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쮸후후?"


어디선가 울린 웃음소리에 앗-하고 벌떡 일어나 보니, 언제나 익숙한 방 안이었다.


"왜 그래?"


리리스는 옆을 돌아보았다. 작게 소리친 바람에 그도 뒤따라 깨어난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죄송해요, 주인님. 리리스가 악몽을 꿨나봐요."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렇게 대답하는데, 남자는 피식 웃기만 했다.


"아침부터 주인님이야? 새벽까지 노예플 실컷 했으면서...."


"...?"


리리스가 의아해서 눈을 깜빡였지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시 이불을 끌어당겼다.


"난 좀더 잘게... 당신 때문에 기 빨렸거든."


그의 하품에 머쓱해진 리리스는 가만히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노예플이라고? 그러고보니 지난 밤에 과격한 BDSM 성관계를 하며 잠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을 혀로 핥은 그녀도 다시 잠드려고 했지만, 한번 놀라며 깨서 그런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동안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남자의 방을 벗어났다.


함장실인 그의 방에서 나오면, 금속제 통로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의 오르카호와 별반 다를바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 그녀와 가족들은 거대 잠수항모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오,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순찰중인 경찰로봇 램파트가 다가왔다.


"네, 아침부터 열심이시네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램파트는 멈추는 법 없이 가던 방향 그대로 걸어나갔다.


무심코 경찰로봇을 흘끗 쳐다본 리리스는 순간 멈칫거렸다.


아가씨라고? 저 로봇은 보통 리리스 양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아니... 잘못 생각했나.


어딘가 위화감을 가지고 돌아다녀 보니, 폴른 등의 보병 로봇과도 마주쳤다.


리리스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도 어딘가 이상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분명히 폴른과 스파르탄 시리즈는 보병부대 스틸라인의 중추를 맡고 있었다.


현재 세계는 철충이라는 금속 생명체에 의해 멸망했고, 리리스와 그 자매들을 포함해서 지구상의 마지막 남성만이 유일한 인간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과거 인류가 남긴 유산인 오르카 호와 AGS 로봇 부대를 가지고 철충과 기나긴 전쟁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르카호에 AGS들만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뭔가 빠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살짝 당황스러워 하며 걷고 있으니,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녀의 자매인 페로와 포이였다.


리리스는 혈육인 동생들을 보자마자 말 못할 안심이 들었다.


"으응. ...벌써 훈련 뛰고 왔나 보네."


둘 다 수건을 두른 운동복 차림에, 가볍게 땀냄새가 나는걸 보니 아침 운동을 마치고 오는 길인 듯했다. 특징적인 고양이 귀와 꼬리 역시 살랑거리는 모습이 평소와 같이 귀여웠다.


멸망 전의 인류는 유전자 개조와 신체 강화가 성행했다. 그녀의 동생들 역시 유전자 개조를 통해 동물의 유전자가 섞여 있었고, 고양이와 같은 귀와 꼬리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언니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네?"


"으응. 좀."


포이가 히죽거렸다.


"오빠랑 또 밤샜구나?"


"하하... 응?"


리리스는 문득 멈칫거렸다.


"왜 그래?"


"포이 너, 주인님께 오빠가 뭐니.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포이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언니도 참. 아침부터 또 노예플이야?"


"...뭐?"


그이와 같은 반응이었다.


페로가 거들었다.


"저흰 메이드지만 SM플레이어가 아니니까요."


"...."


워낙 당당하게 말하는 데에 리리스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생각해보면 페로 말이 맞았다. 동생들이 메이드로 일하고 있긴 하나 사적으로는 그이와 시누이 겸 아내인 사이가 아닌가.


동생들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무언가 찜찜했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리리스가 골똘이 생각하고 있으려니 포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우린 씻으러 갈게. 언니도 아침부터 너무 힘쓰지마~ 히히."


"그, 그래... 포이 너도 샤워 깨끗이 하고."


"당연하쥐."


내가 왜 포이 말을 이상하게 여긴 걸까. 리리스는 의혹을 뒤로한채 가만히 동생들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AGS 로봇들은 마주친 리리스에게 인사해왔다.


"왜 이러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의 일상. 하지만 위화감은 사라지긴커녕 커지기만 했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던 리리스의 눈에 문득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님을 깨워드려야 할 때였다. 아차 싶어서 허겁지겁 그의 방으로 향하려는 찰나,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쮸후후."


아침의 그것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서 얼른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인적인 감각을 지닌 그녀에게서 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착각이었을까.


"리리스, 무슨 일 있어?"


"예?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이날 근무 중에 리리스는 지적을 받았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뭐 걱정이라도 있는 눈치 같은데. 자꾸 딴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고."


남자가 의문 반 걱정 반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스는 그런 배려가 고마웠지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녜요. 컨디션이 좀 안좋나 봐요."


"몸이 안 좋으면 가서 쉬어도 돼."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몇 안되는 마지막 인간이자, 그의 경호원 겸 메이드장 겸 비서로서 할일은 해야 했다. 언제나 일손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업무를 보는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 실례하겠네.


마침 로봇 지휘관들이 직접 보고를 하러 사령실에 들어왔으므로, 둘은 대화를 멈추었다.


스틸라인, 워리어즈 오브 발할라, 아포칼립스 브링어를 지휘하는 AGS들이 남자의 앞에 섰다. 오르카 호 부대의 주력 부대의 지휘관들이자 간부급 지휘관들로서 남자의 믿음직한 조력자들이었다.


그런데 지휘관 AGS들을 보자 리리스는 또다시 기묘한 위화감이 일어 머리가 아파왔다.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는지, 남자는 회의중임에도 말했다.


"...리리스. 역시 몸이 아픈 거 같은데, 가서 쉬는 게 좋겠어."


- 그래. 인간은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


로봇 지휘관 알바트로스도 거들었다.


리리스는 난처한 눈으로 지휘관들과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지휘관 씨들이... 바이오로이드가...."


"응? 바이오 뭐?"


남자가 되물었다.


"네?"


"지금 바이오로이드란 말 하지 않았어?"


"옛? 아니, 그게...."


어째서인지 리리스는 바이오로이드가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실존하는 단어가 맞기라도 한 건지, 어째서 그런 단어가 불쑥 나온 것인지.


"...정말 괜찮은 거 아닌 것 같은데. 동생들하고 교대해도 되니까, 오늘은 가서 쉬어."


"그치만."


"사령관으로서 명령이야. 우리한텐 쉬는 것도 임무라고."


리리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위화감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무의식중에 말했던 바이오로이드라는 단어 역시 동생인 하치코와 펜리르가 보던 공상과학 소설이나 만화책에서나 불쑥 튀어나온 단어일 뿐이었다.


괜한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는 한동안 기묘한 감각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자꾸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는지 남자와 자매들도 이상을 물어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고 나니 리리스 역시 모든 건 착각이고, 어딘가 자신의 몸이 안 좋았는지 스스로도 의심이 갔다.


의사인 AGS 알프레드도, 장기간의 잠수함 생활에 그녀의 정신에 악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를 밝혔다.


해서, 하루는 리리스가 일을 쉬고 방안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으려니, 동생인 스노우 페더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크, 큰일났어요. 언니!"


언제나 온화한 동생이, 그것도 평상복 차림인데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리리스는 벌떡 일어나며 옷을 챙겨입었다.


"무슨 일이니."


"그게, 형부가...!"


"뭐, 그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왜 그래?"


리리스는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페더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그게... 빨리 와보셔야 해요, 언니가 필요해요! 설명은 드릴 테니까, 어서요. 시간이 없어요."


무슨 일인지 캐묻고 싶었지만, 워낙 페더가 다급하게 재촉하자 리리스도 엉겹결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저런 적은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페더가 서둘러 안내한 곳은 오르카호의 식당 앞이었다. 리리스는 걱정스럽게 재차 물었다.


"그이가 뭐 잘못 드시기라도 한 거니?"


"일단... 한번 보셔야 해요."


등을 떠미는 바람에 리리스는 얼른 식당의 도어를 열고 들어섰다.


순간, 폭죽음이 들렸다.


"어서오세욧!"


리리스는 눈을 끔벅거리며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동생들과 남자가, 상에 요리를 가득 차려두고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리리스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이 우리 기념일이잖아. 헤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페더도 웃으며 리리스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동생들 역시 히죽거리며 리리스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곧, 상황을 눈치챈 리리스는 가볍게 남자의 팔을 두드렸다.


"하여튼. 사람 놀라게 하는데 뭐 있어요, 증말... 혹시나 해서 걱정했구만."


"미안, 미안. 그래도 깜짝 파티인게 재밌잖아?"


"몰라욧. 그보다, 무슨 기념일이기라도 한 거예요? 결혼기념일은 좀 멀었는데...."


리리스가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응. 우리가 오르카호에 처음 들어온 기념일이야. ...라는 건 명분이고, 당신이 요즘 컨디션도 안 좋고 기운이 없어 보여서 말이지. 기분 좀 내라는 의미에서."


남자의 말에 리리스는 웃기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럼 우리 언니의 건강을 위해 건배!"


"고기 잘먹겠습니다-."


"아, 그거 형부 몫이니까 놔둬요. 펜리르."


- 파티인가? 우리도 전기 맛 블라인드 테스트 좀 해봐야겠는걸?


- 역시 지열 발전소의 배터리가....


몇몇 로봇들까지 가세해서 식당이 금방 떠들썩해졌다.


"오빠! 고기파이 드세요."


"우리 셰프가 이번에 만든 로스트 치킨이 끝내주더라?"


"오오, 여기 담아."


곧 먹성 좋게 요리에 정신이 팔린 남자와 자매들을, 리리스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은 그녀 자신은 입맛이 그리 없긴 했지만 남자가 먹는 것만 봐도 군침이 돌고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언니. 오늘 와인 좀 먹어도 돼?"


"안돼요."


"칫."


말은 그렇게 해도 술을 먹지 않을 분위기가 아닌지라 금방 모두들 술을 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파티는 술까지 잔뜩 먹은 남자와 자매들을 침실로 던져 놓고, AGS들과 뒷정리를 도맡는 걸로 끝났다.


그래도 리리스는 좋았다. 그가 즐거워 보인 것만으로도 족했다.


언제나 그의 행복이 그녀의 행복이었고, 그의 행복을 지키고 싶었다. 처음 그와 맺어질 때부터 다짐한 소망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약지에 낀 반지를 쓰다듬었다. 그녀 최고의 보물, 그와의 증표.


이게 다 꿈이라도 좋으니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기지개와 함께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복도를 홀로 걸어가는 그때였다.


- 쮸-.


리리스는 기척을 느끼는 순간 멈추어 섰다.


"나와요."


착각이 아니다. 나직이 말하는 그녀에겐 이번에야말로 확신이 있었다.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왜 자꾸 숨어서...."


거기까지 말한 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스토... 커?"


나직이 중얼거린,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는 이 세계에서 쓰지 않을 단어를 시작으로, 머리 속에 흐릿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혀 갔다.


기이한 수면 증후군으로 멸망한 세계, 인간을 모시는 바이오로이드들, 마지막 인간 A, 그리고 그의 경호대장이자 메이드이자... 몸과 마음을 바친 바이오로이드 블랙 리리스.


먹먹한 기억과 위화감이 날이 개듯 깨끗해지고,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중얼거린 그녀의 시선에, 하얀 덩어리 같은 그것이 들어왔다.


젤리처럼 부드러워 뵈는 하얀 몸뚱아리, 그녀와 같은 금색 눈에 코미컬하게 흉내낸 이목구비.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게 자신의 복장을 닮은 듯한 외형.


리리스는 그것을 처음 보았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은 기분이었다.


"역시, 이게 다 당신 짓이었군요?"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몰랐다. 허나 리리스에겐 묘한 직감이 들고 있었다.


"쮸후후후."


그것은, 몸통에서 뻗어나온 작고 하얀 팔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왜 이런 짓을 했어요...?"


그것의 웃음소리는 공기 중에서가 아니라, 뇌리에 직접 들리는 듯했다.


리리스는 그것의 흉계(?)는 몰랐지만, 악의가 없다는 느낌만은 깨닫고 있었다.


- 행복해?


"...."


- 여기는 경쟁자인 다른 여자들도 없고, 진짜 인간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어. 아주 쉽게.


리리스의 마음 속에 그것의 말이 이어졌다.


- 원한다면 여기가 현실이 될 수도 있고.


"...그럼, 주인님이나 내 동생들은?"


- 그들도 여기서 살면 돼.


리리스가 흠칫거렸다. 그것의 말대로, 이 상황은 분명 그녀 스스로가 원하는 바였다.


- 마음만 먹으면 영원히 그와 단둘인 걸. 당신이 바라는 대로.


그것의 말은, 사실이라면 대단히 끌리는 말이었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갖고 싶은 그이를, 자매들과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설령 꿈이라고 해도.


하지만.


잠깐 우두커니 서 있던 리리스는, 곧 얼굴을 들어 입을 열었다.


"생각할 것도 없어. 다른 애들이 없는 곳에서 혼자 정실부인이 되어봐야 누가 알아준다고?"


- ....


한껏 콧대를 높인 리리스는 곧 쓴웃음을 지었다.


"라는 건 핑계고. 사실은... 나도 주인님과 동생들하고만 살고 싶어. 분명히 그런 생각도 많이 했고. 다른 애들이 싫고 미울 때도 많았지. 아니... 실은 지금도 가끔은."


리리스는 계속 말했다. 그것이 들어줄지는 몰랐다. 그것에게보단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욕심이잖아. 주인님, 아니 그 사람은 모두를 돕고 싶어하고, 모두를 좋아하시니까. 좀 분하지만... 나 홀로 그를 가질 순 없어."


그것의 금색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훌륭한 분이야. 세상을 위해 필요한 분이고. 난 그를 위해선 뭐든지 하기로 마음먹었어."


- ....


"그러니까, 마음이 아파도... 그를 독점할 순 없어도... 다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가 내 모든 걸 받아들여 주신 것처럼."


리리스의 말은 갈수록 살짝 떨렸지만, 곧 목을 가다듬었다.


"영웅을 사랑한단 건 그런거잖아? 영웅의 아내가 된다는 건 힘든 일이라고."


가슴을 펴고 짐짓 으스대듯이 말하자, 그것이 대답해 왔다.


- 떠나길 바래? 그와 함께 원래대로?


"...아쉽지만. 나 블랙 리리스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리리스는 거드름을 피우듯이 말했다.


목이 잠긴 느낌은 곧 내려보냈다. 그분에게 걸맞는 당당한 여자가 되기 위해.


대답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작은 고사리손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곧, 그것의 기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도 취했나.


이윽고 방 안에 들어온 리리스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야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수마가 덮쳐왔다.


기분 좋은 잠이 밀려들었다.


상쾌한 느낌의 기묘한 잠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남자가 곁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늦잠꾸러기 아가씨."


"주인... 님."


"어여 일어나. 나도 지각하겠어."


리리스는 가만히 일어나서 쳐다보더니, 말없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속옷 차림인 것도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주 안아주었다.


"왜 그래. 뭐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그냥, 리리스가 여기 있다고 알려드리려고요." 리리스는 약간 물기 띤 목소리를 내었다.


"어, 음. 그래. 나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살짝 당황해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리리스의 등을 쓸어 주는 그였다.


한동안 부둥켜안고 있다가,


"이제 진정됐어?"


"네...."


리리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포옹을 풀었다.


메이드의 솜씨를 살린 그녀가 입혀주는 옷을 입던 중,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나 이상한 꿈 꿨다?"


"꿈이요?"


"응. 애들이 전부 사라지고 로봇 친구들이랑, 너랑 동생들만 남아 있는 꿈이었어. 도중에 술마시다가 깨긴 했는데... 되게 이상한 꿈이야. 그치?"


"...."


옷 매무새를 다듬어주던 리리스의 손이 멈추었다.


"왜 그래?"


잠시 굳은 얼굴로 있던 리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쓴웃음지어 보였다.


역시 그냥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함장실을 나서려는 그를 그녀가 불러세웠다.


"저, 주인님."


"응?"


"사랑해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남자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랑해."


리리스는 먼저 방을 나서는 남자를 흐뭇한 눈으로 보내주었다.


사실은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는 훌륭한 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문득, 어디선가 그것의 웃음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래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이야기는 충분히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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