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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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희 집회 장소는 항상 이런 곳에서 해야 하나요? 아르망?”

 

 요안나 아일랜드의 중심에 우뚝 선 거대한 산. 그리고 그 산의 중턱 즈음에 자리한 석조 건물, ㄷ자 형태로 지어진 이 석조 건물의 크기는 이 섬 위에 있는 여러 생산설비에 비해 작으나 수용 가능한 인원은 최대 1천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모든 인원이 거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생산 인원들은 이곳에 거주하고 있으나 파견 인원들은 근무 지역 멀리 이동하길 싫어해 초소 근처의 쉼터를 이용하는 일이 대다수며 또 산 정상에 거주하는 인원과 목장 인근에 근무하는 인원들은 목장 인근에서 거주하길 희망했다.

 따라서 요안나 아일랜드 중앙건물 1, 2층에 자리한 숙소 시설의 대부분은 사용하는 이가 없어 먼지만 풀풀 날리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사람이 드나들 일 없는 으슥한 빈 숙소 중 한 곳에서 들릴 일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아주십시오. 리리스양.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한 간단한 조치이옵니다.”

 

“어차피 우리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봐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알아듣는 애들도 없을 텐데.”

 

“소첩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대화하는 것이 되려 의심을 덜 살 것 같사옵니다.”

 

“...”

 

 땅거미가 내려앉은 조용한 밤 시간대. 커튼에 가려져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조용한 빈 숙소 안에서 4명의 여성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행여 엿듣는 쥐새끼는 없을 것이라 확신하며 담담한 어투로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소완양과 리제양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사옵나이다. 이곳 인원들이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봤자 이해할 확률은 한 자릿수이옵니다.”

 

“그럼 이 먼지 풀풀 날리는 곳 말고 좀..”

 

“하지만 주인님의 귀에 저희 이야기가 들어갈 확률은 약 90%. 한 마디로 저희의 정체가 드러날 확률이 높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유일하게 옅은 빛을 내뿜는 커다란 책자를 손에 든 소녀, 아르망의 말에 보랏빛 눈동자 속에 짜증을 한껏 머금고 있던 리제의 눈썹이 얕게나마 꿈틀거렸다. 그리곤 이내 그녀의 날카로운 목청이 그녀의 옆으로 향했다.

 

“...야. 해충.”

 

“응? 왜. 스토커.”

 

 낮게 깔리다 못해 서리가 내린 리제의 부름에도 그녀가 서 있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여유롭게 걸터앉아 있는 은빛 머릿결의 여성, 리리스는 가느다란 자신의 다리를 흔들대며 리제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어차피 또 언제까지 이런 짓거리를 계속해야 하느냐지?”

 

“...칫.”

 

“애당초 그날 밤에 제일 좋아서 고갤 위아래로 휘적대던 얘가 누구더라?”

 

“이..이...이..”

 

 어두운 방 안에서도 눈에 띌 만큼 확연히 새빨개진 정원사의 모습에 은빛 머리의 경호원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할 말 없으니까 햇츙이라고 하려고? 그것도 그렇게 남발하면 못 써. 쯧쯧. 얘가 갈수록 어휘력이 떨어지는 거 같다니까.”

 

“...읍.”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제 분기를 맞받아치는 리리스의 모습에 리제는 짜증을 거두곤 방금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건너편 침대 프레임에 기대어 서 있는 여성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여성이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소첩은 이 장소가 불편한 것이지, 딱히 부군께 저희의 정체를 숨기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렇지. 아무리 조용한 장소를 물색한다고 하지만 여기는 청소도 제대로 안 하는 곳이란 말이야. 내 방에는 눈치 빠른 꼬마 아가씨가..”

 

“내일 부군의 조식을 준비해야 하온데. 이리 먼지가 날리는 곳에 있으면 행여 제 완벽한 요리에 흠집이 날수도 있사옵니다.”

 

“...”

 

“...”

 

“? 뭘 그리 소첩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옵니까. 위생관념은 주방에 서는 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아, 네. 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대화 맥락이란 것이 이토록 찾기 어려운 것이었나. 이 섬에서 말 안 통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울 정원사마저도 온통 제 생각밖에 없는 이기적인 요리사의 말 한마디에 어벙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반대로 이 틈을 노렸다는 듯 책자를 든 소녀, 아르망이 붕 떠버린 회의를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주간 결산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결산 보고를 읊을 분은..리리스양으로 하겠습니다.”

 

“어머.”

 

 아르망의 담담한 말 한마디에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앉아있던 여성들의 시선이 단숨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목 대상이 된 리리스는 담담한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우선 극기훈련 2회차 인원 중 보급품을 훔치려거나 혹은 강탈하려는 인원은 없었어요. 다만 조금 거슬리는 일이 있긴 한데. 이건 내일 정기보고 때 이야기하죠.”

 

“어떤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우선 그 이야기만 들어보면 희소식입니다.”

 

“...오자마자 극기훈련을 겪었사온데 어찌 그런 불경한 마음을 가지겠사옵니까.”

 

“뭐,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긴 하네. 주인님한테 그렇게 호되게 혼났는데 빼돌리려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근성이 좋은 거겠지.”

 

“흥. 그런 녀석이 있으면 내 가위로 두 동강 내버릴..”

 

“네 가위는 진짜 가능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아줄래?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까진 안 해.”

 

 이마에 총구멍 갖다 대는 정도지. 리리스는 굳이 꼬투리 잡힐 뒷말을 삼킨 채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근무지 이탈 및 생산 인원을 향한 이유 없는 하대 행위에 대한 신고도 접수되지 않고 있어요.”

 

“그 부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만. 하대 행위가 이렇게 빨리 수정될 줄은.”

 

“아마 윗선에서 조치를 취해 준 거 아닐까요? 주인님의 극기훈련 영상이 전 오르카군에 퍼졌으니 상부에서도 가만히 있었을 리는 만무하죠.”

 

“...아마 폐하 이외의 점도 작용한 것 같군요.”

 

 리리스의 보고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린 아르망의 게슴츠레한 눈빛이 곧장 두 눈을 감은 채 침대에 걸쳐 서 있는 요리사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소완은 재주 좋게 그녀의 시선에 대답했다.

 

“소첩의 근무지에서 꽤 볼멘소리가 나오기는 하옵니다만.”

 

“어머. 평소에는 조용하면서 식사할 때는 풀어지는 걸까?”

 

“그럴 때마다 소첩이 친히 그 고깃덩어리를 요리하기 위해 주방 밖으로 나서옵니다.”

 

“혹시 손에 무얼 들고 나서십니까?”

 

“소첩의 애장(愛仗)이옵니다.”

 

“...그거 그 무식하게 크기만 한 네 중식도를 이야기하는 거지?”

 

“맞사옵니다만?”

 

 급양 시설은 소완이 일임하는 곳. 그래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리리스나 아르망에게 보고가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이 경우에는 그녀가 그녀 맞은 바를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해줘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새로운 정보였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군께 내려받은 소첩의 임무이옵니다. 딱히 부탁하실 필요도 없사옵나이다.”

 

“이럴 땐 되게 대견해 보인단 말이야.”

 

“소첩의 능력에 굳이 자신을 빗대지 마시옵소서. 우울해질 뿐이오니.”

 

“...재수없어.”

 

 평소보다 더 진심이 묻어나오는 리제의 일침에도 소완은 제 어깨 위의 머릿결을 매만질 뿐, 굳이 그 한 마디에 일일이 대응하기 싫은 모양새로 태도를 고수했다. 그렇게 리리스의 짤막한 보고가 끝나자 아르망의 시선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리제에게로 향했다.

 

“리제양. 식량 생산 쪽은 어떻습니까?”

 

“..딱히. 별문제 없어.”

 

“응? 그게 끝이야?”

 

“이거면 됐잖아. 뭘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에휴. 너 보고도 제대로 못 해? 하다못해 너희 자매 이야기라도 해.”

 

“...”

 

 리리스의 핀잔이 드물게 먹혀든 것인가. 리제는 입술을 삐죽이며 뾰로통한 얼굴로 곰곰이 무언갈 한참 동안 생각하다 눈을 감고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었다.

 

“...드리아드들이 해충 발견 빈도가 줄었다고 했어. 덕분에 차기 밀, 벼 수확량이 증가할 예정이야.”

 

“네. 그리고 또 다른 점은 없습니까?”

 

“아쿠아가 홍차 잎 건조 시설을 좀 더 늘릴 수 없냐는 질문을 해 왔어.”

 

“근처 부지를 더 개발할 수 있으니 차후 폐하께 건의해 보겠습니다.”

 

“...다프네가 돔 주위를 꽃밭으로 가꿔보자고 해서..심었어. 꽤 많이. 이게 끝이야.”

 

“괜찮네요. 내일이나 모레 안으로 폐하께서 주변 순찰할 예정이니 보여드리면 기뻐하실 겁니다.”

 

“----!”

 

 아르망의 대답에 바닥을 향해 있던 리제의 머리가 퍼뜩 튀어 올랐다. 방금까지 무뚝뚝하게 말을 잇던 그녀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두 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뺨 위로는 새빨간 홍조가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지게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리리스는 실없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기쁠 일이야? 스토커. 매일 밤마다 주인님 침소를 창밖에서 몰래 훔쳐보는 주제에.”

 

“뭇...그..그건 그냥 주인님이 편히 주무시는지 확인하려고..!”

 

“네네. 변명 잘 들었습니다. 이제 서로 가시죠? 아쿠아양이 눈물로 강을 만들기 전에 말이에요~”

 

“이익-!”

 

 뺨 위로만 떠올랐던 홍조가 얼굴 전체로 퍼져나간 리제의 주먹질이 리리스를 향했으나 리리스는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는 정도로 그녀의 주먹을 재주 좋게 피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소완이 무언갈 떠올렸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그걸 그대는 어찌 아시나이까?”

 

“엣.”

 

“엑.”

 

“리제양이 창밖에서 그걸 훔쳐본다는 걸 안다는 것은..경호원을 자처하는 그대 역시 어디선가 부군을 훔쳐보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사옵나이다.”

 

 예기치 못한 요리사의 일침에 리리스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어느새 평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리제가 노려보고 있자 자칭 경호원은 귀여운 미소와 함께 혀를 내밀었다.

 

“...에헷.”

 

“햇츙! 죽어!”

 

“아-! 왜! 주인님을 지키는 건 내가 할 일이거든?”

 

“주인님께 경호원 취급도 못 받는 주제에!”

 

“야! 내가 그건 말하지 말랬지! 이씨! 이게!”

 

쿠당-탕!

 

 갑자기 벌어지는 캣 파이트에 방안 전체에 자리해 있던 먼지가 사방으로 풀풀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요리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부군께 간택 받지 못한 이들의 치졸한 싸움은 밖에서 하시옵소서. 이 먼지구름처럼 추하옵니다.”

 

“-이익! 너도 매한가지잖아!”

 

“맞아! 주인님과 가까이 있는 시간도 없는 주제에!”

 

 서로의 머리채를 쥔 채 침대 위에서 고개를 홱 돌리는 두 여성의 일갈에 소완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들을 단숨에 침몰시켰다.

 

“? 소첩은 매일 아침 부군께 아침마다 식사를 가져가고 있사온데. 두 분 모두 평온한 일상에 너무 녹아들어 부군께 소홀해진 것은 아니시온지.”

 

“...”

 

“...”

 

“조만간 부군의 방 키카드를 받을 예정이기도 하옵니다만. 후후. 매일 시궁쥐처럼 부군께 몰래몰래 다가가는 비참한 이들에겐 앞으로도 없을 일이지요.”

 

“-해충. 저년은 베어도 괜찮아?”

 

“...조금만 참아. 스토커.”

 

 조만간 쓴맛을 보여줄 테야. 낮게 깔린 두 여성의 으르렁에도 소완은 가만히 손으로 V를 만들어 보였다. 그리곤 시선을 돌려 여전히 가만히 땅바닥 앉아있는 아르망에게 말을 건내었다.

 

“앞서 언급했듯 소첩의 현장에는 별문제가 없사옵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아, 인력이 조금 더 있었으면 하옵니다. 아우로라들은 이상하게 채소 손질에 서툴러 작업이 느리옵니다.”

 

“파견 부대원 중 몇몇을 급양 인원으로 빼겠습니다.”

 

“그리고 소첩이 요구했던 대형 사각 얼음은 어떻게 되었사옵니까?”

 

“그거라면 저희 섬에 있는 냉동고에 준비해뒀습니다. 원하실 때 가져가서 쓰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사옵니다.”

 

“흐음. 그걸 어디다 쓰려고?”

 

 소완과 아르망의 무미건조한 대화를 듣던 리리스가 새침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얼음도 어떻게 보면 소위 말하는 필요물자. 비축 창고의 전반적인 업무를 도맡는 리리스에겐 끼어들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쓸데없는 곳에다 쓰려는 건 아니지? 요즘같이 더운 날에는 얼음도..”

 

“부군의 찬란하고 강직한 모습을 소첩의 미력한 손재주로나마 깎아볼 예정이옵니다.”

 

“좋아. 원하는 만큼 가져다 써. 안드바리는 내가 설득할게.”

 

“협력에 감사하옵니다.”

 

 생각 이상으로 싱거운 비축 창고 담당의 모습에 식량 생산 담당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둘 사이에서 눈알을 휙휙 돌렸다. 그렇게 일련의 보고가 모두 끝나자 아르망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것으로 제5회. 요안나 아일랜드 실무 회의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망의 회의 종료 선언에 리제는 또다시 입을 삐죽였고 리리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소완과 리제를 번갈아 보았다. 이건 그녀들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음을 의미했다.

 

“...왠지 가면 갈수록 너무 실무적인 부분만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거 같은데.”

 

“같은 데가 아니옵니다. 실제로도 그렇사옵니다.”

 

“이게 뭐야. 주인님의 이야기는 거의 안 나왔잖아. 이런 건 그냥 주인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나눠도 되는 거 아니야?”

 

“..최근 날씨가 무더워져 급히 현장의 보고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세 여성의 불만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자 아르망은 예상했다는 듯 방패를 들어 그녀들의 불만을 단숨에 일소시키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르망의 예상보다 날카로운 감을 지니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괜히 자기 폐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게 싫은 건 아니고?”

 

“--.”

 

 리리스의 무덤덤한 질문에 그간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아르망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건 추가타가 들어오기 딱 좋은 신호였다.

 

“하긴. 우리가 여기로 오지만 않았어도 주인님은 자기 독점이었을 테니까.”

 

“후우. 소첩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투정을 부리는 걸 보면 아르망 추기경 역시 소녀는 소녀이옵니다.”

 

“주인님을 독점하지 못해서 짜증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해충.”

 

“...”

 

 세 여성이 단숨에 자신을 몰아붙이자 아르망은 그간 유지해오던 무표정을 포기한 채 살짝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저는 폐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전반적인 행정 업무를 비롯해 각 전선에 보낼 여러 생산품의 출하까지 도맡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여러분보다 폐하와 만날 일이 적단 말입니다.”

 

“어머. 그거 참 미안한 일이네.”

 

“키킥. 햇츙.”

 

“흐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만나지 않사옵니까? 예를 들어 부군께 오리진 더스트를 주입할 때라던가.”

 

“그건 폐하께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에 봉착할 터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폐하와 추억을 쌓는 것 역시 저에게는..”

 

 아르망은 더는 말을 잇기 싫다는 듯하던 말을 끊어버리곤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지금의 폐하라는 말에 일동은 침묵을 지켰다. 그 한참의 침묵 속에서 리리스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그렇게 말하니 좀 미안하네요.”

 

“시간이 촉박한 것은 소첩뿐만이 아니 올 터.”

 

“...주인님의 모습. 응.”

 

“...저희는 어쨌든 간에 지금의 폐하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으니.”

 

“아아-주인님과 함께 한 시간이 그렇게나 길었는데. 겨우 그 얼굴을 바라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소첩은 그럼에도 부군을 쫓을 것이오니. 부군의 모습이 신경 쓰신다면 지금이라도 떨어져 나가 주시겠사옵니까?”

 

“흥. 엉뚱한 소리로 흔들려고 들어 봤자야. 주인님과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운명의 실로 엮여있었거든.”

 

“시끄러워. 스토커. 진짜 스토커들이나 할 법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평소와 같이 쓸데없는 티격태격을 나누며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려 드는 세 사람. 그 모습에 아르망은 분기를 누그러뜨리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의 이야기라. 네. 저는 질투하고 있는 거네요. 저들에게.’

 

 원래라면 이 자리는 그녀들이 이 며칠간 자신의 폐하와 함께 어떤 일을 겪었는지 떠들도록 마련된 자리이다. 애당초 이곳에 속한 존재가 아닌 그녀들이었기에 이렇게 한 번씩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떠벌릴 만한 틈을 만들어줘야 후에 뒷말이 안 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할 거라곤-딱히 없네요. 정말로.’

 

 처음에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에 대한 희열, 정말로 제 폐하가 맞았다는 것에서 느낀 기쁨. 그리고 잠든 그의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각인했었던 그 날들이 마치 몇 년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최근 두드러지게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 그녀에게 폐하는 무심하다면 무심한 남성처럼 보였다.

 

“...폐하는 무심한 남자.”

 

“아르망-양? 이제 나와요. 거기 계속 있으면 호흡기에 안 좋을 뻔하답니다.”

 

“...예. 그래야겠네요.”

 

 겉으로는 자신을 부르는 리리스에게로 대답한 그녀였지만 속으로는 무심한 자신의 폐하께 잔뜩 화가 난 아르망은 그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정한 채 방을 나서려 들었다. 그때, 문득 그녀의 시야 안으로 어두컴컴한 방의 제일 한구석. 미처 그녀들의 눈길이 닿지 않은, 그녀의 책이 내뿜는 빛조차 닿지 않은 구석이 그녀의 시야 한구석에 들어섰다.

 

‘-이 방에 저렇게 먼지가 없는 구석이 있다니. 뭐죠?’

 

 이상하다. 소완이 불평불만을 내뱉을 정도로 관리에 소홀한 방인데. 리리스와 리제가 엎치락 뒤치락했다는 것만으로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게 보일 정도로 먼지가 많은 방인데.

 이상하게 방의 한구석이 깔끔했다. 그 기이한 광경에 아르망의 연산 프로그램이 돌아가려던 무렵-

 

탁-!

 

“아르망양? 얼른 가요. 설마 저 때문에 삐진 건 아니죠?”

 

“-아, 예. 아닙니다. 전혀요.”

 

 방의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는 자신 탓에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선 리리스의 손길에 아르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까의 위화감을 떨쳐내었다. 별일 아니겠지. 아르망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리리스의 손길을 따라 환한 달빛이 내리쬐는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흥. 나도 요새 동생들 탓에 주인님을 못 만나는 건 매한가지야.”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이 눈치 없는 스토커. 애들이 너를 얼마나 아낀다는 소리야?”

 

“귀..귀찮기만 할 뿐인걸.”

 

“그러면서 아쿠아 어리광은 있는 대로 다 받아주는 거. 다 봤어.”

 

“아쿠아양에게 드릴 벌꿀 음료 정도는 내어드릴 수 있사옵니다. 언제 제 주방에 한 번 방문하시옵소서.”

 

“벌꿀 이외에도 현재 비축된 설탕 및 밀의 양이 적재량을 초과할 것 같으니. 언제 한번 보존식으로 바꿀 필요도 있습니다.”

 

“어머. 그러면 우리 애들 전원이 나눠 먹을 만한 양이 나오겠네요~”

 

“디저트는 소첩보단 아우로라양들에게 시키옵소서.”

 

“그러면서 주인님껀 따로 만들어서 지 혼자 재미 볼 심산이겠지.”

 

“...생각보다 예리하옵니다?”

 

“-이 음험한 햇츙!”


"그대에게 듣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렇게 네 명의 여성은 저마다의 담소를 나누며 시끌벅적함만 남긴 채 먼지만 가득한 방 앞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들이 떠난 자리에는 짧은 재채기만이 조용히 터져 나올 뿐이었다.


--)

 

 요안나 아일래드의 중앙 건물은 지상 3계층, 지하 2계층으로 총 5계층으로 건축되었다. 지상 3계층의 1층은 로비 및 생활관. 2층은 생활관과 통신 시설. 3층은 일부 인원에게만 출입이 허가된 기밀 보관 계층.

 뭔가 듣기만 해서는 3층에 무슨 첨단 장비 및 기밀 문건들이 수두룩할 것만 같지만, 실상은 별로 크게 신경 쓸 게 없는 층계다. 바깥 복도 외관이나 벽 외관도 1,2층에 비해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고. 아, 그래도 방문은 전부 합금으로 이루어진 철문이다.

 

“으음...여기서는...이걸..”

 

딱-!

 

“호오. 그래도 살길은 찾으려는 것이오?”

 

“...”

 

“그럼 나는 이 검으로 그대의 심장을 노리겠네.”

 

딱-!

 

“...어?”

 

“체크일세.”

 

 그리고 나머지 지하 2계층, 여긴 상층에 비해 더 별 볼일이 없다시피 한 곳이다. 지하 1층은 이전에 애들을 죄다 모을 때 썼던 대강당 설비가 다다. 물론 그 규모는 이곳 생산인원을 포함해서 파견 인원까지 전부 수용할 정도로 크기는 하다만 잘 쓸 일이 없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지하 2층은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곳, 사방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는 은빛의 책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다시 말해 도서관이다.

 

“음...으음...음..”

 

“하하하! 너무 그렇게 용쓰지 말게나. 작전관. 이건 그냥 게임일세.”

 

“...끄응. 그래. 오케이. 졌다.”

 

“이걸로 이 몸의 3연승이로군. 5판 3선승이었으니 내기에 따라 이번 달 월간 결산 보고 때는 작전관이 직접 주군께 보고하도록 하게나. 하하하!”

 

 게임을 마무리 지은 나이트를 든 채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여성, 요안나의 말에 나는 짧게 혀를 차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위스키 잔에 손을 가져갔다.

 

“쯧. 완패도 이런 완패가 없구만.”

 

 손에 들린 서늘한 잔 속에 담긴 황금빛 액체로 달아오른 속을 찬찬히 식히며 나는 아까의 체스판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잡은 요안나의 말은 기껏해야 폰 4개, 비숍 1개에 룩 하나. 그에 반해 요안나는 차근차근 내 폰을 대부분 정리하며 내 나이트들과 비숍들을 전부 먹어치운 뒤 룩과 퀸으로 막아뒀던 라인을 피해 내 킹을 노렸다.

 앞선 두 판 역시 압도적인 실력 차로 그녀에게 졌으니. 이쯤 되면 열 받아서 3판이나 한 내가 바보였다.

 

‘실력 차도 이렇게나 나면 뭐. 화도 안 나네.’

 

“요안나양이 체스를 잘 두는 것도 의외지만. 대장님이 이렇게나 약한 것도 의외군요.”

 

 곁에서 함께 위스키를 홀짝이며 게임을 관전하던 샌드걸의 말에 내 눈썹이 한층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 우리 세대는 체스보단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세대인데 어떡하라고.

 

“난 또 대장이 시원하게 승부를 받아들이길래 자신 있는 종목인 줄 알았는데. 맨날 술만 마시지 말고 이런 게임도 좀 공부하지? 대장.”

 

“...이프리트. 셔럽.”

 

 샌드걸과 마찬가지로 술이나 뺏어 먹으러 내려온 휘하 장교의 일침에 나는 폭신한 소파 안으로 몸을 더 밀어 넣었다. 이 녀석들, 치사하게 정론으로 치고 들어오다니. 그러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하하하! 너무 작전관을 나무라지 말게나. 그도 그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전황을 타개하고자 했으니.”

 

“...3연승을 거둔 녀석이 달래줘 봐야 더 비참해지기만 하거든?”

 

“그건 그렇군요. 아, 대장님. 이것도 마셔봐도 되겠습니까?”

 

“드시든가 말든가. 아예 한 병째로 가져가라. 요새 할 것도 없을 건데 산 정상에서 바다나 구경하면서 술이나 마셔.”

 

“그랬다간 포츈 언니한테 혼날걸?”

 

“대장님이 줬다고 하면 든든 누님도 별말씀 안 하실 겁니다.”

 

 이프리트의 태클을 가볍게 넘겨버린 샌드걸은 내가 딴소리하기 전에 재빨리 테이블 위에 놓인 여러 술병 중 하나를 골라잡곤 제 허리춤 뒤로 홱 꽂아 넣었다.

 저거 여기 놓인 고급술 중에서도 유독 고급스런 놈인데. 그걸 한눈에 알아보고 챙기다니. 역시 아무리 인생에 비관적이어도 살 낙은 포기 못 하는 게 사람인가보다.

 

“그것보다 요안나 네가 체스에 재능 있는 줄은 몰랐다.”

 

“음. 원체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영 심심해서 말일세. 기사수행을 하던 길에 배운 유희일 뿐일세.”

 

“킥킥킥. 여기 계신 기사님은 무려 기사수행만 몇십 년을 한 바이오로이드인데. 제대로 낚였네. 대장.”

 

“끄응...”

 

 괜히 아무 이유 없이 내기 체스를 두자고 한 게 아니었나. 요새 할 것도 없고 해서 심심해진 틈에 선뜻 요안나가 제안한 게임이었는데. 알고 보니 날 사령관 녀석에게 갖다 붙일 요량으로 파놓은 함정이었다.

 

‘사령관님과 친해지길 바래~라니. 무슨 학급에서 싸운 애들 달래는 선생님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요안나. 사령관님은 체스를 제법 두시나?”

 

“음? 아아. 주군은 어지간한 전략 게임에는 능통하다고 들었다만.”

 

“사령관님 곁에는 여러 전술, 전략에 능통한 각 부대 대장님들이 계시니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오르카 채널에 올라오는 글들 보면 그쪽 방면으로는 거의 천재적이라고 하시던데. 요새는 대장들 상대로 워게임도 종종 이긴다나 봐.”

 

“...”

 

 역시라면 역시인가. 하긴. 백전불퇴의 대명사인 그 남자가 이런 체스판 하나를 못 주무르겠는가. 그에 반해 나는..

 

“그에 반해 대장은 영 이런 거에 재능이 없나 보네. 어떻게 딴 거야? 그 자리. 세상이 멸망했어도 아직 매관매직이 남아 있었던 거야? 역시 인간은 역사를 반복하..”

 

“...이 토끼 녀석이. 뚫린 입에 술이랑 같이 흙도 넣어줄까?”

 

“아 그건 좀 별로.”

 

 안 그래도 그 잘난 사령관의 경력과 볼품없는 내 경력을 비교하고 있었는데! 거기다 매관매직이라니! 나는 애당초 이런 자리까지 바라지도 않았어! 당장에 반납하고 싶었어도 여기로 출발할 때 알았단 말이야!

 

‘후회물 전개가 안 된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역시나 능력도 안 되는 놈이 이런 자리에 있었다가는..’

 

-역시 인간이라고 다 사령관처럼 잘난 건 아닌가 봐. 이제 적당히 내려오지 그래?

 

-음. 소관도 기대를 꽤 걸었건만. 아쉽소이다.

 

-전장에서 무릇 제일 위험한 건 적이 아닌 무능한 아군인 법이지.

 

-딱 저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네. 야, 쓰레기. 널 어떻게 처리해줄까? 미사일에다가 같이 묶어서 철충한테 날려줄까?

 

-하하하! 그랬다간 철충들이 전부 도망칠걸세. 그 벌레들도 이런 오물은 전력으로 피하는 법이지.

 

-각하. 이 자의 처분은 저에게 맡겨주시길. 저희 스틸라인의 브라우니들과 함께 훈련 시키면 최소한 고기방패는..

 

“...”

 

 간만에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머릿속에서 알아서 플롯이 짜 맞춰가기 시작한다. 처음 잠수함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중앙 회의실에서 날 에워싸고 선 노려보던 블랙 리버의 대장들. 그리고 그녀들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날이 선 말들. 그리고 그걸 무심히 지켜만 보고 있는 회의실 가운데 자리의 남성.

 

‘...어째 에어컨을 켜둬서 그런가. 지하라서 그런가. 몸이 왜 이렇게 오들오들 떨리냐.’

 

 에이. 아무리 그래도 고기 방패 취급까지 가겠어. 에이. 그래도 세상에 둘뿐인 남자 인간인데. 하하하. 하하..하. 아, 둘이라서 위험한 거였지. 후회물은.

 

 실컷 떠드느라 메말라 버린 목을 축이려 글라스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얼음이 녹아 희석된 알싸한 알코올이 내 입을 통해 콧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래. 이 맛에 하루를 살아가지.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도서관 알코올 파티 무리는 한동안 말을 멈춘 채 저마다의 잔에 술을 채우고 그걸 또 위장에 들이붓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취한 듯 볼을 발갛게 달아 올린 이프리트가 마치 토끼가 주변을 경계하는 것처럼 주변을 홱홱 돌아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대장. 우리는 왜 이런 지하 도서관까지 내려와서 술 파티를 벌여야 하는 거야? 그냥 1층 휴게실에서 마시면 오케이잖아.”

 

“애들 교육에 안 좋댄다.”

 

“누가 그래? 대체. 애당초 여기 있는 애들은 알 거 다 아는..”

 

“행보관님이랑 비축 창고 총 책임자님이.”

 

“아, 넵.”

 

 내 입 밖으로 두 사람의 직책이 튀어나오자 이프리트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걸 듣고 있던 요안나와 샌드걸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떠올린 것이 있는지 샌드걸은 텅 빈 도서관 내부를 훑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블랙 리리스님이 안 보이는군요. 평소 같으셨으면 숙소에서라도 대장님 곁에 꼭 달라붙어 계셨을 텐데.”

 

“음. 그러고 보니 아르망 추기경도 안 보이는군.”

 

“...뭐. 이 섬의 실세들끼리 아마 회의한다고 하는 것 같던데.”

 

 내가 말하는 이 섬의 실세란 아르망과 리리스 뿐만이 아니다. 그 둘 이외에도 둘이 더 있다. 굳이 누군지 말해봐야 입만 아플 뿐이긴 하지만.

 

“역시 우리 대장. 본인이 실세가 아니라는 걸 제대로 알고 있어.”

 

“시꺼. 너도 나랑 비슷하거든?”

 

“나야 뭐. 물장교 아냐? 노움도 그렇게 생각할걸?”

 

“그런 거 치곤 훈련병들 교육할 땐 너네 둘이 제일 많이 갈구잖냐.”

 

“흥. 요즘 녀석들이 물러터진 거지. 나처럼 생산되자마자 최전선에 배치 당해 본 적도 없으니. 쯧쯧.”

 

“...흐음.”

 

 외관은 열댓 살 남짓한 소녀의 모습이지만 속은 온갖 전장을 다 해쳐온 백전노장이란 건가. 이미 아르망에게서 개별적으로 이 녀석과 곁에 항상 있는 노움에 관한 신상정보 문서를 받아 읽어봤지만, 본인이 직접 이렇게 떠드니 그건 그것대로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

 

‘이런 녀석을 그 마리 소장이 순순히 전역 시켜줬다고? 흐음..’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 너 전역은 어떻게 했냐?”

 

“? 전역해달라 했으니까 했지. 뭐.”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지난번 북? 아닌가. 동분가? 거기 이프리트 보니까 전역날만 꿈꾸드만.”

 

“하. 그런 햇병아리하고 내가 같아? 나 이래 봬도 임관 직전까지...아. 젠장.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어어..”

 

 가뜩이나 기운 없는 놈이 더더욱이 속이 메스껍다는 얼굴로 새하얀 책상 위에 풀썩 엎어져 골골대자 혼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샌드걸이 그녀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이 동네에서 연식으로만 따지면 지금 여기 계신 두 분이 제일 앞설 겁니다.”

 

“그렇게 말하니 이 몸이 대단히 늙어 보이는군. 후후.”

 

“사실이니까요. 저나 다른 애들은 대부분 오르카 1호에서 생산되자마자 이곳으로 온 경우이니.”

 

“그래?”

 

 샌드걸이 툭 던진 말에 내 시선이 곧장 술에 절어 푹 쓰러진 토끼와 담담하게 미소짓고 있는 갈색 피부의 여기사에게로 옮겨갔다.

 

“그러고 보면 이곳까지 오는 여정도 무척이나 길었네만. 후후.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기나긴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뤘다고 생각한다네.”

 

“아~당연하지이이. 우리가 여기 처음 왔을 땐 진짜 숲만 무성한 섬이었다구우...”

 

“숲만 우거진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땐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가 참 막막했네만. 주군과 오르카 호 내 형제들의 도움으로 이렇게까지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네.”

 

 소소한 미소와 함께 과거를 곱씹는 요안나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넓디넓은 섬 곳곳에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또 이만한 인원이 지낼 숙소까지 짓는다라.

 

“...어떻게 했냐. 와.”

 

“그땐 대부분 천막에서 지냈지. 뭐어..”

 

“처음에 여기 왔을 땐 여기가 후방 기지 건설현장인지, 아니면 피난민 구호소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여기 이 이프리트양을 비롯해 계속해서 자매들이 찾아왔지.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하면 그에 맞는 전문인력이 배치되었고, 또 자진해서 이곳으로 온 이들 덕분에 손이 모자르진 않았다네.”

 

“자진해서? 여기 애들 본대에 비하면 적은 편 아니냐?”

 

 자진해서 왔다라기엔 여기 이 섬에 거주하는 바이오로이드의 수는 기껏해야 수십 명 내외다. 본대나 여러 방면 전선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였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런 내 물음에 답한 건 또다시 술잔에 꼬냑을 들이붓는 샌드걸이었다.

 

“적습니다. 확연히 적죠. 여기 후방 기지는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선 비선호, 아니. 무관심에 가까운 기지입니다.”

 

“...왜? 여기는..”

 

“예. 대장님 말마따나 여기는 다른 전선처럼 치열한 전투를 벌일 필요도 없고. 본대처럼 온종일 해저 아래서 지낼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인류 재건이라는 현 오르카 저항군의 대의에 걸맞지 않은 곳입니다.”

 

“...”

 

 긴말을 마친 샌드걸은 글래스에 가득 채운 꼬냑을 입안으로 한가득 밀어 넣었다. 이 녀석. 이제 보니 슬슬 취기가 도는지 빈손으로 담뱃갑을 매만지고 있다.

 

“이 섬에 오는 녀석들은 딱 세 종류입니다. 첫 번째가 섬에 반드시 필요한 전문직 바이오로이드. 대표적으로 식량 생산을 담당하는 다프네양과 드리아드양들. 그리고 아쿠아양이네요. 두 번째는 인간에 대한, 아. 사령관님을 말하는 거긴 합니다만..”

 

 무심코 위험한 발언을 내뱉을 뻔한 샌드걸은 눈알만 굴려 나와 요안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에 나는 손을 털었고 요안나는 여전히 입가에 머금은 미소로 회답했다.

 

“...큼. 그럼 이어서 두 번째는 인간을 불신하는 케이스입니다. 대표적으로 더치걸양들이요.”

 

“그런 거 치곤 우리 동네 더치걸들은 활기차지 않나? 혹시 그거 연기야?”

 

 샌드걸의 입에서 더치걸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처음에야 날 좀 어려워했지 두어 번 보고 나서부턴 꽤 잘 따라왔는데. 그게 만약 인간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술보다 입맛이 더 쓰려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을 간파한 건지 이번엔 샌드걸이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확실히 그녀들이 처음 이 섬에 왔을 땐 사령관님을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었지만 점차 사령관님이 행한 업적들을 보고선 인간 중에도 사령관님처럼 따스한 인간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부터 주군은 더치걸 개체들을 참으로 아꼈으니 말이오.”

 

“그리고 대장님은 잘 모르시나 본데. 대장님이 물자 횡령한 브라우니와 레프리콘한테 윽박지르고 기절했다는 이야기는 그날 하루 만에 모든 생산 인원한테 퍼졌습니다. 그 영향도 무시 못하죠.”

 

“...아아.”

 

 샌드걸의 마지막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가슴에 얽힌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여기가 정상화된 지가 겨우 며칠 밖에 안 됐구나.

 

“더치걸들이 대장님을 따르는 데는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니 뭔가 대단한 걸 한 것처럼 들리네. 별로 한 것도 없구만.”

 

“자기 업적을 너무 격하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라네. 라붕이 작전관.”

 

“뭐어어. 첨에 와쓸 때 지딴에 숨었다고 기둥 뒤에서 우리 훔쳐보든 거느은 확 깼쥐마안.”

 

“...”

 

 인간의 뇌파라는 거. 이럴 땐 진짜 어떻게 숨길 방법이 없나. 나는 책상 위를 침 반 술 반으로 적시고 앉아있는 부하 놈의 볼을 검지로 꾹꾹 눌러대며 아직 끝나지 않은 샌드걸의 말을 경청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입니다만. 이건..음. 그렇네요. 딱히 별다른 생각 없는 녀석들입니다.”

 

“뭐냐. 그 애매모호한 녀석들은.”

 

“바로 저 같은 놈들이죠. 딱히 인류 재건에 큰 관심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어쩔 수 없이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불량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

 

“...그런 놈이라면 여기 너 말고도 하나 더 있긴 한 거 같은데.”

 

“예. 그런 부류 중에서 이프리트양은 최고참이죠.”

 

“흐에흑헤. 헤윽! 흑!”

 

 이놈 오늘따라 맥을 못 추네. 나는 무어라 말하고 싶어 버둥대는 부하 놈을 내려다보다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어 녀석의 보모 연락처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네. 대장님. 무슨 일이세요?」

 

“여기 도서실인데 너네 고참 뻗었다. 빨랑 데려가라.”

 

「앗. 네.」

 

“오는 길에 수건 두어 장도 챙겨오고.”

 

삑-

 

“헤으헤흐헤으으!”

 

“알았다. 알았어. 꼴불견이니 얌전히 눈이랑 입 닫고 있어.”

 

 이제는 아예 테이블 위를 침 바다로 만든 채 어푸어푸 대는 부하의 모습에 나는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되먹은 노친네가 하는 짓이 내 친구 놈들이랑 똑같냐.

 

“하다못해 뒤로 누워. 얌마.”

 

띠리리-띠리리-

 

“응?”

 

 분홍머리 최고참의 머리통을 뒤로 젖히고 있자니 이번엔 내 단말기로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사령관님인가? 황급히 단말기를 들어 화면 위에 표시된 발신자의 명의를 확인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좋은 의미로 빗나갔다.

 

“어. 더치걸. 무슨 일이냐?”

 

「대장! 지금 뭐 해? 어디야?」

 

“지금 어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우우. 치사하게 애들은 저리 가라는 식으로 말하기 없기!」

 

“그래. 그래. 그래서 무슨 일이니. 진짜로.”

 

「지금 안드바리랑 아쿠아랑 다 같이 로비로 내려왔는데 언니들도 다 어디론가 가버려서 심심해서.」 

 

“심심하다고 이 동네 최고위 간부에게 놀아달라고 전화하다니. 너희 배짱도 두둑하구만. 그래.”

 

「헤헤헤..」

 

 단말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실없는 웃음소리에 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녀석들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게 몸소 느껴지는구만 그래.

 

“알겠다. 거기 있어. 안드바리한테 과자랑 음료수나 잘 받아내 봐.”

 

「들었지? 가서 다른 애들도 불러오자. 안드바리~!」

 

삑-

 

“그럼. 이 물감투 인간님은 이 동네 실세 아가씨들에게 몸소 아부 떨러 가보겠습니다.”

 

“하하하! 그러게나!”

 

“좋은 밤 되십시오. 대장님.”

 

“희끅! 히끅!”

 

 부하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도서실 밖으로 걸음을 냉큼 옮겼다. 아, 완전히 나오기 전에 도서실 책장에서 아무 DVD 하나를 챙겨나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겉표지에 왜인지 전등 버튼 하나만 턱 하니 있는 모양새가 딱 봐도 호러 무비인 거 같은데.

 

‘라이트 아웃이라. 뭐. 적당히 무서운 거 보면서 꺅꺅거리는 것도 여름에만 즐길 수 있는 거니까.’

 

 요새 푹푹 찌는 더위 탓에 여기 토박이 애들도 꽤 고생하는 거 같던데. 어디 이 동네 나름의 여름나기도 생각해볼까.

 

‘애들한테 물어봐야겠네. 좋은 방도가 있겠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꺼내든 DVD 탓에 온 동네 사방팔방에 애들의 비명이 퍼져나가 이후 뒷수습을 하는데 꽤 고생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

 

“그래서. 요안나님은 라붕이 대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음? 그렇군. 그가 떠났으니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구만.”

 

 술자리를 개최한 남성이 자리를 떠나자 샌드걸은 그제야 그에 관한 화두를 던졌다. 자리에 없는 이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서도 아까부터 하고 싶어 입술이 바짝 말라버릴 지경이었으니 이미 그녀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라...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네. 그에 관한 정보를 주군께 건네받은 것도 그가 여기 도착한 당일날이었으니 말이세.”

 

“사령관님이 그렇게 꽁꽁 숨기고 싶었던 또 다른 인간님이라. 대체 어디서, 언제 발견한 걸까요.”

 

“그대를 비롯해 그가 여기 오기 전까지 본대의 인원들도 몰랐던 것 같네만. 정말이지. 하늘에서 툭 떨어진 인간님 같군.”

 

“그건 사령관님도 매한가지이긴 합니다만.”

 

징-

 

 두 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쉼 없이 담소를 나누던 사이, 방금 화제의 인물이 열고 나간 문이 다시 열리자 두 여성 모두 말을 끊고 들어선 이에게 눈길을 홱 돌렸다. 다행히 문을 연 이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실..실례하겠습니다. 저 혹시 여기에..”

 

“아, 이제 왔나? 그녀는 여기에 있다네.”

 

“도와드리겠습니다.”

 

 쭈뻣 쭈뻣대는 모양새로 들어선 또 다른 이 동네 장교 직급의 여성에게 샌드걸은 선뜻 도움의 손길을 건네었다. 그러나 그 호의를 거절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방금까지 푹 퍼질러 누워있던 분홍머리 소녀였다.

 

“돼써. 아직 정신은 말짱해애.”

 

“어..언니. 이렇게 될 때까지 마시면 어떡해요.”

 

“괘차나. 한숨 자고 일어나면 대.”

 

 혀가 베베 꼬인 모양새는 여전했지만 게슴츠레 뜬 두 눈 사이에선 평소의 푸른 빛 안광이 더 짙게 삐쳐 나왔다. 그 모습에 샌드걸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응차. 언니. 어때요? 설 수 있겠어요?”

 

“응. 이제 좀 술이 깨는 것 같아.”

 

“뭣 때문에 이렇게 마셨어요. 평소에는 술은 거뜰어도 안 보셨으면서.”

 

“다 우리 무능하신 상관 덕분이지. 뭐. 히히.”

 

 그렇게 자매의 부축을 받으며 두 번째로 자리를 떠나려던 소녀에게 아직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던 두 사람이 손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이프리트는 회답을 하는 대신 혼잣말을 중얼대듯 말 한마디를 남기었다.

 

“뭐. 그래도. 나쁜 쪽은 아니잖아. 오히려 좋은 쪽이지. 그러면 댔자너.”

 

“...음. 그렇군. 명답이오.”

 

“그렇군요. 그 말이 옳군요.”

 

“엣? 무슨 이야기인가요?”

 

“아니야. 그냥 시시껄렁한 이야기야.”

 

 그렇게 이 동네 최고참 중에 하나인 소녀가 터덜터덜 자리를 떠나자 남아있던 두 여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로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음. 역시 시시한 이야기였나.”

 

“축복받은 녀석들의 쓸데없는 걱정이었죠.”

 

“후후. 그것도 그렇구려. 이전의 자매들이 겪었던 삶을 떠올리면 우리는 축복받은 셈이오.”


"그러면 저희의 축복받은 미래에 건배나 하지요."


"좋군. 정말이지. 행복한 미래야."

 

 그렇게 저마다의 행복을 끌어안은 채 요안나 아일랜드의 밤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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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외전으로 1부에서 2부 사이 시간대입니다.

한번 쯤 쓰고 싶어서 모아둔 에피소드들을 정리해서 올려봤습니다. 이게 1년 만에 올리는 문학이네요.

예. 그리고...어...돌아왔다...고. 해야 하나..아이씨. 몰라.


우선 글 쓰는 법 까먹어서 문장 연결이라던가 대화 흐름이라던가 개판 오 분전임.

지금 써둔 것도 보면서 이걸 씨벌 올려야 대 말아야 대 고민하다 올렸음.

플룻도 다시 다 쓰고 싶은 거 꾹 참고 꾸역꾸역 3부 조질려고 쓰고 있음.


솔직히 만우절 이후에 현생+겜생 양 쪽 모두 폭탄 떨어진 기분이라 문학이고 뭐고 쓰지도 못했다.

근데 아직까지 찾는 양반들이 종종 있어서...부끄럽지만 돌아왔다.

앞으로 1주일에 1회 정도는 올리고 싶은데 지금 졸작+기말 기간에 취업처 방문도 해야해서 잘 몰것다.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다. 근데 '갑자기 아스널이 나타났다'보다 재밌어야 올릴 거다.


아무튼 이걸로 1년 전에 쓴 글에 댓글 좀 그만 달아주라. 내가 잘못했다. 이젠 알림 오면 혹시 하면서 긴장부터 든다. 이젠 무섭다. 용서해달라.