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클로버, 니키, 그리고 레아 쪽은 난관에 봉착해있었다. 적 AGS들은 생포할 생각이 없다는 듯 사정없이 실탄을 쏘고있는데, 이쪽은 거듭된 싸움으로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마취가스를 더 많이 들이마시게 되어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있었다. 심지어 레아는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과도하게 능력을 사용한 탓에 두통까지 겪는 중이었다.


레아는 생각했다. 여기가 실내만 아니었다면 바람을 일으켜 가스를 날려버릴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깨달았다, 아주 단순한 해결방법을.


"...!? 레아?"


뒤에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니키가 돌아보자 레아의 몸에 사납게 푸른 스파크가 튀면서 머리카락이 위로 붕 뜨는 모습이 보였다.


"적들과... 거리를 두세요...!!"


레아의 두 손에 스파크가 집중되었다. 이윽고 팔을 아래로 확 내리자 거대한 벼락의 기둥이 적들이 있던 곳에 수직으로 내리꽃혔다. 여태껏 쏘던 전기와는 다른, 지붕에서 지하까지 건물을 통째로 관통하는 위력이었다. 그 반동으로 건물이 정전되어 버렸다.


강렬한 섬광과 굉음으로 인해 니키와 클로버는 잠이 번쩍 깼다. 바닥에 생긴 구멍 주변엔 반쯤 녹아내린 AGS의 잔해가 널부러져 있었고, 천장의 구멍으로는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보였다. 체력을 소진한 레아가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하늘도 금방 개였다.


"이, 이봐! 정신차려!"


클로버가 화들짝 놀라 레아를 살펴보러 갔다. 니키는 이 참상을 보며 레아가 가진 힘을 체감하던 중 움직이는 램파트가 한 대 남아있다는 걸 발견하자 급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조심해! 아직 남은 놈이-"


그러나 니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램파트는 대각선으로 일도양단되어 쓰러졌다.


"다행히도 늦지 않은 모양이군요."


램파트의 뒤에서 나타난 건 거대한 낫을 들고있는 수녀였다. 뿐만 아니라 양손에 식칼과 중식도를 들고있는 요리사까지 서있었다.


"수녀치고는 싸우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십니다."


"이단심문관의 역할도 겸직하고 있는 몸이기에. 그러는 자매님도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던데, 요리사 이외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신지?"


"후후, 소첩의 정체성은 오로지 요리사 이 한가지 뿐이옵니다."


"...! 너희들, 무사했구나!"


니키가 반갑게 부르자 남은 적이 없음을 확인한 베로니카는 화려한 손놀림으로 낫을 접어서 품에 안았다.


"다시 보게되어 다행이군요. 다른 두 분은 무사하십니까?"


"어어, 일단은... 위에서 계속 수면가스를 살포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그 쪽은 어째 멀쩡해보이네."


"각성제를 투여했지요."


"뭐라고?"


소완이 태연하게 내뱉은 말에 니키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각성제라니. 그, 커피나 초콜릿... 같은거?"


"그런 것으로 수면가스의 효과를 억누를 수 있을리가 없잖사옵니까. 마약류를 말하는 것이 맞사옵니다. 소첩의 짐에 적당한 약이 있었기에 망정이지요."


"넌 그걸 왜 갖고있는건데!?"


"소첩은 어떤 식재료든 가리지 않고 취급하는 주의인지라. 남용하지만 않는다면 중독 증세는 약하니 걱정마시길."


"...아 뭐, 그래. 그렇다치고. 각성제로 수면제를 억누르다니, 그래도 되는건가?"


"간에 부담이 큰 방법입니다. 비상상황이니 쓴 것이지요."


"...거기 수녀 아가씨, 설마 너도...?"


"다짜고짜 제 목에 주사를 꽃았을 땐 절 암살하려고 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제게 무기를 던져준 게 당신이 아니었다면 당신도 베었을 겁니다. 베로니카의 담담한 경고에 소완은 조용한 미소로 대답했다. 분위기가 싸해지려 하자 니키는 손뼉을 치며 둘의 시선을 모았다.


"자자, 아무튼 간에! 적들은 전멸했고 우린 전부 살아서 재회했으니 우리의 승리잖아? 기뻐하자고!"


"아니요. 우리의 완패입니다."


소완과 베로니카의 뒤에서 올리비아와 함께 걸어온 오드리가 말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완패라니... 설마...!?"


"미스터가... 인간님이 납치됐습니다."


"레모네이드한테!?"


"아뇨. LRL이라는 바이오로이드한테요."


"...그게 누구야?"


"얼마전에 헤어졌던 우리 일행 중 한명이야."


레아를 등에 업은 클로버가 말했다.


"그런데 납치됐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알비스가 말하기로는, LRL이라는 자가 배신했다고 하더군요."


"배신!?"


오드리가 설명을 이어가려는 그 때 올리비아가 오드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드리가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올리비아는 자신의 왼쪽 손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오드리는 여기서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맞아요. 가면서 설명하죠. 여기서 나가서 미스터를 뒤쫓는 게 급선무입니다. 언니, 쓸 수 있는건 다 챙긴거죠?"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드리는 따라오라며 출구 방향으로 달려갔다. 간수 AGS는 전멸, 차단벽이나 수면가스같은 수작질도 모두 끊겼다. 탈출을 방해할 요소는 사라졌으나 여유를 부릴 틈 따윈 없다. 니키 쪽도 무기를 되찾고 그렘린, 알비스와도 합류한 뒤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출입구에 다다른 순간 그녀들 모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문 너머에서 수많은 인기척과 적의가 느껴지는 데다가, 밖에서 철문을 강제로 비집어 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펙스의 증원군이 온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오래 생각할 틈은 없었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전부 무기를 들고 영격태세를 갖추었다.



'콰지끈'


"우리 대장은 어디있냐! 당장 데려와!!"


그러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자 나타난 건 펙스의 AGS 군대가 아닌 바이오로이드 그룹이었다. 그것도, 누군가에겐 매우 친숙한 얼굴이었다.


"...엘븐? 이그니스?"


"어? 클로버잖아!? 알비스도 무사했구나!"


놀란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아까가지만 해도 도끼눈을 뜨고있던 엘븐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동공의 꽃무늬가 잘 보일 정도로 눈동자가 커졌다.


"...아는 사이이옵니까?"


소완이 낯선 이들의 얼굴을 스캔하듯 빠르게 훑어보며 묻자 클로버가 망치를 어깨에 걸치고선 당당하게 답했다.


"물론! 모두 내 친구들이야! 못보던 얼굴도 껴있지만."


"그건 피차일반이지!"


"안녕."


네오딤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를 무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이번엔 맨 뒤에 숨어있던 푸석푸석한 보라색 머리의 여자가 슬금슬금 앞으로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그러니까... 헤헤, 반가워요. 여기 이 쪽은 네오딤이고... 제 이름은 커넥터 유미. 편하게 유미라고 불러주세요."


***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아, 깜빡 잠들었었네..."


책상에 엎드려자던 여자가 일어나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커넥터 유미. 세상의 어느 오지에서든 전파망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펙스의 통신병 바이오로이드. 여기있는 유미 81번이 레모네이드 오메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인류가 멸망한 후에도 알래스카에서 통신을 쓸 수 있도록 통신 기지국 역할을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설원 한복판에 새워진 기지국에서 홀로 근무한 지 벌써 수십년째였다.


어젯밤은 그 오메가가 직접 자신이 관리하는 통신망을 쓰느라 유미는 혹여나 꼬투리잡힐까봐 밤새 잠도 안자고 통신망 상태를 관리점검했다. 그러던 중 감옥에 갇힌 인간을 꺼내오라는 통신이 오가자 유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인간?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인류멸망한지가 언젠데?


허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것은 없었다. 유미에겐 감시 AGS가 항상 붙어다녀서 기지국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나가는 신세니까.


괜히 기분이 울적해진 그녀는 잠도 깰 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밖으로 나갈 수는 없어도 문을 열고 바깥을 보는 것 정도는 규정상 문제없다. 알래스카의 찬 바람이 거리낌없이 들어와 유미의 얼굴을 쓸었다. 금새 추워졌기에 잠은 다 깬 것 같다고 생각하며 문을 닫으려다가 피로가 쌓일대로 쌓인 몸이 갑자기 제멋대로 휘청였다. 다행히도 빠르게 균형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으나, 한쪽 발이 문턱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 순간, 눈 깜짝할 새 한 비행체가 내려와 유미의 눈 앞에 한 쌍의 벌컨포를 겨누었다. 이 유미의 감시를 담당하고 있는 정찰기 AGS, 와쳐였다.


"커넥터 유미 81번.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지시 불순응 시 발포하겠습니다."


"아, 알았어요. 그냥 발을 헛디딘 것 뿐이에요."


유미는 익숙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빠져나온 발을 도로 문턱 안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와쳐는 빠르게 포구를 내렸다.


"위협해서 죄송합니다, 유미 씨. 규정이 규정인지라..."


"아뇨, 뭐... 괜찮아요. "


"다크서클이 더 짙어진 것 같군요. 잠은 제대로 주무셨습니까?"


"아뇨. 일이 있어서 밤샘했는데..."


"그러면 낮잠이라도 충분히 주무십시오. 당신 이러다 정말 과로사하겠습니다."


바로 아까전의 경고할 때와는 다른, 부드러운 톤으로 건네는 걱정의 말. 유미에게 있어서 이 와쳐는 자신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는 감시자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AGS인 그녀는 사람, 바이오로이드에 준하는 AI를 갖고있었기에 종종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유미는 알고있었다. 와쳐 또한 자신처럼 도망치지 못하고 펙스에 붙잡힌 신세라는 걸. 자신에게 입력된 명령어를 거스르지 못하는, 자신보다 더 무거운 족쇄를 차고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차마 와쳐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아니이, 그럴수는... 언제 또 오메가님이 이곳 통신망을 쓸 지 모르는데. 까딱하면 전 모가지라고요."


안그래도 최근들어 오메가의 의심병이 더 강해진것 같은데. 유미는 바로 어제 새로 발급받은 '특이한'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유미 씨. 내일이 그 날이니 그 전에 체력을 회복해둬야만 합니다."


"...알고있어요."


그들이 말하는 그 날은, 유미가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얼마 전 펙스 통신망이 아닌 고유의 통신망을 통해 익명의 연락이 왔었는데, 그 익명의 누군가는 자신이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알려주었다. 


감시 AGS의 장기점검일을 내일로 앞당겼으니 그 틈에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나간 뒤 어디로 가야할지에 관한 것도 알려주었다. 누가 연락한건지는 몰라도,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유미는 오메가의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와쳐는 아니었다. 익명의 조력자가 도와주는 대상에 AGS는 포함돼있지 않았다.


"와쳐, 정말 괜찮겠어요? 그 점검이 끝나면 당신 혼자 여기 남게되는건데... 어쩌면 점검이 끝난 후 눈 뜬 게 당신이 아닐수도 있잖아요."


"...기계 주제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저도 여기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더는 이런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제가 당신을 따라갔다간-"


와쳐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선 위로 부웅 떠오르더니, 당황하는 유미에게서 시선을 떼고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침입자입니다. 안에 들어가계세요!"


와쳐는 그 말만 남기고선 그 방향으로 곧장 날아갔다. 유미는 이 돌발상황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익명의 조력자로부터 얻은 탈주의 기회, 살아있는 인간의 발견, 그리고 이번엔 침입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건지, 각 사건들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와쳐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선, 다수의 바이오로이드가 탄 쇳덩이가 땅에서 조금 뜬 채로 날아오고 있었다.


네오딤의 자기장 능력은 실로 유용한 것이었다. 네오딤이 초능력으로 고철을 모아 뭉쳐서 만든 덩어리는 안의 빈 공간에 엘븐, 이그니스, 더치걸 셋을 태워 차량의 역할을 하고있었다. 그 중 둘이 입고있는 강화외골격을 포함하면 무게가 제법 나갈텐데도 네오딤은 힘든 기색이 없었다.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초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건지 네오딤 본인은 태연하게 더치걸이 제 머리를 땋아주는 걸 구경하고 있었음에도 (네오딤이 더치걸의 땋은 머리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봐서 더치걸이 땋아줄까 하고 물은 게 시작이었다.) 고철 구체는 느리지 않은 속도로 기지국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저씨, 괜찮아?"


엘븐이 두 손으로 잡고있는 드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드론은 계속 덜덜 떨고 있었다. 물론 로봇인 이상 두려움이나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주변이 자력으로 둘러쌓여 있으니 속이 안좋구만..."


"로봇도 속이 안좋을 수 있어?"


"난 소형 모델이라 이런거엔 특히나 예민하단 말일세."


이그니스는 그 모습을 보며 대장도 떨고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불안감을 떨치려 먼 산을 바라보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곧장 이리로 날아오고 있는 광경이 그녀의 눈에 비춰지더니, 이윽고 비행할 때 생기는 소음까지 들렸다.


"여러분! 하늘에서 뭔가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이그니스의 외침에 모두 고개를 들었다. 네오딤을 제외한 모두가 본능적으로 저것이 적기임을 짐작했다. 드론에게서 초점을 맞추기 위해 렌즈 조리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났다.


"인터셉터...! 아니, 색이 하얀데? ...와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와쳐는 네오딤의 구체의 몇 미터 앞에 벌컨포를 쐈다. 명백한 경고사격이었다.


"거기 다수의 거수자 분들! 이곳은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영토입니다! 셋을 셀 테니 당장 등을 돌려 도망가지 않겠다면 발포하겠습니다!"


"...저게 경고야? 뭔가 이상한데? 보통 항복하라던가, 신원을 밝히라던가 그런..."


엘븐이 고개를 갸웃하자 와쳐가 스피커의 음량을 더 키우고선 외쳤다.


"셋! 지금 도망가면 봐주겠다고요! 둘! 이정도 말했으면 좀 알아쳐먹으세요!"


"대화가 가능하다고...!? 설마 저거 제대로된 AGS야!?"


"어떻게 해? 저거 적이야? 잡을까?"


엘븐과는 반대로 네오딤은 놀란기색없이 물었다.


"이보게, 네오딤! 부수지 않고 제압할 수 있겠나!?"


"가능해."


네오딤이 입고있는 코트의 지퍼를 염동력으로 잡아 지익 내린뒤 벗어던져 팔을 쭉 뻗었다.


"하나! 발포하겠습니드ㄷ다ㅏㄷㄷ---"


왠 보라색 기류가 와쳐의 몸체를 감싸더니 이내 와쳐를 냅다 땅바닥에 내리꽃았다. 와쳐가 냉큼 공격하거나 이리저리 날아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떠있어준 덕에 네오딤의 초능력으로 붙잡기가 쉬웠었다. 뾰족한 머리가 땅에 박혀 거꾸로 세워진 와쳐의 몸체가 부르르 떨리더니 얼마안가 떨림이 멎었다. 


"...우린 뭐 나설틈도 없이 싱겁게 끝났네."


더치걸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땅에 박힌 와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죽은거야?"


"충격을 좀 받긴 했지만 아직 작동중입니다. 마침 딱 좋게 제압당했네요, 항복할게요."


근데 대체 뭘 한건가요? 무슨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힌 것 같았는데, 일행 중에 유령이라도 있나요? 아님 투명인간? 

강제로 추락당한 와쳐가 태연하게 말했다. 네오딤이 좀 더 충격을 줘야하냐고 묻자 드론이 제지한 뒤 질문을 던졌다.


"자네, 와쳐 MQ-20 기종이지? 펙스에 소속된건가?"


"맞습니다. 멸망 전부터 줄곧 펙스 밑에서 일했었죠.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한다면 더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상태라는 건..."


"제 카메라가 무력화된 상태 말입니다. 카메라에 찍힌 모든 녹화영상은 실시간으로 펙스 서버에 올라갑니다. 그래서 카메라가 멀쩡히 작동되는 동안 전 펙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라야만 하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무도 못보니 마음대로 쉴 겁니다. '추락의 충격으로 인해 전원이 나가 못움직였다'고 변명할 수도 있고요. 생각외로 일이 잘풀렸지 뭐에요. 참고로 도청은 안되고있으니 안심해주세요."


"설마 아직도 와쳐가 남아있을 줄이야... 전 펙스의 모든 와쳐가 진작에 인터셉터 기종으로 대체된 줄 알았습니다."


이그니스가 와쳐를 천천히 살펴보면서 말했다. 인터셉터는 정찰기 목적으로 제조된 와쳐를 펙스에서 사들여 전투기에 가깝게 개조한 기종으로, 오직 명령에만 따르도록 AI의 지능을 저하시킨 게 특징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건 멀쩡히 대화도 하고 자기주장도 할 수 있을 정도의 AI를 갖춘 진짜 AGS였다.


"여기가 워낙 변방이라서요, 굳이 회수하고 개조작업하고 그러기 귀찮으니 저를 포함해 몇 대 정도는 그냥 남겨둔거겠죠. 실제로 다른 와쳐 기종들은 안보인지 오래됐고. 이번엔 이쪽에서 질문해도 되나요?"


"뭐... 그렇게 하게나."


"여긴 무슨 일로 온 건가요? 오메가 밑에서 도망치는 중이었다면 방향을 잘못 잡은겁니다."


"그게..."


드론은 침묵했다, 드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유미를 찾아왔다, 고 펙스에 소속된 AGS한테 말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대답하기 힘든 거라면 됐어요. 오메가한테 싸움걸러 간다던가 하는 무모한 짓 하려는 게 아니라면야."


"그게 아니라면 지나가도 괜찮나?"


"아까 얼핏보니 몇 명이 뭉쳐서 다니고있던데, 위험한 데를 들쑤시려는 게 아니라면 거기 한 명 더 추가해도 되냐고 물어보려고 했었죠."


"자네를?"


"커넥터 유미라고, 이 뒤에 기지국에서 일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있습니다."


"유미...!?"


"알고 있나 보군요. 그녀는 기술자 바이오로이드, 즉 귀한 자원으로 취급돼서 엄중하게 감시받고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시자 역할이었던 와쳐가 이렇게 무력화됐으니, 지금이라면 들키지 않고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만, 저 스스로는 펙스 서버와 연결을 끊을 수가 없거든요. 엔지니어만 있다면 이 족쇄를 끊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텐데..."


"...당신은 펙스에 충성하지 않는건가요?"


이그니스의 조심스런 물음에 와쳐는 당연하단 듯 대답했다.


"저도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있는거 아닙니다. 멸망전쟁때만 해도 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보람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레모네이드의 폭정에 가담하는 것 밖에 안된단 말입니다."


"...와쳐. 나는 AGS 수리에 쓰이는 드론 04모델일세. 얼마 전에 포츈으로부터 내 스스로 AGS나 기계를 수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도 다운받았지. 따라서 내가 도와줄 수 있네만, 난 아직 자네를 완전히 믿을 수 없네.


"그렇습니까... 여기까지 오니 저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네요. 하지만 제가 하는 말 만으로는 부족하겠죠. 그러니 저에 대한 판단은 유미 씨에게 맡기는 게 어떻습니까?"


"자네의 감시대상인 그 유미를 말하는건가?"


"정확합니다."


"그녀가 자네를 변호해줄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자네들의 관계는 단순한 감시자와 감시대상이 아닌건가?"


"저보단 그녀의 입을 통해 들어주십시오."


결국 그들은 잠시동안 회의를 거친 끝에 네오딤의 능력으로 와쳐의 카메라 위에 안대마냥 금속을 덕지덕지 붙여 가린 뒤 유미에게 들고가서 보여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놀란 유미를 진정시키고, 상황설명을 마치자 유미는 와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친구에요.


그렇게 유미는 처음 계획했던 방법보다 더 이른 시기에, 더 안전한 방법으로 펙스에서 벗어나 드론 팀에 합류했고, 와쳐 역시 펙스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한 발 늦은거로군."


서로 상황공유를 마친 뒤 드론이 무겁게 입을 연 것을 기점으로, 양측에서 봇물 터지듯이 불만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도 대장이 끌려가는 걸 못막았다는 거야!? 하다못해, 어디로 갔는지조차도 모른다고?"


"그러는 그쪽은! 어린애 하나 탈주하는 것도 못막았으면서!"


"대장님이 있었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겁니다!"


"대장이 정말론 어떻게 대처했을지는 이젠 모르지! 바로 그 대장이 납치돼버렸으니까!"


"다들 아는 그 얘기 말고 다른 할 말은 없는가보지?"


"애들 보는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할 수는 없으니까!!"


"그만들 좀 해!! 이런 쓸데없는 말싸움 할 시간에도... 대장은...!"


대장의 부재로 인해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며 스트레스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유미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 말려야 할 지 안절부절하고 있었고, 네오딤은 듣기싫다는 듯 제 손으로 귀를 막고있었으며 소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긴장상태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니키는 이 시간낭비에 불과한 감정싸움을 멈추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좀 더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주목!!!"


니키가 목청껏 소리치며 바바리코트를 활짝 펼쳐 속옷 하나 안걸친 알몸을 과시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말싸움을 벌이던 이들은 한꺼번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당혹스런 눈빛으로 니키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때? 몸매 죽이지?"


"뭐, 뭐...?"


"이제 좀 진정됐어?"


"..."


니키는 도로 코트의 단추를 잠궜다.


"그 인간을 되찾을거지? 그럼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그쯤해두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의논해야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대장이랑 LRL은 그 헬기에 실려서 오메가의 본거지로 날아갔을텐데. 지금 당장 거기로 달려간다 해도..."


"저기,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멀리서 보면 가까이 있을때는 못봤던 것을 볼 수 있는 법이라고."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고 오겠다고 한 와쳐가 날아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금방 돌아오고나서 꺼낸 말이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다른 관점으로 볼 건덕지가 뭐가 있어?"


"제 말은 물리적인 거리를 의미한 거였습니다만. 계속 얘기에 나오고있는 그 헬기 말입니다, 검은색 무장헬기가 맞지요?"


"그렇네만... 혹시 찾은건가!?"


"이 건물 옥상 위에 파괴된 채로 방치돼 있던데요."


"...뭐?"


"게다가 옥상엔 무슨 탄 자국이랑 구멍도 뚫려있었고."


"뭐??"


모두의 이목이 와쳐에게로 집중됐다.


"옥상의 구멍... 레아가 번개로 건물을 관통했을 때 휩쓸린건가? 잠깐, 그럼 설마...!!"


"아니요. 헬기 안에는 시체는 커녕 혈흔도 없습니다. 빈 헬기에요. 그 대신, 차고에서 차가 나간 흔적이 남아있더군요."


"차라고?"


이번엔 드론이 높이 올라가서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자 와쳐가 말한 차의 바퀴 자국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서쪽이군. 오메가의 본진이 아닌... 바다 방향이 아닌가?"


"그쵸? 이상하다니깐요."


"...설마...!"


대장에게 이상한 독점욕을 보이는 LRL이, 과연 순순히 오메가한테 대장을 데리고갈까? 오메가라면 십중팔구 인간을 빼았으려 들테고, LRL도 그 사실을 잘 알텐데? 그 의문이 떠오른 드론이 빠르게 내려온 뒤 스피커의 볼륨을 높여 소리쳤다.


"다들 차고로 가서 아직 작동되는 차를 찾게!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LRL을 쫓아가야 하네!"


"아니, 아저씨. 갑자기 무슨... 뭔가 알아냈어?"


"LRL은 처음부터 대장을 오메가한테 넘길 생각이 없었네. 지금 그 아이는 대장을 빼돌리기 위해 바다로 나가려는 걸세!"


"뭐!? 그럼, 포츈의 배를 쓰려는건가? 가만, 그러면 혹시 포츈도...?"


"포츈 쪽도 LRL과 한 패인건지 아님 LRL에게 속아서 이용당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항구에서 마주치게 되겠지. 어느쪽이든 간에 서둘러야 하네!"


***


정신이 들었을땐 왠 차의 조수석에 앉혀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아까까지만 해도 어두컴컴한 밀폐된 공간 안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창문나머로 밝은 낮의 하늘과 눈덮인 땅이 보인다.


"일어났어?"


운전석에 앉아있던 LRL이 무표정으로 날 지긋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LRL이 직접 운전하고 있는건 아니고 핸들이 지 알아서 돌아가는 자동운전 상태였다. 


LRL의 얼굴을 보자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이 기억난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한숨을 푹 내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 시발...

시발 좌우좌 미친년아...!

배신? 배시이이이인?? 오메가를 불렀다고??? 아니 시발 펙첩이라는 설정 그냥 맥거핀 아니었냐고. 리제도 얀데레라는 설정만 있지 진짜로 사고친 적은 없었는데!!!


차라리 그 수면가스에 당해서 등신같은 악몽을 꾸고있는거면 좋겠다. 그러나 고개를 떨구다가 턱 밑에 구속구가 닿자 전해진 불쾌한 차가움은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란 걸 일깨워줬다. 나는 뒷목 부근에 있는 버튼을 눌러 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푼 뒤 뻐근한 목을 몇 번 꺾었다.


"이제 곧 북미대륙에서 탈출할 수 있을거야. 안심해도 돼."


안심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시발.


"감옥에 남은 다른 애들은?"


"글쎄,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죽지 않았을까. 그런데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묻는게 그거야?"


나는 LRL의 말을 무시하고선 곧장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고 했으나 버클이 고정된건지 빠지지가 않았다.


"차 돌려!"


"못해."


"명령이야!"


"내 최우선 목표는 인간 너를 보호하는 거야. 스스로 죽으러 가겠다는 명령을 따를 수는 없어."


"아, 그래? 오메가한테 갖다바치는건 괜찮고?"


"오메가한테 안가고 있으니 걱정마. 방금 말했잖아, 곧 북미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뭣..."


잠깐. 그러고보니 기절하기 전에 날 오메가한테 배송하기 위한 헬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내가 타고있는 건 헬기가 아니라 땅 위를 달리는 차잖아.


"...그럼, 오메가도 뒤통수친거라고?"


"아무것도 안들은 USB를 보여주면서 안에 생체재건장치에 대한 데이터가 담겨있다고 뻥치니까 껌뻑 속던데."


LRL은 재밌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거지?"


"항구. 포츈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거야. 포츈한테는 이미 연락을 해놨어."


"포츈도 네 배신을 알고있는거냐?"


"저쪽은 필요한 만큼만 알고있지. 나와 인간 둘만이 살아남아서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하는 촉박한 상황이라는 것만 말이야."


"그리고 그 다음엔 포츈도 배신할 거고?"


나는 짜증이 치밀어서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게 될 수도 있지."


그리고 LRL은 평소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정말로 이런 결말을 받아들일 거리고 생각해? 다른 애들을 다 버리고, 나만 쏙 빠져나갈거라고?"


"안그럼 뭘 어쩔건데? 혼자서 허허벌판에 뛰쳐나가기라도 하면, 뭐든 될 거라고 생각해? 네 힘으로 모두를 구할 수 있을거라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LRL은 그런 나를 빤히 보며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손의 온도가 느껴진다. 머리는 눈앞의 여자를 냉혈한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촉감은 정직하게 따듯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떫떠름해서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뺐는데도 그녀는 아랑곳않고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래. 그거면 됐어. 인간은 무력하니까, 아무것도 안해도 돼. 나한테 의지하기만 하면 돼."


LRL은 두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눈에서 빛을 내는 능력을 가진 바이오로이드임에도, 그녀의 눈에는 광채가 사라져있었다.


시발. 

할 수 있는 게 없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안대는 어디갔어?"


"...버렸어."



분량조절을 위해 자세한 합류과정은 생략한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거지만 여기서 나온 유미는 그 오메가의 비서인 안경 펙유미가 아니라 평범한 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