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음집



63



닥터는 벌써 7잔째 커피를 비우며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었다.


FAN파를 원천차단 할 수있는 완전격리구역에 입원시킨다..? ...아냐. 인류 멸망전에도 그런 시도는 여럿 있었지만, 보다시피 전부 실패했잖아.



자신만의 공간인 연구동에서, 천재 소녀는 라붕이의 검진 소견 차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원천적인 수단이 가로막혔어. 지극히 당연한 수단을 쓰지 못한다면, 이제는 어떡해야...



닥터는 자신이 작성한 레포트가 띄워진 모니터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젠장... 벌써 중추신경의 태반이 FAN파장에 침식되고 있어. 아무리 생체 재건장치라 할지라도 뇌와 중추신경만큼은 새로 재건할 수 없는데..!



원래 자신이 계획해온 방안은 오리진더스트로 근골격계와 신경계를 새로이 재구성하여 배양한 뒤, 완전한 면역력을 갖춘 다음에 마찬가지로 백신과 안정제를 투입해가며 수개월간의 케어를 진행할 생각이었으나... 적합성 제로라는 최악의 변수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간좀 벌자고 더 센 약을 쓰기에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라붕이 오빠의 몸이 더는 못견뎌.

지금 쓰는 약들도 간 기능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한도 내에서 겨우 처방한거라 더 이상은 쓰기 힘들고.



차라리 기계화 시술이라는 극단적인 방안까지도 검토해보려 했으나, 이것은 오르카 내에서도 시도된 적 없는 방법이기에 검증자료가 적어 너무 위험하다.


차라리, 라붕이 오빠만을 위한 격리구역을 새로 제작해서 시범운영을...

에이잇..! 애초에 이미 말기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격리할 단계는 옛날에 지났잖아!!



아무리 닥터라도 설마 오리진 더스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하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닥터는 그런 자신의 안일함을 저주하며 이를 가는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해...



라붕이의 기초적인 신체검사를 진행할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

그러한 위화감이, 오리진 더스트라는 변수가 도입되자마자 보란듯이 튀어나와 결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지? 아무런 특이사항도 이슈도 없는 몸이야.



그의 인체 구조와 특징은 여타 다른 인간과 딱히 다른점은 없다. 오히려, 너무나도 흔하고 평범한 인간남성 그 자체.


그렇다면 적합도도 아무리 못해도 최소 중위 수준 정도는 나와야 정상일텐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과거의 사례가 기록된 데이터베이스까지 전부 끄집어내 조금이라도 라붕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한데 긁어모아 끝도 없이 대조 해보고 비교해 보았으나, 그와 일치하기는 커녕 비슷한 사례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 자체가, 라붕이 오빠가 처음이라는 얘기겠지. 그래서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거야.



과거에도 오리진 더스트라는 물질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례 자체는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는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사례는, 이미 대체방안이나 수단이 충분히 넘쳐난다.

오리진 더스트의 종류를 교체하든, 농도를 희석시키든, 기존의 조합을 변경하든... 이 외에도 시도해볼 수단은 많이 있다.


...그 많은 방법 전부, 둘째 오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것들도 결국은 오리진 더스트로부터 파생된 방법들이니까. 그걸 사용할 수 없는 시점에서, 의미 없는 이야기야.



키보드를 두들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서 회의시간에 사용했던 자료가 띄워진 메인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



아무리 흡사한 선례를 찾아 해결책을 모색해 보려고 해도,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결과는 나온 적이 없었다.


라붕이 오빠 혼자만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 마냥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다른 느낌이야...

도대체 이유가 뭐지..? 왜 라붕이 오빠만 이런 결과가...



여러 경우의 수를 도입해서 방법을 찾으려고 해도, 마치 모난 돌 마냥 어긋나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들을 대입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고 무덤덤하게 실패뿐인 선고만이 이어졌다.


마치, 혼자서만 이 세상의 당연한 "공식"에서 벗어난 듯한...


...라붕이 오빠....
















"닥터?"


...?!



닥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밥은 잘 챙겨먹고 있어? 요 근래에 연구동에서 나오는걸 못본것 같아서."



진심어린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닥터를 걱정하는 사령관은 닥터의 옆자리에 걸터앉으며 닥터가 바라보고 있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은 진전이 없구나."


...응. 미안해 오빠. 라붕이 오빠에게 적용할만한 수단을 최대한 찾아보고는 있지만, 기본적인 단계 자체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닥터 네가 사과하지 않아도 돼. 너가 그 누구보다 애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침울해진 소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은 사령관은 그를 구하기 위한 닥터의 노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위로의 한마디를 건넸다.


헤헤헤... 그래도 오빠한테 위로받으니까 한결 나아진것 같아. 고마워 오빠?



"...고맙긴."



상냥한 미소로 화답한 사령관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역시, 라붕씨에게는 기존의 오리진 더스트를 사용할 수 없는거지?"


응. 억지로라도 사용하는 극단적인 방법도 검토해 보긴했지만, 결과는... 이전에 말한대로야.



"......오리진 더스트라는 물질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이라고 했었지."


.......



"닥터."



그 어느때보다 진중한 얼굴로 사령관은 오르카 최고의 두뇌를 가진 소녀에게 질문했다.



"현재, 라붕씨는 이미 말기에 접어들었다고 했지."


.......



"내가 처음으로 김지석의 묘에서 신체 재건을 시작할때, 시설의 안내사항 중에서는 분명... 뇌와 중추신경은 재건을 할 수 없다고 했었어. 그렇지?"


...응. 맞아.



"......."


표본이 되는 유전자로 새로운 신체를 재건할 수 있는 범위에는, 뇌와 중추신경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 부분만큼은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럼... 따로 격리구역을 만드는건 어떨까? FAN파장으로부터 완전 격리된 공간을 아자즈와 포츈과 함께 협업해서 만든 뒤에 입실시키면..."


현재는 최근들어 말기에 접어든 상태니까. 이제와서 격리를 진행한다 할지라도 큰 의미는 갖지못해. 그리고 진작에 격리했다고 한들, 차이는 크게 없었을거야.

오빠도 알다시피, 라붕이 오빠는 우리와 만나기 전부터 이미 오래전부터 외부에서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으니까. 그 영향이 제일 컷다고 봐야겠지. 



"...그렇지."



만약, 조금만 더 일찍 그와 만날 수 있었더라면... 조금은 더 나은 상황이었을까.



"......."



이미 지나가 버린것은 보지않고 앞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사령관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상황이 악화되어갈수록 밀려오는 후회감은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오빠. 괜찮아?



"응? 뭐가?"


뭐긴... 오빠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요~! 라붕이 오빠 때문에 맘고생하는거 오르카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뭐.



"하하하... 역시 우리 닥터 눈은 못속인다니까."


함께 지낸 시간이 있잖아. 눈치 못채는게 이상하지.



"...응."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닥터는 사령관에게 조심스럽게 "그것"에 대한 것을 물었다.


오빠, 요즘 그 쪽은 상황이 어때? 진전은 좀 있었어?



"그 쪽? 갑자기 무슨... 아."



한 박자 늦게 질문을 이해한 사령관은 씁쓸한 표정으로 질문의 답을 건네주었다.



"...아직 찾은건 없어. 라붕씨랑 처음 만났던 지역 근방은 이미 수도 없이 뒤져봤지만, 큰 의미는 없더라고. 그래서 수색조가 탐색반경을 임의로 넓혀서 찾는 중이야."


.......



예상은 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답변을 들은 닥터는 커피잔 손잡이 끝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라붕이 오빠의 소중한 사람...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할텐데...



"........"


무사히 발견해서, 라붕이 오빠를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마련해 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래선 도저히...



현재 그의 소중한 사람을 비밀리에 수색하는 극비임무 사항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중 하나인 닥터는 메인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라붕이의 건강지표와 차트를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히루메 언니는 요즘 어때? 언니도 라붕이 오빠 많이 걱정하고 있을텐데.



"히루메도 마찬가지로 라붕씨 걱정을 많이 하고 있지. 이전에 유부초밥 포장해서 찾아가기도 하고, 히루메도 나름대로 자주 챙겨주고 있으니까."


히힛. 이 작전을 제일 강하게 밀어붙인것도 히루메 언니였으니까. 그만큼 히루메 언니도 라붕이 오빠를 많이 걱정하고 있는거야.



물론, 그 마음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나 히루메 또한 도저히 그를 못본체 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



"......."


오빠?



"내가, 잘 하고 있는걸까?"


.......



"만약, 이전에 로크가 지적한대로... 정말로 라붕씨의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고, 우린 라붕씨의 상처만 더 깊게 만들고 있는거라면... 난 라붕씨 앞에 제대로 설 수 있을까."


.......



"각오는 굳혔다고 늘 생각했어.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그 무엇하나 좋아지는 것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니까. 그래서인지 점점 무서워 지더라고."


오빠...



"그 사람의 의사는 전혀 고려도 하지 않은채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행동하는게... 과연 옳은 행동인가 하는 의구심이 사라지질 않아. 마음은 그 사람을 도저히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켠으로는 오히려 이런 행동이 그 라붕씨를..."


오빠.



평소와는 다른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닥터의 목소리가 말을 가로채었다.


지금, 오빠는 이 선택을 후회하고 있어?



"......."


지금 하는 이 행동들이, 틀렸을거라고 생각해?



"...아니."


만약,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온다면... 오빠는 다른 선택을 할거야?



".....아니, 절대로."


헤헷! 그렇지?



어느새인가 다시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온 닥터는 천연덕스럽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있잖아. 하루라도 빨리 라붕이 오빠가 건강해져서 활짝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


라붕이 오빠가, 하루라도 빨리 소중한 사람과 만나서 그 사람을 꽈악 껴안고서 행복해 했으면 좋겠어. 만약 라붕이 오빠가 우는 모습을 보일 때가 온다면, 행복에 겨워서 흘리는 눈물이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그걸 위해서라면, 설령 라붕이 오빠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미워하게 될지라도,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거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수색조 오빠들도, 히루메 언니도, 나도, 그리고 오빠도, 다 같은 심정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운을 내보자.



"...그래. 우리가 포기하면 그걸로 정말 끝이니까. 이제와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어."


헤헷! 역시 우리 오빠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미안.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런 모습 보이면 안되는건데."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는 법이야. 그리고 그걸 받쳐주는건 우리들이고.

그러니까, 너무 마음쓸것 없어.



"응... 정말 고마워 닥터."



밝게 미소짓는 사령관은 닥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그럼, 지금은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볼까? 뭐가 되었든간에 라붕씨 건강이 최우선이니까."


응. 우선은 라붕이 오빠부터 치료해야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 두사람은 다시 메인 모니터를 바라보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으으음... 휩노스 병의 면역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후유증없이 온전한 강화시술을 시도할 만한 방법이...



"......."



메인 모니터의 자료와 거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보던 사령관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닥터."


응?



"......."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닥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몸을 이용하는 방법은, 어떨까?"


오빠의... 몸을? 그게 무슨...



"내 몸은 옛날 인류에서도 표본을 찾을 수 없을만큼 오리진 더스트와 친화성이 뛰어나잖아? 그렇다면, 내 신체조직의 일부를 배양해서 그걸 이용할 수는 없을까? 그걸 이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참고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오빠의 신체조직... 유전자를 말하는거구나.



"...응."


으음... 사실 그것도 이미 생각은 해보긴 했는데, 제일 큰 문제는 라붕이 오빠의 몸이 오리진 더스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질이라 시작단계가 막혀있던거라서.

애초에 라붕이 오빠의 신체조건에 맞는 오리진 더스트가 단 한 종류도 없으니ㄲ........



"...닥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던 닥터는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것 마냥 말을 멈추고선 허공에다 무어라 중얼거렸다.


......맞아.



"응?"


바로 그거야 오빠! 의외로 답은 가까이에 있었어!



"으, 응..?"


보다 간단한 방법이 있잖아! 라붕이 오빠의 몸에 맞는 물질이 없다면, 우리가 아예 처음부터 맞춤형으로 새롭게 만들어 버리면 되는거야! 라붕이 오빠의 척수액과 체내 유전자를 극소량 체취한 뒤에, 그걸 토대로 라붕이 오빠의 체질에 맞는 새로운 종류의 오리진 더스트를 새로 만들 수만 있다면..!



"...?!"



모든 종류의 오리진 더스트를 배합해도 사용 가능한 경우의 수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 가진 수단들이 전부 무용지물이라면, 아예 새로운 수단을 만들어 시도하면 될 것이다.

눈 앞의 천재 아가씨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토대로 신체 재건을 시도할 수만 있다면, 라붕씨도 휩노스 병의 면역력을 얻을 수 있다는 거구나!"



오리진 더스트를 개량하는 경우는 있어도, 아예 다른 종류의 새로운 오리진 더스트...

온전히 그의 몸의 인자에 맞춰 커스터마이징한 오리진 더스트를 새롭게 만들어서 주입할 수 있다면...


비록, 성공확률은 계산조차 힘들지만, 시도할 가치는 충분해.



오직 한 명의 인간만을 위한 새로운 오리진 더스트의 개발.

단 한명의 인자에 적합한 오리진 더스트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든다는 시도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 단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사상 최초의 시도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부작용을 불러올지, 어떠한 후폭풍이 생길지는 천하의 닥터조차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되고 안되고 나발이고가 어딨어. 당연히 해야만 하는게 당연하잖아...!



아자즈 언니도, 포츈 언니도, 그렘린 언니도 열심히 도와주고 있다. 혼자가 아니니까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만 한다.



"...닥터."


......응. 오빠.



시뮬레이션을 돌릴 시간도 촉박하다. 애초에 이런 시도 자체가 단 한번도 사례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여기서부턴 그저 도박이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도박!



해야할 일과 계획의 청사진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완성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인류 역사상 최고의 두뇌를 가진 천재 소녀는 일생일대의 도전에 몸을 맡겼다.



























함께 병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 먹은 도시락통을 비롯한 짐을 책상위에 올려놓은 뒤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후우우... 오늘 하루도, 어찌 잘 넘겼네."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이 곳까지 자신을 바래다준 엔젤을 향해 미안함 섞인 감사를 건넸다.



"굳이 여기까지 바래다 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마지막까지 신세만 졌구나. 고마워 엔젤."


고맙긴요.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돌아가봐야 하는거 아니야? 교단 분들께서 많이 걱정하실것 같은데."


그냥...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어요. 걱정되기도 했구요. 헤헤...



"응? 왠 걱정? 뭔일있어?"


뭐냐뇨! 그야 라붕씨 건강이죠. 잊었어요?! 라붕씨는 중환자라구요! 그것도 엄청 위독한 중증환자!



"......."


하아... 이전부터 은근 느껴온건데, 라붕씨는 알고보면 그런 면에서는 엄청 둔감한 면이 있다니까요. 경각심이 없다고 해야할까.



"나 참... 당연히 경각심 정도야 늘 갖고 있지."


그런 분께서 혼자서 오르카 호 밖으로 몰래 나가려고 했어요?



"그, 그건 내가 진짜로 잘못했다니까... 이제 좀 봐주라..."


이건 평생 놀림받을걸요? 알아서 감내하세요. 다 자업자득이니까.



"키키킥... 하긴, 다 내 업보지 뭐."



피식거리며 낄낄거리는 라붕이를 향해 엔젤이 흥미를 드러내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붕씨! 라붕씨는, 여기 오시기 전의 원래 세계에서 어떻게 지내오셨어요?

원래라면 바이오로이드는 없는 세상이었죠?



"응. 내가 살던 세상은 여기만큼 비현실적인 과학기술이 발달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바이오로이드는 커녕 제대로 된 로봇기술도 발달하지 않은 곳이야."


2023년... 확실히 그 때라면 기술수준이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겠네요.



"그런것도 있긴한데, 애초에 내가 살던 세상이 100년 더 지난다고 해서 이 곳과 비슷해질 일은 사실상 제로라고 봐야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 기술이 발달해도 바이오로이드라는 새로운 종족을 창조한다는것 자체가 현실성 없는 이야기니까."


.......



"설령, 바이오로이드를 완성하는 비슷한 성과를 내더라도, 이 세상처럼 바이오로이드가 홀대받고 천대당하는 막장으로 흘러가진 않을거야. 실제로 내가 살던 세상은... 너희를 동경하면 동경했지, 너희쪽 인류처럼 작위적으로 너희를 마냥 괴롭히지만은 않을테니까."


...그렇군요.



"......."



씁쓸하게 중얼거린 라붕이를 잠시 뒤로 한 엔젤은 유리컵에 방금 끓인 차를 2잔 준비한뒤 라붕이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으며 라붕이 개인에 대한것을 묻기 시작했다.


라붕씨는, 한국이 고향이시죠? 사시는 곳은 어디셨나요?



"나? 주로 경기도 중부 쪽에서 살았지. 거기서 그냥 남들과 다를바 없이 살던 특색없는 서민이었거든."



시시하고 색깔도 없는 삶이라서 그랬던걸까.

내가 유독 이 게임에 푹 빠져살았던 이유는, 그 만큼 사령관의 삶이 부러웠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될 수는 없더라도, 대리만족 정도는 가능할테니까.



'...이 곳이 내 현실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지만.'


그러고보니까, 라붕씨가 자주 활동하시던 커뮤니티, 그러니까... 줄여서 라오 채널? 아무튼 거기서 관리자 역할도 하셨다고 했죠?



"응. 강제로 파딱을 맡았지."


네? 파딱?



밥먹고 오니까 파랗게 칠해져있는 자신의 프로필을 보고서 완장새끼를 죽이고 싶었던것이 떠오르자 어깨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 반동놈의 주딱새끼... 말도 없이 그런 심한짓을 하다니."



창작탭의 챈문학 게시글에서 내가 좆목질로 의심되는 댓글을 달았다는 신고를 받았지만, 파딱이 된다는 조건으로 그 죄를 사면해주겠다는 주딱의 악마같은 반협박에 굴복해서 마지못해 허락해 버린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그 제안을 거절하면 바로 갱차다. 썅놈...



"에휴... 그 때 그 놈이 완장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 파딱? 그게 정확히 어떤거에요? 예전에 라붕씨 이야기 해주실때도 유독 그 단어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시던데.



"ㅇ,어..?"



파딱이 뭐하던 놈이었냐고 질문하는 엔젤에게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경멸받지 않고서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고민하며 최대한 멀쩡하게 둘러댔다.



"...뭐... 별건 아니고, 커뮤니티에서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기분나쁘게 하는 녀석들을 차단하거나 단죄하는... 일종의 치안유지담당...? 하하하..."


오오오..! 즉, 오르카의 시티가드 같은 분이셨군요! 정말 대단해요 라붕씨!



"그, 그래..."


라붕씨가 라오 채널의 평화를 지켜왔다는 거잖아요. 좀 더 자랑스러워 하셔도 된다구요!



"...네...?"



순수하게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엔젤의 모습에 당혹스러웠던 라붕이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니...이건 그렇게 멋진게 아닌데....'



완장질하면서 해온거라곤, 알게모르게 내로남불 식으로 분탕질도 자주 저질러오면서 창작탭에서 챈문학 작가들한테 빨리 다음화 가져오라고 깽판을 쳐오던게 전부였지만, 엔젤의 순수한 동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함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럼, 라붕씨가 혼내준 사람들중에 그 나쁜 오르카 분들도 잔뜩 있었겠네요!



"하하하..! 그야 물론이ㅈ...... 누구...?"


누구긴요! 그야 잘못도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던 그 악당들이죠!

고작 나중에 발견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중상모략으로 두 번째 인간님한테 지독한 짓만 골라서 해왔으니까요.



"......."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화가 안풀려요. 그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심한 짓만 골라서 하는걸까요?! 라붕씨가 봐도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어... 그게...."


그나마 그런 나쁜 사람들 혼내주는 라붕씨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라붕씨조차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 분들이 나왔을지 짐작도 안간다니까요.

그러니까, 좀 더 자랑스러워 하셔도 된다구요!



"......."



지금은 유행 끝난 트렌드가 된지 오래지만 라오 채널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후회물 채널이 된 원인은, 사실 이 파딱 출신에게도 어느정도 원인이 있었다.



'...나도 파래지기 직전 고닉시절에 그런 문학 몇개 쓴 적이 있는데...'



충격적인 내용으로 순식간에 념글을 넘어 베라로 직행한 후회물을 보고, 본인도 거기에 꽂혀서 대충 끄적인 후회물이 생각 이상의 개추와 조회수를 기록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 편승해서, 주딱이 주관하는 후회물 대회랑 피폐물 대회같은 것도 여럿 열었지... 물론 내가.'



순식간의 라오챈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금태양NTR후회물 장르는 창작탭 페이지마다 없는 페이지를 찾는것이 힘들 지경이 되었고, 타겜 채널에서의 오르카호의 인상은, 배신과 통수를 일삼는 썅년조직이라는 이미지를 얻게되어 아주 그냥 인상이 씹창이 나버렸었다.



"......."



개추와 댓글에 홀려서 캐릭터들 이미지 씹창나는데에는, 라붕이와 같은 종신파딱들이 한몫했다는 것쯤은 그의 닉네임만 검색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크, 크흠..! 뭐... 이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너희 교단에서 파티? 를 준비한다고 했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순수한 소녀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당장 대화 주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 라붕이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엔젤이 꺼냈던 이야기에 대해 질문했다.


아! 맞아요! 사실은 라붕씨를 과자 파티에 초대해드리고 싶었거든요! 신체재건 다 끝나시고 새로운 몸에 적응되시면 다음에 한번 와주셨으면 해서...



"아... 아까 위에서 따로 말했던 그거?"


네! 저뿐만이 아니라 저희 교단의 천사분들과도 제대로 시간을 보내주셨으면 해서요. 다른 분들도 은근 그걸 바라고 계시니까요.



"......."


아아..! 물론 부담되시면 억지로 참석하진 않으셔도 괜찮아요! 꼭 그 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니까...



"갈게."


......



"건강해지면 제일 먼저 찾아갈게. 과자파티 하는거지? 나도 너희가 먹을만한거 몇개 챙겨서 가져갈게."


...! 정말요?! 정말 와주시는거에요?



"흐흐흐... 그럼 내가 이런걸로 거짓말 할까봐?"


헤헤... 그 말 다 기억했어요? 약속 어기시면 안돼요!



"...그래. 걱정하지마."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저도 슬슬 가봐야할 시간이 됐네요.



"그러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엔젤 너도 이제 슬슬 가서 자야지."


그럼, 라붕씨! 다음에도 또 놀러올게요! 그때도 다 같이 맛있는거 먹어요! 내일은 교단의 다른분들이랑도 다 같이 올테니까요!



"그래~ 다음에도 너희랑 노는거 기대하고 있을게. 아... 그리고."


네?



"...오늘, 정말 고마웠어."


.......



"뭐라 해야할까. 늘 가슴 한켠이 답답하고 무거웠는데, 너랑 이야기하고 난 뒤로 더 이상은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거든."


라붕씨...



"정말 고마워. 너에게는 그 무엇보다 크게 감사하고 있어."


...전 딱히 대단한 일을 한게 아니에요. 그냥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게 전부니까.



"......."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같은 마음이에요. 다른 자매님들, AGS분들... 그리고 구원자님까지.

그러니 저희 사이에 감사같은건 필요없어요.



...너의 그런 부분에 구원받은거야. 엔젤.



"그래. 그렇다면 이제는 조금 더 친숙하게 대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게."


헤헤헷... 그럼, 더욱 건강해진 라붕씨의 모습 기대할게요~!



"...그래."



그럼에도 후회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역시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제는 정말 괜찮겠지.


그럼 라붕씨! 이제 가볼게요~ 몸조리 잘하시고 건강관리 꾸준히 하세요. 힘든일 있으시면 바로 부르시구요!



"그래그래~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들어가. 피곤하겠다."



최대한 밝게 웃으며 엔젤을 안심시킨뒤, 손을 가볍게 흔들어 방을 나서는 엔젤을 배웅해주었다.



"......."



한것 떠들고 난 뒤라서 그럴까. 격렬한 피로감이 몸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역시 나도 이제는 한계인가."



다시 혼자가 된 틈을 이용하여 홀로 산책이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보려 했지만 이 이상은 활동량 초과인듯 하다.



"얼마나... 남은걸까."



자세히는 알 수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은 시간도 이제 곧 바닥날 거라는걸.



"그런데, 이제 곧 죽는 놈치고는... 쓸때없이 차분하네."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것도 휩노스 병의 영향일까. 더 이상은 악몽도 꾸지 않게 된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무서워서 난리피우는 것보다야 낫지만."



뭐가 어찌되었든간에, 남은 시간동안 마음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굳이 고민할 것도 없다.



"내일은, 거기 한번 가볼까."



내심 다시 가보고 싶었던 장소를 되새기며, 늦은 새벽을 마무리 짓기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꿈을 꾸지 않기에 더 이상은 두렵지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부 털어놓아서 후련해졌기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재밌게 보셨으면 개추랑 댓글좀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