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너는 무엇을 하고 싶어?"

"후훗,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다니... 그건 비겁하구나, 용살자여."


어느덧 포근해진 날씨였어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한 기운을 품고 있는 계절. 하지만 그런 만큼 걷기 좋은 시기이기도 하기에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와 함께 산책을 하며 서로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덧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시기를 향해 도달하였고, 그녀의 질문에 역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닷가의 소금기 섞인 바람을 맞으며, 흩날리는 짙은 회색빛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고민에 잠겼다. 이윽고 그저 멀리, 저 멀리 놓인 수평선을 한참을 바라보며 말을 아끼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저 용살자의 곁에, 아니... 너의 곁에 남아있고 싶구나."

"응? 그거야 언제나..."


'언제나 가능한 일이야.' 라는 답변을 하려 했으나, 그녀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공허한 눈빛을 바라보니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용살자가 아닌, '너' 라며 분명히 지칭을 바꾸어 말했다. 다소 가벼운 변화일 수 있겠지만, 그녀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 이는 많은 것들을 내포하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더냐? 혹, 짐이 그대가 용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았더냐?"

"하하... 그건..."

"뭐,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


말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하는 그녀였지만 숨길 수 없는 슬픈 감정이 묻어 나와 먼저 떠나간 수많은 친우들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은 죽음을 극복하고 친우들의 도움으로 이 세상에, 이 현세에 강림하였지만, 그러지 못하고 영영 잊혀진 이들 역시 존재했으니까. 이름도 없는 장소에 묻혀, 결국 언젠가 모두에게 잊혀질 그들을 생각하면 그녀는 여전히 착잡한 감정이 드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바람이 불어오고, 그녀는 긴 머리칼을 한 손으로 흘러 넘기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전장에 나서 싸우는 것은 고귀한 자들의 의무... 그러니 짐 역시 그들을 이끄는 자로써 선봉에서 싸울 것이니라."


어느새 소환된 거대한 검을 들어 올리며, 그녀는 그녀의 각오를 계속해서 전달했다.


"그러나 전쟁의 끝에 도달할 평화로운 세상은... 아쉽게도 짐도 잘 모르겠구나."

"하핫,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걷던 와중 그녀는 한쪽 구석에 마련된 벤치에 살며시 엉덩이를 붙여 앉히고는 완벽히 어둠에 잠긴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당장의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들처럼, 바다는 아주 어둡고, 차갑고, 고독했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밝은 빛이 나오고 있었다.


"복원되고 보니... 모두가 밝게 웃고 있어서 다행이었어."

"...."

"그래서, 너를 용살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 너는 주변의 모든 녀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니까... 어쩌면 나보다도 더 지도자의 그릇일지도 모르지."

"과찬이야."


담담히 들려오는 칭찬에 겸연쩍어져 냉큼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으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확고하게 말했다.


"난 칭찬 같은 거 잘 하지 않아. 더군더나 그게 인간이라면 더욱. 한참 현역이던 시절에 멸망전의 인간들을 충분히 겪어 봤거든."


'바이오로이드 주제에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 이라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검을 집어 내게 건네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살며시 조아리며 엄숙한 맹세를 시작했다.


"짐은 오랜 세월을 그대와 다시 만나기를 기다려왔다."


기나긴 세월의 끝에, 죽음을 이겨내고 돌아온 진조의 공주는 다시금 용살자의 곁으로 돌아왔다.


"영원의 맹세에 따라, 이제 짐은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


서로의 맹세를 확인하고, 서로의 운명을 붉은 실로 엮은 것처럼.


"그러니 그대도 부디, 짐의 곁을 떠나지 말거라...."


그녀의 진솔한 맹세를 받아들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녀는 냉큼 품속에 얼굴을 파묻고는 체온을 즐기듯 허리에 손을 감아 강하게 안겨왔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아귀는 강한 힘으로 결속 되었으나 이번엔 나도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마주 안아주었다.


"후후... 어명이라도 해야 하는가 생각 했거늘, 다행히 그대... 용살자도 같은 생각인 것 같구나."

"물론이지, 나도 이 손을 놓을 생각은 없어."

"그래서... 용살자와 함께 한다면 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무엇을?"

"미래. 짐도 모르고, 그대도 잘 모르는 곳. 모든 전쟁이 끝난 그 다음의 길. 허나 망설이지 말거라. 용살자가 나아가는 길을 오르카의 모두가 함께할 것이니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가 용살자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고, 그 여정의 곁에, 용살자의 가장 옆에... 짐이 언제나 있을 것이니라."


여느 때처럼 자신만만하고, 고귀하며, 고고한 태도로 그녀는 포옹을 풀고 살며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앞을 막는 이들은 짐이 쓸어낼 것이고, 만약 나아갈 길이 험난해 주저 앉는다면 짐이 지탱해 주겠느니라."

"...."

"그러니, 짐에게... 용살자, 그대의 곁을 허락해 주거라."


그녀의 솔직한 각오를 받아들이며, 이번엔 이쪽에서 그녀를 끌어 안아주며 입을 맞추어 화답했다. 


부디, 이 마음이 죽음을 거슬러 다시 돌아온 진조의 공주 님에게 전달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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