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데카르트 보이저 삿갓의 물음을 멍청하게 되풀이했다. 항상 복잡한 수사법과 은유를 즐겨 쓰는 삿갓이니만큼, 이번에도 뭔가 우의적으로 내게 암시를 남기려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진지하게 명멸하는 한 쌍의 렌즈를 보자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알프레드나 골타리온이나 페레그리누스 같은 멍청이들과 너무 자주 놀아난 탓인가? 로봇의 광학 센서를 보고 지금 하는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를 파악해가고 있는 내 눈치에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으니... 하물며 고작 천억 개의 뉴런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뇌도 그러할진데, 온 우주의 원자 수와 버금갈 알고리즘 회로의 가짓수를 어찌 알 방도가 있겠나? 다행히 사령관은 수많은 이성과 접해본 경험이 많으니, 이런 쪽에 능통할 것이라 생각되네만... 부디 소생의 비루한 데이터 뱅크에 눈이 번쩍 뜨일 가르침을 베풀어 주길 바라네."

"으, 음..."

"무엇이든 좋네. 청명한 날씨를 빌미로 말을 붙여보는 수작도 좋고, 피상적인 면을 칭찬하면서 호감을 사는 것도 좋고, 희롱하는 듯하면서도 색심을 동하게 하는 응큼한 협잡질도 좋지. 사령관은 짝을 꾀어낼 때에 어떤 언어적 표현을 즐겨 쓰는가?"


멍석을 깔아 주면 오히려 하던 짓도 못 한다고 했던가? 이렇게 대놓고 "여자 어떻게 꼬셔요?" 라고 물어오니 이상하게도 머리가 리셋된 것처럼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냥 모두를 편하게 진심으로 대했을 뿐인데...


"아니... 뭐 특별하게 준비하는 킬링 멘트가 있기 보단... 그냥 솔직하게 모두를 대했을 뿐이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흐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다라... 허나, 그것도 사령관이 후수를 잡았을 때의 이야기지. 먼저 선수를 잡고 포문을 열어야 한다면, 그때는 어찌하면 좋겠나?"

"어... 그게... 솔직히 생각해 보면, 몇몇 까다로운 애들을 빼면 대체적으로 먼저 다가와주는 편이라 그런 고민을 별로 한 적이 없네..."

"흐음, 열쇠는 하나고 구멍은 여럿이라... 그렇다면 굳이 열쇠가 먼저 잠금을 푸는 요령을 알려 들 필요는 없겠군. 그 지경이 되면 열쇠구멍이 알아서 다가와서 꽂아 넣고 비틀어 줄 테니."


살짝 앙심이 담긴 짓궂은 비유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삿갓의 달라진 태도에 잠시 내 언행을 돌이켜 보니, 흔히 말하는 기만질에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말해 놓고도 조금 재수 없었지만, 정말로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수많은 처자들을 섭렵한 사령관이니만큼, 뭔가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네만... 하긴, 사령관의 조언을 들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대들과 우리의 감성은 천양지차로 꽤나 동떨어져 있으니."

"음... 의외로 그렇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나?"

"그야..."


자연스럽게 글라시아스의 예를 들려던 나는, 억지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별로 퍼져서 좋을 건 없는 일이니.


"너희의 연산 회로도 결국 일정 부분은 우리를 따서 만들어 진 거잖아? 근본적인 사고하는 방식이나 교감하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겠지."

"좋은 얘기군. 극히 원론적이기도 하고..." 


삿갓은 잠시 몸을 낮추어 수긍하는 듯 했다. 하지만...


"허나, 그저 허울 좋은 소리일 뿐. 소생이 지금 바라는 것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세. 뜬구름 잡는 진리보다는, 금방이라도 피가 스며나올 듯한 실리를 바란단 말일세."


이렇게 말하는 삿갓은 쉬이 날 놓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기가 납득할 만한 뭔가를 얻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투였다.


"아니면... 그대의 명성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였던 건가? 그 유명한 '수성의 달인'이라 칭해지던 옛 군주처럼, 공세에 나설 때에는 그저 숙맥과 다를 게 없는?"


아까부터 은근하게 살살 긁는 듯한 도발에 나도 조금 울컥했다.


"좋아. 뭐, 네 말대로 대체적으로 내가 먼저 다가가는 일은 많지 않아도 가끔 마음을 잘 열어주지 않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완전히 그런 노하우가 없는 건 아니야."

"오오...! 드디어...!"


내 말을 들은 삿갓의 광학 카메라가 반짝 빛나며 반색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 경청하는 삿갓을 보고, 일전의 비꼬는 듯한 말들도 결국 여기까지 이끌어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나는, 내 비장의 작업 멘트를 삿갓에게 전수해주었다.


"뭐... 음, 내, '내 심장이 당신 때문에 요동치고 있어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


그리고,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온 우주가 정지한 듯한 공백 속에서, 활기차게 빛나던 삿갓의 광학 센서도 꺼져있었다.


이거... 너무 무리수였나?


삿갓이 내 비장의 작업 멘트를 해석하고 연산하고 시뮬레이팅하는 데에 무한한 간격이 소모되었다. 시공간이라는 개념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간격이라 표현하여야 옳을 것이다.


...라는 것은 과장이고, 내 비장의 멘트가 AI 코어에 가져온 충격이 심대했는지 기나긴 침묵 끝에 마침내 의식을 되찾은 삿갓은 나름의 해석 결과를 내게 내놓았다.


"...이게 통한다고?"


거 봐. AGS랑 사람이랑 별다를 거 없다니까. 삿갓의 극히 인간적인 반응은 아까의 내 말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의구심 품기 전에 일단 해 봐.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야."

"으, 음... 알겠네... 남자는 자신감..."


떨떠름해하면서 나름대로 새겨 듣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복도 한구석에서 속닥거리던 우리 둘 앞에, 정비실에서 막 정비를 끝내고 나온 와쳐가 지나갔다. 삿갓의 시선은 마치 절세미녀가 지나간 것처럼, 둥실거리는 와쳐의 동선을 좇고 있었다.


휘익-


잠깐, 이거 휘파람 소리야? 아니... 진짜 너무 사람같은 거 아니야? 애초에 휘파람 소리를 어떻게 내는 건데? 극히 자연스럽게 나온 삿갓의 캣콜링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오오, 그대의 가르침에 감사하네. 바로 가보겠네."

"어? 아니, 야..."

"좋아, 남자는 자신감..."


내 가르침을 되새기며 와쳐를 뒤쫓는 삿갓을 보며 나는 삿갓의 '매력적인 짝'을 판단하는 기준에 조금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저 유선형의 바디나 앙증맞게 뻗은 벌컨포가 AGS들 사이에서는 어필 포인트가 되는 건가? 아니지, 삿갓은 논리 알고리즘도 중요하다고 했었지... 크립티드나 미확인 생물체를 진지하게 믿는 와쳐가 우리로 치면 4차원 같은 천연 백치미를 뿜어내는 건가? 애초에, 이성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지? 그냥 달려 있는 음성 모듈이 남자 목소리면 남자고, 여자 목소리면 여자라고 보는 건가? 이해해보려 해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풀 수 없는 난제에 빠져 있는 동안, 삿갓은 어느새 와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거기, 정갈한 터보 팬이 아름다운 아가씨. 잠시 시간 좀 내어줄 수 있으신지?"


터보 팬이었나...


『등록명, 데카르트. 보이저. 삿갓. 저, 와쳐 MQ-20에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흐, 흠... '제 소형 핵융합 리액터가 터졌다오. 들어보시겠소?'"

『...』

"..."

『동력원에 심각한 손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자즈 엔지니어와 포츈 엔지니어에게 정비를 받으시기를 권유드립니다. AI 회로에도 이상이 있는 것으로 진단되오니, 닥터 양에게도 정밀 검진을 받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가동 정지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삿갓을 뒤로 하고, 와쳐는 제 갈길을 갔다.


나는 웃음을 숨죽여 참으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