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상황이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하고 물으면 있다! 하고 대답하는 게 반복되는 느낌이다. 조금 전에 좌우좌한테 끌려갈 때는 최소한 내 안전은 보장돼있었던 상황이어있지만 이젠 아니다. 적어도 오메가 앞에 도착한 뒤라면 모를까, 이 헬기에 타고있는 동안은 죽이지 않겠지.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도착하기 전에 뭐든 수를 써야만 한다.


생각해보자. 오메가가 만든 세뇌 귀걸이는 한쪽만 벗겨도 세뇌를 풀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선 트리아이나 귀걸이를 벗겨보려 했지만 그녀의 귀에 손을 가져다대려하자 곧바로 내 손을 낚아챘다. 자동으로 귀걸이를 보호하도록 명령을 받은건가. 아니, 세뇌된 상태니 명령어가 입력돼있다고 해야하나. 손목에 가해지는 압박감에 나는 팔에 힘을 주어 확 뿌리쳤다. 트리아이나는 말없이 손을 내리고 날 멀뚱히 쳐다봤다. 


그럼 포츈은? 양 손 다 헬기 조종하고 있으니 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다가가려 하니 트리아이나가 내 팔을 붙잡았다. 도로 포츈에게서 거리를 벌리자 순순히 놓아줬다.


시험삼아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트리아이나는 날 한시라도 눈에서 떼지 않겠다는 듯 계속 나한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데, 내가 문이나 포츈한테 가까이 가려고 하면 막았다.


문 열고 뛰어내리는 것도 안되고, 얘들한테 반항하지 않는 선에서 헬기 안에서 움직이는 것만이 허용된다는 뜻이군. 섣불리 덤볐다간 반격맞고 기절할테지.


"포츈.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거지?"


포츈은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헬기 조종에만 집중하고있었다.


"대답해. 명령이야."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까 트리아이나가 중얼거린거 보면 말을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닐텐데. 세뇌란게 인간 명령권도 덮어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거였나. 저 세뇌만 풀 수 있다면 다시 내 편으로 만들고 항구로 돌아갈 수 있는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트리아이나, 손 줘봐."


당연히도 반응이 없길래 내가 손을 뻗어서 트리아이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트리아이나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귀가 아닌 다른 데에 접촉하는 건 상관없는건가.


방해하지 못하게 뭔가로 손을 묶어두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적당한 게 안보인다. 하긴, 그런 수갑이나 밧줄이 있었으면 나부터 묶어놨겠지. 혹시 내 목에 채워져있는 구속구를 수갑 대용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잠깐만? 세뇌 귀걸이 이거, 무슨 원리로 바이오로이드를 세뇌하는 거지? 두뇌에 직접 손대지 않고, 대상의 머리에 가까이 위치해있기만 해도 발동된다. 사거리가 한없이 짧긴 해도 원거리에서 무선으로 세뇌시키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오메가의 케스토스 히마스도 원거리에서 대상을 해킹하고 하는 물건이지. 허면 어떻게? 세뇌전파 같은걸 쏴서 뇌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지금 내가 차고있는 구속구는 주변에 방해전파를 뿜어서 내 뇌파를 가린다. 그렇다면, 이 구속구의 방해전파로 세뇌전파를 상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목에 차는 물건이라 귀걸이보다는 머리에서 멀긴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귀에 손을 댄다'는 트리거를 발동시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도는 해봐야겠지. 뒷목의 버튼을 꾹 누르자 구속구가 풀렸다. 트리아이나는 여전히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있는지 이해하기는 하는건지 모르겠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트리아이나에게 확 달려들어 구속구를 철컹 채웠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트리아이나가 한 박자 늦게 자기 목에 채워진 구석구를 붙잡았다. 푸는 방법도 잊은건지 무작정 힘을 주어 당기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이어서 온 몸에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눈에 초점이 생겼다.


"...대장?"


트리아이나의 자의식이 돌아왔다.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구속구에서 손을 떼는 것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트리-"


"뭣? 뭐야!? 여긴 어디야? 대장이 왜 여기있어? 아니, 이건 왜 내 목에 채워져있어? 어떻게 된 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다가 갑자기 입을 벌린채로 말을 멈추더니 이마를 짚었다.


"...기억났어. 내가 끌고온 거였구나... 아, 아니 그게! 대장, 믿어줘!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진정해. 트리아이나. 네가 조종당했던 거 잘 아니까."


"어? 조종?"


"그 세뇌 귀걸이의 힘이지."


"...이 귀걸이...!"


얼굴을 와락 구긴 트리아이나가 냉큼 제 귀로 손를 뻗었으나 끝내 귀걸이에 닿지 못한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다는 판토마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떼, 뗄 수가 없어...! 몸이 멋대로, 거부하는 것 같아! 대장! 도와줘!"


그래서 내가 손을 뻗자 트리아이나의 손이 또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쳐다보자 트리아이나는 화들짝 놀라 내 손을 놓고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일부러 그런게 아냐! 진짜로! 손이 멋대로 움직였어!"


"...아직 세뇌 걸렸는데 안걸린 척 하는 건 아니지?"


"으에에엥! 난 억울해! 믿어줘 대장~!"


트리아이나가 냅다 무릎꿇고 내 다리를 덥썩 끌어앉았다. 막 울먹거리기 시작하길래 알았다고 한 뒤 떨어뜨렸다.


"...아무래도 세뇌 귀걸이의 효과를 완전히 해제할 수는 없는가보네. 트리아이나,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 그 귀걸이는 언제부터 끼고있었어?"


"그게... 어제부터야. 어제 대장이랑 애들이 떠나고나서 좀 있다가 오메가가 우리 배에 연락했어, 혹시 드론이 포함된 바이오로이드 무리가 타지 않았었냐고. 그래서 캡틴이 적당히 진실 섞어서 얘기했는데... 미리 얘기한대로, 알지? 그러니까 오메가가 알았다면서 전화 끊더니 얼마 후에 그년이 보낸 이 귀걸이가 우리 앞에 도착했지 뭐야."


"그래서 그걸 꼈다고?"


"이 귀걸이가 새 신분증이라면서 반드시 끼라는 메시지도 있었단 말이야. 아직 오메가 부하인 척 해야됐을 때이니 의심을 피하기위해서 꼈지. 설마 세뇌시키는 물건일 줄 누가 알았겠어?"


"신분증이라니... 그럼 끼자마자 세뇌된건가?"


"아닐걸...? 적어도 그 땐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아,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어. 뭐랄까, 무의식적으로 대장을 잡아다 오메가한테 바치려고 움직였던 것 같아. 헬기를 준비시킨 것도, 배에서 내려 항구에서 대장을 기다린 것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랬었어."


그리고 대장의 팔을 붙잡는 순간 의식이 뚝 끊겼지. 트리아이나가 말을 마쳤다.


추측해보건데, 아마도 오메가가 세뇌 귀걸이에 심어둔 명령어는 인간의 확보 및 배송. 평소에는 대상의 의식을 남겨둔 채 무의식적으로 세뇌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다가, 인간을 직접 붙잡게 되면 즉시 완전 세뇌 상태로 들어가서 인간을 끌고오도록 설정된 것 같다.


"캡틴..."


트리아이나가 복잡미묘한 얼굴로 헬기를 모는 포츈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지금 상태에선 내게서 시선을 뗄 수 있다는 거군. 한편 포츈은 여전히 이쪽엔 신경도 안쓰고 있다.


"대장, 왜 캡틴이 아니라 나한테 이걸 채운거야? 캡틴이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면 헬기 돌릴 수 있었잖아."


"내가 포츈한테 못다가도록 막은건 바로 너거든."


"아, 맞다. 그랬지... 그럼, 지금은 다가갈 수 있지?"


"구속구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


"어... 그럼... 이제 어쩌지?"


"생각해봐야지... 문 열고 뛰어내리는 건? 여기 낙하산 같은 건 없어?"


트리아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안돼. 낙하산이 없기도 하고, 애초에 헬기는 낮게 날아서 낙하산을 써도 안전하게 착지할 수가 없어. 그래서 헬기는 문제 생기면 비상탈출이 아닌 비상착륙을 하는거지... 캡틴한텐 미안하지만, 둘이서 캡틴을 때려눕히는 건 어때?"


"그럼 헬기 조종은 누가하지?"


"...끄응..."


머리를 잡고 고민하던 트리아이나가 창문에 얼굴을 갖다댔다.


"혹시 큰 호수나 강을 지나갈 때가 있지 않을까? 물에 떨어지면 죽지는 않겠...지? 수영 못해도 괜찮아, 내가 할 줄... 저게 뭐지?"


"뭐가?"


"누가 비행기에 타서 쫓아오는 거 같은데...? 대장? 저거 LRL 아냐?"


"뭐!?"


나는 곧장 창문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트리아이나의 말대로, LRL이 와쳐 위에 매달리듯이 탄 채로 쫓아오고 있었다. ...저건 무슨 조합이야?


***


"따라잡았습니다! 인간님도 보입니다! 다치진 않은 것 같네요. 이제 어떡하죠? 위협사격이라도 해볼까요?"


"걔들 상태를 봐선... 위협은 안먹힐걸..."


LRL은 상공의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끈임없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저 헬기를 멈출 수 있을지. 문을 부수고 인간을 뛰어내리게 해서 받아야 하나? 안에 타서 조종사를 해치우고 직접 착륙시켜야 하나? 테일로터만 파괴해버리면 비상착륙을 선택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게 인간을 구할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실패확률이 너무 높은 도박 뿐이었다.


그 때, 추적자를 눈치챈 포츈이 헬기의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올라간다면 맨몸으로 상공에 노출된 LRL에겐 버티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었다.


"가까이 붙여...!!"


LRL이 목소리를 쥐어짜듯이 소리쳤다. 한손에 소방도끼를 들고, 그녀가 타고있는 와쳐가 헬기에 근접하자 도끼날의 길고 가는 부분을 갈고리삼아 헬기의 다리에 걸었다. LRL의 의도를 파악한 와쳐는 곧장 날개의 프로펠러를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후진했다. 와쳐가 당긺으로서 헬기는 더 올라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정체되었다.


LRL이 자신의 몸 자체로 와쳐와 헬기를 고정시켰다. 헬기가 더 멀리 가지 못하게 막는다, 급한 마음에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움직인 결과였다. 낮은 기온과 희박한 공기만으로도 고통스러웠는데 이젠 어깨까지 빠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힘을 놓치 않았다. 


헬기 밑쪽에 위치한 카메라로 LRL의 방해를 확인한 포츈은 이번엔 헬기 밑에 달린 기관포를 돌려 LRL을 조준했다. 그러나 끝내 총구에서 불을 뿜는 일은 없었다. 


헬기 안에선, 대장이 양손으로 포츈의 오른팔을 붙잡아 막고있었다. LRL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 손은 팔을 억지로 당겨서 총의 조준이 틀어지게 만들고, 다른 한 손은 아예 포츈의 엄지를 붙잡아 기관포를 발사하는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게 하고있었다. 힘의 차이 때문에 그녀를 제압할 수는 없어도, 온 몸을 쓴다면 한쪽 팔의 움직임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포츈이 남은 왼손으로 대장을 떼어내려 하자 이번엔 트리아이나가 왼팔을 붙잡았다. 포츈의 백팩에 매달린 기계팔도 트리아이나가 붙잡아 움직임을 막았다.


"캡틴...! 정신차려!!"


"귀걸이, 저 귀걸이를... 망할, 손이 부족해!"


포춘은 입을 꾹 다물고 구속을 떨쳐내려 팔에 힘을 주고있을 뿐이었다. 포츈 앞에 있는 조종간의 화면엔 LRL과 와쳐가 온 힘을 다해 헬기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 교착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LRL의 손에서 도끼 자루가 미끄러져 빠져버렸다. 연결이 끊어지자 와쳐가 반동으로 확 멀어져버렸고, 동시에 균형을 잃은 LRL이 와쳐에서 떨어져 낙하했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헬기가 그녀의 눈에 비춰졌다. 드론이 다급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도 보였으나 속도로 보아 자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먼저일 것이 분명했다. 죽는다는 두려움에 앞서 분하다는 감정이 넘쳐흐르자 눈물이 나왔다. 실패했다, 라고 생각한 그 순간...


"괜찮나요?"


누군가가 자신을 사뿐히 받아주었다. 공중에 떠있는채로.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있는 그 여자의 얼굴은 어딘가 낯익었었다. 감옥의 감시화면에서 본 적이 있다. 펙스의 감옥에 갇혀있었다가 대장이 꺼내온 일행 중 한명, 오베로니아 레아,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LRL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다시한번 놀라게 되었다.


"네오딤, 잡을 수 있겠어!?"


"가능해. 아슬아슬하지만, 사거리 안이야."


분명히 떨어뜨려놨던 대장의 일행이 어느새 전부 와있었다. 더치걸의 급박한 물음에 네오딤은 태연히 대답하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다음 손가락을 오므리자 그 방향 끝에 있는 헬기가 보랏빛 기류에 휩싸여 멈췄다. 헬기는 프로펠러가 끼긱거리며 멈췄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정체된 상태였는데, 그것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네오딤이 손을 밑으로 내린 순간이었다.


"네, 네오딤! 속도 낮춰!!"


"아, 응."


곤두박질치던 헬기가 땅에서 1미터 가량 떨어진 허공에서 우뚝 멈추더니, 네오딤이 손에 힘을 풀자 쿵 떨어졌다. 네오딤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초능력으로 헬기의 프로펠러를 전부 뜯어내서 다시 날지 못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LRL을 양 손으로 조심스레 안은 레아와 와쳐, 드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유미 씨! 와주셨군요! 통신이 안돼서 얼마나- 지, 지금 뭐하는 거에요!!"


유미가 베로니카의 손에 의해 바닥에 눌려 제압된 모습을 보자 기겁한 와쳐가 소리쳤다. 소완이 앞으로 나왔다.


"모르면 가만히 계시지요. 이 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지라 이리 할 수 밖에 없었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완이 말을 아낀탓에 더치걸이 대신 설명을 보충했다.


"유미는 분명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어. 고의적으로 통신을 끊고 시치미 뗐다고. 소완이 눈치채자 난동 피우기 시작해서 이렇게 잡아둘 수 밖에 없었어. 그보다 대장은? 지금 저 헬기 안에 있는... 

...LRL..."


"여어."


더치걸의 시선이 곧장 레아의 품에서 내려온 LRL에게로 꽃혔다. LRL은 탈구된 왼쪽 어깨를 붙잡고 더치걸을 마주보았다.


"LRL...? 이 아이가요?"


눈 앞의 소녀가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란 걸 알게되자 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축 늘어뜨린 팔을 보아하니 척봐도 다친데다가 멀쩡한 척 꿋꿋이 서있어도 피로와 추위에 몸을 떨고있는 게 가까이 있었던 그녀의 눈에는 보였기에 더 손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대장은?"


"저 안에 있어. 무사해. 하지만 적도 있어."


"적...?"


LRL이 눈짓하자 더치걸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옮겨졌다. 세뇌된 유미를 붙잡고있을 몇 명만 남기고 다들 트럭에서 내려 헬기로 다가가자 대뜸 문이 드르륵 열렸다.


"대장...!"


그러나 안에서 나온 건 대장 혼자가 아니었다. 트리아이나가 대장의 목에 초크를 걸어 붙잡고 있었고, 포츈이 대장의 머리에 리벳건을 겨누고 있었다. 트리아이나까지 세뇌 상태로 돌아온 이유는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그녀가 뒤로 넘어졌을 때 목의 구속구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망할..."


대장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대장!?"


"대장님!!"


모두가 당황한 그 순간, 유미가 팔을 뻗어 외로운 십자가를 움켜진 뒤 크게 휘둘러서 자신을 누르고 있던 베로니카와 근처에 있던 소완을 쳐서 떨어뜨렸다. 니키가 한 발 늦게 달려들자 유미는 곧장 십자가를 과부화 방전시킨 뒤 니키를 향해 전격을 쐈다. 감전된 니키가 주춤한 사이, 유미는 다른 이들을 민첩한 몸놀림으로 지나쳐 포츈과 트리아이나 옆에 섰다. 셋 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포츈, 트리아이나... 유미...!! 지금 뭐 하는 거야!?"


"물러서. 안그러면 이 남자를 쏘겠다."


포츈이 무표정을 지은 채로 말했다. 역시 말할 수 있었잖냐, 대장이 중얼거였다.


"공갈은 집어쳐, 어차피 못쏘잖아? 날 산채로 오메가한테 배달해야 할 테니까!"


"죽지 않게 쏘겠다."


포츈이 총구 끝을 대장의 머리에서 몸통으로 내렸다. 지금의 포츈이라면 정말로 저지를 것 같았기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자 자기가 해결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네오딤이 먼저 움직였다. 네오딤의 손짓 한 번에 포츈의 손에 들려있던 리벳건이 초능력에 의해 콰직 찌그러졌다. 그러자 그것을 트리거삼아 트라아이나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대장의 목에 들어가는 압박이 숨도 못쉴 정도로 강해졌다. 그 자리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이 트리아이나를 막으러 달려들기 전에, 포츈과 유미가 다음 수를 생각하기도 전에, 어느 목소리가 그들을 불러세웠다.


"거기 아가씨들! 잠깐 언니 좀 볼까?"


니키가 코트를 확 펵치자 그 특제코트에 모인 전자기가 섬광과 함께 방출되었다. 바로 EMP였다. 그 직후 포츈과 트리아이나, 유미가 실이 끊긴 인형마냥 일제히 쓰러졌다. 트리아이나에게 붙들려있던 대장도 같이 넘어졌었지만 트리아이나가 기절한 덕에 바로 목에 걸린 팔을 치우고 일어설 수 있었다. 


"와우,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좋은데? 이 녀석들, 안쪽은 완전히 기계로 대체된건가? 뭐, 부숴보면 알겠지."


니키가 쓰러진 이들한테 성큼성큼 걸어가 머리를 짓밟으려 한쪽 발을 들어올리자 대장이 불러세웠다.


"쿨럭! 니키, 멈춰...!"


"아, 이제 다 괜찮아 인간님. 아니, 대장님인가? 누나가 이 녀석들이 다신 괴롭히지 못하게-"


"귀걸이를 벗겨!"


"...귀걸이?"


니키는 의아해했지만 대장이 워낙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기에 토달지 않았다. 발을 땅에 내린 뒤 쭈그려앉아 눈 뜬 채로 기절한 포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확실이 이상한 귀걸이가 걸려있군,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귀걸이를 쏙 벗겨내자...


"허억...! 헉! 허억... 콜록, 콜록..."


포츈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면서 급박하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포츈. 정신이 들어?"


"대... 대장...? 여긴..."


포츈이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앉는 동안 니키는 제지는 커녕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꿈뻑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오메가가 만든 귀걸이로 세뇌됐던 거야."


"...그래, 그랬지... 으으... 미안해, 누나가 몹쓸 짓을 해버렸네..."


"네 잘못이 아냐. 오메가 탓이지."


포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남은 귀걸이를 벗어던졌다. 트리아이나와 유미 역시 귀걸이를 벗기자 금새 정신을 차렸다.


"콜록, 케헥...! 아, 아파아아아아! 아야아아아아...!"


"유미? 왜그래?"


"아파! 엄청 아파요! 뒷통수가!!"


"...좀 전에 제압당할 때 맞은 통증이 이제서야 오나보군요."


"아니 잠깐, 인간님? 진짜로!? 아니, 그보다 여긴 또 어디에요!?"


"어, 그건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그런데 대장은 용케 이걸 알아냈네."


"전에 본 적 있거든. 저 귀걸이. ...오르카호에 있을 때 기록으로."


니키가 대장을 신기하단 듯이 바라보자 대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대장은 고개를 돌려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구하러 와줬구나. 고마워, 모두 다."


"그럼... 이제 다 끝난거지?"


더치걸이 인파를 비집고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그럴걸, 아마?"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더치걸이 울먹거리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대장은 잠시 당황했다가 금방 진정하고 그 작은 등을 토닥여주었다. 더치걸을 기점으로 바이오로이드 AGS 가리지않고 삼삼오오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 일련의 사건을 겪었음에도,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보고싶었어, 정말..."


"걱정했었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대장."


"음. 네가 대장이야? 안녕."


사방에서 따듯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더치걸의 어깨 너머로 한명씩 차례차례 눈을 마주치던 중 어느 한 명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쓸쓸이 제자리에 서있는 LRL과, 안절부절해하며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드론이. LRL은 슬픔을 넘어 처연함이 깃든 얼굴로 대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자신의 자리는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대장."


포츈의 부름에 대장이 LRL로부터 눈을 돌렸다.


"내가 좀 전에 세뇌됐을 때, 오메가한테 대장을 데리고가는 중이라고 알렸었거든? 근데 이제 헬기가 파괴되면서 신호가 끊겼을테니 십중팔구 오메가가 수색대를 보낼 거야. 그러니 빨리 돌아가야 하거든?"


"...알았어. 항구로 돌아가자! 남은 얘기는 배에 타고나서 하자고."


대장이 더치걸을 물린 뒤 서두르라고 훠이훠이 손짓하자 하나둘 차로 돌아갔다. 허나 대장 본인은 다른 이들을 뒤따라 차로 가는 대신 LRL에게로 걸어갔다.


사박거리는 발소리에 다시 고개를 든 LRL은 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LRL과 대장을 번갈아보던 드론은 대장이 입을 열기전에 선수를 쳤다.


"이, 이보게 대장! 내가 LRL을 변호하겠네!"


"변호...?"


"들어보게. 비록 LRL이 조금, 아니 많이, 사고를 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아무도 안죽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 있잖나, 그녀가 워낙 힘들게 살아오다보니-"


"웃기지 마!"


드론의 말을 끊은 건 알비스였다. 알비스는 보기드문 험악한 표정을 짓고선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게 관심받고 싶어서 그랬다 정도의 변명으로 용납될거라고 생각해? 대장님이 정말로 죽을 뻔 했는데! 너! 너 때문에!"


마지막까지 대장의 곁에 남았었으나, 끝내 눈을 벌겋게 뜨고 대장을 빼앗긴 쓰라린 기억을 품고있는 알비스였다. 알비스가 LRL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치고 있었음에도 LRL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건..."


"알비스, 잠깐만."


더치걸이 알비스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내렸다.


"여긴 대장한테 맡기자."


LRL의 처우를 대장의 의사에 맡기자는 말에, 알비스는 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비스와 더치걸, 그리고 드론은 LRL과 대장만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물러났다.


"좌우좌."


대장이 먼저 입을 열고,


"...응."


LRL이 답함으로서 둘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제 알래스카편 막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