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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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세계에 왔을때, 나도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설마 했던 게임속의 등장인물. 내가 그 당사자가 되었다는 실감. 그 누가 살면서 그런걸 예상할까.


"처음엔 저도 전혀 눈치 못챘어요. 그도 그럴게, 눈뜨니까 왠 폐허에 덩그러니 누워있더라구요."


처음엔 다른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자신을 세뇌하듯이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밖을 나갔을때 보인것은... 타이틀 화면에서 질리게 본 폐허였다.


"난리도 아니었어요~ 가진거 하나없는데 눈떠보니 다른 세상... 그것도 내가 즐겨하던 게임속 세상에 전이되어 버린거니까.

그야 처음엔 당연히 믿기지가 않아서 미친듯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나 이외의 사람을 찾아보긴 했는데... 뭐, 결과는 이 모양이고."


멸망한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 느낀 소름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진다. 멸망후의 거리가 남긴 망가진 유산의 흔적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낀 위화감은 내 의사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난 내가 그토록 좋아해온 게임속에 있다는 것을.


...아니다, 이미 옛날에 짐작은 했다. 그냥 애써서 외면했을 뿐이지.


"참... 죽고 싶더라구요.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일이 벌어진걸까, 차라리 옆에 누가 좀 있어줬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용케도 안미치고 살아남았네. 킥킥..."


왜 많고 많은 장소중에서 하필이면 이런 아무도 없는 황량한 폐허에 방치되어 버린걸까.

...굳이 이렇게 혼자 남겨둘 필요는 없었을텐데.


"그 뒤로는 그냥 죽기싫어서 이것저것 뒤지면서 연명해왔어요. 지하 시설이나, 경찰서, 관공서같은... 그나마 사람의 관리가 잘 되어있는 곳들은 보존식이나 생필품이 남아있긴 하더라구요. 하하하..."


무언가에 홀린것 마냥 지하 시설을 뒤적거리고, 참치캔이나 통조림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그렇게 허공에다 자잘한 감정들을 쏟아내며 혼자 거리를 방황하며 살았다. 차라리, 옆에 누가 좀 있어줬더라면 그나마 나았을까.


"거리에 철충들의 잔해가 널려있더라구요, 게임에서 본 것들이 실제 내 눈앞에 덩그러니 널려있다는게... 그때 처음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니까."


거리에 널부러진 철충들의 잔해와 펍헤드와 램파트 였던 고철덩어리들이 녹이 슬어 이끼가 맺혀있는 모습을 보았을때,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난, 정말로 여기에 온거라고. 정말로 이 세계관에 동화되어 "등장인물"이 되어버렸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용케도 미치지 않고 돌아다녔다는게 신기할 지경이네요. 킥킥..."


...그 때부터, 게임 속 세상에 떨어졌다는 것을 자각하셨다는거죠? "라스트 오리진"...이라는 게임 속 세상에.



"......."



식어버린 주먹밥을 대충 씹어삼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엔젤 씨가 이미 어떤 바이오로이드인지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



"엔젤 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것도."


...네.



"........"



엔젤이 건네주었던 차를 한모금 들이키고서 목을 축인뒤, 줄곧 숨겨왔던 것들을 무덤덤하게 털어놓았다.



"이미, 당신들이랑 시간을 잔뜩 보냈으니까요.

...일단은, 저도 '사령관'이었으니까."


.......



"뭐... 말이 사령관이지, 현실은 그냥 게임이나 붙잡고 자동기능 돌려놓은게 전부지만."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플레이 해온 게임속 장면들이 마치 오래된 추억마냥 은은하게 떠오른다.



"처음 폐허에서 콘스탄챠랑 그리폰, 그리고 보리를 만났던 프롤로그부터, 마리와의 만남, 시끌벅적한 요리대회, 트리아이나와의 모험, .....테마파크에 관한 것들도."


.......



"리앤과 왓슨, 그리고 셜록에 대한 이야기, 초코여왕의 이야기, 마키마의 낙원, 히루메의 침입, 요정마을, 스카이 나이츠의 공연, 장화가 이곳에 합류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기억의 방주에서의 일들까지...

그리고 물론, 당신에 대한것도 알고 있어요. 성역에서 있었던... 씁쓸한 일들도."



.....?!



"그 외에도, 당신들이 겪었던 수많은 모험들, 그리고 어떤 적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지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이미 진작에, 다 클리어 했으니까."


......네.



"........"



조용히 대답하는 엔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심정으로 물었다.



".......안 놀라세요?"


네? 놀라다뇨?



"......"



그저 순수하게 되묻는 엔젤의 표정에 살짝 당황스러웠는지 말문이 잠시 막히고 말았다.



"아니... 그 뭐냐... 엔젤 씨 입장에선 이거 엄청 충격적인..... 그런거 아니에요? 그런데 표정보니까 뭐랄까... 너무 무덤덤 하시니까..."



자신들이 살아온 세계는 그저 한낱 게임을 토대로 짜여진 가상의 각본. 바이오로이드도, 인간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가 고통받는 세상. 그것이 그저 일개 게임사가 끄적인 게임의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저 게임의 재미를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각본이라는 운명 위에서 고통스럽게 바스러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 무엇하나 남지 않은것이 이들의 세상.

이러한 진실을 들려주고 있음에도 정작 그 당사자는 너무나도 평온해보였다.


...이 세상이 과거에 겪었던 수많은 괴로움 전부, 그저 쓰여진 이야기에 불과했다. 라는 거죠.



"......."


인간, 바이오로이드... 그 모두가 고통속에서 살아와야 했던 이유는 그저, 이야기가 그렇게 되도록 쓰여져 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오르카 호의 모두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그런 스토리라서 정해져 있으니까. 라는 거군요.



"......네. 맞아요."


그리고 그 게임 덕분에, 이미 저희에 대한것들을 알고 계셨다... 라는 것이, 라붕씨가 말하고자 하는 거죠?

라붕씨는, 2023년... 이 곳과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그것이 라붕씨.



"......."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한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그것에 대해 묻는다.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히루메 양, 인가요?



"...네. 맞아요."


.......



"엔젤 씨가 전부 지켜본 그대로에요. 어차피 그 때도 이미 다 보고 계셨죠? 그 애가... 저한테 간식을 선물해준 날도."


.....네.



"엔젤 씨가 짐작하신대로, 제가 이 세계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었어요. 뭐....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의 히루메가 아닌 다른 히루메지만."


.......



"제가 히루메를 사랑했다는 거, 다른 분들도 이미 알고 계신가요? 아니면...."


.......

라붕씨가 처음 증세가 악화되셨던 날, 간절하게 찾으셨던 분들이 있었죠.



"......."


브라우니 양, 이프리트 양.


....히루메 양...



".....제가 그 때 그 애까지 찾았었나요. 그건... 지금 알았네요."


........



"그럼, 몇몇 눈치 빠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을 지도 모르갰네요. 그게 누군지는.... 이제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네. 하하하...."



맥빠진 웃음소리를 내고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밤하늘로 시선의 방향을 옮겼다.

만약, 내가 정말로 라오 세계관에 떨어진 거라면, 어쩌면... 그 애도 같이 온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혹시나... 그 애도 나랑 같이 온건 아닐까, 그런 막연한 기대감으로 목적지 없이 떠돌던 날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게 의미없는 생각이라는걸 깨닫는데는 얼마 안걸렸지만."



식어버린 찻잔에 비춘 달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고보니, 그 스킨에서도 달밤이 메인이었던가.



"그 애를 제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반지도 선물하고, 이쁜 옷도 준비해줬어요. '밖'에서 내가 해줄수 있는거라곤 그게 전부니까."



살면서 처음으로, 게임이라는 것에 돈을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히루메의 새로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위해서 불러주는 노래가 너무나도 듣고싶었으니까.



"물론, 다른 애들하고도 서약을 한건 맞지만, 그래도 제일 좋아했던건 히루메였어요. 애초부터, 이 게임을 시작한 계기가 그 애 였으니까."


.......

...혹시, 라붕씨가 사랑했던 히루메 양은... 이 오르카의...



"아아... 그건 걱정안하셔도 괜찮아요. 이 쪽의 히루메 이야기가 아니니까. 지금 말하는건 나... 우리쪽 애기 말하는거에요. 키킥..."


.......



"...음...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네요. 여기가 정말로 내가 알던 그 세계가 맞는건지.

그저 지극히 비슷한 또 다른 평행세계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정말로 내가 플레이 했던 게임속에 그대로 와버린 것일수도 있고... 그것 만큼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건 없네요."



챈문학은 공식이 아니다.

정사와는 하등 관계없으며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원작과 이어질 일 따위는 절대로 없다.

후회물이든, 타락물이든, NTR문학이든... 두 번째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두 번째로 발견된 인간이라고 해서, 억지에 가까운 이상한 논리로 의심부터 하고 위협한다는 것은, 아무리 과거에 인류의 역사가 어두웠다 한들 그런 명분도 개연성도 없는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르카의 대원들과 사령관의 성격과 가치관과 상극을 달리하는 심각한 설정붕괴니까.


그냥, 억지에 가까울지라도 그렇게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전개가 읽는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하기에 더욱 많은 추천과 댓글이 달린다. 그 덕에 그것이 보편적인 틀로서 자리 잡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 또한 "첫 번째" 외에는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억까와 부조리로 가득찬 이기적인 세상일 거라고 단정짓고 살아왔다.

...내가 여기에 있는 시점에서, 공식과는 거리가 먼 세상이니까.



"뭐... 사실, 그런건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설령 여기있는 히루메가 제가 사랑했던 당사자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런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걸 아니까."



처음 여기서 그 애를 만났을때, 나도 모르게 그 애의 시선을 피하고서 자꾸만 딴청피우며 외면하던 본인의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저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기 싫었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였다.



"행복하게... 웃으면서 지내고 있으니까요. 비록, 그 옆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서 있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그로 인해서 히루메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전 그걸로 만족해요. 나한테는 그 애를 행복하게 해줄 만큼의 능력은 없으니까."



애초에 난 주인공이 아니다. 출중한 재능이나 능력도 없기에 주연조차 될 수 없는 엑스트라 같은 존재이니, 그 애 옆을 지켜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 입장에서도, 차라리 그게낫다.



"여기 나가려고 했던 이유. 당신도 알다시피 여기 있는 모두를 향한 의심이 이유이긴 했지만, 사실은 내가 느끼고 있는 열등감을 인정하기 싫어서 외면했던것 뿐이에요. 그 사람 옆에 있으면... 모든게 비교되니까."


라붕씨.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중에 그의 말을 가로채었다.


아무도 그런 생각따윈 하지않아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당신을 비하하거나 혹은 다른 이와 당신을 비교해서 깎아내리는 짓 따위는...



"알고 있어요."


...



"내가 제일 잘 알아요. 모두가 그런 짓 따위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냥... 나 혼자서 질투하고 미워한것 뿐이니까."


.......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당신한테는 매우 감사하고 있어요. 드디어 다 털어놔서... 후련해졌어요."



...설마 이런걸 털어놓는 날이 오네. 그것도 제일 무서워 했던 사람에게.


.......



엔젤은 각오를 다지고서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라붕씨가 말해준 진실들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모두가... 사실은 그저 만들어진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니까.



"......."


하지만 라붕씨. 이 장면... 당신과 제가 이렇게 만나서 단 둘이 이야기 하는 이 순간도... 게임속에 존재 했나요?



"...아니. 두 번째인 나는 공식이 아니니까."


그럼... 당신이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모든 것들.

 이 곳 오르카에서 당신과 맺어진 수 많은 인연들도, 라붕씨가 플레이 해왔던 게임 속에서 본 적 있나요?



"...아니."


맞아요. 모든게 전부 처음이겠죠.

왜냐하면, 당신의 "지금"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니까.



"......."


설령 저희의 원본되는 존재가 게임이었다 할지라도,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쉬는 것은 저희의 의지에요. 당신과 만나서 기뻐하고, 함께 웃고, 때로는 화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 모든 것들은, 짜여진 게임 속 각본같은게 아닌 저희의 의지에요.

그리고 나의 앞에 있는 라붕씨도... 게임 같은게 아니야.



"...응."


저는,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이곳에 오는것, 우리가 당신을 만나는 것.



"운명...인가요."


네. 서로 다른 세상을 넘어서 이렇게 맺어지는 것.

...당신이, 우리와 이렇게 만나는 것도.



"......."


이 넓은 세상에서, 어긋나지 않고 저희는 만났어요. 그건 역시, 저희와 라붕씨가 만나기위한 운명의 인도라고 저는 생각해요. 게임속 세상이라던가, 다른 비슷한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같은건... 지금은 더 이상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 기쁘답니다. 위험한 바깥에서, 무사히 저희와 만나준 당신 덕분에. 그러니까...



그의 차가운 손등에 살포시 얹어놓은 손바닥에, 미세한 털림과 조금은 따뜻해진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넣어 더욱 세게 쥐었다.


당신도, 행복하게 웃어주세요. 과거의 당신이 품고있었던 마음의 미련이든, 혹은 다른 고민이든... 거리낌없이 함께 나눠주세요. 저희는 항상 옆에 있을테니까.



"........고마워. 엔젤."


...소중한 동료인걸요.


저희 사이에 그런건 필요없어요.



























(1시간 전)








아오~! 이 새끼는 또 어딜 싸돌아 다니는거야!



천아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스틸라인 애들이랑 헤어진지 얼마 안된걸로 아는데... 그럼 분명 이 근처일테고.



어차피 오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 있을 터.


...설마, 인적 드문곳에서 쓰러지거나 한건... 아니겠지?



아니. 오르카에 cctv에 사각 따위는 없다. 만에 하나 그런 사고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르카가 눈치 못챌리가 없으니까.


나 참... 도대체 어디에...


음?


















라붕씨가 좋아할만한 간식들로 싹쓸이하죠!


이제 라붕씨와도 곧 심야의 예배당에서 야자타임을 가질 수 있겠네요!


너무 들떠서 총동구매 하지는 마라. 교단의 천사로서 근검절약을 잊지 말도록.


아이 참! 사라카엘도 이럴때는 그냥 좀 넘어가자구요!


그나저나, 엔젤 양과 라붕씨가 갑판으로 향한지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군요. 부디, 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는데.


여기서부터는 지품천사를 믿도록 해라. 우리의 차례는 다음으로 미뤄도 상관없으니까.


라미엘?! 양파맛 감자칩! 그거 바구니에 싹다 담아줘요! 아아..! 그리고 그 옆의 초코칩이랑 쌀과자도요!


컵라면부터 쓸어담구요.


자자자잠깐..! 컵라면에 예산을 이렇게나 몰빵하면 어떡해욧! 사야하는 과자가 얼마나 많은데!


2+1은 못참죠.


내 감자칩은...?!!


거기 둘! 도대체 얼마를 쓰는거냐! 내 아껴써야 한다고 그리 일럿거늘!


...에휴....
















...갑판? 엔젤이랑 둘이서?



도무지 짐작이 가지않는 조합과 장소였지만, 어찌되었든간에 알고 싶었던 것을 알아냈다.


새끼... 누나를 뺑뺑이 돌려놓고 다른 애랑 놀고있다..? 몰래 다가가서 뒤통수 후려버려야지!



장난기 가득 머금은 미소를 억누른 채, 천아는 두 사람이 있을 갑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라스트 오리진이라는 게임에선 이야기가 얼마나 진행되었나요? 혹시 이 이후의 이야기도 알고 계신가요?



"음... 정확히는 10지역... 아니, 바르그의 이야기까지는 진행됐어. 그 이후의 시나리오는 출시되지 않아서 그 다음 이야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네."


바르그 양이라면, 레모네이드 델타와의 싸움이 있었던 시기네요.



"응. 그 이후는... 아마 스토리 작가만이 알고 있겠지. 메인 시나리오 출시 주기가 워낙 긴 중소게임이라, 스토리 진행이 엄청 느린 게임이었거든. 하하..."


.......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엔젤은 손가락을 조물딱거리며 힘겹게 질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라붕씨? 그럼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요.



"아, 응. 말해."


.......


저희 혹시, 악역이었나요?



"....어?"


아니... 그게, 라붕씨의 말대로라면, 라붕씨는 그 라스트 오리진 이라는 게임을 통해 저희를 이미 알고 계셨던 거잖아요?



".........."


그 말은, 저희를 알고 계셨으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셨다... 라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혹시나 묻는거에요. 저희 오르카는, 혹시 사악한 악역이었나 싶어서...



".......아......"



그러고보니, 아직 그 이야기에 대해서 제대로 말을 안해줬었지.



"음...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한다..."



그러니까, 우선 공식 설정부터 되짚으면 되려나.



"우선, 게임속에서는 살아남은 인간은 오직 사령관, 단 한명뿐이야. 나와 같은... 두번째 인간 같은건 없어. 이름 그대로, '라스트 오리진'의 이야기니까."


.......



"뭐... 철의 왕자라는 규격 외의 캐릭터도 있긴한데, 걘 이제는 인간'이었던' 철충 이라고 봐야하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원래라면 살아남은 인간은 오직 사령관 단 하나. 절대로 예외따윈 없어."



모든 오해의 시발점에 대해서 이해시켜 주기전에, 어째서 게임의 이름이 라스트오리진 인지...

 우선은 그것을 먼저 이해시켜 줘야겠지.


......


틀렸어요.



"응?"



의미를 알 수 없는 부정에 잠시 말문이 막힌채 엔젤을 쳐다보았다.


단 하나가 아니잖아요.



틀린 답을 지적하는 그녀는 매우 상냥하게 웃으며 옳은 답을 알려주었다.


제 옆에 또 한명, 계시잖아요. 이렇게 생생하게.



"....?!!"



예상치 못한 정정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게졌지만 그것을 애써 숨기고서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렇긴 하네. 지금도 이렇게 너희 덕분에 건강하게 잘 살아있으니까. 하하하!"


.......



"크흠..!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왜 너희를 그렇게 무서워 했느냐, 이게 궁금했던거지?"


...네. 그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엄중한 사안이니까요.



진지한 얼굴로 각오를 다진 엔젤은 이어지는 설명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게임의 설정, 그러니까... 정확히는 과거 너희 인류 문명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있지?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1%채 되지 않는 상류층의 횡포와 욕망때문에 모두가 고통받아왔다는 걸."


...네. 잘 알고있어요.



"라스트 오리진 이라는 게임 속에서는, 인간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악마와 다름없는 군상으로 여겨지고, 연출되어왔어.

물론 수십억에 달하는 모든 인류가 악으로만 묘사되어 왔던건 아니야. 자신의 메이드를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라던가, 셜록 키무라 처럼 바이오로이드인 즐거운 토모를 구해주고 돌봐주면서 소중한 동료로서 끝까지 함께했던 경우도 있고, 므네모시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했던 그녀의 아버지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극소수의 상냥함만으로는 이 세상의 악랄함을 걷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모두가 죽어나갈 수 밖에는 없었고, 실제로 멸망했으니까.



"말 그대로, 대부분의 인간들은 짐승만도 못한 악마이자 악으로 묘사되었거든. 그건... 지금 너희들이 존재하는 세상도 별반 차이가 없었을거라고 생각해."


.......



"그런 암울한 설정이니까, 이 게임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모여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멸망 전 인류를 좆ㄱ.... 다시는 존재해선 안될 악마들로 취급하는게 일반적인 통념이었거든."


...네.



"그런... 세상이니까, 당연히 오르카나 사령관 또한 마찬가지로 구 인류에 대한 적개심이나 경계심이 상당할 것, 이라는 인식이 당연할 거라고 판단하고... 그런 성향의 2차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다시피 했지.

두 번째 인간이 발견되자마자 사령관에게는 비밀로 한채 몰래 '처리'해 버리거나, 딱히 증거나 명분은 없지만 사령관의 왕좌가 흔들리는 것을 경계한 바이오로이드들이 두 번째 인간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무지성으로 쫓아내거나 숙청하는... 그런 이야기들."


.......


그럼, 라붕씨는 그 "2차 창작물"에 나오는 저희들의 모습이 두려워서 저희를 의심했다, 라는 거죠?

실제로 저희도 라붕씨에게 그렇게 행동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셨으니까.




"....응."




........




아주 나쁜 사람들이네요!



"...응?"



갑자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엔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다시피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커뮤니티? 라는 곳에서 화자되는 오르카 분들이요. 그런 이상한 이유로 타인을 멋대로 위협하고 괴롭힌다니! 아주 나쁜 사람들이군요!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분노하는 엔젤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기... 엔젤? 갑자기 왜 화를 내는...."


그럼 당연히 화가 나지,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요!



"......."


그러니까, 그 사람들 논리는 멸망 전의 모든 인간은 이유불문하고 무조건 죽여야만 한다. 이런 뜻이잖아요!



"...어... 요약하자면 그렇겠지?"


심지어, 증거도 이유도 없이 그저 나중에 발견된 인간님 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이유로 집단 따돌림으로 고립시키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이거나 쫓아낸다니, 악마도 이런 악마가 따로 없어요!

설령... 그 사람이 정말로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게 그 사람들이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이유나 자격따윈 되지도 못한다구요. 게다가 추방이라니... 이건 사실상 본인들이 칼만 안들었을 뿐이지, 명백한 살인이잖아요!



"......."


도대체 본인들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걸 판단하는 거죠? 무슨 권리로 타인을 그렇게 멋대로 평가하고 단정지을 수 있는건데요! 처음보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작부터 낙인을 찍고 괴롭히다니! 절대로 용서못해요!



"저기... 엔젤..? 너무 그렇게 감정이입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건 공식이 아닌 그냥 2차 창작ㅁ...."


아뇨. 절대 안 참아요.



"으, 응...?"


그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라붕씨가 여기서 그렇게나 힘들어 하신 거잖아요.



"......."


즉, 책임은 그 나쁜 사람들한테 있는 거라구요! 이런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죠!



".......하하하..."



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공식도, 설정도 아닌데.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말해주는구나."



이 아이도 그것이 의미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이라는 것을 모르는게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위해서 이렇게나 진심으로 화를 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이죠! 만에하나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오르카에 있다면, 제가 혼쭐을 내줄거에요! 그리고 구원자님께서도 그런 나쁜 짓을 절대 용서 안하실 거라구요!



"그래그래~ 엔젤 덕분에 나도 정말 든든하다!"



밝게 웃으며 엔젤의 머리를 쓰다듬는 라붕이의 손길에 깜짝 놀란 엔젤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라붕이를 쏘아붙였다.


아이 참! 장난처럼 흘러넘기지 말구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붕씨는 그러면 안돼죠!



"키키킥... 알겠다니까~ 니 맘 다 알지~"


.......


헤헤...



처음으로 보여주는 진심어린 즐거운 미소를 드디어 볼 수 있게 된 엔젤은 마찬가지로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라붕씨.



"응."



환한 달빛을 담은 새하얀 날개를 파닥이며, 엔젤은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앞으로도, 여기서 저희랑 쭈욱 사실거죠?



"......."


저희랑 즐겁게, 다 같이 살아주실거죠? 혼자가 아니라, 모두랑 같이.



만면의 미소는 거두지 않은 채, 상냥하게 웃으며 답을 원하는 엔젤을 향해 나지막히 대답해 주었다.



"...응. 여기 있을거야."


.......



"죽을 때까지 평생, 너희와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엔젤에게 다가가 한걸음 간격으로 마주보며 진심으로 화답해 주었다.



"함께 하자.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


...네..!



"......."



새하얀 달빛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는 엔젤의 모습은, 태양보다도 환하고, 빛보다도 눈부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꽁꽁 숨겨온 것들마저 처음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밤, 비로소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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