는 볼링공을 챙기고, 도망자를 우리 차 뒷좌석에 처박았다. 샬럿과 LRL은 잠시 내리게 했다.


"통제구역에서 바이오로이드한테 사탕 먹여줬지? 너도 사탕 먹여줄게. 아가리 벌려."


글러브 박스에 들어있던 오렌지 주스를 놈의 아가리에 처붓고 손가락으로 잇몸을 문질렀다. 이빨까지 오렌지 맛이 잘 스며들게 했다.


"이- 해! 이!"


충격에 정신이 몽롱했는지, 하란대로 고른 치열을 드러낸 아가리를 볼링 공으로 내려쳤다.


윗니가 빠져서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또다른 충격에 제정신이 들었는지 놈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사탕 먹여주잖아!"


볼링 공을 내려친다. 빠진 아랫니가 끊어지지 않은 신경에 매달려 덜렁거린다. 이빨 전체를 부수고 뽑아서 목구멍 뒤로 넘겨야 했기에, 연달아 볼링 공을 내려쳤다.


"맛있지?! 이빨 사탕 맛있지!?"

"어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남자가 밖에 있는 둘에게 고개를 돌리라고 손짓했다. 저 쪽은 신경쓰지 않고 그륵그륵 피가 튀어대는 아가리를 계속 내려쳤다. 그러다보니 이빨이 다 빠지기도 전에 면상이 뭉개졌다. 김이 새서 이마를 다섯 번 내려쳐 머리통을 깨버리고 골목 한복판에 버렸다.


이제 오늘은 쉬자고 생각하면서 조수석에 탔다. 그러자 갑자기 상체가 좌측의 남자 쪽으로 확 기울었다. 너무 낯선 감각이어서 처음엔 무연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아예 통제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어, 어라…?"


아아, 이거구나. 


직감했다.

이제 죽는다.


뇌만 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매번 생각했었다. 인간의 뇌사와 똑같을까, 아니면 갑자기 정신을 잃고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 그것도 아니면 서서히 죽어가는 걸까… 가능하면 서서히 죽는 게 좋겠다고 바랐는데.


이런 식으로, 몸의 통제권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형태일 줄은.


다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소리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각만은 살아있었지만, 소리가 죽어버려서 코 앞의 인간이 뭐라 말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말은 할 수 있었다.


"저기… 있잖아." 나는 나도 들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우리 폐하한테, 꼭 가야 돼. 알겠지? 약속 했으니까. 가서… 꼭… 우리 폐하 구해줘야 된다? 안 가면 안 돼…?"


뭐 이런 다급한 유언이 다 있담? 우습게도 마지막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 다음 순간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할 아주 잠깐의 유예도 없이 온통 암흑만 펼쳐졌다. 의식만이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르는 천장이 보였다. 큼직한 조명이 달려 있었으니 천장 외에 다른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상체를 일으킨다. 새하얀 잠옷 차림에, 새하얀 이불에, 새하얀 침대 시트다. 다 새하얗다. 눈이 잘못 됐는가 생각했지만, 손바닥으로 살색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부분이 문제인가 생각해서 몸을 뒤척였는데, 뒤척인 것 자체가 내가 정상이란 증거였다.


"오오, 드디어 일어났냐?"


침대를 기준으로 우측에 있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타났다. 샤워 가운 차림에, 한 손에는 반으로 접은 신문이 들려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우선적으로 내 몸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마지막 기억과 달리 몸이 너무 가벼워서 나는 태평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져버렸다.


"여기 어디야?"


남자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나한테 스턴 건을 들이밀었던 호텔."


"지금, 몇 시야?"


이번에도 시원스러웠다. 다만, 대답 자체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침 7시. 2110년 가을이야."






* * *






호텔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던 내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남자는 옥상 정원으로 나를 끌고 올라갔다. 노을 지는 시간이 되어서도 당혹감이 가시지 않아서, 환자복 같은 잠옷 차림이라 나가기 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저기, 봐."


고층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풍을 헤집듯이 눈에 집중했다. 연꽃 모양과 고양이, 파랑새 모양의 심볼이 새겨진 깃발들이 보였다. 그 깃발 아래에는 이렇게 모여도 되나 싶을 정도의 인파가 대로에 물결치고 있었다. 


시위를 하고 있는 듯했다.


"저 인파의 절반은 바이오로이드야."

"뭐?"


시위 밖에 떠올릴 수 없는 광경과 바이오로이드라는 단어가 매치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바이오로이드라고 했어. 저 시위에는 바이오로이드도 참가했어."


말도 안 된다고 상식적인 부정을 하려는 참에, 대로가 울렸다.


물러나라!


"저것들 지금… 뭐라는 거야?"

"잘 들어봐."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하는 악덕 기업!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자정을 거부하는 썩은 정부!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네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거지."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쓰러진 그 다음 해부터 파랑새의 이사가 정계에 진출했다. 기존에도 바이오로이드에게 인권을 쥐여줘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발언으로 유명세를 떨친 인간이었기에, 여론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의 이야기가 한차례 유명세를 탄 적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반반이었던 것이지, 자경단 활동이 없었다면 여론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었을 거라고 남자는 말했다. 


한편, 바이오로이드 고기 논란에 대해 명쾌한 해명을 하지 못한 것과 더불어, 연일 발생하는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폭력과 악화일로를 걷는 사회 전반의 문제에 염증을 느낀 인간들은 삼안을 겨냥하게 되었다. 그런 흐름을 잘 이용한 이사는 기존의 발언에 더욱 힘을 실어가며 여론에 빈번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럽게 여론은 이사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고, 이사는 자신의 사상과 발언을 공고히 했다. 


그런 순환이 이어졌다.


이변이라고 말해도 될 변화가 찾아온 것은 2103년이었다. 2103년 전반기 삼안의 매출 실적은 전년 대비 절반 이상 감소했고, 파랑새 재단이 조사하고 발표하는 대 바이오로이드 범죄 퍼센테이지 수치도 대폭 감소했다. 거리에서는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폭력에 눈치를 주는 것을 시작으로, 2105년에 이르렀을 무렵이 되어서는 풍조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바이오로이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는 인간 여자도 못 만나는 루저다.


바이오로이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여자는 열등감에 찌든 루저다.


2107년부터는 바이오로이드를 희생시키는 통제구역과 이색 클럽이 맥을 못 추게 됐다. 안 그래도 나와 남자의 활동(인간들은 테러집단의 소행으로 착각했다.)으로 위험하다는 인식이 박힌 두 곳이라 매출은 매년 떨어져 갔는데, 이사의 활동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강해졌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바이오로이드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곳은 수도권에만 점점이 산재해 있을 뿐, 전국적으로 궤멸해 버렸다고. 수도권에 위치한 곳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테마파크들은 최대한 통제구역을 폐쇄하는 쪽으로 선회했다나.


2108년부터는 대놓고 바이오로이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었고, 반 바이오로이드 주의자라고 말하는 인간도 거의 사라졌다. 바이오로이드의 출입을 금하는 온갖 매장도 그러한 혐오 기조를 철회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으로 대하려 드느냐고 비난하는 측과 바이오로이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놈들은 다 루저라는 측이 논리적인 태도를 가장하고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현재에 와서는 바이오로이드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우세하다는 듯하다.


해외에서는 이 나라의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인식 변화를 우려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가장 열을 올렸던 것은 일본과 미국으로, 뉴올리언스 폭동을 예로 들며 바이오로이드에 관한 안전 문제를 주로 거론했지만, 실상은 펙스와 블랙 리버의 빤한 여론 견제였다. 삼안에 이어 매출에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너무 빤했다 보니 견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2110년.


"믿을 수가 없네…"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하는 악덕 기업!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이젠 믿어라."


남자가 씩 웃고 내 어깨를 주물렀다.


"솔직히 나도 못 믿겠어." 남자가 대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 어떤 차원에서도, 여기 차원보다 덜한 곳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눈앞의 펼쳐진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이만하면 됐다.


"나는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됐냐니?"


머릿속이 정상인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겼다.


"그건 분명히 죽은 거였어. 그런데, 어떻게 지금 호텔 옥상에서 저런 광경을 보고 있느냐고."


남자는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나처럼 제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내 머릿속에 있는 벌레를 좀 나눠줬지."


"뭘 나눠?"


"프랑스에서 말했던 거. 나를 연명시키는 장치를 너한테 좀 덜어줬어."


그러면서 남자는 머리숱을 뒤집어 까고 두피에 난 흉터를 내보였다.


"네 머리 뚜껑을 네 손으로 딴 거야? 그리고 내 머리 뚜껑도 따서, 그… 벌레인지 뭔지를 내 머리에 옮겼다고?"


"말을 해도 뚜껑을 딴다가 뭐냐… 맞아."

"그래서 내가 살았다고?"

"그렇다고."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외에 믿을 것도 없다.


"어처구니가 없네…"

"루프하는 녀석이 뭔 어처구니야."


뭐, 맞는 말이다.

상식 따윈 이미 개나 준지 오랜데, 이제 와서 어처구니 없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다.


이왕 어처구니 없어진 거, 더 어처구니 없어지려고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남자가 준비해놨다는 옷으로 갈아입고, 호텔을 나서서 삼안 본사에 향한 시위 인파를 코앞에 뒀다.


무시무시한 열기였다.


"저기, 다시 봐봐."


옆에 선 남자의 손을 꼭 잡고, 나는 남자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연꽃에 웅크린 고양이.


"바이오로이드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다시 태어날 거야. 좀 더, 인간적으로 말이야."


이런 기세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바이오로이드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바로 앞을 지나가는 인파 중에서 눈에 익은 개체들이 몇 명이나 보였다. 바닐라, 콘스탄챠, 리제, 다프네, 드리아드, 포티아…… 그 외에도 참 다양한 면면이 있었다.


어쩐지, 남자가 들려준 루이스 웨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길고양이가 인간에게 안기듯, 바이오로이드도 인간에게 안길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무시 당하던 길고양이 애호가들이 루이스 웨인에 의해 양지로 나왔듯, 바이오로이드 애호가들도 양지로 나올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너는 그야말로 루이스 웨인이구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남자가 말했다. 나는 황급히 부정했다.


그저 혼자 재밌자고 한 짓이 이런 결과를 불러 올 줄은 몰랐다. 내 행보가 영향을 미쳤다 해도, 순전히 나 혼자서 이러한 결과를 만들었다고는 생각 안 한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조금 즐기고 싶었다. 


양지로 나온 바이오로이드 애호가들은, 길고양이와 다름없는 바이오로이드들과 걸었다. 한손에는 파랑새가, 한손에는 연꽃 위에 웅크린 고양이가 그려진 깃발이 들려 있었다. 


종종 서로에게 미소 짓고, 때로는 껴안으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비록 신고되지 않은 불법 시위였지만, 그날, 시위대는 그 어떤 폭력적인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고양이처럼 걸었을 뿐.






* * *






2110년. 겨울.


더는 죽이고 싶은 놈도, 죽일 이유도 없어진 나는 눈을 떴던 호텔에서 묵으며 시간을 죽였다. 가끔 외출할 때는 미끼를 소지하지 않았다. 바이오로이드라고 시비가 걸리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같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처음보는 개체라고 의문을 사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아무 일 없이 돌아다녔다. 커스텀 제작된 바이오로이드라고 밝히면 그만이었으니까.


남자의 설명으로는 잘 실감이 안 났지만, 직접 거리로 나와 보니 변화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10년간 잠들어 있던 사이에 일어난 변화로는, 눈에 보이던 것만 말하자면, 


첫 번째. 카페 테라스 석에서 바이오로이드가 다리를 꼬고 음료를 즐기고 있다. 그걸 보고 아무도 뭐라 안 한다. 


두 번째. 바이오로이드가 길에서 청혼을 받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벤트 자체는 꼴보기 싫었다.


세 번째. 슬슬 처맞는 년이 나와야 하는데 아무도 바이오로이드를 패지 않는다. 공공재든 사유재산이든, 모두 웃고 있다. 기계적인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네 번째. 바이오로이드에게 좀 까칠하게 군 것 뿐인데, 온 곳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인간이 있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도 하나 같이 평화로운 것들 투성이였다.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인식은 차치하고서, 보기 좋았다. 이런 변화를 눈앞에 두고서까지 본심을 부정하면, 안 그래도 싫은 나 자신이 더 싫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2110년에 이러한 세상으로 탈바꿈 되었다는 것일까. 


2111년에 세계는 멸망한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이 바뀐 것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늦게 바뀌어버린 것을 아쉬워해야 할지,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다. 현재의 기쁨에 충실하자고 생각해도, 몇 번이나 멸망을 목도한 입장에서는 마냥 그럴 수도 없었다. 


아메리칸 펍에 들려 위스키 몇 병을 구매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너무 열심이었어."


어차피 지나가 버리고 멸망해 버릴 세계에 너무 몰입한 것을 푸념했다. 다른 150년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없던 성취감이 더해져 내 푸념은 아주 끈적댔다.


남자와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은 둘이서 자주 약속 장소로 잡았던 레스토랑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첫만남을 가지고, 나는 그에게 스턴 건을 들이밀었다.


그랬던 스위트룸에서 지금은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2110년. 겨울. 인류에게 허락된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

"좀 더 기뻐해. 네가 만든 세상이야."


큼직한 아일랜드 식탁에 나란히 붙어 앉아서 위스키를 주고 받았다. 빛은 식탁 가운데에 켜둔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 조명, 건너에 있는 리빙 룸의 tv 뿐이었다.


온색에 휘감겼어도 남자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충분히 기뻐하고 있어. 다만, 내가 만든 세상이란 건 동의하기 어렵네. 주인님이 만든 세상이잖아."


"네 덕에 그 주인님이 살았잖아. 그 남자의 목숨을 누구도 건들지 못할 위치에 놓은 건 너야."


이런 세상이 될 걸 알고 구했다면 철저히 내 공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한테도 고마워." 술 기운 때문인지 입이 쉽게 열렸다. "당신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했을 거야. 이런 세상을 만들 수도, 볼 수도 없었겠지. 분명 길고양이보다도 더 처량한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고 봐."


"취했냐?"


"응. 취했어. 당신이 멋져 보여."


"보통 취한게 아니구만."


"당신은 이상한 인간이야. 그런 부탁이었는데도… 정말 끝까지 따라와서 달라 붙어 있다니. 재미로 죽이고 다녔을 뿐인데 노력했다느니…"


"약속했으니까."


"끔찍하지도 않았어? 솔직히 말해."


"끔찍했지. 그래도 네가 멋있는 걸 어째."


"취했구나."


"그래. 계속 취해 있었던 것 같아."


심각한 주제의 대화나 취하는 게 목적이 아닌, 술을 즐기기 위한 자리였다. 여기서 더 취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웠다. 남자도 말은 안 했지만,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스위트 룸에는 그런 아쉬움이 담긴 기류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나가기로 했다. 술은 더 마실 수 없고, 따로 할 것도 없다면 걷는 게 최고였다.


머플러에 입가를 감추고 가로등이 비추는 대로변을 걸었다. 차가 다니는 대로는 녹은 눈으로 얼어붙어 검게 빛나고 있었다. 시야를 조금 올려보면, 그 구역 전체가 가로등인 듯 온색 덩어리를 품은 번화가가 보였다. 하늘은 지나치게 맑아 도시임에도 별이 보였다. 


차분히 걸어서, 번화가에 들어섰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한 일루미네이션이 거리를 이질적인 주홍색으로 채색하고 있다. 들뜬 남녀 한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어깨를 스치듯 지나간다. 요리들의 향취와 술 냄새, 그것들을 품은 숨결들이 다양한 냄새를 퍼뜨려 코를 간질이고 떠나간다. 멀리서는 자동차의 배기음과 만남의 인사, 한 짝의 탄생을 알리는 탄성, 이별의 비명들이 한 점에 모여 독특한 화음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몇 번이나 보았던 그런 풍경에, 바이오로이드가 융화되어 있었다. 만남과 이별에도, 요리와 술의 향취를 즐기는 무리에도, 우리를 지나쳐가는 연인들에도, 반드시 한 명 이상의 바이오로이드가 섞여 있었다.


번화가 중심의 시계탑이 가까워질수록 거리를 채우는 것은 대부분 연인이었다. 남남. 여여. 남녀. 다양한 조합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조합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들 모두 어깨를 끌어안고 있거나 몰래 키스를 하거나 아예 보란 듯 대놓고 키스를 하고 있거나 했다.


크리스마스라면 당연한 풍경이라고 생각하면 됐지만 역시 이질적이었다. 저러다 갑자기 바이오로이드를 죽이거나 두들겨 패는 건 아닐까 하는, 오싹한 상상이 들었다. 


상상은 상상으로 끝났다. 나는 시계탑 앞의 벤치에 앉아 떨떠름하게 크리스마스의 연인들을 감상했다. 거리에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흐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점령하는 것은 키스와 머라이어 캐리다. 어느 시대 어느 때든, 항상 그렇다. 거의 편집적이라고 할 수준이다. 그렇게나 따로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걸 찾아내는게 어려운 걸까? 블루스도 있고 재즈도 있는데. 


머라이어 캐리가 크리스마스 거리에서 퇴장했다. 나는 주위에서 시선을 돌리고, 문득 현 상황을 자각했다.


죽기 전 화풀이는 끝났고, 폐하한테는 남자가 간다. 더는 목표가 없다. 나는 그냥 살아있을 뿐이다. 도움받을 일도 없다. 그러면 그 남자가 나를 필요로 한다한들, 내가 함께 있을 이유는 없다. 오늘 같은 날에 이런 곳을 들를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크리스마스를 밝히는 주홍빛이 한층 농밀해졌다. 주위에 포진한 연인들의 행각이 강하게 의식되었다.


"한 잔 마셔라."


근처 카페에서 두 잔을 들고 나온 남자가 한 잔을 내밀었다. 

나는 말 없이 잔을 받아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함께 걷는다고 하기엔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로 들어갈 때마다 잔을 홀짝이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몹시 궁금해졌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는 꺼려졌다.


셔터가 내려간 매장 앞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여기면 괜찮겠다고 말한 남자는, 셔터 앞에 쌓인 눈더미에 다가가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 큼지막하게 한덩이 만들고는, 같이 만들자며 내게 손짓했다. 


눈사람을 만들려는 듯했다.


얼떨결에 크기가 다른 눈사람을 하나씩 만들게 됐다.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작은 눈사람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남자가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내게 내밀었다.


단추, 작은 당근, 바둑알, 코팅지. 온갖 잡다한 것이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 중 몇 가지를 집어들고 눈사람에게 이목구비를 만들어줬다. 이왕 만든 김에 걸치고 있던 연지색 머플러도 눈사람에게 줬다. 그렇게 내가 맡은 작은 눈사람이 완성된 순간, 현기증이 돌 정도로 강한 기시감이 일었다.


내가 휘청거린 틈을 노린 양, 남자가 나직하게 미안해, 라고 말했다.


"네 부탁은 다 끝났으니까. 이제 사과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거든."


"지금 이 상황… 본 적이 있어."


남자가 한 발 다가왔다.


"넌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 나니? 내가 네 아빠였을 때 줬던 첫 번째 상."


그 말로 기시감의 정체를 알았다.

솜사탕.


"……기억났어. 그 공원에서… 당신의 마키나가 보여줬어."


내 소망에 근거해 남자의 진보된 마키나가 구현했던, 현실과 다름없던 폐하와의 크리스마스. 그 속에서 본 눈사람과 오늘 만든 눈사람은 똑같았다.


"사실은 말이지." 눈사람에 시선을 두고 남자가 말했다. "그건 네 소망을 구현한 낙원이 아니었어. 실은 내 소망이었어.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오류가 있었더라고. 너한테 사용했으면 네 소망을 구현했어야 했는데, 왠지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소망을 너한테 보여줬더라. 하지만 이상해. 내가 다른 이의 소망을 엿볼 수는 있어도, 다른 이에게 남의 소망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거든."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도, 남자가 하고 싶은 말은 알았다.


"그러니까, 난 단지 한때 당신이 즐겼던 당신의 소망을 봤을 뿐이다? 그 속에 있던 폐하는 우리 폐하가 아니라 당신이었다?"


"맞아."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해? 아주 오래 전 일이잖아."


"갑자기 발작했었잖아. 엄청 화내기도 했고. 대갈통을 부숴버리겠다니, 아직도 안 잊혀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어."


자그마치 900년도 더 지난 때의 일을 품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그렇고,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남자가 미안해 할 만큼의 화도 없었다. 까놓고 말해 뜬금없게도 느껴졌다.


"됐어. 서로 주고 받은 거 많으니까 쌤쌤으로 쳐."


다른 150년에서 보았던 남자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며 이번 루프의 모습과 대조됐다. 


정말로 바보, 라고 생각했다.

재수없고 거만하고 추잡하지만, 실은 정말로 약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일순 강풍이 불어서 라이터가 말을 안 들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남자도 피우고 싶다기에 라이터를 던져줬다. 딴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지 깔끔하게 받아내지 못한 남자는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눈 속에 푹 묻혔다.


"이런… 라이터 없는데." 


남자가 도로 주워 만지작대던 라이터는 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달궈진 부분에 눈이 녹아 물이 스미기라도 했나 보다. 


한동안 남자를 관찰하다가, 강풍에 사그라들려는 담뱃불을 들숨으로 키워내고 남자에게 향했다.


코가 닿을 거리까지 다가가서, 잠시 담배를 떼고 말했다. 


"보는 눈 많으니까, 불 좀 꺼 줘."


그리고 담배를 다시 물고, 재빨리 까치발을 섰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느 쪽 불을 꺼달라는 의미인지 파악이 덜 된 것이다.


쓸데없이 키가 커서, 코트 자락을 잡아 내 쪽으로 당겨야 했다. 눈에 젖은 칙칙한 금발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 뺨에 닿는다.


두 개비 담배 끝이 맞닿는다. 내 불이 남자에게 옮겨 붙고, 남자의 담배는 안정적으로 불씨를 머금게 됐지만, 우리는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두 줄기의 연기는 서로의 궤적을 유지했다. 이윽고 팔이 닿지 않는 높이에 다다라 하나가 되어, 크리스마스의 밤으로 빨려들어갔다.






* * *




더 이상 바이오로이드가 도구 취급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그것은 내가 사는 나라 한정이다. 기업들의 위세는 여전했고, 얼마나 시위에 시달리고 비난을 당하든, 세계를 주무르는 굴지의 위치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민초가 바뀌어 봐야 고작 풍조가 조금 달라지는게 한계라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도 나쁜 흐름이 아니었다. 


여전히 세계는 기업이 주물러야만 했다. 아무리 바뀌었더라도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선 끔찍한 일이 일어나야 했다.


그래야 폐하가 힘을 얻으니까.


삼안이 건재 해야 폐하가 몸을 얻고, 블랙 리버가 건재 해야 함대를 얻는다. 바이오로이드가 있어야, 저항군이 결성된다.


멸망 전이 악으로 창궐할수록, 폐하가 강해진다.


민초 따위에게 무너질 기업도 아니었지만, 무너져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독단으로, 조금 훼방을 놨다.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한 목소리를 내는 장소 근처에서 소동을 벌이거나, 아무도 죽지 않는 테러 행위를 벌이거나 했다. 내가 만든 세상을 내 손으로 다시 훼손한다는 게 싱숭생숭하긴 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게 싫었다면, 바이오로이드를 없애달라고 할 수 있었다. 


아르망 추기경만 없애달라고 할 필요 없이, 바이오로이드 전체를 태어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멸망도 막을 수 있다는 그 남자라면, 분명 내 부탁을 곧이곧대로 들어주었겠지. 그리하여 폐하가 애초에 태어나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리 해주었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내 목숨보다 폐하를 더 사랑하는데.






* * *





많은 것을 바꾸었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의도치 않게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꾸었다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작은 세상이 있다. 내가 존재를 드러내기만 해도, 부서져 버리는 세상이 있다.


나는 싫다고 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이미 위치와 예상 경로를 모두 파악해 놨다고 고집을 부려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척 따라 나섰다.


해가 막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우리는 테마파크를 찾았다. B구역과 통제구역이 사라진 테마파크는 엷은 세피아톤을 띄고 있어서, 그 어떤 150년에서 보았던 테마파크보다 따스했다. 연인과 가족들의 새된 소리와 어트랙션의 구동음이 한데 섞여 울려 퍼지고, 어뮤즈 어텐던트 소속 개체들은 진심이 묻어 나오는 미소로 고객들을 대했다. 


우리는 인형탈을 입고 있었다. 테마파크의 일일 아르바이트다. 남자가 내건, 테마파크에 들어서는 조건이었다. 


억지로 끌고 온 주제에 무슨 조건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한 번 쯤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묵묵히 인형탈을 입었다. 앞으로 만날지도 모를 인간들을 생각하면 얼굴을 가릴게 필요하기도 했다. 


세피아톤이 노을에 짙어질 무렵, 나는 발견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남자가 은근슬쩍 손을 가리킨 곳에, 그들이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제스쳐와 아이들과의 하이파이브도 잊었다. 나는 인형탈이 불어넣어준 용기를 이용해 그들에게 똑바로 다가갔다. 


아이 앞에 서서, 나는 고양이 흉내를 냈다. 고양이 인형탈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아~" 중년의 여성이 손을 잡고 있던 아이에게 말했다. "고양이가 왔네~"


아이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다른 쪽 손을 잡은 중년의 남성이 말했다.


"사진 찍을까? 가서 서볼래?"


아이는 망설이는 듯한 발걸음으로 내게 거리를 좁혀왔다. 


고양이 흉내도 집어치우고, 아이에게 그러듯 양팔을 펼쳐 자세를 낮췄다. 이러기만 하면 하늘이는, 곧잘 아장아장 잘도 걸어왔더랬다.


아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함께 사진기를 바라봤다.

김치~ 셔터가 눌린다. 빛이 명멸한다.


함께 사진을 찍어준 것에 감사를 표하는 부모를 보고,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핑크색 탈을 벗어 바닥에 내려놨다.


"우와…"


이제껏 한마디도 없던 아이는 고양이의 실체를 확인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 눈을 똑바로 보았다. 노을이 깃든 보석같은 눈망울에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두 다리에 힘을 넣어 주저 앉을 것만 같은 몸을 지탱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눈이 통제를 벗어나 눈물을 쏟아내려고 해서, 입술을 꽉 물었다.


"누나. 화났어요?"


그런 내 모습은 아이에게 그렇게 비쳐졌던 모양이다.


아이와 컨택 중인 와중에 흘려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여기서 계속 뭐하고 있니."


가능한 하늘이만 담아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다.


"죄송해요, 어머님. 하늘이가 고양이한테 반해버려서요."


"고양이?"


기품있는 몸짓으로 돌아본 노년의 여성과 눈이 맞는다.


어떻게 된 거지.


막 피어오른 궁금증을 인형탈에 설치된 무전기가 해결해줬다.


"앨리스의 어머니를 구할 때랑 똑같아. 너 몰래 넌지시 알려줬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여성에게 달려간다. 할머니~ 여성이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안는다. 아가. 고양이랑 사진 찍었니? 아이는 말한다. 고양이가 아니에요. 엄청 예쁜 누나에요.


여성과 또 한 번 눈이 맞는다. 그녀가 눈으로 감사를 표한다. 나는 다시 탈을 쓰고 고양이 흉내를 내고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도중에 몇 번, 떠나가는 가족을 돌아보면서.


대관람차 앞에서 춤추고 있던 남색 고양이이게 물었다.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뭔 말?"

"그 아이도 살아있다고. 원래는 10년 전에 죽으니까."

"그랬지. 너한테 저주를 퍼붓고 말이야."


남색 고양이의 아구를 돌렸다. 머리가 반 바퀴 돌아간 고양이를 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쾌활하게 웃었다. 아이들을 인솔하던 키르케도 웃었다.


꼭 한마디 더 해서 매을 번다.


마음이 수런거리는 채로 아르바이트에 몰입했다. 갈수록 춤사위가 약해져가는 남색 고양이를 가끔 두들겨 패서 고객들이 웃게 만들고, 아이들과의 하이파이브에 진심을 다하고, 키르케의 양손을 잡아 빙글빙글 돌고 나면 어지러운 척했다. 


그러다 사진을 찍은 아이의 가족들이 대관람차 앞을 지나가는게 보였다. 고양이 흉내를 내서 대관람차를 이용하도록 유도할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조용히 작별의 말을 읊조렸다.


너는 모를 시간 속에서, 나는 너의 하나 뿐인 언니였다고.


너는 모를 시간 속에서, 너는 나의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 * *





시간에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지나가는 법이다. 단지 건강하게 살아있는게 다였던 나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갔다. 그저 흘러가는게 목적이 아닐까 싶을만큼, 아주아주 빠르게 흘렀다.


빠르게 흐른 시간의 어느 지점에 있던 것은 멸망이었다. 몇 번이나 루프를 하다보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멸망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멸망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그것은 존재할 뿐이라고.


"나를 멋지다고 재평가했던 건, 아직 유효하냐?"


호텔 옥상에 부는 강풍에 태워 보내듯, 둥그렇게 찢어진 하늘을 바라보며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너무 늦을게 뻔한 공습 사이렌은 과연 언제 울릴까, 같은 태평한 생각이나 했다. 그러지 않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유효하지 않다는 걸로 하자."


밉상 짓을 할 거라며 남자는 팔짱을 끼고 내게 고개만 돌렸다.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선택권을 줄게. 멸망을 막을래? 아니면 폐하한테 갈까?"


밉상 짓이라고 가볍게 표현할 말이 아니었다. 욕지기가 끌어오르지만, 처음부터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다 알고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잦아들었다.


"당신은 폐하한테 가야 돼. 멸망해야 폐하가 태어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답하는 거야? 정말로 이대로 둬?"


대답 대신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입에 물린 담배를 낚아채서 난간 너머로 던졌다.


바람에 휘날려 거칠게 추락하는 담배를 보며, 내가 말했다.


"……멸망해야 돼. 처음부터 당신이 폐하한테 가는 걸로 약속했잖아."


"아르망. 잘 들어. 네가 만든 이 세상은, 아주 높은 확률로 바이오로이드에게 행복한 세상이 될 거야. 한 10년 정도 더 흐르면 도구 취급 받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은 이 나라만 그럴 뿐이지만, 일본도 미국도, 나아가서 전 세계가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처럼 대할지도 몰라. 

멸망만 막으면 돼. 내가 막을 수 있어. 막기만 하면, 철충과 바이오로이드가 피 튀기며 싸울 일도 없어져. 알았어? 멸망할 이유가 없어.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거야. 멸망을 막을 수단도 있어. 그걸 알고 있는데도 멸망을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네가 해왔던 그 어느 것보다 이기적인 거야. 아르망.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나는…"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본인이 더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행복한 세상이 돼? 

왜 백 퍼센트라고 자신하지 못하는데?

철충과 피 튀기며 싸울 일도 없어져?

멸망할 이유가 없어?

그럼 폐하는?


"싫어. 그냥 이대로 둬."


단호하게 말했다. 기도가 막힌 듯한 소리를 내고 남자는 말을 멈췄다.


몸이 기울고 다리가 풀렸다. 쓰러지는 자세가 좋지 않아서 바닥에 닿았을 때의 고통을 저도 모르게 상상했지만, 몇 초가 지나도 아무데도 아프지 않았다.


"바보 같으니."


나는 남자에게 안겨 한참을 울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지금 당장 찾아가고 싶은 인간도 많았지만, 그랬다간 눈물만 더 나올 것 같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우는 것 밖에 몰라서 울고, 울고, 그러다 너무 늦게 울린 공습 경보 사이렌을 듣고 또 울었다. 


"많이 울어둬." 상냥한 손길이었다. 등을 쓸어내려준다. "말로는 웃으라 하고 싶은데, 그건 별로 도움 안 되거든. 우는게 최고야."


또 매를 번다고 생각했다. 하여간 말이 많다. 


이렇게 우는 것은 재건축 현장에서 몸을 날리려던 이래로 처음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더 울 수 없을만큼, 세계를 태우는 불길만이 세계를 밝히는 유일한 빛이 될 때까지, 나는 울었다.


이렇게 나의 마지막 멸망 전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선택에 따라서는 '멸망 전'을 뺄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온전히 폐하만 생각하는 나는 멸망을 택했다.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이것으로 아르망의 멸망 전 이야기는 끝입니다. 

아르망의 개인적인 화풀이는 끝났고, 이제는 폐하만이 남았습니다.


다음 화로 아르망의 이야기는 끝날 것 같네요.

전부 다 끝내고 시간이 되면, 신사의 이야기도 풀어볼까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