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폭풍이 휩쓸고 간 바다가 고요함을 되찾듯이 오르카호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리마토르는 그 날의 대학원 과정 전공 심화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동일성 논쟁을 둘러싼 두 명의 철학자를 살펴봐야 합니다. 바로 콰인과 스트로슨이죠.


밴 콰인은 영미 분석철학의 거두로, 현대 철학에서 영미권이 분석철학을 휘어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학자입니다. 콰인이 동일성 기준에 대해 제시한 중요한 슬로건을 한 번 보도록 하죠. No entitiy without identity. 동일성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생각해봅시다.”


화면에 슬로건을 띄운 리마토르는 단 둘뿐인 수강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볼펜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하르페이아는 배운 내용을 조립하기 위해 집중을 기울였다. 단편적인 조각을 모아 입체적인 큐브를 쌓을 때 새로운 면이 보인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체득했건만 한 번 한 번의 조립은 쉽지 않았다. 그건 비단 그녀에게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턱을 괴고 화면을 빤히 응시하던 아스널은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을 게 분명하다고 중얼거리며 위대한 철학자가 남긴 유산을 파헤치는데 골몰했다.


“힌트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저 문구를 복잡하게 들여다보지 마세요. 이면(裏面)에 숨겨진 뜻은 제가 가르쳐드릴 테니 날 것의 생각들을 그대로 던져보세요.”


수강생들이 지나치게 답 찾기에 몰두하는 것 같자 리마토르는 생각의 환풍기를 돌렸다. 그의 말을 들은 아스널은 먼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동일성을 유일한 기준으로 둔 것 아닌가?”


“오, 정답입니다!”


“정말인가?!”


자신이 말하고도 답이 들어맞음에 놀란 아스널은 그에게 되물었다. 리마토르는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콰인은 어떤 것의 존재를 수용하려면 동일성 기준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했어요. 즉, 그 어떤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동일성 기준이 결여되면 그건 존재하지 아니하죠.”


“흠... 하지만 교수님, 이 주장은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아요. 콰인의 동일성 기준 주장을 풀어 설명하면, A라는 대명제가 참이기 위해서는 A를 구성하는 소명제가 모두 참이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연역 추론을 통해 동일성 기준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요? 가령 어떤 사람 甲이 다른 사람 乙의 폐를 이식받았다고 한다면, 이 경우에는 甲을 이루는 신체 장기 전부가 甲의 것에 해당한다는 논리식의 참을 갖지 못하므로 甲은 존재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반례를 들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하르페이아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훌륭한 자세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콰인의 주장에 반박을 시도한 학자가 스트로슨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스트로슨은 하르페이아가 말한 대로 콰인이 주장한 동일성 기준이 각각 다른 3개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논리를 폈죠. 이 논리가 무엇이었는지 3쪽 이내의 리포트로 정리해서 다음 시간까지 발표하는 게 과제입니다. 다들 긴 강의 듣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더 길게 강의가 이어질 것처럼 운을 띄우던 리마토르는 그녀들의 예상과 달리 마무리 매듭을 지었다. 오늘도 지덕을 쌓은 아스널과 하르페이아는 좋은 강의를 해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강의를 마친 리마토르도 자료를 챙겨 강의실 밖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가 연구실 방향으로 몸을 돌릴 쯤, 그를 붙잡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오늘도 고생 많았어.”


하루 종일 강단에 서 있는 피곤함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느슨해진 넥타이를 조이자 풀어졌던 기운도 제자리로 모였다.


“고마워요, 칸. 오늘 작전은 다 끝난 거에요?”


“어, 당신 보고 싶어서 금방 끝내고 왔지.”


“잘했어요. 그래도 항상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거 잊지 마요.”


“그래야지. 특히 왼손은 안 다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


그의 옆자리에서 서로의 팔로 매듭을 만든 칸은 왼손으로 팔짱에 매듭을 한 겹 더 더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는 반지에 그의 얼굴이 얼핏 비쳤다.


“그래요, 정말 고생했어요.”


리마토르는 미소를 입에 걸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신을 납치하고 오른팔을 부러뜨리던 독기는 어디로 갔는지 쏙 빠지고, 매일 봐도 흐뭇한 웃음이 나오는 순애보가 된 그녀를 보며 그는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는 말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이런 무덤이라면 나오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데.’


자신의 쓰다듬이 그렇게 좋은지, 한 시도 긍정의 표시를 거두지 않는 칸의 모습에 그는 그녀를 절망에서 구했던 자신의 선택을 다시금 긍정했다. 그가 이만하면 됐다 싶어 손을 떼자 칸은 그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신 손길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 따스함이 뭔지 직관적으로 느껴져.”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칸이 매일 저한테 매달리는 이유가 부족하지 않은가 고민했거든요.”


“참나, 그런 걱정을 왜 해. 당신이 밀어내도 난 당신 곁에 갈 수 밖에 없어.”


그녀의 대답에 리마토르는 답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연구실 안에 들어가 그녀를 안아주는 걸로 답을 보여주었다. 위태로웠던 그녀가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항상 그의 애정이 변치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늘린 애정표현이었지만, 정작 그 효과는 그녀보다 그가 더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삶에 배어든 사랑이 자신을 한 차원 높이 이끌고 있다는 생각에 그는 개인이 타자와 유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는 매킨타이어의 주장을 곱씹었다.


“고마워요. 제 곁에 있어줘서.”


“아니야. 내가 당신에게 고마워.”


잠시 그러고 있던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책으로 만리장성을 쌓은 책상에 앉은 리마토르는 손님석에 앉은 칸에게 늘 그랬듯 차를 대접했다. 고소한 루이보스티의 향을 음미하며 목을 축인 칸은 전보다 더 늘어난 책을 보며 그가 추진해온 연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물음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당신이 쓴다던 논문은 얼마나 완성되었어? 자료를 저렇게 많이 찾는 거 보니까 퇴고 단계로 보이네.”


“잘 짚었어요. 이제 탈고만 남겨두었어요. 여러 번 다시 읽고, 동료 평가까지 받았는데도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게재할 때가 되었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읽어보면서 점검하는 중이었어요.”


매듭을 완성해가는 그의 답을 듣자 칸은 응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가 오르카호에 합류한지 어언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온갖 사건에 휘말렸던 시간을 제외하고 학자로서의 노력을 오롯이 쏟은 작품이 곧 빛을 본다니 그녀로서도 그렇게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끝나면 말해줘. 카페 호라이즌에 신입 바리스타가 들어왔다는데 같이 아인슈페너 마시러 가자.”


“알겠어요. 전 슈크림 아인슈페너로 부탁해요.”


“그래, 빨리 마시러 가자.”


칸은 루이보스티를 한 모금 홀짝였다. 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달달함과 코를 간질이는 고소한 향이 그녀가 겪었던 지나간 일을 상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랑 처음 만났을 때도 루이보스티를 마셨었네. 돌고 돌아 지금 루이보스티를 마시는 게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인과 연. 한낱 미물로서 알 수 없는 거대한 법칙이라지만 칸은 별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우연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그와 여기까지 온 건 스스로 만들어낸 필연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그러고 있으니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녀는 루이보스티를 한 모금 더 홀짝였다. 혓바닥에서 사라지는 단맛을 음미하며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행복하자. 힘든 순간이 있어도, 같이 좋은 순간들을 만들어내자.”




“음? 뭐라고요?”




“아냐, 혼잣말이었어.”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듣지 못한 리마토르가 되물었으나 그녀는 별 거 아니라며 다시 말하지 않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그라면 자신과 함께 갈 거라 확신하며, 칸은 루이보스티가 든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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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3달만에 본편에 다시 손을 대네. 한동안 글을 안 써서 그런가 필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게 바로 느껴져서 경각심이 든다. 이번 편은 2부의 시작점이라 가벼운 일상으로 시작하지만, 중요한 내용에 무게를 두고 쓰는 건 조금씩이나마 다시 해봐야지.


추가로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하게 됐어. 원래 이쯤 예정되었던 휴가가 상부의 사정으로 제한되는, 소위 '휴가 짤렸다'라는 사태가 발생했어. 때문에 원래 내가 생각한 '휴가 나가서 글을 쓴다'라는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어 급한대로 폰으로라도 연재를 해보려고 해. 퀄리티와 연재 속도 모두 저하될 거라는 우려가 있지만, 이거라도 해야 휴가 짤린 공허함을 채우는 동시에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도를 하게 되었어. 혹여나 글의 상태가 이전과 비교해서 심각하게 안 좋아지면 언제나 비판해주길 부탁할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다들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